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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이릉전(李陵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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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한서(漢書)·이릉전(李陵傳)》


  이릉의 자는 소경(少卿)이다. 젊어서 시중건장감(侍中建章監)이 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선비들에게 겸양했음으로 세상에 이름이 매우 높았다.
  한무제가 일찍이 그의 조부인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①의 풍모가 있다고 여겨 기병 8백 명을 이끄는 장군으로 삼아 흉노 땅 깊숙이 2천여 리를 들어가게 했다. 거연(居延 : 현 내몽고 서단의 액제납기(額濟納旗))을 지나 흉노의 지형을 정찰했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후에 기도위(騎都尉)로 승진하여 5천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주천(酒泉)과 장액(張掖)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에게 활쏘기와 전술을 가르쳐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한나라 조정은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②를  대장으로 삼아 대완(大宛)③을 정벌하게 하고 이릉에게는 휘하의 5천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르게 했다. 이광의 부대가 변경의 요새에 이르자 무제는 다시 어명을 내려 휘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을 그곳에 주둔시키고 이릉 본인은 5백의 경기병을 이끌고 돈황(燉煌)을 나가 염수(鹽水)➃에서 이광리의 본대를 맞이하게 했다. 이릉은 회군하여 장액에 주둔했다.
  천한(天漢) 2년은 한무제 42년으로 기원전 99년이다. 그 해에 이광리는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주천을 나가 천산(天山) 일대를 점령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을 공격했다. 무제가 이릉을 불러 접견하면서 이광리 군대의 군량과 마초를 운송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릉이 무대(武臺) 밑에서 무제에게 고두(叩頭)를 행하며 청했다.
「신이 거느리고 있는 변방의 주둔군 장사(將士)들은 모두 형초(荊楚 : 지금의 호북성 강릉 일대) 출신의 용사들이고, 뛰어난 재주들을 지니고 있는 검객들입니다. 힘은 호랑이를 덮쳐 포박할 수 있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입니다. 원하옵건대 소신이 스스로 한 부대의 지휘를 독립적으로 맡아 난간산(蘭幹山 : 지금의 몽고공화국 서남의 서과벽성(西戈壁省) 경내)의 남록으로 진군하여  선우(單于)의 병력을 분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청하옵건대, 소신과 휘하의 군사들을 이사장군의 치중부대로 만들지 말아주옵소서!」
  천자가 말했다.
「그대는 남의 밑에 속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짐은 군사들 대부분을  흉노 땅에 풀어놓고 있어 그대에게 줄만한 군마가 없다.」
  이릉이 대답했다.
「군마는 필요 없습니다. 신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단지 5천의 보병을 이끌고 선우의 왕정(王庭)으로 곧바로 진군하겠습니다.」
  무제가 이릉의 기백에 마음이 움직여 그의 청을 허락하고 겸하여 강노도위(彊弩都尉) 노박덕(路博德)⑤에게 명을 전하여 군사를 이끌고 중도까지 이릉의 부대를 마중하라고 했다. 복파장군(伏波將軍)을 지낸 적이 있는 노박덕이 이릉의 부대 후위를 맡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상주했다.
「현재 바야흐로 가을철이라 흉노의 말이 살이 쪄있음으로 그들과 섣불리 싸워서는 안 됩니다. 원하옵건대 이릉을 다음 해 봄까지 머물도록 한 후에 신과 이릉이 각기 5천의 기병을 이끌고 동서 두 방향에서 준계산(浚稽山 : 지금의 몽고공화국 파언홍과이성(巴彦洪戈尔省)의 추하(推河)와 탑초하(塔楚河) 남쪽의 고이반박극다산(古尔班博克多山)과 추하의 상류인 항애산(杭爱山)의 남이다.)을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선우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
  상주문을 본 황제가 대노했다. 이릉이 출전을 겁내 노박덕을 시켜서 상주문을 올렸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노박덕에게 다음과 같은 칙서를 내렸다.
「내가 이릉에게 기병을 주겠다고 허락한 이유는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치겠다는 그의 용기를 가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흉노가 서하(西河)를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다. 그대는 속히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서하로 달려가 구영(鉤營)으로 통하는 길을 끊어라!」
  그리고 또 이릉에게는 다음과 같은 별도의 칙서를 내렸다.
「9월에 출동하여 차로장(遮虜鄣 : 거연택 동북의 요새)의 요새를 나가 동쪽의 준계산의 남쪽 용륵수(龍勒水)까지 진군하여 적정을 정찰하라. 만일 적군을 발견하지 못하면 착야후(捉野侯)⑥ 조파노(趙破奴)⑦가 개통한 길을 따라 수항성(受降城)⑧으로 들어가 병사를 휴식시키고 쾌마(快馬)를 보내 그 결과를 보고하라. 노박덕과 의논한 내용은 무엇인지 서면으로 자세히 답하라!」
  이에 이릉은 휘하의 5천 보병을 이끌고 거연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30일을 행군하여 준계산 산록에 주둔했다. 이릉은 지나왔던 산천의 지형을 그려 지도로 만들어 수하의 기병 진보(陳步)를 시켜 도성으로 들어가 보고하게 했다. 진보가 황제를 접견하고 이릉이 이끄는 장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려는 생각에 사기가 충천해 있다고 고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진보를 낭관(郞官)을 삼아 궁중에 머물게 했다. 이윽고 이릉의 군대는 준계산에서 흉노의 주력인 3만이 넘는 기병대를 만나 포위당했다. 준계산 사이의 평원에 주둔하고 있던 이릉의 부대는 대거(大車)를 연결하여 보루를 세웠다. 이어서 이릉 자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보루 밖으로 나가 대오를 갖춘 후에 전방에는 극과 방패를 든 군사들을, 후방에는 궁노수를 배치시키고 군령을 내렸다.
「북소리가 나면 공격하고 쟁이소리가 나면 후퇴하라!」
 흉노군은 병력이 적은 한군을 보고 곧바로 대거로 세운 보루를 향해 돌격해왔다. 이릉이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쇠뇌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자 적병들은 시위소리와 함께 화살을 맞고 넘어졌다. 흉노가 패퇴하여 산 위로 도망치자 한군이 뒤를 추격하여 수천 명의 적군을 죽였다. 선우가 크게 놀라 좌우 현왕(賢王)을 소집하여 8만의 군사로 이릉의 부대를 포위했다. 이릉은 싸우면서 남쪽으로 도망쳐 며칠 후에는 어느 산골짜기에 들어섰다. 전투는 여전히 계속되어 많은 사졸들이 화살을 맞고 부상을 당했는데 세 발 이상 맞은 자들은 수레에 싣고 두 발을 맞은 자들은 수레를 끌고 한 발을 맞은 자들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 이릉이 말했다.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북소리가 울려도 일어나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 군중에 요사스러운 여인이 있어서가 아닌가?」
