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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리열전(酷吏列傳)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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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62. 혹리(酷吏)


1341. 民倍本多巧(민배본다교),

백성들이 본분을 잃고 간사스럽게 되며


1342. 奸軌弄法(간궤농법),

간교함을 일삼아 법률을 농단하니


1343. 善人不能化(선인불능화),

아무리 선인들일지라도 그들을 교화할 수 없었다.


1344. 唯一切嚴削爲能齊之(유일절암삭위능제지).

오로지 엄혹하게만 행함으로써 그들을 능히 다스릴 수 있었다.


1345. 作《酷吏列傳》第六十二(작《혹리열전》제육십이)

《혹리열전》제62를 지었다.



공자가 말했다.

「법령으로써 정치를 행하고 형벌로써 백성들을 이끌거나 제어한다면 법을 범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형벌을 어떻게 해서든지 면하려고만 하게 된다. 그래서 덕과 도로써 백성들을 인도하고 예와 의로써 백성들의 행동을 제어한다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고치게 된다.」

노자가 말했다.

「덕이 높은 사람은 스스로 덕이 없다고 여기니 그것이 바로 덕이 있음이고, 덕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 덕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니 그것이 바로 덕이 없음이다. 그래서 법령의 조항을 엄혹하게 하면 도적의 수는 오히려 늘어나게 되는 법이다.」

태사공이 말한다.

「두 성인의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법령은 정치의 도구이지 정치를 맑거나 탁하게 하는 근원을 관리하는 수단이 아니다.옛날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법망은 매우 촘촘했다. 그럼에도 간사하고 사악한 자들은 싹을 틔우는 초목처럼 일어나 결국에는 극에 달하게 되었고 관리들과 백성들은 서로 속여 나라가 한 번 쓰러지니 결코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때 관리들이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섶으로 불을 끄는 행위처럼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솥의 끓는 물을 퍼낸 후에 다시 그 솥에 부어 못 넘치게 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래서 강건한 관리와 잔혹한 법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임무를 완수하여 유쾌한 마음을 갖게 될 수 있었겠는가? 만일 도덕군자가 관리가 되어 백성들을 잔혹한 법령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그는 곧 직무를 다하지 못하고 실직할 것이다(言道德者,溺其職矣). 그런 이유로 공자가 말했다.

‘소송의 심리는 나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다른 것은 나는 백성들 사이에 송사가 일어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노자도 말했다.

‘어리석은 선비가 도와 덕에 대해 듣게 되면 크게 웃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버릴 것이다. ’

두 성인의 말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한나라가 창건되자 모난 것을 부셔서 둥그렇게 만들었으며, 조각한 장식을 깎아 질박한 것으로 만들어 진나라가 만든 법령을 크게 바꾸었다. 번거롭고 가혹한 법령이 관대하고 간략하게 변한 모습은 배라도 삼킬만한 큰 고기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관대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은 오히려 훌륭한 치적을 이룰 수 있었고 간사한 죄를 짓는 자들은 나타나지 않아 백성들은 모두 평안하고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것으로 볼 때 훌륭한 정치는 군왕의 관대하고 깊은 뜻에 있지 엄혹한 법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후(高后)의 치세 시 혹리(酷吏)로는 오로지 후봉(侯封)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는 황족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속임이 너무 지나쳤을 뿐만 아니라 창업공신들을 모욕하고 해치기를 다반사로 했다. 여씨들이 란을 일으켰으나 철저히 실패하자 한나라 조정은 여씨의 전 종족들과 함께 후봉도 같이 주멸했다. 효경제(孝景帝) 때 조조(晁錯)1)가 등장하여 엄혹하게 법을 운영하고 조정은 그의 재능을 정치에 이용했다. 그 결과 오초칠국(吳楚七國)이 반란을 일으켜 조조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켰다. 조조는 그 일로 인해 처형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질도(郅都)와 영성(寧成)과 같은 무리가 나타났다.

1. 질도(郅都)

질도(郅都)는 양현(楊縣)2) 출신으로 낭관(郎官)이 되어 문제를 모셨다. 경제 때에 질도는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거리낌 없이 조정을 향해 직언과 간언을 올려 면대하는 관료들의 기를 꺾어 복종하게 만들곤 했다. 한 번은 천자를 수행하여 상림원(上林苑)에 갔다가 가희(賈姬)가 변소에 들려 용변을 보던 중에 멧돼지가 변소를 향해 달려왔다. 황제가 눈짓으로 질도에게 가희를 구하라고 했으나 질도는 그 자리에서 선뜻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황제가 친히 무기를 손에 들고 변소를 향해 달려가 가희를 구하려고 했다. 질도가 황제 앞을 가로 막으며 무릎을 꿇고 말했다.

「희첩 한 사람을 잃으면 조칙을 내려 다시 황궁에 진상하라고 하면 그뿐으로 천하 사람들은 가희 한 사람이 없어졌다고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막중한 몸을 가볍게 움직이시려고 하시니 무슨 면목으로 종묘나 태후를 대하시겠습니까?」

황제가 뒤돌아서자 멧돼지도 물러갔다. 이 소식을 들은 태후가 질도에게 황금100근을 하사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질도는 중용되었다.

당시 제남(濟南)에는 간씨(瞯氏)라는 부족이3백여 호 집단을 이루어 호족행세를 하며 살고 있었는데 폭행을 일삼고 교활하여2천 석 녹봉의 제남태수조차도 능히 그들을 다스릴 수 없었다. 그래서 경제는 질도를 제남태수에 봉했다. 제남태수에 부임한 질도는 간씨 종족들의 가장 악질적인 자와 그 가족들을 체포하여 모조리 죽였다. 나머지 간씨들은 모두 놀라서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그리고1년이 지나자 제남군은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우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잘 다스려졌다. 그리고 주위의10여 개에 달하는 다른 군들의 태수들은 질도를 두려워하기를 마치 상사처럼 대했다.

질도라는 위인은 용감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공정하고 청렴했다. 자기에게 보낸 사신(私信)은 결코 개봉하지 않았고, 들여보낸 예물은 결코 받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청탁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말하곤 했다.

「이미 부모를 등지고 관직에 나온 몸이라 마땅히 공직의 책무를 다하다가 절조를 지켜 죽을 수 있을 뿐이니, 처자를 어찌 돌 볼 여유가 있겠는가? 」

질도는 승진하여 정위(廷尉)3)가 되었다. 당시 승상은 조후(條侯)4) 주아부(周亞夫)였는데 가장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오만하게 굴었다. 그러나 질도는 주아부를 보고 그저 고개만 약간 숙이고 읍만을 할 뿐 절대 무릎을 꿇고 절을 하지 않았다. 이때 백성들은 소박하여 죄를 범하는 일을 두려워했고 모두 법을 지키며 자중했으나 유독 질도만은 오히려 혼자 앞장서서 형법을 엄혹하게 시행했다. 그는 결코 권세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황실의 종친까지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법을 집행했다. 열후나 황족들은 질도를 만나면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곁눈질로 대해 그를 『창응(蒼鷹:송골매)』이라고 불렀다.

임강왕(臨江王)5)이 심문을 받기 위해 중위부(中尉府)에 소환되었다. 임강왕이 서장을 써서 황제에게 사죄할 목적으로 필기구를 요청했다. 그러나 질도가 관리들에게 임강왕에게 필기구를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이 알고 사람을 보내 몰래 필기구를 주도록 했다. 임강왕은 황제게 사죄의 글을 써서 올린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태후(竇太后)가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억지로 법을 적용하여 질도를 중상하여 면직시켰다. 질도는 고향인 양현(楊縣)으로 돌아갔다. 경제가 사자 편에 부절을 보내 질도를 안문태수(雁門太守)로 제수했다. 황제는 질도에게 경사(京師)에 들려 조현을 할 필요 없이 곧바로 북상하여 임지에 부임한 후에 모든 일을 정황에 따라서 스스로 알아서 전결하도록 했다. 질도의 평소 품행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던 흉노는 질도가 안문태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나라 변경지역에서 멀리 물러가 이후로 질도가 죽기 전까지 안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흉노는 질도와 닮은 나무인형을 만들어 그들의 기병들이 말을 타고 활쏘기 연습할 때 표적으로 삼았으나 아무도 그 나무인형을 맞추지 못했다. 흉노는 그 정도로 질도를 무서워하여 마치 재앙처럼 여겼다. 두태후가 마침내 한나라의 법을 질도에게 억지로 적용하여 하옥한 후에 처형하려고 했다. 경제가 말했다.

「질도야말로 충신입니다.」

그리고는 질도를 석방하려고 했다. 그러자 두태후가 말했다.

「그렇다면 임강왕은 충신이 아니란 말인가?」

경제는 할 수 없이 질도를 처형하고 말았다.

2. 영성(寧成)

영성(寧成)은 양현(穰縣)6) 사람이다. 낭관(郎官)과 알자(謁者)의 신분으로 한경제를 모셨다. 호승벽이 있어 그가 낮은 관리로 있을 때는 언제나 그의 상관을 능멸했으며, 그가 상사로 있을 때는 또한 그의 부하 관리들을 마치 젖은 장작을 묶듯이 꼼짝 못하게 하곤 했다. 그는 교활하고 잔인했으며 자기 멋대로 위세를 부렸다. 점차적으로 그의 직위는 올라가 제남부의 도위(都尉)7)가 되었다. 그때의 제남태수는 바로 질도였다. 그 전까지는 제남부의 도위들은 보행으로 태수부에 들어가 하급관리들에게 신고하고 태수를 접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현령이 태수를 접견하는 의전으로써 당시 도위들이 태수 질도를 그처럼 두려워했다. 이윽고 영성이 곧바로 질도를 경시하며 상관으로 행세했다. 질도는 평소에 영성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성에 대해 관대하게 대했고 오랫동안 우의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질도가 죽자 장안지역의 황족들 중에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법을 범하는 자가 많이 생겼다. 그래서 황제는 영성을 불러 중위(中尉)8)로 삼았다. 영성의 형옥을 처리하는 방법은 질도를 모방했지만 청렴한 면에서는 같지 않았다. 그러나 황족들과 호족들 중에는 영성을 무서워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무제가 즉위하자 영성은 내사(內史)9)가 되었으나 황실의 많은 외척들이 영성의 결점을 비방했다. 그는 법에 따라 머리를 깎이고 목에 칼을 차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구경(九卿)에 속하는 고위 관리가 죽을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사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고, 일반의 죄형을 받게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극형에 처해진 영성은 이후로는 조정에 나가 관직을 맡게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목에 찬 형구를 벗어던져버린 후에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문서를 위조하여 함곡관을 나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큰 소리쳤다.

「대장부가 관직에 나가 녹봉2천 석의 고급관리도 못되고 상업을 경영하여 천만 전을 벌지도 못한다면 어찌 일반사람들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그는 돈을 빌려 일천 경(頃)10)이 넘는 관개가 가능한 토지를 사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소작으로 주어 수천 호를 노역으로 부렸다. 몇 년 후에 사면령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는 그는 이미 수천 근의 황금을 소유한 부호가 되어 있었다. 그는 강자를 억누르며 약자를 도우는 임협(任俠)으로 자처하며 약점을 잡은 관리들을 장악했다. 그가 자기 집 대문을 나설 때는 수십 명의 종자들이 말을 타고 뒤를 따르며 호위했다. 영성의 백성들에 대한 권세는 군의 태수보다 더 컸다.

