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126 
· 어제 :  631 
· 최대 :  2,389 
· 전체 :  1,266,524 
 
  2012-08-27 12:36:356344 
유협열전(游俠列傳)64
운영자
 유협.jpg  (83.4K)   download : 52
일반

열전64. 游俠(유협)

한비자가 말했다.

「유자(儒者)는 글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고 협객은 무로써 법을 범한다.」

그래서 두 부류를 모두 비판했음에도 세상에서 칭송받은 학자들은 많았다고 했다. 술법으로써 재상이나 경대부가 되어 당시의 황제를 보좌하여 공명을 역사에 드러나게 하는 일은 원래 말할 필요가 없다. 계차(季次)①나 원헌(原憲)②과 같은 사람들은 가난한 유자의 신분으로 독서를 하며 홀로 고상한 군자의 덕성을 품고 도의에 맞지 않은 당시의 세태에 영합하지 않으려고 했음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그래서 계차와 원헌은 평생을 쑥대로 엮은 집에서 갈포를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빈곤하게 살았다. 그들의 죽고 4백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제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뜻을 연마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지금의 유협(游俠)들은 그 행동이 비록 정의에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들이 뱉는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그들의 행동에는 언제나 과감하여 그들이 일단 승낙하면 반드시 성의를 다해 지켰다. 또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남의 고난에 뛰어들 때는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여겼다. 그 밖에도 그들에게는 칭송할 점이 많았다. 위급하게 되어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바는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태사공이 말한다.

「옛날에 우순(虞舜)께서는 우물과 곳간에서 횡액을 당할뻔 했고 이윤(伊尹)은 솥과 도마를 지고 다녔으며 부열(傅說)③은 부험(傅險)에서 숨어 지냈고 강태공 여상(呂尙)은 극진(棘津)에서 곤궁한 처지에 빠졌다. 또한 관중(管仲)은 감옥에 갇혔으며 백리해(百里奚)는 소에 꼴을 먹였고 공자는 광(匡)에서 두려움에 떨었고 진(陳)과 채(蔡)의 땅에서는 끼니를 제대로 연명하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학사로써 이른바 도(道)와 인(仁)을 갖추었음에도 그런 재앙을 만났거늘 하물며 보통사람으로써 난세의 마지막 흐름을 건너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그들이 당하는 재난을 어찌 다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신분이 비천한 자가 한 말도 있다.

「어떻게 인의를 알겠는가? 이익을 누리게 할 수 있는 자가 덕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백이는 주나라를 추하게 여겨 수양산에서 굶어죽었지만 그렇다고 주문왕과 주무왕은 그 일로 인해 성왕으로써 폄하되지 않았고 도척(盜跖)과 장교(莊蹻)는 비록 포악하고 잔인했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들이 의리가 있다고 끝없이 칭송했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갈고리를 훔친자는 사형을 받지만 나라를 훔친자는 제후가 되고 제후의 집에는 인의가 있다.」

