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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삭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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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漢書列傳35 · 동방석전(東方朔傳)




1. 자천상위(自薦上位)

동방삭이 스스로 인재임을 내세워 높은 관직을 요구하다. -


동방삭(東方朔)의 자는 만천(曼倩)이고 평원(平原) 염차(厭次) 염차(厭次) : 지금의 산동성 혜민현(惠民縣)이다.

인이다. 한무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천하에 방을 내걸어 방정(方正), 현량(賢良), 문학(文學)과 용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 파격적인 관직을 주어 그들을 임용했다. 사방의 재사들이 상서를 올려 천하의 이해득실을 논하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그들 중에 능력이 부족하여 임용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곧바로 돌아가게 했다. 동방삭이 경사에 당도하여 상서했다.

「소신 삭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형님과 형수님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13세에 읽고 쓰기를 배우기 시작해서 3년 동안 익혀 문사와 지식을 제법 응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세에 검술을 배우고, 16세에 《시경(詩經)》과《서경(書經)》을 공부해서 22만 자를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세에 손오병법(孫吳兵法)으로 작전술과 포진법(布陣法) 및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한 쟁이와 북의 운영술을 배워 22만 자를 외울 수 있게 되었으니 신 삭이 외울 수 있는 글자는 모두 44만 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 늘 자로(子路)①의 행동을 본받아 항상 의관을 정제하여 몸가짐을 바로 해왔습니다. 22세가 되자 신장은 9척 3촌이고 눈은 구슬과 같이 둥글고 치아는 은빛 조개를 엮어 놓은 듯하고 맹분(孟賁)②과 같은 용력에 민첩하기로는 경기(慶忌)③와 같으며 포숙(鮑叔)의 청렴함과 미생(尾生)④과 같이 신의를 지킵니다. 이러한 재주와 자질은 천자의 대신(大臣)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신 삭은 죽음을 무릅쓰고 재배하며 말씀드립니다.」


주석

① 춘추 시대 노나라의 자로(子路)가 정적과 싸움 끝에 창에 찔려 죽게 되었을 때 군자는 항상 의관을 바로 해야 한다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끊어진 갓끈을 관을 바로 쓰고 죽었다는 고사를 말한다. 자로결영(子路結纓)고 이라고 한다.

②맹분(孟賁)

① 춘추때 위(衛)나라 사람으로 《사기정의》에 의하면 그가 일단 노하여 고함을 치면 그 소리에 하늘이 움직였다고 했다. 《시자(屍子)》에 「맹분은 물속에서는 교룡(蛟龍)도 피하지 않고, 산속을 다닐 때는 흉포한 호랑이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②전국 때 진무왕(秦武王)의 호위 무사였던 맹열(孟說)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력이 있어 평소에 살아있는 소의 뿔을 뽑았다고 했다. 그는 오획(烏獲)과 함께 용력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 진무왕이 용사들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의 용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받았다. 무왕 4년 기원전 307년, 무왕이 주나라에 들어가 구정(九鼎) 들기 힘시합을 맹분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이에 맹분은 죄를 추궁 받아 자신은 살해되고 멸족되었다.


③경기(慶忌) : 춘추 말 오왕(吳王) 요(遼)의 아들로 힘이 절륜한 용사에 특히 민첩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합려(闔閭)가 오왕 요를 시해하고 자립하자 외국으로 망명했으나 후에 합려가 보낸 자객 요리(要離)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④미생(尾生) : 춘추 때 노(魯)나라 사람으로 신의로 유명한 고대 전설상의 인물이다. 《장자(莊子)·도척(盜拓)》 편에 ‘미생이 한 여인과 다리 밑에서 기한을 정해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자는 오지 않고 강물이 불어났으나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밑을 떠나지 않아 물에 익사하고 말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2. 待詔金馬門(대조금마문)

- 금마문에서 황제의 명을 기다리다. -


동방삭은 언사가 불손하고 자신을 스스로 높여 자랑했음으로 황제는 그가 매우 기이하다고 여겨 공거부(公車府)①에서 대조(應詔)②를 명해 기다리게 했다. 그러나 동방삭은 적은 복록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황제를 알현할 수 없었다. 그러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황제의 수레와 말을 보살피는 난쟁[주유(侏儒)]이 관리들을 속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상께서는 너희 무리들이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농사를 짓고 힘을 쓰는 일에는 일반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관직을 맡아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며, 또한 종군해서 오랑캐를 공격할 때에 군사로 종군하지도 못하고 나랏일에 무익한데도 그저 옷과 밥만 헛되이 축만 낸다고 여기시어 너희 무리들을 모조리 죽리려고 하신다.」

난쟁이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울고불고 하자 동방삭이 달래며 말했다.

「주상께서 지나가시거던 고두(叩頭)를 행하고 죄를 청해라!」

얼마 후에 황제께서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난쟁이들은 모두 크게 울부짖으며 고두를 행했다. 황제가 보고 물슨 일이냐고 물었다. 난쟁이들의 고했다.

「동방삭이 주상께서 신들을 모두 죽일 거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동방삭이 꾀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불러 물었다.

「무엇 때문에 난쟁이들에게 겁을 주었느냐?」

동방삭이 대답했다.

「신은 삭은 살아서도 말을 해야 하고 죽어서도 역시 말을 해야 합니다. 난쟁이들은 키가 3척 남짓일 뿐인데도 좁쌀 한 부대에 돈 240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의 키는 키가 9척이 넘는데도 난쟁이들과 똑같이 좁쌀 한 부대와 돈 240전을 받습니다. 난쟁들이 너무 많이 먹어서 죽고 신은 너무 허기져서 죽을 지경입니다. 신이 올리는 말이 쓸만하시면 특별한 예우를 해주시고, 쓸만하지 않으면 파직시키시어 부질없이 장안의 쌀이나 축내게 하지 마옵소서!」

황제가 크게 웃고는 금마문(金馬門)③에서 조칙을 기다리라고 명했다. 이때부터 동방삭은 황제에게 총애을 조금씩 얻게 되어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주석

① 공거서(公車署) : 황제에게 상서를 올린 사람이 접대를 받으며 조칙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던 관서다. 사마문(司馬門)이라고도 한다.

② 대조(待詔) : 국가에 훌륭한 계책이나 뛰어난 문장 등을 지어 올린 자를 공거서에 대기시켜 황제의 조령을 기다리게 한 제도다. 당나라 때에 정식 관청이 되었다.

③ 금마문(金馬門) : 미앙궁(未央宮)이 성문이다. 문 옆에 청동으로 만든 말의 상(像)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금마문이라고 칭했다.


3. 희롱창우(戲弄倡優)

광대 곽사인을 희롱하다. -


황제는 궁중에서 동방삭이 올린 상주문을 읽으면서 정독할 부분에 이르러서는 표시를 하고 2달 동안이나 걸려 비로소 다 읽었다. 일찍이 황제가 술수가(術數家)①들을 시켜 사복(射覆)②을 시키면서, 사발 아래에 도마뱀[수궁(守宮)]을 놓고 알아맞히라고 했다. 아무도 맞히지 못하자 동방삭이 자진해서 나와 말했다.

「신이 일찍이 배운 《주역(周易)》의 괘로 맞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시초(蓍草)를 나누어 괘(卦)를 펼쳐놓고서 말했다.

「신이 생각하기에 용인데도 뿔이 없고, 또 뱀이기도 한데 발이 있습니다. 꿈틀꿈틀 기고 벽을 잘 타오르는데 도마뱀이 아니면 도마뱀붙이가 아닌가 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잘 맞추었다.」

그리고는 비단 14필을 상으로 하사했다. 다시 다른 물건들을 알아맞히라고 하자 계속해서 맞추어 그때마다 비단을 받았다.

이때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곽사인이라는 광대가 있었는데 언변에 능하고 활계의 소재가 무궁무진해서 항상 황제의 곁에서 시위했다. 그런 동방삭을 보고 곽사인이 말했다.

「동방삭은 미친놈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맞추었지 술수에 능한 자가 아닙니다. 원컨대 열을 내리시어 삭에게 다시 복사를 시켜보십시오. 동방삭이 맞히면 신이 곤장 백대를 맞겠고 맞히지 못하면 신에게 비단을 하사하십시오.」

그리고는 나무에 기생하는 식물을 덮어놓고 동방삭에게 알아맞히라고 했다. 삭이 말했다.

「이것은 구수(窶藪)③입니다.」

곽사인이 말했다.

「과연 동방삭이 맞히지 못했습니다.」

동방삭이 대답했다.

「날고기는 회(膾)라하고 하고 말린 고기는 포(脯)라고 합니다. 나무에 기생하여 사는 것을 기생이라고 하고 동이 아래에 넣는 것을 구수(窶藪)라고 합니다.」

황제가 광대의 우두머리에게 명을 내려 곽사인에게 곤장을 치라고 했다. 곽사인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동방삭이 비웃으면서 말했다.

「이 보시게나!털 없는 주둥이 소리는 아이고, 아이고! 엉덩이는 들썩이며 자꾸 올라가는 구나!」

곽사인이 화를 내면서 황제를 향해 말했다.

「동방삭이 멋대로 천자를 시종하는 관리를 욕보이고 기만했음으로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야 합니다.」

황제가 동방삭에게 물었다.

「무었 때문에 그를 욕보였는가?」

「신이 감히 욕보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에게 수수께끼를 내 준 것 뿐입니다.」「무슨 수수께끼인가?」

「무릇 입에 털이 없는 것은 개의 똥구멍이고, 아이고, 아이고 내는 소리는 새가 새끼를 먹이려는 새소리이고, 꽁무니가 들썩들썩 거리는 것은 먹이를 쪼아 먹는 두루미입니다.」

곽사인이 승복하지 않고 말했다.

「신이 다시 동방삭에게 수수께끼를 내겠습니다. 알아 맞히지 못하면 그에게도 곤장을 치십시오.」

곽사인이 곧바로 억지로 운을 맞춘 말을 내놓았다.

「‘令壺齟(영호서),老柏塗(노백도),伊優亞(이우아),狋吽牙(의우아)’는 무슨 뜻인가?」

동방삭이 대답했다.

「영(令)은 명(命)이고 호(壺)는 물건을 담는 그릇이며. 서(齟)는 고르지 못한 이의 모습이다. 이가 바르지 못한 것을 뜻한다. 노(老)는 사람에게 공경을 받는 것이고 백(柏)은 귀신이 사는 뜰이며 도(塗)는 질척거리는 길이다. 이우아(伊優亞)는 애매모호한 밀이고 의우아(狋吽牙)는 두 마리의 개가 싸우는 소리다.」

곽사인이 수수께끼를 낼 때마다 동방삭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즉각 대꾸하는데 ㄱ지와 재치가 번득여 변화무쌍한 그를 당해낼 수 없었고 그것을 본 좌우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황제가 동방삭을 상시랑(常侍郞)④으로 삼았다. 이로써 동방삭은 마침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주석

①술수가(術數家) :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술수(數術)란 명당(明堂), 희화(羲和), 사(史), 복(蔔)으로 점을 치는 직책을 통틀어 칭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술수가(數術家) 천문가(天文家), 역보가(曆譜家), 오행가(五行家), 기귀가(蓍龜家), 점가(雜占家), 형법가(形法家) 등의 어섯 가지 파로 나뉜다. 원래 희화는 태양을 수레에 태우고 하루 동안 하늘을 나는 마부인 중국 고대의 신화상의 태양신이었다. 또 요임금 이 천문을 관찰하고 역법을 제정하기 위해 나라의 사방으로 파견한 희중(羲仲)、희숙(羲叔)、화중(和仲)、화숙(和叔) 등의 네 사람을 희화(羲和)로 합칭한 용어다. 서한 중엽 한선제 때 승상이 전한기(前漢紀)·前漢孝宣皇帝紀卷第十八》:丞相又奏言古有羲和之官。以承四時之節。以敬授民事。(譯:丞相又上奏說古代有羲和的官員。以承接四季的節日。以慎重任命百姓的事務。

②사복(射覆) : 어떤 물건이나 동식물을 넣은 넣은 그릇을 엎어놓고 지니고 있는 술수(術數)를 발휘하여 알아맞히는 놀이다. 사(射)는 알아맞힌다는 뜻이다.

③구수(窶藪) : 머리에 짐이나 물건을 담은 동이를 일 때 머리 사이의 완충을 위해 얹는 똬리다.

④상시랑(常侍郞) : 한(漢)나라가 설치한 관명이다. 황제 좌우에서 상시적으로 시위하고 오직 조령(詔令)에 의해서만 직무를 수행했다.


4. 발검할육(拔劍割肉)

황제가 하사한 고기를 폐검으로 잘라서 가지고 가다. -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복날에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고기를 하사한다는 조칙이 나왔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도록 담당하는 태관승(太官丞)①이 나타나지 않자 동방삭은 혼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고기를 베고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복날은 집에 일찍 가야하니 하사품을 가져가야 하겠소!」

그리고는 고기를 가슴에 품고 가버렸다. 태관이 알고 그 일을 황제에게 고했다. 다음날 동방삭이 입조하자 황제가 말했다.

「어제 하사한 고기를 조칙도 기다리지 않고 칼로 베어 가지고 갔다고 하던데 어찌된 일이오?」

동방삭이 관을 벗고 사죄를 올리자 황제가 말했다.

「선생은 일어나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동방삭이 재배를 올리며 말했다.

「삭아, 삭아! 조칙도 기다리지 않고 하사품을 받았으니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범을 뽑아 고기를 잘랐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고기를 적게 가지고 갔으니 얼마나 청렴한가? 집으로 가져가서 세군(細君)②에게 주었으니 얼마나 또 얼마나 인자한가?」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선생의 잘못을 고하라고 했던 오히려 스스로를 찬양하는구나!」

황제가 다시 술 1석과 고기 백 근을 하사해서 세군에게 주라고 했다.


주석

①태관승(太官丞) : 황실의 음식물 공급을 관장하는 관리다.

②세군(細君) : 안사고(顏師古)의 주에 “세군은 동방삭 부인의 이름이다. 일설에는 세(細)는 소(小)로써 동방삭 자신을 제후에 비유해 그의 아내를 제후의 아내인 소군(小君)이라고 불렀다.”라고 했다.


5. 기원(譏苑)

상림원 수건(修建)을 풍자하다.