  처음에 군대가 출동할 때  변경 밖으로 추방당했던 관동의 도적들 처나 딸들이 따라와 군사들의 아내가 되어 수레에 숨어있었다. 이릉은 그녀들을 수색해서 모두 칼로 찔러 죽였다. 다음 날이 되자 흉노와 다시 싸워 3천여 명의 적군 수급을 얻을 수 있었다. 이릉의 부대는 흉노의 포위를 동남쪽으로 뚫고 나가 용성(龍城)⑨으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서 4~5일 정도 도망치다가 갈대가 우거진 광할한 소택지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흉노의 추격군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이용하여 갈대숲에 불을 질렀다. 이에 이릉은 군사들에게 맞불을 놓도록 해서 구사일생으로 공지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시 계속 도망쳐 어느 산 밑에 이르렀는데 그때는 이미 선우는 산상에 기다리면서 그의 아들에게 기병을 주어 이릉의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이릉의 보군은 숲 사이에서 숨어 흉노의 기병에 대적하여 다시 수천의 적군을 참살하고 연노(連弩)를 산상의 선우를 향해 쏘게 했다. 이에 선우는 산을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그날 포로가 된 흉노의 병사들이 한 입으로 말했다.
「우리 선우께서 말씀하시기를‘저 한나라 군사들은 정예병들이라 아무리 오랫동안 공격해도 격파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군사들을 남쪽의 한나라 국경의 요새까지 유인하고 있다. 계속 우리가 저들을 추격한다면 그들의 복병에 걸리지 않겠는가?」
 그러자 많은 흉노의 당호(當戶)들과 군장들도 선우를 향해 말했다.
 「선우께서 수만 기의 기병을 이끌고 수천에 불과한 한나라 군사들을 무찌르지 못한다면 이후로 두 번 다시는 군사들을 동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한나라는 더욱 우리 흉노를 무시할 겁니다. 지금 이 계곡에서 다시 한 번 더 맹공을 가하면 4-50리  못 가서 평지에 이를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한군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그때 철군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이릉의 군사들은 더욱 위급해졌다. 흉노가 병력을 증원하여 더욱 세차게 공격하자 이릉의 군대는 하루에 수십 번이나 전투를 치르게 되어 다시 2천여 기의 적군을 죽였다. 이에 결국 한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흉노는 철수를 준비했다. 그때 마침 교위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도망쳐 흉노진영에 투항한 이릉 군중의 관감(管監)의 직에 있던 지휘관 한 명이 하나라 진영의 정세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이릉의 부대는 후방에 지원군이 없습니다. 화살도 거의 다 떨어지고 오로지 이릉장군의 직속부대와 성안후(成安侯) 소속의 8백 명이 선봉을 맡고 있는데 황색과 백색의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旗手) 아래에 있습니다. 정예의 기병으로 기수를 사살하면 그들의 진영을 쉽게 깨뜨릴 수 있을 겁니다.」 
 관감이 말한 성안후는 영천(潁川) 출신의 한연년(韓延年)이다. 연년의 부친 한천추(韓千秋)는 제남국(濟南國)의 재상을 지내고 후에 남월원정군에 종군했다가 전사했다. 무제가 한천추의 공을 기려 한연년을 후에 봉하고 이릉의 군중에 교위(校尉)르 삼았다. 관감의 말에 크게 기뻐한 선우는 휘하의 군사들에게 일제히 한군을 공격하라고 명하고  다음과 같이 외치게 했다.
「이릉과 한연년은 빨리 항복하라!」
  흉노의 기병은 한군의 퇴로를 막고 맹렬히 공격했다. 이때 이릉은 골짜기 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언덕 위의 흉노군이 사방에서 쏘는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흉노군과 사투를 벌리면서 남쪽으로 계속 행군하던 한군은 미처 제한산(鞮汗山)에 당도하지 못했다. 하루만에 50만 개에 달하는 화살이 모두 떨어졌음으로 이에 전차를 버리고 후퇴했다. 그 당시 한군은 3천여 명이 생존해 있었는데 모두 적수공권으로 병거의 바퀴살을 뜯어내어 무기로 삼고 군리들은 단지 단도만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행군 중에 큰 산의 험한 지형을 만나 협곡으로 들어가자 선우가 험지에 의지하여 한군의 진로를 막고 통나무와 바위를 굴려 공격했다. 많은 한군이 바위에 깔려 죽고 더 이상 앞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평복차림으로 옷을 바꿔 입은 이릉이 혼자서 진영 앞으로 나가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나를 따라 나설 필요가 없다. 나 혼자 나가서 선우를 잡아와야 되겠다.」
  그리고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온 이릉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가 싸움에 졌다. 이제는 죽음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구나!」
  곁에 있던 군리 한 사람이 듣고 말했다.
「장군은 이미 흉노의 군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황제께서는 틀림없이 장군의 죽음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후에 별도의 방법을 강구하여 한나라로 돌아가신다면 옛날 착야후가 비록 흉노의 포로가 되었지만 후에 탈출하여 한나라에 돌아가자 황상께서는 예를 다하여 대우했습니다. 하물며 흉노를 진동시킨 장군이신데 어찌 황제께서 용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릉이 대답했다.
「그대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싸우다 죽지 않는다면 나는 장사가 아니다」
  그리고는 이릉은 부하가 들고 있던 정기을 빼앗아 자른 후에 다른 중요한 물건과 함께 땅속에 묻으면서 말했다.
「화살이 몇 십 개만 더 있어도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텐데 아무런 무기가 없으니 다시 싸울 수가 없구나! 날이 밝으면 우리는 그저 흉노의 포승에 묶여 포로가 될 것이다. 너희들은 각자 날짐승처럼 각자 흩어져 혹시라도 탈출하게 되거든 우리들의 일을 황제폐하께 고하도록 하라!」
  이릉은 장병들 한 사람 당 두 되의 건량과 한 덩어리의 얼음을 주고 차로장에 당도하면 다른 병사들을 기다리도록 약속했다. 이윽고 한 밤중이 되어 북소리를 신호로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북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이릉과 한연년이 같은 말에 타고 십여 명의 장사들과 함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흉노의 수천 기가 이릉 일행의 뒤를 추격하자 한연년은 싸움 중에 전사했다. 이릉이 한탄하면서 말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폐하를 뵈올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 흉노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그를 따르던 부하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목숨을 구해 차로장에 당도할 수 있었던 자들은 4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릉이 싸움에서 패해 흉노에게 항복한 곳은 차로장에서 불과 백여리 떨어진 곳이었다. 차로장의 수장이 올린 싸움의 정황을 듣고 이릉이 전사한 것으로 생각한 황제는 이릉의 모친과 처자를 불러 접견하고 관상을 보게 했더니 그들의 얼굴에 죽음의 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후에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무제가 대노하여 진보(陳步)을 불러 견책하자 진보는 자살하고 말았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모두 이릉을 매도했다. 무제가 이릉의 일에 대해 태사령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이 대답했다.
