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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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6 이일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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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2:04:476945 
제67회. 計逐慶封(계축경봉) 弑侄簒奪(시질찬탈)
양승국   (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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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67회 計逐慶封 弑侄簒奪(계축경봉 시질찬탈)

계략을 써서 경봉을 쫓아내 제장공의 원수를 갚은 노포계와

조카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초영왕

1. 王子晉成仙(왕자진성선)

-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른 주나라 왕자진 -

한편 주영왕(周靈王)의 장자는 이름이 진(晉)이라 하고 자는 자교(子喬)라 했는데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총명하고 생황을 잘 불었다. 왕자진(王子晉)이 생황을 불 때면 봉황이 날아들어 우는소리를 내고 돌아 다녔다. 영왕은 그를 태자로 세웠다. 그의 나이가 17세가 되었을 때 이락(伊洛)①으로 놀러 나갔다 돌아오던 길에 죽었다. 영왕이 매우 애통해 하였다. 어떤 사람이 와서 영왕에게 고했다.

「태자가 구산(緱山)② 고개 마루에 백학을 타고 내려와 생황을 불며 그곳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자의 자리를 마다하고 부구공(浮丘公)③을 따라가서 숭산(嵩山)④에 같이 살고 있는데 내 마음이 매우 즐거우니 나로 인해서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고 부왕에게 전하시오.’ 라고 했습니다.」

― 부구공(浮丘公)이란 황제(黃帝)와 함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 상의 사람이다.― 주영왕이 사람을 시켜 왕자진의 무덤을 파 확인하게 했는데 과연 관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영왕은 곧 태자가 신선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게 되었다. 주영왕 27년 기원전 545년에 영왕이 잠을 자다가 태자가 학을 타고 와서 자기를 맞이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는 잠에서 부지 간에 깨어났으나 꿈속에서 들은 생황 소리는 창 밖에서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영왕이 말했다.

「태자가 나를 맞이하려 하니 내가 마땅히 가야 되겠구나!」

주영왕은 즉시 왕위를 둘째 아들 귀(貴)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아무런 병도 걸리지 않고 잠결에 세상을 떠났다. 영왕의 뒤를 이어 왕자 귀가 즉위하였다. 이가 주경왕(周景王)이다.

그 해에 초나라 강왕(康王)이 죽었다. 영윤 굴건이 군신들과 상의하여 강왕의 어린 아들 웅미(熊穈)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얼마 후에 굴건도 역시 죽었다. 공자위(公子圍)가 굴건을 대신하여 초나라의 영윤이 되었다. 공자위는 강왕의 동복동생으로 웅미에게는 숙부였다.

2. 경봉독상(慶封獨相

- 최저를 숙청하고 제나라 정권을 멋대로 휘두른 경봉 -

한편 최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봉은 제나라의 재상을 혼자 차지하고 국정을 전단하면서 한층 더 황음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노포별의 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노포별이 그의 처를 나오게 하여 경봉에게 술을 따르게 했다. 노포별 아내의 미색에 매혹된 경봉은 곧이어 그녀와 사통하게 되었다. 경봉은 국정을 모두 그의 아들 경사(慶舍)에게 맡겨 놓고 그의 처첩과 재물들을 전부 노포별의 집에 옮기도록 했다. 경봉은 노포별의 처와 매일 밤마다 잠자리를 같이 잤다. 아내를 경봉에게 빼앗긴 노포별 역시 경봉의 처첩들과 정을 통했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살면서 아무 것도 꺼리지 않고 자기들 마음내키는 대로 했다. 하루는 경봉과 노포별이 그들의 처첩들과 한자리에 모여 술을 마시며 서로 희롱하며 놀다가 이윽고 모두가 술에 취하자 못하는 짓들이 없이 소란을 피웠다. 좌우에 시중들던 사람들이 그들의 짐승과 같은 짓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경봉과 노포별은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노포별이 기회를 보아 그의 형 노포계(盧蒲癸)를 노나라에서 불러 주기를 경봉에게 청했다. 경봉이 허락했다. 노포계가 돌아오자 경봉은 그에게 경사를 받들라고 했다. 경사는 완력이 뛰어난 장사였다. 노포계 역시 힘이 센 장사이고 또한 경봉에게 아첨을 잘하여 경사가 이윽고 노포계를 총애하게 되었다. 경사가 그의 딸 경강(慶姜)을 노포계에 주어 사위로 삼았다. 두 사람은 옹서지간이 되어 경봉은 노포계를 한층 더 총애하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노포계는 오로지 장공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뿐이었으나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 어느 날 경사와 함께 사냥을 하던 중에 노포계가 왕하(王何)의 무용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경사가 듣고 물었다.

「지금 왕하는 어디에 있는가?」

「거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경사가 왕하를 불러오게 했다. 왕하도 제나라에 돌아와 경사를 모시게 되었다. 왕하 역시 경사의 총애를 받았다. 경봉이 옛날 최저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사람들이 자기를 암살하지나 않을까 항상 두려워했다. 그가 집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자기가 믿는 심복 장사들을 과를 들고 따르게 하여 앞뒤에서 호위를 받았다. 경사도 그 아버지의 행동을 본받아 따라하고 있었다. 노포계와 왕하 두 사람을 총애한 경사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과를 들게 하여 자기를 앞뒤에서 호위하게 하고는 다름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했다.

옛날에 공경대부의 밥상에는 매일 의례적으로 닭 한 쌍을 잡아서 올려야 되는 법이 있었다. 그 때 제경공은 원래 닭발을 매우 좋아했다. 경공은 식사 때마다 공경대부들을 초청하여 수천 개의 닭발을 소비하였다. 공경대부들의 집에서도 경공의 식사법을 본받아 모두가 닭발을 음식 중에 최고로 생각하게 되었다. 닭 값이 폭등하여 궁중 요리사는 궁실의 음식을 준비하는데 옛날의 경비로는 같은 수의 닭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리사는 궁리 끝에 경씨부를 찾아가 궁중의 음식비용을 늘려 달라고 청했다. 노포별이 경씨들의 잘못된 점을 부추기려는 마음으로 경사에게 음식비용을 올려 주지 말라고 하면서 궁실의 요리사에게 말했다.

