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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7 12:12:073760 
대원열전(大宛列傳)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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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63. 대원(大宛)1)


대원의 사적은 장건(張騫)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장건은 한중(漢中) 출신이다. 건원(建元) 연간에 랑(郞)이 되었다. 그때 천자가 항복한 흉노를 심문한 결과 말하는 내용이 모두가 같았다. 흉노가 월지(月氏)와 싸워 그들의 왕을 죽여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으며 월지부족들은 멀리 도망가 숨어 살면서 항상 흉노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고 하나 함께 협력하여 공격할 동맹국이 없다고 했다. 그 당시 한나라는 바야흐로 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려고 하던 참이라 그 소리를 듣고 월지에 사자를 보내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그러나 월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흉노의 땅을 통해야 했음으로 능히 사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널리 모집하여 보내려고 했다. 이때 장건이 응모하여 월지에 가는 사자로 뽑혀 당읍씨(堂邑氏)의 가노였던 흉노인 감보(甘父)와 함께 농서(隴西)의 길을 통해 나아갔다. 그러나 흉노의 땅을 통과하던 장건의 일행은 흉노의 군사들에게 잡혀 선우(單于)에게 보내졌다. 선우가 장건을 억류시키며 말했다.

「월지는 우리나라의 북쪽에 있는데 한나라가 어찌하여 사자를 보내는가? 내가 한나라의 남쪽에 있는 월(越)나라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나라는 기꺼이 나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는가? 」

흉노는 장건을 10여 년 동안 억류시키고 그에게 처를 주어 아들을 낳게 했다. 그러나 장건은 한나라 사자의 지절(持節)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흉노에 섞여 오랫동안 사는 동안 행동이 자유롭게 된 장건은 기회를 보아 그의 가속과 함께 도망쳐 월지국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쪽으로 수십 일을 걸어 대원(大宛)에 당도했다. 평소에 한나라에는 재물이 풍부하다는 소식을 듣고 통상을 하고자 했던 대원이 한나라의 사자로 온 장건을 보자 기뻐하며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려하는가?」

장건이 대답했다.

「나는 월지국으로 가는 한나라 사자입니다. 흉노에 의해 억류되어 길을 가지 못한 바가 되었으나 도망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왕께서 사람을 내어주어 저를 월지국까지 보내주십시오. 진실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사자의 임무를 다하고 한나라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왕께서는 한나라부터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을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원이 장건의 말을 믿고 안내원과 통역을 붙여 보내주었다. 장건의 일행은 이윽고 강거(康居)2)에 당도했다. 강거는 다시 장건을 대월지로 보내주었다. 옛날 흉노에 의해 살해되어 그들의 왕을 잃은 대월지는 태자를 왕으로 세워 받들고 있었다. 대하(大夏)3)를 점령하여 신복시킨 대월지는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산에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아 안락한 생활에 젖어 있었고 또한 자기들 나라는 한나라와는 너무 멀어 특별히 흉노에게 복수를 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다. 장건은 월지에서 대하에 이르렀으나 결국은 월지로부터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월지에서 1년여를 머물다가 귀환 길에 올라 남산(南山)4)을 따라 강족(羌族)의 땅을 경유하여 돌아오려고 했으나 도중에 다시 흉노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흉노의 땅에서 또 다시 1년여를 지내던 중 선우가 죽자 좌곡려왕(左谷蠡王)이 흉노의 태자를 공격하여 스스로 선우의 자리를 차지하는 내란이 발생했다. 그 틈을 타서 장건과 흉노인 처 및 감보(甘父)가 함께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나라는 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5)에 감보는 봉사군(奉使君)6)에 임명했다. 장건은 힘이 세고 마음이 넓었으며 사람들 사이에 신망이 있어 흉노를 포함한 서역의 만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감보는 원래 흉노인으로 활을 잘 쏘았음으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짐승들을 활로 쏘아 잡아 식량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처음에 장건이 서역으로 출발할 때는 일행은 모두 100여 명에 달했으나 13년에 걸친 여행 끝에 단지 2 사람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장건이 당도한 곳은 대원(大宛), 대월지, 대하(大夏), 강거(康居) 등의 나라였지만 그 외에 주변의 대국 5-6개 나라에 대해서도 전해 듣고 천자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대원은 흉노의 서남쪽, 한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한나라와는 만 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곳의 풍속은 한 곳에 정착해서 살면서 밭을 갈아 벼와 보리 등의 농사를 짓고 포도로 술을 담궈 마십니다. 좋은 말이 많은데 흘리는 땀은 피와 같아 그 말의 선조는 천마의 새끼라고 합니다. 거주지는 외성과 내성으로 된 성곽 안에서 가옥을 짓고 사는데 크고 작은 70여 개의 성읍에 백성들은 수십 만입니다.


대원은 흉노의 서쪽에 있고 한나라에서는 정서(正西)이고 한나라로부터 만 리입니다. 그 나라의 풍속은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밭을 갈아 벼와 보리를 심어 주식으로 삼습니다. 포도주를 담그고 핏물 같은 땀을 흘리는 한혈마(汗血馬)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그 조상은 천마(天馬)의 새끼라고 합니다. 성곽이 있고 그 안에 가옥을 짓고 삽니다. 그 나라의 지방에는 크고 작은 성 70여 개가 있고 백성들은 수효는 수 십 만에 달합니다. 그들의 무기는 창과 활이며 군사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쏩니다. 그 북쪽에는 강거, 서쪽에는 대월지, 서쪽에는 대하, 동북쪽에는 오손(烏孫)이 있고 동쪽에는 우온(扜鰛)과 우전(于窴)이 있습니다. 우전의 서쪽에는 강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서해(西海)로 들어갑니다. 그 동쪽의 강은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으로 흐릅니다. 염택의 물은 지하로 흘러들어갔다가 그 남쪽의 황하의 발원지에서 솟아납니다. 옥돌이 많이 산출되고 황하는 중국으로 흐릅니다. 누란(樓蘭)과 고사(古事)는 성곽이 있고 염택과 인접해 있습니다. 염택에서 장안까지는 5천 리입니다. 흉노의 왼쪽은 바로 염택의 동쪽이고 농서(隴西)의 장성에 이르러 남쪽으로는 강(羌)과 접하고 한나라와 통하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오손(烏孫)은 대원의 동북 쪽으로 2천 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유목을 하는데 흉노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자가 수만 명이고 싸움에 나서면 용감합니다. 옛날에는 흉노에 복속되었지만 지금은 세력이 커져 흉노에 보낸 인질들을 모두 귀국시키고 지금은 회합에 참가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강거(康居)는 대원 서북으로 2천 리 되는 곳에 있습니다. 떠돌아다는 생활을 하며 월지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길 수 있는 군사가 8-9만에 이르고 대원과 이웃해 있습니다. 나라는 작아 남쪽지방은 월지에 의해 통제되고 동쪽은 흉노를 받들고 있습니다.


엄채(奄蔡)는 강거에서 서북쪽으로 2천 리 떨어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목생활을 하며 강거와 풍속이 같습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군사는 10여 만 명에 달하고 끝이 보이지 않은 큰 못을 접하고 있으며 아마도 그곳이 북해(北海)인 것 같습니다.


