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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계열전(滑稽列傳)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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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66. 滑稽(골계)

淳于髡•優孟•優旃(순우곤우맹우전)

공자가 말했다.

「나라를 운용하기 위해 육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모두 같다. 예경(禮經)으로써 사람을 절도 있게 하고, 악경(樂經)으로써 화합하게 하고, 서경(書經)으로써 옛일을 본받게 하고, 시경(詩經)으로써 자기의 뜻한 바를 전달하고, 역경(易經)으로써 우주만물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며, 춘추(春秋)로써 의(義)의 시비를 가리게 한다.」

태사공이 말한다.

「천도는 넓고도 넓다.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상적인 하찮은 말 중에도 어려운 일을 풀어 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는 법이다.」

1. 순우곤(淳于髡)

순우곤(淳于髡)은 제나라의 데릴사위였다. 키는7척이 안되고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언변이 좋았다. 여러 차례 제후에게 사신으로 다니면서 한번도 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밤새도록 술 마시며 놀기를 좋아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던 제위왕(齊威王)①이 정치를 경대부에게 맡겨 놓았음으로 백관이 문란하고 어지럽게 되어 그 틈을 타서 제후국들이 쳐들어와 국가의 존망이 조석에 놓이게 되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감히 간언하지 못하자 순우곤이 수수께끼로 유세하여 말했다.

「나라 안에 커다란 새가 있는데 왕의 정원에 머물러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이 새가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그 새는 날지 않을 뿐이지 한 번 날기 시작하면 하늘을 뜷으리라! 그 새는 울지 않을 뿐이지 일단 한 번 울기시작하면 세상을 놀라게 하리라!」

그리고는 즉시 나라 안의 현령과 현장들70여 명에게 도성으로 들어와 조현을 올리도록 부른 제위왕은 그 중 한 명은 상을 주고 한 명을 주살하여 군사들을 분발시켜 출전시켰다. 제후들의 놀라서 몸을 떨며 그들이 침략하여 빼앗아 간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제위왕은36년 동안 제후들에게 위세를 떨쳤다. 이 일은 진경중완세가(陳敬仲完世家)에 실려있다.

제위왕8년 기원전371년, 초나라가 대군을 발하여 제나라로 쳐들어왔다. 제위왕이 순우곤을 사자로 삼아 조나라에 구원군을 청하면서 황금 백 근, 거마10승을 주었다. 순우곤이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다가 관끈이 끊어졌다. 왕이 보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가지고 가는 예물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서 입니까?」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그렇게 크게 웃습니까?」

「오늘 제가 동쪽에서 오는데 길옆에서 밭을 갈던 농사꾼이 제사를 지내는데 돼지 발 하나와 술 한 사발을 놓고 축수하며 ‘높은 밭에서는 광주리에 가득, 낮은 밭에서는 수레에 가득, 오곡이 잘 익어 우리집을 풍성하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손에 들고 바치는 예물은 그렇게 적음에도 바라는 바는 그처럼 많았음으로 웃었습니다.」

이에 제위왕은 즉시 황금 천일(千鎰)과 백옥10쌍, 수레100승을 더 내주었다. 순우곤이 작별인사를 올리고 길을 떠나 조나라에 도착했다. 조왕이 정예스러운 군사10만과 전차 천승을 구원군으로 주니 초나라가 이 소식을 듣고 밤에 군사를 이끌고 도망갔다. 제위왕이 크게 기뻐하여 후궁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순우곤을 불러 술을 내리며 물었다.

「선생은 얼마를 마시면 취하오?」

순우곤이 대답했다.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한 말을 마셔서 취하는데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소? 그 이유를 들어 볼 수 있소?」

「대왕께서 직접 면전에서 술을 하사하신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옆에 서있고 어사가 뒤에서 서있으니 이 곤은 두려운 마음에 땅에 엎드려 술을 마시니 한 말도 마시기 전에 곧바로 취하게 됩니다.

만약 부친께 귀한 손님이 오셔서 이 곤이 옷깃을 바르게 하고 무릎을 꿇고 면전에서 접대하면서 때로는 술잔을 받들어 남은 술을 받아 마시며 손님의 장수를 빌면서 몸을 자주 일으키게 되면 두 말도 마시기 전에 곧바로 취하게 됩니다.

만약 친한 친구와 오래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갑자기 상봉하게 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지난날의 일들을 말하고 감회를 토로하면서 마시게 되면5-6말이라도 취하지 않습니다.

만약 동네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돌리며 머물면서 육박(六博)이나 투호(投壺)를 하며 서로 당겨 편을 짜고, 손을 잡아도 죄가 되지 않고 빤히 들여다보아도 괜찮습니다.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로는 비녀가 흩어져 있으면 저는 삼가 이런 일들을 즐기니 여덟 말을 마셔도 십의 이삼만 취합니다.

해는 저물고 술은 취하는데 술통을 모으고 남녀가 붙어 앉아 합석하여 신발은 뒤섞어 흩트려져 있으며, 술잔과 안주를 담은 쟁반이 어지럽게 흐트러지고 당 위에 촛불이 꺼집니다. 주인은 저를 머물게 하며 다른 객들을 전송합니다. 비단저고리 옷깃이 풀어지고 살며시 향기를 맡게 되면 저는 속으로 제일 즐거운 마음으로 한 섬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술을 끝까지 마시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끝까지 가면 슬퍼진다.’라고 했습니다. 만사가 모두 이러하니 ‘말은 끝 간 데까지 다하면 안 되는 법이며 극도로 하면 쇠퇴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순우곤이 풍간하자 제위왕이 옳다고 여겨 밤새워 술 마시는 일을 중지하고 제후를 접대하는 일을 순우곤에게 맡겼다. 그리고 궁궐에서 주연을 베풀 때는 항상 순우곤을 옆에 있게 하였다.

2. 우맹(優孟)

그리고 백여 년 후에 초나라에 우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② 우맹(優孟)은 원래 초나라의 악인(樂人)으로8척의 키에 언변이 좋았다. 항상 미소를 머금으며 왕에게 풍간했다. 초장왕(楚莊王)③ 때의 일이다. 장왕이 사랑하는 말에게 무늬가 있는 비단 옷을 입히고 화려하게 장식한 집에 키우면서 장막이 없는 침대에서 쉬게 하고 대추와 말린 육포를 먹였다. 이윽고 말이 지나치게 쌀이 쪄 병으로 죽자 장왕은 군신들에게 복상(服喪)을 하라 명하고 속널과 겉널을 만들어 대부에 해당하는 예로써 장례를 치르려고 했다. 왕의 측근에서 모시던 신하들이 서로 다투어 불가하다고 간하자 왕이 칙령을 내려 말했다.