「주공에게 바치는 음식은 허락된 비용 내에서 전부 그대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지 하필이면 비싼 닭만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궁실 요리사가 할 수 없이 오리를 사서 요리해 바쳤다. 궁중의 주방에서 일하던 비복들이 오리고기 요리는 경공의 수라상에 올라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 고기를 훔쳐 먹게 되었다. 그날은 자를 각각 자미(子尾)와 자아(子雅)라고 부르던 대부 고채(高蠆와 란조(欒竈)가 경공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올라온 음식을 살펴보았다. 음식 중에 닭고기는 없고 단지 살을 다 발라먹고 남은 오리 뼈만 있었다. 두 사람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말했다.

「경씨 놈들이 국정을 맡더니 심지어는 공궁의 음식비용까지 깎는 구나! 어찌 이렇게 까지 우리를 기만하는가!」

두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물러가 버렸다. 고채가 가서 경봉에게 따지려고 하였으나 란조가 말렸다. 어떤 사람이 이일을 경봉에게 전했다. 경봉이 노포별을 불러 말했다.

「자미와 자아가 나에게 매우 노해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그 놈들이 어찌 감히 노한단 말입니까? 죽여 버리면 그만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포별이 그 일을 그의 형인 노포계와 상의했다. 다시 노포계가 왕하를 불러 계략을 꾸미며 말했다.

「고씨와 란씨 두 집안이 경씨들과 틈이 벌어졌으니 우리가 고채와 란조를 돕도록 합시다.」

왕하가 밤이 되어 아무도 몰래 고채의 집을 찾아 접견을 청해 경씨들이 고씨와 란씨 두 집안을 공격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고채가 크게 노하며 말했다.

「경봉이란 놈은 실은 최저와 공모하여 장공을 시해한 놈이다. 오늘 최씨가 이미 멸족되어 이제는 경씨들만 남아 있는데 내가 마땅히 장공을 위해 원수를 갚아야 되겠다.」

「대부의 말씀은 이 왕하의 뜻과 같습니다. 대부께서는 밖에서 도모하시고 이 하와 노포 형제는 안에서 도모한다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3. 계축경봉

- 계략을 꾸며 경봉 일당을 축출한 노포계 -

고채가 은밀히 란조를 만나 상의하여 기회를 기다리다가 일제히 일어나 경씨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밖에 제나라의 어진 신하들인 진무우(陳无宇), 포국(鮑國), 안영(晏嬰)등은 그 낌새를 알고 있었지만 경씨들의 전횡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일을 경씨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노포계와 왕하가 경씨들을 공격하는데 길흉을 알아보기 위해 점을 쳤다. 점괘가 다음과 같이 나왔다.

虎離穴 彪見血(호리혈 표견혈)

호랑이가 굴을 떠나니, 호랑이 새끼는 피를 흘리는 구나!

노포계가 점을 칠 때 사용한 거북등의 갈라진 모양을 경사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제가 원수들을 공격하기 전에 길흉을 알아보기 위해 점을 쳐봤습니다. 점괘와 함께 점을 칠 때 사용한 거북등을 가져왔습니다. 그 길흉이 어떤지 알 수 있겠습니까?」

경사가 거북등의 갈라진 모양을 보더니 말했다.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겠다. 호랑이와 그 새끼는 부자지간을 말하는 것이라 집을 나가서 피를 본다는 뜻이니 어찌 이길 수가 없겠는가? 원수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고향의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경사가 의심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 8월에 경봉이 족인들인 경사(慶嗣), 경유(慶遺)등을 데리고 동래(東萊)⑤로 사냥을 나가면서 진무우도 동행시키려고 했다. 진무우가 그의 부친인 진수무를 찾아가 출행 인사를 드렸다. 진수무가 아들 무우에게 말했다.

「경씨들이 조만간에 화를 당할 텐데 그들과 같이 출행을 나가서 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근심된다. 어찌하여 사양하지 않았느냐?」

「제가 사양하면 의심을 받을 것 같아 감히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후에 부친께서 다른 핑계를 대어 저를 부르시어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경봉의 일행이 사냥터로 떠나가자 노포계가 기뻐하며 생각했다.

「점괘에 ‘호랑이가 그 굴을 떠난다’고 했는데 과연 그 점괘가 맞는 것 같구나!」

곧이어 노포계는 노포별 및 왕하와 함께 비밀리에 고채와 란조와 회동하여 상제(嘗祭)⑥를 올리는 날을 정해 일제히 일어나 경씨 일족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상제(嘗祭)는 천자나 제후들이 4계절에 맞추어 지내는 제사 중에 가을에 지내는 추제(秋祭)다. 진수무가 눈치채고 경봉과 함께 있는 아들 진무우가 함께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그의 처가 위독하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불러오게 했다. 진무우가 경봉에게 자기 모친의 병환이 낳을 수 있는지를 거북점을 쳐 달라고 부탁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진씨와 경씨의 길흉을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경봉이 불에 태워 갈라진 거북등을 보며 점괘를 말했다.

「이것은 멸신(滅身)의 점괘라. 하극상이 일어나 그 비복이 상전을 해치는 괘다. 노부인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겠다.」

무우가 거북등을 받아 들고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경봉이 측은하게 생각하여 그를 집으로 돌아가게 허락했다. 무우가 수레를 타고 돌아가려는 순간 경사(慶嗣)가 보고 물었다.

「어디를 가는가?」

「모친께서 위독하시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말을 몰아 달려갔다. 경사가 경봉을 찾아가 말했다.

「무우가 그의 모친이 병이 들어 위독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도성 안에서 변이 일어 날 것 같습니다. 빨리 돌아가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경사가 굳게 지키고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우가 임치성을 향해 전속력으로 수레를 달리게 하여 이윽고 치수(淄水)에 당도했다. 치수를 건넌 무는 다리를 부수고 모든 배에는 구멍을 내어 강물에 가라 앉혀 경봉이 돌아오는 길을 끊었다. 경봉은 그때까지도 자기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때는 가을 초순도 다 지나가고 거사를 하기로 한 날이 닥쳐왔다. 노포별이 가갑들을 모아 배치해 놓고는 드디어 경씨들을 공격하려는 채비를 갖추었다. 그의 처 경강이 보고 노포계에게 물었다.