대월지는 대원의 서쪽으로 3천 리 되는 곳에 있고 규수(嬀水)7)의 북쪽에 있습니다. 그 남쪽에는 대하(大夏), 서쪽에는 안식(安息), 북쪽에는 강거가 있습니다. 유목국가로 떠돌아다니며 가축을 따라 거처를 옮겨 다닙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군사는 1-2십만에 달합니다. 옛날 나라가 강했을 때는 흉노를 가볍게 대했으나 흉노에 모돈(冒頓)이 대선우가 되고 나서 윌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노상선우(老上單于) 때에는 월지왕을 죽여 그 두개골 뼈로 그릇을 만들어 술을 마셨습니다. 원래 월지는 돈황(敦煌)과 기련산(祁連山) 사이에 나라를 세웠는데 흉노에게 패한 후에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원(大宛)을 지나 대하(大夏)를 쳐서 그들을 신복시키고 마침내 규수(嬀水) 북쪽 평원에 도읍을 세우고 왕정(王庭)으로 삼았습니다. 원래 살던 곳을 떠나지 않고 남은 일부 월지인들이 남산과 강족(羌族)이 거주하던 곳을 지키며 살면서 소월지(小月氏)라고 불렀습니다.


안식(安息)은 대월지의 서쪽 수천 리에 있습니다. 그들의 풍속은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고 벼와 보리를 경작하고 포도주를 생산합니다. 성읍은 대원과 비슷하며 나라에 속한 성읍은 대소 수백 개가 있으며 땅은 사방 수천 리에 달해 그 중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규수(嬀水)가 흐르고 있고 시장이 있는데 백성들이나 상인들은 수레와 배를 가지고 인접한 나라나 수천 리 되는 먼 곳을 다니며 장사를 합니다. 은으로 돈을 만들고 그 표면에 왕의 얼굴을 넣고 왕이 죽으면 재빨리 동전을 바꿔 왕의 얼굴을 다시 넣습니다. 그들은 가죽 위에 글을 써서 기록합니다. 그 나라 서쪽에는 조지(條枝)가 있고 북쪽에는 엄채(奄蔡)、여헌(黎軒)이 있습니다.


  조지(條枝)는 안석의 서쪽 수천 리 되는 곳에 있고 서해에 맏닿아 있습니다. 기후는 덥고 습합니다. 농사를 짓고 벼를 경작합니다. 큰 새가 있는데 그 알이 마치 항아리와 같이 큽니다. 사람은 매우 많은데 가는 곳마다 소군장(小君長)들이 있습니다. 안식은 이 나라를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안식의 장로는 조지에는 약수(弱水)와 서왕모(西王母)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대하는 대원의 남쪽 2천 리 되는 곳의 규수 남쪽에 있습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을 하고 성을 짓고 그 안에 집을 짓고 사는데 대원과 같습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대군장은 없고 가는 곳마다 성읍에는 소군장이 있습니다. 그들의 군사는 약하고 싸움을 싫어합니다.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데 능숙합니다. 대월지가 서쪽으로 이주해와 그들을 공격해서 패주시키고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하의 인구는 매우 많아 백만이 넘습니다. 그 도성은 람지성(藍氏城)이라고 하는데 시장이 있어 여러 가지 물품들을 사고팝니다. 그 동남쪽에는 신독국(身毒國)이 있습니다. 】


장건이 말했다.

「신이 대하에 있을 때 공(邛)에서 생산되는 죽장(竹杖)과 촉(蜀)에서 나는 베를 보고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대하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나라 상인들이 신독(身毒)의 시장에서 사왔습니다. 신독은 대하의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을 하고 대체적으로 우리 대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날씨는 불순하고 습하며 여름에는 몹시 덥다고 했습니다. 그 백성들은 코끼리를 타고 싸웁니다. 그 나라에는 아주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 건(騫)이 추측해본 바,대하는 우리 한나라에서 서남쪽으로 1만 2천 리 정도 떨어져 있는 듯 합니다. 오늘날 신독국은 대하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고 또 촉에서 만든 물품들이 있으니 이는 촉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말합니다. 지금 바로 대하로 사자를 보낸다면 강(羌) 족의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길이 험할 뿐 아니라 강족이 매우 싫어하는 일입니다. 또 북쪽으로 조금만 돌아간다해도 흉노에게 잡히고 맙니다. 촉을 통해 곧바로 간다면 길도 가깝고 도중에 도둑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장건의 보고를 받은 천자가 생각했다.

「대원, 대하 및 안식과 같은 큰 나라에 여러 가지 진기한 물품이 많고 백성들은 정착생활을 하면서 중국과는 산업이 비슷하며 군사는 약하고 한나라의 재화와 물품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북쪽의 강한 군사들을 보유한 대월지와 강거와 같은 나라에 뇌물을 주어 이익으로써 회유하여 우호관계를 만들어놓으면 그들을 입조시킬 수 있음이라. 그들이 오면 성의를 다하여 의로써 그들을 복속시킨다면 우리의 영토를 만 리나 넓힐 수 있고 여러 차례 통역을 거쳐서라도 풍속이 다른 이민족을 입조케 하여 우리 한나라의 위엄과 은덕을 천하에 두루 떨칠 수 있지 않겠는가?」

천자는 매우 기쁜 마음이 되어 장건의 말을 찬동하고 그 즉시 장건에게 령을 내려 촉의 건위군(犍爲郡)에서 밀사를 출발시켜 네 길로 나아가게 했다. 그들은 각기 방(駹),염(冉),사(徙),공(邛)과 북(僰) 등의 네 곳에서 출발하여 각기 1-2천 리를 행군하다가 북쪽에서는 저(氐)와 착(筰)에서 막혔고 남쪽에서는 수(嶲)와 곤명(昆明)에서 저지되었다. 군장이 없는 곤명과 같은 종족들은 도둑질을 일삼아 한나라 사신들을 보는 대로 죽이고 약탈해서 한 사람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서쪽으로 천여 리 되는 곳의 전월(滇越)이라는 나라는 코끼리를 타고 다니는데 촉의 상인이 밀무역을 하기 위해 간혹 왕래한다고 했다. 그래서 한나라는 대하를 통해서 전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옛날 한나라가 서남이(西南夷)로 통하기 위해 길을 뚫다가 과다한 비용만 쓰고 성공하지 못하고 중지한 적이 있었다. 이에 장건은 대하와 통할 수 있다고 상주하여 또다시 서남이로 통하는 길을 뚫으려고 했다.


