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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소무전(蘇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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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서(漢書)·소무전(蘇武傳)》

소무의 부친 소건(蘇建)은 무제 원삭 2년(前127년)에 교위(校尉)의 직책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정벌전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평릉후(平陵侯)에 봉해졌다. 후에 군사 10여 만 명을 거느리고 삭방(朔方)에 성을 건설했고 후에 직급이 올라가 위위(衛尉)①가 되었다. 원삭 5년(前124년)소건은 위위의 신분으로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어 위청을 따라 삭방에서 출격하여 흉노와 싸워 적지 않은 수급을 얻었다. 다음 해 다시 대장군 위청이 소건을 포함한 여섯 장군을 이끌고 정양군(定襄郡)에서 출격할 때 소건은 우장군(右將軍)의 임무를 맡아 3천의 기병을 이끌고 있던 전장군 조신(趙信)과 만나 북상하다가 흉노의 선우가 이끌고 있던 수만 명의 기병을 만나 전투 끝에 휘하 군사들 대부분을 잃었다. 조신은 흉노에게 항복하고 소건은 간신히 몸을 빼내어 위청의 본대로 돌아왔다. 군사를 잃은 죄로 참수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죄금을 내고 사형만은 면하고 관직은 몰수당하고 평민이 되었다. 소건은 만년에 다시 기용되어 대군(代郡) 태수로 재직 중 죽었다. 소건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는데 소무는 그 중 가운데 아들이었다. 소무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이 구경의 직에 있었음으로 한나라 조정이 규정한 제도에 따라 소무 형제는 모두 낭관의 직을 같게 되었다.
자가 자경(子卿)인 소무는 어린 나이에 두 형제와 함께 낭관이 되었다가 점차적으로 승진하여 황제의 마구간을 관리하는 마구감(馬廐監)② 자리에 올랐다. 당시 한나라 조정은 흉노 토벌에 전력을 기우리고 있으면서 상호 간 상대방의 정보를 얻기 위해 수시로 사자를 교환하고 있었다. 와중에 흉노가 한나라 사자 곽길(郭吉)③과 노충국(路充國)➃ 등 10여 명을 억류시키자 한나라 조정도 흉노의 사절을 억류시켜 맞대응했다.
기원전 100년, 한무제 41년, 흉노의 선우 자리에 새로 즉위한 차제후(且鞮侯)는 한나라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말했다.
「한나라 황제는 나의 형님되시는 분이다.」
그리고는 노충국을 포함한 한나라 사자 일행을 전부 석방한 후에 돌려보내주었다. 한무제는 흉노의 행위를 찬양하면서 소무를 중랑장(中郞將)⑤의 신분으로 사자로 삼아 흉노로 보내 한나라가 억류하고 있던 흉노의 사절을 송환하는 책임을 맡겼다. 무제는 막대한 예물을 소무에게 주어 선우에게 바치도록 해서 흉노의 우호적인 행위에 답했다. 소무는 부중랑장의 신분의 장승(張勝)을 부사(副使)로 속관인 상혜(常惠)를 수행사절 등을 대동했다. 사절단은 사졸 중에서 사자를 호위할 군사와 정탐 임무를 맡을 사졸들을 공개모집하여 1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윽고 흉노의 궁정에 당도한 소무는 가져간 막대한 예물을 진열하여 보여준 후에 선우에게 바쳤다. 선우는 이에 더욱 오만하게 되어 한나라가 처음에 기대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선우가 바야흐로 사자를 임명해서 소무 등의 한나라 사절들을 한나라에 귀환시키려고 하던 순간, 흉노의 구왕(緱王)과 당시 한나라 장수(長水)⑥ 출신의 우상(虞常) 등이 흉노의 내부에서 모반을 획책하고 있었다. 구왕은 곤야왕의 누이의 아들로 즉 생질이다. 구왕과 곤야왕은 옛날 한나라에 항복하여 착야후(浞野侯) 조파노(趙破奴)와 함께 흉노를 쳤으나 싸움에 패하여 다시 흉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가 위율(衛律)을 데리고 흉노에 투항한 우상(虞常)과 선우의 모친 연지((閼氏)를 겁박하여 한나라에 귀환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때 마침 소무가 사절단을 인솔하고 흉노에 들어온 것이다. 우상이 한나라에 있을 때 부사로 따라온 장승(張勝)과는 친교가 있던 사이였다. 우상이 몰래 장승을 찾아와 말했다.