이 말은 결고 허언이 아니다. 지금 학문에 억매이거나 하찮은 의를 가슴에 품은 체 오래 동안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방법이 어찌 천박한 생각으로 세속에 영합하여 부침하는 세태의 흐름을 타고 영화와 명성을 얻는 일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포의의 평민 신분이지만 취하고 베푸는 행위가 도의에 부합하고 일단 승낙한 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미덕을 중하게 여기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이 행힌 의는 천리 밖까지 칭송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의 비난을 개의치 않는다. 이것이 그들의 장점이지만 그냥 할 수 있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곤궁한 처지에 놓인 선비들은 그들에게 의지하니 어찌 그들이 현능한 호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민간의 의협들을 권세와 역량으로 당세에 공로를 세운 계차와 원헌같은 학자들과 비교한다면 이들을 같이 논할 수는 없으나 신의로 이룬 그들의 공로를 본다면 협객의 의리도 또한 결코 작다고만 할 수 없다. 옛날에 활약했던 포의의 협객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근대에 들어 연릉(延陵)의 계자(季子)④, 맹상군(孟嘗君), 춘신군(春申君), 평원군(平原君), 신릉군(信陵君)과 같은 무리가 있었지만 모두 왕족들이거나 귀족들로써 봉토와 경상(卿相)의 직위로 이룬 부를 가지고 천하의 현능한 자를 초빙하여 그 명성을 제후들 사이에 드러냈다. 그들 또한 현능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바람의 부는 방향으로 고함을 치면 그 소리가 더욱 크고 낭랑하게 될뿐만 아니라 바람의 격렬한 기세로 인해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들리게 되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시정의 협객들은 오직 자기들의 몸가짐을 수양하여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아 그 명성을 온 천하에 높였으니 어찌 그들을 현능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유가나 묵가(墨家)들은 이들을 배척하여 그들의 문헌에는 올리지 않았다. 진나라 이전에는 필부 출신의 협객은 모두 인멸되어 볼 수 없어 나로써는 심히 한스러운 일이다. 한나라가 흥기하자 주가(硃家)、전중(田仲)、왕공(王公)、극맹(劇孟)、곽해(郭解)와 같은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때때로 당시의 법망에 저촉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의가 있었고 청렴했으며 겸손하고 남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음으로 칭송할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헛된 행동으로 명성을 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도 그들을 까닭없이 추종했다고 할 수 없다. 붕당과 강성한 문벌이 세력을 이루어 한패가 되어 축재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리고 폭력으로 외롭고 약한 사람들 괴롭히고 욕을 보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쾌락을 즐기는 일을 유협들은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함에도 세상의 풍속은 주가나 곽해 등을 난폭한 깡패들과 같은 부류로 여기고 비웃음의 대상으로 여기기만 할뿐 잘 살펴보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노나라의 주가는 한고조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유학을 공부할 때 주가는 협객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숨겨서 목숨을 구한 호걸들이 백 수십 명이나 되며 나머지 일반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의 일을 자랑하지 않았고 덕행을 숨겼다. 오히려 덕을 베풀었던 사람들을 만나기를 두려워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도울 때 그들의 신분을 따지지 않고 먼저 가난하고 천한 사람부터 택했다. 집에는 재산이 남아나지 않았고 의복은 헤져 무늬가 분명하지 않았으며 식사할 때 반찬은 두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으며 탈것도 소달구지가 고작이었다. 그는 전적으로 남의 위급한 일을 달려가 도왔고 자신의 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일찍이 위험에 빠진 장군 계포(季布)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윽고 계포가 귀한 신분이 되었으나 그는 죽을 때까지 계포를 보지 않았다. 함곡관 이동 사람들 중 목을 길게 빼고 그와 친교를 맺으려고 원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나라의 전중(田仲)도 협객으로 이름이 높았다. 검술을 좋아하고 주가를 아버지처럼 모셨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품행은 주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전중이 죽은 뒤에 낙양에는 극맹(劇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나라 사람들은 장사에 재능이 뛰어났으나 극맹은 임협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오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는 태위가 되어 전거(傳車)⑤를 타고 하남에 달려가 극맹을 얻고는 기뻐하며 말했다.

「대사를 일으켰으면서도 극맹을 구하지 않은 오초의 행동을 보니 그들의 무능함을 알겠도다!」

천하에 난리를 평정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재상으로써 극맹을 얻었다는 사실은 적국 하나를 얻은 일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극맹은 대체로 주가와 같은 인물로 노름을 좋아했는데 이는 전부 젊은이들의 놀이였다. 극맹의 모친이 죽자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서 몰려든 자만해도 천 승이 넘었다. 이윽고 극맹이 죽었으나 집에는 그가 남긴 재산이라고는 십금 정도에 불과했다.