「감히 말로 인해 간한 자가 있다면 죄를 물어 죽이겠다.」

우맹이 듣고 궁궐의 문으로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통곡했다. 왕이 놀라 그 연유를 묻자 우맹이 대답했다.

「왕께서 말을 평소에 사랑했고 초나라는 또한 당당한 대국이온데 어찌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의 예로 치르는 장례는 너무 박합니다. 청컨대 군주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십시오.」

「어떻게 치르라는 말인가?」

「원컨대 옥에다 조각해서 속널을 만들고 화려한 무늬를 새긴 가래나무로 겉널을 짜십시오. 단풍나무 느릅나무, 녹나무로 횡대를 만드십시오. 또한 군사를 동원하여 묘혈을 파게 하고 노약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봉분을 쌓게 하십시오. 제(齊)와 조(趙)나라의 사신들을 열을 지어 앞에 세우고 한(韓)과 위(魏)의 사신들을 그 뒤에 세워 호위하게 하십시오.④ 사당을 지어 태뢰(太牢)⑤로써 제사를 지내고 만호(萬戶)의 읍에 봉하십시오. 제후들이 들으면 모두 대왕께서는 사람을 천하게 여기고 말을 귀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과인의 잘못이 이렇듯 크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청컨대 대왕을 위해 육축(六畜)6)⑥ 예로 장사지내십시오. 부뚜막을 바깥널로 삼고, 구리로 만든 솥을 속널로 삼아, 생강과 대추로 맛을 내고, 목란을 향료로 써서 비린내를 없앤 후에 쌀을 넣어 제사밥을 만들고 불을 떼서 의복으로 입혀 사람들의 내장 속에 장사지내십시오.」

그래서 왕은 그 즉시 말의 시체를 태관(太官)에 주고 천하 사람들이 그 일을 오래 동안 알지 못하게 했다. 우맹이 현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초나라의 재상 손숙오(孫叔敖)는 평소에 그를 잘 대해주었다. 노년에 병이 들어 죽게 된 손숙오가 그의 아들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으면 너는 틀림없이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맹이 찾아와 만나면 단지 손숙오의 아들이라고만 말하라.」

그리고 몇 년 후에 그의 아들은 곤공한 처지가 되어 땔나무를 짊어지고 가다가 우맹을 만나게 되었다. 아들이 우맹을 보고 말했다.

「나는 손숙오의 아들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내가 가난하게 되면 우맹을 찾아가라로 당부하셨습니다.」

「당신은 멀리가지 말고 기다리시오.」

그리고는 즉시 의관을 손숙오처럼 꾸미고 행동거지와 말투를 흉내 내는 연습을 했다. 이렇게 하기를 일 년 남짓하게 되자 우맹의 모습과 언행은 손숙오와 비슷해서 장왕과 측근들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장왕이 주연을 베풀자 우맹이 앞으로 나가 축수했다. 우맹이 모습을 본 장왕이 크게 놀라 손숙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여겨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다. 우맹이 말했다.

「청컨대 집에 가서 부인에게 의견을 물어봐야 겠습니다. 3일만 말미를 주시면 돌아와 재상의 자리에 앉겠습니다.」

장왕이 허락하자 약속대로3일 후에 돌아온 우맹을 보고 장왕이 물었다.

「부인이 뭐라고 말했는가?」

「부인이 삼가 재상 자시를 맡지 말라고 하면서 ‘초나라의 재상은 할 짓이 못됩니다. 손숙와같은 사람이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청렴결백하게 초나라를 다스려 초왕을 패자로 만들었으나 지금 죽고 없으니 그의 아들은 송곳하나 찌를 수 있는 한 뼘의 땅뙈기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땔나무나 지고 다니며 팔아 끼니를 때우고 있습니다. 기어코 손숙오처럼 된다면 내가 자살하고 말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山居耕田苦(산거경전고)

산골에 살며 고생해서 밭을 갈아도


難以得食(난이득식)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어


起而爲吏(기이위리)

몸을 일으켜 벼슬아치가 되었으나


身貪鄙者餘財(신탐비자여재)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는 재물을 남기고


不顧恥辱(불고치욕)

부끄러운 줄 모른다.


身死家室富(신사가실부)

몸은 죽어 집은 부유해지나


又恐受賕枉法(우공수구왕법)

그래도 두려운건 뇌물을 받고 법을 굽혀


爲奸觸大罪(위간촉대죄)

부정을 저질러 큰 죄를 범해


身死而家滅(신사이가멸)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일이다.


貪吏安可爲也(탐리안가위)

탐관오리들이 무슨 일을 할 있겠는가!


念爲廉吏(염위염리)

청백리가 되어


奉法守職(봉법수직)

법을 받들고 맡은 바 직책에 충실하며


竟死不敢爲非(경사불감위비)

죽을 때가지 감히 부정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廉吏安可爲也(염리안가위야)

청백리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楚相孫叔敖持廉至死(초상손숙오지렴지사)

초나라 재상 손숙오는 죽을 때까지 청렴했으나


方今妻子窮困負薪而食(방금처자궁곤부신이식)

이제는 처자가 굶주려 땔나무를 팔아 끼니를 때운다.


不足爲也(부족위야)

청렴한 벼슬아치 살아서 무엇하나!


그래서 초장왕이 우맹에게 사과하고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침구(寢丘)⑦의 민호4백 호에 봉해 그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그 후 손숙오의 후사는10세가 지나도 끊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실로 우맹이 말해야 할 시기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3. 우전(優旃)

그 후2백여 년 후에 진(秦)나라에 우전(優旃)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전은 진나라의 난쟁이 가수였다. 남을 잘 웃겼지만 대도와 합치되는 바가 있었다. 진시황 때 주연을 벌렸는데 그때 마침 비가 쏟아져 대궐의 섬돌에서 방패를 들고 지키던 호위병들의 옷이 모두 적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우전이 보고 가엽게 여겨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쉬고 싶으냐?」

호위병들이 모두 한입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참으로 고마울뿐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부르면 너희들은 그 즉시 호응하여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전상에서 진시황의 축수를 빌면서 만세를 외치자 그 틈에 우전도 난간에 기대에 큰 소리로 외쳤다. 「섬돌 밑의 방패를 들고 있는 호위병들아!」

「네」

「너희들은 키만 장승처럼 커가지고 아무짝에 쓸모없이 비를 맞고 서있구나! 나는 비록 단신이지만 이렇게 쉴 수 있도다!」

진시황이 듣고 호위병들을 반반씩 교대해서 쉬게 했다. 진시황이 한 번은 황실 전용의 정원과 동물원을 크게 확장하여 동쪽으로는 함곡관, 서쪽으로는 옹성(雍城)과 진창(陳倉) 사이의 땅을 모두 포함시키려고 했다.⑧ 우전이 듣고 말했다.

