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617 
· 어제 :  698 
· 최대 :  2,389 
· 전체 :  1,223,418 
 
  2012-11-08 03:48:447115 
화식열전(貨殖列傳)69
운영자
 화식열전129-2.jpg  (427.7K)   download : 138
 사마천_아담스미스의_뺨을_치다...[1].jpg  (89.3K)   download : 109
일반

열전69. 화식(貨殖)


노자가 말했다.

「나라의 지극한 치세는 이웃한 마을이 서로 바라보면서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서로 들으며, 백성들은 각자 음식을 맛있게 먹고, 아름다운 옷을 입으며, 각기의 풍속을 편안하게 여기며, 각자의 생업을 즐기다가 늙어 죽을 때 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이런 정치가 훌륭하다 하여 지금의 세상에서 일부러 노자의 말을 실행하기 위해 힘써 백성의 귀와 눈을 틀어막는다 해도 거의 할 수 없는 일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신농씨(神農氏)1) 이전에는 어떠했는지 나도 알지 못하지만, 『시경(詩經)』과『서경(書經)』에서 말하고 있는 우순(虞舜)·하우(夏禹) 이후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귀와 눈은 아름다운 소리와 빛을 즐기려 하고, 입은 소와 양 따위의 맛있는 고기 맛을 찾아 헤매며, 몸은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원하며, 마음은 권세와 능력으로 얻은 영화를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풍속에 백성들의 삶이 젖어들었는지 오래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자의 훌륭한 가르침을 들려준다 해도 백성들을 쉽게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정치가는 백성의 마음을 다스리고, 그 다음으로는 이익을 통하여 백성을 이끌며, 그 다음은 백성들을 가르쳐서 깨우침을 주는 일이며, 그 아래 방법은 강제로 백성들을 규제하는 것이다. 가장 못난 정치는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

대체로 산서(山西)2)지방에는 목재、대나무、닥나무[穀]、삼[纑]、검은 소 꼬리[旄]、옥석(玉石) 등이 많이 나고 산동(山東)3)에는 물고기, 소금, 칠, 실이 많이 나고 가수와 미인으로 유명하다. 강남(江南)4)지방은 녹나무[楠], 가래나무[梓]、생강[姜]、계[桂]5)、금、주석、연(連)6)、단사(丹沙)、무소[犀]、대모(玳瑁)7)、진주[珠璣]、짐승의 이빨이나 가죽[齒革]8) 등이 많이 난다. 용문(龍門)9)과 갈석(碣石)의 북쪽에서는 말, 소, 양, 전구(旃裘)10)、근각(筋角)11)이 많이 난다. 구리와 철은 천리 사방 곳곳에서 많이 산출됨으로 산속의 광산은 마치 바둑판 위에 놓은 바둑알처럼 분포되어있다. 이것이 각지에서 산출되는 물산의 대략적인 정황이다. 열거한 품목들은 모두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이고 세간에서 쓰이는 피복, 음식 및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필품이나 장례를 치르는데 필요한 용품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농민이 경작하는 농산물에 기대에 먹을 것을 얻고, 사냥꾼이 산으로 들어가 잡거나 채취하고 어부는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아 물품을 생산하고 공인(工人)은 그것들을 가공하고 상인은 유통시킨다. 이런 일들이 어찌 정령이나 교화 혹은 징발에 의하거나 약속함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겠는가? 사람마다 각기 지닌 능력에 맞추어 있는 힘을 다해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고로 물품 값이 싼 것은 장차 비쌀 징조이며, 물건 값이 비싼 것은 장차 싸질 징조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일에 힘쓰고 그 일을 즐기며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듯이 밤낮으로 멈추는 때가 없다. 부르지 않아도 오고 구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물품을 생산한다. 어찌 이것이야말로 도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겠으며 자연스러운 일임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주서(周書)에 말하기를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먹을 것이 부족하고 공인이 물건을 만들지 않으면 생활용품이 부족하게 되며 상인이 장사를 하지 않으면 삼보(三寶)12)의 유통이 끊어지게 된다. 또한 나무꾼이 나무를 베지 않으면 자재가 모자라게 되고, 자재가 모자라게 되면 산과 택지는 개발되지 못한다. 이 네 가지야말로 백성들이 입고 먹고 사는 생활의 근원이 된다. 근원이 크면 부유해지고, 근원이 작으면 빈곤해진다. 위로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아래로는 가정을 부유하게 만든다. 가난해지고 부자가 되는 일은 누가 주거나 빼앗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결국은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법이다. 기민한 사람은 재부를 쌓을 수 있고 우둔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산다.

영구(營丘)13)에 봉해진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은 봉국에 부임하여 보니 땅은 소금기가 많고 습했으며, 백성들은 적었다. 그래서 태공망은 여인들에게 길쌈을 장려하고 공예의 기술을 높였으며 생선과 소금을 내다팔아 유통시켰다. 그러자 마치 엽전이 꾸러미에 꿰이듯 수레 바퀴살이 중심으로 모이듯 많은 상인과 물품이 모여들었다. 그 결과 제나라는 관(冠)과 띠, 의복과 신발 같은 천하가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해와 태산 사이의 제후들은 옷깃을 여미며 찾아와 조현을 올렸다. 그러다가 제나라는 점차로 쇠약해졌으나 다시 관중이 나타나 태공의 사업을 재정비하여 경중구부(輕重九府)14)를 설치하여 제환공(齊桓公)15)을 패자(覇者)에 의 자리에 올려 구합제후(九合諸侯)16), 일광천하(一匡天下)17)의 위업을 이룩했다. 그러나 관중도 역시 삼귀(三歸)18)를 소유하여 신하의 신분임에도 재부는 열국의 군주보다 더 많았다. 제나라의 부강함은 위왕(威王)19), 선왕(宣王)20) 때까지 이르렀다.

그럼으로 말하기를「창고가 차야 사람들은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라고 한 것이다. 예란 재부가 있으면 생기고 가난하게 되면 없어진다. 그래서 군자가 부유하게 되면 덕을 행하기를 좋아하게 되나 소인이 부유해지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힘을 휘두르려고 한다. 연못이 깊어야 고기가 살고 산이 높아야 짐승들이 살 수 있듯이 사람이 부유하게 되면 인의(仁義)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부유한 사람에 세력을 얻게 되면 세상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되지만 세력을 잃으면 따르던 객도 줄어들고 즐겁지 않게 되는 법이다. 이런 일은 이적(夷狄)의 경우 더욱 심하다. 속담에「천금의 부자집 자식은 거리에서 죽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빈 말이 아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세상이 희희낙락하면 천하는 이익을 위해 모여들고, 세상이 소란하게 되면 이익 때문에 떠난다.」라고 했다. 무릇 천승의 나라 왕이나 만호를 거느리는 제후 및 백 칸의 집을 소유한 부호들도 가난함을 걱정하는데 하물며 호적에 올라 있는 백성들과 같은 필부들의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옛날 월왕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 올라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을 때 범려(范蠡)와 계연(計然)을 등용했다. 계연이 말했다.

「전쟁이 일어날지를 알면 미리 군비를 정돈해야 하며, 어느 때 무슨 물자가 필요할지를 알면 앞서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알면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의 상황을 미리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목성이 서쪽에 있는 해에는 풍년이 들고, 북쪽에 있는 해에는 수해가 납니다. 또한 동쪽에 있으면 대기근이 오고 남쪽에 있으면 가뭄이 듭니다. 가뭄이 들 해에는 미리 배를 준비해 두고 수해가 난 해에는 미리 수레를 준비해 두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준비하는 기본입니다. 일반적으로 6년마다 풍년이 오고 6년마다 가뭄이 들며 12년에 한 번 큰 기근이 일어납니다. 쌀값이 한 말에 20전까지 떨어지면 농민이 고통을 겪고, 반대로 90전까지 오르게 되면 상인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상인들이 어려우면 상품의 생산과 유통이 어려워지고 농민이 어려우면 온 땅이 황폐해집니다. 따라서 쌀값이 비싸도 80전을 넘지 않고, 헐해도 30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해야만 농민과 상인들이 함께 잘 살게 됩니다. 쌀값을 안정시키고 물자의 유통을 고르게 하여 시장에 물자가 부족하지 않도록 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지게 됩니다. 물자를 비축하는 방법은 쉽게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쌓아 두기만 한다고 해서 이익이 되지는 않습니다. 물품을 빠르게 유통시켜야 하며 낡은 물품은 버리고 특히 비싼 물품일수록 빨리 유통시켜야 합니다. 물품의 남음과 모자람을 잘 파악하면 값을 추측하는 일은 쉽습니다. 가격이란 최고로 오르면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고 최하로 떨어지면 다시 오르기 마련입니다. 값이 오르면 주저 없이 팔아치우고 떨어지면 사두어야 합니다. 돈이나 물건은 흐르는 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값이 비쌀 때는 분토(糞土)를 버리듯이 내다 팔고 값이 쌀 때는 주옥을 손에 넣듯이 사들여야합니다. 재물과 돈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유통시켜야 합니다.」

계연의 말대로10년 동안 다스리자 나라는 부유하게 되었고 전사들에게는 후한 금품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군사들은 갈증 난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워 마침내는 강국 오나라에 복수하고 중국에 위세를 떨쳐 오패(五覇)라 칭호를 얻었다.