부리(符離) 사람 왕맹(王孟) 역시 강수와 회수 사이에 협객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이때 제남(濟南)의 간씨(瞷氏)、진(陳)의 주용(周庸) 역시 호협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경제가 듣고 사람을 보내 그들의 무리를 모조리 주살했다. 그 후에 대군(代郡)의 백씨 일족, 양(梁)나라의 한무벽(韓無辟)、양책(陽翟)의 설형(薛兄)、섬(陝)의 한유(韓孺)) 등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곽해(郭解)는 지읍(軹邑) 출신으로 자는 옹백(翁伯)이다. 관상을 잘봤던 허부(許負)⑥의 외손이다. 곽해의 아버지는 협객이라는 이유로 효문제 때 살해되었다. 곽해는 몸은 단신이지만 총명하고 용감했으나 술은 마시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심성이 잔인하고 표독하여 마음먹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개하여 직접 사람을 살해했는데 그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도망자를 숨겨주고 법을 어기고 강도질을 했으며, 일이 없을 때는 화폐를 위조하고 분묘를 도굴했는데 이러한 일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체포될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천행으로 도망치거나 사면될 수 있었다. 세월과 함께 나이가 든 곽해는 뜻을 꺾고 근신하여 덕으로써 원한을 해결하고 후하게 베풀고서도 그 대가는 적게 바랐다. 그는 스스로 즐겨하며 의협적인 행동을 더욱 열심히 했다. 남의 목숨을 구해주고도 그 공을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잔인하고 표독한 마음은 마음속에 여전히 있어 분노가 갑자기 일어나면 화난 눈을 부릅떴다. 그의 행동을 앙모했던 주위의 젊은이들은 재빨리 그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었으나 그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곽해의 누이 아들이 그의 위세를 등에 업고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다가 상대방에게 술잔을 강제로 비우게 했다. 그가 주량이 약해 감당하지 못하고 마시려고 하지 않았으나 술잔에 계속 술을 따라 마시게 했다. 격노한 그 사람이 칼로 곽해의 조카를 살해하고 도망쳤다. 곽해의 누이가 노하여 말했다.

「천하에 의리로는 옹백이라고 하는데 남이 자신의 조카를 죽였는데 그 놈을 잡을 수가 없구나!」

곽해의 누이가 아들의 장례를 치르지 않고 시신을 길거리에 놓아 둠으로써 곽해를 욕보이려고 했다. 곽해가 사람을 시켜 살인자가 있는 곳을 알아내게 했다. 이에 살인자가 궁지에 몰리자 스스로 찾아와 곽해에게 사실을 고했다. 곽해가 듣고 말했다.

「그대가 조카를 죽인 마땅한 이유가 있었소. 내 조카가 잘못했소.」

그 살인자는 보내준 곽해는 자신의 조카에게 죄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여러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곽해의 의를 칭송하며 더욱 그를 따랐다. 곽해가 출입할 때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혼자서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오만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곽해가 사람을 시켜 그의 이름을 물어보게 했다. 문객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곽해가 말했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덕을 쌓지 못해서이기 때문이요. 그가 무슨 죄가 있겠소?」

그리고 몰래 마을의 위사(尉史)를 찾아가 당부했다.

「그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그가 병역을 교체할 때 면하게 해주시오.」

그 후로 매 번 군역을 바꿀 때마다 수년 동안 관리는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러자 이를 이상하게 여겨 연유를 알아본 그 사람은 곽해의 부탁으로 그리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리를 벌리고 거만하게 앉아서 곽해를 대했던 사람은 육단(肉袒)으로 찾아와 사죄했다. 젊은이들이 듣고 곽해의 의협심을 더욱 앙모했다. 낙양에 서로 원수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읍내의 현인이나 호걸들 십여 명이 그들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결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문객이 곽해를 찾아가 그 일을 고했다. 곽해가 밤중에 원수진 사람들이 집을 찾아가 만났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굽혀 곽해의 말을 듣고 화해하기로 했다. 그러자 곽해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에 낙양의 여러 호걸들이 당신들 사이를 중재하려고 여러 번 노력했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다행히 그대들이 나의 말을 듣고 화해를 한다고는 하지만 다른 곳에서 온 외지인이 이곳 읍내에서 사는 호걸들의 권리를 빼앗을 수 있겠소?」

그리고는 밤중에 그곳을 떠나 사람들이 자기가 왔다간 사실을 모르게 하면서 말했다.