3. 주양유(周陽由)

주양유의 부친 조겸(趙兼)은 회남왕 유장(劉長)11)의 이모부 신분으로 주양후(周陽侯)12)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주양유는 성을 주양으로 바꾸었다. 주양유는 외척의 신분으로 낭관에 임명되어 문제와 경제를 모셨다. 경제 때 군의 태수가 되었다. 무제가 즉위했을 때 역시 관리들이 정사를 처리하는 태도는 여전히 법에 따라 근신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러나 주양유는2천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고급 관리 중에 가장 포학하고 잔인했으며 교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비록 죽을죄를 지었더라도 법을 왜곡해서라도 그를 살렸으며, 그가 싫어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법령을 왜곡해서 그를 죽였고 그가 관리로 있던 군내의 호족들을 모조리 주살했다. 후에 군의 태수 자리에 올랐을 때는 도위(都尉)를 마치 현령처럼 대했으나 막상 자신이 도위의 자리에 있을 때는 오히려 상관인 태수를 욕보이며 그 권력을 범하고 빼앗았다. 강직하고 엄격한 성격의 급암(汲黯)13)과, 법조문으로 사람을 해치는데 능통했던 사마안(司馬安)은 모두2천석의 녹봉으로 구경의 대열에 섰던 고급관리였으나 그들조차도 주양유와 한 마차에 탈 때는 감히 부들방석에 같이 앉거나 복식(伏軾)14)의 예를 행할 때 함께 하지 못했다. 후에 하동군(河東郡)15)의 도위(都尉)로 자리를 옮긴 주양유는 당시 하동태수 승도공(勝屠公)16)과 권력을 다투어 두 사람은 상대방의 비행을 서로 고발했다. 그 결과 승도공은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결코 죄를 인정하지 않고 절의를 지켜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살했다. 주양유는 남을 중상한 죄를 받아 기시(棄市)의 형에 처해졌다.

영성과 주양유 이후 정사는 더욱 번잡해졌고 백성들은 교묘한 사술을 써서 법령을 빠져나갔음으로 대부분의 관리들은 영성과 주양유가 행했던 방법을 따라갔다.

4. 조우(趙禹)

조우(趙禹)는 태(斄)17) 출신이다. 좌사(左史)18)라는 말단 관리의 신분에서 경사로 불려가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가 청렴함으로 영사(令史)19)로 승진하여 승상 주아부(周亞夫)를 모셨다. 승상부의 관리들이 모두 조우가 청렴하고 공평무사한 관리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주아부는 조우를 중용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나는 조우가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법을 집행하는 방법은 너무 엄격하고 잔혹하다. 그래서 그에게 최고 관부의 막중한 일을 맡기지 않았다.」

무제의 시대에 이르자 문서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 공적을 쌓아 점차 승진하여 어사(御史)가 되었다. 황제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다시 그를 태중대부(太中大夫)20)로 승진시켰다. 그와 장탕(張湯)이 공동으로 각종 법령을 제정했는데 그 중에 견지법(見知法)21)이라고 있었다. 관리들로 하여금 상호감시, 검거하도록 규정한 법이었다. 한나라의 법이 엄하고 사납게 변한 시점은 대체적으로 두 사람이 활약하기 시작했던 이때부터였다.

5. 장탕(張湯)

장탕(張湯)은 두현(杜縣)22)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장안에 속하는 한 현의 승(丞)이었다. 장탕이 어렸을 때 그 부친이 집을 나가면서 장탕에게 집을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부친이 집에 돌아와 보니 쥐새끼가 고기를 훔쳐 먹은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장탕을 채찍으로 때렸다. 쥐굴을 파서 고기를 훔쳐 먹은 쥐새끼와 먹다 남은 고기까지 찾아낸 장탕은 쥐새끼를 보고 그 쥐의 죄행을 논하고 두들겨 패기까지 하면서 심문하고 그 과정을 문서에 기록한 후에 다시 그 과정을 반복했다. 이윽고 쥐새끼의 죄상을 상급이라고 판결하고 쥐새끼와 먹다 남은 고기를 증거로 제시한 장탕은 최종판결을 내려 마침내 쥐새끼의 몸통을 찢어서 죽였다. 장탕의 그런 모습을 본 부친은 그가 쓴 문서를 보니 마치 노련한 법관의 판결문과 같아서 매우 놀랐다. 그래서 장탕의 부친은 그를 옥사에 관한 문서를 작성하는 공부를 시켰다. 부친이 사망하자 장탕은 장안의 지방관리가 되어 매우 오랫동안 복무했다.

구경(九卿)의 신분으로 장안에서 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힌 주양후(周陽侯) 전승(田勝)23)을 장탕이 전력을 다하여 변호했다. 옥에서 풀려나 후(侯)에 봉해진 전승은 그 일로 인해 장탕과 매우 친하게 지내며 당시 조정의 권세있는 고관들을 한 사람씩 모두 소개하여 장탕으로 하여금 그들과 면식을 갖도록 했다. 장탕은 내사(內史)가 되어 영성의 속관이 되었다. 장탕의 재능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출중했음으로 영성은 그를 상급 관부에 천거했다. 장창은 무릉위(茂陵尉)가 되어 능묘(陵墓) 공사를 감독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승상의 자리에 오른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장탕은 발탁되어 승상부의 내사에 임명했다. 뒤이어 승상 전분이 그를 천자에게 천거하자 천자는 그를 어사로 삼았다. 진황후(陳皇后)의 무고사건(巫蠱事件)에 대한 옥사의 책임자가 된 장탕은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잔당들을 모두 색출해 잡아들였다. 이에 장탕이 옥사를 처리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고 인정한 무제는 그를 태중대부로 발탁했다. 태중대부 조우와 함께 장탕은 한나라의 각종 법률의 조문을 애써 가혹하고 엄격하게 만들어 일반 관리들을 속박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우가 중위(中尉)로 승진했다가 다시 소부(少府)로 자리를 옮기고 장탕은 정위가 되어 두 사람은 교우관계를 돈독히 했다. 장탕은 조우를 대하기를 마치 친형처럼 대하며 예절을 극진히 했다. 조우라는 위인은 청렴하고 오만했음으로 관리가 된 이래 그의 집에는 손님을 두지 않았다. 삼공구경(三公九卿)의 고관들이 찾아와도 조우는 결코 답방을 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조우는 그의 지우(知友)나 빈객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데 힘써 그들의 청탁을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가 법령의 조문에 위반되는 자는 수시로 잡아들였으나 반복해서 조사하여 그들의 여죄는 추궁하지 않았다.

장탕이란 위인은 사술로 잔꾀를 부려 상대방을 제압했다. 그는 미관말직에 있을 때부터 사리를 탐하여 장안의 거상 전갑(田甲)이나 어옹숙(魚翁叔)과 같은 무리들과 결탁했다. 이윽고 그의 벼슬이 구경(九卿)에 이르렀을 때, 그는 다시 천하의 명사들과 교우를 맺었다. 내심으로는 비록 그들과는 뜻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속마음을 감추고 그들을 존경하는 척했다.

그때 한무제가 바야흐로 유가(儒家)의 학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탕은 판결문을 작성할 때는 유가의 관점에 부합하기 위해 박사(博士)의 제자들을 초빙하여 상서(尙書), 춘추(春秋) 등을 연구시키고 그들을 정위의 속관으로 삼아 의심나는 법률조문을 상서와 춘추에 근거하여 평판하도록 했다. 다시 의심나는 옥사를 상주할 때는 반드시 먼저 황제에게 올려 각 방면에 대한 원인을 알게 해서 황제가 옳다고 하면 그것을 원안으로 삼아 정위(廷尉)의 이름으로 공포하고 다시 목판에 새겨 황제의 밝은 지혜를 찬양했다. 만일 상주한 옥사가 잘못되어 견책을 받게 되면 장탕은 곧바로 그 잘못을 사죄하고 황제의 뜻대로 고치면서 그때는 반드시 정(正), 감(监), 연사(掾史) 등의 부하 관원들 중 현명한 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말했다.

「저들이 원래 소신에게 제안한 안건들은 황상께서 저를 책망한 내용들과 같았사온데 소신이 그것들을 채납하지 않아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죄는 황제에 의해 항상 용서를 받아 추궁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올린 상주문을 황제가 좋다고 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상주문은 제가 알고 있었던 내용이 아니라 정위부의 정(正), 감(監) 연사(掾史) 등의 관리들 중 모모가 저를 위해 써 낸 것입니다.」

그가 속관들을 황제에게 천거할 때 그들의 장점을 올려주고 단점을 숨겨주는 일을 그와 같이 행했다. 그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만일 황제가 그 자에게 죄를 주고 싶어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면 그 안건을 법을 가혹하게 적용하는 정위감(廷尉監)이나 연사(掾史)에게 넘기고, 만일 황제가 그 죄인을 용서하고 싶어 한다면 그 안건을 법을 비교적 공평한 자세로 가볍게 적용하는 속관에게 넘기곤 했다. 또한 그 법에 연좌된 자가 권세가 있는 호족이라면, 그는 기필코 법 조문을 농단하여 교묘하게 적용시켜 그 자를 함정에 빠뜨렸다. 만일 대상이 평민이나 백성 혹은 허약하고 늙은 사람이라면 그는 항상 황제에게 구두로 진술하여 비록 법조문에는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되는 죄목이지만 황제로 하여금 자세히 헤아려 선처하도록 했다. 그래서 황제는 번번이 장탕이 구두로 진술한 안건에 연좌된 죄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곤 했다. 장탕이 비록 고관의 자리에 올라 귀한 신분이 되었지만 그의 몸가짐은 매우 훌륭했다. 빈객들과 왕래를 하며 함께 격의 없이 술과 음식을 즐겼다. 특히 옛 친구의 자제로써 관리가 된 자들이거나, 가난한 형제들에게는 더욱 후하게 대하고 덥거나 춥거나를 개의치 않고 삼공에게 문안인사를 올렸다. 그래서 장탕이 비록 법을 가혹하게 적용하거나, 내심으로 타인을 질투하는 마음을 숨기며, 불순하고 불공정하게 안건을 처리했음에도 오히려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엄혹하고 악독하게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은 모두 장탕에 의해 발탁되어 그의 손발이 되었으며 또한 그들 중 대부분이 유가(儒家)의 무리들이었다. 그래서 승상 공손홍(公孫弘) 조차도 누차에 걸쳐 그의 미덕을 칭송했다. 이윽고 회남왕(淮南王)24), 형산왕(衡山王)25), 강도왕(江都王)26)의 모반사건의 심리를 맡은 장탕은 그 사건의 전후사정을 철저히 추궁해서 밝혀냈다.

모반사건에 연루된 엄조(嚴助)27)와 오피(伍被)28)를 무제가 석방하려고 하자 장탕이 반대하며 말했다.

「오피는 원래 모반을 획책한 장본인이며 엄조는 황상의 측근으로 총애를 받아 궁중의 금문(禁門)을 무상출입하며 지키는 신하입니다. 주상의 총애를 받은 자의 신분으로 반란을 일으키려는 제후들과 몰래 친교를 맺었음에도 죽이지 않는다면 이후로는 어떻게 조정신하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황제는 장탕이 내린 판결을 허락했다. 그가 옥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이와 같이 대신들에게 타격을 가하여 그의 공적으로 삼은 일이 매우 많았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된 장탕은 이윽고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그때 마침 흉노의 혼야왕(渾邪王)29)이 한나라에 투항해 온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여긴 한나라 조정은 대군을 일으켜 흉노를 토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산동의 어떤 군들은 수해(水害)로 또 어떤 군들은 한발(旱魃)이 들어 농사를 망친 백성들은 집을 잃고 유랑하며 모두가 정부가 나누어 주는 의복과 음식에 의지해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정부의 창고는 대부분이 비어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의중을 살핀 장탕은 은전(銀錢)30)과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하고31) 나라 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염철(鹽鐵)을 국가에 의한 전매제로 전환하여 천하의 대상(大商)과 대고(大賈)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했다. 고민령(告緡令)32)을 반포하여 지방의 호족들과 대지주를 뿌리 채 뽑아 버렸다. 또한 법조문을 교묘하게 농단하여 그들을 함정에 빠뜨린 후 법령을 고쳐 보완하곤 했다. 장탕이 조정에 들어와 일을 상주하고 국가의 재정상태에 대해 담론을 할 때마다 황제는 항상 해가 저물 때까지 장탕의 말에 식사도 잊어먹고 계속 귀를 기우리곤 했다. 승상 등은 단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고 천하의 일은 모두 장탕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윽고 백성들은 마음을 놓고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크고 작은 소동은 끊이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일으킨 모든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않고 단지 간악한 관리들만이 백성들의 재산을 침탈하고 도적질을 일삼아 엄혹한 법으로 그들을 징치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삼공구경(三公九卿)에서 일반 평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장탕을 비난했다. 장탕이 한 번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황제는 몸소 장탕의 거소로 가서 문병했다. 장탕의 고귀한 신분은 그와 같았다.

