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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열전(儒林列傳)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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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336. 自孔子卒(자공자졸),

공자가 죽은 이래


1337. 京師莫崇庠序(경사막숭상서),

도성의 사람들은 아무도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1338. 唯建元元狩之間(유건원원수지간),

단지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연간에


1339. 文辭粲如也(문사찬여야).

학문이 일어나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다.


1340. 作<儒林列傳>第六十一(작<유림열전>제육십일).

<유림열전>제육십일을 지었다.


▶건원(建元)과 원수(元狩)/ 한무제 때의 연호로 건원은 140년부터 135년 원수는 기원전 122년부터 115년까지임. 따라 건원과 원수지간이 함은 기원전 140년부터 115년까지의 기간을 말함.



열전62. 유림(儒林)


태사공이 말한다.

“ 내가 공령(功令)을 읽다가 학관(學官)의 장려책에 이르면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 슬프도다!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자 관저(關雎)가 지어였고, 주유왕(周幽王)과 주려왕(周厲王)이 무도하여 예악이 무너지고 제후들은 방종과 횡행하여 정령은 강한 제후국에서 나왔다. 그래서 공자는 왕도가 무너지고 사도(邪道)가 흥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여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차례로 논하여 예악을 일으키려고 했다. 제나라에 가서 소(韶)를 듣고 석 달 동안 고기맛을 몰랐다. 위(衛)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음악을 바르게 정비하자 아(雅)와 송(頌)이 각각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혼탁했음으로 쓰일 수가 없었고 공자는 세상을 주유하면서 70여 명의 군주들에게 유세했으나 받아주는 군주가 없자 말했다.

「만약 나를 쓰는 군주가 있다면 1년이면 충분할 텐데!」

노나라의 서쪽 교외에서 기린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말했다.

「나의 도는 이제 끝이 났구나!」

이에 노나라의 사관의 기록을 보고 춘추(春秋)를 지어 왕도로 삼게 했다. 그 언사가 치밀하고 내용이 광범하여 후세의 학자들이 대부분 이를 본받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죽은 후에 70여 제자들은 흩어져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크게 된 자는 군주의 사부나 경상(卿相)이 되었고 작게는 사대부들의 친구나 선생이 되었다. 그리고 혹자는 초야에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자장(子張)은 진(陳)나라에서,담대(澹臺)와 자우(子羽)는 초나라에서, 자하(子夏)는 서하(西河)에서,자공(子貢)은 제나라에서 일생을 보냈다. 전자방(田子方)、단간목(段幹木)、오기(吳起)、금활리(禽滑釐)와 같은 부류는 모두 자하와 같은 유가들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아 왕의 스승이 된 경우다. 이 무렵 제후국의 군주들 중에 오직 위문후(魏文侯)만이 유학을 좋아했다. 후에 유학은 점점 쇠퇴하여 진시황 대에 이르기 까지 천하는 서로 다투어 전국시대를 이루며 유학을 배척했지만 제와 노 두 나라에서만은 학자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었다. 제위왕(齊威王)과 제선왕 시대에 맹자와 순경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공자의 유업을 이어받아 윤색하여 유학을 당세에 드러나게 했다. 이윽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대에 이르자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유가들을 매장해서 죽였는데 육예는 이 때 없어졌다.   

진섭이 몸을 일으켜 왕을 칭하여 진왕(陳王)이 되자 노나라의 모든 유생들은 공자의 예기(禮器)를 지니고 귀의했다. 그래서 공갑(孔甲)은 진왕의 박사가 되었으나 결국은 진섭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필부의 몸으로 몸을 일으킨 진섭은 변경으로 유배되어 수자리를 나가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한 달 만에 초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반년도 채 못 넘기고 멸망했다. 진섭이 한 일은 매우 보잘 것 없었으나 관복을 입은 사대부들이 공자를 모셨던 예기들을 들고 나아가 바치며 그의 신하가 되려고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시서(詩書)를 불태운 진나라에 싸인 원한을 진섭을 통해 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항우를 죽인 고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노나라를 포위했음에도 노나라의 여러 유생들은 와중에 여전히 예악을 송독하고 익히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부르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어찌 성인이 남긴 유업으로 인해 예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로 공자가 진나라에 들어가 곤궁한 처지에 놓였을 때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았는가?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향의 젊은이들의 뜻은 높고 행동은 대범하여 학문을 성취할 수 있는 자질이 뛰어난데 나는 그들을 인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구나!」