회계(會稽)의 치욕을 설욕한 범려는 한탄하며 말했다.

「월(越)나라가 계연(計然)의 일곱 가지 계책 중 다섯 가지를 써서 그 뜻을 이루었다. 그의 계책을 나라에 이미 시험해 보았으니 나는 집안을 일으키는데 써봐야 하겠다.」

그리고는 그 즉시 강호(江湖)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나가 제나라로 들어가서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살았다. 얼마 후에 다시 도읍(陶邑)21)은 천하의 중심으로 제후들의 나라와 사방으로 통해있어 물품의 교역이 편리하다고 생각하여 그곳으로 들어가 주공(朱公)이라고 칭했다. 그는 산업을 다스려 재화를 사서 쌓아두고 때에 맞추어 팔아 이익을 추구했지 사람을 억지로 부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가 산업을 잘 다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잘 뽑아 시기에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도주공은 19년 동안 세 번이나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가 다시 가난한 친구들이나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기를 부유하게 되면 좋은 일을 행하여 덕을 쌓는 일이 아니겠는가? 후에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자 모든 일을 자손들에게 맡겼다. 자손들 또한 산업을 재정비하여 이윽고 재산을 거만금으로 불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라고 하면 도주공을 칭하게 되었다.

자공(子贛) 단목사(端木賜)는 일찍이 공자에게 학문을 배운 후 위(衛)나라에서 벼슬을 살다가 물러나 조(曹)와 노(魯) 두 나라 사이에서 물자를 사고파는 장사로 돈을 벌러 70여 제자 중 가장 부유했다. 그러나 자사(子思) 원헌(原憲)은 술지게미나 쌀겨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후미진 뒷골목에 은거하여 살았다. 자공은 사두마차에 비단과 폐물을 싣고 다니며 제후들을 방문했음으로 그가 이르는 나라의 군주들은 모두 신하들로 하여금 뜰의 양쪽으로 늘어서게 하여 자신들과 동등한 예를 행하도록 했다. 대저 공자의 이름을 천하에 알린 사람은 자공이 앞뒤로 모시고 다니며 도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소위 부자가 세력을 얻으면 그 이름이 세상에 더욱 드러나는 경우라 하겠다.

백규(白圭)는 주나라 사람이다. 위문후(魏文侯)22) 때 이극(李克)23)은 토지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데 힘썼지만 백규는 시세의 변화에 따른 물가의 변동을 살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버리는 물품은 사들이고 사람들이 사들이는 물품은 팔아넘겼다. 대저 풍년이 들면 곡식을 사들이고 대신 실과 옻과 같은 물품은 팔았고 흉년이 들어 누에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옷을 사들이고 식량을 팔았다. 태음(太陰)24)이 묘(卯)자리 즉 동쪽에 있는 해는 풍년이 드나, 그 다음 해는 수확이 좋지 않다. 오(午)자리 즉 남쪽에 있으면 그 해는 가뭄이 들고 그 다음 해는 수확이 많다. 그리고 유(酉)자리 즉 서쪽으로 옮기면 풍년이 들고 다음 해는 흉년이 들며 자(子)자리 즉 북쪽으로 옮기면 큰 가뭄이 들고 그 다음 해는 수확이 좋아지나 큰 홍수가 난다. 이처럼 태음이 한 바퀴 돌아 묘자리에 다시 돌아올 때마다 그가 축적한 재산은 대체적으로 매년 배로 불어났다. 그는 현금자산을 늘리고 싶으면 하등의 곡물을 사들이고, 곡물의 보유수량을 증가시켜 상품재산을 늘리고 싶으면 종자로 사용할 수 있는 상등품의 곡물을 사들였다. 그는 능히 소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기호품들을 조절했으며 검소한 의복을 입고 다니며 자기가 부리는 동자나 노복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가 시세의 변동을 따를 때는 마치 사나운 맹수나 새가 먹이를 낚아채듯이 재빨랐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업을 경영함에 있어서 모략은 이윤(伊尹)25)과 여상(呂尚)을, 용병은 손자(孫子)와 오기(吳起)를, 법의 시행은 상앙(商鞅)을 본받듯이 했다. 그래서 나는 지혜가 부족하여 임기응변을 할 줄 모르거나, 용기가 부족하여 결단을 못 내리거나, 정확하게 주거나 취할 수 있는 어진 덕을 갖추지 못하거나, 능히 지킬 수 있을 만큼 강건한 심성이 없거나 했던 사람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나에게 상술을 배우려고 했어도 결코 그들에게 전수하지 않았다.」

대저 천하에 상업을 경영하는 사람으로써 백규를 원조로 삼았다. 백규는 직접 몸소 행하여 시험해 봤음으로 능히 장점을 보일 수 있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의돈(猗頓)26)은 염전을 경영하여 사업을 일으켰고 한단(邯鄲)의 곽종(郭縱)은 철을 다루어 크게 성공했다. 그들의 부는 왕들과 겨룰만큼 컸다.

오지현(烏氏縣)27)의 나(倮)라는 사람은 가축을 길었는데 그 수효가 불어나자 모두 팔아서 진기하고 아름다운 비단 등의 물품을 사서 중간에 다리를 놓아 융왕에게 바쳤다. 융왕이 나(倮)가 바치기 위해 팔아치운 가축의 10배가 넘는 수량을 상으로 주어 기르게 했다. 그래서 그가 기르는 가축은 골짜기 수로 말과 소의 수효를 셀 정도가 되었다. 진시황이 칙명을 내려 나(倮)를 제후로 봉해진 자들과 동열에 세우고 규정한 날이 되면 여러 대신들과 함께 궁궐에 들어와 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또 파군(巴郡)의 과부 청(淸)은 그 조상이 단사(丹沙)가 나는 광산을 발견하여 얻은 이익을 여러 대에 걸쳐 독점해 왔으므로 재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청은 과부이기는 했지만 그 가업을 지키고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을 지켜 사람들로부터 침범 당하지 않았다. 진시황은 그녀를 위해 정조가 굳센 여인이라고 여겨 손님으로 대하고 여회청대(女懷清台)28)라는 대를 지어주었다. 나는 비천한 신분의 목장주였고 청은 궁벽한 시골의 과부였지만 만승의 제후들이 행하는 예를 나누고 이름이 천하에 빛났으니 이것이 어찌 부유함의 세력으로 그리 되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한나라가 일어나 해내를 통일하자 관문과 다리를 개방하고 산택에의 출입금지를 풀었다. 이에 부상(富商)과 대고관문과 다리를 개방하고 산림과 소택에서의 금령을 느슨하게 하였다. 대고(大賈)29)들이 천하를 누비며 교역시키지 못하는 물품이 없었음으로 누구든지 원하는 물품은 모두 얻을 수 있었다. 한나라 조정은 천하의 부호와 호걸 및 지방의 호족들을 경사(京師)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관중은 견(汧)과 옹(雍)30)의 동쪽부터 시작해서 황하와 화산(華山)에 이르기 까지의 땅은 기름진 옥야 천 리로 요순(堯舜) 때부터 하나라에 이르기까지 조세제도상 상등의 전지(田地)로 분류했다. 이어서 공류(公劉)31)가 빈(邠)32) 땅으로 이주했고 이어서 태왕(太王)33)과 왕계(王季)는 기(岐)에서 살았으며 주문왕은 풍읍(豊邑)을 건설했으며 주무왕은 호경(鎬京)을 지어 도읍으로 삼았다. 그런 연유로 주나라의 백성들은 선왕들의 유풍을 본받아 농사짓기를 즐겨하고 오곡을 심으며 땅을 중히 여겼으며 사악한 일을 그다지 염려하지 않았다. 이윽고 진나라의 문공, 덕공(德公). 목공(穆公)이 옹(雍)에 도읍을 정하자 옹성은 농(隴)과 촉(蜀)에서 나는 물자가 교류하는 요지가 되어 상인들이 많았다.