대농령 안이(顔異)33)가 복비죄(服誹罪)34)로 피살되었다. 안이(顔異)는 당초에 제남(濟南)의 한 고을의 정장(亭長)35)이었는데 청렴하고 공평무사하여 차츰 직위가 올라 마침내 대농령(大農令)이 되어 구경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천자와 장탕이 백록(白鹿)의 가죽으로 만든 피폐(皮幣)를 미리 만들어 놓고 안이에게 그 의견을 물었다. 안이가 대답했다.

「오늘 제후왕이나 열후가 황제께 조공을 드릴 때4천 냥의 가치가 나가는 푸른색의 벽옥으로 바치나, 벽옥을 싸는 사슴 가죽은 오히려40만 전이나 하니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입니다.」

천자가 안이의 말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안이는 또한 옛날 다른 일 때문에 장탕과 다투어 사이가 벌어진 상태였다. 이윽고 어떤 사람이 안이가 조정을 비방했다고 고변하자 장탕이 그 사건을 심리하게 되었다. 안이와 손님이 대화를 나누다가, 그 손님이 말하기를 조령(朝令)이 처음에는 많이 불편했다고 불평을 해대자 안이는 맞장구는 치지 않고 입만 삐죽거리며 동의를 표시했다고 했다. 손님의 진술을 확보한 장탕은 구경의 신분으로 조령(詔令)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입조하여 자기의 의견을 당당하게 개진해야지 오히려 마음속으로 조정을 비방한 행위는 죽을죄에 해당한다고 주청을 올려 결국은 안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일로 해서 복비법이 생겨 이 후로는 대부분의 공경대부들은 아첨으로써 몸을 보신하게 되었다.(복비죄 이하의 내용은 평준서에서 따옴)

흉노가 내조하여 화친을 청해호자 군신들이 조정에 나와 천자 앞에서 의논했다. 박사 적산(狄山)이 말했다.

「화친하는 편이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황제가 화친어 어째서 유리하냐고 묻자 적산이 대답했다.

「병기는 흉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제께서 흉노를 토벌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평성(平城)에서 포위되어 결국은 흉노와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 혜제와 고후(高后) 때는 천하는 안정되고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문제께서 제위에 올라 흉노를 토벌하려고 하시자 북방의 변경이 소란스러워져 천하가 불안해지고 백성들은 전쟁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경제 때는 다시 오초칠국이 반란을 일으켜 경제께서는 미앙궁(未央宮)과 장락궁(長樂宮) 사이를 오가며 몇 개월 동안이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불안해 하셨습니다. 경제께서는 오초칠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붕어하실 때까지 전쟁에 대해 논하지 않으셨음으로 천하는 다시 부유해지고 물산은 풍부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공격하시기 시작한 이래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 나고 변겅의 백성들은 극도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군사작전보다는 화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장탕에게 의견을 묻자 장탕이 대답했다.

「적산은 우둔한 유생에 불과하여 천하의 대사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적산이 말했다.

「신은 원래 우둔합니다만 충심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어사대부 장탕의 충성심은 거짓된 것입니다. 장탕이 회남왕과 강도왕의 모반사건을 심리할 때 엄격하고 잔혹하게 형법을 적용시켜 방자하게도 제후들을 심하게 몰아부쳐 골육을 이간시키고 봉국의 관리들을 마음속으로 불안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원래 장탕이 충성심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얼굴에 노한 기색을 띠우고 적산에게 물었다.

「내가 경에게 변경의 지키는 군의 태수자리를 맡기면 국경을 침범하여 노략질하는 흉노를 막을 수 있겠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군 밑의 현을 맡기면 지킬 수 있겠소?」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못한다면 변경의 요새 하나는 지킬 수 있겠소?」

적산이 만일 그것도 못한다고 대답했다가는 황제가 자기를 형리에 넘겨 치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황제는 적산을 변경의 성채로 가게 해서 지키게 했다. 그리고1개월 후 흉노가 성채를 공격하여 적산의 머리를 베어갔다. 이후로 군신들은 몸을 떨며 두려워했다.

장탕의 문객 중에 전갑(田甲)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록 상인 출신이지만 어질고 품성이 곧았다. 장탕이 미관에 있을 때부터 전갑과는 금전과 재물로 왕래를 해온 사이였다. 장탕이 고귀한 신분이 되자 전갑은 장탕을 도의와 품덕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여 의로운 지사의 풍도를 보였다. 장탕은 어사대부로 오른 지 7년 만에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하동(河東) 사람 이문(李文)은 옛날부터 장탕과 사이가 나빴다. 후에 그는 어사중승(御史中丞)36)이 되어 장탕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장탕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번에 걸쳐 궁중의 문서에서 장탕을 해칠만한 재료를 찾았지만 서류는 빈틈이 없었다. 장탕이 총애하는 부하관리에 노알거(魯謁居)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장탕이 이문을 심중으로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노알거는 사람을 시켜 황제에게 이문의 비리를 고발하게 했다. 황제는 이문의 고변사건을 장탕으로 하여금 심리하도록 시켰다. 이문의 죄는 사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하고 처형한 장탕은 그 사건은 노알거가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황제가 장탕에게 물었다.

「익명으로 이문을 고변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황제의 물음에 장탕은 짐짓 놀란 체하며 대답했다.

「그것은 이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이문의 옛 친구였습니다.」

후에 노알거가 병으로 쓰러져 같은 고향사람이 주인으로 있는 집에서 요양하자 장탕이 찾아가 문병하고 노알거의 다리를 안마해주었다.

한편 조나라 사람들은 제련과 주조(鑄造)의 일을 그들의 직업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왕 유팽조(劉彭祖)37)는 조정에서 파견한 감찰관과 조나라의 제철관들과 함께 소송을 제기했으나 그때마다 장탕은 조왕에게 타격을 가했다. 그래서 조왕은 장탕의 숨긴 비리를 찾기 시작했다. 노알거 역시 일찍이 조왕을 추죄(追罪)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왕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조왕은 두 사람에 대해 고발했다.

「대신의 자리에 있는 장탕이 그의 부하 관리인 노알거가 병이 나자 문안을 가서 그의 다리를 주물러준 일은 필시 두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을 같이 모의한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

조왕의 고변사건은 정위(廷尉)에게 넘겨 심리토록했으나 그 사이 노알거는 병이 들어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에 일의 진행됨에 따라 그의 동생이 연좌되었다. 노알거의 동생은 연행되어 도관(導官)38)의 서(署)에 구금되었다. 장탕 역시 도관에 구금된 다른 죄수들을 심리하다가 노알거의 동생을 발견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구해주려고 생각하고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장탕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 노알거의 동생은 자기를 모르는 체 하는 장탕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시켜서 장탕과 노알거가 같이 모의하여 이문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고발하게 했다. 이 사건은 감선(減宣)39)에게 맡겨졌다. 감선은 옛날 이미 장탕과 사이가 벌어져 있었음에도 그 사건을 접수하여 정황을 파악했으나 물이 마르면 바위가 들어나는 법이라고 생각해서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공교롭게도 어떤 자가 문제의 능원(陵園)을 범하여 순장된 동전을 몰래 도굴해 가져간 사건이 발생했다. 승상 장청책(莊靑翟)이 장탕과 약속하여 같이 조정에 나가 사죄를 드리기로 약속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황제 앞에 서게 되자 장탕은 계절에 따라 능원을 순시하는 일은 승상의 임무일 뿐이지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는 사죄의 말을 올리지 않았다. 승상의 사죄에 따라 황제는 어사를 보내 그 일을 조사하게 했다. 장탕은 승상에게 견지법(見知法)을 적용시키려고 하자 승상은 매우 불안해 했다. 승상부의 세 장사(長史) 모두는 장탕의 그러한 행위에 분노하고 그를 함정에 빠뜨려 해칠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일찍이 장사 주매신(朱買臣)은 회계(會稽) 사람으로 일찍이 춘추를 공부했다. 회계가 같은 고향인 엄조가 주매신을 황제에게 천거했다. 주매신은 초사(楚辭)에도 능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조와 함께 황제로부터 총애를 받아 시중(侍中)의 자리에서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해서 중용되었다. 이때 장탕은 현달하기 전으로써 미관에 있었기 때문에 주매신의 면전에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에 장탕은 정위가 되어 회남왕의 반역사건을 심리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주매신과 장조을 소외시켰음으로 두 사람은 장탕을 괘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었을 때는 주매신은 회계태수를 역임한 후에 조정에 불려와 주작도위(主爵都尉)40)가 되어 구경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법을 범하게 되어 구경에서 면직된 주매신이 장사(長史)를 대신하는 직책으로 장탕을 만나 절을 올렸으나 장탕은 의자에 그대로 앉은 채 일상적인 업무를 보듯이 주매신을 대했다. 또한 장탕의 속관인 승사(丞史) 역시 주매신을 예를 갖추어 대하지 않았다. 초 땅의 선비로써 자부심이 강한 주매신은 그 일로 인하여 장탕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그를 죽일 수 있는 구실을 찾았다.

왕조(王朝)는 제(齊) 사람이다. 유가학설을 배워 우내사(右內史) 되었다. 변통(邊通)은 종횡가(縱橫家)의 학설을 배워 성격이 강직하고 난폭했다. 관리가 된 후에 제남왕의 승상을 두 번에 걸쳐 역임했다. 예전에 그 세 사람은 모두 장탕보다 관직이 높았으나 면직되어 승상부의 장사 대리의 신분으로 장탕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드려야 했다. 장탕은 수차에 걸쳐 승상의 직무를 겸임했는데 승상부의 세 장사는 모두 옛날 장탕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항상 그들을 멸시하고 억압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승상부 장사는 모의하여 승상 장청책에게 말했다.

「처음에 승상께서는 장탕과 협의하여 황제를 찾아가 능원의 사건에 대해 사죄하기로 약속했으나 장탕은 승상을 배반하고 오히려 그 일을 기화로 승상을 탄핵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장탕이 승상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짓입니다. 우리들은 장탕이 은폐한 사건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장사는 부하관리들을 보내 장탕과 공범인 전신(田信) 등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전신은 장탕이 황제에게 상주한 정책의 내용을 미리 알고 미리 비축한 물자를 팔아 증식된 재산을 장창 등과 나누어 가졌으며 그 밖에 다른 나쁜 일도 많이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세 장사가 문서로 만들어 황제에게 올리자 황제가 장탕에게 물었다.

「내가 어떤 일을 행하려고 하면 상인들이 미리 알고 물품들을 미리 더욱 많이 축적한 일은 아마도 어떤 자가 나의 생각을 상인들에게 미리 알려준 것 같소.」

장탕이 사죄를 하지 않고 짐짓 놀란 체하며 말했다.

「아마도 어떤 자가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 감선이 장탕과 노알거의 공모사건에 대해 상주했다. 천자가 마침내 장탕이 간사한 마음으로 군왕을 속였다고 생각해서8명의 사자로 하여금 문서를 가져가게 해서 조목에 따라 장탕을 심문하도록 했다. 장탕은 그러한 죄를 지은 죄가 없다고 말하며 불복했다. 그래서 황제는 조우(趙禹)를 보내 장탕을 심문하도록 했다. 조우가 장탕을 꾸짖었다.

「황상께서 어찌 당신의 일을 모른다고 생각하시오? 그대가 심리한 사건으로 멸족된 사람의 수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있소? 지금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죄상에 대해 모두 증거가 있어 황제께서는 당신의 사건을 처리하는 방법을 놓고 고심한 나머지 그대가 스스로 알아서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고 계시는데 하필이면 그렇게 장황하고 구차하게 변명하시오?」

장탕이 서신으로 황제에게 사죄의 말을 올리며 말했다.