대저 제노(齊魯)의 사람들이 문학은 좋아한 것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그들의 천성이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여러 유생들은 비로소 그들의 평소에 익혀온 제노의 경서를 가지고 대사례(大射禮)나 향음례(鄕飮禮)를 강습할 수 있었다. 숙손통(叔孫通)이 한나라 조정의 예의(禮儀)를 세웠는데 그 공으로 태상(太常)이 되었고 함께 일한 유생과 제자들도 모두 등용되었다. 이 일로 인해 한고조는 유학의 쇠퇴를 탄식하고 부흥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천하는 전쟁이 그치지 않아 사해를 평정해야 했음으로 상서(庠序)의 일을 정비할 경황이 없었다. 혜제(惠帝)와 여후(呂后) 때 공경대신들은 모두 무력으로 공을 세워 공신이 된 자들이었다. 문제 때는 어느 정도 학문을 하는 자들을 등용하는 듯했으나 문제는 원래 형명(刑名)의 학문을 좋아했다. 이윽고 경제 때에 이르자 다시 유생들을 내쳤으며 특히 두태후(竇太后)는 황노의 학술을 좋아했음으로 여러 박사들은 관직만을 차지한 채 하문만을 기다렸을 뿐 승진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금상폐하께서 즉위하시자 조관(趙綰)、왕장(王臧)과 같은 인사들이 유학을 밝히고 금상폐하께서도 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으로 방정(方正)과 문학(文學)으로 현량(賢良)을 천하에서 초빙했다. 이 후로 시경에 정통한 학자로는 노나라의 신배공(申培公),제나라의 원고생(轅固生),연나라의 한태부(韓太傅)가 있었고, 상서(尙書)에는 제남(濟南)의 복생(伏生), 예경(禮經)에는 노나라의 고당생(高堂生)이 있었다. 역경(易經)은 치천(菑川)의 전생(田生)이 있있고 춘추(言春)는 제노(齊魯)의 호무생(胡毋生)과 조나라의 동중서(董仲舒)가 있었다. 이윽고 두태후가 죽자 무안후 전분(田蚡)이 승상이 되어 황노와 형명 등의 백가들의 학설을 배척하고 문학과 유학의 학자들 수백 명을 초청했다. 그 중 공손홍(公孫弘)은 춘추로써 평민의 신분에서 일약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평진후(平津侯)에 봉해졌다. 이로써 천하의 학문은 모두 유학에 쏠리게 되었다.


학관으로 등용되어 승상이 된 공손홍은 유가의 도가 침체된 것을 한탄하고 다음과 같이 청했다.

「승상과 어사대부가 말씀 올립니다. 황제께서 예전에 말씀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 대체로 듣건대 백성들은 예로써 이끌고 음악으로써 풍속을 개변한다고 했다. 혼인은 가족을 이루는데 가장 큰 윤리다. 지금 예는 폐하지고 음악은 무너져 짐은 매우 슬퍼하고 있다. 그래서 천하에 품행이 바르고 깊은 지식을 갖춘 선비들을 모조리 조정에 불러들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등용하고 예관(禮官)에게 학문을 연구하라고 권장하는 것은 강론과 의론으로 예를 일으켜 천하의 본보기로 삼기 위함이었다. 다시 태상(太常)은 박사들 및 제자들과 의논하여 민간에서도 교화를 숭상하게 만들어 현인들과 인재들을 배출하는 길로 삼으라!』삼가 신등은 폐하의 성지를 받들어 태상 공장(孔臧)과 박사 평(平) 등과 의논하여 청을 올립니다.

『듣건대 옛날 삼대(三代) 때에는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향리(鄕里)에 교육기관을 두었다고 했습니다. 하(夏)나라 때는 교(校), 은(殷)나라 때는 서(序), 주(周)나라 때는 상(庠)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선행을 행한 자에게는 조정에서 표창하여 선을 권장하고 악행을 행한 자는 징계를 내리고 벌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고로 교화의 방법으로는 먼저 도성으로부터 선행의 본보기를 먼저 세우시고 안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파급시키는 것입니다. 금상폐하께서는 지극하신 덕을 밝히셨으며 큰 지혜를 열어 하늘과 땅을 안배하시고 인륜에 바탕을 두셨습니다. 또한 학문을 권장하고 예를 수행하고 교화를 숭상하교 현능한 자를 독려하심으로 사방의 풍속을 개변시켰으니 이것은 태평성대의 근본입니다. 옛날에는 정치와 교육이 미흡해서 예가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옛날의 관제로부터 예를 부흥시키도록 하십시오. 박사를 위해 각기 제자 50명 씩을 두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요역을 면제시키고 민간에서 18세 이상 되는 풍모와 예의가 단정한 사람들 중에서 박사들을 보필하는 제자를 뽑는 일을 태상에게 맡기십시오. 군(郡), 국(國), 현(縣), 도(道), 읍(邑)에 학문을 좋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정령과 교화를 엄수하고 향리의 관례에 순응하며 언행과 품행이 소문으로 들었던 사실과 어긋나지 않으면 현령, 후국(侯國)의 상(相), 현장(縣長), 현승(縣丞)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이천석의 상관에게 올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이천석의 고관들은 삼가 잘 관찰하여 가하다고 판단되는 자들을 계리(計吏)와 함께 경사의 태상(太常)에게 보내 박사들의 제자들과 같이 수업을 받게 하십시오. 1년이 지나 모두 시험을 보게 하여 한 가지 분야에서라도 능통하게 되면 문학과 장고(掌故)의 결원을 보충시키십시오. 그 중에 낭중이 될만한 뛰어난 자가 있으면 태상이 명부를 만들어 보고토록 하십시오. 또한 특출한 수재(秀才)가 발견되면 그 즉시 이름을 고하게 하십시오. 그 중에서 학업을 게을리하고 재능이 부족하여 한 가지 일에도 능통할 수 없으면 즉시 쫓아내고 그런 부적격자를 천거한 자를 벌주십시오.