헌공(獻公) 때 도읍을 옮긴 역읍(櫟邑) 또한 북으로는 융(戎)과 적(翟)을 물리칠 수 있고 동쪽으로 삼진(三晋)과 통했음으로 역시 상인들이 많았다. 진효공과 소양왕(昭陽王) 때는 함양(咸陽)에 치소를 옮긴 이래로 한나라도 도성으로 치소로 삼고 장안 부근에 여러 황제의 능을 모시기 위해 현(縣)을 설치했음으로 사방의 상인들과 물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땅은 좁고 사람들은 많아 백성들은 점차 약아져서 농사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관중의 남쪽은 바로 파촉이다. 파(巴)와 촉(蜀) 땅 역시 비옥한 평야에 땅에서는 연지(臙脂), 생강, 단사. 석재, 구리, 철, 죽제품, 목기 등의 물산이 풍부했고 남쪽의 만족들인 전(滇)과 북(僰) 땅을 통제했다. 특히 북(僰)에서는 가동(家僮)이 많이 나왔다. 서쪽으로는 공(邛)과 착(笮)이 가까웠고 특히 착에서 살출되는 산품으로는 말과 검은 소가 유명했다. 사방이 막혀있지만 천리에 걸쳐 잔도(棧道)가 건설되어 있어 통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오로지 포야(褒斜)34)의 통로만은 출입구가 바퀴통에 바퀴살이 모여들 듯이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남은 물자가 부족한 물자와 교환되는 곳이었다. 천수(天水)、농서(隴西)、북지(北地)、상군(上郡)의 풍속은 관중(關中)과 같았으나 서쪽으로는 강족(羌族)으로부터 생기는 이익이 있었고, 북쪽으로는 융적(戎翟)이 기르는 가축이 있었는데 축목은 그곳이 천하에서 가장 성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그곳의 지리 역시 궁벽하고 험난하여 오로지 경사에서만 그곳으로 가는 길을 뚫어 통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중의 땅에 사는 백성들은 불과 10의 3에 불과했으나 그들의 생산량과 부는 10의 6이나 되었다.

옛날 당(唐)을 세운 요(堯)임금은 하동(河東)에, 은나라 사람들은 하내(河內)에, 그리고 주나라 사람들은 하남(河南)에 도읍을 정했다. 대저 삼하(三河)35)는 천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각각은 정족지세(鼎足之歲)를 이루며 여러 왕들이 번갈아 가며 거주하다가 왕국을 건설하고 수백 년에서 천년까지 내려온 곳이다. 토지는 협소하고 사람들은 많았으며 제후들의 모여들어 도읍을 삼아 습속은 인색해지고 세상물정에 밝게 되었다. 양(楊)36)과 평양(平陽)37)은 서쪽으로 진(秦). 적(翟)에,북쪽으로는 종(種)38)과 대(代)39) 땅 사람들과 교역했다. 석읍(石邑)40)의 북쪽 땅은 가까이 사는 흉노에 의해 빈번하게 약탈당했다. 그곳의 백성들은 강직한 성품에 싸움을 좋아하고 협객의 기질로 간악한 일에 종사하고 농사나 상업으로 생업을 삼지 않는다. 그러나 북쪽의 이족들과 인접해 있어 군사들이 자주 출동하기 때문에 중원에서 군수물자가 수시로 운수될 때는 뜻하지 않게 막대한 이익을 볼 때도 있다. 들양처럼 사나운 성격의 그곳 백성들은 농사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위조(韓魏趙) 삼가(三家)가 아직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기 전인 진(晉)나라 시절부터 이미 날래고 사나운 그곳의 백성들을 중원 사람들은 걱정했다. 이어서 전국시대 조무령왕(趙武靈王)은 조나라 백성들의 그러한 성격들을 더욱 독려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습속이 지금까지 조나라의 유풍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양(楊)과 평양(平陽) 두 읍의 백성들은 서쪽의 진(秦)과 적(翟), 북쪽의 종(種)과 대(代) 사이를 오가며 원하는 물품들을 모두 얻었다.

온(溫)과 지(軹) 두 읍은 서쪽으로 상당(上黨)과 북쪽으로는 조(趙)와 중산(中山)과 장사했다. 중산의 땅은 척박했으나 인구는 많았는데 특히 은(殷)나라의 음탕한 주왕(紂王)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던 사구(沙丘)의 백성은 성격이 조급하고 투기에 능했음으로 그러한 방법으로 이익을 남겨 먹고 살았다. 남자들은 서로 모여 오락을 즐기며 서로 희롱하며 슬픈 노래로 강개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들은 낮에는 서로 작당하여 몰려다니면서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약탈하고 저녁에는 분묘를 파해쳐 도굴을 저지르며 가짜 물건을 만들고 위조화폐를 주조했다. 또한 잘 생긴 많은 남자들은 가수나 배우가 되었고 여자들은 거문과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며 신발을 끌고 곳곳을 찾아다니며 부귀한 사람들에게 애교를 떨어 첩이나 후궁으로 들어가 제후국들에 널리 퍼져 살았다.

한단(邯鄲) 역시 장수(漳水)와 하수(河水) 사이에 있는 큰 도회지다. 북쪽으로는 연(燕)과 탁(涿) 지방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정(鄭), 위(衛)와 통한다. 정위(鄭衛)의 풍속은 조(趙)나라와 비슷하다. 그러나 정위와 이웃한 양(梁)과 노(魯) 지방의 풍속은 자존심이 강하고 절조를 중히 여긴다. 위나라 사람들이 복수(濮水) 강변의 성읍에서 살다가 야왕(野王)으로 이주했음으로 야왕 사람들이 기개를 소중히 알고 임협의 기질이 있음은 원래 그들이 위나라 풍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대저 연(燕)은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의 큰 도시다. 남쪽으로는 제(齊)와 조(趙)에 동북으로는 흉노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상곡(上谷)에서 요동(遼東)까지 땅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백성들은 희박하고 빈번히 이족의 침입을 받아왔다. 풍속은 대체로 조(趙), 대(代)와 닮았고 백성들은 강하고 사납지만 생각이 짧다. 해산물과 소금 및 대추와 밤이 많이 생산된다. 북쪽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에 인접해있고 동쪽으로는 예맥(濊貊), 조선(朝鮮), 진번(眞蕃)과 교역을 통해 생기는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

낙양(洛陽)은 동쪽으로 제노(齊魯), 남쪽으로 양초(梁楚)와 교역을 행한다. 태산(泰山) 북쪽은 제(齊)이고 남쪽은 노(魯)다. 제는 태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비옥한 토지가 천리에 펼쳐있다. 뽕나무와 삼이 잘 자라고 백성들은 화려한 문양의 비단이나 삼베, 생선과 소금을 많이 생산한다.

임치(臨菑) 역시 바다와 태산 사이에 있는 큰 도회지다. 그 풍속은 너그럽고 활달하며 지혜가 있으며 토론을 좋아한다. 성격이 또한 진중하여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싸움은 두려워하지만 칼을 들고 남을 찔러 죽이는 일에는 용감하다. 그래서 남을 협박하여 물건을 약탈하는 사람이 많다. 대체로 대국의 풍도가 있다. 이곳은 사(士), 농(農), 공(工), 상(商), 고(賈)의 다섯 가지 일을 하는 백성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추(鄒)와 노(魯)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강변의 땅으로 그곳에는 여전히 주공(周公)의 유풍이 남아있고 유학의 풍속을 좋아하고 예를 항상 행하기 때문에 사람의 성격이 소심하고 신중하다. 뽕나무와 삼베를 짜는 산업이 매우 성하지만 삼림과 수택에서 나오는 산물은 없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 사람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고 죄를 두려워하는 성격이라 간사하지 않다. 이윽고 노나라가 쇠하자 장사길에 들어서서 이익을 추구하기를 주나라 사람들보다 심하게 했다.

무릇 홍구(鴻溝) 이동부터 망(芒)과 탕(碭) 이북 및 거야택(巨野澤)에 이르는 이 땅은 옛날 양(梁)과 송(宋)나라 땅이다. 도(陶)와 수양(睢陽) 역시 큰 도회지다. 옛날 요임금은 성양(成陽)에서 일어났고 순임금은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았으며 탕(湯)임금은 박(亳)에서 살았다. 그 땅의 풍속은 여전히 선왕의 유풍들이 남아있고 사람들은 중후해서 군자(君子)가 많고 농사일을 좋아했다. 비록 산천에서 나오는 풍요로움은 없지만 남루한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재물을 모아 부유하게 산다.