「한나라 천자가 위율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한나라를 위해 쇠뇌를 숨겨 가지고 가서 위율을 쏘아 죽이겠습니다. 나의 모친과 동생들은 한나라에 살고 있으니 원컨대 한나라는 그들을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장승이 우상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가지고 간 재물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 달이 조금 지난 후에 선우가 사냥을 나가면서 연지를 포함한 선우의 가족들을 남겨두었다. 우상 등의 70여 명이 계획대로 거사를 행하려고 했으나 그 중 한 사람이 밤중에 탈출하여 연지와 선우의 자제들에게 고했다. 선우와 그의 자제들이 군사를 일으켜 우상의 일당과 교전을 벌려 구왕 등을 모두 살해하고 우상은 사로잡았다. 선우가 위율에게 반란 사건을 심문하게 했다. 우상의 일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승은 전에 그와 나눈 밀담이 발각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그 동안의 사정을 모두 소무에게 고했다. 소무가 듣고 말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틀림없이 나도 연루될 것이오. 모욕을 당하고 죽는다면 그것은 또한 더욱 나라에 죄를 짓는 일이요.」
그래서 소무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장승과 상혜가 함께 소무를 제지시켰다. 우상은 과연 장승이 함께 모의했다고 자백하자 대노한 선우가 흉노의 귀족들을 소집하여 그 일에 대해 논의했다. 한나라 사절단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살해하려던 선우에게 흉노의 좌윤질자(左伊秩訾)가 말했다.
「위율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모조리 죽인다면, 만일 선우를 죽이려고 했다면 무슨 법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투항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선우가 위율을 보내 소무를 심문하게 했다. 소무는 상혜 등을 향해 말했다.
「한나라 신하로써 지조를 꺾고 사자로써의 사명을 욕되게 한다면 비록 목숨을 부지한다 한들 무슨 면목으로 한나라에 돌아갈 수 있겠소?」
말을 마친 소무는 칼을 꺼내 들고 자기 목을 찔렀다. 위율이 놀라 소무를 몸소 안으며 부하에게 빠른 말을 타고 가서 의원을 불러오라고 시켰다. 의원은 땅을 파서 만든 구덩이에 숯불을 빨갛게 지핀 뒤에 그의 얼굴을 구덩이 위에 올리고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려 울혈을 쏟게 했다. 그때 소무는 이미 숨이 넘어가 있었으나 반나절이 지난 후에 기적적으로 숨을 다시 쉬기 시작했다. 상혜 등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수레에 태워 자신들의 막사로 돌아왔다. 선우는 소무의 절조를 높이 사서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보내 소무를 문병하게 하고 그의 몸 상태를 물었다. 그리고 장승은 잡아다 옥에 가두었다.
소무의 상처는 점차 아물기 시작하자 선우는 우상에 대해 조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무를 설득하여 항복을 권유하라고 했다. 우상을 참수한 위율이 소무에게 말했다.
「한나라 사자 장승은 선우의 대신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으니 한나라 사절 일행은 모두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하나 선우께서 항복한 자들은 모두 그들의 죄를 사면하시겠다고 했소.」
그리고는 검을 들어 장승을 살해하려고 하자 장승은 항복하겠다고 했다. 위율이 소무를 향해 말했다.
「부사가 지은 죄는 마땅히 정사가 책임져야 하오.」
소무가 대답했다.
「나는 원래 부사가 공모한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소. 또한 그들의 친속도 아니오. 어찌하여 내가 그들의 음모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단 말이오.」
위율이 다시 검을 들어 소무를 베려고 했으나 소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소무를 보고 위율이 말했다.
「소군!나 위율은 옛날 한나라를 버리고 흉노에 귀순했소. 다행히 선우의 큰 은혜를 입어 나에게 작호를 내리고 왕호까지 하사하여 노예 수만 명을 거느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말과 기타 가축으로 내 봉지를 가득 채우게 할 정도로 부유하게 만드셨소. 소군도 오늘 흉노에 투항하면 내일은 나와 같은 귀한 신분이 될 것이오. 공연히 몸을 버려 초원의 비료가 된다한들 누가 알아주겠소?」
위율의 회유하는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위율이 다시 말했다.
「그대가 나의 말을 듣고 순순히 투항한다면 나는 그대와 결의형제를 맺겠소. 그렇지 않고 나의 충정어린 배려를 무시하면 이후로 나를 다시 본다한들 이런 기회를 또다시 잡을 수 없을 것이오.」
소무가 위율을 심한 말로 꾸짖었다.