건원(建元) 3년(138)에 황제가 처음으로 미행(微行)을 나서 북쪽으로는 지양(池陽)①까지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황산(黃山)②에서 놀았고, 남쪽으로는 장양(長楊)③에서 사냥했으며, 동쪽으로는 의춘(宜春)④까지 가서 놀았다. 미행할 때는 항상 주주(酎酒)⑤를 마신 연후에 출발했다. 8~9월 중에 시중(侍中), 상시(常侍), 무기(武騎)와 대조(待詔)하는 농서(隴西)와 북지(北地)의 양갓집 자제들 중 기마에 능하고 활을 잘쏘는 자들과 대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의 문이라는 기문(期門)이라는 호칭은 이때에 생겼다. 미행은 물시계가 10각(刻)⑥에 내려오면 바로 시작했는데 늘 자신을 평양후(平陽侯)⑦라고 자처했다. 날이 밝아오면 산 밑으로 달려가 사슴, 멧돼지, 여우, 토끼 같은 사냥감을 활로 쏘고 맨손으로 곰과 싸우느라 논과 밭을 짓밟았다. 백성들은 하나같이 아우성치며 욕을 했고 서로 모여 스스로 호현(鄠縣)과 두현(杜縣)의 수령을 찾아가 호소했다. 현령이 가서 평양후를 알현하려고 하자 여러 기병들이 그를 매질하려고 했다. 현령이 크게 화를 내고 관리들을 보내 사냥을 중지시키고 수렵하던 여러 기병을 붙잡아 구류했는데 결국은 황제의 상징인 승여(乘輿)의 어물(御物)을 보이고서야 한참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때로는 밤에 나갔다가 다음 날 저녁에 돌아왔고, 그런 다음 5일 치의 식량을 지니고 나갔는데, 닷새에 한 번 정도는 황태후가 거처하는 장신궁(長信宮)에 얼굴을 내밀면서도 상은 이를 크게 좋아하며 즐겼다. 그후 종남산(終南山) 기슭의 백성들은 마침내 황제의 미행이 자주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후로 황제는 태후에게 신경이 쓰여 감히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다. 승상과 어사는 천자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에 우보도위(右輔都尉)를 시켜 장양궁(長陽宮)의 동쪽을 순찰토록하고 우내사(右內史)에게는 백성들을 징발해 회합장소에서의 접대를 맡도록 시켰다. 후에 비밀리에 휴게소까지 설치했다. 선곡궁(宣曲宮)의남쪽에 휴식하게 접합한 12곳의 휴게소르 세우로 하고 밤에는 이궁(離宮)에 투숙했는데 장양궁, 오작궁(五莋宮), 배양궁(倍陽宮), 선곡궁에 자주 행차했다.

이에 상이 길이 멀고 힘든 데다가 또 백성들에게 걱정거리가 된다고 여겨 태중태부 오구수왕(吾丘壽王)⑧을시켜 셈에 밝은 대조(待詔) 두 사람으로 하여금 아성(阿城 : 옛 아방궁(阿房宮))이남의 주질(盩厔)⑨ 동쪽과 의춘원(宜春苑)서쪽 땅을 장부에 올려, 논밭 면적과 그 값을 계산하도록 했다. 그 밭을 없애 상림원(上林苑)을 만들어 남산과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 중위와 좌·우내사(左右內史)에게 조서를 내려 이웃 현의 미개한 초전(草田)을 표식했는데 호현(鄠縣)과 두현(杜縣)의 백성들에게 변상을 해주기 위함이었다. 오구수왕이 일을 보고하자 상은 크게 기뻐하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이때 동방삭이 곁에 있다가 나아가 간언했다.

「신이 듣건대 겸손하고 삼가면 하늘이 응답을 드러내되 복록으로 응답하고 교만하고 사치하면 하늘이 재이(災異)로 응답한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수많은 회랑(回廊)과 누대(樓臺)를 지으면서 높이 쌓지 못할까만을 염려하시고, 사냥하는 장소가 넓지 못한 것만 걱정하십니다. 하늘이 변고를 보이지 않으면 삼보(三輔)의 땅 전체를 동산으로 만들 지경이니 어찌 꼭 주질(盩厔), 호현(鄠縣), 두현(杜縣) 등의 땅에만 그치고 말겠습니까? 사치함이 도를 넘으면 하늘이 그로 인해 변고를 만들어냄으로 상림원을 아무리 작게 조성해도 신은 오히려 크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남산은 천하의 요새입니다. 남산 앞으로는 장강과 회수(淮水)가, 북쪽으로는 하수와 위수(渭水)가 흐릅니다. 견수(汧水)와 농산(籠山)동쪽으로부터 상현(商縣)과 상락현(商洛縣) 서쪽까지는 토양이 비옥합니다. 한나라가 일어날 때 삼하(三河)의 땅을 버리고⑩ 패수(覇水)와 산수(滻水)서쪽에 머물러 경수(涇水)와 위수(渭水)남쪽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이 지역은 풍광이 빼어나고 천하의 물자가 모여드는 곳으로 진나라가 서융(西戎)을 사로잡고 산동(山東) 여섯 나라를 병합한 근거지입니다. 이곳의 산에서는 옥돌이 나오고, 금, 은, 동, 철, 예장(豫章)나무 , 자단목(紫檀木), 산뽕나무 등을 비롯한 특이한 물자가 산출돼 그 수량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 물건을 공인들이 가져다 쓰고 만백성들이 그 물자에 기대어 풍족하게 살아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벼, 밤, 뽕나무, 삼, 대나무, 화살 따위의 물건이 풍부합니다. 토양이 생강과 토란을 재배하기에 알맞고 물에는 개구리와 물고기가 많아서 가난한 백성들이 그 덕분에 먹을 것, 입을 것을 마련해 굶주림이나 추위에 떨 걱정하지 않게 합니다. 풍현(豊縣)과 호경(鎬京)사이는 기름진 땅으로 명성이 나서 땅 값이 1무에 1금이 나갑니다. 그런데 이제 그 같은 땅을 구획정리해 상림원을 만드신다면, 저수지와 연못에서 나오는 이익을 끊어버리고 백성들의 비옥한 땅을 빼앗는 일입니다. 위로는 국가의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농사를 빼앗습니다. 이미 거둔 공을 버리고 실패할 일을 반복하여 나라의 수입을 감소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이 상림원을 지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상림원을 조성하면 가시나무 숲을 만들어 고라니와 사슴을 키우고 여우와 토끼가 뛰놀 동산을 넓히며, 범과 이리가 뛰어다닐 언덕을 확대할 겁니다. 또 백성의 무덤을 파헤치고 사는 집을 무너뜨려, 어리고 나약한 자들이 옛 고향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늙은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상림원을 지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원림을 넓히는 데 힘쓰고 농부의 고통을 돌보지 않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은나라 주왕(紂王)이 시장에 9개나 되는 궁궐을 세우자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초영왕이 장화대(章華臺)를 세우자 백성들이 이반했으며 진나라가 아방궁(阿房宮)을 세으자 천하가 어지러워졌습니다.

비천하고 어리석은 소신의 목숨도 잊고 죽음을 재촉하며, 성대한 처자의 뜻을 거스르고 엄한 지시를 거슬렸음으로 그 죄가 만 번 죽음 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태계육부(泰階六符)⑪를 아뤼오니 하늘의 괴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이날 태계의 일을 아뢰었다. 황제는 즉시 동방삭을 태중태부 급사중(給事中)에 제수하고 황금 백 근을 하사했다. 그러나 결국은 상림원의 수건을 중단하지 않고 오구수왕이 상주한대로 시행했다.


주석

①지양(池陽) : 한혜제(漢惠帝) 4년인 기원전 191년에 현을 설치하고 좌풍익(左冯翊)에 속하게 했다. 치소는 지금의 섬서성 경양현(涇陽縣) 경내다. 《한서(汉书)·지리지(地理志)》의 응소(應劭)의 주에 지양현은 지수(池水)의 남쪽 고을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한나라가 궁궐을 짓고 지양궁이라고 했으며 서진(西晉) 때 부풍국(扶风国)에 속했고 북위 정권 때는 함양군이 치소였다. 북주(北周) 건덕(建德) 3년인 서기 574년에 경양현에 통합되었다.

②황산(黃山) :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남쪽의 고을로 서한 초 행궁이 있었다.

③장양(長楊) : 지금의 섬서성 주지현(周至縣) 경내로 황제의 행궁이 있었다.

④의춘(宜春) : 《삼보황도(三辅黄图)·감천궁(甘泉宫)》에 “의춘궁(宜春宫)으로 진(秦)나라 때 지은 이궁이다. 장안성 남동의 두현(杜縣) 동쪽에 있었다.

⑤주주(酎酒) : 종묘에 올리는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빚은 술

⑥십각(十刻) : 저녁 8시 반 경이다.

⑦평양후(平陽侯) : 기원전 201년 서한의 개국공신 조참의 봉호다.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를 치소로 두고 1만 630호를 관할했다. 당시 평양후 조수(曹壽 : 자(字)는 시(時))는 조참의 증손자로 한무제의 동복누이 양신공주(陽信公主)의 남편이었다. 양신공주가 평양공주다. 후에 악질에 걸린 조수는 후국에 머물며 평양공주와 별거하다가 한무제 재위 9년 원광(元光) 3년인 기원전 132년에 죽었다. 과부가 된 평양공주는 그녀의 가노출신인 위청(衛靑)과 재혼했다.

⑧오구수왕 : 자는 자공(子贛)이고 조(趙)나라 사람이다. 어렸을 때 바둑을 잘 두어서 대조(待詔)로 불려가 동중서(董仲舒)에게서《춘추(春秋)》를 배우라는 명을 받았다. 총명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여 시중과 중랑이 되었다. 후에 범죄에 연좌되어 면직되었다가 동군(東郡)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동군도위로 복직되었다. 후에 광록대부 시중(侍中)으로 제수되어 승상 공손홍(公孫弘)이 백성들에게 활이나 칼의 소지를 금지시키겠다는 정책을 반대했다. 후에 다시 법에 저촉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한나라 때 부를 잘 짓기로 이름을 얻어 지위는 엄조(嚴助), 주매신(朱臣臣) 등과 같았으나 작위는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오구수왕(吾丘壽王)》 6편, 《우구설(虞丘说)》 1편, 《오구수왕부(吾丘寿王赋)》 15편이 있다.

⑨주질(盩厔) : 지금의 섬서성 주지현(周至縣)이다.

⑩삼하(三河) : 하수(河水), 이수(伊水), 낙수(洛水) 등의 세 강을 말한다. 삼하의 땅을 버렸다는 뜻은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지 않았다는 뜻이다.

⑪태계육부(泰階六符) : 《한서·예문지(藝文志)》의 천문가(天文家) 항목에 인용한 이기(李奇)의 주에 “태계(泰階)는 별 이름으로 삼태(三台)다. 각 태성은 각각 2개의 별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6개다. 부(符)란 이 6개의 별이 상징하는 징조다.”라고 했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황제(黃帝)는 《태계육부경(泰階六符經)》에서 ‘태계(泰階)란 하늘의 세 계단이다. 상계(上階)는 천자가 되고, 중계(中階)는 제후와 공경대부가 되며 하계(下階)는 선비와 서인(庶人)이 된다. 상계의 윗 별은 남성 군주인 남주(南主)이고 아랫 별은 왕비를 뜻하는 여주(女主)이다. 중계의 윗 별은 제후와 삼공(三公)이고 아랫 별은 공경과 대부이다. 하계의 윗 별은 원사(元士)이고 아랫 별은 일반 백성인 서인(庶人)이다. 세 계단이 모두 바르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비바람이 제 때에 내리거나 불고, 사직의 신령들은 모두 마땅함을 얻어 천하가 크게 안정되니 이를 일러 태평(太平)이라고 한다. 반면에 세 계단이 모두 바르지 못하면 다섯 신령이 제사를 받지 못하고, 해는 먹히며 물은 마르고 농사는 제대로 되지 않으며, 겨울에는 천동 번개가 치고, 여름에는 이슬이 내려 백성들이 편안치 못하게 되니, 그로 인해 다스리는 도리는 기울어지게 된다. 이리되면 천자는 폭령(暴令)을 내리고 군사 일으키기를 좋아하며, 궁궐을 수리하고 정원이나 동산을 넓히게 되니, 위 계단은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듬성듬성해진다. 효무제가 하려는 일들은 모두 해당되니 때문에 동방삭이 간언을 올린 것이다.


6. 時然後言 不厭其言(시연후언 불염기언)

- 말이란 시의에 맞아야 다른 사람이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

그리고 오랜 세월에 지나 융려공주(隆慮公主)①의 아들 소평군(昭平君) 진상(陳尚)이 황제의 딸 이안공주(夷安公主)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병으로 고생하던 융려공주가 천근의 황금과 전 천만을 바치며 장차 소평군이 죽을 죄를 저질렀을 때 속죄시켜 달라고 청하자 황제가 허락했다. 곧이어 융려공주는 죽고 소평군은 날이 갈수록 교만해져 마침내 술김에 이안공주의 보모를 죽였음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공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정위(廷尉)가 무제에게 죄명을 정해달라고 주청했다. 황제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이 소평군을 위해 모두 말했다.

「예전에 속죄금을 내자 폐하께서는 허락하셨습니다. 」

황제가 말했다.

「내 여동생이 나이가 들어 아들 소평군만을 두어 죽을 때 내게 부탁했었지!」

그리고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면서 말했다.

「법령이란 선제가 만들었다. 동생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선제의 법령을 어긴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고조의 사당에 들아갈 수 있겠는가? 또 아래로는 만백성을 대할 수 없다.」

곧이어 정위의 주청을 허락하고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좌우의 신하들도 모두 슬퍼했다. 동방삭이 앞으로 나와 축수하면서 말했다.

「신은 듣건대 ‘성왕이 정사를 돌볼 때는 원수라도 꺼리지 않고 상을 주고 골육지친이라고 해도 가리지 않고 죄를 지으면 죽인다.’라고 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무리 짓지 않으니, 왕도(王道)는 넓고도 넓도다[不偏不黨,王道蕩蕩]!’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오제(五帝)가 소중하게 여겼던 법이며, 삼왕(三王)도 따르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그것을 행하셨으니 이로부터 천하 만백성들은 모두 자기가 맡은 바를 지키며 살 것이니 천하를 위해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이 말을 듣고 황제는 곧바로 일어나 들어가 버렸다. 저녁 때가 되어 동방삭을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전(傳)에 이르기를 ‘말이란 시의적절해야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는다[然後言,人不厭其言]’라고 했는 선생은 이때에 하필이한 축수를 하시는 것이오?」②

동방삭이 관모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이 듣기에 즐거움이 지나치면 양기가 넘치고, 슬픔이 지나치면 음기가 손상된다라고 했습니다. 음양이 변하면 심기가 움직이고 심기가 움직이면 정신이 흩어지며, 정신이 흩어지면 사기(邪氣)가 침범합니다. 근심ㅇ르 푸는 방법으로는 술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축수를 올린 뜻은 남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올바른 일을 하신 폐하를 환하게 드러내고 슬픔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리석게도 기휘(忌諱)할 줄 모르고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전에 삭은 술에 취해g 궁궐 안에서 소변을 본 일이 있다. 그 때문에 불경죄로 탄핵을 받았디. 조서를 내려 서인으로 삼아 환자서(宦子署)에서 조칙을 기다리게 했었다. 이번 일로 인해 다시 중랑을 삼고 비단 100필을 내려주었다.