월(越)과 초(楚) 지방은 세 가지 풍속이 있다. 대저 회북(淮北)의 패(沛), 진(陳), 여남(汝南)、남군(南郡)에 이르는 지역을 서초(西楚)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다. 쉽게 분노를 표출하고 땅은 척박하여 산물이 적어 저축할 수 없다. 강릉(郢都)은 옛날 초나라의 도성이었던 영(郢)이다. 서쪽으로는 무(巫)와 파(巴)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운몽택(雲夢澤)의 산물로 풍요로움의 혜택을 받고 있다. 진(陳)은 초와 하(夏)가 만나는 지점으로 그곳 백성들은 생선과 소금을 취급하는 상인이 많다. 서(徐). 동(僮), 취려(取慮) 일대의 풍속은 깨끗하나 각박하다. 그곳의 백성들은 약속을 잘 지키는 일을 긍지로 삼고 있다.

팽성(彭城) 이동의 동해(東海)、오(吳)、광릉(廣陵)을 동초(東楚)라고 한다. 그 땅의 풍속은 서(徐)、동(僮)과 같다. 구(朐)、증(繒) 이북의 풍속은 제나라와 비슷하다. 절강(浙江)의 남쪽은 월(越)이다. 대저 오왕 합려(闔廬)부터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오왕(吳王) 유비(劉濞) 등의 세 사람은 놀기를 즐기는 천하의 젊은이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았다. 동쪽으로는 바닷물을 말려 나오는 소금의 풍요로움과 장산(章山)의 동(銅) 삼강(三江)과 오호(五湖)의 산물로 이익을 누린다. 오(吳)는 강동의 큰 도회지 중의 하나다.

형산(衡山)、구강(九江)、강남(江南)、예장(豫章)、장사(長沙) 등지는 남초(南楚)다. 그 풍속은 서초와 대개 비슷하다. 초나라는 처음에 도읍했던 영(郢)에 수춘(壽春)으로 옮겼는데 수춘 역시 큰 도회 중의 하나다. 합비(合肥)는 남쪽이 장강과 북쪽의 회하(淮河)의 조수를 받아들이는 곳으로 피혁, 건어물, 목재가 모이는 곳이다. 민중(閩中)、우월(于越)의 풍속이 섞여 있기 때문에 남초 사람들은 언변에 능하지만 말을 교묘하게 꾸며서 하기 때문에 믿음이 적다. 강남은 땅이 지대가 낮아 습하여 남자들의 수명은 짧다. 이곳은 대나무가 많이 난다. 예장(豫章)은 황금의 출산지로 유명하며 장사는 납과 주석을 생산하다. 그러나 매장량은 지극히 적어 채굴하면 그 비용을 대기도 부족하다. 구의(九疑)、창오(蒼梧) 이남에서 담이(儋耳)에 이르기까지의 풍속은 대개 강남의 것과 비슷하고 양월(楊越)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반우(番禺) 역시 남방의 큰 도회 중의 하나로 주기(珠璣)、무소[犀]、대모(玳瑁)、과일、삼베 등이 집산지다.

영천(潁川)、남양(南陽)은 옛날 하(夏)나라 사람들의 거주지다. 하나라 사람들은 충실하고 질박한 정치를 숭상했으므로 지금까지도 선왕의 유풍이 남아 있다. 영천은 후덕하고 매사에 성실하다. 진나라 말에는 반역 행위를 한 사람들을 남양으로 옮겨 살게 했다. 남양은 서쪽으로는 무관(武關) 및 운관(鄖關)과 통하고 동남쪽에는 한수(漢水), 강수(江水), 회수(淮水)와 마주하고 있다.

완(宛) 역시 큰 도회지다. 이곳의 풍속은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으며 사람들은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생업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이 많고 협객의 기질이 있다. 이곳은 영천과 서로 통하므로 지금까지도 이곳 사람들을 하(夏)나라 사람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천하에는 물자가 적은 곳도 있고 많은 곳도 있고 백성들의 풍속도 또한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산동에서는 바다에서 나는 소금을 먹고, 산서에서는 산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먹으며, 영남(嶺南)과 사북(沙北) 지방에서는 옛날부터 곳곳에서 소금이 난다. 물산과 백성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이와 같다.

이것을 대체적으로 보면 초나라와 월나라는 땅은 넓지만 사람이 드물며, 쌀밥에 생선국을 먹는다. 어떤 곳에서는 마른 풀을 태워 밭을 갈고, 논에 물을 대어 김을 매고, 초목의 열매와 소라 및 조개 등이 장사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 지형 상 먹을 거리가 풍부하여 굶주릴 염려가 없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은 게으르고 그럭저럭 살아가며, 재산을 모으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강수와 회수 남쪽지방에는 굶주리는 사람들도 없지만 천금을 가진 부잣집도 없다.

기수(沂水)와 사수(泗水)에서부터 그 북쪽 지역은 오곡과 뽕나무와 삼을 심고 육축(六畜)을 기르기에 알맞다. 그러나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다 수해와 가뭄이 잦다. 그곳 사람들은 저축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진(秦), 하(夏), 양(梁), 노(魯)에서는 농사를 권장하고 농민을 소중히 여긴다. 삼하(三河), 완(宛), 진(陳)의 백성들도 이와 같으나, 상업에도 힘을 기울인다. 제나라와 조나라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를 부리고 기회를 보아 이익을 잡으려 하며, 연나라와 대(代)나라에서는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며 양잠에도 힘쓴다.

이런 점을 볼 때, 현능한 자가 조정에 들어가 심오한 계책을 내어 쟁론하고, 신의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나, 세상을 피해 숨어 있는 선비들이 명성을 높이려는 이유도 결국 무엇 때문인가? 바로 부귀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청렴한 관리는 오래 일할 수 있고 그 결과, 보다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으며, 정직한 장사꾼이 결과적으로 더 부유하게 된다. 부(富)는 사람의 본성인지라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열심히 추구하기 마련이다.

장수가 전투에서 누구보다 앞서서 용맹을 발휘하는 목적도 큰상을 받는 데 있다.

또 시골동네 골목의 젊은이들이 살인해서 시신을 땅에 암매장하고, 길을 막고 강도질을 일삼으며, 분묘를 도굴하고, 화폐를 위조하며, 의협을 가장하여 남의 재산을 횡령하여 강제로 자기 것으로 만들며, 같은 패라고 서로 도우며 개인적인 원한에 대한 원수를 갚아주고 아무도 몰래 뒤를 따라다니며 약탈을 일삼고 법률이 금하는 행위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마치 죽을 곳을 향해 내달리는 말처럼 날뛰는 것도 사실은 모두가 돈과 재물을 위해서이다.

얼굴에 화장을 해서 아름답게 꾸민 저 정나라나 조나라 미녀들이 거문고를 아름답게 키고 긴 소매를 나부끼면서 경쾌한 발놀림으로 춤을 추어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유혹하는 행위나, 천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달려가 노소 불문하고 손님을 찾는 목적도 돈 때문이다. 또한 시간 많은 귀공자들이 멋있게 꾸미고 으스대며 돌아다니는 행위도 그들의 부귀를 과시하기 위해서이며, 주살을 쏘아 물고기와 짐승을 잡기 위해 새벽 일찍 나아가 밤늦게 돌아오며, 서리나 눈을 무릅써가며 깊은 골짜기를 뛰어다니며 맹수의 위험도 피하지 않고 사냥에 열심인 이유도 먹고 싶은 고기를 구하기 위함이다. 도박이나 경마, 닭싸움, 개싸움 등의 내기를 하면서 핏대를 올리며 서로 과시하며 반드시 이기려고 다투는 이유도 남에게 져서 재물을 잃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의사나 술사 등 여러 가지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노심초사하여 재능을 다하려고 하는 이유도 또한 경제적인 수입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관리가 교묘한 수단으로 법을 농단하고 인장과 서류를 위조하여 들키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형벌도 피하지 않으려고 이유도 뇌물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농(農), 공(工), 상(商) 고(賈) 들이 재물을 증식시키는 이유도 역시 재산을 더욱 늘리려는 본성 때문이다. 이렇게 아는 바를 다하고 능력을 발휘하여 재물을 추구할 뿐, 마지막까지 힘을 남겨두지 않고 재물을 남에게 양보하는 일은 없다.

속담에 이르기를「백리 밖으로 나가 땔나무를 팔지 말고, 천리 밖에 나가 곡식을 팔지 말라!」고 했다. 또한 1년을 살려거든 곡식을 심고, 10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고, 백 년을 살려거든 덕을 쌓으라고 했다. 덕이라는 것은 사람됨을 말한다.