「그대는 한나라 사람으로써 신하와 자식의 의무를 저버리고 임금의 은덕을 배신했소. 친척들을 포기하고 이족의 나라에 투항해서 노예로 살고 있는 그대를 내가 다시 보기를 어찌 원한단 말이오. 항차 선우가 그대를 신임한 나머지 사람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재판을 맡겼음에도 공정하게 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속에 불평을 품고 쌍방의 주인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두 나라에 일어날 재난과 손실을 구경하려고 하오. 남월왕이 한나라의 사자를 살해한 결과 그 땅은 평정되어 한나라의 아홉 개 군으로 되었으며 대완(大宛)의 왕이 한나라 사자를 살해하자 자기의 목은 신하들에게 잘려 궁궐의 북문에 걸리고 말았소. 또한 조선왕이 한나라의 사자를 살해하자 그 즉시 한나라가 토벌하여 나라는 없어지고 말았소. 오직 흉노만이 아직 그 징벌을 받지 않고 있다하나 나는 결코 흉노에 투항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한나라와 흉노가 서로 싸우게 만들겠소. 그 결과 흉노가 멸망의 화를 입게 되면 그 원인은 지금 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소무가 어떠한 위협에도 투항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위율은 설득을 중지하고 선우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선우는 그럴수록 소무의 항복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소무를 일단 땅을 깊이 파서 움막을 지어 그를 가두고 일체의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자 소무는 누워서 눈을 받아먹었고 양탄자의 털을 뽑아 허기를 채워 며칠이 지나도 소무는 죽지 않았다. 소무를 신인(神人)이라고 생각한 선우는 그를 북해의 사람이 살지 않은 곳으로 보내 숫양을 기르게 하면서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한나라에 귀국시켜주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상혜를 포함한 소무의 부하와 수행원들은 따로 다른 지방에 안치시켰다.
소무가 북해에 옮겨 살았으나 양식은 보내주지 않아 들쥐의 굴을 파서 그곳에 저장된 야생 과일로 연명했다. 그는 한나라 사신의 신표인 부절(符節)을 손에 쥐고 양을 키웠다. 마침내 부절에 달린 소꼬리 장식도 달아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5-6년이 지났을 때 선우의 동생 오간왕(於靬王)이 북해로 사냥 나왔다. 소무는 사냥할 때 쓰는 그물을 짜주거나 궁노를 올바르게 작동시켜 주어 그의 사냥을 도왔다. 오간왕이 소무를 중하게 여겨 그에게 의복과 식품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3년 후에 오간왕이 병을 얻어 죽을 때 소무에게 말과 가축 및 젖으로 빚은 술이 가득 찬 항아리와 원형 모양의 파오를 치는 양탄자를 보내주었다. 오간왕이 죽자 그의 부하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해 겨울 정령(丁零)⑦ 사람들이 소무가 기르던 소와 양을 모두 훔쳐갔다. 그 일로 인해 소무는 다시 곤궁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옛날 소무와 이릉은 함께 시중으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다. 소무가 흉노로 사자로 가서 억류되고 2년 후에 이릉이 흉노에 투항했다. 투항한 처지의 이릉은 감히 소무를 만나겠다는 청을 하지 못했으나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선우는 이릉을 북해에 보내 주연과 가무로 소무를 위로하라고 했다. 어렵게 소무를 만난 이릉은 소무에게 말했다.