주석

①융려공주(隆虑公主) :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불상이고 한무제 때 졸했다. 사서에는 이름을 기록되지 않았다. 한경제(漢景帝)의 딸로 친모는 2번 째 황후 왕지(王娡)다. 동모형제로는 평양공주(平陽公主), 남궁공주(南宮公主) 한무제 유철(劉徹) 등이있다. 융려후(隆慮侯) 진교(陳蟜)에게 시집가서 소평군(昭平郡)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며느리는 한무제의 딸 이안(利安)공주다.

②《논어(論語)·헌문편(憲問篇)》에 보인다.

「부자(夫子)께서는 시의에 맞은 뒤에야 말씀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말을 싫어하지 않으며, 즐거운 뒤에야 웃으시므로 사람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의에 맞은 뒤에야 취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취함을 싫어하지 않습니다.[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7. 한언(扞偃)

간언으로 한언의 앞길을 막다. -


처음에 황제의 고모 관도공주(館陶公主)①는 두태주(竇太主)라고 했는데 당읍후(堂邑侯) 진오(陳午)②에게 시집갔다. 진오가 일찍 죽자 두태주는 과부가 되었다가 나이가 50여 세가 되었을 때 시중을 들던 동언(董偃)이라 자를 총애했다. 옛날 동언은 그 어미와 함께 구슬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언의 나이 13세 때 그의 어미를 따라 두태주의 집을 출입했다. 태주를 모시던 사람들이 동언의 용모가 아름답다고 말하자 태주가 불러 보고는 말했다.

「내가 너의 어미가 되어 키워주리라!」

그리고는 태주의 저택에 머물르며 살게 하면서 글쓰기, 산술, 상마(相馬), 수레를 모는 방법, 활쏘기 등을 가르쳤다. 이로써 언은 제법 책을 많이 읽었다. 18세에 이르자 관례(冠禮를 치르고 출입할 때는 태주의 수레를 끄는 말고삐를 잡고 집에 들어와서는 가까이 모셨다. 사람됨이 온순하고 인정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태주가 매우 총애했기 때문에 여러 공경들이 그를 잘 대우했다. 이에 그의 이름이 장안성 안에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그를 동군(董君)이라고 호칭했다. 두태주는 그를 남들에게 추천하고 재물을 풀어 선비들과 교제하도록 하면서 중부(中府)③에 영을 내렸다.

「동군이 요청하면 하루에 황금 100근이 넘고 돈은 100만이 넘으며, 비단은 1000필이 넘는 것만 나에게 보고하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라!」

안릉(安陵)의 원숙(爰叔)이란 사람은 문제 때 중랑장을 지낸 원앙(爰盎)의 조카로 동언과 친했다. 원숙이 동언에게 말했다.

「족하께서는 사사로이 두태주를 모시면서 헤아릴 수 없는 죄를 끼고 사는데 장차 어떻게 처신하려고 하십니까?」

동언이 두려워하며 말했다.

「걱정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소.」

원숙이 말했다.

「문제의 능묘는 장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천자가 쉴만한 이궁이나 변변한 시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가래나무와 대나무가 있어 천자가 노닐기에 적당하니 족하께서 두태주에게 말씀드려 적전(藉田)이 있는 그녀 소유의 장문원(長門園)을 천자에게 바치는 것이 어떠합니까? 그 땅은 평소에 황제가 욕심내는 땅이라 그렇게 하면 그 일을 주선한 장본인이 족하임을 황제께서 알게 될 것이니 그 후로는 배게를 편히 베고 잠들 수 있고 겁내고 슬퍼할 걱정거리도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만약 오래도록 조치하지 않다가 황제께서 스스로 청하기라도 한다면 그때 족하는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동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동언이 저택의 침소에 들어가 두태주에게 고하자 두태주는 상주문을 쓰게 하여 장원문을 황제게 바쳤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두태주의 장문원을 장문궁(長門宮)으로 부르게 했다. 두태주 역시 기뻐하며 동언에게 황금 백 근을 내어주며 원숙을 축수하게 했다. 원숙은 이 일을 계기로 동군이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계책을 꾸며 태주에게 아뢰어 병을 핑계로 조현을 드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황제가 태 병문안을 와서 태주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태주가 사양하면서 말했다.

「첩은 다행히도 폐하의 두터운 은혜와 선제가 남기신 덕으로 조현의 의례에 참가하여 신첩의 예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공주의 대열에 서서 많은 상을 하사받고 식읍으로부터 걷어들이는 부세는 황상의 은덕으로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두터우니 백 번 죽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폐하를 모시는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이 미천한 몸이 먼저 구렁텅이에 굴러 죽게 된다면, 한스러운 일이 한 가지 남아 마음속에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폐하께서 시간이 나실 때 만 가지 국사를 잠시 잊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대궐로부터 수레를 돌이켜 소첩의 산림으로 행차하신다면, 폐하께 축수하는 술잔을 받들어 올리고 즐겁게 해드릴 기회를 가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고 죽는다며 무슨 한이 남겠습니까?」

황제가 말했다.

「태주께서는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병이 나으시기만을 바랍뿐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따르는 시종이 너무 많아 비용을 너무 쓰게 할까봐 걱정일 뿐입니다.」

황제가 궁궐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 태주의 병이 낫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궁궐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찬만 전의 비용을 들여 주연을 마련하고 태주와 함께 마셨다.

며칠이 지나 황제가 산림에 행차하니 태주가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요리를 하다가 황제를 안내하여 섬돌로 올라 연회장에 좌정하게 했다. 미처 좌정하기도 전에 황제가 말했다.

「원컨대 주인옹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태주가 곧바로 당 아래로 내려가 비녀와 귀고리를 풀어놓고 맨발이 되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첩은 후안무치하게도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고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폐하께서는 법대로 처리해 용서하지 마시옵고 소첩의 죽을죄를 머리를 조아리며 아룁니다.」

황제는 용서한다는 조칙을 내리자 태주는 비녀를 꽂고 신발을 신고 일어나 동쪽의 별채로 가서 동군을 이끌고 황제 앞에 대령했다. 동군은 푸른색 두건을 쓰고 가죽토시를 찬 복장으로 태주를 따라 앞으로 나와 전당 밑에 엎드려 태주가 이른대로 고했다.

「관도공주(館陶公主)의 주방 요리사 언이 죽을 죄를 무릅쓰고 재배를 올리며 뵈옵니다.」

이어 고두를 행하며 사죄하자 황제가 일어나라는 명을 내렸다. 조칙을 내려 의복과 관을 하사하고 위로 오르라고 했다. 동언이 일어나 총총걸음으로 달려가 의관을 차려 입었다. 태주가 친히 황제에게 음식을 받들고 술잔을 바쳤다. 그 술자리에서 동군은 존대를 받았으나 호칭이 없었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주인옹이라고 불렀다. 황제는 술을 마음껏 마시고 크게 즐거워했다. 태주는 이에 장군(將軍), 열후(列侯), 수종관원(隨從官員)들에게 황금과 돈, 각종 유색 비단을 각기 차등을 두어 하사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동군이 귀하게 되어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이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전국의 군국(郡國)에서 개시합, 말타기, 축국(蹴鞠) 놀이를 잘하는 자들과 검객들이 동군에게로 몰려들었다. 동군은 항상 무제를 쫓아서 북궁에서 놀았고 상림원의 평락관(平樂觀)에서 말을 달려 사냥했으며, 투계와 축국놀이를 구경하고 개시합과 경마를 겨루었다. 그 놀이를 크게 즐겨한 황제는 이에 태주를 위해 황제가 평소에 기거하는 선실(宣室)에서 술잔치를 열고 알자를 시켜 동군을 궁궐로 불러오게 했다.

그때 동방삭은 극을 들고 계단 밑에서 시위(侍衛)하다가 극을 내려놓고 앞으로 나와 말했다.

「동군에게 참수형에 해당하는 죄가 셋이 있는데 어째서 대궐로 불러들이시는 겁니까?」

황제가 말했다.

「무슨 죄란 말인가?」

「언이라는 자는 남의 신하된 몸으로 공주를 사사로이 모셨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남녀 간의 풍기를 문란하게 만들고 혼인의 예를 어지럽혀 왕실의 제도를 손상시켰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폐하께서는 나이가 젊으심으로 한창 육경(六經)에 마음을 기울기고 제왕의 업무에 정신을 쏟아야 하며, 요임금과 순임금 시절의 정사를 따르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고,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어진 임금을 본받아야할 때입니다. 그런데 동언은 경전을 따르거나 학문을 권하기는커녕 도리어 화려한 것만 숭상하고 사치만을 힘쓰며, 개시합이나 말 타는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눈과 귀의 감각적인 쾌락만을 만끽하며, 사악하고 잘못된 길만을 걷고, 음란하고 비뚤어진 길을 날쌔게 다닙니다. 이 자는 나라의 큰 도적이자 군주의 큰 요물입니다. 동언은 음란한 자의 괴수이니 이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옛날 백희(伯姬)가 불에 타 죽자④ 제후들이 탄복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묵묵부답으로 아무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 말했다.

「내가 이미 잔치를 벌였으니 이후로 고치겠노라!」

그러자 동방삭이 말했다.

「불가합니다. 무릇 선실(宣室)이란 선제(先帝)들께서 기거하시던 정전(正殿)입니다. 국가의 대사를 의논하는 자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음란한 짓이 점차 커져 나라를 찬탈하는 변고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제나라에는 수초(竪貂)라는 환관이 음란한 짓을 벌여 역아(易牙)와 더불어 난을 일으켰고⑤ 경보(慶父)⑥가 죽자 노(魯)나라가 온전해졌으며 관채(管蔡)⑦가 죽임을 당하자 주나라 왕실이 편안해 졌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잘 알았노라!」

그리고는 조칙을 바로내려 잔치를 중단했다. 그러나 다시 북궁(北宮)에다 술자리를 마련하고서 동사마문(東司馬門)을 통해 동군을 데려오게 했다. 동언이 이 문을 통해 드나들며 무제와 사귀었다고 해서 동사마문은 동교문(東交門)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동방삭에는 황금 30근을 상으로 하사하고 동군에 대한 총애는 이후로 점점 쇠해졌다. 동언은 나이 30에 죽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두태주도 죽었는데 동군과 함께 패릉에 합장되었다. 이 후로 공주와 귀인의 예법과 제도를 뛰어넘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는 동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주석

① 관도공주 : 한문제(漢文帝)와 두황후(竇皇后) 사이에 소생으로 이름은 유표(刘嫖)다.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고 한무제 재위 28년 째인 원정(元鼎) 4년 서기 116년에 죽었다. 한경제의 누이이고 한무제의 고모다.

② 당읍후(堂邑侯) 진영(陳嬰)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84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이다. 지금의 안휘성 천장시(天長市)인 동양(東陽) 사람으로 진말 동양현의 옥리였다. 위인이 근면, 신중했으며 신의를 잘 지켜 평소에 장자(長子)라고 불렸다. 진2세 원년 기원전 209년 동양의 백성들이 진승의 기의에 호응하여 일어설 때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스스로 왕의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항량을 찾아가 그의 부하가 되었다. 항량은 그를 장군에 임명했다. 초회왕이 서자 그는 상주국(上柱國)에 임명되고 5개 현에 봉해졌다. 한고조 5년 기원전 202년 항우가 죽자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한 진영은 예장, 절강 등의 땅에 할거하여 스스로 왕호를 참칭하고 있던 장식(壯息)을 공격하여 평정하고 스스로 장식후(壯息侯)가 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당읍(堂邑)에 봉해지고 1,800호의 식읍을 받았다. 후에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의 상(相)이 되어 11년 동안 있었다. 여태후 4년인 기원전 184년에 죽었다. 진오(陳午)는 진영의 손자다. 한무제의 첫 번째 황후 진아교(陳阿嬌)는 관도공주와 진오(陳午) 사이의 소생이다.

③중부(中府) : 태주의 금백(金帛)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부서

④백희(伯姬)는 춘추시대 노선공(魯宣公)의 딸로 송공공(宋共公)에게 시집갔다. 공공이 일찍 죽어 그녀는 과부로 살았는데 송경공(宋景公) 때에 이르러 밤에 백회가 기거하는 궁에서 불이 났다. 좌우에 있던 사람이 ‘부인은 잠깐 불을 피하십시오.’라고 하자 백희가 ‘부인은 시녀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밤에 당을 내려가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불에 타 죽었다. 《좌전(左傳)》 노양공(魯襄公) 30년(기원전 543년) 조에 “송나라에 큰 화재가 나 백희가 불에 타 죽었는데 보모(保姆)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⑤수초(竪貂)와 역아(易牙) : 춘추 때 제환공의 내관이다. 수초는 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이 되어 제환공을 곁에서 모셨고 역아는 그의 어린 아들을 잡아 요리로 만들어 제환공에 바친 궁중 요리사다. 관중은 이 두 사람을 흉악한 자라고 여겨 제환공에게 내치라는 유언을 하고 죽었다. 환공은 듣지 않고 두 사람을 곁에 두어 중용했다. 이윽고 환공이 노환으로 병이 들자 두 사람은 란을 일으켜 궁문을 봉쇄하고 환공에게 음식을 주지 않았다. 환공은 결국 굶어 죽고 3개월이나 장례를 치르지 않아 방치되어 썪은 시체에서는 벌레가 생겼다.

⑥ 경보(慶父) : 춘추 때 노환공(魯桓公)의 서자로 노장공(魯莊公)의 동생이다. 장공이 죽자 경보는 장공의 아들 노민공(魯閔公)을 시해하고 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싸움에 지자 거(莒)나라 달아났다. 그 후에 노희공(魯僖公)이 거나라에 경보의 송환을 요구하자 거나라는 경보를 붙잡아 노나라로 보내려고 했다. 경보가 스스로 목을 메달아 죽자 노희공의 군위는 비로소 안정되었다.