「소신 장탕은 촌척의 공도 세움이 없이 문서를 담당하는 말단관리로 시작하여 폐하의 은총을 입어 저로 하여금 삼공의 대열에 서게 하셨음에도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면키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장탕을 죄인으로 모함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자들은 승상부의 세 장사(長史)들입니다.」

그리고 장탕은 자살했다. 장탕이 죽을 때 그가 남긴 재산은 오백 금도 못 미쳤는데 모두가 봉록이나 황상의 하사품이 전부로써 다른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장탕의 형제들과 아들들은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고 하자 장탕의 모친이 말했다.

「탕은 나라의 대신으로 모함과 중상을 받고 죽었다. 어찌 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소달구지에 실어 운구(運柩)했는데 관만 있고 외곽(外槨)은 없었다. 천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말했다.

「그의 모친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와 같은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다시 명을 내려 장탕 사건에 대해 모든 진상을 밝혀내고 세 사람의 장사들을 모두 주살했다. 승상 장청책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신(田信)을 포함한 장탕사건의 연루자들을 석방한 황제는 장탕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그의 아들 장안세(張安世)41)를 발탁해서 기회를 보아가며 점차적으로 직위를 올려주었다.

조우(趙禹)는 중도에서 면직되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복직하여 정위(廷尉)가 되었다. 옛날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는 그가 승상으로 있을 때 조우는 잔혹하고 음험한 자라고 생각하여 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우는 소부(少府)의 장관인 소경(少卿)이 되어 구경(九卿)의 반열에 섰다. 조우는 원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엄혹하고 조급했는데 그가 만년에 이르자 나라의 일은 많아져 다른 관리들은 더욱 가혹하게 법을 집행했으나 조우만은 오히려 법을 가볍고 완만하게 적용하여 온화하고 공평하다는 평을 받았다. 후에 조우의 직을 이어 받은 왕온서(王溫舒) 등은 법을 더욱 엄혹하게 집행했다. 조우는 나이가 들었음으로 연나라의 승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노년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조우는 배역(背逆)의 죄를 범하여 면직되어 살다가 장탕 사후10여 만에 노환으로 집에서 죽었다.

6. 의종(義縱)

의종(義縱)은 하동(河東) 인이다. 어렸을 때 장차공(張次公)42)과 함께 강도짓을 하며 도적떼를 결성했다. 의종에게는 후(姁)라고 부르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의술로 왕태후(王太后)43)의 총애를 받았다. 왕태후가 그녀에게 물었다.

「관직에 있는 아들이나 형제가 혹시 있느냐?」

후가 대답했다.

「동생이 하나 있는데 품행이 불량해서 관직에 나갈 수 없습니다.」

태후가 황제에게 말해 의후(義姁)의 동생 의종(義縱)을 중랑(中郞)에 임명하도록 하고 후에 상당군 예하의 한 현(縣)의 현령으로 옮기도록 했다. 현령으로 부임한 의종은 결코 관용이나 포용하는 마음과는 거리를 두고 법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집행했다. 그래서 현 내에는 도망치는 백성들이 사라져 군내에서 제일 잘 다스려지는 현으로 꼽혔다. 후에 다시 장릉(長陵)44)과 장안(長安)의 현령으로 옮겨 정무를 법에 따라 처리하면서 귀족이나 황친을 가리지 않았다. 수성군(脩成君)의 아들 김중(金仲)을 체포, 심문하여 법에 따라 조치했다. 수성군은 왕태후가 전남편 사이에 낳은 딸이다. 황제가 의종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내도위(河內都尉)로 승진시켰다. 도위가 된 의종은 부임하자 당지의 호족인 양씨(穰氏) 종족들을 멸족시켰다. 이로써 하내의 관할에서는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을 감히 주워가지 못했다. 그때 용감하고 날렵했던 장차공 역시 낭관이 되었다가 종군하여 적진 깊숙히 들어가 전공을 세웠음으로 안두후(岸頭侯)에 봉해졌다.

영성(寧成)이 집에서 놀고 있을 때 황제는 그를 어느 군의 태수로 제수하려고 하자 어사 공손홍(公孫弘)이 말했다.

「제가 산동에서 미관(微官)으로 있을 때 영성은 제남의 도위였었습니다. 그가 정무를 보는 태도는 마치 흉폭한 이리가 양을 몰아붙이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영성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황제는 영성을 관도위(關都尉)45)에 임명했다. 영성이 관도위가 된지1년이 되자 함곡관을 넘나들었던 관동(關東) 지방의 군국(郡國)의 지방관서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새끼를 안고 있는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영성의 노여움은 사지 말라!」

하내도위에서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자리를 옮긴 의종은 영성이 남양의 집에서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윽고 의종이 부임길에 남양의 관문에 당도했을 때 영성은 몸을 낮추어 의종의 뒤를 따르며 영접하고 송별했다. 그러나 혈기가 왕성하고 오만한 의종은 영성을 업신여기며 예를 갖추어 답례를 하지 않았다. 남양의 태수부에 당도한 의종은 영씨 종족들의 죄행을 심문하여 완전 풍지박산으로 만들어버렸다. 영성 역시 죄에 연좌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그러자 남양의 다른 호족 공씨(孔氏)와 포씨(暴氏) 종족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이후로 남양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행동을 극도로 조심하며 감히 죄를 짓지 못했다. 당시 평씨현(平氏縣)의 주강(朱强)과 두연현(杜衍縣)의 두주(杜周)는 모두 의종의 도움으로 관리가 되었으며 후에 중용되어 정사(廷史) 로 승진했다.

그때 한나라 조정은 수차에 걸쳐 정양(定襄)46)의 군졸들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양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불안한 마음이 되어 민심이 흐트러지고 풍속은 파괴되었다. 조정은 의종을 정양태수(定襄太守)로 임명해서 파견했다. 정양에 부임한 의종은 형구를 차지 않고 있던 죄형과는 상관없이200명에 달하는 옥중의 죄수들과 그들을 비밀리에 면회했던 사람들과 형제친척들200명을 모두 함께 체포했다. 그들을 심문한 의종은 죄수들은 탈옥을 기도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탈옥하려는 죄수들을 도와 모두 죽을죄를 범했다고 판결하고 그 날로4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몰살시켜버렸다. 그 후로는 군내에서는 추워서 떨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고 교활한 백성들은 관리들의 앞잡이가 되어 의종의 행정을 도왔다.

그때 조우(趙禹)와 장탕(張湯)은 법을 엄혹하게 집행해서 구경의 대열에 섰지만 관대하고 느슨한 그들의 정치는 모두 법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의종의 정치는 매가 날개를 푸득거리며 작은 새를 공격하여 낚아채듯이 흉폭하고 잔혹했다.

후에 문란한 화폐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오수전(五銖錢)과 백금(白金)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통용시켰으나 호족들이 그것을 기회로 여겨 위조를 일삼았는데 경성(京城) 지역이 특히 심했다. 그래서 조정은 의종을 우내사(右內史), 왕온서(王溫舒)를 중위(中尉)로 삼아 단속하도록 했다. 극도로 잔혹했던 왕온서는 의종에게 미리 알라지 않고 처결했으며, 의종은 또한 사사로운 감정으로 왕온서를 능멸하여 그가 처결한 일을 모두 망쳐놓았다. 의종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목숨을 빼앗는 일이 매우 많았으나 치안을 유지하는 데는 다급하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뿐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급기야는 직지(直指)47)라는 관직을 만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의 주요한 일은 사람들을 결박짓고 참살하는 일이었다. 그 중 염봉(閻奉)이라는 인물은 흉악한 자로써 관리에 임명된 자였다. 잔혹한 의종이 청렴한 것은 질도(郅都)를 본받은 바가 컸다. 황제가 어가를 움직여 정호(鼎湖)48)에 들렸다가 병을 오랫동안 심하게 앓았다. 이윽고 병에 차도가 있자 갑자기 어가를 움직여 감천궁(甘泉宮)으로 돌아오는데 행차하는 길이 정비가 되지 않아 황제가 대노하여 말했다.

「의종이란 놈은 내가 병이 낫지 않아 이 길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황제는 마음속으로 의종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해 겨울, 황제는 조칙을 내려 양가(楊可)에게 고민(告緡)의 일을 관할하도록 했다. 의종은 고민법의 시행이 풍속을 어지럽히는 소행이라고 생각해서 휘하의 관리들을 풀어 양가를 위해 일하는 자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천자가 듣고 두식(杜式)을 보내 의종의 행위를 조사하도록 했다. 두식은 의종의 집법행위는 군주를 대하는 예에 크게 벗어나고 군왕이 시행하고자 하는 일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판결하여 기시형(棄市刑)에 처해 죽였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장탕이 죽었다.

7. 왕온서(王溫舒)

왕온서(王溫舒)는 양릉인(陽陵人)49)이다. 나이가 젊었을 때 분묘를 도굴하는 등 나쁜 짓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에 현리(縣里)의 정장(亭長)이 되었으나 여러 번에 걸쳐 면직되고 다시 복직을 반복했다. 후에 다시 말단관리가 되어 임무를 잘 수행했기 때문에 승진하여 정사(廷史)가 되어 장탕을 섬겼다. 장탕은 그를 어사(御史)로 승진시켰다. 도적들을 추포하는 일을 감독했던 그는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그는 점차 승진하여 광평도위(廣平都尉)50)가 되었다. 그는 군내의 호족 중 용감한 사람10여 명을 부하 관리로 뽑아 그들을 앞잡이로 삼아 이면으로는 그들이 숨은 중죄를 파악한 뒤에 도적을 잡는 일을 독찰하도록 해서 그가 원하는 바를 빠른 시간 안에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저지른 죄가 백 가지가 넘어도 그 죄를 묻지 않았으나, 자기의 명을 거역하자는 자들은 처형시키고 심지어는 그들의 종족까지 멸족시키곤 했다. 그 후로는 제(齊)와 조(趙) 땅의 근교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도적떼들은 감히 광평의 경내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으며 광평 관하의 백성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황제가 듣고 왕온서를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승차시켰다.

원래 왕온서는 광평도위로 있으면서 하내의 간사한 호족들에 대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태수로 임명되고서도 일부러 지체해서9월이 되어서야 부임했다. 군 산하의 현령들에게 명을 내려 민가의 말50필 씩을 차출하여 하내에서 장안까지의 각 역참에 배치하도록 시켰다. 그런 후에 광평에서 사용한 책략대로 군 내의 간사한 호족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연좌된 집안만 해도 천여 호가 넘었다. 왕온서가 황제에게 서장을 올려 큰 죄를 짓는 자는 멸족을 시키고 적은 죄를 지은 자는 사형에 처한 후에 재산은 몰수하여 그들이 도둑질한 재물은 상환하겠다고 청했다. 그가 상주한 서장은 출발한 지 불과3일 만에 장안에 도착했다. 왕온서는 황제로부터 그대로 집행하라는 윤허를 받았다. 이윽고 안건이 상부에 보고되었는데 처형할 때 흐르는 피는10여리를 흥건히 적셨다고 했다. 하내의 백성들은 그가 상주하여 비준을 받는데 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신속하여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이윽고12월이 되자 군내에서는 일체의 소리가 사라지고 감히 밤에 외출하는 자도 없고 들판의 개를 짓게 하는 도적도 없어졌다. 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도적들은 인근의 군국으로 도망쳤다. 입춘이 되자 온서가 발을 구르며 한탄했다.

「아아 겨울이 한 달만 더 길었으면 내가 하던 일을 모두 끝낼 수 있을텐데!」51)

왕온서는 그와 같이 사람을 처형하기를 즐겨했다. 천자가 듣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를 중위(中尉)에 임명했다. 그가 형옥을 다스리는 방법은 하내에서 하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해서 남을 해치는데 능한 교활한 관리들을 심복으로 삼아 함께 일을 했다. 하내의 양개(楊皆), 마무(麻戊), 관중의 양공(楊贛)과 성신(成信) 등이 그런 무리였다. 의종(義縱)이 내사(內史)로 있을 때는 그를 꺼린 왕온서는 감히 자기 멋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이윽고 의종과 장탕이 죽자 왕온서는 정위로 자리를 옮기고 윤제(尹齊)가 중위가 되었다.