지금 관에서 주는 봉록도 없고 식읍에서 들어오는 수입도 없음에도 그와 같이 즐겁게 사는 사람이 있으니 이를 소봉「소봉(素封)」이라고 한다. 봉(封)이란 조세(租稅)를 받아먹고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율을 매 호 년 200전을 걷는다면 천호에 봉해진 제후는 매 년 20만 전의 수입이 있어 그 돈으로 참조(參朝)와 조근(朝覲)41)을 행하고 손님을 초빙하고 연회를 여는데 사용한다. 서민에 해당하는 농(農), 공(工), 상(商), 고(賈) 등이 만전의 원본이 있으면 매년 이식은 2천 전이다. 즉 백만 전의 원전이라면 수입은 매년 20만 전이다. 병역, 요역의 대납금, 전조(田租), 인두세(人頭稅) 등의 비용을 지불하고 남은 돈으로 의식을 해결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말하기를 「말 50마리, 소 170마리42), 양 250마리를 기를 수 있는 목장의 소유자, 돼지 250마리를 기를 수 있는 저습지, 연간 천 석(石)43)의 물고기를 기를 수 있는 양어장, 천 주의 나무를 베어낼 수 있는 산림의 소유자, 안읍(安邑)의 대추나무 천 주, 촉(蜀), 한(漢), 강릉(江陵)의 귤나무 천주, 회북(淮北)、상산(常山)에서부터 남쪽의 황화와 제수(濟水) 사이의 가래나무 천 주, 진(陳)과 하(夏)의 옻나무 밭 천 무(畝)44), 제(齊)와 노(魯) 지방의 뽕나무나 삼나무 밭 천 무, 위천(渭川)의 대나무 밭 천 무, 이름 난 국가의 일만 호 이상 되는 도회지의 성곽을 낀 1무(畝) 당 1종(鐘)45)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천무의 좋은 전답, 염료의 원료로 쓸 수 있는 치자나무나 꼭두서니 밭 천 무, 또는 생강이나 부추를 심은 천 휴(畦)46)의 밭, 이런 사람들은 천 호의 봉지를 지니고 있는 제후들과 수입이 동등하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부의 원천이 되어 소봉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시정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 타읍으로 행상을 나갈 필요도 없이 그저 앉아서 수입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몸은 처사의 도의를 지키지만 수입은 풍부하게 된다. 만약 집이 가난하고 노년의 부모를 모시면서 연약한 처자에 매년 때가 되어 제사를 지낼 수 없어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음식과 의복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면 이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는 열등한 사람이다.

그래서 재산이 없는 사람은 막노동을 하고 다소 재산이 있는 사람은 지혜를 써서 증식하려고 하며 재산이 많은 사람은 시기를 기다리며 늘리려한다. 이것이 재산을 증식시키는 가장 큰 방법이다. 생업을 위해 몸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은 현능한 사람이 힘쓰는 바고, 때문에 본업에 해당하는 농업으로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다음는 상업으로 돈을 버는 것이며, 간악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이 가장 나쁘다. 그렇다하더라도 세상을 등지고 바위굴에 사는 처사의 신분도 아니면서 오랫동안 가난하게 살면서 입으로는 인의만을 외치는 자도 역시 부끄러운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백성들은 상대의 재산이 자기보다10배가 많으면 굽신거리며 사정하고, 백 백가 많으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많으면 그를 위해 즐겨 일하고, 만 배가 되면 그의 종이 되려고 한다. 이는 만물의 법칙이다. 무릇 가난한 자가 부를 이루는 수단은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은 상어만 못하다. 자수로 무늬를 놓는 일보다는 성문에 기대어 장사를 하라는 말은 상업을 하라는 뜻으로 상업은 가난한 사람이 부를 축적하는 데에는 첩경이라는 말이다. 교통이 발단한 큰 도회지에서 다음에 열거한 품목 중 어느 것이든 1년 간 거래하면 20만 전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천 독의 술, 항아리 천 개의 식초 혹은 장유, 항아리의 천 개의 된장, 도살한 소, 양, 돼지의 가죽 천 장, 천 종의 곡식, 천 수레 혹은 천 장(仗) 길이에 해당하는 배에 실은 땔감이나 짚, 일 천 주의 목재, 만 개의 대나무 장대, 초거(軺車) 백 대, 우마차 천 량, 천 개의 칠기(漆器), 천 균(鈞)47)의 무게에 해당하는 구리 그릇, 천 석의 목기나 철기, 혹은 치자나 꼭두서니, 말 200마리, 소 500마리, 양이나 돼지 2천 마리, 노비 100명, 힘줄, 뿔, 단사 천 근, 천 균의 견(絹), 솜, 올 고운 삼베[細布] 천 필의 무늬와 물들인 비단, 거칠고 두터운 백포(白布;榻布)와 피혁 천 석, 옷 천 말, 누룩이나 메주 천 홉, 북어나 갈치 천 근, 건어물 천 섬, 자반 천 균, 대추와 밤 3천 석, 여우와 담비 옷 각 천 벌, 염소나 양의 갖옷 천 석, 담요 천 장, 과일이나 채소 천 종(鍾) 등 어느 것이든 본전 백만 전인 이것들을 1년 동안 팔아서 20만 전의 이득을 얻거나 현금 천 관을 빌려주고 2할의 이자를 얻어도 된다. 중개인이나 욕심 많은 상인은 3할의 이득을 얻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싼 가격에 파는 상인은 신용을 얻어 5할의 이득을 얻게 된다. 이런 사람들로 모두 천 호의 식읍을 가진 제후들에게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이 소봉의 대략적인 수치이지만 기타의 잡업으로 연 2할의 이득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말하는 소봉의 재화가 아니다.

다음은 당세의 천리 이내에 있는 현능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재부를 쌓았는지에 대해 후세의 사람들이 참고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간단히 기술하겠다.

촉(蜀)의 탁씨(卓氏)는 선조가 조(趙)나라 사람인데 제철업을 일으켜 부자가 되었다. 조나라를 멸한 진나라가 탁씨들을 강제로 촉 땅으로 이주시켰다. 진나라의 포로가 된 탁씨는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부부만이 수레를 끌고 이주지로 들어갔다. 강제로 이주하게 된 여러 사람들 중 재물을 갖고 있던 자들은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가까운 곳을 구해 가맹(葭萌)48)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탁씨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말했다.  

「이 땅은 협소하고 토질은 척박하다. 내가 듣기에 문산(汶山)49) 밑은 비옥한 평야로 땅 속에서 나는 구근작물은 마치 올빼미의 대갈통만큼이나 커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굶주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백성들은 교역에 익숙하여 장사하기가 쉽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먼 곳으로 가기를 원해 결국은 임공(臨邛)50)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철광산을 개발하여 쇠를 녹여 기구를 만들고 계획을 세워 번 돈으로 전(滇)과 촉(蜀) 땅 사람을 압도했다. 그의 재부는 가동만 해도 천 명이 넘었고 광대한 전야나 호수에서 수렵을 즐기며 임금 부럽지 않게 살았다.

정정(程鄭)은 산동(山東)에서 끌려온 포로였다. 그 역시 철공업에 손을 대어 머리에 상투를 튼 서남이와 교역하여 부를 쌓았는데 역시 탁씨와 같았다. 탁씨와 함께 임공에 살았다.

완(宛)의 공씨(孔氏)는 선조가 양나라 사람으로 철공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위(魏)나라를 점령한 진나라가 공씨를 남양(南陽)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는 쇠를 녹이고 두들겨 철기를 만들고 방죽과 연못을 파서 물고기를 키웠다. 수 많은 거마로 상단을 꾸려 제후들 사이를 오가며 맺은 교제를 이용하여 상업을 경영하여 이익을 남겼다. 그가 제후들에게 주는 선물은 대단히 규모가 컸음으로 유한공자(游閑公子)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돈을 헤프게 썼지만 그가 얻은 이득은 막대했음으로 세세하고 인색한 사람보다 훨씬 치부를 많이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수천 금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남양의 장사치들은 공씨의 대범함을 본받았다.

노(魯)나라 사람들의 풍속은 검소하고 인색하다. 그 중 조(曹)나 병(邴) 씨들은 특히 심했다. 그들은 제철업을 일으켜 수만금의 재산을 모았다. 그러면서도 부형이나 자손들 간에 스스로 약속하기를 몸을 구부리면 물건을 줍고 위를 쳐다보면 물건을 취하라고 했다. 그들은 행상을 하면서 모든 군국에 돈을 빌려주었다. 추(鄒)와 노(魯) 지방 사람들이 문학을 버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게 된 것은 모두가 조씨와 병씨들 때문이었다.