⑦ 관채(管蔡) : 주무왕(周武王)의 동생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다. 무왕이 죽자 그 뒤를 이은 성왕은 나이가 8세에 불과한 어린아이 였다. 이에 주공(周公) 단(旦)이 섭장을 행하자 우 사람은 불복하고 은주(殷紂)의 아들 무경(武庚)과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단이 반란을 진압하고 무경과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하자 주나라는 이로써 안정을 찾았다.


8. 失之毫厘 差之千里(실지호리 차지천리)

- 어긋나는 것은 터럭이나 그 차이는 천리이다. -


이 무렵 천하는 사치가 극도로 심해져 많은 백성들이 상공업에 뛰어들어 농토를 버리고 떠나는 농민들이 많았다. 황제가 조용한 틈을 타서 동방삭에게 물었다.

「내가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동방삭이 대답했다.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禹)임금, 탕(湯)임금,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 강왕(康王) 때의 일은 이미 수천년이 지난 상고지사(上古之事) 임으로 실로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원컨대 가까운 효문황제(孝文皇帝) 때의 일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기로(耆老)들은 모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효문황제는 귀하기로 천자이시고 부유하기는 온 천하를 소유하신 분임에도 몸에 입은 옷은 검은색의 거친 비단이었고, 발에는 생가죽으로 만든 가죽신을 걸치셨습니다. 장식 없는 가죽띠로 검을 차셨고, 왕골자리를 깔고 앉으셨으며, 병기는 무디어서 칼날이 없을 정도였고, 옷은 낡아 무늬가 없었으며, 상서문(上書文)을 담는 주머니를 이용해 궁궐의 휘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덕을 아름답게 여기시고, 인의를 준칙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에 천하의 백성들이 효문황제의 행동거지를 멀리서 보고 순박한 풍속을 이뤄 교화가 분명하게 시행됐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장안성 안이 협소하다고 생각하셔서 성 밖에을 건장궁(建章宮)을 세우려고 하십니다. 왼편으로는 봉궐(鳳闕)을 지어 건장궁의 성문으로 삼고 오른편으로는 신명대(神明臺)①를 세워 천문만호(千門萬戶)로 불립니다. 궁궐의 나무와 흙에도 화려한 자수로 치장하고 개나 말한테도 오색 비단옷을 입힙니다. 궁인들은 대모(玳瑁)로 만든 비녀를 꽂고 몸에는 구슬을 차고 있습니다. 놀이하는 수레를 만들어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을 조장하고, 화려하게 꾸미고 진귀한 물건 모으기를 좋아합니다. 대궐 안에서 1만 근짜리 종을 치고, 우레와 같은 큰 소리가 나는 북을 두드리면서 광대들이 놀이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춤을 춥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지나치게 사치하시면서 백성들에게만 사치하지 말라, 이농하지 말라고 요구하시니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폐하께서 참으로 신 삭의 의견을 채택하시어 수많은 화려한 휘장을 철거해 사통오달(四通五達)의 거리에서 불태우시고, 준마를 내버려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신다면, 요순 임금의 드높은 정사와 견줄만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역서(易書)》에 이르기를 ‘근본을 바로잡는다면 만사가 잘 다스려지고, 어긋나는 것은 털끝이나 차이는 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점을 유의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②

동방삭은 우스갯소리를 잘했지만 때때로 황제의 안색을 엿보아 직언하고 준업하게 비판해, 황제는 늘 그의 말을 채택했다. 동방삭은 공경을 비롯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모두 경시하고 조롱해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다.

황제는 동방삭이 우갯소리를 잘하고 구변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즐겨 질문을 자주했다. 일찍이 황제가 동방삭에게 물었다.

「선생은 짐이 어떤 임금이라고 생각하는가?」

동방삭이 대답했다.

「정치가 융성했던 요순시대부터 성강(成康)의 치세를 가지고도 오늘 날 금상폐하의 치적과 비유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이 엎드려 폐하의 공덕을 살펴보건대 오제(五帝)의 윗자리에 놓이고 삼왕(三王)보다 앞섭니다. 단지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고 진심을 다해 천하의 현사들을 얻었기 때문에 공경을 포함한 벼슬아치들이 모두 적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을 승상으로, 공구(孔丘)를 어사대부로,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장군으로, 필공(畢公)고(高)③를 습유(拾遺)④로, 변엄자(弁嚴子)⑤를 위위(衛尉)로, 고요(皐陶)⑥를 대리(大理)⑦로, 후직(后稷)⑧을 사농(司農)⑨으로, 이윤(伊尹)⑩을 소부(少傅)로, 자공(子貢)을 외국에 보내는 사신으로, 안연(顏淵)과 민자건(閔子騫)⑪을 박사(博士)로, 자하(子夏)를 태상(太常)⑫으로, 익(益)⑬을 우부풍(右扶風)⑭으로, 자로(子路)를 집금오(執金吾)⑮로, 설(薛)⑯을 대홍려(大鴻臚)⑰로, 용봉(龍逢)⑱을 종정(宗正)⑲으로 삼으시고, 백이(伯夷)를 경조윤(京兆尹)⑳으로, 관중(管仲)을 좌풍익(左馮翊)㉑으로, 노반(魯盤)㉒을 장작감(將作監)㉓으로, 중산보(仲山甫)㉔를 광록대부(光祿大夫)㉕로 삼으시고, 신백(申伯)㉖을 태복(太僕)㉗으로, 연릉계자(延陵季子)㉘를 수형도위(水衡都尉)㉙로, 백리해(白里奚)㉚를 전속국(典屬國)㉛으로, 유하혜(柳下惠)를 대장추(大長秋)㉜로 삼으시고, 사어(史魚)㉝를 사직(司直)㉞으로, 거백옥(蘧伯玉)㉟을 태부(太傅)로, 공보(孔父)㉟를 첨사(詹事)㊱로, 숙손오(叔孫敖)㊲를 제후의 재상으로 삼으시고, 자산(子産)㊳을 군수로, 왕경기(王慶忌)㊴를 기문(期門)㊵으로 삼으시고, 하육(夏育)㊶을 정관(鼎官)㊷, 예(羿)㊸를 모두(旄頭)㊹로, 송만(宋萬)㊺을 식도후(式道侯)㊻로 삼으셨습니다.」

황제가 듣고 크게 웃었다.

당시 조정에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황제가 삭에게 물었다.

「지금 조정에는 승상 공손홍(公孫弘)㊼, 어사대부 예관(兒寬)㊽, 동중서(董仲舒)㊾, 하후시창(夏侯始昌)㊿, 사마상여(司馬相如)51, 오구수왕(吾丘壽王)52, 주보언(主父偃)53, 주매신(朱買臣)54, 엄조(嚴助)55, 급암(汲黯)56, 교창(膠倉)57、종군(終軍)58、엄안(嚴安)59、서락(徐樂)60、사마천(司馬遷)의 무리들이 모두 변론을 잘하고 지식이 풍부하여 문장을 아주 잘 짓는다. 선생 자신이 보기에 이들과 비교해 어떠하오?」

동방삭이 대답했다.

「신이 살펴보니 들쑥날쑥한 이, 툭 튀어나온 광대뼈, 대접 같은 입술, 내려앉은 목에 쳐든 고개, 정강이와 다리는 붙어있고, 볼기짝과 꽁무니가 이어진 자들이 걸음걸이는 비틀비틀, 허리는 구부정합니다. 신 삭이 비록 모자란 놈이기는 해도 오히려 이런 사람들 여러 몫을 할 수 있습니다.」

물음에 대답하는 동방삭의 기발한 말솜씨가 모두 이런 식이었다.


주석

① 신명대(神明臺) : 건장궁 안에 있는 신선(神仙)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설치한 대

②《역경(易經)》에 나오는 말이 아니다. 《대대예기(大戴禮記)》의 『보부(保傅)』 편과 《사기(史記)·태사공자서(太史公自書)》에서 위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③ 필공(畢公) : 주문왕의 아들로 이름은 고(高)다. 지금의 산서성 함양시(鹹陽市) 북쪽의 필(畢) 땅에 봉해져 필공이라 했다. 그의 후손 중에 필만(畢萬)이라는 사람이 당진(唐晉)의 헌공(獻公)을 모셔 지금의 산서성 예성(芮城) 북의 위(魏)에 봉해졌다. 필만의 후손들은 성을 위(魏)로 삼고 후에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의 하나인 위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④습유(拾遺) : 황제를 시종하면서 풍간을 하거나 잘못된 황제의 언행이나 과실을 지적하는 직책이다. 당나라 때터 문하성 안에 정식으로 설치했다.

⑤ 변엄자(弁嚴子) : 변장자(卞壯子)다. 한명제(漢明帝)의 이름 장(莊)을 휘(諱)해 엄자로 바꿨다. 변(弁)은 변(卞)으로 중국 고대의 모자로 피변(皮弁)은 무관이 작변(爵弁)은 문관이 썼다. 변장자는 춘추 때 노나라의 대부로 전국책에는 관장자(管莊子)라고 되어 있다. 봉지는 지금의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경내 동쪽에 있었던 변읍(卞邑)이다. 자기의 힘을 믿고 항상 호랑이를 잡으러 다니던 변장자를 보고 관수자(館竪子)라는 사람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잡아먹기 위해서는 필시 서로 싸워야 할 것이며, 싸우게 되면 두 호랑이 중 한 마리는 죽고 다른 한 마리는 상처가 깊을 것이며 그때 남은 호랑이를 잡으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변장자가 그 말대로 해서 한 번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영전(迎戰)하러 나온 노군 대장 변장자가 한 손으로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물러갔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뜻의 미인(美人)은 지혜(知慧), 무욕(無慾), 용기(勇氣), 재능(才能)의 덕목을 갖춘 사람을 칭한 말로 변장자는 그 중에서 용기를 갖춘 사람이라고 칭송되었다.

⑥ 고요(皐陶) : 순(舜)임금 때 법리(法理)에 통달하여 법을 세워 형벌을 제정하고, 또 옥(獄)을 만든 전설상의 인물로 후대에 중국 사법의 시조로 받들여지고 있다.

⑦ 대리(大理) : 중국 상고시대에 형법을 관장하는 관직 이름이다. 순임금 때 고요가 처음 으로 임명되었다. 진한(秦漢) 시대에 정위(廷尉)로 개칭되었다가 수(隋)나라가 원래의 대리로 설치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의 최고 집법기관이다.

⑧ 후직(後稷) : 주나라를 세운 주족(周族)의 시조다. 제곡(帝嚳)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모친 강원(姜嫄)이 외출을 나갔다가 우연히 거인의 발자국을 밟게 된 후에 임신을 하게 되어 후직이 태어났다. 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갓난아이를 멀리 내다 버리게 했으나 뭇 짐승들이 기를 보호했음으로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다시 거두어 길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기(棄)라고 지었다. 기가 성장하면서 농사 짓는 일을 좋아하여 씨을 뿌리고 수확하는 법에 정통하게 되었다. 요임금이 후직을 농사(農師)에 임명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순임금이 그를 태(邰)에 봉했다. 주족은 그가 인류 최초로 기장과 보리를 기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여 그의 이름에 직(稷)자를 붙여 불렀다. 후세에 이르러 농사를 관장하는 신으로 받들어 졌다.

⑨ 사농(司農) : 중국 상고시대에 백성에게 농사의 일을 가르치는 관리들의 장관이다.

⑩ 이윤(伊尹) : 탕(湯)임금을 도와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을 토벌한 상(商)나라의 창업공신이다. 이름은 지(摯)이고 아형(阿衡)이라고도 불렀다. 원래는 탕임금의 비인 유신씨(有辛氏)의 몸종이었다가 탕임금에 의해 발탁되어 상나라의 국정을 맡았다. 탕임금이 하나라를 멸하고 상왕조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후에 탕임금의 뒤를 이은 외병(外丙)과 중임(中壬) 두 임금을 보좌했다. 중임의 죽자 태갑(太甲)을 왕으로 옹립하여 올바른 정치와 법도에 대해 가르쳤다. 태갑이 선지 3년이 되자 정치를 포학하게 하고 탕왕이 세운 법도를 어지럽히자 이윤은 태갑을 쫓아내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상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3년 후에 태갑이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자 그는 태갑을 맞아들여 왕위에 복위시켰다. 태갑의 뒤를 이은 옥정(沃丁) 임금 때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윤에 의해 쫓겨난 태갑이 7년 후에 돌아와 이윤을 살해했다고도 했다.

⑪ 민자건(閔子騫) : 춘추 시대 말기 노(魯)나라 출신으로 이름은 손(損)이고, 자건은 자다. 공자(孔子)의 제자였으며, 공자보다 15살 연하다. 효성과 덕행으로 유명하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지만 효도를 극진히 하여 부모를 감동시켰다고 했다. 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의기를 지녔었다.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1009) 낭야공(琅邪公)에 추봉(追封)되었다.

⑫ 태상(太常) : 종묘(宗廟)의 의례(儀禮)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 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효(忠孝)스럽고 몸가짐이 조신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⑬ 익(益) : 고대 전설에 나오는 인물로 백익(伯益), 백예(伯翳), 대비(大費)라고도 한다. 순임금으로부터 영(贏) 성을 하사받아 진(秦)과 조(趙) 씨들의 선조가 되었다. 익은 우임금의 치수사업을 도와 고산대천(高山大川)을 안정시켰다. 다시 우임금으로부터 벼농사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명을 받자 벼 씨앗을 지대가 낮은 습지에 뿌렸다. 순임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른 우임금이 익의 부친인 고도(皐陶)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고도가 죽자 우임금은 익에게 고도의 후임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겼다. 우임금이 죽음에 임하여 임금의 자리를 익에게 선양했으나, 익이 우임금을 보좌한 기간이 길지 못하고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제후들은 모두 익을 떠나 우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가서 조현을 드렸다. 우임금을 위한 삼년상이 끝나자 그는 임금의 자리를 계에게 물려주고 기산(箕山)의 남쪽으로 들어가 살았다.

⑭ 우부풍(右扶風) : 우부풍(右扶風)은 중국 전한의 관직으로, 수도 주변 지역인 삼보(三輔)를 관할하는 특수한 지방 장관이다. 삼보는 우부풍을 포함한 경조윤(京兆尹), 좌풍익(左馮翊)이다. 관할지역은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으로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속현은 호현(鄠縣), 함양(咸陽), 순읍(旬邑)이다.

⑮ 집금오(執金吾) : 원래 이름은 중위(中尉)로 진나라 때 설치되었다. 한무제 태초(太初) 원년에 집금오로 이름이 바뀌었고, 봉록은 중이천석이었다. 경사의 순찰, 도적을 예방하고 범죄자 체포 및 옥사 등을 관장했다.