장건은 교위(校尉)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흉노정벌전에 종군했다. 그는 사막에 물과 초지가 있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음으로 군대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 공으로 장건은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다. 원삭(元朔) 6년에 기원전 123년으로 한무제 재위 18년 째 되는 해였다. 다음 해인 원수(元狩) 원년 위위(衛尉)8)의 신분으로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과 함께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우북평(右北平)에서 출격했다. 흉노에 포위되어 공격을 받은 이장군의 군대는 많은 군사를 잃었다. 함께 출전한 장건은 참수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이 해에 한나라는 표기장군 곽거병을 보내 수만 명에 달하는 흉노의 기병을 격파하고 기련산(祁連山)에 이르렀다. 다음 해인 원수 2년 기원전 121년, 흉노의 혼야왕(渾邪王)이 그 부족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해왔음으로 금성(金城)9)、하서(河西) 서쪽에서 남산(南山)을 따라 염택(鹽澤)에 이르는 땅에는 흉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흉노는 때때로 정탐병을 보내기도 했으나 매우 드물었다. 그리고 2년 후에 한나라는 선우를 공격해서 막북으로 쫓아냈다.


그때 천자는 여러 차례 장건에게 대하 등의 나라에 대해 물었다. 후의 작위를 잃은 장건은 그때마다 대답했다.

「제가 흉노에 살고 있을 때 오손의 왕은 곤막(昆莫)이었습니다. 그의 부왕 때 흉노의 서쪽 변경에 살고 있던 작은 나라였던 오손을 흉노가 공격하여 오손의 부왕을 살해하고 곤막을 들판에 버렸습니다. 그러자 까마귀가 고기를 날라와 먹이고 이리가 와서 젖을 먹였습니다. 신이 돕고 있다고 기이하게 생각한 선우가 그를 거두어 키웠습니다. 이윽고 장성한 곤막이 장수가 되어 여러 번 공을 세웠음으로 선우는 다시 그의 부족들을 곤막에게 주어 오래 동안 흉노의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의 백성들을 거두어 기른 곤막은 변방의 작은 고을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그의 부족들은 활을 쏠 수 있는 전사로 성장하여 싸움에 익숙해졌습니다. 흉노의 선우가 죽자 곤막은 그의 부족들을 이끌고 먼 땅으로 이주하여 중립을 지키면서 흉노의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흉노가 군사를 보내 기습을 시도했으나 이기지 못했음으로 곤막을 신인이라고 생각하고 멀리하며 속국으로만 삼고 대대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우는 한나라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으며 혼야왕이 살고 있었던 하서지역은 무인지경으로 비어 있습니다. 원래 만이들은 한나라의 재화와 물품들을 좋아함으로 이때 성의를 다하여 많은 뇌물을 예물로 오손에게 주고 그들을 동쪽으로 불러 옛날 혼야왕의 땅에 이주하게 한 그들과 우리 한나라가 형제의 결의을 맺음으로써 그들을 자연히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곧 흉노의 오른 팔을 자르는 일이 됩니다. 일단 오손과 연계가 되면 그 서쪽에 있는 대하와 같은 다른 나라도 모두 불러 우리의 외신을 삼을 수 있습니다.」

장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천자는 장건을 중랑장(中郎將)에 임명하여 3백 명의 인원과 각기 말 두 필, 그리고 소와 양 수만 두와 수천 만 전에 해당하는 황금과 폐백을 지참케 하고 많은 부사에게도 지절(持節)을 주어 만약 길이 통할 수 있으면 오손의 이웃나라에도 그들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장건이 이미 오손에 당도하자 오손왕 곤막은 흉노의 선우가 사자를 맞이하는 예를 행했다. 장건은 이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만이는 욕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말했다.

「천자께서 내리는 하사품을 왕께서 절을 하지 않고 받으시겠다면 다시 가지고 가겠습니다.」

곤막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사품에 대해서는 절을 했으나 나머지 의식은 그대로였다. 장건이 사자의 신분으로 천자의 유지를 전했다.

「오손은 능히 혼야왕의 옛 땅으로 옮겨 살 수 있고 한나라의 옹주를 곤막의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손의 의론이 나뉘어져 왕은 늙고 한나라는 멀어 그 나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었으며 평소에 흉노에게 오래 동안 복속되어 있었고 또한 가까운 곳에 있어 오손의 대신들은 모두 흉노를 두려워했음으로 하서의 땅으로 이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손왕은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고 장건도 달리 뽀쭉한 방법이 없었다. 곤막에게는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운데 아들의 이름은 대록(大祿)이라고 했는데 굳세고 군사들을 잘 부렸기 때문에 만여 기의 기병을 이끌고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대록의 형 태자에게는 잠취라는 아들이 있었다. 태자가 젊은 나이에 죽게 되자 부왕인 곤막에게 부탁했다.

「반드시 잠취를 태자로 세우시고 절대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시지 마십시오.」

곤막은 태자가 가엽게 생각되어 그의 청을 허락하고 결국 잠취를 태손으로 삼았다. 태자의 자리에 앉지 못한 대록이 노하여 그의 동생들을 모두 회유하여 반란을 일으켜 잠취와 곤막을 공격하려고 모의했다. 이미 늙은 곤막은 항상 대록이 잠취를 살해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잠취에게 만여 기의 기병을 주어 다른 곳에 거처하게 했다. 그리고 곤막 역시 만여 기의 군사를 이끌고 스스로 대비했다. 오손의 백성들은 셋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나 대부분은 그래도 곤막에게 속했다. 곤막 역시 정세가 이러했음으로 감히 자기 마음대로 장건과 약속할 수 없었다.


장건은 데리고 간 부사들을 대완(宛), 강거(康居), 대월지(大月氏), 대하(大夏), 안식(安息), 신독(身毒), 우전(于窴), 우온(扜鰛) 등의 여러 주변 국가에 사자로 보냈다. 오손은 안내인과 통역을 보내 장건 일행을 환송했다. 장건이 이끌고 온 오손의 사자 수십 명은 한나라의 하사품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그들의 말 수십 필을 끌고 왔는데 그들에게 한나라를 시찰시켜 광대함을 알게 했다.

장건이 귀국하자 황제는 그를 대행(大行)10)에 임명하여 구경의 반열에 서게 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죽었다.


한나라가 인구는 많고 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손의 사절들은 귀국해서 정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장건이 보낸 부사(副使)들이 대하 등의 나라와 통호를 하고 수많은 그들의 사절들과 함께 한나라에 돌아왔다. 그래서 결국 서북의 여러 나라들은 한나라와 통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장건이 개척한 길이었음으로 그 후에 사자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 박망후를 칭해 그들의 신임을 얻으려고 했으며 그들 역시 장건으로 인해 그들을 신임했다.


박망후 장건이 죽은 이후에 흉노는 한나라가 오손과 통호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 노하여 오손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어서 오손에 당도한 한나라 사신이 그 남쪽을 지나 대원과 대월지와 같은 나라를 방문하여 접촉하는 모습을 본 오손은 비로소 두려워하며 사자를 보내 말을 바치며 한나라의 옹주와 결혼하여 형제국이 되기를 원했다. 천자가 군신들에게 의논해보도록 하자 모두 말했다.

「반드시 먼저 폐백을 받고난 후에 옹주를 시집보내야 합니다.」

예전에 천자가 역경을 보고 점을 쳐보게 했는데 다음과 같은 괘가 나왔다.