「나와 그대가 우정이 매우 깊다는 말을 들은 선우가 나를 그대에게 보내 설득하라고 했소. 선우는 겸양과 성의를 다하여 그대를 대우하겠다고 했소. 선우의 뜻이 그러하니 그대는 결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이런 황무지에서 헛되이 고생을 감수하여 한나라에 조정에 신의를 지킨다한들 어떻게 그들이 알 수 있겠소? 옛날 그대의 큰형 가(嘉)는 봉거도위(奉車都尉)가 되어 황제를 수행하여 옹(雍)에 있는 역양궁(棫陽宮)에 갔었소. 그때 황제의 거가를 붙잡고 계단을 내려오던 그가 기둥에 부딪쳐 수레의 끌채를 부러뜨린 실수를 저질렀소. 그래서 큰 불경죄로 몰린 그대의 형은 결국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소. 이에 조정은 그에게 2백만 전을 하사하여 장례를 치르는 비용으로 사용하게 했소. 그대의 동생 유경(孺卿) 현(賢)도 하동의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를 지내러 가는 황제를 수행 중에 환기(宦騎)가 황문부마(黃門駙馬)와 배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다가 환기가 황문부마를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고는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었소. 환기를 체포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은 유경은 그를 찾아 나섰으나 붙잡지 못하자 그로 인해 죄를 추궁당할까 두려워하여 음독자살했소. 내가 장안을 떠나기 전에 그대의 부모가 돌아가셔서 내가 직접 양릉(陽陵)까지 따라가 장례에 참석했었소. 그대의 부인은 그때 아직 젊은 나이라 내가 들으니 개가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집에는 두 여동생과 두 딸 및 어린 아들 하나만 살고 있다고 했소. 이제 10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그들이 생사는 알 수 없게 되었소. 인생은 마치 새벽에 스러지는 이슬과 같은데 하필이면 이렇게 오랜 시간 스스로 고생만을 자초하고 있단 말이오? 나도 투항한 처음에는 매일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듯한 상실감에 거의 미칠 것 같았소. 한나라를 배신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으며 설상가상으로 모친께서 나로 인해 잡혀가 궁궐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도 들었소. 자경이 흉노에 투항하지 않으려는 심정이야 오죽하겠소만, 그렇다고 어찌 이 이릉의 마음보다야 더 할 수 있겠소? 이제 황상의 나이 이미 연로하게 되었고 법령은 수시로 바뀌고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10명이 넘은 대신들의 가족이 몰살되어 아무도 자신의 안위에 대해 예측할 수 없게 되었소. 절조를 지킨들 내일의 목숨을 보장받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소. 원컨대 나의 우정어린 충고를 받아들여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말고 흉노에게 투항하시오.」
소무가 대답했다.
「우리 소무 부자들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음에도 모두 발탁하여 관직은 장군의 반열에 서게 하고, 작위는 통후(通侯)까지 올랐음은 모두가 황제의 은덕 때문이었소. 우리 3형제는 모두 황제의 측근에서 모셨고 항상 조정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소. 지금이야 말로 이 몸을 희생하여 나라에 충성할 기회를 얻게 되었소. 부월(斧鉞)로 목을 잘리거나 가마솥에 삶겨지는 극형을 받아 죽는다하더라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감내하겠소. 군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은 마치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일과 같으니 어찌 내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겠소? 원컨대 더 이상 말씀 마마시오.」
이릉이 소무와 며칠 동안 함께 술을 마시다가 다시 말했다.
「그대는 반드시 나의 말을 들어야 하오.」
소무가 대답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선우가 반드시 나를 투항시키려고 한다면 오늘 즐겁게 그대와 술을 마신 후에 나로 하여금 그대 앞에서 죽게 해주시오.」
한나라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한사코 바꾸려고 하지 않는 소무를 보고 이릉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아, 진정 그대는 의로운 사람이오. 나 이릉과 위율이 지은 죄는 이미 하늘이 알고 있을 것이오.」
말을 마친 이릉은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로 자신의 옷소매를 적시며 소무와 이별을 고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소무에게 예물을 보내기를 꺼려한 이릉은 그의 처자를 시켜 수십 마리의 양과 소를 보냈다.
후에 이릉은 다시 북해에 와서 소무에게 말했다.

「한나라 국경의 운중(雲中)에서 잡은 포로가 말하기를 그곳의 태수와 관리들 및 백성들은 모두 흰 소복을 입었다고 했소. 아마도 황제가 승하한 것 같소.」
이릉의 말을 전해들은 소무는 남쪽을 향해 주저앉고 방성대곡을 하다가 입에서 피를 쏟아내더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곡하기를 몇 달을 계속했다.
한소제(漢昭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몇 년 후에 흉노와 한나라는 강화를 맺었다. 한나라는 그 동안 흉노에 억류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소무와 그 일행의 송환을 요청했다. 흉노는 거짓으로 소무는 이미 죽었다고 말해 한나라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한나라 사자가 흉노에 오자 상혜는 자기를 지키는 감시병을 설득하여 그와 함께 밤이 되기를 기다려 한나라 사자를 만나 그 동안에 흉노에서 일어났던 일의 전모를 모두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한나라 사자에게 흉노의 선우에게 “한나라 천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다가 활로 쏘아 잡은 큰 기러기의 발목에 묶여 있는 비단에 소무가 북해에 살아있다고 써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게 했다. 한나라 사자는 크게 기뻐하며 상혜가 일러준 대로 소무의 일에 대해 선우을 추궁했다. 선우와 그 측근들은 매우 놀라면서 한나라 사자에게 사죄의 말을 올렸다.