「훌륭한 일입니다. 수 많은 날짐승과 들짐승들을 그 안에 놓아길러서 혹시 동쪽의 외적이 공격해오면 미록(麋鹿)에게 명을 내려 막게 하면 그뿐이겠습니다.」

진시황이 우전의 말을 듣고 그 계획을 그만두었다. 이세황제가 서자 성벽에 옻칠을 하려고 했다. 우전이 말했다.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황제께서 비록 말씀은 하시지 않았더라도 제가 주청을 드리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성벽에 옷칠을 하게 되면 백성들은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세금을 걱정하겠지만 그러나 보기는 참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옻칠한 성벽은 미끈거려 적군이 쳐들어오더라도 기어오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벽에 옻칠을 하는 일은 쉬운 일이나 옻칠을 생산하기 위해 건조실을 만드는 일을 더욱 곤란한 일입니다.」

이세황제가 웃고 그 계획을 중지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세황제는 조고(趙高)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우전은 한나라에 항복했으나 몇 년 후에 죽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순우곤은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어 제위왕이 뜻대로 행동할 수 있었고 우맹은 머리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땔감을 팔아 연명하고 있는 손숙오의 아들이 봉토를 받게 할 수 있었다. 우전은 난간에 기대어 큰 소리를 외쳤음으로 호위병들을 교대로 쉬게 할 수 있었다. 어찌 이들이 훌륭하다고 할 수 없겠는가?』



[이하는 저소손(褚少孫)이 보충한 부분이다.]

저선생(褚先生)⑨이 말한다.

나는 다행히 경학(經學)으로 랑(郞)이 되어 정사 이외의 사전(史傳)이나 기록을 즐겨 읽고 당돌한 줄 알면서도 또다시 활계들에 대한 글 여섯 장을 지어 이 편의 끝에 첨부한다. 내가 읽어보다가 의기가 끓어오르니 후세의 호사가들에게 읽힐만하다고 생각해서다. 이글을 읽게 되면 마음이 유쾌해지고 귀가 놀라게 된다. 그래서 위의 태사공이 지은 세 장의 뒤에 붙인다.

4.곽사인(郭舍人)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가수에 곽사인(郭舍人)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가 했던 말은 대도에 합치되지는 않는다 해도 황제의 마음을 평안하고 즐겁게 했다. 무제가 어렸을 때 동무후(東武侯)⑩의 모(母)가 항상 젖을 먹여 길렀다. 장성한 무제는 그녀를 ‘대유모(大乳母)라고 불렀다. 유모는 대체로 한 달에 두 번 입조했는데 그때마다 황제는 조명을 내려 총신 마유경(馬遊卿)을 시켜 비단50필을 유모에게 하사하고 더불어 음식을 준비하여 유모를 공양했다. 유모가 글을 올려 상주했다.

「어떤 곳에 공전(公田)이 있는데 원컨대 제가 빌리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유모는 그 공전을 얻기를 바라는가?」

황제는 유모에게 공전을 하사했다. 황제는 유모가 하는 말은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황제는 조명을 내려 유모가 탄 수레는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치도(馳道)로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로써 공경대신들은 유모를 존경하고 높였다. 유모의 권세를 믿고 그녀의 자손과 노복 및 종자들은 장안에서 행패를 심하게 부렸다. 길에서 남의 마차를 세우고 넘어뜨리는가 하면 남의 옷을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 이런 소문이 궁중에까지 들렸지만 황제는 차마 그들을 법으로 처단하지 못했다. 해당관청에서 유모의 집안을 변경으로 옮겨 살게 해야 한다고 주청했음으로 황제는 허락했다. 유모가 궁중으로 들어가 작별인사를 올리기 전에 먼저 곽사인의 집에 들려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처지를 호소했다. 곽사인이 말했다.

「입궐하여 작별인사를 올린 뒤에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시오.」

유모가 황제를 배알하고 그의 말대도 작별인사를 올리고 빠른 걸음으로 물러가면서 여러 차례 뒤를 돌아봤다. 황제의 곁에 있던 곽사인이 빠른 말투로 유모에게 꾸짖어 말했다.

「빨리 물러가지 못할까!늙은 할망구야!어찌하여 빨리 물러가지 않은가!폐하는 이미 장성하셨는데 어찌 여전히 너는 젖을 먹이려고 하느냐? 어찌하여 빨리 물러가지 않고 뒤를 자꾸 돌아보느냐?」

황제가 듣고 유모를 불쌍히 여겨 즉시 조명을 내려 유모의 이주를 중지시키고 그녀를 비방한 자를 귀양보냈다.

5. 동방삭(東方朔)

무제 때 제나라 사람 성은 동방(東方)에 이름은 삭(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책을 즐겨 읽고 경학을 사랑했으며 경사(經史) 외에 전기(傳記)와 잡설(雜說) 등을 두루 읽어 박학다식했다. 동방석이 처음 장안에 들어왔을 때 공거사마(公車司馬)⑪에 출두해서 모두3천 자로 된 죽간에 쓴 상주문을 올렸다. 공거(公車)에 근무하는 사람 두 명이 그 상주문을 겨우 들어서 황제에게 올릴 수 있었다. 황제가 그 상주문을 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중간에 쉴 때는 을(乙)자를 표시해가며 읽어 두 달만에 다 읽었다. 조명으로 동방삭을 불러 랑으로 삼고 항상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했다. 동방삭은 자주 불려가 황제의 말상대가 되었는데 황제는 한 번도 즐거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때로는 조명으로 동방삭을 불러 어전에서 식사를 하게 했으며 식사가 끝나면 먹다 남은 고기를 남김없이 품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 그래서 동방삭의 옷은 항상 더러웠음으로 황제가 자주 겸백(縑帛)으로 지은 옷을 하사했으나 그때마다 어께에 메고 가지고 갔다. 그는 하사받은 돈과 비단을 물쓰듯 써서 장안의 젊은 미녀들을 샀다. 대체로 취한 여인들은1년이 되면 버리고 다시 취하곤 했다. 그는 하사받은 돈이나 재물을 모두 여인을 찾는데 탕진했다. 황제의 측근에 있는 여러 랑관(郞官)들이 그를 반미치광이로 취급했다. 황제가 듣고 말했다.

「동방삭에게 그와 같은 황당한 행동을 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몰두한다면 그대들 같은 사람이 어찌 그의 위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동방삭은 그의 아들을 추천해서 랑관이 되게 하고 다시 시알자(侍謁者)로 승진시켰다. 그는 항상 지절을 지진 사자의 임무를 행했다. 궁중에 머물고 있는 동박삭을 보고 랑관이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동방삭이 대답했다.