「신마(神馬)가 장차 서북쪽에서 오리라!」

그런 후에 오손의 양마를 얻어 그 이름을 천마(天馬)라 지었다. 이어서 대원의 한혈마(汗血馬)을 얻었는데 더욱 건장했음으로 오손의 말 이름을 서극(西極)으로 짓고 대원의 한혈마의 이름을 천마로 했다. 한나라가 영거(令居)11)의 서쪽에 성을 쌓고 주천군(酒泉郡)을 설치하여 서북의 나라들과 통하게 했다. 이에 한나라의 더욱 많은 사자들이 안식(安息)、엄채(奄蔡)、여헌(黎軒)、조지(條枝)、신독국(身毒國) 등을 방문하도록 했다. 그리고 천자가 대원의 말을 좋아했음으로 사신들은 줄을 이어 끊이지 않고 왕래를 계속했다. 외국으로 나가는 사절들은 한 번에 크게는 수백 명이고 적게는 백여 명에 달했다. 사절들이 지참한 물품들은 대체로 박망후 때와 비슷했다. 그 후에 점차 익숙해지자 차츰 물품의 양을 줄였다. 한나라가 일 년 동안 사절을 많을 때는 10여 차례나 보냈고 적을 때는 5-6번에 달했으며 먼 나라는 일정이 8-9년 걸렸고 가까운 나라는 몇 년 만에 돌아왔다.


이때 한나라가 이미 월을 멸하여 촉과 서남이의 땅이 진동했음으로 그곳의 군장들은 한나라에 관리들을 파견해 주기를 청했다. 그래서 한나라는 익주(益州)、월수(越巂)、장가(牂柯)、침려(沈黎)、문산(汶山) 등에 군을 설치하고 한나라의 국경과 연결시켜 대하와의 왕래를 편리하도록 했다. 뒤를 이어 백시창(柏始昌)과 여월인(呂越人) 등과 같은 사람을 사절로 삼아 한 해에 10여 차례 파견하여 처음으로 설치한 군을 지나 대하로 가게 했으나 모두가 곤명에서 길이 막혀 그들에게 살해되고 지참하고 간 폐백과 물품을 모두 빼앗기고 결국은 대하와 통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나라가 삼보(三輔)12)의 죄수들과 파촉의 군사 수만 명을 동원하여 곽창(郭昌)과 위광(衛廣) 두 장군을 대장으로 삼아 한나라 사자들의 길을 막고 살해한 곤명족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곽위 두 장군은 수만 명에 달하는 곤명족들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아왔다. 그리고 후에 다시 사절을 보냈으나 곤명족들이 다시 사자들에게 피해를 입혀 결국은 대하와 통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쪽의 주천으로 통하는 길로 출발한 사절들은 매우 많아 외국은 점차로 한나라의 폐백과 물품에 싫증을 느껴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박망후가 외국과의 길을 열어 그 공으로 존귀한 신분이 되자 그를 따라다녔던 관리와 병사들은 서로 다투어 외국의 기이함과 이해를 상서하여 사절로 가기를 청했다. 외국은 너무 멀어 사람들이 쉽게 갈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 천자는 그들의 청을 허락하고 부절을 주어 관리나 민간에서 모집하여 그들의 출신을 불문하고 인원을 갖추어 사절단의 인원을 늘려 그 규모를 더욱 확대했다. 그래서 돌아온 사절 중에는 폐물을 도적질한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고 사절로써 천자의 뜻을 어기는 자도 생기게 되었다. 그들은 외국의 사정에 익숙해져 있음으로 취조해서 중죄를 주고 다시 발분케 하여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했다. 그래도 그들은 다시 사절이 되어 외국에 나가기를 원했다. 사신으로 가야할 이유는 끝이 없었고 또한 경솔하게 죄를 범하기도 했다. 수행한 관리들과 군졸들은 외국의 것을 과장해서 칭송했다. 크게 과장한 자에게는 부절을 주어 정사(正使)로 작게 과장한 자에게는 부사의 직을 주었다. 그래서 허황된 말만을 지껄이는 자들은 다투어 사신가기를 원했다. 그 사신이라는 자들은 모두 가난한 집의 자식들로써 관부에서 서역 각국에 보내는 예물을 착복하여 헐값에 처분하고 외국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을 사유화하려고 했다. 외국 역시 한나라 사신들이 사람마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한나라 군사들이 머나먼 자기들 나라까지 원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나라 사신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지 않아 고통을 당하게 했다. 한나라 사절들은 식품을 포함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끊겨 원한이 쌓임에 따라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였다. 루란(樓蘭)13)과 고사(姑師)14) 두 나라는 소국일 뿐이지만 한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길의 요처에 있어 왕회(王恢)15) 등의 한나라의 사신들을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해갔으며 흉노 또한 기병(奇兵)을 내어 서방의 나라와 왕래하는 한나라 사신의 앞길을 막았다. 사절들은 대체로 외국에서 자기들이 당한 재난과 피해에 대해 말하기를 서쪽의 외국들은 모두 성읍이 있기는 하지만 군사가 약해 쉽게 격파할 수 있다고 서로 다투어 말했다.

그래서 천자는 종표후(從驃侯) 조파노(趙破奴)16)를 장군으로 삼아 속국(屬國)의 기병(騎兵)과 군(郡)의 군사 수만 명을 징발하여 흉하수(匈河水)17)까지 진격하여 흉노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흉노는 모두 달아나버린 후였다. 그 다음 해 고사국(姑師國)을 공격하기 위해 조파노 장군은 경기병 700여 기를 이끌고 먼저 가서 루란왕을 포로로 잡고 이어서 고사국도 함께 함락시켰다. 이 군사작전으로 오손이나 대원과 같은 나라들에게 한나라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천자는 개선한 조파노를 착야후(浞野侯)에 봉했다. 외국에 수시로 사절로 다닌 왕회가 루란으로부터 당한 고통을 천자에게 호소하자 천자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조파노를 도와 루란을 공격하여 무찌르도록 명했다. 천자는 루란을 무찌르고 돌아온 왕회를 호후(浩侯)에 봉했다. 그 결과 주천에서 옥문관(玉門關)까지 초소와 요새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줄을 잇게 되었다.


오손이 한나라 여인을 데려가기 위해 말 천 필을 폐백으로 보냈다. 한나라는 강도옹주(江都翁主)18)를 오손왕에게 시집보냈다. 오손왕 곤막은 그녀를 우부인(右夫人)으로 삼았다. 이에 흉노의 선우도 역시 딸을 곤막에게 시집보내자 곤막은 그녀를 좌부인으로 삼았다.

졸지에 젊은 부인을 두 명이나 새로 얻게 된 곤막이 말했다.

「나는 이미 늙었다.」

그리고는 즉시 영을 내려 그의 손자 잠취에게 강도옹주를 주어 그의 처로 삼게 했다. 오손은 말이 많았는데 부유한 사람 중에는 4-5천 필이 말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었다.