「이릉은 평상시에 모친에게 효성을 다했으며 사졸들에게는 신의를 가지고 대하면서 항상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의 위난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릉은 오랜 세월 국사의 뜻을 가슴 속에 키워왔습니다. 오늘 싸움에 한 번 패해 불우한 처지에 빠진 그를 조정의 신하들이 자신의 몸과 가속들의 생명을 보전하면서 다른 사정을 도외시하고 이릉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옳지 않으며 실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물며 이릉은 5천도 채 되지 않은 소수의 군사로 흉노의 심장부까지 진군하여 수만 명의 적군을 참살했습니다. 이에 적군은 죽거나 상해를 입은 군사들을 구할 겨를도 없이 다시 활을 쏠 수 있는 장정들을 모두 징집하여 이릉의 군사들을 포위하여 더욱 세차게 공격했습니다. 그는 스무 배나 더 많은 적군과 싸우면서 천리를 행군하다가 마침내 전사들은 화살이 떨어져 적수공권으로 우박처럼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도 여전히 목숨을 돌보지 않고 육박전을 전개하여 무소한 적군을 살상했습니다. 이릉 장군이 부하들로 하여금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게 만든 것은 옛날 명장들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릉장군의 몸이 여러 겹의 포위망에 떨어져 싸움에 패하게 되었지만 그가 적군을 살상한 공적은 천하에 전해 고양시키는데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그가 싸움 중에 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후에 기회를 보아 공을 세워 속죄하여 한나라 조정에 보답하려고 하기 때문일 겁니다.」
  처음에 천자가 이사장군에게 대군을 주어 출정시켰을 때 이릉에게는 단지 치중을 책임지는 일을 맡겼을 뿐이었다. 후에 이릉과 선우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이사장군의 전공은 소소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사장군의 전공을 폄하하기 위해 일부러 이릉을 비호한다고 생각한 황제는 사마천을 하옥시키고 궁형에 처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릉에게 구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한 무제가 말했다.   「이릉이 변경의 요새를 나갈 때 원래 강노도위 노박덕에게 명을 내려 합동작전을 펼치라고 했다. 그러나 간교한 늙은 장군이 올린 상주문 때문에 내가 명을 바꾸어 결국은 이릉의 군대가 전멸시키고야 말았다.」
  무제는 사자를 파견하여 이릉의 부대원 중 생환자들을 위로하게 하고 포상했다.
  이릉이 흉노에 항복한지 1년이 되는 해에 무제는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公孫敖)⑩에게 군사를 주어 흉노의 영토로 깊숙이 들어가 적군을 공격하면서 이릉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 공손오가 무제에게 고했다.
「포로로 잡은 흉노의 군사들이 고하는 바에 의하면 이릉은 흉노의 군중에 있으면서 한군과의 싸움을 위해 흉노군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릉에 대해 더 이상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보고를 접한 무제는 이릉의 집안 사람들을 멸족형에 처해 그의 모친과 형제처자를 모두 사형시켰다. 농서(隴西) 일대에 살던 사인(士人)들은 모두 이릉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집안에까지 누를 끼친 이릉의 행태를 수치로 여겼다. 후에 흉노의 왕정에 당도한 한나라의 사자를 보고 이릉이 말했다. 
「나는 한나라를 위해 보졸 5천 명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다가 구원군의 도움을 받지 못해 패했다. 그런데 내가 무슨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한나라는 나의 전 가족을 몰살시켰단 말인가?」
  한나라 사자가 대답했다.
「황제께서는 이장군께서 흉노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말을 들으셨기 때문이었소.」
  이릉이 말했다.
 「흉노를 훈련시킨 사람은 내가 아니었소.」
  원래 한나라의 색외도위(塞外都尉) 이서(李緖)는 해후성(奚侯城)을 지키다가 흉노가 쳐들어오자 투항했다. 선우가 그를 예우하여 언제나 이릉보다 상좌에 앉았다.  흉노의 군사들을 훈련시킨 일로 자신의 집안이 멸족되었다는 것에 한을 품은 이릉은 사람을 보내 이서를 죽였다. 대연지(大閼氏)가 알고 이릉을 죽이려고 했으나 선우가 이릉을 북방으로 옮겨 숨겼다. 대연지가 죽은 후에 왕정으로 돌아온 이릉을 선우는 예전보다 더욱 후대했다. 선우가  딸을 주어 사위로 삼은 이릉은 우교왕(右校王)에, 위율(衛律)은 정령왕(丁靈王)으로 세웠다. 이로써 이릉과 위율은 흉노의 귀족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위율의 부친은 원래 흉노 출신으로써 장수(長水)로 이주해서 살다가 위율을 낳았다. 한나라에서 태어난 위율은 성장하면서 장대한 체구의 용사가 되었다. 그는 협율도위 이연년과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이연년이 위율을 흉노로 보내는 사자로 무제에게 천거했다. 그가 흉노에서 돌아왔을 때 이연년은 모반죄로 사형에 처해졌고 그의 가족들은 관노가 되어있었다. 위율은 이연년과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흉노로 도망쳐 투항했다. 그는 선우의 총애를 받아 항상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이윽고 선우의 막사 밖에서 살던 이릉을 선우가 큰일이 있으면 불러서 의논했다.
  기원전 86년, 한나라에서는 무제가 죽고 뒤를 이은 소제(昭帝)의 보정(輔政)이 된 대장군 곽광(霍光)⑪과 좌장군 상관걸(上官桀)⑫은 이릉과 친교가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릉의 옛 친구였던 농서(隴西) 사람 임입정(任立政) 등 세 사람을 찾아 흉노로 보내 이릉을 한나라로 데려오려고 했다. 흉노에 사자로 온 임입정 등을 선우가 연회를 열어 접대하자 이릉과 위율 등도 함께 참석했다. 선우 때문에 이릉과 사사로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임입정 등은 눈짓하며 그들이 차고 있던 칼자루의 고리를 수차례 쓰다듬고 이릉의 발목을 자신의 발을 쥐어보였다. 칼자루의 환(環)은 곧 환(還)을 의미하고 발을 만지작거린 것은 ‘주(走)’로 도망치라는 뜻으로 한나라로 돌아오라는 뜻을 암시한 것이었다. 선우가 마련한 주연이 파하자 이릉과 위율은 다시 소를 잡아 음식을 마련하고 술을 준비하여 옛날 한나라에서 온 옛친구들과 회포를 풀며 서로 위로하면서 술을 마셨다. 이릉과 위율 두 사람은 호복을 입고 상투를 틀고 있었다. 입정이 큰소리로 말했다.
「새로운 황제가 서자 한나라 조정은 대사면령을 내려 지금 중국은 매우 평안할 뿐만 아니라 황제의 나이는 어직 어리기 때문에 대장군 곽광과 좌장군 상관걸이 보정을 맡고 있습니다.」
  임입정은 그 말로 이릉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했으나 이릉은 아무 말로 하지 않았다. 이윽고 입정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펴보다가 상투를 튼 자기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나는 이미 흉노 사람이 되었소.」
  잠시 후 위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바꿔입기 위해 자리를 뜨자 입정이 이릉을 보고 말했다.
「소경, 고생이 얼마나 많으십니까? 곽광 대장군과 상관걸 좌장군 두 보정께서 소경에게 안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릉이 대답했다.
「곽공과 상관 대인들은 잘 지내고 있소?」
「두 분 보정께서는 소경께서 고향에 돌아와 부귀를 누리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릉이 작은 목소리로 입정에게 말했다.
「소공(少公),내가 한나라로 돌아가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요. 나는 단지 치욕을 다시 당하게 될까봐 걱정할 뿐이오.」
  이릉이 미처 말을 다 끝내기 전에 위율이 자리에 돌아왔음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위율이 임입정을 향해 말했다.
「이소경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굳이 한나라에만 몸을 매일 필요가 없소.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했고, 유여(由餘)는 진(晉)나라를 떠나 서융(西戎)에 살다가 다시 진(秦)나라로 들어가 진목공(秦穆公)을 모셨소. 그런데 지금 무엇 때문에 옛날 살던 나라를 운운할 필요가 있겠소?」
  그리고는 술자리를 끝내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임입정이 이릉과 같이 걸으면서 말했다.
「소경께서는 지금에라도 돌아가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이릉이 대답했다.
「대장부가 어찌 치욕을 두 번이나 당할 수 있던 말이오?」
  그리고 이릉은 흉노에서 20년을 더 살다가 한소제 원평(元平) 원년 기원전 74년에 노환으로 죽었다. 