「소무를 포함한 당시의 사절단 일행은 모두 살아 있습니다. 틀림없이 송환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선우는 이릉을 시켜 소무를 위해 주연을 베풀고 축하하라고 했다. 이릉이 소무를 보고 말했다.
「오늘 그대는 드디어 한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소. 그대는 흉노에 포로로 있으면서 의기로 이름을 드높였고 한나라 황족 중에서도 그 공적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소. 고대의 사서에 기록된 행적이나 그림으로 그려진 인물 중에서 그 누가 그대의 공적을 뛰어넘을 수 있겠소? 나 이릉은 무능하고 겁이 많은 소인배요. 하지만 그때 한나라 조정은 나를 대역죄인으로 몰아 나의 노모까지 죽여, 너무나도 큰 치욕감을 내 가슴 속에 품게 했소. 그렇지 않았다면 춘추 때 가읍(柯邑)의 회맹에서 노나라 장군 조말(曹沫)⑧처럼 능히 패전의 치욕을 일거에 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소. 나의 일족은 모두 체포되어 살육당하고, 나 자신은 당세에 있어서 너무나도 큰 치욕을 입었으니 내가 어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었겠소? 나는 이미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으니 한나라에는 더 이상 아무 미련이 없소.」
말을 마친 이릉이 춤을 추며 노래했다.

徑萬裏兮度沙幕(경만리혜도사막)
만리 길을 지났음이여, 사막을 건넜도다!

爲君將兮奮匈奴(위군장혜분흉노)
군주를 위해 장군이 되었음이여, 흉노와 싸웠도다!

路窮絕兮矢刃摧(로궁절혜시인최)
길이 막혔음이여, 화살은 떨어지고 칼을 부러졌도다!

士眾滅兮名已隤(사중멸혜명이퇴)
사졸들은 전멸했음이여, 나의 명성은 무너졌도다!

老母已死(노모이사)
노모도 이미 돌아가셨으니

雖欲報恩將安歸(수욕보은장안귀)
효도를 하고 싶으나 돌아갈 데가 없구나!

이릉은 눈물을 떨구며 자리를 떠나 소무와 영원히 이별했다. 소무와 그의 부하들을 한 곳에 모은 선우가 그들을 한나라에 보내니 이미 투항하거나 사망한 자를 제외하고 모두 9명이었다.

한소제(漢昭帝) 시원(始元) 원년인 기원전 81년에 봄, 소무의 일행은 마침내 장안에 당도했다. 소제는 칙명으로 소무를 불러 제품(祭品)을 하사하여 무제의 능묘와 사당에 들려 배알하게 했다. 소무는 봉록 중2천 석의 전속국(典屬國)⑨에 임명되었고 2백만 전의 상금, 관전(灌田) 2경(頃), 장원이 딸린 저택 한 채를 하사받았다. 상혜(常惠)、서성(徐聖)、조종근(趙終根) 3인은 모두 황제의 시위관(侍衛官)에 임명되었으며 각각 비단 2백 필을 하사받았다. 그 밖의 6명은 나이가 이미 노쇠하여 집으로 보내 일인당 10만 전의 상금을 하사하고 종신토록 요역을 면제시켰다. 상혜는 후에 우장군(右將軍)으로 승진하고 후(侯)에 봉해졌다. 상혜에 대해서는 따로 전기가 있다.

흉노에 19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한나라로 돌아온 소무가 사자로 갔을 때는 장년의 나이였었으나 돌아올 때는 수염과 두발이 모두 백발로 변한 늙은이가 되어있었다.