⑯ 설(薛) : 은나라의 시조다. 순임금은 우(禹)를 도와 공을 이룬 설을 순임금은 설을 상(商) 땅을 봉하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내렸다. 설은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 시기에 등용되어 백관을 위해서 일했으므로, 그의 공적은 백관들 사이에 칭송되었고, 백관들은 안정을 얻게 되었다.

⑰ 대홍려(大鴻臚) : 구경의 하나로 귀순한 이민족의 관리를 위해 설치한 관청으로 처음 이름은 전객(典客)이었으나 한경제 때 대행령(大行令)으로 고쳤다가 한무제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 대홍려로 고쳤다.

⑱ 용봉(龍逢) : 관룡봉(關龍逢)이다. 하나라 걸왕(桀王)의 어진 신하로서 걸왕의 황음무도한 짓을 보다 못해 자주 간하다가 걸왕의 분노를 사서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은 살해당했다.

⑲ 종정(宗正)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정부기구로 원래 주나라의 소종백(小宗伯)이 그 효시다. 9경에 속하고 황족과 외척의 명부를 작성하여 관련된 업무를 주관했다. 황족들이 지은 범죄 중 곤형(髡刑) 이상의 형벌은 먼저 종백에게 고한 후에 황제에게 보고하게 하여 일반 사법기관의 관리들은 심문할 수 없도록 했다. 녹봉은 중이천석이고 속관으로는 사공(司空), 령(令), 승(丞), 내관장(內管長) 등이 있었다.

⑳ 경조윤(京兆尹) : 한나라 때 도성인 장안 일대를 관할하는 지방장관으로 한무제 태초 원년 우내사(右內史)를 개칭하여 삼보(三輔)의 하나가 되었다. 12개의 속현이 있었고 장안 이동, 진령 이북의 위수 남쪽을 관할했다. 봉록은 중이천석이고 구경(九卿)과 같은 직급으로 조정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㉑ 좌풍익(左馮翊) : 진나라가 경사의 지방행정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내사(內史)를 한무제가 좌우 내사로 분할하고 다시 한무제 태초 원년인 기원전 104년 좌내사를 좌풍익으로 개칭하고 치소를 지금의 서안시 동북의 장안현(長安縣)에 두고 수장의 직위를 군의 태수와 동급으로 했다. 관할은 1개 군 24현에 지금의 섬서성 위수 이북, 경수(涇水) 이동, 낙수(洛水) 중하류 지구다.

㉒ 노반(魯盤) : 노반(魯班), 공수반(公輸般) 이라고도 한다. 춘추 때 노나라 사람으로 후세 사람들이 목수의 조사(祖師)로 추앙했다. 기원전 450년경 노나라에서 초나라로 건너와 초나라의 병기 제조를 도왔다. 초나라가 노반이 만든 운제를 이용하여 송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천리 길을 10일 동안 밤낮으로 초나라의 도성인 영도(郢都)까지 달려와 노반과 초왕 등을 논쟁으로 설득하여 송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했다.

㉓ 장작감(將作監) : 고대의 관서명으로는 궁실의 건축, 금옥(金玉)과 진주와 비취, 무소뿔과 상아, 귀중한 보배, 정교한 그릇 등을 제작하고 비단 자수 및 각종 기이한 모습의 기구를 제작하는 관서다.

㉔ 중산보(仲山甫) : 서주(西周)의 중흥주 선왕(宣王) 때의 현대부(賢大夫)로,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번(樊)에 봉해져 번중(樊仲) 또는 번중산보(樊仲山父), 번목중(樊穆仲), 번후(樊侯)로도 불린다. 견융과의 전쟁에 패해 많은 병력을 잃은 선왕이 태원(太原)에서 料民한 후에 징집하여 전쟁을 다시 벌이려고 하자 그가 말려 중지하도록 했다. 신백(申伯)과 함께 선왕을 보좌한 어진 재상으로 이름이 있다. 윤길보(尹吉甫)가 일찍이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증민(蒸民)」을 써서 그 덕을 찬미했다.

㉕ 광록대부(光祿大夫) :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다. 광록훈은 진나라가 설치한 낭중령(郎中令)을 한무제가 바꾼 명칭으로 구경(九卿) 중 한 명이다. 궁궐의 숙위(宿衛), 수문(守門), 총관(總管), 궁내사(宮內事) 등의 궁궐 안의 일을 총관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㉖ 신백(申伯) : 주려왕(周厲王)의 비 신후(申后)의 오빠로 주선왕(周宣王)에게는 외숙이 된다. 신백이 주선왕에게 조현을 올리기 위해 경사에 들어와 오래 머무르며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선왕이 신백을 특별히 생각하여 그의 봉지를 넓혀주고 다시 소호(召虎)를 파견하여 사(謝) 땅에 성과 종묘를 세우고 전답의 구획과 경계를 정해 양식을 비축하게 만들었다. 또 왕의 측근에게 명하여 신백의 사인(舍人)들을 사(謝) 땅으로 옮겨가 살게 했다. 이윽고 신백이 봉국에 부임할 때 선왕은 거마와 개규(介圭)를 하사하고 미(郿) 땅까지 나아가 전송했다. 이에 선왕의 대신 윤길보(尹吉甫)가 지어 바친《숭고(崧高)》라는 시가 《시경·대아편》에 전해진다. .

㉗ 태복(太僕) : 주왕조 때 하관(夏官)의 속관이었으며 진한(秦漢) 왕조가 전례를 쫓아 설치했다. 황제의 수레와 말을 관리했으며 질록(秩祿)은 2천 석에 구경(九卿)의 한 명이다.

㉘연릉계자(延陵季子): 춘추 때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인 계찰(季札)의 별호다. 원래 수몽이 오왕의 자리를 형제 중 제일 현능한 계찰에게 물려주려고 했으나 받지 않았다. 이에 수몽이 왕위를 장자인 제번(諸樊)에게 물려주면서 이후로는 오나라의 왕위는 부자상속 대신에 형제상속을 행하여 계찰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하라고 유언하고 죽었다. 제번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그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오왕의 자리는 제번에 이어 이매(夷昧), 여제(餘祭) 등으로 차례로 형제간에 이어졌다. 여제 4년 기원전 544년, 계찰은 여제의 명을 받들어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례(周禮)를 살펴보고 그 뜻을 모두 알고 있어 노나라 사람들의 공대를 받았다. 다시 제(齊), 정(鄭), 당진(唐晉) 등의 나라를 방문하여 당시의 현인들로 이름이 난 안영(晏嬰), 자산(子産), 숙향(叔向) 등의 명현(名賢)들과 교유를 맺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후에 중국 역사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계찰이 예견한 대로 진행되었다. 여제가 죽자 오왕의 자리는 그의 아들 왕료(王僚)가 이었다. 기원전 512년 왕료의 명을 받들어 당진에 사신으로 가 있던 중에, 왕료가 제번의 아들인 공자광(公子光)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자광이 오왕 합려(閤閭)다. 계찰은 귀국하여 합려에게 사신으로 갔다온 일을 복명한 후에 왕료의 묘를 찾아 곡을 올렸다. 후에 공자(孔子)가 친히 계찰이 묻힌 무덤을 찾아가서 『유오연릉계자지묘(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비문을 썼다. 계찰은 공자보다 한 세대 전 사람이다.

㉙ 수형도위(水衡都尉) : 상림원(上林園)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기 위해 한무제가 원정 2년 (기원전 115년)에 처음 설치한 관청이다. 상림원 외에 황실의 원림과 전답, 기물, 화폐의 주조, 선박, 마필, 세수, 창고 등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고대에 산림을 감독하는 관리를 형(衡)이라고 하고 그 주요한 일은 원(苑)과 지(池)였음으로 수형이라고 했다. 질록(秩祿)은 비이천석(比二千石)이고 속관으로는 상림(上林), 균수(均輸), 어수(御羞), 종관(鍾官) 등의 9관(官)과 영승(令丞), 형관(衡官), 도수(都水) 등의 7관(官) 장승(長丞)을 두었다.

㉚ 백리해(白里奚)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21년에 죽은 섬진의 대신을 지낸 중국의 전형적인 대기만성적인 인물이다. 자는 정백(井伯)이고 우(虞)나라 출신이다. 당진국의 순식(荀息)이 펼친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으로 우나라가 멸망하지 백리해는 포로가 되어 진목공에게 시집가는 진헌공(晉獻公)의 딸 목희(穆姬)의 노예가 되어 섬진국에 보내졌다. 도중에 도망친 백리해는 초나라로 들어가 어인(圉人)이라는 하급관리가 되어 소를 길렀다. 후에 진목공이 백리해가 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숫양가죽 5장을 속죄금으로 주고 초나라에서 데려와 재상에 임명했다. 유랑생활할 때 의형제를 맺은 건숙을 목공에게 천거하여 섬진의 문물과 제도를 개혁했다. 백리해와 건숙의 보좌를 받은 진목공은 국세를 획기적으로 신장시켜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㉛ 전속국(典屬國)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제로 한무제 때 도위(都尉), 승(丞), 후(候), 천인(千人) 등의 속관을 두어 기구를 확장했다. 한성제(漢成帝) 원년(전28) 대홍려(大鴻臚)에 합병되었다. 소수민족의 이민이나 귀항(歸降) 및 조공 등의 일을 관장했다. 봉록은 중이천석이고 열경(列卿)의 지위였다.

㉜ 대장추(大長秋) : 진나라는 장행(将行)이라 했고 한나라가 따른 궁중의 환관을 관장하는 부서의 수장이다. 한경제 6년 대장추(大長秋)로 개칭했다. 황후의 뜻을 전달하고 궁중의 일을 관리하였으며, 황후 근시관의 수령으로 통상적으로 환관이 맡았다. 벼슬의 이름은 황후의 경(卿)을 뜻한다.

㉝ 사어(史魚) : 춘추 말 위(衛)나라의 사관(史官)이다. 자는 자어(子魚)이고 사추(史鰌)는 그의 별명이고 이름은 타(佗)다. 위영공 때 축사(祝史)로 임명되어 위나라의 사직신(社稷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했다. 오나라의 계찰(季札)이 위나라를 방문했을 때 사어를 나라를 지탱하는 주석지신(柱石之臣)이라고 찬양했다. 위영공 38년 기원전 497년, 위나라의 공숙자(公叔子)가 잔치를 크게 준비하여 위영공을 접대하자 사어가 경계의 말을 했다. “그대는 부유하고 군주는 가난하니 장차 몸에 화가 달칠 것이다. 비록 부유하지만 거만하지 않은 자세로 신하의 도리를 지켜야 화를 피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번 위영공에게 거백옥(璩伯玉)을 천거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윽고 사어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가족들에게 “내가 자주 거백옥의 현능함을 주군에게 천거했지만 등용되지 못했고 미자하(彌子瑕)의 불초함을 탄핵했지만 물러나게 할 수 없었다. 남의 신하된 몸으로 현능한 사람을 천거하지도, 불초한 사람을 물러가게 하지 못했으니 나는 죽어서 정당(正堂)에서 치상(治喪)을 받을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죽으면 관에 넣지 말고 방안에 그대로 빈소를 만들어라! 나는 그것으로 마땅하다.” 라고 유언했다. 후에 문상을 온 위영공이 그의 시신을 정당에 모시지 않은 까닭을 묻자 상주인 아들은 사어의 유언을 그대로 고했다. 위영공은 크게 깨닫고 거백옥을 등용하여 높은 자리를 주고 미자하를 내친 후에 사어의 시신을 정당으로 모시게 하여 상례를 치르게 하고 자리를 떴다. 이 일이 시간(屍諫)과 사어병직(史魚秉直)이라는 성어의 어원이 되었다. 사어의 충직함을 공자는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충직한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화살처럼 곧았고 도가 없을 때도 화살처럼 곧았도다!”

㉞ 사직(司直) : 관리들을 감찰하는 벼슬이다. 한무제 원수(元狩) 5년(전 118)에 처음 '사직(司直)'이라는 벼슬을 두어 승상부에 속하게 하여 관원들의 불법을 적발하는데 승상을 보좌했다. 이를 승상사직(丞相司直)이라 하여 봉록은 이천석보다 많고 사례교위(司隷校尉)보다 직급이 높았다. 한무제 때 감찰의 직무를 정했는데 어사증승은 사례교위(司隷校尉)를, 사례교위는 승상(丞相)을, 승상은 사직(司直)을, 사직은 각 주의 자사(刺史)를, 자사는 2천석 이하의 질록의 관리들을 규찰하게 했다.

㉟ 거백옥(蘧伯玉) : 춘추 때 위나라 대부로 이름은 원(瑗)이고 자가 백옥(伯玉)이다. 위헌공(衛獻公) 18년 기원전 559년, 헌공이 신하들에게 쫓겨나자 그도 란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위나라에 돌아와 위상공(衛殤公), 위양공(衛襄公)을 모시며 어진 이름을 얻었다. 영공이 서자 사어(史魚)의 추천으로 다시 조정에 나와 영공의 총애를 받았다. 오나라의 계찰(季札)이 중원을 유람하기 위해 위나라에 들려 ‘거백옥이야 말로 군자로다!’라고 말했다. 공자와 교유하였고 논어에 ‘군자로다,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에 나아가고, 도가 없을 때는 거두어 물러나는 구나!(君子再擧伯玉. 邦有道 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라고 했다.

㉟ 공보(孔父) : 춘추 때 송나라의 대부로써 자(子) 성에 공(孔) 씨에 이름은 가(嘉)다. 공자의 6대조로 송목공 때 송나라의 대사마가 되었다. 목공이 병이 들어 위중하게 되었을 때 그를 불러 후계에 대해 상의하자 그는 목공의 아들 공자풍(公子馮)을 세우라고 간했으나 목공은 듣지 않았다. 이윽고 목공은 그의 형 선공(宣公)의 아들 공자 여이(與夷)에게 군위를 물려주었다. 이가 송상공(宋殤公)이다. 공자풍은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에 가서 살았다. 태제 화독(華督)이 공보가의 처를 보고 그 미모에 미혹되어 빼앗을 마음을 품었다. 이윽고 기회가 오자 화독은 공보가와 송상공을 죽이고 공보가의 처를 빼앗았다.