신 등이 지금까지 발표한 조서나 율령을 살펴보니 황제폐하께서는 하늘과 인간의 구별을 분명히 하시고 고금의 의(義)에 통달하셨으며 문장은 아름답고, 훈령은 심오하며, 베푸신 은덕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아래의 관리들은 견문이 천박하여 조서와 율령의 뜻을 구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명백하게 밝혀 백성들을 회유하지도 못합니다. 치례(治禮)와 장고(掌故)의 직책은 예의와 문학으로 관리가 되었으나 자리를 옮기거나 승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들의 직급에서 비이백석(比二百石) 이상의 관리와 한 가지 예(藝)에 능통한 관리들을 선발하여 좌우 내사(內史)와 대행(大行)의 졸사(卒史)로 채우시고, 비백석 이하는 군수와 태수의 졸사로 보내 보좌하게 하되 각 군에는 2명, 변경의 군에는 1명을 두도록 하십시오. 우선 경서를 많이 외우는 자들을 채용하시고 만일 인원이 부족한 경우에는 장고(掌故)에서 선발하여 중이천석의 고관의 속관으로 삼도록 하시고 문학(文學)과 장고에서 선발한 인원을 군의 속관으로 보내 예비인원을 두십시오. 청컨대 이를 공령으로 기록하시어 시행하시고 기타의 것은 율령대로 하면 됩니다.』」

황제가 조명으로 그대로 시행하라고 허락했다. 이후부터 공경, 대부, 사(士), 이(吏) 등의 관리들은 문학 출신의 선비들이 비율이 두드러지게 많아졌다.  


신공(申公)은 노나라 사람이다. 고조가 몸을 일으켜 노나라를 지나갈 때 신공은 스승 부구백(浮丘伯)을 따라 제자의 신분으로 고조를 노나라의 남궁(南宮)에서 알현했다. 여태후가 집정시 신공은 장안으로 유학와서 유영(劉郢)과 함께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 이윽고 유영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자 신공은 초왕의 태자 유무(劉戊)의 사부가 되었다. 유무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공을 매우 싫어했다. 이윽고 유영이 죽고 초왕의 자리에 오른 유무는 신공을 서미(胥靡)로 만들었다. 신공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노나라에 돌아와서는 집에 은퇴하여 머무르며 제자들을 가르치며 평생토록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손님들도 일체 사절하며 만나주지 않았으나 오로지 제후의 명이 있을 때만 초청에 응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먼 지방에서 온 자들만도 100여 명명이 넘었다. 신공이 시경을 가르침에 있어서 그 시의(詩意)만을 강독으로 해설할 할 뿐 시경의 뜻을 밝히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면 보충하여 남겼을 뿐 억지로 제자들에게 가르쳐 전수하지도 않았다. 난릉(蘭陵) 사람 왕장(王臧)이 신공으로부터 시경을 배워 경제에게 출사하여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으나 얼마 후에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금상폐하께서 처음 즉위하시자 고향에 은거하고 있던 왕장은 상서를 올려 숙위(宿衛)가 되었다가 계속 승진하여 1년 동안에 낭중령(郎中令)에 올랐다. 그리고 신공에게서 일찍이 시경을 배운 대(代)나라의 조관(趙綰)도 어사대부가 되었다. 조관과 왕장이 천자에게 청하여 제후들을 소집하여 조현의 의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기 위해 명당(明堂)을 세우려고 했으나 그 일을 추진할 수 없자 스승 신공을 천거했다. 그래서 천자는 사자를 보내 속백가벽(束帛加璧)과 안거사마(安車駟馬)의 예를 행하여 신공을 맞이했다. 이에 왕장과 조관이 제자의 신분으로 일반의 역마를 타고 수행했다. 이윽고 장안에 당도하여 신공을 접견한 천자가 정치에 대해 물었다. 당시 80이 넘은 나이의 신공은 기력이 쇠하여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스림이란 많은 말에 있지 않고 얼마나 힘써 행하느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는 천자는 화려하게 꾸민 문사를 좋아했음으로 신공의 대답을 듣고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현사로 초빙했음으로 신공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제수하고, 노왕(魯王)의 저택을 주어 그곳에서 명당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했다. 태황태후 두태후는 황노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유학을 싫어했다. 조관과 왕장의 잘못을 찾아내어 황제를 꾸짖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명당에 관한 일을 중지하고 조관과 왕장을 형리에 맡겼다. 두 사람은 이 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공 역시 면직되어 향리로 돌아갔다가 몇 년 후에 죽었다.

그의 제자로써 박사가 된 자는 10여 명이고 그 중 공안국(孔安國)은 임회태수(臨淮太守),주패(周霸)는 교서내사(膠西內史),하관(夏寬)은 성양내사(城陽內史),탕노사(碭魯賜)는 동해태수(東海太守),란능(蘭陵) 목생(繆生)은 장사내사(長沙內史),서언(徐偃)은 교서중위(膠西中尉),추인(鄒人) 궐문경기(闕門慶忌)는 교동내사(膠東內史)가 되었다. 그들이 관리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은 모두 청렴하고 절제가 있었음으로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송할만 했다. 신공의 제자들로써 학관이 된 자들의 품행은 다소 미흡했지만 그래도 대부, 낭중, 장고(掌故) 등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백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시경에 대한 언사는 모두 달랐지만 대부분 신공의 학설을 따른 것이었다.   