「나와 같은 사람을 소위 말해서 세상을 피해 조정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소. 옛날 사람들은 세상을 피해 산중에서 살았지만 말이오.」

때때로 술좌석에서 술이 거나하게 되면 두 손으 땅에 짚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陸沈於俗(육침어속)

세속에 묻혀 살며


避世金馬門(피세금마문)

금마문 안에서 세상을 피한다.


宮殿中可以避世全身(궁전중가이피세전신)

궁궐 안에서도 세상을 피해 몸을 보존할 수 있거늘


何必深山之中(하필심산지중)

하필이면 깊은 산중의


蒿廬之下(호려지하)

쑥대 움막이어야 하는가?


금마문(金馬門)이란 환관들이 드나드는 문 옆에 동으로 만든 말상이 있어 사람들이 그 문을 금마문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한 번은 여러 박사들와 제생들이 궁 안에서 모여 의론하면서 모두 함께 동방삭을 비난하면서 말했다.

「소진(蘇秦)、장의(張儀)는 만승의 나라 군주를 한번 만나기만 하면 모두 경상(卿相)의 지위를 얻고 그 은혜는 후대에까지 미치게 했소. 지금 그대는 선왕의 가르침을 배우고 성인의 의를 본받아 《시․서(詩書)》와 백가의 학설을 암송하여 풍자하는 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소. 또한 그것들을 죽백에 글로 남겨 스스로 해내에서는 자신과 겨룰 수 있는 자는 없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그대가 박문강기(博聞强記)하고 지혜와 언변이 뛰어난 인사라고 말할 수 있소. 그런 사람이 온힘을 다해 충성을 바쳐 성군(聖君)을 모시면서 헛되이 장구한 수십 년을 보냈음에도 벼슬은 시랑(侍郞)에 직위는 집극(執戟)에 불과하오.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대는 무슨 결함이라도 있기 때문인 듯 하오? 그 까닭이 무엇이오?」

동방삭이 대답했다.

「이는 그대들이 능히 알 수 없는 일이오. 소진과 장의사 살던 때를 하나의 시대로 본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때도 또한 다른 하나의 시대이니 어찌 두 시대가 같다고 할 수 있겠소? 무릇 장의와 소진의 시대는 주나라 왕실이 크게 무너져 제후들은 조현을 올리지 않고 힘으로써 정쟁을 일삼아 권력을 다투었으며 군사를 동원하여 서로 간에 살육을 일삼아 결국 천하는 모두12나라로 병합되었으나 결국 자웅을 가리지도 못했소. 현사를 얻는 제후들은 강해지고 현사를 잃는 제후들은 망했으니 유세가 받아들여져 그 계획대로 군주들이 실행하면 현사들은 존귀한 지위에 앉게 되어 그들의 은덕은 후세에까지 미치고 자손들은 오래 번영하게 되었소.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오. 성상께서 제위에 계시어 은덕은 천하에 고루 미치고 제후들은 복종하고 있으며 위엄은 주변의 오랑캐까지 진동시키고 있소. 사해의 밖에까지 깔아 놓은 한 개의 돗자리처럼 연이어 있고 천하는 엎어 놓은 그릇보다 안정되게 한 집안으로 뭉쳐져 있소. 백성들을 일으켜 거사를 하려고 해도 손바닥 안에서 노는 일과 같소. 이런 태평성대에 현능하거나 불초하거나 무슨 차이가 있겠소? 지금 천하는 바야흐로 방대하게 커졌고 황제에게 달려와 있는 힘을 다해 유세를 행해 신임을 얻으려고 하는 선비들과 백성들의 수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소. 있는 힘을 다하고 의를 숭상하나 의식이 부족하여 고통을 받고 어떤 자는 관리가 되는 길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소. 비록 장의와 소진이 나와 함께 지금 세상에 같이 산다해도 아마도 장고(掌故)와 같은 미관말직 자리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오. 어찌 감히 상시(常侍)나 시랑(侍郞)과 같은 자리를 바랄 수 있겠소? 전해오는 말에 이르기를 ‘ 천하에 재해가 없다면 비록 성인이 있다한들 그 재주를 필 기회가 없고 상하가 화목하면 비록 현능한 자가 있다한들 공을 세울 수 없다.’고 했소. 그래서 말하기를 시대가 다르면 해야 하는 일도 다르다고 했소. 비록 일이 그렇다한들 어찌 몸을 수양하기를 게을리 할 수 있겠소? 그래서 시경(詩經)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소.

鼓鍾于宮(고종우궁)

종을 궁에서 울리니


聲聞於外(성문어외)

종소리가 밖에까지 들린다.⑫


鶴鳴九皋(학명구고)

학이 구고(九臯)⑬에서 우니


聲聞於天(성문어천)

소리가 하늘까지 들린다.⑭


진실로 능히 몸을 수양할 수만 있다면 어찌 영달하지 못할까 걱정하겠소? 태공(太公)은 몸소 인의를 실천하다가72세에 주문왕을 만나 그의 유세가 받아들여져 제나라에 봉해져 그의 자손은7백 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소. 이것이 바로 선비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학문을 닦고 도를 실천하여 중지하지 않는 이유요. 지금 세상의 처사들은 당세에는 비록 등용되지 못한다고 해도 힘차게 홀로 서며, 괴연히 홀로 살면서 윗대로는 허유(許由)를 보고 밑으로는 접여(接餘)를 살피며 계책은 범려(范蠡)에 못지않으며 충성심은 오자서(伍子胥)와 같으나 평화로운 세상에 살면서 몸을 수양하여 스스로 지키니 친구는 적고 반려는 없게 됨은 원래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라고 할 수 있소.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의심하시오.」

그러자 여러 제생(諸生)들은 묵묵이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건장궁(建章宮) 후각(後閤)의 이중 난간 가운데에서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다. 그 모양이 고라니와 비슷했다. 소문을 듣고 친히 왕림하여 살펴본 무제가 평소에 경학에 통달했다고 생각되는 좌우의 군신들을 향해 물었으나 아무도 그 짐승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조명을 내려 동방삭을 불러오게 했다. 동방삭이 말했다.

「신은 이 짐승을 알고 이습니다. 원컨대 신에게 맛있는 술과 기름진 쌀로 지은 밥을 마음껏 먹게 해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제가 허락하자 술과 밥을 다 먹은 동방삭이 다시 청했다.

「모처에 공전(公田)과 고기를 기르는 연못과 그 주위에 부들과 갈대가 자라고 있는 땅이 몇 경(頃)⑮이 있습니다. 신에게 하사하시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황제가 또한 허락하자 동방삭이 말했다.