「당신이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하고 상의하지 않으시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노포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신은 아녀자의 몸인데 어찌 나와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있겠소?」

「지혜로운 부인의 생각은 남자보다 낫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셨습니까? 주무왕 때 열 명의 신하들이 란을 일으키자 읍강(邑姜)⑦이 한 일을 모르십니까? 어찌 아녀자와는 일을 같이 도모하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옛날 정나라 대부 옹규(雍糾)가 정려공(鄭厲公)의 밀명을 받아 제중(祭仲)을 죽이려고 했다가 그의 처 옹희(雍姬)에게 그 계획을 발설하여 자기는 죽고 정려공은 제중에게 쫓겨났었소. 그것은 몇 대를 내려온 큰 교훈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그리 될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오!」

「부인되는 사람에게는 그 지아비는 하늘과 같은 존재라 부창부수(夫唱婦隨)는 당연한 일인데 항차 지아비의 명은 중하기가 군명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 정나라의 옹희는 그 모친의 말에 혹하여 그 지아비를 해치고 말았는데 그것은 옹희가 규방에서 한 역적질과 같습니다. 하필이면 옹희에 빗대어 말하십니까?」

「만약에 당신이 옹희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처신하겠소?」

「능히 행할 수 있으면 도와 드리고 만일에 제가 도와 드릴 수 없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발설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제후(齊侯)와 백성들은 경씨들의 전횡으로 고통을 받고 있소. 그래서 내가 고씨와 란씨들과 힘을 합하여 경씨들을 몰아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오. 당신은 절대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마시오.」

「제 조부이신 상국이 사냥을 나가 도성에서 멀리 떠나 있는 지금이 거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추제(秋祭)를 지내는 날에 거사할 예정이요.」

「제 친정아버님은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또한 주색에 빠져 공사에 태만하십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실을 만들어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면, 추제에 참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제가 친정에 가서 제사에 참석하지 말라고 하면 아버님은 오히려 제사에 참석할 것입니다.」

「나의 목숨을 당신에게 맡겼으니 당신은 옛날 옹희의 전철을 밟지 말기 바랄 뿐이오.」

경강이 친정에 가서 친정아버지 경사에게 말했다.

「제가 들으니 자아와 자미가 상제를 지낼 때를 이용하여 부친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한다 합니다. 부친께서는 제사에 나가지 마십시오.」

경사가 화를 내며 말했다.

「고채와 란조 두 놈은 개돼지만도 못한 보잘 것 없는 놈들이라, 그 놈들은 내가 밑에 깔고도 잘 수 있는 자들이다. 누가 감히 란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이냐? 설사 그놈들이 란을 일으킨다 한들 어찌 내가 두려워하겠느냐?」

경강이 집에 돌아와 노포계에게 경과를 말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게 하였다.

이윽고 추제를 올리는 날이 되자 경공이 제사를 올리기 위해 태묘로 향하자 제나라의 모든 대부들이 그 뒤를 따랐다. 경사가 나와 제사를 주관하고 경승(慶繩)이 술을 따라 올렸다. 경씨들이 그들 집안의 가갑을 동원하여 태묘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계를 철저히 했다. 노포계와 왕하가 과를 들고 경사의 좌우에 붙어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호위했다. 진씨와 포씨 두 집안의 말을 기르는 사람들 중에 희극을 잘하는 자가 있었다. 진포 집안의 두 어인들을 어리(魚里)라는 길목에 놀이판을 마련하여 재주를 부려 경씨들이 데리고 온 가병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때 마침 경씨의 가병들이 타고 왔던 말 한 마리가 소란 중에 놀라 달아났음으로 모두가 몰려가 잡아가지고 와서는 모든 말들을 한 곳의 기둥에 묶어 놓았다. 이윽고 놀이판이 벌어지자 경씨의 가병들은 갑옷을 벗어버리고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서 두 사람이 벌리고 희극을 구경했다. 그러는 사이에 란(欒), 고(高), 진(陳), 포(鮑) 등 네 집안의 가병들이 모두 태묘의 문밖에 모여들었다. 노포계가 소변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태묘 밖으로 나와 네 집안의 가병들이 약속대로 모두 모였는지를 확인한 후에 그들에게 아무도 몰래 태묘 주위를 몇 겹으로 에워싸게 했다. 노포계가 다시 들어와서 경사의 뒤에 서서 극을 거꾸로 잡아 고채에게 신호를 보냈다. 고채가 알아채고 종인들을 시켜 문짝을 세 번 막대기로 쳐서 신호를 보냈다. 태묘 밖에 대기하고 있던 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벌떼처럼 안으로 쳐들어 왔다. 경사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미처 자리를 뜨기도 전에 노포계가 들고 있던 극으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등을 찔렀다. 노포계의 극은 경사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다시 왕하가 달려들어 들고 있던 과로 찌르자 경사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경사가 왕하를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란을 일으킨 놈들이 너희들이었구나!」

경사가 남아 있던 오른 손으로 제사용 항아리를 들어 던지자 왕하가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노포계가 갑사들을 불러 경승을 먼저 잡아오게 하여 죽였다. 로포계와 왕하로부터 몸에 깊은 상처를 입은 경사는 그 고통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남은 한 손으로 태묘의 기둥을 흔들어댔다. 그 바람에 기둥이 심하게 흔들려 태묘 건물이 진동했다. 이윽고 경사가 큰 소리로 한번 절규하더니 숨을 거두었다. 뜻하지 않게 경사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목도하게 된 경공은 크게 놀라 달아나서 몸을 피하려고 하였다. 곁에 있던 안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신하들이 주군을 위해 경씨들을 죽여 사직을 안정시키려고 하는 의로운 일입니다. 놀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을 진정시킨 경공은 제복을 벗어버리고 수레에 올라 내궁으로 돌아갔다. 노포계가 선두에 서서 네 집안의 가갑들과 함께 경씨부로 가서 경씨 일당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주살했다. 그리고 각 성씨별로 성문 하나씩을 맡아 지키게 했다. 경봉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 방비를 엄밀히 하여 철통같이 지키기 해서였다.

4. 善人富賞 淫人富殃(선인부상 음인부앙)

- 선한 사람의 부는 상이고, 악한 사람의 부는 재앙이다. -

한편 경봉은 사냥을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경사의 집에서 도망쳐 온 가정들을 만나서 도성에서 란이 일어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봉은 그 아들이 상제를 지낼 때 피살되었음을 전해 듣고 대노하여 즉시 도성으로 진격하여 서문을 공격했지만 그 전에 성안에서 사전에 방비를 매우 철저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성문을 결코 깨트릴 수 없었다. 이윽고 시간이 흐르자 경봉을 따르던 군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봉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환이 두려워 노나라로 도망쳤다. 제경공이 노나라에 사자를 보내 역신을 받아 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노나라 대신들이 경봉을 잡아 제나라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경봉이 미리 알고 방향을 바꾸어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왕 이매가 경봉에게 주방(朱方)⑧의 땅을 주어 그곳의 수장으로 임명하여 녹봉도 매우 후하게 주었다. 경봉은 제나라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살게 되어 오나라를 위해 초나라의 동정을 수시로 살폈다. 노나라 대부 자복하(子腹何)가 알고 숙손표(叔孫豹)에게 물었다.