주석
①이광(李廣)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19년에 죽은 서한 때의 명장이다. 지금이 감숙 진안(秦安)인 농서(隴西) 성기(成紀) 출신이다. 기사(騎射)에 능했다. 한문제(漢文帝) 때 흉노정번전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음으로 랑(郞)을 거쳐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되었다. 한경(漢京)제 때 농서도위(隴西都尉), 기랑장(騎郞將), 효기도위(驍騎都尉) 등의 직책을 거쳐, 상곡(上穀), 상군(上郡), 북지군(北地郡), 운중군(雲中郡) 등의 태수가 되어 흉노의 공격을 물리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무제가 즉위하자 이광은 미앙궁(未央宮) 위위(衛尉), 효기장군(驍騎將郡) 되었다. 후에 우북평(右北平) 태수로 부임하자 그의 무용을 두려워한 흉노가 이광을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르며 감히 이광이 지키던 우북평 땅을 침범하지 못했다. 이광은 생전에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회나 치르면서 후(侯)에 봉해진 휘하의 부하장수들은 수십 명에 이르렀으나 정작 본인은 후가 되지 못했다. 원수(元狩) 4년 기원전 119년, 흉노를 정벌군을 이끌고 출전하영 대장군 위청의 부대에 소속되어 출전했다가 중간에 길을 잃어 추궁을 당하자 자살했다. 후에 흉노와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항복한 이릉(李陵)은 이광의 손자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받아 발분하여 《사기(史記)》를 지었다.
②이광리(李廣利) : 서한의 음악가인 이연년(李延年)이 그의 여동생 이부인(李夫人)을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고 노래로 소개하여 한무제에 의해 총애를 받자 이연년의 동생 이광리도 천거되어 장군이 되었다. 한무제 37년(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장건(張騫)의 원정으로 서역의 사정이 알려지자 이광리가 군사를 이끌고 대완(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한혈마(汗血馬)를 얻어 한무제에게 바쳤다. 그 공로로 이광리는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후 4년간 고전하면서도 대완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서역 제국과의 통상의 길을 열어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여졌다. 그후 이부인이 죽고 형 이연년이 실각하자 무고(巫蠱) 사건에 연루되어 흉노에 투항했으나 얼마 후에 살해당했다.
③대원(大宛) :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주(州)와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주가 이 지역에 해당된다. 유사 이전부터 이란계 주민에 의한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동서교통의 요지였다. 페르가나는 역대 중앙아시아 제국의 한 요지가 되어 왔는데, 특히 18세기에 이르러 코칸드 한국(汗國)이 성립되면서부터 오시 ·안디잔 ‧ 마르길란(현재의 페르가나) · 코칸드 · 나망간 등의 여러 도시가 일어났다.
➃염수(鹽水) : 염택(鹽澤)으로 지금의 신강성 나포박(羅布泊 : Nopnor Lake)이다. 감숙성과의 경계에 있는 고목탑격사막(庫木塔格沙漠 : Kumtag Desert)에 있는 오아시스다.《사기·대완열전(大宛列傳)》에 “돈황(燉煌)에 주천도위(酒泉都尉)를 설치하고 서쪽의 염수(鹽水)에 이르기 까지 초소를 줄지어 세웠다.”라는 기사가 있다.
⑤노박덕(路博德) :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고 서한의 장령으로 서하(西河) 평주(平州) 출신이다. 평주는 지금의 내몽고 동승현(東勝縣)이다. 한무제 때 우북평(右北平)의 태수가 되어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 부대에 여러 번 종군하여 흉노와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한무제 원수(元狩) 4년 기원전 119년, 부리후(符離侯)에 봉해졌다. 후에 위위(衛尉)룰 거쳐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임명되어 남월을 평정했다. 한무제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 104년, 그의 아들이 지은 죄에 연좌되어 후의 작위를 잃었다가 후에 강노도위(彊弩都尉)가 되어 거연(居延)에 주둔했다. 주둔지에서 병사했다. 
⑥착야후(浞野侯) : 원봉(元封) 3년 기원전 109年,누란이 한나라의 사절을 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서역으로 통하는 비단길을 끊자 조파노가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고사성(姑師城)을 함락시키고 누란왕을 포로로 잡아왔다. 조파노는 그 공으로 착야후에 봉해졌다.
⑦조파노(趙破奴) : 서한의 장령이다. 《한서(漢書)》에는 태원(太原) 출신이라고 하나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에는 구원(九原) 출신이라고 했다. 일찍이 도망쳐 흉노에서 살다가 얼마 후에 한나라로 돌아와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 막사의 사마(司馬)가 되었다. 한무제 원수(元狩) 2년 기원전 121년, 곽거병의 흉노정벌군에 종군하여 흉노의 왕 2명을 포로로 잡은 공을 세워 종표후(從驃侯)에 봉해졌다. 원정(元鼎) 5년 기원전 112년, 주금(酎金) 죄에 연루되어 후에서 폐해졌다. 주금이란 제후(諸侯)가 황실이 지내는 제사에 소요되는 비용으로 바치는 공금(貢金)이다. 원봉(元封) 3년 기원전 108년, 흉하장군(匈河將軍)이 되어 누란(樓欄)을 공격하여 누란왕을 포로로 잡아왔음으로 그 공으로 착야후(浞野侯)에 봉해졌다. 누란은 지금의 신강성 동부의 나포박(羅布泊) 호수 일대에 존재였던 유목국가다. 태초(太初) 2년 기원전 103년, 준계장군(浚稽將軍)이 되어 2만의 기병을 이끌고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했으나 싸움에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흉노에서 10년 동안 잡혀있다가 천한(天漢) 원년 기원전 100년, 탈출하여 한나라로 돌아왔다. 후에 무고(巫蠱)의 사건에 연루되어 멸족되었다. 
⑧수항성(受降城) : 한무제 원봉(元封) 6년 기원전 105년, 흉노의 좌대도위(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이고 투항하겠다는 뜻을 전해오자 한나라는 그들의 항복을 받기 위해 공손오(公孫敖)를 시켜 수항성을 축조하게 했다. 수항성은 지금의 내몽고 포두시(包頭市) 서쪽의 오랍특기(乌拉特旗) 북이다.
⑨용성(龍城):흉노가 제천제를 지내던 곳이다. 한나라 초의 용성은 지금의 내몽고 오란찰포맹((烏蘭察布盟)의 음산(陰山) 일대에 있었다. 이어서 원수(元狩) 4년 기원전 119년 이후로는 북쪽의 몽고공화국의 악이혼하(鄂爾渾河) 서쪽과 석시달목호(碩柴達木湖) 부근으로 옮겼다. 본문의 용성은 원수 4년 이전의 내몽공 성도인 호화호특 서쪽 음산 남록의 초원이다.
⑩공손오(公孫敖)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93년에 죽은 서한의 장군이다. 지금의 감숙성 합수현(合水縣)인 북지군(北地郡) 의거(義渠)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기 시작해 기마술과 사격술에 뛰어났다. 한경제 때 양가의 자제 신분으로 흉노정벌전에 참전하여 용기와 무예를 드러냈음으로 궁중으로 불려가 기랑(騎郞)이 되었다. 후에 한무제를 모시다가 위청(衛靑)과 친구가 되어 위청이 죄를 지었을 때 그를 구한 적도 있었다. 관직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올랐다. 원광(元光) 6년(전129년) 기장군(騎將軍)에 임명되어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과 함께 길을 나누어 흉노를 공격했으나 휘하의 군졸들을 대부분 잃었다.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무용을 발휘하여 힘껏 싸운 것이 인정되어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원삭(元朔) 5년 (전124) 교위로 기용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종곤하여 흉노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합기후(合騎侯)에 봉해졌다. 다음 해에 중장군(中將軍)이 되어 위청을 따라 흉노를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원수(元狩) 2년 (전121년) 곽거병과 길을 나누어 흉노를 공격하기로 했으나 중도에 길을 잃어 곽거병과의 약속한 기일을 지키지 못해 참수형의 판결을 받았다. 다시 속죄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다시 얼마 후에 교외로 기용되어 태초(太初) 원년(전 104년) 인우장군(因杅將軍)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음산(陰山)의 북쪽에 수항성(受降城)을 건설했다. 천한(天漢) 4년(전97) 이광리(李廣利)와 함께 길을 나누어 흉노를 치다가 흉노의 좌현황의 주력부대를 만나 많은 군사를 잃었음으로 참수형을 선고 받고 옥에 갇혔으나 자살을 위장하여 도망쳐 민가에 숨어 살다가 발각되었으나 사면을 받아 다시 장군으로 복귀했으나 한무제 태시(太始) 4년 기원전 93년 일어난 무고(巫蠱)의 란 때 부인이 연좌되어 멸족되었다. 평생 동안 4번의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2번은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고 한 번은 거짓으로 죽었다고 도망쳤고 다시 마지막으로 멸족된 특이한 전력의 소유자다. 공손오는 이릉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한무제에게 보고해 이릉의 가족이 몰살된 단초를 제공하여 이릉이 후에 한나라에 돌아오는 길을 막았다. 또 옛날 위청이 흉노를 정벌할 때 같이 종군한 이광의 자살에도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이릉 집안과는 악연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⑪곽광(霍光)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8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다. 자는 자맹(子孟)이고 지금의 산서성 임분(臨汾)인 하동 평양(平陽) 출신이다. 표기장군 곽거병의 이모동생이다. 한무제의 총애를 받아 처음에 낭(郞)으로 시작하여 계속 승진하여 광록대부 등으로 올라 항상 무제 곁에서 시봉했다. 한무제가 죽을 때 상홍양(桑弘羊)과 함께 불러 어린 한소제를 보좌하라는 유명을 받았다. 8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소제 밑에서 대사마와 대장군을 맡아 정권을 오로지 하다가 소제가 죽자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곧바로 폐위시키고 한소제(漢昭帝)를 다시 추대했다. 한소제는 무고의 란으로 억울하게 죽은 폐태자 유거의 손자다. 한소제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서한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시원(始元) 6년 기원전 81년, 한소제의 명으로 승상 전천추(田千秋), 어사대부 상홍양 등과 함께 염철(鹽鐵)의 전매정책에 대해 전국의 학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염철론(鹽鐵論)》은 당시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의 발언을 기록한 책이다. 국가의 전매제(專買制)에 대한 인류 최초의 학술서다. 
⑫상관걸(上官桀)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80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다. 농서 상규(上邽) 출신으로 기사(騎射)에 능해 군대에 들어갔다. 젊었을 때 우림기문랑(羽林期門郞)이 되었고 무제에 의해 감천궁(甘泉宮)에서 북변을 지키는 장수로 발탁되어 흉노를 물리쳤다. 무제 후원 2년 기원전 87년, 무제가 병이 들었을 때 좌장군(左將軍)의 신분으로 곽광(霍光)과 함께 어린 나이로 제위를 잇게 된 소제(昭帝)를 보좌하라는 고명을 받았다. 시원(始元) 원년 기원전 85년 안양후(安陽侯)에 봉해져 식읍 3천 호를 받았고  그의 손녀는 소제의 황비가 되어 곽광과 권력을 두고 다투었다. 원봉(元鳳) 원년 기원전 80년 모반죄로 그의 아들이며 표기장군(驃騎將軍) 상관안(上官安)과 함께 살해되고 그의 집안은 멸족되었다.