「이 짐승은 소위 추아(騶牙)라고 합니다. 중국의 의를 앙모한 먼 나라가 찾아와 귀속할 때가 되면 이 짐승이 먼저 나타납니다. 이 짐승의 이빨은 앞뒤로 하나이며 가지런하며 어금니가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추아(騶牙)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일 년여 후에 과연 흉노의 혼야왕(混邪王)이 그의 종족10여 만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해왔다. 황제가 다시 동방삭에게 막대한 돈과 재물을 하사했다. 이윽고 동방삭이 노환으로 죽음에 임했을 때 황제게 간언을 올렸다. 

「시경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營營青蠅(영영청승)

앵앵 날아가는 쇠파리


止於蕃(지어번)

울타리에 앉아 쉰다.


悌君子(개제군자)

자애롭고 선량한 군자여


無信讒言(무신참언)

참언을 믿지 마라


讒言罔極(첨언망극)

참은 끝이 없나니


交亂四國(교란사국))

사방의 나라를 어지럽힌다.⑯


원컨대 폐하께서는 교묘한 말로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 하시고 참소하는 무리들을 물리치십시오.」

황제가 듣고 말했다.

「근래에 들어 동방삭이 좋은 말을 많이 하는구나!」

황제는 동방삭을 행동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얼마 후에 동방삭은 병으로 죽었다. 다음과 같이 전해오는 말이 있다.

鳥之將死 其鳴也哀(조지장사 기명야애)

새가 죽을 때는 그 소리가 애달프고

人之將死 其言也善(인지장사 기언야선)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하다.

이는 동방삭을 두고 하는 말이다.


6. 동곽선생(東郭先生)

무제 때 대장군 위청(衛青)은 황비 위자부(衛子夫)의 오빠로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하여 여오수(余吾水)⑰까지이르는 동안 적군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아 개선하여 그 상으로 황금 천근을 하사받았다. 대장군이 궁문을 나서는데 그때 방사(方士)로 초빙되어 공거(公車)에서 조서를 기다리고 있던 제나라 사람 동곽선생(東郭先生)이 대장군의 수레 앞을 막아서며 배알하고 말했다.

「원컨대 드를 말씀이 있습니다.」

대장군이 수레를 멈추게 하고 동곽선생을 수레 앞으로 다가오게 했다. 동곽선생이 수레 옆에서 말했다.

「왕부인께서 황제에게 새로이 총애를 받고 있으나 부인의 친정집은 가난합니다. 지금 장군께서 하사 받으신 천근의 황금을 절반으로 나누어 그 반을 왕부인의 부모에게 바쳐 성의를 보이십시오. 황제께서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 바 기묘하고 편리한 계책입니다.」

위장군이 감사하며 말했다.

「선생께서 다행히 편리한 계책을 알려주셨습니다. 원컨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그래서 위장군은 황금5백 근을 왕부인이 부모에게 바쳐 장수를 빌었다. 왕부인을 통해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무제가 말했다.

「대장군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무제가 대장군을 불러 그 계책을 어디서 얻었냐고 물었다. 대장군이 대답했다.

「공거에서 조명을 기다리고 있는 동곽선생에게서 얻었습니다.」

황제가 동곽선생을 불러 군의 도위(都尉) 벼슬을 주었다. 동곽선생은 공거에서 오래 동안 조명을 기다리는 바람에 노자가 떨어져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의복은 헤지고 신발도 온전하지 않았다. 눈 속을 걷게 되면 신발의 윗부분은 있어도 밑창은 없었기 때문에 발바닥이 땅에 그대로 닿았다.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이 그 모습을 비웃자 동곽선생이 대답했다.

「누가 능히 신을 신고서 눈길을 가는데 겉은 틀림없는 신발이지만 그 신의 밑창을 사람의 발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재주를 부릴 수 있겠는가?」

이윽고 동곽선생은 봉록이2천석인 관리가 되어 푸른색갈의 인수를 차고 궁궐문을 나가서 여사의 주인에게 인사했다. 평소에 동료로써 조명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도성의 문 앞에 모여서 조도신(祖道神)⑱에게제사 지내 그의 출발을 영화롭게 해주고 그 이름을 당세에 드러나게 했다. 이것이 소위 갈포(葛布)를 입고 보화를 품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다. 그가 빈곤할 때 사람들은 그를 눈여겨보지도 않더니 그가 귀하게 되자 앞을 다투어 붙었다. 그래서 ‘말을 감정할 때는 여위였기 때문에 잘못 볼 수 있고 선비의 관상을 볼 때는 가난했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⑲.’라는 속담은 바로 이 일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왕부인의 병이 매우 심했다. 이에 황제가 문안가서 물었다.

「그대의 아들을 왕으로 삼아야겠는데 어느 곳에 봉하고 싶은가?」

「원컨대 낙양(洛陽)에 봉해주십시오」

「불가한 일이다. 낙양은 무기고가 있고 군량미를 저장하는 오창(敖倉)과 관(關)의 입구가 있어 천하의 목젖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래서 선제 때부터 이곳에는 왕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관동에는 제나라보다 큰 나라는 없다. 제왕으로 봉할 수는 있겠다.」

왕부인이 손으로 머리를 치며 외쳤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왕부인이 죽자 제왕의 태후가 죽었다고 했다.

7. 순우곤2

옛날 제왕이 순우곤을 사자로 보내 초왕에게 고니를 바치게 했다. 그가 도성의 문을 나서자 도중에 고니가 하늘로 날라가 버렸다. 할 수 없이 빈 초롱을 들고 가면서 그럴듯한 말을 꾸며 준비했다. 이윽고 초왕을 접견한 순우곤이 말했다.

「제왕의 명으로 고니를 바치기 위해 사신의 임무를 띠고 오던 도중 강을 건너다 목말라하는 고니를 차마 보지 못하고 새장에서 꺼내어 물을 마시게 하던 중 고니가 그만 날라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할복하거나 목을 졸라 죽으려고 했으나 사람들이 우리 왕이 새나 짐승과 같은 미물로 인해 선비들의 몸을 상하게 했다는 비난을 받지나 않을까를 걱정해서 차마 죽지 못했습니다. 고니는 원래 털이 많은 새라 서로 비슷비슷해서 다른 것을 사서 대신하려고도 했으나 이것 또한 신의를 버리고 우리 왕을 속이는 행위가 되어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로 도망치려는 생각도 해봤으나 두 나라의 임금 사이가 서로 두절되면 역시 마음이 아파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제가 저지른 잘못을 고하며 머리을 조아려 대왕께 벌을 받고자 청하옵니다.」

초왕이 듣고 말했다.

「훌륭하도다. 제왕이 신하 중에 이렇게 신의가 있는 선비가 있었구나!」

초왕이 순우곤에게 많은 상금을 하사했다. 상의 크기는 고니를 잃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두 배나 되었다.

8. 왕생(王生)

무제 때 북해태수를 불러 행재소에 출두하게 했다. 그때 문학의 졸사(卒史)로 왕선생이라고 있었는데 태수를 수행하기를 자청하며 말했다.