8. 윤제(尹齊)

윤제는 동군(東郡) 임평(荏平)52) 출신이다. 도필리(刀筆吏)에서 점차 자리를 옮겨 어사(御史)가 되어 장탕을 모셨다. 장탕이 여러 번 그가 청렴하고 굳세다고 칭송하여 도적을 잡는 일을 감독시키자 그는 귀척을 가리지 않고 참형에 처했다. 다시 관내도위(關內都尉)가 된 윤제는 그 명성이 영성보다 더 높게 되었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황제는 그를 중위(中尉)로 삼았다. 윤제로 인해 관리들과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윤제는 융통성이 없고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었음으로 강포하고 흉악한 관리들은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선량한 관리들은 독자적으로 정사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옛 일들을 수시로 폐했음으로 죄에 저촉되어 파면되고 말았다. 황제가 왕온서를 중위로 삼고 잔인하고 혹독한 정치로 이름이 높은 양복(楊僕)을 주작도위(主爵都尉)도 삼았다.

9. 양복(楊僕

양복(楊僕)은 의양(宜陽) 출신다. 천부(千夫)53)의 신분으로 미관(微官)이 되었다. 하남태수가 심사하여 그가 재능이 있다고 천거했다. 후에 어사로 승진하여 관동의 도적을 추포하는 일을 독찰했다. 윤제의 방법을 따른 그의 정치는 흉맹하고 과감하다고 인정받아 점차적으로 직급이 올라 주작도위가 되어 구경의 대열에 섰다. 양복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황제는 남월(南越)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누선장군(樓船將軍)에 임명했다. 남월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양복은 장량후(將梁侯)에 봉해졌다. 후에 조선정벌전에 참가한 그는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에게 포박당하는 몸이 되었다. 면직되어 오랫동안 집에서 칩거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다시 왕온서가 복직되어 중위(中尉)가 되었다. 왕온서는 위인이 꾸밈새가 적어서 정위로 있을 때는 어리숙하여 변설도 변변치 않아 하는 일마다 성과가 없었으나 중위가 되어서는 마음속으로 깨우치는 바가 있었다. 도적을 추포하는 일을 독찰할 때 평소에 관중의 풍속에 익숙했기 때문에 호족과 악질적인 관리들을 잘 알고 있어 그들을 모두 불러 부하관원으로 쓰자 그들은 모두 왕온서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계책을 도모했다. 그들로 하여금 도적들을 감찰하는데 가혹할 정도로 혹사시키고, 도적이나 악행 소년들에 대한 고발을 유도하기 위해 투서함과 함께 현상금을 걸었다. 또한 백격장(伯格長)54)을 두어 마을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나 도적들을 독찰했다. 왕온서는 사람들에게 아첨을 잘했다. 그래서 세력이 있는 사람들을 잘 받들었고 세력이 없는 사람은 마치 자기 집의 하인 부리듯이 했다. 세력가라면 그가 비록 태산과 같이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결코 법을 적용시키지 않았으며 세력이 없다면 그가 비록 귀족이거나 외척이라고 해서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욕을 보였다. 법조문을 교묘하게 적용시켜서 교활한 평민들을 함정에 빠뜨려 강대한 호족들을 위협했다. 중위로써의 치적은 그와 같았다. 간사하고 교활한 백성들은 반드시 그 죄를 추궁해서 대부분은 살갗이 찢어지고 살이 터져 옥사했으며 죄를 다시 논하여 옥에서 빠져나오는 자는 없었다. 그가 앞잡이로 쓰는 관료들은 마치 관을 쓰고 있는 호랑이와 같이 흉포했다. 그래서 중위부(中尉府)의 관할에 속하는 중등 이하의 간교한 백성들은 모두 숨어서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권세있는 사람들은 모두 왕온서를 대신해서 명성을 선전하고 그가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고 칭찬했다. 그러기를 몇 해를 계속하자 그에게 속한 관리들은 대부분이 권력과 부를 얻었다.

왕온서가 동월의 정벌전에 종군한 후에 돌아와서 올린 사안이 천자의 뜻에 부합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은 조그만 법에 저촉되는 일로 인해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 그때 마침 통천대(通天臺)55)을 개수하려고 했던 황제는 마땅히 그 일을 관장할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왕온서는 중위부(中尉府)의 관할 하에 있는 사람 중에서 병역을 기피한 사람 수만 명을 심사하여 그들을 동원하여 통천대를 개수하겠다고 주청했다. 황제가 매우 기뻐하며 그를 소부(少府)의 책임자로 임명했다가 다시 우내사로 전임시켰다. 그의 일을 수행하는 방식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으나 간교하고 사악한 일은 다소 줄어들었다. 법에 저촉되어 관직을 잃었으나 다시 복관되어 우보(右輔)가 되어 중위(中尉)의 일을 맡아 했으나 그의 일을 수행하는 방식은 예전과 같았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서 대완(大宛)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지방의 호족과 관리들 중에서 징발하라는 황제의 조칙이 내려졌으나 왕온서는 화성(華成)이라는 부하 관리를 숨겨주었다. 후에 어떤 사람이 왕온서를 고발했는데 그는 기병에 속한 사람으로부터 금전을 받고 징집을 면해주고 그밖에 옳지 못한 일을 했다고 했다. 그의 죄는 멸족에 해당했기 때문에 그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두 동생과 두 사돈집은 모두 각기 여러 가지 죄를 저질렀음으로 결국은 멸족되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광록훈(光祿勛) 서자위(徐自爲)가 말했다.

「아 슬프구나! 옛날에는 삼족을 멸하는 죄목이 있었는데 왕온서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오족이 동시에 멸족되었구나?」

왕온서가 죽자 그가 모아 놓은 재산은 모두1천금에 달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윤제(尹齊) 역시 회양도위(淮陽都尉)로 재직 중 병으로 죽었으나 그의 재산은50금도 채 못 미쳤다. 그에게 잡혀 죽은 회양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기 때문에 그가 죽자 원한에 사무친 유가족들이 그의 시체를 가져가 불사르려고 했다. 그래서 윤제의 가족들은 물래 그의 시체를 훔쳐 고향으로 가져가 안장해야만 했었다.

왕온서 등이 잔인하고 흉악한 수단으로 정사를 처리하기 시작하고부터 그 뒤를 군수, 도위 및 제후와2천석 녹봉의 관리들이 본받았으나 법을 범하는 관리들이나 백성들은 오히려 더욱 많아지고 도적들은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남양(南陽)의 매면(梅免), 백정(白政), 초(楚)의 은중(殷中), 두소(杜少), 제(齊)의 서발(徐勃), 연조(燕趙)지간의 견로(堅盧), 범생(范生) 같은 자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도적떼들의 괴수들로써 제멋대로 도적단의 이름을 짓고 횡행하면서 성읍을 공격하고 무기고를 습격했으며 사형수들을 석방했다. 그들은 군수와 도위를 생포하여 욕보였으나2천석의 관리들을 살해하고 격문을 현에 보내어 식량을 구하기도 했다. 촌락 사이를 횡행하며 노략질을 일삼는 백 수십 명으로 구성된 비교적 작은 도적떼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황제는 어사중승(御史中丞)과 승상장사(丞相長史)에게 도적떼들을 추포하는 일을 독찰하게 했다. 그래도 도적떼들은 금하지 못했다. 이에 황제는 광록대부 범곤(范昆), 삼보(三輔)56)의 각 도위(都尉), 옛날 구경(九卿)을 지냈던 장덕(張德) 등에게 비단옷과 지절(持節)과 호부(虎符)를 주어 군사들을 징발하여 도적떼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참수한 도적떼들의 수급이 만여 개가 넘는 부서도 있었다. 또한 도적떼들에게 식량을 제공한 자들을 법에 의해 처형했는데 여기에 연좌된 자는 몇 개 군에 미쳤고 많은 곳은 수천 명이 주살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도적떼들의 대두령들을 대부분 잡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흩어져 도망친 졸개들은 다시 험준한 산천의 요새지에 의지하여 무리를 짓고 여기저기에 군거했으나 한나라 조정은 그것까지는 어쩌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시 조정은 심명법(沈命法)을 만들어 반포했다. 심명법은 “도적떼가 일어났음에도 적발하지 않고 적발했으나 체포한 자가 일정한 수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2천 석 이하에서 말단 관리까지 그 책임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라는 내용의 법이었다. 그후로 주살될 것을 두려워한 말단관리들은 비록 도적떼가 일어나도 감히 상부에 보고하지 못하고, 또한 체포하지 못할 경우 상급 관청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상급 관청 역시 말단관리들에게 보고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도적떼들은 더욱 많이 일어나게 되었지만 하급이건 상급이건 관청들은 모두 도적떼들을 숨기고 문서들을 거짓으로 꾸며 법망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10. 감선(減宣)

감선은 양(楊)57) 출신이다. 현의 좌사(佐史)로 일하면서 능력을 발휘했음으로 하동태수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대장군 위청(衛靑)이 말을 사기 위해 하동으로 보낸 사람이 감선을 보고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는 감선을 발탁하여 대구승(大廐丞)58)으로 삼았다. 맡은 일을 잘 처리했음으로 점차 승진하여 옮겨 어사(御史)와 중승(中丞)이 되었다. 황제가 감선에게 주보언(主父偃)과 회남왕(淮南王)의 모반사건을 심리하도록 명했다. 미미한 법조문을 깊고 엄혹하게 적용하여 피의자들을 함정에 빠뜨려 그로 인해 피살된 사람이 무수히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의혹이 있는 어려운 사건을 잘 처리했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파직되고 다시 기용되기를 반복해서 어사와 중승이 되는 데만 무려20여 년이나 걸렸다. 왕온서가 중위(中尉)의 자리에 파직될 때 감선은 좌내사(左內史)로 있었다. 그는 미곡과 소금에 관한 일을 관리했는데 큰일이거나 작은일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가 친히 처리했고 또한 자기가 친히 관하의 현과 현내의 각 부서의 재물과 기물까지도 직접 관리하면서 현령이나 현승(縣丞)이 임의로 바꾸지 못하게 했다. 만일 그것을 참지 못하고 위반하는 자는 무거운 죄를 적용하여 처벌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군 내의 모든 작은 일들은 잘 처리되었으나, 작은일을 잘 처리하여 큰일에 까지 적용되도록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감선의 역량에 의지해서만이 실행될 수 있었고 그의 방법은 일괄적으로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선의 결국 중도에 파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후에 복직되어 우부풍(右扶風)에 임명되었다. 감선이 부하관원이었던 성신(成信)에게 원한을 품자 성신은 달아나 상림원(上林苑)으로 들어가 숨었다. 감선이 미현(郿縣)의 현령과 그 관원들 및 사졸들을 이끌고 상림원으로 들어가 숨어있던 성신을 찾아내 죽였다. 미현의 관원들과 사졸들이 성신을 발견하고 활을 쏘아 죽일 때 몇 개의 화살이 상림원의 문에 꽂히게 되어 고발된 감선은 법관에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되었다. 법관은 감선이 대역무도한 죄를 범해 멸족을 판결했다. 감선은 자살하고 두주(杜周)가 임용되었다.

11. 두주(杜周)

두주는 남양(南陽)의 두연(杜衍)59) 출신이다. 의종(義縱)이 남양의 태수 직에 있을 때 그의 앞잡이가 되어 일을 잘했음으로 그의 천거를 받아 정위사(廷尉史)가 되어 장탕의 속관이 되었다. 장탕이 두주가 일을 매우 공정하게 잘한다고 칭송하자 그는 어사(御史)로 승진했다. 변경의 군졸들이 탈영한 사건을 맡았을 때 그는 매우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그는 황제의 마음에 부합하게 상주를 잘했음으로 중용되어 감선이 하던 일을 대신 맡았다가 다시 중승(中丞)이 되어10여 년 동안 재직했다.