소무가 돌아온 지 다음 해 상관걸(上官桀)과 그의 아들 상관안(上官安), 상홍양(桑弘羊), 연왕(燕王) 유단(劉旦) 및 개주(蓋主)⑩과 함께 획책한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소무의 아들 소원(蘇元)은 평소에 상관안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원래 대장군 곽광과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상관걸 부자는 곽광의 잘못을 적어 연왕에게 주어 황제에게 고하게 했다. 또 말하기를 소무는 흉노에 사자로 갔다가 20년 동안 항복을 거부하고 돌아와 전속국에 임명되었으나 대장군의 장사(長史) 양민(楊敏)는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않았음에도 수속도위(搜粟都尉)르 임명한 행위는 곽광이 권력을 남용한 행위라고 했다. 그러나 연왕과 공모한 자들이 오히려 주살되었다. 이어서 그들의 잔당들을 조사할 때 소무는 평소에 상관걸 및 상홍양과 친분이 있었고 또한 여러 차례 연왕의 상소문에도 언급되어 있었다. 더욱이 반란사건에 참여한 그의 아들과도 연좌되었음으로 정위가 주청하여 소무를 체포하려고 했다. 보고를 받은 곽광은 소무의 관직을 빼앗는 것으로 끝냈다.
몇 년 후에 소제가 붕어하자 소무는 옛날 2천석의 고위관리를 지냈다는 전력으로 한선제(漢宣帝)⑪를 옹립하는 대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관내후(關內侯)의 봉해지고 3백호의 식읍을 받았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위장군(衛將軍) 장안세(張安世)가 고사에 밝고 천자의 명을 성실히 수행하여 욕되게 하지 않았으며 또한 선제의 유명도 있다고 소무를 천거했다. 선제는 소무를 즉시 불러 환자서(宦者署)의 대조(待詔)에 임명했다. 수시로 황제의 부름을 받아 접견하다가 다시 우조(右曹)의 전속국(典屬國)에 복직되었다. 절조가 높은 노신이라는 이유로 소무는 초하루와 보름에는 입조토록 하여 제주(祭酒)라 칭하고 매우 총애했다. 소무는 황제로부터 상을 받을 때마다 모두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집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황후의 부친 평은후(平恩侯) 허백평(許伯平)、황제의 외삼촌 평창후(舅平昌侯) 왕무고(王無故)、낙창후(樂昌侯) 왕무(王武), 거기장군(車騎將軍) 한증(韓增)、승상 위상(魏相)、어사대부 병길(丙吉) 등은 모두 하나 같이 소무를 중히 여기고 존경했다.
나이가 들어 노쇠하게 된 소무가 아들의 역모사건에 연좌 된 것을 황제는 가엽게 여고 좌우의 근신들에게 물었다.
「소무가 오랫동안 흉노에 잡혀있었는데 그때 얻은 아들이 혹시 없는가?」
 소무는 평은후를 통해 고백했다.
「옛날 흉노를 떠나올 때 흉노의 여인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어 통국(通國)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얼마 전에 소식을 전해 오기를 돈과 폐백을 지불하면 돌려보내준다고 했습니다.」
황상이 허락하자 후에 사자의 뒤를 따라 한나라로 들어온 통국을 랑으로 삼고 다시 소무의 조카를 우조((右曹)로 삼았다.
소무는 80여 세를 살다가 신작(神爵) 2년 노환으로 죽었다.  

주석
① 위위(衛尉)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명으로 9경의 일원이다. 봉록은 중2천석이다. 궁중의 위병을 지휘하고 궁내의 숙위를 관할했다. 한경제 초에 중대부령(中大夫令)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다시 위위로 환원되었다.
② 마구감(馬廐監):한나라 궁궐 안에 체원(栘園)이라는 말을 기르는 원림이 있었고 그 안에 설치한 마구간을 마구(馬廄) 혹은 마붕(馬棚)이라고 불렀다. 마구에서 안마(鞍馬), 응견(鷹犬) 및 황제가 타고다니는 수레를 끄는 말에 소요되는 일체의 마구를 관장하는 관리의 장을 마구감이라고 했다.
③곽길(郭吉) : 원봉(元封) 원년, 한무제가 18만의 대군을 몸소 이끌고 순행나가 북지(北地)에 당도하여 흉노에 무력시위를 벌린 후에 수행했던 장군 곽길을 흉노의 선우에게 사자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선우가 대노하여 곽길을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원봉 원년은 기원전 110년이고 한무제 재위 31년 째 되는 해다.
④노충국(路充國) : 한무제 원봉 4년 기원전 107년, 흉노의 사자가 한나라에 당도했으나 병이 들어 죽었다. 한나라가 노충국을 2천석 관리의 신분으로 사자로 삼아 흉노 사자의 시신을 호송하게 했으나 흉노의 오유(烏維) 선우는 한나라가 죽였다고 생각하여 노충국을 억류시켰다. 노충국은 8년 동안 잡혀있다가 차제후(且鞮侯) 선우 즉위 초인 한무제 천한(天漢) 원년 기원전 100년에 석방되어 한나라로 돌아왔다.