청하왕(清河王)의 태부 원고생(轅固生)은 제나라 사람이다. 시경을 깊이 연구하여 효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한 번은 황제의 면전에서 황생(黃生)과 논쟁했다. 황생이 말했다.

「상나라의 탕임금과 주나라의 무왕은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군주를 시해한 자들입니다.」

원고생이 응대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하걸(夏桀)이나 은주(殷紂)는 잔학한 정치로 세상을 어지럽게 했기 때문에 그들의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탕임금이나 주무왕에게 귀의했음으로 두 임금은 부득이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인데 어찌하여 천명을 받지 않았다고 하십니까?」

황생이 반박했다.

「모자는 비록 헤어져도 반드시 머리에 써야하고 신발은 비록 새 것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발에 신고 다녀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그것은 상하의 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걸주가 도를 잃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군주로써 윗사람입니다. 탕임금이나 주무왕은 비록 성군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신하일 뿐입니다. 무릇 군주가 실정했음에도 신하의 직분으로써 바른 말로 잘못을 바로 잡아 천자를 높이지는 못하고 오히려 잘못이 있다하여 그들을 주살하고 그들 대신 천자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것이 시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이 꼭 말한 대로라면 그렇다면 고제가 진나라를 대신해서 천자의 자리에 오른 행위도 옳지 않은 일입니까?」

이때 경제가 끼어들어 말했다.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만 말의 간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고기 맛을 모른다고 할 수 없소. 학자들이 탕임금과 주무왕이 천명을 받았는지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리석다는 뜻은 아니오.」

그리고는 논쟁을 끝냈다. 이후로 학자들은 감히 천명과 시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노자의 글을 좋아한 두태후가 원고생을 불러 노자의 문장에 대해 물었다. 원고생이 대답했다.

「이것은 집안 일이나 하는 사람들의 하찮은 글일 뿐입니다.」

태후가 노하여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공(司空)에게 말하여 그대를 성단형(城旦刑)에 처하도록 하겠다.」

그리고는 원고생을 짐승의 우리에 집어넣고 돼지를 찔러죽이라는 벌을 내렸다. 경제는 태후가 비록 화를 내고 있지만 직언한 원고생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원고생에게 예리한 병기를 주어 우리 안의 돼지를 찔러 죽이도록 했다. 원고생이 정확히 돼지의 심장을 찔러 넘어뜨렸다. 태후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죄를 내릴 수도 없어 그 일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원고생이 청렴, 강직하다고 생각한 경제는 청하왕의 태부로 임명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후에 병으로 면직되었다. 금상폐하 즉위 초에 원고생을 현량(賢良)으로 다시 불렀다. 여러 유자들은 원고생을 미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원고생은 너무 늙었다고 헐뜯었음으로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 원고생의 나이는 90이 넘었었다. 원고생이 현량으로 조정에 초빙되었 때 설(薛) 출신 공손홍도 같이 초빙되었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매우 두려운 눈빛으로 대했다. 그런 공손홍에게 원고생이 말했다.

「공손선생, 정직한 학문에 힘써 정견을 펴야지,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마시오!」

이후로는 제나라 사람으로써 시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원고생을 근본으로 했다. 제나라 출신으로 시경으로써 귀한 신분이 된 사람들은 모두 원고생의 제자들이었다.


한생(寒生)이란 사람은 연(燕)나라 출신이다. 효문제 때 박사가 되고 경제 때 상산왕(常山王)의 태부가 되었다. 한생은 시경을 연구하여 수만 어로 된 한시내전(韓詩內傳)과 한시외전(韓詩外傳)을 지었는데 그 언사는 제노 지방의 것과는 많이 달랐으나 결국 그 귀결점은 같았다. 회남(淮南)의 분생(賁生)이 전수 받았다. 이 후로는 연과 조 지방에서 시경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한생으로 인한 것이다. 한생의 손자 한상(韓商)은 무제 때 박사를 지냈다.


복생(伏生)은 제남 출신으로 진(秦)나라 때 박사를 지냈다. 효문제 때 분서갱유로 없어진 상서에 능통한 사람을 천하를 뒤져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윽고 복생이라는 사람이 상서에 능통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복생은 이미 나이가 90이 넘이 연로했음으로 길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문제는 태상에게 명을 내려 장고(掌故)의 직에 있었던 조조(晁錯)를 파견하여 상서의 내용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진나라가 분서를 행할 때 복생은 상서를 집의 벽 속에 숨겼다. 그 후에 전쟁이 크게 일어나 유랑하다가 한나라가 천하를 안정시키자 복생은 상서를 찾아냈으나 그 중 수십 편은 망실되고 단지 29편만을 얻어 제노의 지방에서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있었다. 학자들이 상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복생으로 인했다. 이후로 산동의 대 학자들은 상서를 언급하지 않고는 가르칠 수 없었다. 복생은 제남의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을 가르치고 구양생은 천승(千乘)의 예관(倪寬)에게 전했다.