「당분간 내 말을 따르지 마시고 내가 간 다음 낙양의 호걸들이 중재하러 올 때 그들의 말을 따르시오.」

곽해는 평상시 행동을 겸손하게 하여 감히 수레를 타고 현청에 들어선 적이 없었다. 가까이 있는 군국에 가서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처리할 때는 일을 성사시킬 수 있으면 가서 일을 반드시 성사시키고, 성사시킬 수 없으면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이해시킨 다음에서야 비로소 술과 음식을 먹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그를 엄중하게 대했고 서로 다투어 쓰이기를 다투었다. 밤이 되면 읍내의 젊은이들과 부근의 현인들이나 호걸들이 방문했는데 그들이 타고 온 수레는 열 대가 넘었다. 이는 곽해의 문객을 데려가 자기가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한나라 조정이 천하의 호걸들과 부자들을 무릉(茂陵)으로 옮겨 살게 했을 때 곽해의 집은 가난했음으로 재산이 등급에 미치지 못했으나 그의 명성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를 이주시키지 않았다가 혹시나 처벌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관리들은 감히 그를 이주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군 위청(衛靑)이 그를 위해 황제게 상주했다.

「곽해는 집이 가난하여 무릉으로 옮겨가서 살 수 있는 등급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포의의 인물임에도 장군이 그를 위해 말할 정도라면 그의 집은 가난하지 않소.」

그래서 곽해는 집을 무릉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런 곽해를 전송하기 위해 모금한 돈만도 천여 만 전에 달했다. 현의 연(掾)으로 근무하던 지읍(軹邑) 사람 양계주(楊季主)의 아들은 곽해를 이주시켜야 한다고 거론한 자였다. 곽해의 조카가 양계주의 아들 목을 베었다. 이 일로 인해 곽씨와 양씨는 서로 원수가 되었다.

곽해가 관중으로 들어가자 관중의 현사와 호걸들은 그를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그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그와 교제하려고 했다. 곽해의 몸집은 작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출입할 때 말을 탄 적이 없었다. 곽해를 따르던 사람들이 다시 양계주마저 살해하자 양계주의 집안에서 상서를 올렸다. 그러자 다시 상서한 사람을 대궐 안에서 살해하고 말았다. 황제가 듣고 관리를 시켜 곽해를 체포하라고 명했다. 곽해는 도망쳐서 그의 모친과 아내를 하양(夏陽)에 두고 자신은 임진(臨晉)으로 갔다. 임진의 적소공(籍少公)은 평소에 곽해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곽해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고 자기를 관문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적소공은 곽해를 관문 밖으로 나가해 주었다. 곽해는 전전하여 태원(太原)으로 들어갔다. 곽해는 자기가 지나오면서 묵은 집 주인에게 자기의 행선지를 언제나 말해 주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의 뒤를 추적하여 이윽고 적소공의 집에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적소공이 자살한 후 였음으로 곽해의 종족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곽해는 체포되었다.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와 살인사건은 모두 철저하게 추궁되어 밝혀졌으나 그것들은 모두 사면령으로 용서 받았음으로 그를 처벌할 수 없었다. 지읍에 유생이 곽해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 상부에서 파견된 관리와 마주 앉았는데 손님 중 한 사람이 곽해의 명성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유생이 말했다.

「곽해는 함부로 간악한 범죄를 저질러 법을 범한 죄인일 뿐이오. 어찌 현사라고 말하시오!」

곽해의 문객이 그 소리를 전해 듣고 그 유생을 죽여버리고 그의 혀를 잘랐다. 관리가 그 일을 곽해에게 추궁했으나 곽해는 유생을 살해한 자를 알 수 없었고 살인자도 역시 어디도 숨어버려 찾을 수 없어 결국 그가 누구인지 밝혀낼 수 없었다. 관리들이 곽해는 죄가 없다고 상주했다. 어사대부 공손홍(公孫弘)이 관리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말했다.

「곽해는 포의의 신분이면서 협객이라는 이름으로 권세를 부려 조그마한 원한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곽해가 그 살인자가 누이인지는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 죄는 곽해가 직접 살인한 죄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대역무도한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곽해의 일족은 멸족되고 말았다.