「제가 같이 가서 태수께 도움을 주겠으니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태수부의 연(掾)이나 공조(功曹) 등 아전들이 모두 말했다.

「왕선생은 평소에 술을 줗아하고 말이 많고 실속이 없습니다. 그와 함께 가시면 안 됩니다.

「선행이 가시고자 하는데 내가 청을 안 들어줄 수 없다.」

그래서 태수는 왕선생과 함께 행재소로 출발했다. 이윽고 태수 일행이 행궁에 당도하여 궁문 앞에서 머물며 황제의 명을 대기했다.

왕선생은 하릴 없이 가지고 간 돈으로 술을 사서 위병들이나 복야들과 함께 술을 마셔 매일 취해있으면서 태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윽고 태수가 불려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배알할 때가 되었다. 왕선생이 수문장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나를 위해 우리의 태수님을 궁문 안으로 불러내어 멀리라도 좋으니 저와 몇 마디를 나누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문장이 부름에 응하여 나타난 태수를 보고 왕선생이 보고 말했다.

「천자가 태수님께 어떤 방법으로 북해를 다스려 도적이 없어지게 했는지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려고 하십니까?」

「현능한 인재들을 뽑아 각기 능력을 발휘하여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게 만들어 공적을 쌓은 자는 상을 주고 불초한 자는 벌을 주는 방법으로 다스렸다고 말할 작정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스스로 이름을 높이고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일이 되어 불가합니다. 태수님께서는 ‘그것은 신의 힘이 아니고 폐하의 신령과 위무(威武)가 도적들을 감화시켰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십시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윽고 태수가 부름을 받고 어전 밑에 이르자 황제가 물었다.

「어떻게 북해군을 다스렸기에 도적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는가?」

태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신의 힘이 아니옵고 모두 폐하의 신령과 위무가 도적들을 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대가 장자의 말을 듣고 하는 말인가!누구에게서 들었는가?」

「태수부의 문학졸사에게서 들었습니다.

「지금 어디 있는가?」

「행궁이 문 앞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명을 내려 왕선생을 수형(水衡)⑳의승(丞)에 임명하고 북해군 태수를 수형도위(水衡都尉)로 삼았다.

전하는 말에 ‘ 아름다운 말은 남에게 팔아도 좋고 고귀한 품행은 남에게 베풀어도 좋다. 군자끼리는 서로 좋은 말을 주고받으며 소인끼리는 서로 재물을 주고 받는다.’라고 했다.

9. 서문표(西門豹)

위문후(魏文侯) 때 서문표(西門豹)는 업성(鄴城)의 태수가 되었다. 서문표가 업에 당도하여 장로들을 만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 물었다. 장로들이 대답했다.

「하백(河伯)이 부인을 찾아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가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서문표가 그 까닭을 묻자 장로들이 다시 대답했다.

「업성의 삼로(三老)㉑와현청의 아전들은 항상 해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해서 걷어 들이는 돈이 수백 만 전에 달하는데 그 중2-3십만 전은 하백에게 부인을 보내는 비용으로 쓰고 그 나머지 돈은 무당들과 나누어가진 후에 돌아갑니다. 하백에게 부인을 얻어주는 시기가 되면 가난한 농가를 돌아다니다가 제법 예쁜 처녀를 발견하면 마땅히 하백의 부인이 될만하다고 말하고 즉시 돈을 주어 그 처녀를 삽니다. 처녀의 머리를 감기고 목욕시킨 후에 새로 짠 화려한 무늬의 비단옷을 입혀 조용한 곳에 머물며 제계(齋戒)시킵니다. 이어서 재궁(齋宮)을 강가에 짓고 붉고 진한 장막을 치고 그 안에 머물게 합니다. 소를 잡고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10여 일 동안 잔치를 벌입니다. 그날이 되면 화장을 시켜 처녀가 시집갈 때처럼 이부자리나 방석과 같은 기물을 만들어 그 위에 태워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처녀는 강물에 수십 리를 떠내려가다가 결국은 강물에 가라앉습니다. 때문에 예쁜 딸을 둔 집은 대무가 와서 하백을 위하여 데려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딸을 데리고 멀리 도망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중에는 더욱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고 또 가난합니다. 이 일은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도 ‘하백에게 부인을 부내주지 않으면 홍수가 와서 모두 물에 잠기고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된다.’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서문표가 듣고 말했다.

「하백에게 부인을 보낼 때 원컨대 삼로, 무당, 부로 등이 처녀를 강물에 띄어 보낼 때 나에게 고하시오. 내가 가서 할 말이 있습니다. 나도 가서 처녀를 환송하겠소.」

장로들이 모두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윽고 때가 되자 서문표가 장수(漳水) 가의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장소로 나갔다. 삼로, 관속, 부호와 장로, 향리의 부로 등이 모두 모이고 또한 의식을 참관하기 위해2-3천 명에 달하는 백성들도 몰려왔다. 의식을 주관하는 대무는 나이가 이미70이 넘은 늙은 여자였는데 데리고 나온 여제자10여 명은 모두 비단으로 만든 홑옷을 걸치고 대무의 뒤에 서있었다. 서문표가 보고 말했다.

「하백의 신부를 불러오라! 그녀를 보낼 수 있는지 미추(美醜)를 봐야 되겠다.」

아전들이 즉시 처녀를 장막 안에서 나오게 하여 앞에 대령시켰다. 서문표가 살펴보고 삼로, 대무, 부로 등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처녀는 그다지 예쁘다고 할 수 없다. 번거롭겠지만 대무 할머니는 강물 속으로 들어가서 하백에게 아름다운 처녀를 다시 구해 후일 보내준다고 전하고 오시오.」

그리고는 즉시 관리와 병졸들을 시켜 대무를 들고 안아서 강물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얼마간이 시간이 지나자 말했다.

「대무할머니가 어찌 이리 늦는단 말인가? 제자들이 가서 빨리 오라고 독촉하라!」

다시 제자 중에 한 사람을 들어 강물 속으로 던지게 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말했다.

「제자들마저 어찌 이리 오래 걸린단 말인가? 다시 한 사람을 보내 재촉하라고 하라!」

다시 제자 한 명을 강물 속으로 던졌다. 모두3명의 제자들을 강물 속으로 던져버린 서문표가 주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늙은 할미에 그 제자들은 모두 여자라 일처리가 능숙하지 못해서인 듯하다. 번거롭겠지만 삼로가 하백에 가서 우리의 사정을 알리시오.」

또다시 사람을 시켜 삼로를 강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서문표는 붓을 비녀처럼 머리에 꽂고 몸을 경(磬)처럼 굽혀 경건한 태도로 강물을 바라보며 오래 동안 서서 지켜봤다. 곁에서 참관하던 장로와 관속들이 모두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서문표가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무는 늙은 할머니라 그렇다고 하겠지만 어째서 삼로도 돌아오지 않는단 말인가? 이를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다시 정연(廷掾)을 시켜 호족과 장로 각 한 명을 강물에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모두들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찧는데 얼굴에서 나는 피가 땅 위로 흘렀고 사람들의 얼굴색은 잿빛으로 변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서문표가 말했다.