㊱ 첨사(詹事) : 서한이 설치한 첨사의 직무는 황후와 태자궁의 사무를 관장했다. 승(丞), 태자솔갱(太子率更), 가령승(家令丞), 중장추(中長秋)등 속관들을 거느렸다. 따로 장신첨사(長信詹事)를 두어황태후의 궁사를 관장했다. 후에 장신소부(長信少府)로 개칭하였다. 한성제(漢成帝) 홍가(鴻嘉) 3년에 첨사관(詹事官)을 폐하고 그 직무를 대장추에게 속하게 했다.

㊲ 숙손오(叔孫敖) : 춘추 때 초장왕(楚莊王 : 재위 전613-592년) 때의 영윤(令尹)이다. 이름은 위오(蔿敖)이고 숙오(叔敖)는 그의 자(字)이다. 원래 침구(寢丘)에 살았음으로 침윤(寢尹) 혹은 심윤(沈尹)이라고 칭했다. 성왕에게 살해당한 초왕 분모(蚡冒)의 증손자다. 사마(司馬)로 있던 그의 부친 위가(蔿賈)가 장왕 때 반란을 일으킨 투월초(鬪越椒)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는 그의 종족들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성 회빈(淮濱) 동남의 기사(期思)라는 지방으로 이주해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후에 초장왕에 의해 발탁되어 초나라의 영윤이 되었다. 그는 작피(芍陂)에 대규모의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현재 단위로 5500만 평에 달하는 땅을 개간하여 농사가 가능하게 했으며, 다시 지금의 하남성 상성(商城)의 우루(雩婁)에 대규모의 전답을 조성하여 초나라의 농업생산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다시 초장왕이 무게가 가벼운 화폐를 무겁고 큰 것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나 백성들이 사용하기가 불편하다고 호소했다. 손숙오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장왕에게 간하여 왕명을 취소하게 만들었다. 후에 장왕을 따라 종군하여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 동북의 필(邲)에서 당진군을 대파하여 초장왕이 패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기·순리열전(循吏列傳)》에 ‘그가 재상에 세 번이나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한 번도 기뻐하지 않았음은, 그의 재주가 그럴만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가 세 번이나 재상의 직에서 파면되었지만 슬퍼하지 않았음은 자기의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㊳ 자산(子産) : 춘추 때 정나라의 대부 공손교(公孫僑)의 자다.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522년에 죽었다. 공자보다 한 세대 앞선 사람이며 제나라의 안영(晏嬰)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정간공(鄭簡公) 때 상경의 직책을 맡아 나라의 국정을 쇄신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미신을 타파하고, 전답의 경계를 정돈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으며, 안무정부(按畝征賦) 제도를 정립하여 부세의 혁신을 꾀하고, 성문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법률에 따라 다스렸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여 향교(鄕校)를 창시하였다. 정나라는 자산이 등장함으로 해서 과거 7-80년 간 당진과 초나라 사이에 끼어 패권 다툼의 와중에서 끊임 없는 전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공자(孔子)가 자산에 대해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산에게는 군자다운 점이 네 가지가 있었으니 자기가 일을 행할 때는 공손했으며, 윗사람 섬길 때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했으며 백성들을 다스릴 때는 은혜를 베풀고 또한 의를 행하게 하였다.(子謂子産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㊴왕경기(王慶忌) : 춘추 말 오왕 요(遼)의 아들로 힘이 절륜한 용사에 특히 민첩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합려(闔閭)가 오왕 요를 죽이자 외국으로 망명했으나 후에 합려가 보낸 자객 요리(要離)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㊵기문(期門) : 기문랑(期门郎)의 간칭이다. 한나라 때 낭관(郎官)의 일종으로 수렵(狩獵)을 관장했다. 그 장관을 복야(僕射)라고 했는데 후에 기문복야(期门仆射)로 개칭했다. 한평제(漢平帝) 때 호분랑(虎賁郞)으로 호칭을 바꿨다.

㊶ 하육(夏育) : 춘추 때 위(衛)나라 출신의 전설상의 대력사다. 천균(千鈞), 즉 10톤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후에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에게 살해되었다고 했다. 전박(田搏)에게 살해 되었다는 설도 있다.

㊷정관(鼎官) : 정사(鼎士)로 정을 들 수 있는 용사다.

㊸예(羿) : 후예(后羿)다.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전설상의 인물로 유궁씨(有窮氏) 부락의 수령이었다. 영성(贏姓)에 전욱(顓頊)의 후예라고 전해지며 활을 잘 쏘았다. 하나라의 계(啓)가 죽자 그 다섯 아들들이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자 백성들의 뜻이라고 하면서 하나라를 대신 다스리다가 이윽고 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계(啓)의 아들 태강(太康)과 중강(仲康)은 나라 밖으로 쫓겨나 유랑 중 죽었다. 그는 자기의 활 솜씨를 믿고 정사를 신하인 한착(寒浞)에게 맡겼다가 결국은 그에게 살해되었다.

㊹모두(旄頭) : 기병대의 선두에 서는 용사다.

㊺ 송만(宋萬) : 춘추 때 송나라의 용사 남궁장만(南宮長萬) 혹은 남궁만, 송만 등으로 불린다. 송민공(宋湣公) 10년 기원전 680년,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노나라를 공격했다가 노나라에 포로로 잡혔다. 후에 두 나라가 화의를 맺자 석방되어 송나라로 귀국했다. 송민공이 적국의 포로로 잡혔다고 모욕하자 민공을 시해하고 공자 유(游)를 새로운 군주로 세웠다. 송나라의 국인들이 일어나 공자유를 죽이고 민공의 동생 어열(御說)을 군주로 세웠다. 어열이 송환공(宋桓公)이다. 와중에 장만은 노모를 모시고 진(陳)나라로 망명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이 송나라의 요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장만을 사로잡아 송나라로 송환했다. 송나라 사람들이 장만을 죽였다.

㊻ 식도후(式道侯) : 서한의 집금오(執金吾) 속관으로 식도좌후(式道左候)、식도우후(式道右候),식도중후(式道中候)의 총칭이다. 황제의 어가가 출행할 때 길을 청소하는 일을 관장하고 돌아올 때는 휘장을 들고 궁문에 이르러 성문을 여는 임무를 맡았다.

㊼ 공손홍(公孫弘): 대략 기원전 200년에 태어나서 한무제 원수(元狩) 2년인 기원전 121년에 죽은 서한왕조의 대신이다. 자는 계(季) 혹은 차경(次卿)이고 지금의 산동성 수광시(壽光市) 기대진(紀臺鎭)의 치천(菑川)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던 노국(魯國) 설현(薛縣) 인이다. 어렸을 때 설현에서 옥리(獄吏)가 되었으나 후에 죄를 짓고 면직되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호수가에서 돼지를 길러 살았다. 이후로 40여 년 동안 《춘추(春秋)》의 여러 학설을 공부하고 특히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전공했다. 무제 즉위 초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박사(博士)로 초빙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60이 넘은 나이었다. 후에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복명했으나 무제의 뜻을 거슬렸음으로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130년 한무제 원광(元光) 5년 또다시 현량으로 천거되어 상주한 대책 (對策)이 1등으로 채택되어 다시 박사에 제수되었다가 1년이 안 되어 좌내사(左內史) 벼슬로 옮겼다. 위인이 법조문과 관리의 업무에 매우 능숙하고 유가의 학술로 문식(文飾)을 더하는 것을 살피며 황제의 면전에서 직간하거나 조정에서 논쟁을 하지 않고 일을 의논할 때는 언제나 무제의 뜻에 영합했음으로 무제는 그를 신임했다. 원삭 3년 기원전 126년 공손홍은 어사대부가 되었고 원삭 5년에는 설택(薛澤)의 뒤를 이어 승상의 자리에 올라 평진후(平津侯)에 봉해졌다. 한나라가 하층 계급 출신을 재상으로 임명할 때 제후로 봉하는 제도의 첫 번째 수혜자였다. 위인이 몸가짐을 매사에 조심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하에 여겨 겉으로는 관대하고 안으로는 생각이 깊었으나 그와 일단 틈이 벌어진 사람은 겉으로는 좋게 대하고 뒤로는 음모를 꾸며 해치려고 했다. 주보언(主父偃)이 살해당하고 동중서(董仲舒)가 관직에서 폄적당한 일은 모두 공손홍이 꾸민 짓이다. 한무제 원수(元狩) 2년 기원전 121년, 승상에 재직 중에 병으로 죽었다.

㊽ 예관(倪寬) : 전한 천승(千乘) 출신이다. 구양생(歐陽生)에게 『상서』를 배우고, 나중에 공안국(孔安國)의 제자가 되었다. 집안이 가난해 생계를 위해 품팔이를 했으면서도 경전을 가지고 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무제(武帝) 때 사책(射策)으로 정위문학졸사(廷尉文學卒士)가 되어 정위 장탕(張湯)의 신임을 받고 시어사(侍御史)에 올랐다. 무제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 중대부(中大夫)로 좌내사(左內史)로 옮겼다. 재임하는 몇 년 동안 농상(農桑)을 권하고 형벌을 완화했으며, 옥사(獄事)를 순리대로 처리해 관리와 주민들의 신임을 받았다. 또 정국거(鄭國渠) 상류 남안에 육보거(六輔渠)를 설치해 관개 면적을 확대할 것을 건의했다.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하여 인사 고과에서 최하 등급을 받아 면직되게 되었는데, 백성들이 다투어 세금을 바쳐 다시 최고 등급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고, 사마천(司馬遷) 등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했다.

㊾ 동중서(董仲舒) : 광천군(廣川郡)의 사람이다. 『춘추』를 연구하여 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집안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휘장을 높이 쳐놓고 강독했는데, 제자들은 입문한 순서대로 수업했기 때문에 어떤 제자는 스승인 동중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동중서는 3년 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와 정원과 채마밭을 안 볼 정도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출입할 때에도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였고, 예법에 맞지 않으면 행하지 않아서 학생들은 모두 스승의 예로써 그를 존경했다. 무제가 즉위한 뒤에 그는 강도(江都)의 상(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춘추』에 기재된 자연재해와 특이한 현상 변화를 가지고 음양(陰陽)의 도가 바뀌는 원인을 유추했다. 때문에 비를 내리길 청할 경우에는 양기(陽氣)를 가두고 음기(陰氣)를 방출시키고, 비를 그치게 청하는 경우에는 그와 반대의 방법으로 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강도국에도 적용시켜 실행하였는데, 원하는 대로 실행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뒤에 좌천되어 중대부(中大夫)로 떨어졌으나, 관사에 있으면서 『재이지기(災異之記)』를 저술했다.

이 때에 요동(遼東)에 있던 한고조 사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주보언(主父偃)이 동중서를 시기해 그의 책을 절취해 무제에게 바쳤다. 무제는 여러 유생들을 불러서 그 책을 살펴보게 했는데, 그 속에는 재앙 현상을 가지고 조정의 실정을 풍자하고 비방한 내용이 있었다. 동중서의 제자인 여보서(呂步舒)는 자기 스승의 책인 줄 모르고, 이를 어리석은 견해라고 폄하했다. 이리하여 동중서를 법관에게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황제는 조칙을 내려 그를 사면시켜 주었다. 그 후부터 동중서는 결국 재이(災異)에 관한 학설을 감히 다시 강론하지 못했다. 동중서의 사람됨은 청렴하고 정직했다. 그 때 한나라는 사방의 오랑캐들을 중국 밖으로 내쫓고 있었는데, 공손홍은 동중서보다 못했지만 『춘추』를 연구하여 세속에 영합하여 일처리를 잘했기 때문에 공경대신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동중서는 공손홍을 저속한 아첨꾼으로 여겼고, 이에 공손홍도 동중서를 질시했다. 그래서 공손홍은 무제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오직 동중서만이 교서왕(膠西王)의 상(相)이 될 수 있습니다.”

교서왕의 사람됨은 악랄하고 난폭했지만 평소 동중서의 덕행을 듣고 그를 잘 대해 주었다. 그러나 동중서는 교서왕의 상으로 오랫동안 지내면 누명을 쓰고 죄를 얻을 것을 두려워해서 질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동중서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가산을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학문연구와 저술하는 일에 전념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가 건국되어 다섯 세대가 지났지만 오로지 동중서가 『춘추』에 가장 정통했었다는 명성을 얻었다.

㊿ 하후시창(夏侯始昌) : 생몰연대는 미상이고 서한 노국(魯國) 출신으로 한나라 때 저명한 대유학자이고 경학가이다. 원고생(辕固生)으로부터 《제시(齊詩)》를 배워 《상서》와 함께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동중서와 한영(韓嬰)이 죽은 뒤에 한무제에게 중용되었다. 천한(天汉( 4년(기원전 97년), 한무제가 작은 아들 유박(劉髆)을 창읍왕(昌邑王)으로 세우고 시창을 태부로 삼았다. 후에 노년으로 죽었다.

51. 사마상여(司馬相如) : 서한의 문학가다. 자는 장경(長卿)이고 촉군 성도(成都) 출신이다. 원래의 이름은 견자(犬子)였으나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재상 인상여(藺相如)를 흠모하여 이름을 상여로 바꾸었다. 사부(辭賦)에 능하여 한경제 밑에서 무기상시(武騎常侍)를 지내다가 그만두고 양나라로 들어가 문학을 좋아했던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를 모셨다. 양효왕은 한경제의 동모제다. 그러나 양효왕이 기원전 144년에 죽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상여는 곤궁하게 살다가 암공(臨邛)으로 들어와 도정(都亭)이 되어 생계를 해결했다. 이때 우연한 기회에 만난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몰래 성도로 도망쳐 살았다. 탁문군은 청상과부로 임공의 거상 탁왕손(卓王孫)의 딸이다. 이때 상여가 지은《자허부(子虛賦)》라는 문장이 한무제의 눈에 띄어 부름을 받고 황제를 모시는 랑(郞)이 되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사자가 되어 서남(西南)으로 들어가 서남이(西南夷)를 평정했다. 그의 작품은 자허부 외에 《상림부(上林賦)》,《사마상여상서간렵(司馬相如上書諫獵)》,《장문부(長門賦)》,《봉구황(鳳求凰)》등의 문장과 시가 전해진다. 특히 《봉구황(鳳求凰)》은 금곡(琴曲)으로 사랑하는 연인에게 구애할 때 지금까지 애송되고 있다.