옛날 한나라 사절이 안식에 처음 당도했을 때 안식왕은 2만 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동쪽 국경에서 맞이했다. 동쪽 국경과 왕도는 수천 리가 떨어져 있다. 사절의 행렬이 왕성까지 가는 데에는 몇 수십 개의 성읍을 지나갔고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수효는 대단히 많았다. 한나라 사설이 돌아올 때 그들도 사자를 보내 뒤따르게 하여 한나라의 광대함을 보고 큰 새의 알과 여헌(黎軒)의 마술사를 바쳤다. 이어서 대원 서쪽의 환잠(驩潛)、대익(大益),대원 동쪽의 고사(姑師)、우온(扞鰛)、소해(蘇薤)와 같은 나라도 모두 한나라 사자를 따라와 천자에게 조현을 올렸다. 천자는 이를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한나라 사자들은 황하의 원류를 찾았는데 황하의 발원지 우전(于窴)에서 많이 산출되는 옥돌을 캐어와 천자에게 바치자 천자는 옛날의 서적들을 참고하여 황하가 시작되는 이 산의 이름을 곤륜(崑崙)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때 황제는 여러 차례 해상으로 순수를 나가 언제나 외국의 사절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인구가 많은 큰 도시를 지날 때는 재물과 비단을 풀어 하사품으로 나누어주고 풍성한 술과 안주를 갖추어 그들을 후하게 대접함으로 해서 한나라의 부유함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수시로 씨름대회를 열고 기이한 놀이와 진기한 물건들을 진열하여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아 후한 상품을 하사하고 주지육림과 같은 큰 잔치를 베풀어 외국의 손님들로 하여금 각각의 부고에 쌓여있는 재화들을 구경시켜 한나라의 광대함을 보여 외국의 사신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마술사의 기교가 더욱 기묘해지고 씨름의 기예도 해가 갈수록 변화를 더하여 갈수록 성행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서북의 외국 사절들은 오면 가고, 가면 오고 해서 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대원 서쪽의 나라들은 한나라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여전히 교만하고 안일하게 한나라 사절들을 대했으나 한나라 역시 예로써 그들을 대하여 복종시킬 수는 없었다. 흉노와 가까운 오손 서쪽으로부터 안식에 이르는 나라들은 흉노가 월지를 괴롭히고 나서부터는 흉노의 사자가 선우의 편지를 한 통이라도 지니고 있으면 나라마다 음식을 보내주며 감히 억류시키거나 괴롭히지 못했다. 그러나 한나라 사절의 경우는 폐백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면 시장에서 음식을 살 수 없었고 가축을 사서 탈 수도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한나라는 멀리 있을 뿐만 아니라 한나라는 재물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나라 사신들은 원하는 물품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사야만 했는데 이는 또한 그들이 한나라보다는 흉노를 더 무서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원과 그 주변 나라는 모두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다. 부자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저장해 둔 포도주가 만여 섬에 달하고 오래 된 것은 수십 년이 지나도 상하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술마시기를 좋아했고 말은 목숙(苜蓿)을 좋아했다. 한나라 사자가 목숙과 포도의 종자를 가져와서 천자에게 바치자 천자는 목숙과 포도를 비옥한 땅에 심으라고 명했다. 그리고 천마가 많아지고 외국의 사신들이 몰려올 무렵에는 이궁(離宮)과 별관(別觀) 주위의 땅에는 모조리 포도와 목숙이 심어져 있었다. 대원 서쪽에서 안식에 이르는 지역은 나라마다 언어는 비록 달랐지만 풍속은 대체적으로 같았고 서로 간에 언어를 이해했다. 그들의 생김새는 모두 눈이 움푹 들어가고, 턱수염과 구렛나루를 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장사에 능했으며 작은 돈에도 다툼이 많았다. 풍속은 여자가 귀했으며 여자가 말하면 남편이 따라야했다. 이곳에는 명주실과 옻나무가 없었고 철기(鐵器)를 주조하여 쓸줄 몰랐다. 한나라 사신을 따라가 도망쳐 그들에게 항복한 한나라 군졸들이 그들에게 주조법을 가르쳐 병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한나라의 황금과 백금을 얻게 되면 그 즉시 그릇으로 만들었고 돈으로 쓰지는 않았다.


이윽고 한나라 사자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그들을 어렸을 때부터 따라다녔던 자들은 모두 천자에게 지나치게 좋은 말로 고했다.

「대원은 좋은 말들이 이사성(貳師城)에 감추어 두고 한나라 사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천자는 이미 대원의 말들을 좋아하고 있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혹했다. 그 즉시 장사와 거령(車令) 등에게 천금에 해당하는 황금과 황금으로 만든 말을 가지고 가서 이사성에 감추어둔 좋은 말을 사오라고 명했다. 대원 사람들이 한나라의 많은 재물을 보고 서로 상의하며 모략을 꾸미며 말했다.

「한나라는 우리나라와 먼 곳에 있어 그들 사자들 중에는 염수(鹽水)에 빠져 죽는 자도 있고 북쪽으로는 흉노가 막고 있으며 남쪽으로 물과 목초가 없다. 게다가 중도의 많은 곳에 성읍이 끊어져 식량이 떨어질 때도 많다. 한나라 사자가 수백 명이 떼지어 오면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하여 죽은 자는 절반이 넘는다. 그런데 어찌 대군을 이끌고 이곳까지 올 수 있겠는가? 한나라는 결코 우리나라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또 이사성의 말들은 우리 대원국의 보마(寶馬)다.」

그래서 결국 이사성의 보마를 한나라 사절에게 내주지 않았다. 한나라 사자가 노하여 욕을 하며 금으로 만든 말을 망치로 내리쳐 부셔버리고 대원을 떠나갔다. 대원의 귀족들도 화를 내며 말했다.

「한나라 사자가 우리는 너무 가볍게 보는구나!」

대원은 한나라 사자들을 돌려보내놓고는 다시 그 동쪽 변경의 욱성(郁成)의 왕에게 령을 내려 한나라 사자들을 공격하여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황제는 크게 노했다. 일찍이 대원에 사신으로 갔다온 적이 있는 요정한(姚定漢) 등은 대원의 군사는 약하기 때문에 한나라 군사 3천 명만 데리고 가서 강노(彊弩)로 공격하면 대원을 무찌르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천자는 이미 옛날 착야후 조파노가 루란을 공격할 때 7백 명의 기병으로 먼저 달려가 루란왕을 포로로 잡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요정한 등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때 총애한 후비 이부인(李夫人)의 형제들을 후(侯)에 올리려는 생각으로 이부인의 오빠 이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에 임명하여 속국에서 징발한 6천의 기병과 군국(郡國)의 불량소년 수만 명을 이끌고 원정가서 대원을 정벌하게 했다.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는 이사성을 점령하여 명마를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이사장군은 조시성(趙始成)을 군정(軍正),옛날 호후(浩侯)였던 왕회(王恢)를 향도, 이치(李哆)는 교위(校尉)로 삼아 군사들을 통제했다. 이 때가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으로 한무제 재위 37년 째 되는 해로 관동(關東) 지방에 메뚜기 떼가 일어나 서쪽의 돈황까지 날아갔다.