「알았다. 내 잠시 기다려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서문표가 입을 열어 말했다.

「정연은 일어나라. 하백이 우리가 보낸 사람들을 손님으로 맞이해 오래 잡아두고 있으니 이제 우리도 그만 마치고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업성의 관리와 백성들은 크게 놀라 모두 두려워하여 이후로는 누구도 감히 하백이 부인을 취한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서문표는 즉시 백성들을 동원해서12개의 구거(溝渠)를 파고 장수의 물을 끌어들여 백성들의 밭에 물을 대니 밭은 모두 논으로 변했다. 그 당시에는 구거를 파야했던 백성들은 매우 번거롭고 고통스러워해서 공사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서문표가 말했다.

「백성들은 이미 이루어진 일은 즐길 수 있으나 함께 일을 시작해서 도모할 수는 없다. 지금 부로들과 그 자제들이 힘든 공사로 걱정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러나 백세에 이르는 먼 훗날 그들의 자손들은 나를 칭송하리라!」

금상폐하가 다스리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구거를 파서 얻은 수리(水利)의 덕택으로 풍족하게 살고 있다. 12개의 구거가 황제의 전용도로인 치도(馳道)를 가로질러 그 길을 끊고 있었다. 이윽고 한나라가 서자 고관들이12개의 구거 위에 세워진 다리가 치도를 끊으며 또한 그것들이 서로 근접해 있음을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구거의 물을 서로 합치고 또한 치도가 지나는 곳은 세 구거를 합쳐 그 위에 하나의 다리를 놓으려고 했다. 그러자 업성의 부로들은 고관들의 말을 듣지 않고 구거는 서문군(西門君)이 만들었기 때문에 현자가이 만든 법식은 바꾸면 안 된다고 했다. 고관들도 마침내 그 말을 듣고 구거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서문표가 업성의 태수가 되어 이름을 천하에 알리고 그 은택을 후세에 까지 미치게 해서 끊어지지 않게 했으니 어찌 그들 현능한 대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자산(子產)이 정나라를 다스리자 때 백성들은 그를 속일 수 없었고, 자천(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리자 백성들은 차마 속일 수가 없었다.㉒또한 서문표가 업성을 다스릴 때 백성들은 감히 속일 수 없었다.」

세 사람의 재능 중 누가 가장 현능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스리는 길을 아는 자는 능히 구별할 수 있으리라!

<골계열전 끝>

주석

①제위왕(齊威王)/ 전국 때 제나라의 군주로 기원전356년 즉위하여 기원전320년에 죽었다. 전(田) 성에 이름은 인제(因齊)다. 재위시 정치를 개혁하고 군대를 정비했으며 추기(鄒忌)를 재상으로 기용하고, 손빈(孫臏)을 군사로 삼아 신장된 국세로 중원을 크게 진동시켰다.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당시의 패권국 위(魏)나라의 군대를 대파하고 위(魏)를 대신하여 패자를 칭하여 제후들을 호령했다. 그로 인해 제후들은 감히20여 년 동안 제나라에 대해 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임치성 동문 밖 직하(稷下)에 학자들을 초빙하여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열었다.

②골계열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활동연대가 실제적인 연대와 맞지 않는다. 편작창공열전이나 소진장의열전의 경우와 같이 사마천의 착오다. 골계열전에 나오는 인물이 활약할 당시의 군주들의 재위기간은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맹: 초장왕 전613-592년.

2. 서문표: 위문후 전446-395년,

3. 순우곤: 제위왕 전356-320년,

4. 우전: 진시황+이세 전246-207,

5. 곽사인+동방삭+동곽선생+왕생: 한무제 기원전140-87년

③초장왕(楚莊王)/ 전613-592년에 재위한 초나라의 왕으로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이다. 부왕을 죽이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오른 초목왕의 아들이다. 재위 초 음주와 가무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자기에게 정사에 간한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자 오거(伍擧)가 삼년불비(三年不飛), 삼년불명(三年不鳴)의 새로 비유하여 간하자 비즉충천(飛則沖天), 명즉경인(鳴則驚人)이라고 대답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초나라의 내정을 개혁하여 정사에 힘쓴 결과 초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루렀다. 그 힘을 바탕츠로 정나라를 사이에 두고 당진국과 중원의 패권을 다투다가 기원전600년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북쪽의 황하 남안의 필에서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당진군을 대파하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④이 구절에 나오는 조(趙)와 한(韓)과 위(魏) 세 나라는 전국시대의 나라들이다. 453년 진양성 싸움에서 한위조 삼가는 지백(智伯)이 이끌던 그 당시 가장 강력했던 지가(智家)를 멸망시키고 당진국(唐晉國)을3분하여 기존의 섬진(陝秦), 초(楚). 제(齊), 연(燕)과 함께 전국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기원전613년에서592년 사이에 재위했던 초장왕과는 시대가 맞지 않는다. 사마천의 착오이거나 후세에 어떤 사람이 가필한 부분으로 추정된다.

⑤태뢰(太牢)/ 고대 중국에서 소, 돼지, 양 각 한 마리씩을 잡아 음식을 준비하여 손님을 접대하거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제후들만이 행할 수 있는 주례 중의 하나다.

⑥육축(六畜)/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육축이라 한다.

⑦침구(寢丘)/지금의 안휘성 임천현(臨泉縣) 경내. 안휘성 부양시(阜陽市) 서쪽의 하남성과의 경계지역에 있었다. 초장왕 때의 영윤 손숙오(孫叔敖)가 죽을 때 그 아들 손안(孫安)에게, 자기 사후에 봉지를 받게 되면 그 곳의 땅을 청하라고 유언했다. 침구는 그 땅이 매우 척박하여 아무도 탐내지 않았기 때문에 손숙오의 후손들은 그 곳을 오랫동안 식읍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⑧함곡관에서 진창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대략300키로가 넘는 거리로 진시황이 확장하려고 했던 정원과 동물원의 규모는 실로 방대했다.