52. 주보언(主父偃) : 전한의 제나라 임치 출신으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한무제 원삭(元朔) 3년인 기원전 126년에 죽었다. 처음에 종횡술(縱橫術)을 배우다가 후에 『주역(周易)』과 『춘추(春秋)』 등 《백가(百家)》의 사상을 배웠다. 무제(武帝) 원광(元光) 때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글을 올려 국사에 대해 논했다. 제후왕(諸侯王)의 세력을 깎아 약화시키고 추은(推恩)을 명분으로 삼아 후왕(侯王)의 자제들에게 분봉(分封)하여 후(侯)로 삼으라고 주장하고 삭방군(朔方郡)을 두어 흉노(匈奴)에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무제가 받아들여 낭중(郎中)에 오르고, 한 해 동안 네 번 승진하여 중대부(中大夫)가 되었다.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8) 외직으로 나가 제나라의 상(相)이 되었다. 얼마 후에 제왕과 그의 누이 사이에 일어난 페륜의 일을 알려 제왕이 자살하게 했다. 주보언 역시 족멸되었다.

53. 주매신(朱買臣)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한무제 원봉(元封) 2년인 기원전 109년에 죽었다. 자 옹자(翁子)이고. 지금의 강소성 소주(蘇州)인 회계군(會稽郡) 오현(吳縣) 출신이다. 학문을 좋아하면서도 집안이 가난하여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는 스스로 이별하였다. 군청의 회계장부를 관리하는 상계리(上計吏)에 속하는 급사로 일하던 중 동향인 엄조(嚴助)의 추천으로 무제에게 《춘추(春秋)》를 강설하게 되어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 뒤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서 헤어진 아내와 그의 남편을 불러 도와주었으나 그 아내는 부끄러워 자살했다. 다시 중앙에 돌아와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어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고, 승상장사(丞相長史)가 된 뒤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 장탕(張湯)의 죄상을 파헤쳐 그를 자살로 몰았으나 자신도 무제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

54. 엄조(嚴助)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2년에 죽은 서한의 관리로 사부가(辭賦家)이다. 원래 장(莊) 씨였으나 후세 사람이 한명제(漢明帝)의 이름 장(莊)을 휘(諱)하여 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회계(會稽) 오현(吳縣) 출신이다. 사부가 엄기(嚴忌)의 아들로 한무제 원년 기원전 140년 책문으로 현량(賢良)을 뽑을 때 무제의 눈에 띄어 중대부로 발탁되었다. 조정의 공론을 주도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년 민월(閩越)이 동구(東甌)를 쳐들어가 포위하자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회계의 군사를 발하여 바다로 나아가 동구를 구했다. 6년 남월을 안무하기 위해 남월에 들어가 남월왕을 설득하여 그의 태자를 데리고 와서 황제에게 조현을 올리게 했다. 얼마 후에 회계태수가 되었다가 다시 시중(侍中)이 되어 황제의 측근에서 모시며 부(賦)와 송(頌) 수 십 편을 지었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을 획책했을 때 평소에 맺은 회남왕과의 친교관계 때문에 연좌되어 주살되었다. 한서 예문지에 그가 지은 사부 35편이 전해진다.

55. 급암(汲黯) : 자는 장유(長孺)로 하남성 복양(濮陽) 출신이다. 한무제 때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어 9경(九卿)의 한 사람이 되었다. 승상(丞相) 장탕(張湯)과 어사대부 공손홍(公孫弘) 등을 법률 만능주의자에 천자에게 아첨하는 영교지도(佞巧之徒)라 비난하고, 황로지도(黃老之道) ·무위(無爲)의 정치를 주장했다.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회양태수(淮陽太守)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57. 교창(膠倉) : 료창(聊仓)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하북성 한단(邯鄲)인 서한왕조의 조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금마문의 대조(待詔)로 주매신, 오구수왕, 사마상여, 주보언, 서락, 장안, 동방삭, 매고, 종군, 정총기 등과 함께 한무제의 문학 시종(侍從)이 되어 측근에서 모셨다. 《한서(汉书)·예문지(艺文志)》에 3편의 작품이 종횡가 편에 실려있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58. 종군(終軍) : 전한 제남(濟南) 사람. 자는 자운(子雲)이다. 젊어서 학문을 좋아해 박학했고, 문장을 잘 지었다. 18살 때 박사제자(博士弟子)로 선발되었다. 장안(長安)에 와 국사에 대해 글을 올리니 무제(武帝)가 알자급사중(謁者給事中)에 임명했다. 거듭 승진하여 간대부(諫大夫)에 올랐다.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 20여 살의 나이로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왕이 나라를 들어 복속하도록 설득했다. 다음 해 재상 여가(呂嘉)에게 피살되었다. 《춘추》에 밝았다고 했다. 저서에 《종군》이 있었는데, 현재는 편집본만 전한다.

59. 엄안(嚴安) : 한경제(漢景帝) 전원원년인 기원전 156년에 태어나서 한무제 원봉(元鳳) 2년인 기원전 78년에 죽은 서한의 관료다. 승상사(丞相史)로 재직할 때 상서를 올려 흉노를 공격하는 일은 이롭지 않다고 했다. 무제가 상서를 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 낭중에 임명하고 후에 기마령(騎馬令)까지 올랐다.

60. 서락(徐樂) : 생몰연대는 미상이고 연군(燕郡) 무종(無終) 출신이다. 한경제 초년부터 한무제 말년까지 활약했다. 한무제 원삭(元朔) 원년인기원전 128년 주보언과 엄안 등과 같이 상서를 올려 한무제의 인정을 받아 낭중에 임명되었다. 주보언, 엄안, 사마상여, 오구수왕 등과 함께 한무제를 문학으로 시종하는 측근이 되었다.


9. 객난(客難)

- 손님이 동방삭의 무능을 비난하다. -

황제는 이미 영특한 준재들을 불러서 각 자의 그릇과 재능을 헤아려서 기용했는데 혹시라도 그 능력에 어울리는 자리를 제대로 주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마음을 썼다. 그때 바야흐로 한나라는 밖으로는 흉노와 남월을 정벌하고, 안으로는 제도를 바로 세우느라 한창 일이 많았다. 공손홍(公孫弘) 이하 사마천(司馬遷)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자의 명을 받들어 사방으로 사신으로 나갔는데, 어떤 자는 군의 태수와 제후국의 재상이 됐고, 공경 대신까지 이르렀지만 유독 동방삭만 일찍이 태중대부(太中大夫)까지 오른 경우를 빼고는 뒤에는 항상 낭관이었고, 매고(枚皐)나 곽사인과 함게 황제의 좌우에서 우스갯소리나 할 뿐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삭은 글을 올려 병농(兵農)을 통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계책을 말하고 그 기회에 자신이 큰 벼슬자리를 얻지 못했음으로 자신도 한번 쓰이기를 바란다고 하소연했다. 그런데 그가 사용한 언사가 오로지 상앙(商鞅)과 한비자(韓非子)의 설만 채용했고 말하고자 한 뜻이 제 마음대로이고 게다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제법 많아 수만 자에 달하는 말을 했음에도 결국 채용되지 못했다. 그러자 삭은 가상의 객(客)을 설정해 자신을 비난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렇게 해서 낮은 지위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했다.

『객이 동방삭을 비난하며 말했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만승의 제후를 한번 만나자마자 정승의 자리를 걸머쥐어 그 은덕이 후세에까지 미쳤소. 지금 당신은 대부로서 선왕의 학술을 익혔고, 성인의 외로움을 사모했으며,《시경(詩經)》,《서경(書經)》 및 《백가(百家)》의 글을 암송해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할 지경이오. 죽간과 비단에 글을 써서 입술이 썩고 이가 다 빠질 정도로 가슴속에 담아두어 잠시도 놓치 않으니, 학문을 좋아하고 도를 즐긴 결과가 아주 분명하오. 지혜와 능력이 천하에 짝할 자가 없다고 자부함으로 박학하고 구변 좋고 지혜롭다 할 만하오. 그러나 온힘을 다하고 충성을 바쳐 성스러운 천자를 섬긴 지 수많은 세월이 지났건만, 시랑(侍郞)의 관직을 벗지 못하고 창을 잡고 경비를 서는 지위를 넘지 못하니, 혹시 행실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오? 그리고 친형제가 머물러 살 곳도 없으니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그의 질문에 동방삭 선생은 “허허1” 장탄식하고서 머리를 쳐들고 말했다.

「그 속내는 그대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니 같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나요? 소진과 장의의 시대는 주나라 왕실이 크게 붕괴해 제후들이 조회를 드리지 않고 힘으로 정벌하고 권력을 다투었소. 서로 무력을 동원해 침략해 일개 제후국으로 합병돼 자웅을 가리지 못했소. 이때는 인재를 얻은 자가 강성해지고 인재를 잃은 자는 망하는 때라, 유세하는 선비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들의 몸은 높은 지위를 누리고, 진귀한 보물은 집 안에 가득하며, 밖에는 곡식 창고가 있고, 덕택이 후세에까지 미쳐 자손들이 오래도록 향유했소. 지금은 사정이 다르오. 성스러운 황제의 덕이 흘러서 천하가 두려워하고, 제후들이 복종하며, 사해 밖까지 띠처럼 둘러 사발을 엎어놓은 듯 편안하오. 천하가 전쟁 없이 평형을 이루고 한 집안이 돼 큰 사업을 하기가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쉬운 일이오. 그러니 현자와 바보를 무엇으로 구별하겠소. 하늘의 도리를 준수하고 땅이 이치를 따름으로 제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없소. 따라서 천자가 어루만지면 안정을 찾고 뒤흔들면 괴로움을 겪으며, 높이 올려주면 장군이 되고, 낮춰놓으면 포로가 되며, 높이 천거하면 청운(靑雲) 높이 올라앉고, 억누르면 깊은 연못 밑으로 가라앉소. 사람을 기용하면 범이 되고, 쓰지 않으면 쥐가 되는 법, 있는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려고 해도 재주를 발휘할 마당이 있겠소? 하늘과 땅은 넒고, 백성은 수가 많아 정력을 다해 유세하려고 사방팔방에서 몰려드는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소. 가진 힘을 다해 황제의 덕을 사모해도 옷과 밥을 얻지 못하고 심지어는 대궐 문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도 있소. 소진과 장의가 오늘날 세상에 나처럼 태어났다면 장고(掌故)①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감히 상시랑(常侍郞)을 바라기나 하겠소? 그렇기 때문에 때가 다르고 일이 다르다고 했소. 그렇다고 자신을 수양하지 않을 수야 있겠소? 《시경(詩經)》에는 ‘집안에서 종과 북을 치면 바깥까지 소리가 들리고’②, ‘낮은 못에서 학이 울면 울음소리 하늘에서 들린다.’③라고 했소. 자신을 잘 수양한다면 영화를 얻지 못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소. 강태공은 몸소 인의(仁義)를 실현하다 일흔 두 살이 돼 주나라 문왕, 무왕에게 기용되어 제 주장을 펼치고, 제나라에 봉해져 700년이 지나도록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소. 선비가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행실을 닦아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소. 비유하자면 할미새가 날면서도 우짖는 것과 같지요. 그럼으로 《춘추좌씨전》에서는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미워한다고 겨울을 없애지 않고, 대지는 사람이 험준함을 미워한다고 광대함을 포기하지 않으며, 군자는 소인들이 흉흉히 소란을 피운다고 행실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소. 또 ‘하늘에는 일정한 도수(度數)가 있고 대지에는 일정한 형상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일정한 행실이 있다. 군자는 일정한 행실을 따라 움직이지만 소인은 결과만을 따진다.’라고 했지요. 《시경(詩經)》에서는 또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남의 말을 두려워하랴?’④했소. 그러므로 ‘물이 지극히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극히 깨끗하면 따르는 자가 없다. 관을 쓰고 앞에 수술을 드리우는 것은 밝게 보는 것을 가리기 위함이요, 귓가에 다는 구슬은 똑똑하게 듣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소. 아무리 눈이 밝은 자라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고, 아무리 귀가 밝은 자라도 듣지 못한 것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오. 덕이 큰 사람을 천거할 때 조그마한 과실 정도는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데 그 까닭은 한 사람에게 모든 덕목을 갖추기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굽은 것을 바로 잡는 것도 스스로 터득하게 하고, 관대하고 부드럽게 변하는 것도 스스로 얻게 하며, 제 본성과 재능을 재고 헤아리는 것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오. 성인의 교화란 이처럼 스스로 터득하게 만드는 것이오. 스스로 터득하면 효과가 바르고 넓게 되오. 그런데 오늘날 처사는 따르는 자 없이 쓸쓸하고 초연하게 홀로 살고 있소. 위로는 천하를 마다한 허유(許由)를 찾고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고 미친 척하던 접여(接餘)가 있나 둘러보고 있소. 공을 이루자 도망해버린 범려(范蠡)같은 꾀를 써보려고 하고, 간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오자서의 충성을 바치려고도 합니다.그러나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의를 지키고 있으니 더불어 지낼 것이 당연하지 않소? 그대는 어째서 내 처지를 의심하오? 저 연나라 소왕이 악의(樂毅)를 써서 제나라를 격파하고 진나라가 이사(李斯)를 기용해서 천하를 통일하고 , 한나라 고조께서 역이기(酈食其)를 써서 제나라 왕을 설득해 70여 개의 성을 항복시켰소. 그때 물이흐르듯 유창하게 유세한 말은 잘 받아들여졌고, 손가락에 반지가 끼어있듯이 제후들이 그 말을 따랐기 때문에 시도한 것이 모두 성취되어 공훈이 산악처럼 높게 되었소.반면에 지금은 천하가 안정되고 국가가 평안함으로 이 좋은 시대를 만나 살면서 그대는 내가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이상히 여길 이유가 있겠소? 속어에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며, 풀줄기로 종을 친다.’⑤라고 했소. 그래 가지고야 어떻게 하늘의 법도를 꿰뚫어 보고, 바다의 이치를 알아내며, 종소리를 낼 수 있겠소? 이렇게 본다면, 처사가 출세하는 것을 비유하자면 생쥐가 개를 습격하는 꼴이자, 돼지 새끼가 범을 물어뜯는 격이오. 그 앞에 이르기만 하면 몸이 으스러지고 말 테니 무슨 공을 세우겠소? 이제 어리석고 비루한 식견으로 처사를 비난하는 그대를 내 아무리 곤경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해도 정말 어쩔 수 없소. 그대가 시세 변화를 읽지 못할 뿐만 아니라 큰 도리조차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줄 뿐이오.」


주석

①. 장고(掌故) : 국가의 전고(典故), 고사(古事), 관례(慣例), 또는 전장(典章), 제도(制度)를 관장하는 관직 이름, 또는 그 일을 이르는 말.

② 鍾鼓於宮, 聲聞於外(詩經·小雅·白華)

③ 鶴鳴於九皐, 聲聞於天(詩經·小雅·鶴鳴)

④ 禮義之不愆 何恤人之言. 순자가 인용한 逸詩다.