 제(齊)나라의 풍속은 노예를 천시했으나 도간(刀間)이라는 사람만은 홀로 노예를 사랑하며 귀하게 여겼다. 사람들은 보통 사납고 교활한 노예를 근심한다. 그러나 도간은 오히려 그런 노예를 취해 그들을 시켜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며 행상을 시켜 이익을 남겼다. 도간은 거마로 상단을 꾸려 태수나 재상들과 거래를 했는데 그럴수록 더욱 노예를 신임하여 그들에게 일임했다.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온 힘을 다하게 만들어 그는 마침내 수천만 금의 거부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작위를 얻느니 보다는 도간의 노예가 되겠다.」라는 말이 생겼다. 그것은 도간이 그의 노예들을 부유하게 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온 힘을 다하도록 만들었다고 한 말이다.

주(周)나라 사람들은 원래 인색했지만 사사(師史)라는 사람은 더욱 그랬다. 곡물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백 단위로 세며 군국을 왕래하면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던 부자였다. 그가 살았던 낙양(洛陽)은 제(齊), 진(秦), 초(楚), 조(趙) 등의 중심되는 곳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모시면서 부를 쌓는 방법을 배워 그들이 오랫동안 외지에 나가 행상한 것을 자랑하며 자기 고향을 여러 번 지나가면서도 자기 집에 들르지 않을 정도로 모두 열성적이었다. 사사는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의 장사를 맡겨 능히 7천 만 전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선곡(宣曲)51)의 임씨(任氏)들 선조는 독도(督道)52)의 창고를 지키는 관리였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호걸들이 일어나 모두 금은보석만을 두고 다툴 때 임씨만은 미곡을 취하여 움막 속에 감추었다. 후에 초한 양국이 형양(滎陽)에서 대치하자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음으로 곡식의 가격은 폭등하여 만전까지 올랐다. 이에 임씨는 곡물을 판 돈을 대거 풀어 호걸들이 가지고 있던 금은보석 등을 사들여 모두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이로써 임씨는 재부를 크게 늘릴 수 있었다. 대저 부자들은 모두 사치를 다투게 되나 임씨만은 근검절약하고 농사와 목축에 힘썼다. 보통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할 때 구입하는 기물들은 모두 싸게 사려고 다투었으나 임씨만은 홀로 비싼 것을 좋아했다. 임씨들의 부는 몇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임씨 집안은 서로 약속하기를 자신이 짓거나 기른 농산물이나 가축으로 인해 생긴 물품이 아니면 의식으로 삼지 않았고 또한 공사(公事)를 미처 끝내지 못했을 때는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기로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향촌의 지도자가 되어 부를 늘렸음으로 황제도 그를 존중했다.

한나라가 흉노를 물리치고 북방의 변경지방이 안정되자 오직 교요(橋姚)만이 말 천 필, 소는 2천 두, 양은 만 두, 곡식은 수 만 종의 재산을 만들었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장안에 살던 열후와 봉군(封君)들은 싸움에 종군하기 위해 전주들에게 군자를 대부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전주들은 관동의 성패가 유동적이라 장안에 머물고 있던 열후와 봉군들에게 대부해주기를 꺼려했다. 오로지 무염씨(無鹽氏)만 홀로 큰돈을 풀어 대부해주면서 이자를 원금의 10배로 했다. 이윽고 3개 월 만에 오초칠국의 란이 평정되자 일 년 동안 무염씨의 재산은 10배로 늘어나 그의 부는 관중 전체의 것과 같게 되었다.

관중의 부상이나 대고(大賈)는 대개가 전씨들의 일족으로 그 중 전색(田嗇)과 전란(田蘭)이라는 사람이 대표했다. 위가(韋家)와 율씨(栗氏),안릉(安陵)과 두읍(杜邑)의 두씨(杜氏) 역시 거만금을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이상의 부호들은 가장 특이하고 탁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식읍도 없었고 봉록도 없었고 또한 법을 농단하고 범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한 재부도 아니다. 사물의 이치를 추리하여 거취를 결정하고 때에 맞춰 자세를 바꿔가며 이득을 얻었으며 상업으로 재부를 모으고 농업에 투자하여 지켰다. 힘으로써 결단하고 협상으로써 지켜 그들의 태도에는 절도가 있었음으로 기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만약 있는 힘을 다하여 농업, 목축업, 수공업, 임업, 어렵, 행상, 좌고(坐賈), 상업, 행상 등에 힘써 권세와 재력의 힘에 의지하여 부자가 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면 크게는 군(郡)을 압도하고 다음은 현(縣)을, 작게는 향리(鄕里)를 압도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모두 열거하기에는 너무나 많다.

면밀하게 계신하고 부지런히 일하여 근검절약함으로로 재산을 늘리는 방법이 부자가 되는 올바른 길이지만 부자가 되는 사람은 언제나 독특한 방법으로 남을 제압한다. 농사에 힘쓰는 것은 돈을 벌기에는 졸렬한 방법이지만 진양(秦揚)이라는 사람은 한 주를 통틀어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도굴은 간악한 일이지만 전숙(田叔)이라는 사람은 그 일로 부를 일으켰다. 도박은 나쁜 일이지만 환발(桓發)은 그 일로 부자가 되었으며 행상은 장부가 하기에는 천한 일이지만 옹락성(雍樂成)은 그 일로 부유해졌다. 기름장사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옹백(雍伯)은 천금을 모았다. 매장(賣漿)53)은 아주 조그만 규모의 장사이지만 장씨(張氏)는 천만 전을 벌 수 있었다. 칼갈이는 보잘 것 없는 기술이지만 질씨(郅氏)는 가마솥에 밥을 해서 먹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고용했다. 위포(胃脯)54)는 단순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이지만 탁씨(濁氏)는 그것으로 돈을 벌어 외출할 때 기병의 호위를 받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말을 고치는 수의사는 비천한 직업이지만 장리(張裏)는 그것으로 돈을 벌어 식사를 할 때는 편종(編鐘)을 연주시킬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이것들은 모두 성실한 마음으로 한 가지 일에 힘쓴 결과이다.

이런 것들로 살펴보면 부를 쌓는 일은 정해진 업종이 없고, 재화는 일정한 주인이 없다는 점이다. 능력이 있는 자들은 재물을 모을 수 있고 불초한 자들은 재물을 기와장 날리듯이 허비한다. 천금의 부자들은 한 도회지를 소유한 군주에 비견될 수 있고 거만금의 부자들은 왕처럼 wmf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소봉(素封)이라고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화식열전 끝>

1) 신농(神農) / 중국 고새 신화 상의 삼황오제 중의 한 사람으로 염제(炎帝)다. 사람의 몸에 머리는 소나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농업과 양잠(養蠶), 상업, 의약(醫藥)을 가르쳤고 오현금(五絃琴)을 발명했다.

2) 산서(山西)/ 산은 지금의 산서성과 하북성을 가르는 태항산(太行山)을 가르키고 산서는 지금의 산서성 이서 일대를 말하고 지금의 산서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3) 산동(山東)/ 태항산 이동 지방으로 지금의 산동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전국시대 진나라 때의 산동이라 함은 효산(崤山) 이동의 열국을 가리키기도 했다.

4) 강남(江南)/ 장강 이남지방이다.

5) 계화(桂花)나무 즉 물푸레나무[木犀] 혹은 계피를 말한다.

6) 연(連)/ 연(鉛)이다.

7) 대모(玳瑁)/ 주로 열대 지방의 바다에 사는 거북의 하나로, 누런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등딱지는 단단하여 갓끈이나 풍잠(風簪)등을 만드는 원료로 쓰인다.

8) 치혁(齒革)/ 치(齒)는 상아 혁은 호피 등으로 귀한 짐승의 이빨과 가죽을 지칭한다.

9) 용문(龍門)/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북으로 산서성을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대각선으로 흐르는 분수(汾水)가 황하와 합류하는 하구(河口) 도시다.

10) 전구(旃裘)/ 모직물과 가죽

11) 근각(筋角)/ 짐승과 힘줄과 뿔

12) 삼보(三寶)/ 먹을 것, 생활용품, 재물을 말한다.

13) 영구(營丘)/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 경내로 후에 임치(臨淄)로 바뀌었다. 서주나 춘추전국시대 전 기간을 통해 제나라의 도성이었다.

14) 경중구부(輕重九府) : 경중은 화폐를 의미하고 구부는 경제에 관련된 아홉 개의 관청이다. 구부란 대부(大府), 왕부(王府), 내부(內府), 외부(外府), 천부(泉府), 천부(天府), 직내(職內), 직금(職金), 직폐(職幣)를 말한다.