答蘇武書(답소무서)
이릉은 후에 흉노에 사신으로 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와 교유하며 지냈다. 소무는 한나라와 흉노가 화해함에 따라 19년에 걸친 억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이릉은 소무가 귀국한 뒤에 《답소무서(答蘇武書)》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릉은 이 편지에서 흉노와 벌였던 치열한 전투에 대하여 "전사한 병사들이 들판에 쌓이고, 살아남은 병사는 100명도 안 되었다. 그들도 모두 부상을 당하여 더 이상 창과 방패를 들고 있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팔을 휘두르며 한 번 큰 소리로 외치자 창에 찔려 쓰러져 있던 병사들도 모두 일어났고, 칼을 들어 오랑캐를 가리키자 오랑캐들은 말을 달려 달아나기에 바빴다[死傷積野, 餘不滿百, 而皆扶病, 不任干戈. 然陵振臂一呼, 創病皆起, 擧刃指虜, 胡馬奔走]라고 묘사했다.

子卿足下(자경족하)
자경족하께서는

勤宣令德(근선령덕)
근면성실하여 훌륭한 덕이 널리 알려지고

策名淸時(책명청시)
태평한 시절에 조정에서 일하시면서

榮問休暢(영문휴창)
명예를 드높이셨으니

幸甚(행심)
경사스럽고

幸甚(행심)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遠託異國(원탁이국)
외국으로 멀리 몸을 피하는 일을

昔人所悲(석인소비)
옛사람들은 슬피 여겼습니다.