「경봉이 오나라로 도망치더니 제나라에 있을 때 보다 더 잘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하늘이 그 음탕하고 포악한 사람에게 계속 복을 내리는 연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이 착한 사람이 부를 얻게 되면 그것은 복이라 할 수 있지만 악한 사람이 부를 얻게 되면 이것은 곧 재앙이라 화가 머지 않아 경봉에게 미칠 것이오. 어찌 그것이 또 다른 복이라 하겠소?」

한편 제나라에서는 경봉이 나라 밖으로 도망쳐 버리자 그때부터 고채와 란조가 정사를 맡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이 최저와 경봉의 죄를 나라 안에 널리 알리고 경사의 시체를 조당에 전시하여 장공의 넋을 위로했다. 최저의 시체도 찾아 전시하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어 방을 붙여 현상금을 걸었다.

「최저의 시체가 묻혀 있는 곳을 아는 자에게는 최씨가 갖고 있던 벽옥을 상으로 주겠다.」

최저의 어인(圉人)이 그 벽옥을 탐내어 즉시 관아에 출두하여 사실을 고했다. 경공이 사람들을 보내 최씨들의 조상묘를 파헤쳐 최저의 시체를 찾아오라고 명했다. 사람들이 최저가 들어 있는 관을 얻어 그 뚜껑을 뜯었다. 관 안에는 두 구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경공이 두 구의 시체를 같이 시정에 기시하려고 하자 안영이 말리면서 말했다.

「부인의 시체를 기시하는 행위는 예의가 아닙니다. 」

경공은 안영의 말대로 최저의 시체만을 저자 거리에 전시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이 모여 구경시켰다.

제나라의 여러 대부들은 최씨와 경씨의 봉읍들을 나누어 가졌다. 경봉의 모든 재산은 노포별이 차지가 되어 자기 집으로 옮겼다. 여러 대부들이 보고 노포별이 경봉과 함께 음란한 짓을 저질렀다고 비난하고 연나라로 추방했다. 노포계 역시 연나라로 추방된 노포별을 뒤따라가 같이 살았다. 경공은 최씨와 경씨 두 집안의 재산들을 따로 거두어 여러 대부들이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진무우 만은 혼자 아무 것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대부들은 상의하여 경씨의 장원에 있던 백여 수레가 넘는 목재를 모두 진무우에게 주기로 했다. 무우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도성 안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일로 해서 백성들은 무우의 덕을 칭송하게 되었다.

이 일은 주경왕 원년 즉 기원전 544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 해에 란조가 죽자 그의 아들 란시(欒施)가 그 부친의 직을 이어 받아 고채와 같이 국정을 맡게 되었다. 고채는 죽은 고후(高厚)의 아들 고지(高止)를 시기했다. 또한 고채는 고후와 함께 자신이 이고(二高)라는 칭호로 대등하게 사람들에게 호칭되었던 일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고채에 의해 쫓겨난 고지는 연나라로 망명하여 살았다. 고지에 아들에 고수(高竪)라고 있었다. 자기의 부친이 나라 밖으로 추방당하자 고수가 로읍(盧邑)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경공이 대부 여구영(閭邱嬰)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서 로읍을 포위하고 고수를 토벌하라고 명했다. 고수가 사람을 보내 여구영에게 자기의 뜻을 전했다.

「내가 나라에 반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고씨들의 제사가 끊기지 않을까 걱정하여 군사를 일으켰을 뿐입니다.」

여구영이 고씨들의 후사를 세우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허락했다. 고수는 군사들을 해산시키고 자신은 당진으로 도망쳤다. 여구영이 돌아와 경공에게 복명하였다. 경공이 즉시 고연(高酀)을 세워 고혜(高傒)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고채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원래 여구영을 고수의 토벌군으로 보낸 목적은 고씨들의 후사를 끊기 위해서였는데 한 사람을 쫓아내고 한 사람을 다시 세웠으니 이것은 무슨 경우인가?」

고채는 즉시 사람을 시켜 여구영을 죽였다. 자산(子山), 자상(子商), 자주(子周) 등 제나라의 공자들은 고채의 처사에 대해 모두 불평을 하며 그 지나친 행위에 대해 비난했다. 고채가 듣고 노하여 다른 트집을 잡아 그들마저도 다른 나라로 추방해 버렸다. 제나라의 백성들도 모두 고채를 곱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고채가 죽었다. 그의 아들 고강(高彊)이 대부의 직을 이었으나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려 경으로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제나라의 모든 대권은 란시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5. 子産執政(자산집정)

- 자산이 정나라의 집정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때 당시는 당진과 초가 통호하여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찾아와 중원의 열국들도 편안한 날을 보낼 수 있었다. 정나라 대부 양소(良宵)는 자를 백유(伯有)라 했다. 그는 공자거질(公子去疾)의 손자이고 공손첩(公孫輒)의 아들이었다. 양소는 원래 성격이 거만하고 지나치게 사치했을 뿐만 아니라 술을 너무 좋아했다. 항상 밤을 새워 술을 마시기 일쑤였고 더욱이 음주 중에는 다른 사람은 절대 만나 주지 않는 괴상한 버릇의 소유자였다. 양소는 또한 어떤 일에 대해 물어 보는 것도 싫어했기 때문에 땅을 깊이 파서 방을 만들고는 음구(飮具)와 종과 북을 지하실에 비치해 놓고 그 안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셔대곤 했다. 가신들이 와서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려 해도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낮 시간임에도 술에 취해 입조하여 정간공(鄭簡公)에게 공손흑(公孫黑)을 우호사절로 초나라에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자사(子駟) 공자비(公子騑)의 아들로 양소에는 당숙이 되는 공손흑은 당시 공손초(公孫楚)와 서오범(徐吾犯)의 여동생을 놓고 다투고 있는 중이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행차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양소를 만나서 초나라에 가는 우호사절의 임무를 면하게 해 달라고 청하려고 했다. 공손흑이 양소의 집에 찾아와 만나기를 청하자 집안의 심부름하는 하인이 나오더니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이미 지하실에 들어가버려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공손흑이 대노하여 인단(印段)과 함께 자기 집의 가병들을 모두 끌고 나와 밤을 틈타 양소의 집을 포위하고는 불을 질러 모두 태워 버렸다. 술에 취한 양소를 주위 사람들이 부축하여 수레에 태우고는 옹량(雍梁)⑩으로 달아났다. 양소가 술에서 깨어나서 공손흑이 자기를 공격하였음을 알고 크게 노했다. 며칠이 지나자 양소의 가신들이 모두 옹량에 모여들더니 도성 안의 정세를 말해 주었다.