  이사장군이 이미 염수(鹽水)를 지나 서쪽으로 진군하자 길목의 작은 나라들이 두려워하여 각기 성을 굳게 지키고 식량을 공급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격했으나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고 항복하면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항복하지 않으면 며칠 머물다가 행군을 계속했다. 이윽고 욱성(郁成)에 이르렀을 때는 군사는 수천 명으로 줄었고 모두 굶주림에 지쳐있었다. 욱성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한군이 욱성에게 크게 패하고 사상자가 심히 많았다. 이사장군이 이치와 조시성과 상의했다.

「욱성조차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들의 왕도를 어떻게 점령한단 말인가?」

그래서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여 돌아오는데 걸린 세월이 2년이 걸렸다. 그들이 돈황에 당도했을 때는 살아 돌아온 군사는 십에 일이에 불과했다. 이사장군이 사자를 황제에게 보내 상서했다.

「길은 멀고 양식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사졸들은 싸움을 걱정했음이 아니라 배고픔을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은 나이가 어려 대원을 점령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원컨대 잠시 군사를 해산했다가 더욱 많은 군사를 일으켜 다시 원정하고자 합니다.」

천자가 듣고 대노하여 사자를 보내 옥문관을 폐쇄(閉鎖)하고 감히 관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목을 베라고 명했다. 이사장군이 두려워하여 돈황에 머물렀다.

 그해 여름 한나라는 촉야후 조파노가 이끄는 2만의 군사를 흉노와의 싸움에서 잃었다. 공경들 이하 관료들은 의론하여 대원의 원정군을 해산하고 흉노에 전력을 쏟아야한다고 간했다. 그러나 천자는 대원을 주벌하여 공업을 이루기로 결심했다. 대원같은 작은 나라도 이기지 못한다면 대하와 같은 나라는 한나라를 가볍게 볼 것이고 대원이 양마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손, 윤두(倫頭) 같은 나라도 한나라 사신을 괴롭혀 외국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원을 정벌하는 일은 매우 불편하다고 말한 등광(登光) 등을 형리에 넘겨 심문케 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게 했다. 죄수와 형도를 사면하여 재관(材官)19)으로 삼고 품행이 좋지 않은 불량소년들과 변경의 기병(騎兵) 들을 더욱 많이 징발하여 일 년여 동안 돈황으로 보낸 자만 6만 명이 넘었다. 개인적으로 먹을 것을 짊어지고 따라간 자들은 포함시키지 않은 숫자였다. 소 10만 마리, 말 3만여 필, 나귀와 노새 및 낙타 만 수천 마리를 끌고 갔다. 군량을 충분했고 무기와 강노도 많이 구비되었다. 천하는 그 일로 소동이 일어나 대원을 정벌하기 위한 명령을 서로 전하고 받들어 동원된 교위만도 50여 명에 달했다. 대원의 성 안에는 우물이 없어 모두 성 밖의 강물을 길어다 식수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 군대는 수리기술자를 시켜 성 밑으로 흐르는 물길을 옮겨 성안의 물을 말려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한나라는 변경을 지키는 갑병 18만 명을 더 동원하여 주천(酒泉), 장액(張掖) 북쪽에 거연현(居延縣)과 휴도현(休屠縣)을 설치하여 주천군을 방어하도록 하고 천하에 7가지 죄20)로 유배생활을 하던 죄인들을 동원하여 말린 양식을 지고 가서 이사장군에게 공급하게 했다. 화물을 실은 수레와 사람들의 무리가 줄을 이어서 속속 돈황에 몰려들었다. 말을 잘 보는 사람을 집구교위(執驅校尉)에 임명하여 대원을 함락시켰을 때 양마를 선별할 경우를 대비했다.

이리하여 이사장군이 다시 원정길에 오르자 이끄는 병력이 많았음으로 길목의 소국들은 감히 성을 나와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모두 성을 나와 음식을 제공했다. 이윽고 한군의 행렬이 윤두에 이르렀으나 윤두는 나와서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이사장군이 공격하여 도륙했다. 이후로 계속 서쪽으로 진군했으나 대항하는 나라가 없어 순조롭게 대원의 왕성에 이르렀을 때는 한군의 수효는 3만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대원의 군사들이 한나라 군사들을 공격해 왔으나 한군이 활을 쏘아 그들을 패주시켰다. 대원의 군사들은 달아나 성안으로 들어가 성벽에 의지해서 대항했다. 이사장군은 병력을 움직여 욱성(郁成)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행군을 지체하면 대원으로 하여금 더욱 속임수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먼지 대원의 왕성으로 진군하여 성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에 성에 의지하여 성을 굳게 지키려고 했던 대원은 대단히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대원의 왕성을 포위한지 40여 일만에 그 외성을 파괴하고 대원의 귀족들과 용감한 장군 전미(煎靡)를 사로잡았다. 대원이 크게 두려워하여 외성을 버리고 내성으로 들어갔다. 대원의 귀족들이 서로 모의하며 말했다.

「한나라가 우리 대원을 공격하는 이유는 무과(毋寡) 왕이 양마를 숨기고 한나라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무과왕을 죽이고 양마를 내주면 한나라 군사들은 마땅히 포위를 풀고 물러갈 것이다. 그래도 포위를 풀지 않으면 그때가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는다 해도 늦지는 않는 일이다.」

그래서 대원의 귀족들은 그들의 무과왕을 죽여 그의 머리를 잘라 귀족을 사자로 삼아 이사장군에게 보내면서 약속했다.

「한나라가 우리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면 우리는 양마 전부를 내주어 원하는 만큼 모두 가져가도록 하고 한나라 군사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겠소. 만일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당도할 강거의 구원군과 함께 우리는 안에서 강거군은 밖에서 한나라 군사들과 싸우겠소. 한나라 군사들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오. 어찌하겠소?」

그때 한나라 군대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던 소수의 병력으로 구성된 강거의 구원군은 한나라 군사들의 수효가 대단히 많았음으로 감히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장군과 조시성 및 이치 등이 상의하며 말했다.

「들으니 대원의 왕성 안에 새로 진(秦)나라 출신의 수리기술자를 얻어 우물 파는 법을 알게 되었고 또 성중에는 식량이 충분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원정을 온 목적은 우리 한나라를 적대시한 무과를 주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무과의 목이 이미 우리에게 도착했고 또한 우리가 포위를 풀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사적으로 성을 굳게 지킬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한군이 피로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강거의 군사들이 대원을 구하기 위해 공격해오면 우리는 틀림없이 싸움에서 지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군리들도 모두 그렇다고 생각했음으로 결국 대원의 강화요청을 받아들였다. 대원은 약속대로 그들의 양마를 모두 내와 한나라가 스스로 골라가도록 하고 음식을 공급하여 한군을 배불리 먹였다. 한군은 양마 수십 필과 중마 이하 암수 3천 필을 골라 취했다. 대원의 귀족으로 옛날 한나라 사절들을 잘 대해준 이름이 매채(昧蔡)를 대원의 새로운 왕으로 세운 후에 서로 맹세를 행하고 군대를 거두었다. 결국 한나라 군대는 대원의 중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한나라로 철군을 시작했다.