두주의 일하는 방법과 감선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무거운 자세를 취하며 서두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관대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엄혹하게 적용해서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치게 했다. 감선이 좌내사의 자리에 있을 때 두주은 정위가 되어 장탕을 그대로 본받아 황제가 뜻에 부합시키려고 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을 내치려고 하면 그는 법을 농단하여 그 사람을 법망에 옭아매고, 황제가 풀어주려고 하면 그 자를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어두었다가 황제가 하문하기를 기다려 조심스럽게 그가 억울하게 죄에 연루되었다고 변호했다. 손님 하나가 그런 두주를 비난했다.

「대감께서 황제를 위하여 평결을 하는데 삼척(三尺)의 법(法)60)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황제의 뜻에 맞추어 판결을 하고 있습니다. 옥사를 처리하는 방법이 원래 그와 같습니까?」

그러자 두주가 대답했다.

「삼척의 법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먼저의 군주로부터 나와 정해진 법을 율(律)이라고 하고, 나중에 군주가 옳다고 하는 법을 적어 놓은 것을 령(令)이라 한다. 당시의 군주가 옳다고 하면 되지 어찌 옛 법을 운운하는가?」

두주가 정위에 임명되자 황제의 명으로 생긴 옥사가 더욱 많아졌다. 2천석의 고관으로써 법에 연좌되어 옥에 갇힌 관리들이 현직이거나 전직이거나를 합해서100 명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군의 관리나 중앙의 상급 관청의 관리로써 정위부에 송치된 사람은 일 년에1천여 명이 넘었다. 큰 사건의 경우 연루되어 체포되거나 증인으로 소환된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르고, 작은 사건의 경우는 수십 명에 달했다. 또한 멀리서 온 자는 수천 리에 가까운 곳에 온 자는 수백 리나 되는 먼 곳에서 출두해야 했다. 옥에 가두어놓고 심문을 할 때는 옥리들은 소장의 내용대로 탄핵했으며 윽박지르고 불복하면 태형이나 고문을 가해 원래의 죄를 확정시켰다.

 그래서 관리들이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모두가 도망쳐서 몸을 숨겼다. 심리가 오래 걸리는 사건은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사면을 받아 석방되어10여 년이 지났음에도 새로 고발을 받으면 대부분은 부도죄(不道罪) 이상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황제의 명으로 취급한 옥사로 인해 정위와 중도관(中都官)61)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은6-7만 명에 달했고 이 밖에 속관들에게 의해 별도로 체포된 연루된 자들까지 합치면10여 만에 이르렀다.

두주는 파직되었으나 후에 다시 집금오(執金五)62)가 되어 도적을 쫓는 일을 계속했다. 상홍양(桑弘羊)63)과 위황후(衛皇后)의 큰오빠 아들들을 체포하여 심문했는데 법을 가혹하게 적용했다. 황제는 그가 전력을 다해 사심 없이 처리했다고 해서 그를 어사대부로 승진시켰다. 두주의 아들들은 하수(河水)를 사이에 두고 하남군과 하내군의 태수가 되었다. 그들 형제의 다스림 역시 포악하고 잔혹하여 심지어는 왕온서보다 더 심했다. 두주가 처음 정사로 발탁되었을 때는 온전한 말이 한 필도 없을 정도로 빈한했다. 이윽고 그가 직책을 맡아 함으로 해서 그의 신분은 삼공의 대열에 서고 자손들은 고관의 자리에 올라 존경을 받았으며 집안의 재산은 거만금에 달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질도(郅都)에서 시작해서 두주(杜周)에 이르기까지의10여 명은 모두가 잔혹하고 극렬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질도는 강직하여 일의 시비를 분명히 밝히고 천하의 대체를 밝히려고 했다. 장탕은 음양의 조화를 잘 알아 황제의 뜻을 잘 받들었으나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어 국가가 힘입은 바가 컸다. 조우는 법에 근거하여 수시로 정의를 수호했다. 두주는 권세있는 사람에게 아첨을 일삼았으나 말을 적게 함으로써 신중하다는 평을 받았다. 장탕이 죽은 후 법망은 매우 조밀해져 수많은 사람들이 죄에 저촉되어 엄혹한 판결을 받았으나 정사는 오히려 쇠퇴하고 황폐해졌다. 구경(九卿)들은 모두가 자기의 관직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 그들의 과실을 방지하는 것도 미치지 못했는데 어찌 법률 이외의 것을 논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 열 사람 중에 청렴했던 자는 다른 사람의 의표(儀錶)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들이 시도한 책략이나 사람들에 대한 교도와 간사하고 사악한 것을 금지한 일체의 행위 역시 찬란히 빛을 발하여 본질적으로는 문과 무를 갖추고 있었다. 비록 법의 집행을 엄혹하게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직무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촉군태수(蜀郡太守) 풍당(馮唐)이 사람들을 폭력으로 꺾어 누르고, 광한(廣漢)의 이정(李貞)이 제 멋대로 백성들을 잡아 찢어 죽이며, 동군(東郡)의 미복(彌僕)은 톱으로 사람의 머리를 잘랐다. 또한 천수의 락벽(駱璧)은 죄수들의 머리를 방망이로 내리쳐 자백을 받았고, 하동(河東)의 저광(褚廣)은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였으며 경조(京兆)의 무기(無忌), 풍익(馮翊)의 은주(殷周)는 살모사나 맹금(猛禽) 처럼 사나웠고, 수형(水衡)의 염봉(閻奉)은 사람을 몽둥이로 쳐서 죽이고 또한 사면의 조건으로 뇌물을 받아 챙겼다.

이러한 일들을 어찌 거론할 가치가 있겠는가? 어찌 거론할 가치가 있겠는가?』

  

- 혹리열전 끝-

주석

1)조조(晁錯) : 기원전200년에 태어나서154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으로 영천(潁川) 출신이다. 영천은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이다. 조조(朝錯) 혹은 조조(鼂錯) 등으로도 표기한다. 어렸을 때 장회(張灰)에게 신불해(申不害), 상앙(商鞅) 등의 형명학(形名學)을 배웠다. 문제 때 문학으로 천거되어 태상장고(太常掌故)가 되어 진나라 때 박사를 지냈던 복생(伏生)으로부터 상서(尙書)를 구술받아 정리했다. 후에 태자사인(太子舍人), 문대부(門大夫), 박사(博士), 태자가령(太子家令) 등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자 유계(劉啓:후의 경제(景帝))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다. 그는 흉노에 대해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하면서 수차에 걸쳐 《관병사소(官兵事疎)》,《수변권농소(守邊勸農疎)》,《모민실색소(募民實塞疎)》 등의 상소를 올렸다. 문제는 농민들을 변경으로 이주시켜 국경을 지켜야 한다는 조조의 상소를 허락했다. 문제12년 기원전168년, 다시 《논귀속소(論貴粟疎)》와 《감수농민조세(減收農民租稅)》라는 제목의 상소를 올려 농민들이 곡식을 바치면 작위를 내리고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가 받아들여 시행하고 더불어 당해 년의 조세 중 절반을 면제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경제가 즉위하자 내사(內史)로 자리를 옮겨 많은 법령을 개정하고 정비했다. 경제2년 기원전155년 어사대부가 되어 제후왕들의 봉지를 줄여야 한다고 건의하면서 다듬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 제후왕들의 영지를 깎아도 반란이 일어나고 깎지 않아도 반란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봉지를 깎으면 반란을 앞당겨 일어나게 해서 그 화는 적게 되고, 깎지 않는다면 반란을 늦게 일어나겠지만 그 화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경제가 조조의 계책을 받아들여 시행하자 얼마 후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이 군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의 정적 원앙(袁盎)의 계책을 받아들인 경제가 조조를 처형하고 그 가족들을 멸족시켜 제후들의 반란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한서 예문지(藝文志)에 그의 저서31편을 기재했다고 했으나 지금은8편 일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행적은 한서 조조전(鼂錯傳), 식화지(食貨志), 형연오전(荊燕吳傳) 등에서 볼 수 있다.

2)양현(楊縣) :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경내다. 홍동현은 산서성 남쪽의 분수(汾水) 강안의 도시다.

3)정위(廷尉) : 전국의 형옥(刑獄)과 쟁송에 관한 일체의 일을 관장한 관리들의 장관으로 구경에 속했다. 매년 전국에서 행해졌던 형옥의 일을 취합하고 그 중 주군(州郡)이나 현에서 의심스러운 사건은 정위에게 보고하여 판결을 요청했다. 정위는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항상 속관을 파견하고 다시 황제와 삼공에게 올바른 판결을 위한 의견을 제출했다. 정위는 황제의 명령에 근거하여 제후왕이나 대신들을 체포 구금한 후에 일의 내막을 조사하고 판결했다. 그밖에 예의나 율령은 모두 정위가 간직하다가 사건의 추이에 따라 그들의 권한으로 고칠 수 있었다. 분(分), 척(尺), 촌(寸), 장(丈) 등의 도량형의 표준을 정하는 것도 정위의 소관이었다. 정위는2천석이고1천석에 해당하는 정위정(廷尉正)과 좌·우(左·右)의 감(監) 각1인 씩과 그 밑에 연사(掾史)를 두었다.

4)조후(條侯) : 강후(絳侯) 주발(周勃)의 아들 주아부(周亞夫)의 봉호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143년에 죽었다. 문제 때 흉노가 침범하자 장군이 되어 세류(細柳)에 주둔하며 수비에 임했다. 경제 때 태위(太尉)가 되어 오초칠국의 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경제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고 승상에 오르고 조후에 봉해졌으나 후에 율태자(栗太子) 폐위에 반대하여 관직에 물러나 있던 중 아들의 수뢰사건에 연루되어 하옥 중 절식하여 굶어죽었다.

5)임강왕(臨江王) : 율태자(栗太子) 유영(劉榮)을 말한다. 기원전149년 그의 모후 율비(栗妃)가 경제의 총애를 잃자 태자에서 폐위되어 임강왕이 되고 얼마 후에 태자의 자리에는 왕부인의 소생 유철(劉徹) 즉 한무제가 대신 섰다. 기원전146년 종묘의 땅을 범한 죄명으로 하옥되어 중위로 있던 질도의 심문을 받다 자살했다.

6)양현(穰縣) :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이다.

7)도위(都尉) : 전국 때 처음으로 시작되어 진과 한나라가 따라서 설치한 관직으로 고위 무장 밑의 중급 무관이다. 그 직위는 교위(校尉) 보다 낮았으며 관명은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예를 들면 호군도위, 부마도위, 강노도위 등과 호칭되었다. 한나라 때의 봉록은2천 석이었다.

8)중위(中尉) : 전국 때 조나라가 처음 설치한 관직 이름. 인재를 발굴하여 천거하는 일을 맡았다. 진(秦)나라 때 구경(九卿)의 하나가 되었다가 한나라가 이어받았다. 수도의 치안을 관장하고, 한나라 때는 수도 방위군의 북군을 관장했다. 한무제 태초 원년 기원전104년 집금오(執金吾)로 개명되었다.

9)내사(內史) : 진한(秦漢)때 경기(京畿) 지방에 설치하여 군을 대신한 행정구역의 이름. 진나라에서 처음 시작하여 함양을 관할 구역으로 하시작하여 한경제2년 좌우로 나뉘어졌다가 무제에 이르러 우내사는 경조윤(京兆尹), 좌내사는 좌풍익(左馮翊), 새로 신설한 우부풍(右扶風)으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통칭하여 삼보(三輔)라 했다.

10)경(頃) : 지금 평수로5,500평이다. 1천 경은5백5십만 평에 달하는 면적이다.

11)유장(劉長) : 고조의 여덟 아들 중7남으로 고조11년 기원전196년 회남왕에 봉해졌다. 효문제 때 교만한 나머지 입조할 때는 항상 황제와 같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갔다. 봉지에 있을 때는 한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정해 다스렸다. 문제6년 기원전174년 흉노 및 민월의 수령들과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려고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촉군(蜀郡)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를 가던 중 절식하여 굶어 죽었다. 시호는 려(厲)이다.

12)주양(周陽) :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聞喜縣) 경내다.