望風懷想(망풍회상)
서로 멀리서 바라보면서 옛친구를 회상하니

能不依依(능불의의)
서로 그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昔者不遺(석자불유)
예전에 보낸 서신을 잊지 않으시고

遠辱還答(원욕환답)
외람되이 답장을 해주셔서

慰誨懃懃(위회근근)
간절하게 위로해 주시고 깨우쳐주심이

有踰骨肉(유유골육)
형제보다 두터웠습니다.

陵雖不敏(릉수불민)
제가 비록 우둔하나
 
能不慨然(능불개연)
어짜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自從初降(자종초강)
처음 적에게 항복한 뒤로

以至今日(이지금일)
오늘까지

身之窮因(신지궁인)
몸 둘 곳이 궁색하여

獨坐愁苦(독좌수고)
홀로 앉아 마음속으로 근심스럽고 괴로워

終日無覩(종일무도)
하루종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但見異類(단견이류)
보이는 것이라곤 모두 낯설었습니다.

韋韝毳幕(위구취막)
그들의 부드러운 가죽 팔찌를 차고

以禦風雨(이어풍우)
취막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羶肉酪漿(전육락장)
양고기와 우유로

以充飢渴(이충기갈)
배고픔과 갈증을 풀었습니다.

擧目言笑(거목언소)
눈을 치켜들고 말하고 웃으려 하지만
 
誰與爲歡(수여위환)
누가 저와 함께 기뻐하겠습니까?

胡地玄冰(호지현빙)
오랑캐 땅에는 얼음이 두껍고

邊土慘裂(변토참렬)
변방 땅은 얼어 갈라집니다.

但聞悲風蕭條之聲(단문비풍소조지성)
들리는 것은 비풍의 쓸쓸한 소리뿐입니다.

涼秋九月(량추구월)
차디찬 9월이 오면

塞外草衰(새외초쇠)
새외의 풀은 말라 버립니다.

夜不能寐(야불능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側耳遠聽(측이원청)
귀 기우려 멀리서 들리는 소리 듣고

胡笳互動(호가호동)
호인들의 피리소리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牧馬悲鳴(목마비명)
기르는 말들의 슬피 우는 소리

吟嘯成羣(음소성군)
울부짖는 소리 무리지어 들리고

邊聲四起(변성사기)
변경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옵니다.

晨坐聽之(신좌청지)
아침에 일어나 앉아서 이런 소리를 듣노라면

不覺淚下(불각루하)
저도 모르게 눈물이 되어 떨어집니다.
 
嗟乎子卿(차호차호)
아, 자경이시여!

陵獨何心(릉독하심)
저만이 어떤 마음이길래

能不悲哉(능불비재)
혼자만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與子別後(여자별후)
제가 당신과 헤어진 후

益復無聊(익복무료)
더욱 무료해졌습니다.
 
上念老母(상념노모)
생각해보면 노모께서는

臨年被戮(임년피륙)
연로하신데도 죽임을 당하고

妻子無辜(처자무고)
처자는 죄가 없는데도

並爲鯨鯢(병위경예)
살육을 당했습니다.
 
身負國恩(신부국은)
저는 국은을 저버려

爲世所悲(위세소비)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子歸受榮(자귀수영)
당신께서는 귀국하여 영광을 받고

我留受辱(아류수욕)
저는 여기 남아 수모를 받고 있으니

命也如何(명야여하)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身出禮義之鄕(신출예의지향)
몸은 예의를 아는 곳에서 태어나

而入無知之俗(이입무지지속)
이 무지한 풍속이 있는 곳에 와서

違棄君親之恩(위기군친지은)
군주와 부모님의 은혜를 버리고

長爲蠻夷之域(장위만이지역)
야만인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 게 되었으니

傷已(상이)
슬플 뿐입니다.
 
令先君之嗣(령선군지사)
선군의 자손이

更成戎狄之族(갱성융적지족)
오랑캐 족속으로 변하다니

又自悲矣(우자비의)
저절로 마음이 슬퍼집니다.

功大罪小(공대죄소)
공로는 크고 죄는 작은데

不蒙明察(불몽명찰)
임금님의 현명하신 살핌을 받지 못하고

孤負陵心區區之意(고부릉심구구지의)
 나라에 보답하고자 하는 내 작은 마음마저도 저버렸습니다.

每一念至(매일념지)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忽然忘生(홀연망생)
홀연히 삶을 잊고

陵不難刺心以自明(릉불난자심이자명)
심장을 도려내어 스스로를 밝히고

刎頸以見志(문경이견지)
목을 찔러 의지를 보이고 싶습니다.

顧國家於我已矣(고국가어아이의)
돌아보건대 다만 나라가 저에 대해 한 일이

殺身無益(살신무익)
죽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適足增羞(적족증수)
수치스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故每攘臂忍辱(고매양비인욕)
그래서 매일 억지로 용기를 내고 참아가며

輒復苟活(첩복구활)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左右之人(좌우지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見陵如此(견릉여차)
이러는 저를 보고

以爲不入耳之歡(이위불입이지환)
듣기 거북한 즐거운 말로

來相勸勉(래상권면)
저를 위로했지만

異方之樂(이방지락)
이역에서의 즐거움은

秖令人悲(지령인비)
사람을 슬프게 하고

增忉怛耳(증도달이)
근심만 더해줄 뿐입니다,

嗟乎子卿(차호자경)
아, 자경이시여!

人之相知(인지상지)
사람들은 서로 알고 지내면서

貴相知心(귀상지심)
서로 마음을 이해하여 주는 것이 귀중합니다.

前書倉卒(전서창졸)
지난번에 보낸 서신은 바쁘게 쓰느라

未盡所懷(미진소회)
마음에 있는 생각을 다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故復略而言之(고복략이언지)
그래서 다시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昔先帝授陵步卒五千(석선제수릉보졸오천)
옛날 선제께서 저에게 보졸 오천 군사를 주셔서

出征絶域(출정절역)
먼 흉노지역까지 출정했습니다.

五將失道(오장실도)
다섯 장군이 길을 잃어

陵獨遇戰(릉독우전)
저 혼자서 싸움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而裹萬里之糧(이과만리지량)
식량을 만리 이상 운반하면서

帥徒步之師(수도보지사)
보병을 거느리고

出天漢之外(출천한지외)
한나라 국경을 떠나

入彊胡之域(입강호지역)
강한 오랑컈 땅에 들어가

以五千之衆(이오천지중)
오천 명의 군사로

對十萬之軍(대십만지군)
십만 대군과 대적했습니다.
 