「공손흑이 우리 양씨 집안에 대항하려고 성안의 여러 집안들이 서로 연합하였으나 단지 국씨(國氏)와 한씨(罕氏)들 만은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

양소가 기뻐하며 말했다.

「두 집안이 우리를 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양소가 즉시 가병들을 거느리고 정성으로 돌아가 북문을 공격하였다. 공손흑이 그의 조카 사대(駟帶)로 하여금 인단과 같이 가병들을 인솔하여 양소를 막게 했다. 양소가 싸움에 패하여 옹량의 양을 잡는 도살장으로 도망쳤으나 공손흑의 가병들에게 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의 가신들 역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양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자산(子産) 공손교(公孫僑)가 즉시 옹량으로 달려가서 양소의 시체를 붙잡고 통곡을 하며 말했다.

「형제간이 서로 싸워 죽이니, 하늘이여 어찌 이런 불행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양소와 그 가신들의 시신을 거두어 모두 렴을 한 후에 투성촌(鬪城村)이라는 시골에 장사를 지내어 주었다. 공손흑이 듣고 노하여 말했다.

「자산은 곧 양소와 같은 무리란 말인가?

공손흑이 즉시 공손교를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상경 한호(罕虎)가 만류하며 말했다.

「자산은 죽은 사람에게도 예를 갖추었는데 아저씨는 산 사람에게도 예를 갖출 줄 모르십니까? 예란 나라의 근본이라 예를 갖춘 사람을 죽이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자가 자피(子皮)인 한호(罕虎)는 공손사지(公孫舍之)의 아들로 공손흑에게는 양소나 자산과 같이 당질의 관계였다. 공손흑은 공손교를 잡아 죽이려는 생각을 멈추었다. 정간공이 국정을 맡기려고 하자 한호가 사양하면서 말했다.

「신보다는 자산의 재주가 훨씬 낫습니다.」

간공은 한호의 말을 따라 공손교에게 국정을 맡겼다. 그때가 주경왕 3년 기원전 542년의 일이었다.

정나라의 정사를 맡게 된 자산 공손교(公孫僑)는 법을 제정하여 도성이건 시골이건 모두 복식을 서로 다르게 하여 상하가 그 직분에 맞는 옷을 입게 했다. 또한 논밭 사이의 경계를 법으로 정하여 분명하게 했으며 경작하는 토지 중 그 오분의 일에서 나오는 소출을 따로 떼어 내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서로 돕도록 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근검절약하는 정신을 부양하고 사치를 억제하였다. 이윽고 나라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고 생각한 자산은 정사를 어지럽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공손흑은 붙잡아 그의 죄를 열거하여 죽였다. 또한 청동 솥을 주조하여 형법의 조문을 넣고서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였으며, 향교(鄕校)를 세워 나라를 다스리는데 그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나라 안의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불러 자산의 덕을 칭송하였다.

우리들 자제를, 자산이 있어 깨우쳐 주시고

우리들 논밭의 곡식, 자산이 늘려 주시네

자산이 죽는다면, 누가 대신 해주리?

我有子弟 子産誨之(아유자제 자산회지)

我有田疇 子産殖之(아유전주 자산식지)

子産而死 誰其嗣之(자산이사 수기사지)

하루는 어떤 정나라 사람이 북문을 통하여 도성 밖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황홀지간에 몸에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과를 들고 있는 양소를 만나게 되었다. 양소가 그 사람에게 소리쳐 말했다.

「사대(駟帶)와 인단(印段)이란 놈이 나를 죽였으니 내가 반드시 그들을 죽이리라!」

그 사람이 성안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는 이어서 몸져눕게 되었다. 그래서 온 성안에는 양소가 와서 원수를 갚으려 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쫙 퍼지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기만 하여도 마치 양소의 창과 칼을 피하기라도 하듯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가 미친 사람들처럼 쥐구멍을 찾아 도망치기 바빴다. 얼마 있지 않아 사대가 죽었다. 또 수일이 지나자 인단도 따라 죽었다. 도성 안의 백성들이 모두 크게 놀라 밤낮으로 전전긍긍 했다. 공손교가 간공에게 말하여 양소의 아들 양지(良止)를 대부로 임명하여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한 공자가(公子嘉)의 아들 공손설(公孫泄)도 같이 대부에 제수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자 도성 안의 헛소문이 잠잠하게 되었다. 행인(行人)⑪의 관직을 맡고 있던 자가 자우(子羽)인 유길(游吉)이 자산을 찾아와 물었다.

「두 사람을 대부로 세워 그 집안의 제사를 잇게 한 후로 성안의 흉흉한 요언이 사라졌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유길은 공손체의 아들로 자산과는 6촌 형제다. 자산이 대답했다.

「무릇 흉악한 사람이 비명에 죽으면 그 혼백이 흩어지지 않고 원귀(寃鬼)가 된다고 모두 믿고 있습니다. 즉 만일 원귀가 돌아갈 곳이 있다면 사람 앞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들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치한 일은 원귀가 돌아갈 곳을 마련해 준 일이라고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안의 요언이 사라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었다면 양소의 아들만 대부로 세우면 되지 어찌하여 공손설도 함께 세웠는가? 어찌하여 죽은 자공(子孔)도 같은 원귀를 만들었는가?」

「양소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후사를 세우지 않았는데 만약에 양소의 원귀 때문에 후사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모두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믿게 되어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런 연유로 칠목(七穆)⑫의 끊어진 제사를 잇게 한다는 핑계를 대고 양씨와 공씨(孔氏)를 같이 세워 이로써 귀신 이야기에 현혹된 백성들의 마음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유길이 탄복하며 물러갔다.

6. 子弑淫父(자시음부)

- 부군은 며느리와 간통하고 아들은 부군을 시해했다.-

다시 1년 전인 주경왕 2년 기원전 543년으로 돌아가 채경공(蔡景公)이 재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는 해에 일어난 일이다. 채경공은 그의 세자 반(般)를 위해 초나라 왕녀인 미씨(羋氏)를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채경공이 며느리 미씨와 사통하자 세자반이 알고 노하여 말했다.