13)급암(汲黯) : 자는 장유(長孺)로 하남성 복양(濮陽) 출신이다. 한무제 때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어 구경(九卿)의 한 사람이 되었다. 승상(丞相) 장탕(張湯)과 어사대부 공손홍(公孫弘) 등을 법률 만능주의자요 천자에게 아첨하는 영교지도(佞巧之徒)라 비난하고, 황로지도(黃老之道)·무위(無爲)의 정치를 주장했다.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회양태수(淮陽太守)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4)복식(伏軾) : 수레 앞쪽의 횡목을 붙잡고 몸을 의지하며 사열을 행하는 의식

15)하동군(河東郡) : 원래 전국 때 위(魏)나라가 설치한 군현(郡縣)이었으나 진(秦)나라가 빼앗아 관할하다가 한나라가 그대로 따랐다. 지금의 산서성 남부지역을 관할로 하고 치소는 안읍(安邑)이다.

16)승도공(勝屠公) :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신도(申屠)의 오기라 했다.

17)태(斄) : 지금의 섬서성 무공시(武功市)다.

18)좌사(佐史) : 한나라 때 지방장관의 군청과 현청의 각종 사무를 처리했다. 군과 현의 속관으로 녹봉이100석에 못 미치는 한나라 때 가장 직급이 낮은 관리였다.

19)영사(令史) : 한나라 때 중하급 관리들의 통칭이다. 영사승(令史丞), 승사(丞史)로도 불렀다.

20)태중대부(太中大夫)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계승한 관직으로 조정의 공론과 고문에 응하는 직책으로 일정한 직책이 없이 황제의 명이 있을 때에 한하여 업무를 보았다. 궁중에 기거하면서 명의상으로는 낭중령(郎中令:후의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광록훈의 지휘를 받지 않았던 황제 직속의 고급 참모에 해당했다. 봉록은1천석으로 급사중(給事中), 시중(侍中)으로 불리며 황제의 측근에서 보좌했기 때문에 권력이 매우 컸다.

21)견지법(見知法) : 관리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적발하여 탄핵하지 않을 경우 적용하여 처벌하는 법을 말한다. 지금 한국으로 말하면 불고지죄에 해당한다.

22)두현(杜縣) :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동남쪽의 고을로 한무제 때 두릉(杜陵)으로 개칭되었다.

23)전승(田勝)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130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로 경제의 비 왕황후(王皇后)의 동모이부(同母異父) 동생이다.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경내의 장릉(長陵) 출신으로 무제 건원(建元) 원년(전140년) 주양후(周陽侯)에 봉해졌으나 재물을 탐하여 법을 범하고 문사를 잘 꾸몄다.

24)회남왕(淮南王) : 유안(劉安)을 말한다. 기원전179년에 나서122년에 죽었다.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의 아들로서 독서를 좋아하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특히 사부를 짓는데 재능이 있었다. 유장은 고조 유방의 막내아들이다. 문제16년 기원전164년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 받아 회남왕이 되었다. 경제3년 기원전154년 오초칠국의 란에 참가하려 했으나 승상의 간언으로 중지하여 란이 진압된 후에 무사할 수 있었다. 무제가 들어서자 문재가 출중하여 총애를 얻고 무제의 명으로 《이소전(離騷傳)》을 지었다. 새벽에 황제의 침전에 들러 식사를 같이 하면서 글을 써 완성했다. 일찍이 빈객과 방술인을 모으기 시작해서 수천 명에 달했다. 《내서(內書)》21편, 《외서(外書)》33편, 《중편(中篇)》8권 등의 책을 편찬했다. 후에 모두 합하여 《회남홍열(淮南鴻列)》》이라고 칭했다. 즉 《《회남자(淮南子)》》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잡가(雜家)의 계열에 섰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122년 모반사건이 발각되어 자살했다.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참조

25)형산왕(衡山王) : 회남려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의 아들이며 회남왕 유안의 동생 유사(劉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122년에 죽었다. 문제8년 기원전172년 양주후(陽周侯)에 봉해지고16년 여강왕(廬江王)에 봉해지고 경제4년 기원전153년에 형산왕으로 봉국이 바뀌었다. 한무제 원수 원년 기원전122년에 반란을 획책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자살했다.

26)강도왕(江都王) : 경제의 작은아들 강도역왕(江都易王) 유비(劉非)의 아들 유건(劉建)을 말한다. 유비의 봉국을 물려받은 그는 극도로 황음무도했다. 상중에 부친의 애첩과 동침했을 뿐만 아니라 자매들을 범했다.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을 꾀할 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하지 않고 비밀리에 병장기를 제작하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모반이 발각되어 경사에 불려와 심문을 받고 자살했다.

27)엄조(嚴助)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122년에 죽은 서한의 관리로 사부가(辭賦家)이다. 원래 장(莊) 씨였으나 후세 사람이 한명제(漢明帝)의 이름 장(莊)을 휘(諱)하여 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회계(會稽) 오현(吳縣) 출신이다. 사부가 엄기(嚴忌)의 아들로 한무제 원년 기원전140년 책문으로 현량(賢良)을 뽑을 때 무제의 눈에 띄어 중대부로 발탁되었다. 조정의 공론을 주도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년 민월(閩越)이 동구(東甌)를 쳐들어가 포위하자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회계의 군사를 발하여 바다로 나아가 동구를 구했다. 6년 남월을 안무하기 위해 남월에 들어가 남월왕을 설득하여 그의 태자를 데리고 와서 황제에게 조현을 올리게 했다. 얼마 후에 회계태수가 되었다가 다시 시중(侍中)이 되어 황제의 측근에서 모시며 부(賦)와 송(頌) 수 십 편을 지었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122년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을 획책했을 때 평소에 맺은 회남왕과의 친교관계 때문에 연좌되어 주살되었다. 한서 예문지에 그가 지은 사부35편이 전해진다.

28)오피(伍被) : 지금의 호북성 노하구시(老河口市)인 찬(贊) 출신으로 반고의 한서에 ‘오피는 초인(楚人)으로 혹자는 오자서의 후예’라고 했다. 오피는 서한 초 회남왕 유안(劉安)의 모사였다. 오피의 뛰어난 재능은 유안의 막료 중 단연 으뜸이었다. 유안이 후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오피를 불러 그 의견을 물었다. 오피는 옛날 오자서가 오왕 부차(夫差)에게 간했으나 오왕이 듣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사를 유안에 빗대어 말했다. 유안이 노하여 그의 부모를 붙잡아3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었다. 후에 유안의 모반이 누설되어 오피는 유안과 함께 체포되었다. 무제가 언사가 공손한 오피의 목숨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어사대부 장탕이 반대하며 말했다.

「오피는 유안의 모반 계획을 꾸민 자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인 입니다.」

오피는 결국 처형당했으며 그 사건으로 연루되어 함께 죽은 사람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유안 역시 자살했다. 원래 회남자를 편찬한 유안은 도가에 입각한 자연과 천도를 주창하고 복고를 반대했다. 백가를 쫓아내고 오로지 유가만을 받들었던 무제의 문화정책에 저항한 결과 반란사건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유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한 댓가로 피살되었다고 할 수 있다.

29)혼야왕(渾邪王) : 흉노의 선우(單于) 밑에 있는 여러 왕 중 한 명으로 무제 원수(元狩)2년 기원전121년4만의 부족들을 거느리고 한나라에 투항했다. 《흉노열전》 참조

30)은전(銀錢) : 평준서의 백금전(白金錢)을 말하는 것으로써 은과 동을 합금하여 만든 한무제가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 발행한 고액화폐다. 제일품은8량의 무게로 원형의 모양에 용의 무늬를 넣고 이름하여 백선(白選)이라고 하고 그 명목 가치는3000전(錢)으로 하고 제이품은 무게를 일품보다 가볍게 하고 정사각형의 모양에 말의 그림을 넣고 그 명목 가치는500전(錢)으로, 제삼품은 무게를 더욱 가볍게 해서 타원형의 모양에 거북이 그림을 넣고 그 명목가치는300전으로 했다.

31)오수전(五銖錢) :한나라 때의 화폐로 《평준서(平準書)》에 ‘관리들이 다시 주청을 하기를 삼수전(三銖錢)이 너무 가벼워 위조하기에도 용이하다고 하면서 각 제후국과 군현들에게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는 다른 한쪽 면의 둘레에도 윤곽을 넣어 동전에서 동가루를 긁어 내지 못하도록 했다.’라고 했다. 이에 한무제는 원수(元狩) 5년 기원전118년, 기존의 삼수전은 폐기하고 새로 주조한5수전을 한나라의 새로운 화폐로 통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화폐의 주조권이 군국(郡國)의 지방정부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 조정은 화폐의 관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원정(元鼎) 4년 기원전113년 동폐의 주조권을 중앙으로 모두 귀속시키고 상림삼관(上林三官)을 두어 관장하도록 했다. 상림원 내에 수형도위(水衡都尉)라는 밑의 속관으로 종관(鐘官), 기교(技巧), 변동(變動) 등의 삼관을 말한다. 오수전은 한나라 전역에서 통용된 화폐로써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 사용된 화폐로써 한나라가 망하고 나서도7백여 년 후인 수나라 때까지 통용되었다.

32)고민령(告緡令) : 한나라 무제 때 재산을 은닉하여 세금을 포탈한 상인들을 적발하여 세금으로 추징한 법령이다. 민(緡)은 동전을 꿰는 끈을 말하나1천 전을 꿴 화폐의 단위이다. 한무제는 부상(富商)과 대고(大賈), 고리대금업자 등의 상업자본가를 압박하여 대대적인 흉노정벌로 고갈된 국가재정을 채우기 위해 시행한 중요정책이다. 원수(元狩) 4년 기원전119년, 산민령(算緡令)을 반포해서 대상(大商), 대고(大賈),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스스로 소유재산을 신고토록 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재산세를 징수했다. 매2천 전, 즉2민(緡) 당120전에 해당하는1산(算)을 납부토록 했다. 그러나 상인 등의 상업자본가들이 재산을 은닉하여 신고하지 않거나, 신고하더라도 재산을 줄여 신고함으로 해서 산민령의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자, 다시 고민령(告緡令)을 반포했다. 양가(楊可)를 등용하여 고민령의 시행을 감독시켰는데 재산을 은닉하거나 속여 신고한 사람을 고발하여 사실로 확인될 경우에는 고발당한 사람은 그 재산을 전부 몰수당하고 동시에1년 동안 변경에 가서 군역에 복무해야 했으며, 몰수한 재산 중 절반을 고발한 사람에게 포상금으로 지불한다는 내용의 법이었다. 이 법이 발표되자 전국각지에서는 서로 다투어 고발함으로 해서 대상업자본가는 완전 몰락하게 되었으며, 국가는 수 억 전의 돈과 함께 상업자본가 소유의 광할한 농지 및 노비들을 재정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고민령은 근10년간 시행했다가 원봉(元封) 원년인 기원전110년에 가서야 비로소 중지했다.

33)안이(顔異)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19년에 죽었다. 정장(亭長)의 벼슬로 시작하여 청렴하고 공평무사하다고 해서 천거되어 대사농에 제수되었다. 어사대부 장탕과 정견이 같지 않음으로 해서 무제 원수 원년 기원전119년 장탕에 의해 탄핵되어 복비죄(服誹罪)로 피살 되었다.

34)복비죄(服誹罪) : 말은 하지 않으나 마음속으로 비방한 죄.

35)정장(亭長) : 진나라가 설치한 지방의 하급 관리로 매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여 정장을 두고 치안을 도둑을 물리치거나 체포케 하고 머무는 여행객을 관리하고 민사를 처리하게 하였다.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패현(沛縣)의 정장 출신이다.

36)어사중승(御史中丞) : 진한(秦漢) 때 어사대부 바로 밑의 중요한 속관으로 녹봉은 천석이다. 궁중의 도서와 장부를 관장했고 내부적으로 시어사(侍御史)들을 거느리고 밖으로는 자사(刺史)들을 감독하며 백관의 규찰을 담당했다.