策疲乏之兵(책피핍지병)
피로에 지친 병사를 독려하여

當新羈之馬(당신기지마)
흉노의 정예 기병을 막아냈으며

然猶斬將搴旗(연유참장건기)
적장의 머리를 베고 적기를 빼앗았습니다.
 
追奔逐北(추분축배)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滅跡掃塵(멸적소진)
흔적을 없애고 먼지를 쓸어내듯 하여
 
斬其梟帥(참기효수)
용맹한 적장을 죽였습니다.
 
使三軍之士(사삼군지사)
그래서 모든 군사들이

視死如歸(시사여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陵也不才(릉야불재)
그러나 제게 능력이 없어

希當大任(희당대임)
이러한 중대한 임무를 맡기가 어려웠지만

意謂此時(의위차시)
이때 마음속으로 

功難堪矣(공난감의)
공을 세우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匈奴旣敗(흉노기패)
흉노가 싸움에 패한 후

擧國興師(거국흥사)
거국적으로 군대를 일으키고

更練精兵(갱련정병)
다시 날랜 군사를 훈련시켰는데

彊踰十萬(강유십만)
그 수가 십만이 넘었습니다.

單于臨陣(선우임진)
흉노의 군주 선우가 몸소 진영 앞에 임해

親自合圍(친자합위)
저의 군사를 포위했습니다.

客主之形(객주지형)
한흉(漢兇) 양군은 주객의 형세로

旣不相如(기불상여)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步馬之勢(보마지세)
적의 보병과 흉노의 기병 세력도
 
又甚懸絶(우심현절)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疲兵再戰(피병재전)
지친 병사들이 다시 싸움에 임했는데

一以當千(일이당천)
한 사람이 천 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然猶扶乘創痛(연유부승창통)
그러나 오히려 상처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으며

決命爭首(결명쟁수)
목숨을 다해 다투어 적군을 죽였습니다.

死傷積野(사상적야)
들판은 사상자로 가득차고

餘不滿百(여불만백)
살아남은 사람은 백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而皆扶病(이개부병)
하지만 모두 부상당해

不任干戈(불임간과)
무기조차 들 수 없었습니다.

然陵振臂一呼(연릉진비일호)
그러나 제가 한 번 소리치며 팔을 휘두르자

創病皆起(창병개기)
부상당하고 병든 군사들이 일어나

擧刃指虜(거인지로)
모두 칼을 들고 오랑캐를 가리키니

胡馬奔走(호마분주)
오랑캐들은 말을 타고 도망쳤습니다.

兵盡矢窮(병진시궁)
병사들은 화살이 바닥났습니다.
 
人無尺鐵(인무척철)
손에는 조그마한 무기 하나 없고

猶復徒首奮呼(유복도수분호)
머리에는 투구도 없이 소리 지르며

爭爲先登(쟁위선등)
앞 다투어 진격했습니다.
 
當此時也(당차시야)
이때를 당하여

天地爲陵震怒(천지위릉진노)
하늘과 땅이 저를 위해 진노했다 여긴

戰士爲陵飮血(전사위릉음혈)
전사들은 저를 위해 죽음을 무릅썼습니다.

單于謂陵不可復得(선우위릉불가복득)
저를 사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한 선우는
 
便欲引還(편욕인환)
병사를 인솔하여 돌아가려 했습니다.

而賊臣敎之(이적신교지)
그러나 역적이 우리에게 후원군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遂便復戰(수편복전)
선우가 돌아와 재차 공격했습니다.
 
故陵不免耳(고릉불면이)
그래서 제가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昔高皇帝以三十萬衆(석고황제이삼십만중)
옛날에 고황제께서는 삼십만 대군으로도

困於平城(곤어평성)
 평성에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當此之時(당차지시)
그 당시에는

猛將如雲(맹장여운)
맹장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고

謀臣如雨(모신여우)
 지모있는 신하들이 비오듯 많았으나

然猶七日不食(연유칠일불식)
7일 간이나 굶주리고 나서

僅乃得免(근내득면)
간신히 곤란한 상황을 면했습니다.
 
況當陵者(황당릉자)
하물며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해

豈易爲力哉(기역위력재)
어찌 쉽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而執事者云云(이집사자운운)
조정에서 일하는 고관들은

苟怨陵以不死(구원릉이불사)
죽지 못한 저를 원망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然陵不死(연릉불사)
그렇습니다, 제가 죽지 못한 것은

罪也(죄야)
죄가 됩니다.
 
子卿視陵(자경시릉)
자경께서 저를 보시기에

豈偸生之士(기투생지사)
어찌 제가 구차하게 목숨이나 부지하려는 장수이여
 
而惜死之人哉(이석사지인재)
죽음을 애석히 여길 사람이겠습니까?

寧有背君親(녕유배군친)
어찌 임금과 어버이를 배반하고

捐妻子(연처자)
처자를 버려가면서

而反爲利者乎(이반위리자호)
이익을 추구하는 자이겠습니까?

然陵不死(연릉불사)
제가 죽지 않은 이유는
 
有所爲也(유소위야)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故欲如前書之言(고욕여전서지언)
저번 서신에 말씀드린 것처럼

報恩於國主耳(보은어국주이)
임금님께 은혜를 갚고자 해서였습니다.
 
誠以虛死不如立節(성이허사불여입절)
진실로 헛되이 죽으면 절개를 지키는 것만 못하고

滅名不如報德也(멸명불여보덕야)
생명을 끊는 일은 덕을 보답하는 것만 못합니다.
 
昔范蠡不殉會稽之恥(석범려불순회계지치)
옛날 범려는 회계에서 수치를 당했으나 죽지 않았고

曹沬不死三敗之辱(조매불사삼패지욕)
조말은 세 번 싸워 세 번 패했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卒復句踐之讐(졸복구천지수)
결국 범려는 구천의 원수를 갚았고

報魯國之羞(보노국지수)
조말은 노나라의 수치를 씻었습니다.

區區之心(구구지심)
저의 변변치 못한 생각도
 
切慕此耳(절모차이)
이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何圖志未立而怨已成(하도지미립이원이성)
어찌 뜻을 세워 꾀하지도 않았는데 원망이 생기고
 
計未從而骨肉受刑(계미종이골육수형)
계획을 실현하기 전에 골육이 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此陵所以仰天椎心(차릉소이앙천추심)
이것이 바로 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가슴을 치며
 
而泣血也(이읍혈야)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입니다.
 
足下又云(족하우운)
족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漢與功臣不薄(한여공신불박)
'한왕조는 공신을 후하게 대한다.'고 하셨습니다.
 
子爲漢臣(자위한신)
그대는 한나라 신하인데

安得不云爾乎(안득불운이호)
어찌 이러한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까?