곽해 이후로 협객이라고 칭한 자는 매우 많았으나 모두 오만하여 진정으로 협객이라고 여길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관중 지방의 장안(長安)에 사는 번중자(樊仲子),괴리(槐里)의 조왕손(趙王孫),장릉(長陵)의 고공자(高公子),서하(西河)의 곽공중(郭公仲),태원(太原)의 로공유(鹵公孺),임회(臨淮) 아장경(兒長卿),동양(東陽) 전군유(田君孺) 등은 비록 협객이었지만 신중하고 겸손한 군자의 풍격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장안의 북쪽 지방의 요씨(姚氏),서쪽 지방의 여러 두씨(杜氏), 남쪽 지방의 구경(仇景),동쪽 지방의 조타(趙他)와 우공자(羽公子),남양(南陽)의 조조(趙調) 등의 무리들은 도척(盜蹠)과 같은 자들로써 단지 민간에 섞여 살았을 뿐이다. 어찌 거론할 가치가 있겠는가? 이들은 옛날 주가(硃家)와 같은 인물들이 수치스럽게 여기던 자들이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 내가 곽해를 만나봤는데 그의 풍체는 중인에도 미치지 못했고 말하는 솜씨도 뛰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찬하의 현명한 사람이나 불초한 사람이나 그를 알고 있던 사람이나 모르고 있던 사람이나 모두 그의 명성을 흠모했다. 자칭 협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들먹였다. 속담에 이르기를 ‘ 영예와 명성을 흠모하는 사람이 어찌 다하는 때가 있으랴?’ 했으니 곽해의 명성은 희극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

< 유협열전 끝 >

주석

①계차(季次) : 춘추 때 제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 공석애(公晳愛)의 자다.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천하 사람들이 도를 행해지 않음에도 많은 선비들은 대부들의 가신이 되고 도성에서 벼슬을 살고 있는데 오직 계차만은 지조를 지키며 벼슬하지 않았다('天下无行,多为家臣,仕于都;唯季次未尝仕)’라는 기사가 있다.

②원헌(原憲) : 공자의 제자 자사(子思)의 자다.

부열(傅說) : 은(殷)나라의 무정제(武丁帝)가 즉위하여 쇠락해진 은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하였으나 자신을 보좌해줄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冢宰)에게 맡겨놓고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살폈다. 무정제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그 이름을 열(說)이라고 했다. 무정제는 꿈에서 본 열의 모습을 대신과 관리들 속에서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백관들에게 나라 밖에서 찾아보게 했는데 드디어 부험(傅險)이란 곳에서 열을 찾아냈다. 열은 죄를 짓고 노역에 끌려 나가 길을 닦고 있었다. 무정제가 보고 “바로 이 사람이 내가 꿈속에서 본 열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열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과연 성인이었음으로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마침내 은나라는 훌륭히 다스려졌다. 무정제는 열을 부험이라는 곳에서 찾았다하여 그를 부열(傅說)이라고 불렀다.

④연릉계자(延陵季子) ; 춘추말 오월쟁패시 오나라의 왕자 계찰(季札)을 말한다. 그의 봉지가 지금의 강소성 태호 북쪽의 상주시(常州市)에 있었던 연릉이라는 공에 봉해졌기 때문에 붙은 칭호다.

⑤전거(傳車) : 나라에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 이용하는 관용 역마차다.

⑥허부(許負)/ 서한 초기 때의 유명한 관상가다.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인 제원현(濟原縣)인 지읍(軹邑), 혹은 하남성 온현(溫縣)인 지읍(軹邑) 출신이라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초한전쟁 때 일찍이 위왕(魏王) 표(豹)의 비빈(妃嬪) 박씨(薄氏)의 관상을 보고 천자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표가 듣고 매우 기뻐하며 한나라를 배신하고 중립으로 돌아서서 초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후에 위표는 한신에 사로잡혀 한나라로 돌아왔다가 형양(滎陽)의 싸움에서 그의 배신을 염려한 주가(周苛)에 의해 살해되고 그의 비빈 박씨는 한고조 유방의 후비가 되어 한문제 유항을 낳았다. 한문제 때 다시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의 관상을 보고 굶어죽을 상이라고 말한 결과 주아부 역시 한경제 때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굶어죽었다.