「부친이 부친답지가 않은데 아들이라고 아들답겠는가?」

경공은 단지 그의 아들이 사냥 나간 줄만 알고 즉시 동궁으로 행차하여 곧바로 미씨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자 반(般)이 내실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경공이 나타나자 세자궁의 내시들과 같이 불시에 들고일어나 경공을 칼로 난자해서 죽였다. 세자반은 경공이 갑자기 병이 발작하여 죽었다고 제후들에게 발상을 고한 후에 스스로 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채영공(蔡靈公)이다.

후에 사관은 ‘ 반이 그 부친을 시해한 행위는 천고의 걸친 대역죄라고 논하고 경공 역시 그의 며느리를 간음하여 스스로 패역을 불러 들였으니 그도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도다!’ 라고 평했다. 이어 시를 지어 이 일을 한탄하였다.

신대⑬에서의 더러운 행위가 청사에 오점으로 남았는데

채경공은 어찌하여 그 짓을 답습했는가?

역자의 칼날이 구중궁궐의 내실에서 번쩍이니

비명에 죽은 가련한 급자가 생각나는구나!

新台醜行汚靑史(신대추행오청사)

蔡景如何復蹈之(채경여하복도지)

逆刃忽從宮內起(역인홀종궁내기)

因思急子可怜兒(인사급자가령아)

채나라 세자반(般)이 비록 자기의 부군이 폭질(暴疾)로 갑자기 죽었다고 제후들에게 부고를 내기는 하였으나 시역(弑逆)의 행한 흔적을 종내는 감추지 못하고 들통이 나게 되었다. 자기 아버지를 죽인 일이 자국에서 소문이 퍼지고 있어 각국의 조문 사절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그때 당진의 평공은 맹주로써의 직분에 그다지 열심이지 않았고 초왕 겹오(郟敖)는 나이가 어렸음으로 천하의 법에 따라 반의 시역죄를 토벌할 수 없었다.

그해 가을 송나라 궁궐에 한 밤중에 큰불이 났다. 당시 송평공(宋平公)의 부인은 노후(魯侯)의 딸인 백희(伯姬)였다. 화마가 내실로 번지자 궁녀들이 백희에게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가자고 품했다. 그러나 백희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무릇 부인의 직분이란 보모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밤에는 절대 당을 내려서지 않는 법이다. 불길이 비록 흉맹하다고는 하나 어찌 법도를 어길 수 있겠느냐?」

그래서 보모를 부르러 갔으나 보모가 왔을 때는 백희는 이미 불에 타서 죽은 후였다. 백성들이 모두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때 진평공은 당진이 초나라와 강화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송나라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공은 송나라의 궁궐에서 화재가 일어나 백희가 죽고 많은 재물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석하게 생각한 나머지 전연(澶淵)의 땅에서 제후들을 크게 모이게 하여 각 나라에서 공출한 재물로 송나라를 돕게 했다.

남송 때 유학자 호안국(胡安國)⑭이 이 일을 다음과 같이 논했다.

『채나라 세자 반이 저지른 시부(弑父)의 대역죄를 토벌하지 않았으면서도, 오히려 제후들로부터 재물을 모아 송나라의 재난을 도운 행위는, 무겁고 가벼운 것초자 구분하지 못한 행위다. 이로써 당진의 평공은 제후들로부터 신의를 잃게 되어 패자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7. 子圍僭儀(자위참의)

- 왕의 의식을 행하여 찬탈의 뜻을 키우는 초나라의 공자위 -

주경왕 4년 기원전 541년 당진과 초나라가 송나라의 주선으로 괵(虢)⑮ 땅에서 모여 다시 회맹을 맺고자 하였다. 그때 초나라는 강왕(康王)의 뒤를 이었던 그의 아들 웅미(熊穈)가 어린 나이로 재위에 있었다. 웅미의 후견이었던 굴건이 얼마 전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웅미의 숙부인 공자위(公子圍)가 초나라 영윤이 되었다. 공자위는 강왕의 이모제에 공왕의 서장자였다. 위인이 포악한 성격에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남의 밑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자기의 재주를 과신했다. 마음속으로 남의 신하 노릇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은 공자위는 어리고 힘이 없는 웅미를 업신여겨 많은 일을 제 멋대로 처리했다. 충직한 대부 원엄(薳掩)을 시기하여 그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여 그의 처와 함께 죽였다. 대부 원파(薳罷)와 작당하여 심복 오거(伍擧)를 모사로 삼아 날마다 찬탈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한번은 야외에 사냥을 나가면서 자기의 수레에 초왕의 깃발을 꽂고 행진하여 우읍(芋邑)⑯에 이르게 되었다. 우윤(芋尹) 신무우(申无宇)가 신하된 자로써 왕의 깃발을 달고 다니는 행위는 참람한 죄를 저지른 행위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그 깃발을 빼앗아 부고(府庫)에 넣어 두었다. 이 일로 공자위의 기가 조금 꺾이게 되었다. 이윽고 괵 땅에서 열리는 회맹을 참석할 때가 되자 공자위가 회맹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먼저 정나라에 들려 사절의 임무를 행하고 내친 김에 정나라 풍(豊)씨의 딸을 데려와 부인으로 삼으려고 했다. 공자위가 길을 떠나면서 초왕 웅미에게 말했다.

「우리 초나라는 이미 왕호를 칭하고 있어 제후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신으로 하여금 제후들이 행하는 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중원의 제후들로 하여금 우리 초나라가 그들 보다 더 존귀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겠습니다.」

웅미가 허락하자 공자위는 무엄하게도 군주들이 사용하는 의식을 취하여 의복과 그 기구들을 후백(侯伯)의 것으로 모방하고 두 사람에게 과를 들게 하고 행렬의 앞에 서서 인도하게 하였다. 이윽고 공자위의 행렬이 정나라 교외에 당도했다. 정나라 교외를 지키는 관리들은 그 행렬을 보고 초왕이 행차한 것으로 알고 놀라 도성으로 달려가 보고했다. 정나라 군주와 신하들 모두 크게 놀라서 시간이 이미 밤이 되어 길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더듬어 가며 초왕을 맞이하기 위해 교외까지 나갔다. 그러나 만나서 보니 초왕이 아니라 공자위였다. 공자위의 행동을 매우 참람하다고 생각한 공손교는 그가 정성에 들어오게 되면 변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즉시 행인 유길을 시켜 정성 안의 관사가 너무 낡아서 수리를 하고 있는데 아직 끝나지 않아 성 밖에 있는 관사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통고하게 했다. 공자위가 성 밖에 묶으면서 오거를 정성 안으로 들여보내 풍씨와의 혼사를 진행시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했다. 정백이 허락했다. 공자위가 예물을 담은 광주리들을 풍씨에게 보내는데 그 수효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드디어 풍씨의 딸과 혼인식을 올리는 날이 되자 공자위는 갑자기 혼인식을 이용하여 정나라를 습격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풍씨의 딸을 맞이하러 간다고 하면서 수레에 군사를 태운 후 겉을 요란스럽게 장식하고 정성 안으로 들어가 일을 벌이려고 했다. 공손교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초공자 위(圍)의 마음은 전혀 예측할 수 없으니 반드시 그들의 많은 일행들은 성안으로 들여보내지 마시오. 공자위와 몇 사람만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혼인식을 올리게 하시오.」

유길이 여러 관료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다시 초공자에게 가서 우리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소.」

성 밖에 관사에 묶고 있는 공자위를 찾아간 유길이 말했다.