예관이 상서에 능통하게 되자 문학으로 군의 천거를 받아 박사의 제자가 되어 수업을 받았는데 공안국에게서 배웠다. 집이 가난한 예관은 학비를 댈 수 없었음으로 항상 제자들의 식사당번을 맡아서 했고 때때로 틈을 내어 품팔이를 하여 의식을 해결했다. 일할 때도 책을 지참했다가 쉬는 시간에는 이를 외워 익혔다. 이윽고 시험을 보아 순위에 들어 정위사(廷尉史)로 보임되었다. 이때 정위는 장탕(張湯)였는데 바야흐로 유학을 장려하고 있었음으로 예관을 주헌연(奏讞掾)으로 삼고 예관의 활약으로 옛날이 법으로써 큰 옥사의 의혹을 판결할 수 있게 되자 그를 매우 총애했다. 예관은 사람됨이 매우 온순하고 선량했으며, 청렴하고 기지와 지조를 갖추고 있었다. 문장력이 뛰어나 상소문을 쓰는데 그 문체가 기민했으나 언변으로는 분명하게 밝히지 못했다. 장탕은 그를 장자로 여겨 수시로 그를 칭찬했다. 이윽고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자 예관을 어사대부의 연(掾)으로 황제에게 천거했다. 황제가 접견하여 대화를 나눠보고 매우 기뻐했다. 장탕이 죽고 6년 후에 예관은 어사대부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9년 후에 관직에 재직 중에 죽었다. 예관이 삼공의 자리에 있으면서 온화하고 어진 성품으로 천자의 뜻을 잘 받들어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직간을 올려 어떤 일을 바로 잡지 않았기 때문에 부하 관원들이 그를 만만하게 보고 힘써 일하지 않았다.

장생 역시 박사가 되었고 복생의 손자도 상서를 통달했다고 해서 초빙되었는데 분명하게 밝히지는 못했다. 이후로 노나라의 주패(周霸)、공안국(孔安國),낙양(雒陽)의 고가(賈嘉) 등은 상서에 대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었다.

공안국은 고문(古文)으로 된 상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금문(今文)으로 풀어 읽었다. 이로써 고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일어나 일실된 상서도 10여 편 얻게 되었다. 이로써 상서의 편수와 내용이 풍부해졌다.

여러 학자들은 예경에 대해 논했지만 그 중에서 노나라의 고당생( 高堂生)이 가장 본래의 뜻에 가까웠다. 예경은 원래 공자가 생존해 있을 때도 원래 완성되지 않았고 더욱이 진나라 분서되어 잃어버린 부분이 더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사례(士禮)>만이 남아있고 고당생만이 이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노나라의 서생(徐生)은 의식에 뛰어났다. 문제 때 서생은 예절로써 예관대부(禮官大夫)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예절에 대한 학식을 그의 아들 서연(徐延)과 손자 서양(徐襄)에게 전했다. 서양은 태어날 때부터 예절에 뛰어났으나 예경(禮經)에 통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연은 예경에는 능통했지만 예절에는 그렇지 못했다. 서양은 예절로 한나라의 예관대부가 되었다가 광릉내사(廣陵內史)까지 올랐다. 서연과 서씨의 제자인 공호만의(公戶滿意)、환생(桓生)、선차(單次) 등은 무리는 모두 일찍이 한나라의 예관대부가 되었다. 그리고 하구(瑕丘)의 소분(蕭奮)은 예경으로 회양태수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로 예경과 예절을 강론하는 자들은 모두 서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공자에게서 역경(易經)을 전수받은 노나라의 상구(商瞿)는 공자가 죽자 제자들에게 전수해서 육세를 지나 전하(田何)에 이르렀다. 전하는 자가 자장(子莊)으로 이때 한나라가 일어났다. 전하는 동무(東武) 사람 왕동(王同)과 자중(子仲)에게 전했고 자중은 치천인(菑川人) 양하(楊何)에게 전했다. 양하는 역경으로 원광 원년인 기원전 134년(한무제 재위 7년)에 초빙되어 중대부에 올랐다. 제나라 사람 즉묵성(卽墨成)은 역경으로 벼슬이 성양국(城陽國)의 상(相)이 되었다. 광천인(廣川人) 맹단(孟但)은 역경으로 태자의 문대부(門大夫)가 되었으며 노인(魯人) 주패(周霸),거인(莒人) 형호(衡胡),임치인(臨菑人) 주보언(主父偃) 등은 모두 역경으로 2천석의 고관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로 역경에 대해 논하는 자는 모두 양하의 설에 뿌리를 두었다.