37)유팽조(劉彭祖) : 가부인 사이에 난 경제의 아들이다. 경제2년에 광천왕(廣川王)에 봉해지고 후에 조왕(趙王) 유수(劉遂)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폐출되자 조왕으로 개봉되었다. 법률을 좋아했고 궤변에 능했으며 항상 조정의 승상을 모함하려고 시도했다. 정화 원년 기원전92년에 죽었다.

38)도관(導官) : 궁중에 쌀과 음식을 공급을 맡아 했던 관직의 이름이다.

39)감선(減宣) : 서한의 혹리로 함선(咸宣)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洪洞縣)인 양(揚) 출신으로 무제 때 하동태수부에서 좌사(佐史)의 직에 있다가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회남왕(淮南王)과 주보언(主父偃)의 반란사건을 심문하라는 한무제의 령을 받고 과감하게 사건을 처리했다. 이후 파직과 복직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하다가 어사중승(御史中丞)의 자리에 근20년 가까이 재직했다. 후에 우부풍(右扶風)에 임명되어 부임하자 불법을 저지른 성신(成信)이라는 하급관리를 치죄하려고 했으나 성신이 도망쳐 상림원(上林苑)으로 들어갔다. 그가 우붕풍 관하의 현령과 군사를 이끌고 상림원으로 들어가 성신을 잡아서 죽였다. 그 와중에 화살이 상림원의 원문에 꽂혀 대역죄에 연좌되어 하옥되자 자살했다.

40)주작도위(主爵都尉) : 한경제 중원(中元) 원년 기원전144년 주작중위를 개칭해서 설치하고 제후들의 봉작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했다. 녹봉은2천석으로 구경 중의 한 명이다. 무제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104년, 다시 우부풍(右扶風)으로 개편되어 내사(內史)의 좌우의 관할 중 우측 땅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의 명칭이 되고 봉작에 관한 일은 대홍려(大鴻臚)가 담당하게 되었다. 남월열전(南越列傳)에 ‘주작도위 양복(楊僕)이 루선장군(樓船將軍)에 임명되어 남월 정벌에 나섰다.’라는 기사가 있다.

41)장안세(張安世) : 장탕의 아들로 자는 자유(子孺)다. 장탕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무제에 의해 발탁되어 랑(郞)이 되었다가 상서(尙書)의 자리에 올라 힘을 다하여 공무를 수행했다. 그 공으로 상서령(尙書令)이 되고 다시 광록훈(光祿勛)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제(昭帝)가 제위에 오르자 우장군(右將軍)과 광록훈(光祿勛)을 역임하며13년 동안 황제를 보좌했다. 원봉6년 기원전74년, 부평후(富平侯)에 봉해지고3천 호의 식읍을 받았다. 소제가 죽자 그와 곽광(霍光)은 황음무도한 소제의 동생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웠다. 그 공으로 장안세는1만6백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지절2년 기원전68년 곽광이 죽자 그는 대사마(大司馬)와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고 상서(尙書)의 일을 통괄했다. 다음 해에 위장군(衛將軍) 임명되어 장락궁 및 미앙궁, 성문의 경비병과 북군의 총수가 되었다. 선제의 깊은 신임을 받아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 영향력을 발휘했다.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고 매사에 주도면밀하여 새로운 조령(詔令)이 내려질 때마다 그는 일부러 놀라고 두려운 모습을 하고 부하관원들을 시켜 승상부에 보내 자세한 내막을 알아오라고 시켰기 때문에 공경대신들은 그가 이미 조령을 논의할 때 깊이 참여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직위는 공후(公侯)에 식읍은 만호에 달했지만 몸에는 항상 검은 물을 들인 옷을 입었으며 부인은 베틀을 몸소 돌렸고7백 명에 달하는 가동들도 모두 직공등이었지만 또한 그의 부는 곽광을 능가했다. 원강(元康) 4년 기원전62년에 죽었다.

42)장차공(張次公) : 서한의 장군으로 하동인으로 그의 부친 장륭(張隆)은 한경제의 근위병이다. 장륭은 명궁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의종(義縱) 등과 결당하여 도적떼를 결성하고 강도가 되었다. 무제 때 랑(郞)이 되어 군사작전을 나가 용감하고 민첩한 행동으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공을 세워 정위가 되었다. 원삭(元朔) 2년 기원전127년 대장군 위청(衛靑)의 부하 장수가 되어 흉노 정벌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안두후(岸頭侯)에 봉해지고 장군(將軍)에 임명되어 북군을 통솔했다. 원삭5년 기원전124년 다시 위청을 따라가 흉노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식읍을 더 받아2천호가 되었다.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122년 회남왕 유안(劉安)의 딸과 간통하고 다시 뇌물을 수수하여 파직되고 후의 자리와 식읍을 잃었다.

43)왕태후(王太后)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126년에 죽었다. 한경제의 모후로써 왕(王) 성이다. 처음에 장릉(長陵) 인 김왕손(金王孫)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하나 낳았다. 후에 그녀의 모친이 관상가의 말을 믿고 왕태후를 김왕손과 이혼시키고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문제 때 태자인 경제의 동궁으로 들어가 미인(美人)이 되어 총애를 받아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경제가 제위에 오르자 부인이 되고 아들 유철(劉徹:후의 무제)은 교동왕(膠東王)에 봉해져 그녀는 교동왕태후로 불리워졌다. 평소에 사이가 좋은 경제의 누이 장공주(長公主)와 모의하여 경제의 총비 율비(栗妃)를 모함하여 폐출시키고 동시에 율비의 소생 유영을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경제7년 황비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유철은 태자로 책봉되었다. 경제가 죽고 유철이 뒤를 잇고 그녀는 황태후가 되어 두태후(竇太侯)와 궁중의 세력을 다투아 무제 초년에는 영향력을 크게 발휘했다. 그녀는 권력을 이용하여 왕가의 출신3명을 제후로 만들었다. 그녀의 동모이부 동생 전분(田蚡)은 승상이 되어 그녀의 비호아래 전횡을 일삼고 발호했다. 또한 그녀의 전남편 사이의 소생인 딸을 수성군(脩成君)에 임명했는데 수성군의 아들은 권력을 믿고 장안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44)장릉(長陵) : 한고조 유방의 능묘로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북 백묘촌(白廟村) 동북에 있다.

45)관도위(關都尉) : 관문의 출입을 통제하는 관리들의 장관이다.

46)정양(定襄) : 서한 때 운중군(雲中郡)을 나누어 설치한 군(郡)으로 치소는 성락(成樂)이다. 성락은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和林格爾 土城子다. 예하에12개 현을 두고 관할지역은 지금의 내몽고 淸水河, 화림격이(和林格爾), 卓資 일대다.

47)직지(直指) : 비단옷을 입은 어사를 간칭하는 용어다. 수의어사(綉衣御史), 직지수의사자(直指綉衣使者), 직지사자(直指使者)라고도 호칭했다. 한무제가 처음 설치하고 왕망 수의집법(綉衣執法)으로 개칭했다. 도적을 쫓아가 체포하고 큰 옥사를 심리했다. 녹봉은6백석이다. 한무제 말년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기의하자 무제는 포승지(暴勝之) 등을 직지로 임명하여 부월을 지참하고 현지로 내려가 관군을 독려하고2천 석 이하의 지방관을 주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사정에 얽매이지 않고 일을 처결한다는 뜻에 수의는 황제의 은총을 받은 존경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상설직이 아니고 일이 발생했을 때만 설치한 관직이다.

48)정호(鼎湖) : ①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장소로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했다는 곳이다. 봉선서(封禪書)에 의하면 ‘황제가 정(鼎)을 만들어 완성되자 수염을 늘어뜨린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황제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후에 사람들이 그곳을 정호라고 불렀다.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靈寶縣) 형산(荊山) 부근으로 추정된다. ②지금의 섬서성 남전(藍田)에 있었던 한나라 때의 궁궐이름이다. 효무본기에 ‘천자가 정호에 행차했다가 병을 크게 앓았으나 무당이나 어의가 온갖 방법을 모두 써봤으나 차도가 없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사기지명고에 따르면 감천궁(甘泉宮) 운양(雲陽)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49)양릉(陽陵) :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고릉현(高陵縣)이다.

50)광평(廣平) : 한경제 중원(中元) 원년 기원전149년 거록군(鉅鹿郡)을 나누어 설치한 후국(侯國)으로 치소는 광평(廣平)으로 지금의 하북성 계택현(鷄澤縣) 동남이다.

51)한나라의 법제에 입춘(立春) 이후에는 죄인들을 처형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이 있었다.

52)임평(荏平) : 지금의 산동성 임평현(荏平縣) 경내다.

53)천부(千夫) :한무제가 전쟁에 나가 세운 무공(武功)에 따라 수여하기 위해 제정한 작위(爵位)의 명칭으로 제7급이다. 무제 때20급의 작위가 군공으로 남발되어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게 여기자 흉노에 대한 대규모의 정벌전을 수행하기 위해 원삭(元朔) 6년 기원전123년 다시 군공에 따라 작위를 내리기 위해11급으로 제정해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려고 했다. 천부의 작위는11급 중7급으로써 원래20급의 작위에 있어서9급인 오대부(五大夫)의 특권을 누렸다.

54)백격장(伯格長) : 백은 도로를 따라 조성된 시가를 말하고 격은 촌락을 의미하며 따라서 백격장은 리장이나 촌장을 말한다.

55)미신에 빠져 신선이 되고 싶었던 한무제가 감천궁(甘泉宮) 내에 축조한 고대(高臺)로 높이가 약50장에 달했다.

56)삼보(三輔) : 서한이 창건될 때 수도인 장안을 포함한 인근지역을 경기(京畿)라 하고 그 관할 구역을 경조윤(京兆尹), 우부풍(右扶風), 좌풍익(左馮翊)으로 나누어 삼보(三輔)라 칭하고 각 구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장관에 좌.우내사, 주작도위(主爵都尉) 등을 두었다.

57)양(楊) :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경내의 남범촌(南范村)에 옛 고성이 있다. 주나라 때 희성 제후국으로 춘추 때 진(晉)나라에 합병되어 양설힐(楊舌肹)의 채읍이 되었다. 한나라가 이 곳에 양현을 설치했다.

58)대구승(大廐丞) : 태복(太僕)에 속하는 양마를 관리하는 관청의 장관인 대구령(大廐令)과 함께 황제의 수레를 끄는 말과 마굿간을 관리했다.

59)두연(杜衍)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경내 서남이다.

60)삼척의 법: 당시 법조문은 죽간이나 목간에 적어서 세 자 길이의 죽통에 넣어 보관했음으로 이에 삼척의 법이라 한 것이다.

61)중도관(中都官) : 한나라 도성(중도(中都))의 지방관아에 속하는 관리들의 총칭이다.

62)집금오(執金五) : 무제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104년 한무제가 중위(中尉)의 명칭을 집금오로 개칭했다.

63)상홍양(桑弘羊) : 낙양(洛陽) 출생. 장사꾼 아들로 태어나BC 140년경 암산(暗算)의 재능을 인정받고13세 때 시중(侍昭算) 되었다. 무제가 소금과 철(鐵)의 전매 등 새로운 재정책을 필요로 하게 되자 재무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내BC 115년 대사농중승(大司農中昞算) 되어 회계를 관장하고 균수관(均輸官) 설치에 착수하였다. BC 110년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되어 공근(孔僅)을 대신하여 염철(鹽鐵)의 전매를 장악, 균수평준법(均輸平準法)을 실시했다. BC 100년 대사농이 되고BC 98년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BC 87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올랐으나 그의 재정정책에 대한 민간의 불만이 높아졌다. BC 81년 현량문학(賢良文學)의 선비들과 궁정에서 전매법 기타 민간을 괴롭히는 문제에 관하여 격론을 벌였는데, 그때의 기록이《염철론》이다. 대장군 곽광(霍光)과 반목이 격화되어 연왕 유단(劉旦)·상관걸(上官傑) 등과 모의하여 곽광을 죽이고 소제를 폐위시키려고 반역을 획책하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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