⑨저선생(褚先生)/ 서한의 문학가이며 사학가로 이름은 소손(少孫)이다.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인 영천(潁川) 출신으로 어렸을 때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인 패(沛)로 이주하여 살았다. 일찍이 당시의 저명한 유학자 왕식(王式)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원제(元帝: 전49-33년)와 성제(成帝: 전33-7년) 연간에 박사(博士)가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누락된 부분을 발견하고 보찬(補撰)했다. 효무본기(孝武本紀), 삼왕세가(三王世家), 외척세가(外戚世家), 귀책열전(龜策列傳), 일자열전(日者列傳) 및 골계열전(滑稽列傳)을 보찬하거나 부록으로 달았다.

⑩동무후(東武侯)/ ① 서한의 제후로 고조의 공신 곽가(郭家)의 아들 곽타(郭他)를 말한다. 여후(呂后) 6년 기원전182년 아버지 곽가의 작위를 세습했다. 지금의 산동성 조장현(棗莊縣)인 설(薛) 출신이다. 곽타의 모친은 일찍이 무제의 유모가 되었으나 한경제6년(전151년)죄를 짓고 피살되었다. ②일설에는 한무제의 유모로 성은 후(侯)고 출신지가 동무(東武) 였기 때문에 동무후라고 호칭되었다고 했다.

⑪공거사마(公車司馬)/ 궁궐의 경호책임자인 위위(衛尉)의 속관으로 황제에게 올라가는 상주문의 출납을 담당했다. 봉록은 연6백석이다.

⑫소아(小雅) 백화(白華)에 나오는 구절이다.

⑬구고(九臯)/ 천상에 있는 그윽하고 깊은 연못이다.

⑭시경 소아 학명(鶴鳴) 편의 구절이다.

⑮경(頃)/ 고대 중국의 면적을 재는 단위로1경은100무(畝), 1무는 지금 평수로50평이다. 즉1경은5천 평에 해당한다.

⑯시경소아 청승(靑蠅)에 나오는 구절이다.

⑰여오수(余吾水)/ 지금의 몽고공화국 수도 울란바토르 서쪽으로 남북으로 흘렀던 강이름이다.

⑱조도신(祖道神)/ 길의 신이다. 중국 고대에는 여행을 떠날 때 길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무사한 여행이 되기를 기원했다.

⑲相馬失之瘦,相士失之貧

⑳수형(水衡)/ 황제의 사유지 상림원(上林園)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관청이다.

㉑삼로(三老)/ 중국 고대 왕조의 제도로써 말단 지방행정기관에는10리마다 정(亭)을 두고 그 장을 정장(亭長)이라 했으며, 매10정마다 향(鄕)을 두고 그 장을 향장이라 했다. 매 향에는 삼로를 두어 그곳 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하게 했다.

㉒복자천(宓子賤) : 《설원(說苑)》에 공자의 제자 복자천이 선보(單父)를 다스릴 때 전당에만 머물며 오로지 거문고만을 탔으나 선보는 잘 다스려졌다. 그 전에 선보를 다스렸던 무마기(巫馬期)도 치적을 올렸다. 그는 별이 있을 때 등청하고 별이 뜰 때 퇴청하면서 별과 달을 벗삼아 일을 열심히 했음으로 비로소 선보가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무마기기 그 이유를 묻자 복자천이 대답했다.

나는 사람에게 의지했고 그대는 자신의 힘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힘에 의지하는 사람은 고생이 심하고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편안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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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외전5. 섭정(聶政)

學琴報仇(학금보구) 전국 때 섭정(聶政)의 부친은 한나라 왕을 위해 칼을 만들다가 기한을 넘기도록 만들지 못해 한왕의 명령에 의해 살해 되
운영자 13-01-13
[일반] 외전4. 자산(子産) 공손교(公孫僑)

외전 4. 자산(子産) 정간공(鄭簡公) 원년 기원전 565년 여러 공자들이 모의하여 자사(子駟)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자사가 미리 알고 무리를 모아
운영자 12-12-17
[일반] 외전2. 보임안서(報任安書)

보임안서(報任安書) 사마천이 자신의 친구인 임안(字:少卿)에게 보낸 유명한 서신이다. 이 서신은 『한서(漢書)』『사마천전(司馬遷傳)』 및 『문선
운영자 12-12-16
[일반] 외전1. 순우곤(荀于髡)

순우곤(荀于髡)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아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배웠다. 그가 유세하거나 간
운영자 12-12-05
[일반] 화식열전(貨殖列傳)69

열전69. 화식(貨殖) 노자가 말했다. 「나라의 지극한 치세는 이웃한 마을이 서로 바라보면서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서로 들으며, 백성들
운영자 12-11-08
[일반] 귀책열전(龜策列傳)68

열전68. 귀책(龜策) 태사공이 말한다. 옛날부터 성왕이 천명(天命)을 받아 나라를 세워 왕업을 일으키려 할 때마다, 복서(卜筮)1)를 소중히
운영자 12-09-10
[일반] 일자열전(日者列傳)67

열전68. 일자(日者)① 옛날부터 천명을 받은 자만이 왕이 되었지만 왕자가 일어날 때 복서(卜筮)로써 천명을 판단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와
운영자 12-09-06
[일반] 골계열전(滑稽列傳)66

열전66. 滑稽(골계) 淳于髡•優孟•優旃(순우곤우맹우전) 공자가 말했다. 「나라를 운용하기 위해 육경을 공부하는 목
운영자 12-08-27
[일반] 영행열전(佞幸列傳)65

열전65. 영행(佞幸) 속담에 “ 힘써 농사짓는 것이 해를 이어 풍년이 든 것 보다는 못하고 관리가 영달하는 데는 직무에 충실한 것이 윗사
운영자 12-08-27
[일반] 유협열전(游俠列傳)64

열전64. 游俠(유협) 한비자가 말했다. 「유자(儒者)는 글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고 협객은 무로써 법을 범한다.」 그래서 두 부류를 모두 비판
운영자 12-08-27
[일반] 대원열전(大宛列傳)63

열전63. 대원(大宛)1) 대원의 사적은 장건(張騫)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장건은 한중(漢中) 출신이다. 건원(建元) 연간에 랑(郞)이 되었다. 그때 천
운영자 12-08-27
[일반] 혹리열전(酷吏列傳)62

열전62. 혹리(酷吏) 1341. 民倍本多巧(민배본다교), 백성들이 본분을 잃고 간사스럽게 되며 1342. 奸軌弄法(간궤농법), 간교함을 일삼아
운영자 10-10-05
[일반] 유림열전(儒林列傳)61

1336. 自孔子卒(자공자졸), 공자가 죽은 이래 1337. 京師莫崇庠序(경사막숭상서), 도성의 사람들은 아무도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운영자 10-10-05
[일반] 급정열전(汲.鄭列傳)60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운영자 10-10-04
[일반] 순리열전(循吏列傳)59

열전59 循吏(순리) 1324. 奉法循理之吏(봉법둔리지리),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1325. 不伐功矜能(불벌공긍능), 자기들
운영자 1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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