동중서(董仲舒)는 광천인(廣川人)이다. 춘추에 능통하여 효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장막을 쳐놓고 강론했는데 제자들은 입문한지 오래된 순서에 따라 서로 달리 수업을 했음으로 어떤 제자는 스승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동중서는 3년 동안 자기 집의 정원을 둘러보지도 못할 정도로 정성을 기우렸다. 출입할 때는 삼가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음으로 학사들은 모두 그를 스승으로 여겼다. 금상폐하께서 즉위하시자 강도(江都)의 상에 임명되었다. 그는 춘추의 재난과 이변에 대한 기록으로써 음양(陰陽)의 기운이 운행하는 이치를 추론했다. 그래서 비를 원할 경우에는 모든 양기를 틀어막고 음기는 드러내게 했고, 그치게 하고 싶을 때는 반대로 실행했다. 강도국 전역에 이를 시행케 하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도에 해임되어 중대부가 되어 관사에 머물며 <재이지기(災異之記)>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때 고제의 신주를 모시던 요동의 한 사당에서 화재가 발생자가 평소에 동중서를 시기하던 주보언(主父偃)이 그의 재이지기라는 책을 취하여 천자에게 올렸다. 천자는 여러 학자들을 소집하여 그 책을 살펴보게 한 결과 황제를 비방하는 기록이 있었다. 동중서의 제자 여보서(呂步舒)는 그 책의 저자가 스승인줄을 모르고 비천하고 어리석다고 했다. 그래서 동중서를 형리에게 넘겨 사형을 판결하게 했으나 황제게 조칙을 내려 사면했다. 이 일로 인해 동중서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재이(災異)의 대한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동중서의 사람됨은 청렴하고 강직했다. 그때 바야흐로 한나라는 사방으로 이족(夷族)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춘추에 대해 동중서를 따라갈 수 없었던 공손훙은 춘추의 설로 시세에 영합하여 처신함으로써 그 지위가 승상까지 올랐다. 이에 동중서는 공손홍을 아첨꾼으로 여겼고 공손홍은 그런 동중서를 질시했다. 공손홍이 황제에게 상주했다.

「동중서만이 교서왕(膠西王)의 상을 맡길 수 있습니다.」

평소에 동중서의 품행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던 교서왕은 그를 후대했다. 그래도 혹시 시간이 지나면 교서왕으로부터 죄를 얻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동중서는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은거했다. 마침내 그가 죽었으나 평생토록 가산을 돌보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만 힘썼다. 한나라가 건국 되어 다섯 황제가 거치는 동안 춘추를 밝혀 이름을 얻은 학자는 오로지 동중서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춘추는 공양씨(公羊氏)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었다.   


호무생(胡毋生)은 제인(齊人)이다. 효경제 때 박사가 되었고 늙어서는 고향에 돌아와 제자를 가르쳤다. 제나라 지역에서 춘추를 강론하는 자들은 모두 호무생에게서 전수 받았고 공손홍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구(瑕丘)의 강생(江生)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공부하여 공손홍에게 등용되었으며 일찍이 이에 대한 해설들을 수집하여 비교하다가 마침내 동중서의 것을 채용했다.

동중서의 제자들로써 성공한 사람들로써 란능(蘭陵)의 저대(褚大),광천(廣川)의 은충(殷忠),온(溫)의 여보서(呂步舒) 등이 있다. 저대는 양나라의 상(相)을 지냈다. 승상부의 장사(長史)가 된 여보서는 지절을 지니고 회남왕의 모반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파견되어 제후가 재량으로 처리하여 조정에 보고하지 않은 사건을 춘추의 정의를 밝혀 이를 반증했음으로 천자는 이를 옳다고 여겼다. 그의 제자 가운데 춘추에 능통한 자는 명대부(命大夫)의 자리까지 올랐고 랑(郞), 알자(謁者), 장고(掌故) 등의 자리에 오른 자는 백 수십 명이 되었다. 동중서의 아들과 손자도 모두 학문으로써 대관에 올랐다.


<유림열전 끝 >


주석

1) 공령(功令)/ 고대의 국가에서 학문을 관장한 관리들을 심사하고 등용하는 규율을 말한다.

2) 학관(學官)/ 교육을 담당하는 관리와 교사를 말한다. 한나라 때 처음으로 오경박사를 두었다.

3) 관저(關雎)/ 시경 국풍의 주남(周南)에 나오는 첫 번째 시가다. 모시서(毛詩序)는 주나라 왕비의 부덕을 읊었다고 했고, 노시(魯詩)는 주강왕(周康王)의 호색을 풍자했다고 했으며 주희(朱熹)는 시집전(詩集傳)에서 민가에서 유행했던 애정시라고 했다.

4) 주유왕(周幽王)/ 기원전 781년부터 771년까지 재위한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姒)의 미색에 빠져 국정에 게을리하다가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자신은 피살당하고 뒤를 이은 아들 평왕이 나라를 동쪽의 낙읍으로 옮겼다.

5) 주려왕(周厲王)/ 위무(衛巫)를 시켜 공포정치를 행하다가 국인들에 의해 쫓겨나 체 땅으로 달아나 왕 대신 주공과 소공이 나라를 다스렸다. 기원전 827년 체 땅에서 려왕이 죽어 아들 정(靜)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주선왕(周宣王)이고 선왕의 아들이 주유왕이다.

6) 소(韶)/ 순임금 때의 악곡 이름이다.