15) 제환공(齊桓公) : 춘추 때 제나라의 군주로 기원전 685년부터 643년까지 43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이름은 소백(小白)이고 제희공(齊僖公)의 아들이며 제양공(齊襄公)의 동생이다. 양공 만년에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관중의 보좌를 받고 있던 공자규(公子糾)는 노나라로, 포숙의 보좌를 받고 있던 환공은 거(莒)나라로 달아나 몸을 피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양공이 시해되자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포숙의 적극적인 천거로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한 제환공은 제나라의 내정을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했다. 이어서 그 힘을 바탕으로 해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내걸고 지금의 북경 지방에 있었던 산융(山戎)을 정벌하고, 당시에는 남쪽의 오랑캐 정도로 여겨졌던 초나라의 북진을 막았다. 주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평정하고 천자를 보호했으며, 이족의 침입으로 멸망에 이르게 된 위(衛)와 형(邢) 두 나라를 복국시켜 패자가 되었다. 43년 동안의 재위 기간 중 ‘구합제후(九合諸侯) 일광천하(一匡天下)’의 위업을 달성하여 춘추 기간 동안 가장 강력했던 패자의 위치에 올랐다.

16) 구합제후(九合諸侯) : 제환공이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한 일을 말한다. 회맹을 연도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681년 송나라의 남궁장만(南宮長萬)이 그 군주인 민공(閔公)을 시해하자 제후들을 북행(北杏)으로 소집하여 송나라의 내란을 평정하고 송환공(宋桓公) 어설(御說)을 즉위시킨 일을 시작으로 기원전 651년 지금의 하남성 란고현(蘭考縣)과 조현(曹縣) 사이의 규구(葵丘)에서 모여 주양왕(周襄王)이 자기를 추대한 공로를 치하하여 하사품을 내리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의 의식을 행하기 까지 행한 아홉 번의 회맹을 주도한 일을 말한다.

17) 일광천하(一匡天下) : 주혜왕(周惠王 : 재위 전676-652년)이 작은 아들 숙대(叔帶)룰 총애하여 태자 정(鄭)을 폐위시키고 대신 세우려고 하자 기원전 655년 제환공이 제후들을 수지(首止)에 모이게 한 후에 태자 정을 모시고 회맹을 행해 군신의 관계를 기정사실화하여 주혜왕으로 하여금 태자를 바꾸지 못하게 했다. 태자 정은 주혜왕의 뒤를 이어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주양왕(周襄王)이다. 제환공이 주나라 천자의 자리를 적통으로 지키게 한 업적을 일광천하라고 한 것이다.

18) 삼귀(三歸) : 관중이 지은 화려하게 장식한 건축물의 이름, 세 명의 정실부인을 두고 세 개의 가정을 꾸린 일 및 제나라의 조세 수입 중 3/10이 관중의 봉록으로 했다는 일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9) 위왕(威王) : 전국 때 제나라의 군주 제선왕으로 기원전 356년 즉위하여 기원전 320년에 죽었다. 재위 시 정치를 개혁하고 군대를 정비했으며 추기(鄒忌)를 재상으로 기용하고, 손빈(孫臏)을 군사로 삼아 신장된 국세로 중원을 크게 진동시켰다.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당시의 패권국 위(魏)나라의 군대를 대파하고 위(魏)를 대신하여 패자를 칭하여 제후들을 호령했다. 또한 임치성 동문 밖 직하(稷下)에 학자들을 초빙하여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열었다.

20) 선왕(宣王)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19년에 즉위하여 301년에 죽은 전국 때 제나라 군주다. 이름은 벽강(辟彊)이고 제위왕(齊威王)의 아들이다. 즉위 초, 전영(田嬰)을 상국으로 등용하여 내정 개혁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함종을 강화하여 국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주난왕(周赧王) 14년 기원전 301년 연나라의 내정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연나라의 혁신세력을 진압했다. 학술을 중시하여 천하에 유세객이나 학자들을 자신이 학술단지로 조성한 직하(稷下)라는 곳으로 초빙하여 학문을 진흥시켰다.

21) 도읍(陶邑)/ 전국 때 송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정도시(定陶市)로 춘추전국부터 번성한 상업중심도시였다.

22) 위문후(魏文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45년에 즉위하여 396년에 죽은 위나라 군주로 이름은 사(斯)다. 기원전 445년에 즉위해서 49년 간 재위했다.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등에게서 사사했으며 현인과 재사들을 초빙하여 기용했다. 그의 치세 기간 중 이룩한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를 기용하여 황하 이서와 낙수 이동의 땅을 점령하고 하서군을 설치 진나라의 서진을 막았다.

2. 악양(樂陽)을 기용하여 조나라 영토 너머 있던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여 위나라령으로 했다.

3. 서문표(西門豹)를 업(鄴)의 태수로 임명하여 하백을 팔아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있던 무당과 관리들을 치죄하여 미신을 타파했다. 서문표가 백성들을 잘 다스려 그 땅에 대규모의 관개시설을 건설하자 농산물의 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업 땅에 치세가 오도록 했다.

4. 이극(李克)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구습을 타파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이극은 진지력지교(盡地力之敎)라는 제도를 시행하여 토지생산력을 제고시키고 법경(法經)을 제정하여 시행함으로 해서 백성들은 법의 보호를 받고 생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했으며 평적법(平糴法)을 시행하여 물가의 안정을 꾀해 경제를 발전시켰다. 평적법이라는 풍년이 들 때 국가가 사들였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싼 값으로 공급하는 제도다. 이극의 활약으로 위나라는 국부를 증대시켜 전국시대 초기 패자가 될 수 있었다.

23) 이극(李克)/ 전국 초기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다. 자하(子夏)의 제자로 중산(中山)의 재상이 되었고 위문후를 도와 위나라에 치세가 오게 만들어 패자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일설에는 법가의 조종으로 위나라에 변법을 시행했던 이회(李悝)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24) 태음(太陰)/ 세성(歲星) 즉 목성(木星) 뒤에 있는 두 별을 가르킨다.

25) 이윤(伊尹)/ 탕(湯)임금을 도와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을 토벌한 상(商)나라의 창업공신으로 이름은 지(摯)이고 아형(阿衡)이라고도 불렀다. 원래는 탕임금의 비인 유신씨(有辛氏)의 몸종이었다가 탕임금에 의해 발탁되어 상나라의 국정을 맡았다. 탕임금이 하나라를 멸하고 상왕조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26) 의돈(猗頓)/ 춘추 때 노나라 사람으로 원래는 가난한 선비였으나 범려(范蠡)가 돈을 많이 모았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 축재의 술을 물었다. 도주공이 가축을 길러 돈 버는 법을 가르쳐 주자 곧바로 지금이 산서성 임의현(臨猗縣) 남쪽의 서하(西河) 땅으로 옮겨 살면서 의씨(猗氏)라는 곳에서 소와 양을 크게 길렀다. 이어 10년이 되자 거부가 되어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고 그가 의씨라는 곳에서 거만금을 모았음으로 해서 성을 의(猗)로 삼았다. 일설에는 염업을 일으켜 거부가 되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일설에는 옥을 잘 식별하여 돈을 모았다고도 한다.

27) 오지(烏氏)/ ① 춘추 때 지금의 영하성 고원시(固原市) 동남이다. 흉노열전에 ‘岐섬, 梁山, 경수(涇水), 칠수(漆水) 북쪽에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지(烏氏), 구연(朐衍) 등은 융족이 세운 나라다.’라고 했다. ②전국 때 진혜문왕(秦惠文王)이 오지를 멸하여 진나라 영토에 편입시키고 그 땅에 오지현을 설치했다. 한나라가 그대로 따랐다.

28) 여회청대(女懷淸臺)/ 지금의 사천성 장수현(長壽縣) 남쪽에 세워진 대로 회는 그녀의 성이라는 설도 있다.

29) 부상대고(富商大賈)/ 옛날 상인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는데 천하를 돌아다니며 중계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상인, 어느 한 곳에 정착하여 창고를 가지고 물품을 판매하는 사람들을 고인(賈人)이라고 했다.

30) 견(汧)과 옹(雍)/ 지금의 섬서성 농현(隴縣)이고 옹은 지금의 봉상현(鳳翔縣)이다.

31) 공류(公劉)/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의 후예로 선조들을 따라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종족들을 위해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벌목한 목재를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같이 사는 종족들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공유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절(慶節)이 뒤를 잇고 빈(豳) 땅에 도읍 하여 나라를 세웠다.

32) 빈(邠)/ 빈(豳)으로 주나라를 세운 주족들의 선주지다.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 경내 서쪽이다.