「저희들은 영윤께서 많은 시종들과 군사들을 데리고 정성 안으로 들어와 혼인식을 올리시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정나라 도성은 매우 협소하여 영윤이 데리고 온 군사들과 시종들을 받아 들여 수용할 만 곳이 없습니다. 청컨대 성 밖의 땅을 고르시어 그곳에서 부인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시기 바랍니다.」

공자위가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대답했다.

「정백께서 과분하게도 이 위에게 풍씨와 혼인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서는, 한편으로는 야외에서 신부를 맞이하라고 하시니 어찌 내가 예를 갖추어 혼례를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예로 말씀하실 것 같으면 병사들을 데리고 남의 나라 도성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예는 더군다나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혼인을 하는데 더 말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영윤께서 만일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결혼식을 성대하게 보이게 하시려면 청컨대 군사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바랍니다.」

오거가 귓속말로 공자위에게 말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 챈 것 같습니다. 군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성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혼례를 치르니만 못하겠습니다.」

공자위는 오거의 말을 쫓아 즉시 사졸들에게 활과 화살을 버리고 전통은 거꾸로 메도록 명한 후에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윽고 초나라 군사들이 풍씨의 딸을 데리고 나와 관사로 모셨다. 두 사람의 결혼식이 끝나자 공자위의 일행은 괵 땅의 회맹 장소로 이동했다.

당진의 조무를 위시하여 송(宋), 노(魯), 제(齊), 위(衛),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등의 각국 대부들이 모두 먼저 와서 초나라의 사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자위가 사람을 먼저 보내 당진의 조무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초와 당진은 예전에 이미 회맹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우호관계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할 뿐이니 구태여 번거로운 삽혈의식과 함께 문서에 서명을 할 필요가 없이 단지 우리가 송나라에서 맺은 규약이나 한 번 읽어 여러 제후들이 잊지나 않으면 족하다고 생각하오.」

기오(祁午)가 조무를 향해 말했다.

「공자위가 이런 말을 하는 뜻은 우리 당진과 선두의 자리를 놓고 다투려는 뜻에서입니다. 지난 번 송나라에서의 회맹 때 우리가 초나라에게 그 선두를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그들이 선두자리를 양보할 차례입니다. 만약에 옛날 맺은 규약이나 한번 읽고 만다면 이것은 초나라가 항시 선두자리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원수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회맹에 참석하러 온 모습을 보니 그가 거처하는 곳은 마치 왕궁처럼 꾸미고 그 위세와 격식은 초왕과 같이 하고 있소. 그의 뜻은 열국에 대해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일 뿐 아니라 안으로는 반역을 꾀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소. 잠시 자기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그의 교만한 마음을 키워 주도록 합시다.」

「원수의 뜻이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지난번의 송나라에서의 회맹 때 자목(子木 : 屈建의 字)이 갑병들을 데리고 참석하였으나 다행히 군사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공자위가 다시 수많은 군사들을 끌고 왔으니 우리도 마땅히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우호를 맺으려고 하는 이유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조무는 신의를 지키는 일만 알지 그 밖의 다른 일은 알지 못하오.」

열국의 대부들이 모두 단에 오르자 공자위가 옛날에 맺은 규약들을 읽고 희생을 잡아 제단에 바쳤다. 조무는 단지「예, 예」하며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회맹의 일이 다 끝나자 공자위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군사들을 이끌고 자기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회맹에 참여했던 열국의 대부들은 모두 공자위가 장차 초왕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알았다. 후에 사관이 이에 대해 시를 지었다.

기고만장한 귀공자를 제멋대로 하게 방치하고

또한 초왕의 의장을 갖추어 돌아다니게 했는가?

열국의 대부들은 귀공자의 발호를 모두 알았는데

유약한 겹오만은 조당에 들어앉아 희희락락 했도다!

任敎貴倨稱公子(임교귀거칭공자)

何事威儀效楚王(하사위의효초왕)

列國盡知成跋扈(열국진지성발호)

郟敖燕雀尙怡堂(겹오연작상이당)

조무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옛날에 맺은 규약만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초나라에 선두의 자리를 빼앗긴 일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신의를 지킨다는 말만을 각국의 대부들을 향하여 재삼 강조하면서 계속 했던 말을 반복하곤 했다. 이윽고 본국으로 회군하기 위해 정나라 경계를 다시 통과하게 된 조무는 노나라 대부 숙손표가 동행하게 되었다. 조무가 다시 숙손표를 향하여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반복했다. 숙손표가 듣고 말했다.

「상국께서는 미병(彌兵)에 대한 약속을 계속 말씀하시는데 그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때가 되어 식사나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안녕하면 되지 어찌 한가로이 알 수 없는 먼 후일에 대해서 물어 보십니까?」

숙손표가 조무와 헤어져서 정나라 대부 한호(罕虎)를 만나자 조무에 대해 말했다.

「조맹이 머지 않아 죽을 것 같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먼 앞날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고 또한 그의 나이는 아직 오십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말하는 어투는 팔구십 먹은 노인처럼 지나치게 간곡했습니다. 어찌 그가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조무가 과연 죽었다. 한기(韓起)가 조무의 뒤를 이어 정경이 되어 당진의 집정을 담당하였다.