7) 아(雅)와 송(頌)/ 시경에 수록된 시가의 종류로 아는 주왕실이 제사를 올릴 때 선조들의 공덕을 칭송하며 부르는 노래고, 송은 상(商), 주(周) 두 천자국과 제후국 노(魯)의 조상들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다.

8) 제위왕(齊威王)/ 전국 때 제나라의 군주로 기원전 356년 즉위하여 기원전 320년에 죽었다. 전(田) 성에 이름은 인제(因齊)다. 재위시 정치를 개혁하고 군대를 정비했으며 추기(鄒忌)를 재상으로 기용하고, 손빈(孫臏)을 군사로 삼아 신장된 국세로 중원을 크게 진동시켰다.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당시의 패권국 위(魏)나라의 군대를 대파하고 위(魏)를 대신하여 패자를 칭하여 제후들을 호령했다. 그로 인해 제후들은 감히 20여 년 동안 제나라에 대해 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임치성 동문 밖 직하(稷下)에 학자들을 초빙하여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열었다.

9) 제선왕(齊宣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19년에 즉위하여 301년에 죽은 전국 때 제나라 군주다. 이름은 벽강(辟彊)이고 제위왕(齊威王)의 아들이다. 즉위 초, 전영(田嬰)을 상국으로 등용하여 내정 개혁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함종을 강화하여 국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주난왕(周赧王) 14년 기원전 301년 연나라의 내정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연나라의 혁신세력을 진압했다. 학술을 중시하여 천하에 유세객이나 학자들을 자신이 학술단지로 조성한 직하(稷下)라는 곳으로 초빙하여 학문을 진흥시켰다.

10) 대사례(大射禮)/ 고대에 제후들이 제사나 행사를 치를 때 군신들과 함께 활을 쏘는 의식을 거행하여 화살을 맞춘 자는 제사에 참석할 수 있었고 맞추지 못한 자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11) 향음례(鄕飮禮)/ 고대의 향학(鄕學)은 수업기간이 3년이었는데 그 중 우수한 학생은 중앙에 천거되었다. 이때 고을의 대부나 지방장관이 천거한 사람이 중앙으로 떠날 때 그들을 위해 치른 전별연으로 유가들의 의식이다.

12) 숙손통(叔孫通)/ 산동성 설현(薛縣) 사람으로 일찍이 진나라 때 박사를 지내다 몸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에 한고조에게 귀의하여 박사가 되어 직사군(稷嗣君)에 봉해졌다. 한나라가 건국되자 노나라의 유생들과 함께 조정의 의식을 행해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 후헤 태자태부가 되었다. (열전39. 유경숙손통열전 참조)

13) 태상(太常)/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명으로 종묘의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박사를 선임하는 일을 주관했다. 진나라 때 봉상(奉常)이었으나 한경제 때 태상으로 개명했다. 구경 중의 하나다.

14) 상서(庠序)/ 고대의 교육제도를 말한다. 하(夏)나라 때의 학교는 교(校), 은(殷)나라 때는 서(序), 주(周)나라 때는 상(庠)이라고 했다.

15) 현량(賢良)/ 한나라 때의 인재 등용 제도로써 한문제 15년 (전 160년) 처음으로 천하의 군국과 공경들에게 조칙을 내려 직언과 극간을 할 수 있는 현량을 천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천거되어 중앙에 올라온 100여 명의 인사들을 모두 친히 접견하고 대책을 묻고 결과에 따라 관리로 등용했다. 한무제 역시 여러 번에 걸쳐 천하에 현량방정에 다시 문학을 더하여 천하 군국과 대신들에게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16) 향리(鄕里)/ 주나라 때의 지방행정기구 명칭이다. 리(里)는 25가, 향(鄕)은 12,500가를 단위로 했다.

17) 현(縣)/ 만호 이상은 현령으로 녹봉은 천석에서 6백석이고 , 만호 이하는 현령으로 녹봉은 500석에서 300석이었다.

18) 도(道)/ 이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해당하는 지방기구로 현에 해당한다.

19) 읍(邑)/ 황제, 황후, 공주 등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식읍인 탕목읍(湯沐邑)을 말한다.

20) 계리(計吏)/ 군국(郡國)에서 지방 정치상황이 문서를 보고하는 관리.

21) 장고(掌故)/ 태상의 속관으로 국가의 법률제도에 대한 문헌과 사례를 찾는 일을 담당했다. 봉록은 1백석이다.

22) 치레(治禮)/ 대행(大行)의 속관으로 예의 의식을 담당한 하급관리다.

23) 졸사(卒史)/ 진한(秦漢) 교체기 때 군(郡)의 주요한 관리 중의 하나로 군승(郡丞)의 밑에 있으면서 군수부의 문서수발을 도왔다. 그 녹이 1년에 100석이었던 관계로 백석졸사(百石卒史)라고도 했다.

24) 부구백(浮丘伯)/ 부구공(浮丘公) 또는 포구자(包丘子)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임치(臨淄) 출신이다. 순자에게서 배웠다. 진시황 때 시경(詩經)을 배워 한왕조가 서자 신공(申公)과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에게 가르쳤다. 그의 제자 신공은 시경에 정통하여 <시전(詩傳)>을 시작했는데 이를 노시(魯詩)라 했다. 부구백은 후에 학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는 신선으로 여겨졌다.