昔蕭樊囚縶(석소번수집)
이전에 소하와 번쾌는 구금당했고

韓彭葅醢(한팽저해)
한신과 팽월은 죽임을 당해 육젓이 되었으며

鼂錯受戮(조착수륙)
조조는 처형되었으며

周魏見辜(주위견고)
주발(周勃)과 두영(竇嬰)은 무고를 입었습니다

其餘佐命立功之士(기여좌명입공지사)
그 외에 천자를 돕고 공을 세운

賈誼亞夫之徒(가의아부지도)
가의나 주아부 같은 사람들은

皆信命世之才(개신명세지재)
진실로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이었고

抱將相之具(포장상지구)
재상과 장군의 그릇이었는데도
 
而受小人之讒(이수소인지참)
소인배들의 참소로 인해

並受禍敗之辱(병수화패지욕)
화난을 당하는 욕됨을 입었습니다.

卒使懷才受謗(졸사회재수방)
그들은 재주가 있었으나 비방을 받다
 
能不得展(능불득전)
능력을 펴보지도 못했습니다.

彼二子之遐擧(피이자지하거)
이 두 사람을 중용되지 않았지만

誰不爲之痛心哉(수불위지통심재)
그들을 위해 누가 애통해 하지 않았습니까?

陵先將軍功略蓋天地(릉선장군공략개천지)
저의 조부께서 세운 공로는 천하를 덮었고

義勇冠三軍(의용관삼군)
의기와 용맹은 삼군 중에 제일이었습니다.
 
徒失貴臣之意(도실귀신지의)
다만 권력 있고 높은 지위의 대신들의 환심을 사지 못해

剄身絶域之表(경신절역지표)
먼 이역 땅에 원정 중에 자결하셨습니다.
 
此功臣義士(차공신의사
이것이 공신과 의사들이

所以負戟而長歎者也소이부극이장탄자야)
창을 쥐고 길게 탄식하는 까닭입니다

何謂不薄哉(하위불박재)
그런데 어찌 후하게 대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且足下昔以單車之使(차족하석이단차지사)
또한 전에 족하께서는 단거로 한나라의 사신이 되어
 
適萬乘之虜(적만승지로)
만승의 강한 오랑캐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遭時不遇(조시불우)
불리한 때를 만나

至於伏劍不顧(지어복검불고)
칼 위에 엎드려 목숨을 돌아보지 않아야 할 때도 있었고

流離辛苦(유리신고)
이곳저곳 떠돌며 고생하다가

幾死朔北之野(기사삭북지야)
북방의 황야에서 거의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丁年奉使(정년봉사)
젊어서 사신으로 와서

皓首而歸(호수이귀)
백발이 성성해져야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老母終堂(노모종당)
노모께서는 돌아가시고

生妻去帷(생처거유)
살아 있던 처도 개가했습니다.
 
此天下所希聞(차천하소희문)
이러한 일은 천하에 매우 드문 일로
 
古今所未有也(고금소미유야)
고금을 통해서도 없었던 일입니다.
 
蠻貊之人(만맥지인)
오랑캐들도

尙猶嘉子之節(상유가자지절)
당신의 절개와 지조를 높이 샀는데

況爲天下之主乎(황위천하지주호)
천하를 통치하는 황제께서는 어떠하셨습니까?

陵謂足下(릉위족하)
제가 보기에 당신께서는
 
當享茅土之荐(당향모토지천)
마땅히 제후왕이 받아야하는 봉지와

受千乘之賞(수천승지상)
천승에 해당하는 상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聞子之歸(문자지귀)
당신께서 귀국하신 후
 
賜不過二百萬(사불과이백만)
하사받은 땅은 겨우 이백만 전뿐이었고
 
位不過典屬國(위불과전속국)
지위는 속국에 불과했으며

無尺土之封(무척토지봉)
봉지는 조금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加子之勤(가자지근)
이것이 당신의 공로에 대한 상이었습니다.
 
而妨功害能之臣(이방공해능지신)
게다가 공훈과 능력있는 사람을 방해한 신하들은
 
盡爲萬戶侯(진위만호후)
모두 만호후의 제후가 되었으며

親戚貪佞之類(친척탐녕지류)
황제의 친척들과 아첨하는 무리들은
 
悉爲廊廟宰(실위랑묘재)
모두 조정의 대신이 되었습니다.
 
子尙如此(자상여차)
당신께서 일찍이 이처럼 대접을 받으셨으니

陵復何望哉(릉복하망재)
저 같은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且漢厚誅陵以不死(차한후주릉이불사)
더욱이 한나라는 제가 죽지 않은 것을 엄하게 질책하고
 
薄賞子以守節(박상자이수절)
절의를 지킨 그대에 대해서는 박한 상을 내렸습니다.

欲使遠聽之臣(욕사원청지신)
먼 곳에서 이런 소식을 접한 신하가
 
望風馳命(망풍치명)
멀리 바라보고 달려가 목숨을 다해 명을 받들기란
 
此實難矣(차실난의)
실로 너무 어렵습니다.
 
所以每顧而不悔者也(소이매고이불회자야)
그래서 매번 생각해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陵雖孤恩(릉수고은)
저는 은혜를 버렸지만

漢亦負德(한역부덕)
한나라 또한 덕을 버렸습니다.
 
昔人有言(석인유언)
옛 사람이 남긴 말에
 
雖忠不烈(수충불열)
‘'충신이 비록 격렬할 필요는 없지만

視死如歸(시사여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한다.'라고 했습니다.
 
陵誠能安(릉성능안)
제가 정말 편안하게 지낸다면

而主豈復能眷眷乎(이주기복능권권호)
황제께서 어찌 저를 못 잊고 생각하시겠습니까?

男兒生以不成名(남아생이불성명)
사나이로 세상에 태어나서 이름을 내지 못하면

死則葬蠻夷中(사즉장만이중)
죽어 오랑캐 땅에 묻힐 뿐입니다.

誰復能屈身稽顙(수복능굴신계상)
그러니 누가 다시 몸을 굽혀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고

還向北闕(환향북궐)
대궐로 돌아가

使刀筆之吏(사도필지리)
옥리가 법을 가지고

弄其文墨邪(롱기문묵사)
장난칠 기회를 갖게 하겠습니까?
 
願足下勿復望陵(원족하물복망릉)
족하께서는 제가 돌아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嗟乎子卿(차호자경)
아, 자경이시여!

夫復何言(부복하언)
더 이상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相去萬里(상거만리)
서로 만리나 떨어져
 
人絶路殊(인절로수)
왕래도 없고 길도 다릅니다.

生爲別世之人(생위별세지인)
살아서 서로 다른 세상의 사람

死爲異域之鬼(사위이역지귀)
죽어서도 서로 다른 곳의 귀신이 될 것이니

長與足下生死辭矣(장여족하생사사의)
당신과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幸謝故人(행사고인)
제 대신 옛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주시고

勉事聖君(면사성군)
황제께도 힘써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足下胤子無恙(족하윤자무양)
그대 아들은 잘 있으니

勿以爲念(물이위념)
염려하지 마십시오.

努力自愛(노력자애)
부디 스스로를 보중하시고
 
時因北風(시인북풍)
북쪽에서 바람이 불 때면

復惠德音(부혜덕음)
다시 소식 주시기 바랍니다.
 
李陵頓首(이릉돈수)
이릉이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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