예전에 이사장군이 돈황에서 나와 서쪽으로 진군할 때 휘하의 병력이 많아 진군로 주변의 나라들이 양식을 모두 공급할 수 없었음으로 군사들을 나누어 남북으로 나아가게 했다. 교위 왕신생(王申生)과 옛날 홍려(鴻臚)를 지낸 호충국(壺充國) 등의 천여 명은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욱성(郁成)에 당도했다. 욱성이 성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고 한나라 군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다. 본대와 2백 리를 먼저 진군한 왕신생은 욱성을 가볍게 보고 욱성왕을 책망했다. 한군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를 거부한 욱성왕은 왕신생이 거느린 군대의 수효가 적은 사실을 탐지하고 새벽에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왕신생의 한군을 전멸시켰다. 그 중에서 살아남은 몇 명이 도망쳐 이사장군의 본대로 돌아왔다. 이사장군은 수속도위(搜粟都尉) 상관걸(上官桀)21)에게 명하여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가서 욱성을 공격하라고 했다. 강거로 도망친 욱성왕의 뒤를 쫓아 상관걸도 강거의 변경에 당도했다. 한나라가 이미 대원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강거는 욱성왕을 잡아 상관걸에게 넘겨주었다. 상관걸은 욱성왕을 포박하여 4명의 기병에게 압송의 책임을 맡겨 이사장군에게 바치도록 했다. 네 기병이 서로 상의하며 말했다.

「욱성왕은 원래 한나라를 싫어하는 사람인데 오늘 산채로 데려가다가 뜻밖에 그를 놓치기라고 한다면 큰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아무도 먼저 나서서 손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일행 중 나이가 가장 어린 상규(上邽) 출신 기사 조제(趙弟)가 칼을 빼어들고 욱성왕을 찔러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들고 갔다. 조제와 상관걸은 대장군의 본대를 뒤쫓아 갔다.

예전에 이사장군이 두 번째 출전할 때 천자는 사자를 오손에 보내 대군을 일으킬 예정이니 같이 힘을 합쳐 대원을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오손이 2천 기의 기병을 보냈으나 그들은 두 나라 틈에 끼어 망설이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사장군이 동쪽으로 귀환할 때 대원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도중의 여러 작은 나라들은 모두 왕의 자제를 보내 한군을 따라가 천자를 접견하고 인질로 남게 했다. 이사장군이 대원을 정벌할 때 군정 조시성이 힘껏 싸워 그 공이 가장 많았다. 이어서 상관걸도 용감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갔으며 이치는 많은 계책을 내었으나 옥문관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군사들은 단지 만여 명에 군마는 천여 필에 불과했다. 이사장군의 두 번째 출전에는 군사들에게는 음식도 부족하지 않았고 싸우다가 죽은 자도 많지 않았으나 장수들과 군리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졸들을 사랑하지 않아 군량을 빼돌려 굶어죽은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자는 만리나 되는 먼 곳을 행군하여 대원을 정벌했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과오를 묻지 않고 이사장군 이광리를 해서후(海西侯)에 봉했다. 또 욱성왕의 목을 벤 기사 조제를 신치후(新畤侯)에 봉하고 군정 조시성은 광록대부에 임명했다. 또한 상관걸은 소부(少府)에, 이치는 상당태수에 임명했다. 대원 원정으로 교위나 군리들 중 구경에 오른 자는 3명이고 제후국의 상이나 군수 및 이천석의 고관이 된 자는 100여 명에 달했고 천석 이하의 관리에 임명된 자는 천여 명이 넘었다. 발분하여 원정에 참여하여 기대 이상의 관직을 주고 죄수로써 원정에 참가한 자들은 그 노역을 면제해주었다. 사졸들에게 하사한 상급에 소요되는 돈은 4만 금에 달했다. 대원을 정벌하기 위해 두 번을 출정했고 전쟁이 끝이나기 까지는 모두 4년이 걸렸다.

한나라가 대원을 정벌한 후에 매체를 세우고 물러간 지 일 년여가 지나자 대원의 귀족들은 매체가 한나라에 아부하여 대원을 어려움에 빠지게 했다고 생각하여 서로 상의하여 매채를 죽이고 무과의 동생 선봉(蟬封)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선봉은 그의 아들을 인질로 한나라에 보냈다. 한나라는 사절을 보내 뇌물을 후하게 주고 그들을 진무했다.

그리고 10여 개의 사절단을 대원의 서쪽에 있는 나라에 보내 진기한 물건들을 구해오게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대원을 정벌한 한나라의 위엄과 덕행을 알게 했다. 이어서 돈황에 주천도위(酒泉都尉)를 설치하고 서쪽의 염수(鹽水)에 이르기 까지 초소를 줄지어 세웠다. 윤두에는 둔전병 수백 명을 주둔시키고 감독하는 사자를 보내 그곳의 농전을 보호하고 양식을 저장하여 외국으로 나가는 사절단에게 식량을 공급하게 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우본기(禹本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하수는 곤륜산에서 나온다. 곤륜산은 그 높이가 2천 5백여 리이고 해와 달이 서로 피해 숨으며 그 위에는 예천(醴泉)과 요지(瑤池)가 있다.」。

오늘 장건이 대하로 사신으로 갔다 온 후에 하수의 원류를 찾아냈는데 어떻게 우본기에서 말하는 곤륜산을 본 사람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럼으로 구주(九州)의 산천에 관한 기록은 상서(尙書)에 기사와 가깝다. 우본기나 산해경에서 말한 기괴한 물체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

< 대원열전 끝 >


주석

1) 대원(大宛) :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주(州)와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주가 이 지역에 해당된다. 유사 이전부터 이란계 주민에 의한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동서교통의 요지였다. 페르가나는 역대 중앙아시아 제국의 한 요지가 되어 왔는데, 특히 18세기에 이르러 코칸드 한국(汗國)이 성립되면서부터 오시 ·안디잔 ‧ 마르길란(현재의 페르가나) · 코칸드 · 나망간 등의 여러 도시가 일어났다.

2) 강거(康居) : 영어 표기는 Kangju로 현재 우즈베키스탄 인근 지역에 세워진 고대 국가다. 강거의 여름 수도가 지금의 타슈켄트이다. 위치는 소그디아나의 북쪽이며 대원(大宛 : Ferghana)의 북서쪽 1000km 떨어져 있다. 기원전 128년 장건이 방문한 후 기록에 남겼다. 수당(隋唐) 때 강국(康國)으로 개명하였지만 그 당시에 영역은 곡투르트칸의 돌궐인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3) 대하(大夏) : 중앙아시아의 고대 유목제국 이름으로 Bactria의 중국명이다. 원래 페르시아제국의 일 개 행정구역이었으나 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제국에 속했다가 알렉산더가 죽자 후계국가 중의 하나였던 셀레우코스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3세기 중엽 독립했다.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에 존재했던 박트리아제국의 전성기 때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아무다리아(Amudarya)강 상류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렀다. 후에 분열되어 쇠락해져 기원전 140-130년 경 대월지에 의해 점령당했다.

4) 남산(南山) : 실크로드의 천산남로를 따라 있는 쿤론산맥, 阿尔金山산맥과 감숙회랑을 따라 솟아 있는 기련산맥(祁連山脈)을 가리킨다.