25) 유영(劉郢)/ 고조의 동생으로 한신의 봉국인 초나라에 봉해진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의 아들이다. 한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초원왕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시호는 초이왕(楚夷王)으로 재위 4년 만인 기원전 175년에 죽었다.

26) 유무(劉戊)/ 한문제 6년(전 174년) 부왕 초이왕 유영(劉郢)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한경제(漢景帝) 3년 (전 154년) 한나라 조정이 그의 봉지에서 동해군(東海郡)을 삭감하자 불만을 품고 오왕 유비(劉濞)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역사상 이를 오초칠국지란(吳楚七國之亂)이라고 한다. 한나라 조정은 주아부(周亞父)를 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일으켜 결국 양도가 끊겨 싸움에 패한 유무는 자살했다.

27) 서미(胥靡)/ 노예에 대한 호칭으로 밧줄로 몸을 묶어 강제노역을 시켰다. 한 대에 강제노역에 해당하는 일종의 형벌이었다.

28) 랑중령(郎中令)/ 궁정의 숙위 및 성문의 출입 감시, 궁내의 제반사에 대한 관리 및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진한 때는 구경(九卿)의 일원이다. 휘하에 대부, 랑(郞), 알자(謁者), 기문(期門), 우림(羽林), 광록연(光祿掾), 광록주사, 광록주부 등의 속관이 있었다. 후에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위병들을 관장하는 장관으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원래 진나라의 제도를 따라 랑중령이라고 부르다가 한무제에 의해 광록훈으로 바꾸었다.

29) 속백가벽(束帛加璧)/ 束帛捆為一束的五匹帛。 古代用為聘問、饋贈的禮物。 《 賈公彥 疏: “束者十端 , 每端丈八尺 , 皆兩端合卷 , 總為五匹 , 故云束帛也。” 束帛加璧束帛之上又加玉璧。 古代表示貴重的禮物。 《禮記‧禮器》: “束帛加璧 , 尊德也。” 《史記‧孟子荀卿列傳》: “ 惠王 欲以卿相位待之 , 髡 因謝去。 於是送以安車駕駟 , 束帛加璧 , 黃金百鎰。” 《漢書‧武帝紀》: “遣使者安車蒲輪 , 束帛加璧 , 徵 魯申公 。”

30) 安車駟馬/ 古代一种通常用一匹马拉的、可以在车厢里坐乘的车子。上古乘车一般都是站立在车厢里,而安车则可以安坐,故名。《礼记·曲礼上》:“大夫七十而致事(退休)……适四方,乘安车。”汉郑玄注:“安车,坐乘,若今小车也。”官员告老,或征召德高望重的人,往往赐乘安车,这是一种优礼方式。安车多用一马,也有用四马的,那是表示特殊的礼遇

31) 청하왕(淸河王)/ 한경제의 아들 유승(劉乘)으로 영지는 지금의 산동성과의 접경 지역인 청하시 일대다.

32) 성단형(城旦刑)/ 진한 때 형벌 중의 하나로 야밤에 성을 쌓는 노역을 해야 했다.

33) 상산왕(常山王)/ 한경제의 막내아들 유순(劉舜)으로 경제 중원 5년(전145년)에 상산왕에 봉해졌으나 생활이 황음문란하고 계속해서 조정의 금칙을 어겼으나 경제는 항상 용서했다. 기한무제 27년 원정 3년 (기원전 114년에 죽었다.)

34) 정위사(廷尉史)/ 정위의 속관으로 비서에 해당한다.

35) 주언연(奏讞掾)/ 정위의 속관으로 주로 형사사건의 심리 결과를 문서로 작성하여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36) 성양국(城陽國)/ 한문제 2년 기원전 179년 여씨의 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이 봉해진 제후국이다. 관할은 지금의 산동성 거현(莒縣)과 기현(沂縣) 일대다. 유장은 한고조 유방의 서출 장남 유비(劉肥)의 아들이다.

37) 태자문대부(太子門大夫)/ 태자태부와 소부의 속관으로 질록은 600석이었다.

38) 강도(江都)/ 한경제 4년 기원전 153년 경제의 아들 유비(劉非)의 봉국이다. 영지는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揚州市)와 강도현(江都縣) 일대다. 한무제 원수(元狩) 2년 기원전 121년 유비의 뒤를 이은 유건(劉建)이 상중에 부왕의 희첩과 통정한 사건이 발각되어 후국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광릉군(廣陵郡)이 설치되었다.

39) 교서왕(膠西王)/ 한경제의 아들 이고 한무제의 동생 유단(劉端)을 말한다. 봉지는 지금의 고밀현 일대로 후에 고밀국(高密國)으로 나라 이름을 바꿨다. 재위 중 포악한 성격으로 중앙에서 파견한 여러 명의 상(相)을 무고하여 살해하고 상중에 부왕의 희첩과 통정한 죄를 저지르고 중앙의 법을 지키지 않았으나 무제는 차마 죽이지 못했다.

40) 명대부(命大夫)/ 황제가 직접 임명했던 대부의 총칭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중대부(太中大夫), 간대부(諫大夫)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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