⑤ 중랑장(中郞將)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이름으로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다. 문호를 지키고 거기(車騎) 인원을 보충한다. 녹봉은 비육백석이다. 중랑에는 5관(官)과 좌우(左右) 및 삼서(三署)가 있었다. 중랑의 장관은 중랑장으로 녹봉은 비이천석이다.
⑥장수(長水) 지금의 섬서성 남전현(藍田縣) 서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패릉과 백록원을 지나 패교(霸橋) 남쪽에서 패수(覇水)와 합류하여 위수(渭水)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⑦정령(丁零) : 고대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 이름이다. 정령(丁令), 정령(丁靈) 등으로 불린다. 주요분포 지역은 지금의 바이칼호 주변과 신강성 투르판분지에 일대다. 한나라 초에 흉노의 공격을 받아 싸움에서 패하고 복속되었다. 《사기·흉노열전》에 “모돈 선우가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역(屈射), 정령(丁零), 격곤(鬲昆), 신려(薪犂) 등의 나라를 복속시켰다”고 했다.「위략(魏略)」에 정령(丁零)은 강거(康居)의 북쪽에 있고 흉노의 왕정이 있는 접습수(接習水)로부터 7천 리 떨어져 있으며 흉노 북쪽에 혼유국(渾窳國)이 있다고 했다. 접습수는 安習水라고도 했다.
⑧조말(曹沫) :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인물로 춘추 초 노장공(魯莊公) 때 활약했던 노나라의 무장이다. 제나라와 3번 싸워 모두 패한 노나라가 땅을 떼어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했다. 그러나 노장공은 조말에게 패전의 죄를 묻지 않고 계속해서 장수로 기용했다. 후에 제호ᅟᅪᆫ공이 노장공과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陽谷縣) 동북의 가(柯) 땅에서 회맹을 행할 때 수행한 조말이 비수로 제환공을 겁박하여 노나라가 할양한 땅을 돌려받았다.
⑨전속국(典屬國)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제로 한나라의 예속국에 대한 사무를 관장했다. 한무제 때 도위(都尉), 승(丞), 후(候), 천인(千人) 등의 속관을 두어 기구를 확장했다. 한성제(漢成帝) 원년(전 28), 대홍려(大鴻臚)에 합병되었다. 소수민족의 이민이나 귀항 및 조공 등의 일을 관장했다. 봉록은 중이천석이고 열경(列卿)의 지위였다.
⑩개주(蓋主):무재의 장녀로 악읍장공주(鄂邑長公主)에 봉해졌다. 개후(蓋侯) 왕신(王信)에게 시집갔음으로 개주라고 칭했다. 왕신은 한무제의 외삼촌으로 왕태후의 친정 오빠다.
⑪한선제(漢宣帝) : 기원전 90년에 태어나서 49년에 죽은 서한왕조의 7대 황제로 이름은 유병기(劉病已)다. 황위에 오른 후에 유순(劉詢)으로 바꿨다. 한무제의 증손자이며 폐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아며 한무제의 증손자다. 무고(巫蠱)의 란으로 유거와 부친 유진(劉進)이 살해될 때 유순은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였음으로 죽음을 면하고 몰래 조모(祖母) 사량제(史良娣)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민가에 섞여 살던 어린 유순은 항상 삼보(三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하층민들의 생활을 몸소 체득하고 관리들이 행하는 정치의 이해득실을 알게 되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남다르던 유순은 황노와 형명학에 심취했다. 기원전 74년 한소제(漢昭帝)가 죽자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곧이어 난잡하다는 이유를 들어 폐위시킨 대장군 곽광은 유순을 찾아 황제로 옹립했다. 재위 기간 중 옥사를 줄이고 형벌을 완화시켰으며 현량들을 임용하고 요역과 부세를 줄여 생산을 장려햇다. 과거 한무제의 무단정치로 서한왕조의 붕궤(崩潰)된 경제기반과 피폐해진 사회는 한선제의 18년에 걸친 집정기간 동안 일약 안정을 되찾고 치세를 이루게 되었다. 역사상 선제의 치세를 ‘선제중흥(宣帝中興)’이라고 부른다.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여 서역을 중국역사상 최초로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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