5) 태중대부(太中大夫)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명으로 조정의 공론을 주재하고 황제의 고문을 맡았다. 일정한 업무는 없었고 황제의 명이 있을 때에 한해 업무를 수행했다. 질록은 천석이고 궁중에 거하며 명의상으로는 낭중령(광록훈)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광록훈의 통제를 받지 않은 황제의 고급 참모였다. 급사중(給事中), 시중(侍中) 등으로 불렸으며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근신이 되어 직권이 매우 커졌다.

6) 봉사군(奉使君) : 한나라가 설치한 관직 이름으로 천자의 사절에 속했다. 질록(秩祿)은 확실하지 않다.

7) 규수(嬀水) : 지금의 아모하(阿姆河) 즉 Amudarya 강으로 중앙 아시아의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하여 서북방으로 흘러, 아랄(Ara)l 해로 흘러들어가는 길이는 약 2,300km다..

8) 위위(衛尉)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명으로 9경의 일원이다. 봉록은 중2천석이다. 궁중의 위병을 지휘하고 궁내의 숙위를 관할했다. 한경제 초에 중대부령(中大夫令)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다시 위위로 환원시켰다.

9) 금성(金城) : 한나라가 하서회랑(河西回廊)에 설치한 군(郡)으로 할경은 지금의 감숙성 성도 란주시(蘭州市) 이서와 서녕시(西寧市) 이동이다.

10) 대행(大行) : 구경 중의 하나인 대행령(大行令)을 말한다. 제후들과 이민족들과 사무를 관장했다. 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에는 전객(典客)이라는 명칭으로 9경에 들었다. 한경제 때 대행령(大行令)으로 개칭했다가 무제(武帝) 때 대홍려로 다시 변경했다.

11) 영거(令居) : 지금의 감숙성 란주시(蘭州市) 북 50키로의 영등현(永登縣) 경내다.

12) 삼보(三輔) : 한무제가 장안을 포함한 도성과 그 주위의 해정구역인 사례부 중 경조윤(京兆尹), 우부풍(右扶風), 좌풍익(左馮翊)의 지방장관을 삼보(三輔)라 했다. 기타 사례부에는 홍농군(弘農郡), 하동군(河東郡), 하남군(河南郡) 등이 있다.

13) 루란(樓蘭) : 지금의 신강성 罗布泊(Luóbùpō) 일대에 있었던 실크로드 상의 교역중심지다. 한무제 때 처음으로 서역과 통할 때 한나라의 사자들은 이곳을 경유해야 했다. 루란은 한나라의 사자들을 습격하여 교역물품을 약탈해 가자 원봉 3년 기원전 108년 장군 趙破奴가 군사를 이끌고 정벌하여 루란왕을 생포했다. 그후로 루란은 한나라와 흉노에 번갈아가며 칭신했다. 漢昭帝 元鳳 4년 기원전 77년, 한나라가 尉耆를 왕으로 세우고 국명을 鄯善으로 바꾼 후에 지금의 신강성 약강(若羌) 부근의 우니성(扜泥城)으로 천도했다.

14) 고사(姑師) :실크로드 주변의 고대국가로 지금의 중국 신강성 투르판분지 서북의 교하(交河) 일대에 있었다. 기원전 48년 한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거사(車師) 전후 양부를 설치했다.

15)왕회(王恢) : 한무제 元封 4년 기원전 107넌 중랑장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서역의 거사국(車師國)의 왕을 사로잡아 그 공으로 浩侯에 봉해졌다가 같은 해에 酒泉矯制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판결받았으나 작위를 반납하여 속죄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교제란 황제의 조서를 위조한 행위를 말하나 자세한 사건의 경위는 전해지지 않는다.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흉노의 치중을 공격하지 않은 죄를 추궁당하여 자살한 왕회와는 동명이인이다.

16) 조파노(趙破奴) : 태원(太原) 출신으로 한무제 원수 2년(전 121년) 흉노 정벌전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워 종표후(從驃侯)에 봉해졌다. 후에 죄를 얻어 후의 작위를 잃고 서인이 되었다. 원봉 2년 기원전 110년 루란(樓蘭)을 점령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 104년 흉노 정벌전에 참전했다가 싸움에서 지고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가 천한 원년 기원전 100년 흉노를 탈출하여 한나라로 돌아왔다. 후에 무고(巫蠱)의 란에 연루되어 피살되었다.

17) 흉하수(匈河水) : 종표후 조파노가 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영거(令居)에서 출결하여 북쪽으로 천여 리를 북진하여 흉하수(匈河水)에 이르렀다가 귀환했다(흉노열전). 흉하수는 강 이름으로 영거에서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영거는 지금의 감숙성 영등(永登)이다. 즉 사기색은(史記索隱)은 흉하수는 흉노수(匈奴水)라고 비정했다.

18) 강도옹주(江都翁主) : 劉非의 아들이며 한경제의 손자에 한무제의 조카인 강도왕 劉建의 딸로 이름은 유세균(劉細君)이다. 강도옹주가 오손왕에게 시집을 간 해는 원봉 6년인 기원전 105년이다.

19) 재관(材官) : 한나라 군제의 특종부대 중 산악작전에 동원되는 궁수로 편성된 부대를 말한다. 한나라의 병과는 경기(輕騎), 기사(騎士), 재관(材官), 루선(船) 등의 특종부대가 있어 평와와 평지 작전에는 경기와 기사, 산악 작전에는 재관, 강과 호택(湖澤) 작전에는 누선을 동원했다.

20) 원문은 칠과적(七科謫)이다. 칠과란 1. 죄를 지은 관리 2. 수형 중 도망친 죄수 3. 데릴사위(贅婿) 4. 시적(市籍)에 등재 되어 있는 장사군. 5. 과거에 시적에 등재된 사람 6. 부모가 시적에 올랐던 사람 7. 조부모가 시적에 등재 된 사람. (시적이란 한나라 때 시행한 제도로써 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호적에 등재해서 관청의 관리를 받아야했다. 당시 장사는 천한 신분의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21) 상관걸(上官桀)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80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다. 농서 상규(上邽) 출신으로 기사(騎射)에 능해 군대에 들어갔다. 젊었을 때 우림기문랑(羽林期門郞)이 되었고 무제에 의해 감천궁(甘泉宮)에서 발탁되어 북변을 지키는 장수가 되어 흉노를 물리쳤다. 무제 후원 2년 기원전 87년 무제가 병이 들었을 때 좌장군(左將軍)의 신분으로 곽광(霍光)과 함께 어린 나이로 제위를 잇게 된 소제(昭帝)를 보좌하라는 고명을 받았다. 시원(始元) 원년 기원전 85년 안양후(安陽侯)에 봉해져 식읍 3천 호를 받았고 그의 손녀는 소제의 황비가 되어 곽광과 권력을 두고 다투었다. 원봉(元鳳) 원년 기원전 80년 모반죄로 그의 아들이며 표기장군(驃騎將軍) 상관안(上官安)과 함께 살해되고 그의 집안은 멸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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