목록
8616
[일반] 외전5. 섭정(聶政)

學琴報仇(학금보구) 전국 때 섭정(聶政)의 부친은 한나라 왕을 위해 칼을 만들다가 기한을 넘기도록 만들지 못해 한왕의 명령에 의해 살해 되
운영자 13-01-13
[일반] 외전4. 자산(子産) 공손교(公孫僑)

외전 4. 자산(子産) 정간공(鄭簡公) 원년 기원전 565년 여러 공자들이 모의하여 자사(子駟)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자사가 미리 알고 무리를 모아
운영자 12-12-17
[일반] 외전2. 보임안서(報任安書)

보임안서(報任安書) 사마천이 자신의 친구인 임안(字:少卿)에게 보낸 유명한 서신이다. 이 서신은 『한서(漢書)』『사마천전(司馬遷傳)』 및 『문선
운영자 12-12-16
[일반] 외전1. 순우곤(荀于髡)

순우곤(荀于髡)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아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배웠다. 그가 유세하거나 간
운영자 12-12-05
[일반] 화식열전(貨殖列傳)69

열전69. 화식(貨殖) 노자가 말했다. 「나라의 지극한 치세는 이웃한 마을이 서로 바라보면서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서로 들으며, 백성들
운영자 12-11-08
[일반] 귀책열전(龜策列傳)68

열전68. 귀책(龜策) 태사공이 말한다. 옛날부터 성왕이 천명(天命)을 받아 나라를 세워 왕업을 일으키려 할 때마다, 복서(卜筮)1)를 소중히
운영자 12-09-10
[일반] 일자열전(日者列傳)67

열전68. 일자(日者)① 옛날부터 천명을 받은 자만이 왕이 되었지만 왕자가 일어날 때 복서(卜筮)로써 천명을 판단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와
운영자 12-09-06
[일반] 골계열전(滑稽列傳)66

열전66. 滑稽(골계) 淳于髡•優孟•優旃(순우곤우맹우전) 공자가 말했다. 「나라를 운용하기 위해 육경을 공부하는 목
운영자 12-08-27
[일반] 영행열전(佞幸列傳)65

열전65. 영행(佞幸) 속담에 “ 힘써 농사짓는 것이 해를 이어 풍년이 든 것 보다는 못하고 관리가 영달하는 데는 직무에 충실한 것이 윗사
운영자 12-08-27
[일반] 유협열전(游俠列傳)64

열전64. 游俠(유협) 한비자가 말했다. 「유자(儒者)는 글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고 협객은 무로써 법을 범한다.」 그래서 두 부류를 모두 비판
운영자 12-08-27
[일반] 대원열전(大宛列傳)63

열전63. 대원(大宛)1) 대원의 사적은 장건(張騫)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장건은 한중(漢中) 출신이다. 건원(建元) 연간에 랑(郞)이 되었다. 그때 천
운영자 12-08-27
[일반] 혹리열전(酷吏列傳)62

열전62. 혹리(酷吏) 1341. 民倍本多巧(민배본다교), 백성들이 본분을 잃고 간사스럽게 되며 1342. 奸軌弄法(간궤농법), 간교함을 일삼아
운영자 10-10-05
[일반] 유림열전(儒林列傳)61

1336. 自孔子卒(자공자졸), 공자가 죽은 이래 1337. 京師莫崇庠序(경사막숭상서), 도성의 사람들은 아무도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운영자 10-10-05
[일반] 급정열전(汲.鄭列傳)60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운영자 10-10-04
[일반] 순리열전(循吏列傳)59

열전59 循吏(순리) 1324. 奉法循理之吏(봉법둔리지리),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1325. 不伐功矜能(불벌공긍능), 자기들
운영자 10-10-04
1 [2][3][4][5][6][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