33) 태왕(太王)/ 주문왕(周文王)의 조부인 고공단보를 말한다. 원래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인 빈(豳) 땅에 살던 주족을 이끌고 기산(岐山) 밑으로 이주하였다. 고공단보의 증손인 주무왕이 천하를 통일하고 주왕조를 세우자 고공단보를 태왕으로 높였다. 막내아들 계력의 아들 주문왕 창이 성인의 자질이 있었음으로 주족의 수장으로 세우려고 하자 그의 큰 아들 태백(太白)과 중옹(仲雍)이 남만으로 달아나 그들과 살았음으 계력이 후계자가 되고 이어서 주문왕이 그 뒤를 이어 주나라가 서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동쪽에서 현자가 주나라에 들어온 현자의 도움을 받아 주족이 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음으로 후에 강태공 여상을 태공망(太公望)이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34) 포야(褒斜)/ 관중지방과 한중지뱡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포곡(褒谷)과 야곡(斜谷)의 준말이다. 섬서성 종남산(終南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미현(眉縣)에서 위수와 합류하는 야수(斜水)와 종남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한중시에서 한수(漢水)와 합류하는 포수(褒水)로 연결한 고대의 중요한 교통로다.

35) 삼하(三河)/ 앞서 말한 하동, 하내, 하남을 말한다.

36) 양(楊)/ 지금의 산서성 洪洞縣 동남쪽에 있었던 제후국이다.

37) 평양(平陽)/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서남쪽에 있었던 전국 시대 때 한나라의 첫 번째로 도성으로 삼은 성읍이다. 초한 쟁패시 위왕 위표(魏豹)의 치소다.

38) 종(種)/ 지금의 하북성 울현(蔚縣) 일대

39) 대(代)/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일대

40) 석읍(石邑)/ 지금의 하북성 성도 석가장시 남

41) 조근(朝覲)/ 제후가 천자에게 매 년 입조하여 인사를 올리는 제도로써 봄에 올리는 것을 조(朝), 가을에 행하는 것을 근(覲)이라고 했다.

42) 본문은 牛蹄角千으로 소 한 마리를 발 4족에 뿔 2개로 표현했다. 제각 천 개는 정확히 167마리의 소를 뜻한다.

43) 석(石)/ 전한 때 한 석은 120근이고 한 근은 256g으로 지금이 단위로는 30키로에 해당함.

44) 무(畝)/ 전한나라 때 1무(畝)는 1.8a 로 약 55평에 해당하는 면적임

45) 종(鐘) / 곡물을 재는 단위로 전한 때 한 종은 50리터다.

46) 휴(畦)/ 한 휴는 50무로 지금의 단위로 2,750평이다.

47) 균(鈞)/ 일 균은 삼십 근을 말하며 한 근은 256그램임. 즉 일균은 약 7.7kg 에 해당함.

48) 가맹(葭萌)/ 지금의 사천성 광원현(廣元縣)에 있던 고을이다. 가맹관(葭萌關)은 삼국연의에 선주 유비가 촉의 성도를 정벌하기 위한 주둔지였다.

49) 문산(汶山)/ 지금의 사천성 민산(岷山)의 한나라 때 이름으로 사천성과 감숙성을 가르는 산맥이다. 사천성 북쪽의 송반(松潘) 이북에 있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민강(岷江)은 사천평원을 적시고며 성도(成都)지나 남쪽으로 흘러 의빈시(宜賓市)에서 장강과 합류한다.

50) 임공(臨邛)/ 지금의 사천성 공래현(邛崍縣)으로 성도(成都)에서 남서 100키로 되는 곳이다. 가맹에서는 남서 쪽으로 약 500키로 이상 떨어진 곳이다.

51) 선곡(宣曲)/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西安市) 서남 풍수(灃水)와 곤명지(昆明池) 강변의 고을로 한나라 때 선곡궁이라는 궁궐이 있었다.

52) 독도(督道)/ 독(督)은 식량창고의 이름이고 도(道)는 도(䆃)의 약자로 한 줄기에 6개의 이삭이 달린 벼가 나타났음을 축하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53) 매장(賣漿)/ 원래 장(漿)은 도수가 낮은 술, 죽, 초장, 간장 혹은 된장 등을 칭하는 말이나 매장은 간단한 음식을 파는 소규모의 간이식당을 뜻한다. 한국말로는 포장마차 정도에 해당하는 말이다. 「위공자열전」에 신릉군이 조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도박장에 몸을 숨긴 모공(毛公)과 매장(賣漿)에 몸을 숨긴 설공(薛公)을 찾아가 해 교제를 맺었다는 고사가 있다.

54) 위포(胃脯)/ 양의 내장을 손질하여 삻은 후에 말린 음식

목록
8616
[일반] 외전5. 섭정(聶政)

學琴報仇(학금보구) 전국 때 섭정(聶政)의 부친은 한나라 왕을 위해 칼을 만들다가 기한을 넘기도록 만들지 못해 한왕의 명령에 의해 살해 되
운영자 13-01-13
[일반] 외전4. 자산(子産) 공손교(公孫僑)

외전 4. 자산(子産) 정간공(鄭簡公) 원년 기원전 565년 여러 공자들이 모의하여 자사(子駟)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자사가 미리 알고 무리를 모아
운영자 12-12-17
[일반] 외전2. 보임안서(報任安書)

보임안서(報任安書) 사마천이 자신의 친구인 임안(字:少卿)에게 보낸 유명한 서신이다. 이 서신은 『한서(漢書)』『사마천전(司馬遷傳)』 및 『문선
운영자 12-12-16
[일반] 외전1. 순우곤(荀于髡)

순우곤(荀于髡)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아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배웠다. 그가 유세하거나 간
운영자 12-12-05
[일반] 화식열전(貨殖列傳)69

열전69. 화식(貨殖) 노자가 말했다. 「나라의 지극한 치세는 이웃한 마을이 서로 바라보면서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서로 들으며, 백성들
운영자 12-11-08
[일반] 귀책열전(龜策列傳)68

열전68. 귀책(龜策) 태사공이 말한다. 옛날부터 성왕이 천명(天命)을 받아 나라를 세워 왕업을 일으키려 할 때마다, 복서(卜筮)1)를 소중히
운영자 12-09-10
[일반] 일자열전(日者列傳)67

열전68. 일자(日者)① 옛날부터 천명을 받은 자만이 왕이 되었지만 왕자가 일어날 때 복서(卜筮)로써 천명을 판단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와
운영자 12-09-06
[일반] 골계열전(滑稽列傳)66

열전66. 滑稽(골계) 淳于髡•優孟•優旃(순우곤우맹우전) 공자가 말했다. 「나라를 운용하기 위해 육경을 공부하는 목
운영자 12-08-27
[일반] 영행열전(佞幸列傳)65

열전65. 영행(佞幸) 속담에 “ 힘써 농사짓는 것이 해를 이어 풍년이 든 것 보다는 못하고 관리가 영달하는 데는 직무에 충실한 것이 윗사
운영자 12-08-27
[일반] 유협열전(游俠列傳)64

열전64. 游俠(유협) 한비자가 말했다. 「유자(儒者)는 글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고 협객은 무로써 법을 범한다.」 그래서 두 부류를 모두 비판
운영자 12-08-27
[일반] 대원열전(大宛列傳)63

열전63. 대원(大宛)1) 대원의 사적은 장건(張騫)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장건은 한중(漢中) 출신이다. 건원(建元) 연간에 랑(郞)이 되었다. 그때 천
운영자 12-08-27
[일반] 혹리열전(酷吏列傳)62

열전62. 혹리(酷吏) 1341. 民倍本多巧(민배본다교), 백성들이 본분을 잃고 간사스럽게 되며 1342. 奸軌弄法(간궤농법), 간교함을 일삼아
운영자 10-10-05
[일반] 유림열전(儒林列傳)61

1336. 自孔子卒(자공자졸), 공자가 죽은 이래 1337. 京師莫崇庠序(경사막숭상서), 도성의 사람들은 아무도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운영자 10-10-05
[일반] 급정열전(汲.鄭列傳)60

1329. 正衣冠立于朝廷(정의관립우조정), 의관을 바르게하고 조정에 서면 1330. 而群臣莫敢言浮說(이군신막감언부설), 여러 신료들이 이를 보고
운영자 10-10-04
[일반] 순리열전(循吏列傳)59

열전59 循吏(순리) 1324. 奉法循理之吏(봉법둔리지리), 법을 받들어 도리를 밝히는 관리들은 1325. 不伐功矜能(불벌공긍능), 자기들
운영자 10-10-04
1 [2][3][4][5][6][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