⑤ 以管窺天, 以蠡測海, 以莛撞鐘


10. 비유선생(非有先生)

동방삭은 또 비유선생(非有先生)의 논쟁을 가설해 지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유선생이 오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조정에 나와서는 옛일을 거론해 군주의 마음을 격려하지도 않고, 조정에서 물러나서는 군주가 잘한 일을 칭송해 세상에 공적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지낸 지 3년이 되지 이를 괴이하게 생각한 오나라 왕이 그에게 물었다.

「과인이 선왕의 공훈을 이어받아 현자의 윗자리에 올라앉은 이래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을 자면서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고 있소. 그렇건만 선생이 표연히 높이 날아와 먼 오나라 땅에 몸을 붙이고 과인을 보좌해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오. 참으로 마음속으로 가상하게 여기고 있소. 한시도 자리에 누워도 편치 못하고 밥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며, 곱고 아름다운 여자를 눈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북과 종으로 연주하는 멋진 음악을 귀로 듣지 못했소. 마음을 비우고 뜻을 다부지게 잡아 고견의 끄트머리라도 듣고자 기다린 지 벌써서 3년이 지났소. 그러나 지금껏 선생은 조정에 나와서는 정사를 보좌하지도 않고 물러나서는 군주의 명예를 드날리지도 않았소. 과인이 생각컨대, 선생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소. 재능을 간직하고 드러내지 않는 것은 충성스럽지 못하고 재능을 드러냈으나 펼치지 못한 것은 군주의 불찰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과인의 불찰이 아닌가 하오.」

이 말에 비유선생이 엎드려서 “예,예!”라고 하자 오나라왕이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다 해보시오. 과인이 정중하게 듣고 채택하겠소.」

그러자 비유선생이 말을 시작했다.

「아,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아,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그렇게 손쉽게 군왕께 말씀드릴 수야 있겠습니까? 눈에도 거슬리고, 귀에도 거슬리고, 비위에도 상하지만 자기 몸에는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있는 반면, 눈으로 보기에도 좋고, 귀에 듣기에도 부드럽고,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인생을 해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명철하고 성스러운 군주가 아니라면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오나라 왕이 듣고 물었다.

「어째서 그렇단 말이오. 중간 정도 이상의 사람이라면 높은 도를 말할 수 있다고 했으니 선생은 한번 말해보시오. 과인이 잘 듣겠소.」

비유선생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옛날 용봉(龍逢)은 걸왕(桀王)에게 온 힘을 다해 간언했고, 왕자 비간(比干)은 주왕(紂王)에게 직언했습니다. 이 두 신하는 온갖 지혜를 짜내어 충성을 바친 분입니다. 제왕의 은덕이 아래 백성에게까지 퍼지지 않아 만백성이 소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임금의 잘못을 직언하고 사악한 행실을 준엄하게 비판해 군주의 영화를 꾀하고 닥쳐올 재앙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다릅니다. 저 두 신하처럼 하면 도리어 군왕의 행실을 비방했다고 하면서 신하로써 예의가 없다고 여깁니다. 결국에는 시비를 분간하지 않기 때문에 제 한 몸을 잃고 허물이 없으면서도 죄를 뒤집어 쓰고, 선친까지 욕보여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손쉽게 군왕께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군왕을 잘 보필하는 신하들은 와해되기 쉬운 반면, 사악하고 아첨하는 신하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마침내 비렴(蜚廉)과 오래(惡來) 같은 자들이 나타납니다. 간사하고 거짓된 일을 잘하는 이 두 사람은 교묘하고 솜씨 좋은 말로 벼슬자리에 잘도 올랐습니다. 곱게 꾸미고 아로새긴 물건으로 은밀하게 임금의 마음을 끌어다가 눈과 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힘써, 구차하게 제 한 몸 보전하기만을 추구했습니다. 지나간 일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면 몸을 죽이고 욕을 다하며, 종묘는 붕괴되고 국가는 폐허가 됩니다. 성현을 내쫓고 죽이며, 참소하는 자들을 가까이한 결과입니다. 《시경(詩經)》에 ‘참소하는 자들은 법도 없어 사방 나라를 어지럽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는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몸을 낮추고 부드러운 얼굴빛과 고운 말씨로 싱글벙글 “예,예”하면서 임금의 정치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차마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점잖게 엄숙하고 바른 자세를 갖추고서 진중한 말로 직간해 위로는 군왕의 사악함을 바로 잡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해치는 자를 없애려고 한다면, 사악한 군주의 마음에 거슬리고 난세의 법에 저촉됩니다. 따라서 천수를 누리려는 선비들을 조정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깊은 산중에 처박힌 채 흙을 쌓아 집을 만들고, 쑥대를 엮어 지게문을 삼아, 그 속에서 거문고를 튕기며 상고적 세상의 풍모를 읊으며 지냅니다. 그 생활도 즐거우니 죽음마저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를 피해서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었으나 후세 사람들은 그들의 어짊을 칭송합니다. 사악한 군왕의 행위는 이처럼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럼으로 손쉽게 군왕꼐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비유선생의 말을 들은 오나라 왕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낯빛을 바꾸며 방석을 치우고 안궤(案几)를 밀쳐놓은 다음 단정히 앉아 경청했다. 선생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접여(接餘)는 세상에서 도피했고 기자(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혼탁한 세상에서 도피해 제 한 몸을 보존했습니다. 그들이 명철하고 현명한 군주를 만나, 한가한 시간에 너그럽고 온화한 기분으로 발분해, 충성을 바칠 기회를 얻어 국가의 안위를 계획하고 정치의 잘잘못을 헤아리도록 했다고 해보십시오. 위로는 군왕의 몸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안녕하게 했을 겁니다. 그렇게 됐다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치세를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목도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윤(伊尹)은 치욕을 무릅쓰고 솥과 도마를 짊어지고 다섯 가지 맛을 잘 조리해 탕 임금을 뵙기를 청했고, 강태공은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해 문왕을 뵐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마음이 합해지고 뜻이 같았기 때문에 신하가 의도한 것을 이루도록 군왕이 도왔고, 신하가 계획한 것을 군왕이 따랐습니다. 정말 군주를 제대로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왕은 깊고 원대하게 사고해 자기 몸을 정의롭게 바로잡고 은헤를 아랫사람에게 널리 베풀었습니다. 어짊과 의로움을 뿌리로 삼아 덕이 있는 자는 포상하고, 어질고 능력있는 자는 녹봉을 주었으며, 사악하고 난리를 일으키는 자는 죽이고, 먼 지역을 제어해 모든 부족을 통일해 풍속을 멋지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왕이 번창하게 된 까닭입니다. 위로는 하늘의 본성을 바꾸지 않고, 아래로는 인륜을 빼앗는 일이 없으면, 천지가 조화를 이루고 먼 나라에서도 사모해 따르게 될 겁니다. 따라서 이들을 성왕(聖王)이라고 부릅니다. 신하가 주어진 직분을 다하자 토지를 나누고 공후(公侯) 작위를 하사해 제후국을 자손까지 전하게 했습니다. 그 이름을 후세까지 드날리게 해 백성들이지금까지 그들을 칭송합니다. 태공과 이윤은 이런 처지가 됐건만 용봉과 비간은 그런 처지가 됐으니 왜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손쉽게 군왕께 말씀드릴 수 있겠냐고 말을 한 것입니다.」

오나라와 왕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일굴을 들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했다.

「아아! 내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간당간당해 대가 끊어질까 위태롭구나!」

왕은 명당(明堂)에서 정사를 정돈하고, 군신 간의 질서를 바로잡고, 현명한 재사를 등용하고, 덕과 은혜를 베풀고, 인의를 시행하고, 공을 세운자를 포상했다. 몸소 검소하게 절제하고, 후궁의 경비를 삭감하고, 수레와 말에 드는 비용을 줄이고, 음탕한 음악을 내치고, 아첨꾼을 멀리하고, 음식비용을 덜고, 사치품을 없앴다. 궁궐과 건물을 작게 짓고, 궁궐 정원을 부수고, 인공 호수를 다시 메워 생업이 없는 빈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궁궐의 창고를 열러 빈민을 구휼하고, 노인을 위문하고, 과부와 고아를 보살피고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경감했다. 이렇게 3년을 시행하자 온 나라가 평안하고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만물이 다 제 위치를 찾았다. 나라에는 재해의 변괴가 없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기색이 사라졌다. 집안은 넉넉하고 사람은 풍족했으며, 쌓아놓은 곡식이 풍부해 감옥은 텅텅 비었다. 뒤이어 봉황이 날아오고, 교외에 기린이 나타났으며, 감로수가 하늘에서 내리고 붉은 풀의 싹이 텄다. 나중에는 풍속이 다른 먼 나라 사람들까지 오나라의 풍속과 의로움을 사모해 제각기 제 직분을 지키며 찾아와 공물을 바쳤다. 치란(治亂)의 길과 존망(存亡)의 단서는 이렇듯이 쉽게 드러나건만 군주의 자리에 있는 자는 시행하려고 하지 않고, 신하는 어리석어 틀렸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경(詩經)》에서 “왕국에 선비들이 많으니 주나라의 기둥이로다! 많고 많은 선비들이여! 그들 덕분에 문왕께서 평안하셨도다!”라고 읊었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 노래한 시가다.』


동방삭의 문장은 위에 보인 두 편이 가장 좋다. 그 나머지로《봉태산(封泰山)》、《책화씨벽(責和氏璧)》과《황태자생매(皇太子生禖)》、《병풍(屏風)》、《전상백주(殿上柏柱)》、《평락관부렵(平樂觀賦獵)》,팔언(八言)、칠언(七言) 상하(上下),《종공손홍차거(從公孫弘借車)》등의 작품이 있는데 유향(劉向)이기록한 동방삭의 글은 이것이 전부다. 세상에서 동방삭이 한 일이라고 전하는 여타의 사실은 모두 그릇된 것이다.


12. 찬(贊)

찬하여 말했다.

『유향(劉向)이 말하기를 젊을 때 동방삭과 같은 시대를 살아 당시 일을 잘 아는 어르신들과 뛰어난 분들에게 자주 물었는데, 그들은 다 ‘동방삭은 해학을 말하고 논변에 능했으나 자신만의 주장을 가지지는 못했고, 일반인들에게 이런저런 주장을 펼치기 좋아했기에 후세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진 것이다.’라고 했다. 양웅(楊雄)도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삭의 말은 스승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고 그의 행실은 도덕적 순수함이 없어 남겨진 풍모나 글이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삭의 이름이 실상보다 넘치게 된 까닭은 그가 해학에 뛰어나고 다방변에 재능을 가져 한가지 행위로 이름 붙일 수 없는 데에 있다. 그가 사람과 상대하며 펼치는 해학을 보면 광대를 닮았고 무궁무진하게 솟아나는 지혜를 보면 한 사람의 성철인 듯 하고 바른 말로 직간할 때는 올곧은 사직지신을 닮았으며, 스스로 자신의 덕을 더렵히는 행위는 은자와 비슷하다.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잘못되었고 유하혜(柳下惠)②는 옳다고 여긴 동방삭은 보신(保身)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자식들에게 경계를 주면서 말했다.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는 졸렬하고 주나라의 주하사(柱下史)③가 된 노자는 노련하다.

배불리 먹고 거드름 피우기 위해서는

농사를 버리고 벼슬을 해야지

조정에 숨어서 세상을 즐기며 살았고

시류를 거스르다 회를 자초하지 말라!

飽食安步(포식안보)

以仕易農(이사역농)

依隱玩世(의은완세)

詭及不逢(궤급불봉)」


이것으로 보아 동방삭은 골계하는 자의 우두머리라고 말할 수 있다. 동방삭의 해학(諧謔), 예언(豫言), 사복(射覆) 따위는 경박한 일이었지만 대중들에게 유행해 어린애와 목동들이 현혹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후세의 호사가들이 기이한 말과 괴상한 이야기를 가져다가 동방삭에게 결부시켰기 때문에 상세하게 기록했다.』


주석

①양웅(楊雄)의 《法言·연건(淵蹇)》편에 나오는 말이다. 應諧似優,不窮似哲,正諫似直,穢德似隱

②유하혜(柳下惠) : 춘추 초기 노나라의 대부로써 전(展) 성에 이름은 획(獲)이다. 식읍(食邑)이 유하(柳下)이고 시호(諡號)를 혜(惠)라고 했기 때문에 유하혜라고 부르게 되었다. 유하는 지금의 산동성 평음현(平阴縣) 효직진(孝直镇) 전와촌(展洼村)이다. 노나라에서 형옥(刑獄)의 일을 관장하는 사사(士師) 벼슬을 살았다. 노희공(魯僖公) 26년 기원전 634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그는 종제 전희(展喜)에게 계책을 일러 제나라 진영으로 보내 제군을 물러나게 했다. 변설에 능하고 예절에 밝았음으로 이름이 높아 공자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또한 직도(直道)를 지켜 임금을 섬기고 진정한 화(和)를 이룬 사람이라고 해서 맹자에 의해 이윤(伊尹), 백이(伯夷), 공자와 함께 4대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춘추 시대 대도(大盜)이며 악인(惡人)의 대명사로 쓰이는 도척(盜蹠)은 그의 동생이다. 이에 형제간에 현인과 대악인이 있을 때 이들에 비유하였다. 《논어·미자(微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유하혜는 사사(士師)였는데, 세 차례나 쫓겨났다. 사람들이 보고 말하기를 ‘다른 데로 가 버릴 수 없었던가요?’ 하고 말하자, 그는 ‘곧은 도리로 남을 섬기자면 어디에 간들 세 차례는 쫓겨나지 않겠소? 남을 섬길려면 정도(正道)를 굽혀야 하는데 하필이면 부모의 나라를 떠나야 한단 말이오?’ (柳下惠爲士師, 三黜. 人曰子未可以去乎. 曰直道而事人 焉往而不三黜 枉道而事人 何必去父母之邦)] 또한 《맹자·공손축(公孫醜)》에 백이, 이윤, 공자와 함께 그의 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③주하사(柱下史) : 주(周)와 진(秦) 왕조 때의 어사(御史)의 별칭이다. 직무가 언제나 궁전의 기둥 밑에서 시립하여 직무를 봤기 때문에 붙은 직명이다. 주나라 제도에는 어사는 전당의 기둥 사이에 시립하여 직무를 본다고 해서 주어사(柱御史)라고 했으며 진제에서는 시어사(侍御史)라고 칭했다. 노자가 주나라의 주하사로 있으면서 도서를 관장했다.


《동방삭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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