8. 시질찬위(弑侄簒位)

- 조카를 시해하고 초왕의 자리를 찬탈한 초영왕 -

한편 초나라 공자위가 귀국하여 보니 웅미가 병이 들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내궁의 침실에 누워 있었다. 공자위가 웅미의 병문안을 하기 위해 입궁했다. 그는 웅미에게 비밀리에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주위의 비빈들과 시종들을 물러나게 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공자위는 갑자기 자기의 관끈을 풀어 웅미의 목을 졸랐다. 가엽게도 웅미는 숨이 끊어져 죽었다. 웅미에게는 막(幕)과 평하(平夏)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두 사람이 궁중에서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칼을 빼 들고 달려와 공자위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힘이 부족한 두 사람은 공자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공자위에게 모두 살해당했다. 자를 각각 자간(子干)과 자석(子晰)이라고 부르는 웅비(熊比)와 웅흑굉(熊黑肱)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우윤(右尹)과 궁구윤(宮廐尹)⑰의 관직에 있던 자간과 자석은 초왕 부자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들에게도 화가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당진국과 정나라로 각각 도망쳐 몸을 피했다. 공자위가 웅미의 부고를 알리는 글을 다음과 같이 쓰게 하여 제후들에게 보내려고 했다.

『과군 웅미께서 복이 없어 일찍 세상을 떠나 내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오거가 보고 말을 바꾸었다.

「과군 웅미께서 복이 없어 일찍 세상을 떠나 선왕이신 공왕의 아들 중 나이가 연장자인 공자위로 그 뒤를 이었다.」

9. 楚靈王大合諸侯(초영왕대합제후)

- 제후들을 대거 소집하여 회맹을 행하고 패주가 된 초영왕 -

공자위가 초나라의 왕위에 오르고 이름을 웅건(熊虔)으로 개명했다. 이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원파(薳罷)는 영윤으로, 정단(鄭丹)은 우윤으로, 오거(伍擧)는 좌윤으로, 투성연은 교윤(郊尹)으로 삼았다. 그때 태재 백주리(伯州犁)는 일이 있어 겹(郟)⑱땅을 방문하여 머무르고 있었다. 백주리가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영왕이 사람을 보내 죽였다. 그리고 그는 웅미의 시신을 겹 땅으로 보내 장사지냈다. 이로써 웅미의 시호가 겹오(郟敖)가 되었다. 영왕은 이어서 원계강(薳啓疆)을 태재로 임명하여 백주리의 일을 대신하게 하고 정사에 힘을 기우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장자 록(祿)을 세자로 세웠다. 초왕의 자리에 오른 영왕은 영윤으로 지내던 시절보다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게 되어 평소에 품고 있었던 패자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영왕은 그 첫 단계로 오거를 사자로 삼아 당진으로 보내 당진이 초나라를 위해 제후들을 소집시켜 줄 것을 요청하게 하고, 정나라 출신 풍씨의 딸은 그 집안이 한미하여 초왕의 비로 세우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여 다시 당진의 군주에게 혼인을 청했다. 조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해 하고 있던 당진의 평공은 세력이 강대한 초나라를 두려워한 나머지 초왕이 요청한 것은 모두 들어줬다.

주경왕 6년 기원전 539년, 겨울철 2월 달에 정간공과 허도공(許悼公)이 초왕에게 조현을 올리기 위해 초나라에 들렸다. 초영왕이 그들을 붙잡아 두고 당진에 간 오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오거가 당진에서 돌아와 초왕에게 복명하였다.

「당진의 군주가 우리의 두 가지 청을 다 허락했습니다.」

영왕이 크게 기뻐하여 맹회를 위해 제후들을 소집하는 사자를 보내고 다음 해 봄철 3월 달에 초나라의 신(申) 땅으로 모이라는 전갈을 보냈다. 정간공이 신 땅으로 가서 제후들을 영접하는 일을 맡겠다고 청했다. 영왕이 허락하여 정간공과 허도공을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윽고 다음 해 봄철이 되자 열국의 제후들이 신읍에서 열리는 회맹에 참석하기 위한 행렬이 줄을 잇게 되었다. 단지 노와 위 두 나라는 국내 사정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고 송나라는 대부 상수(向戍)를 보내어 송군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밖에 채(蔡), 진(陳), 서(徐), 등(滕), 돈(頓), 호(胡), 심(沈), 소주(小邾) 등의 군주들은 모두가 몸소 회맹에 참석하였다. 초영왕이 병거를 대거 인솔하고 신읍에 당도하자 제후들이 모두 마중 나와서 접견의 예를 취했다. 우윤 오거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신이 들으니 패업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제후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제후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극진한 예로써 대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대왕께서 당진에게 부탁하여 제후들을 소집하게 되었는데 송나라의 상수, 정나라의 공손교 두 사람은 모든 대부들의 귀감이라 세상에서 부르기를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대할 때 극진한 예로써 대하십시오.」

「옛날에는 제후들과 회합할 때의 예는 어떠했는가?」

「하(夏)나라의 계왕(啓王)⑲은 균대(鈞臺)⑳에 제후들을 모아 잔치를 벌리고, 상(商)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제후들을 경박(景亳)㉑으로 소집하한 후에 명을 세웠습니다. 또한 주무왕은 맹진(孟津)㉒에서 제후들을 모아 하늘에 맹세를 시켰고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은 기산(岐山)의 남쪽에서 제후들을 모이게 했으며 또한 성왕의 아들인 강왕(康王)은 풍(酆)㉓의 별궁에서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조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소왕(昭王)을 이은 목왕(穆王)은 도산(涂山)㉔으로 나가 제후들을 접견했습니다. 제환공은 소릉(召陵)으로 군사들을 끌고 우리 초나라를 포함한 중원의 제후들과 회맹하였고, 당진의 문공은 천토(踐土)에서 회맹을 열어 제후들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제후들을 소집하여 의식을 행한 여섯 왕과 두 패주가 회맹을 행할 때 그 의식이 같지 않으니 어떤 것이든 대왕께서 택하여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과인은 제환공이 소릉에서 행했던 패자의 의식을 따랐으면 하는데 나는 그때 행한 예가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여섯 왕과 두 패주가 행한 예는 신도 그 이름만 들었지 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환공이 우리 초나라를 정벌하러 왔을 때 소릉까지 군사를 물리치고 굴완(屈完)을 제나라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제환공은 8국 제후들의 병거와 군사들을 열병시켜 그 위세를 굴완에게 보여주고 난 후에 열국의 제후들 및 굴완과 함께 회맹의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지금 중원의 제후국들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복종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왕께서도 역시 우리들 군사의 수효가 많음과 그 세력이 강하다는 모습을 보여주어 제후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 나라들을 토벌한다면 어떤 제후국들이건 감히 우리에게 거역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과인이 제후들의 군사들과 합쳐 용병을 해야겠는데 어느 나라부터 정벌해야 하겠는가?」

「제나라의 군주를 시해한 경봉이 지금 오나라에 도망쳐 살고 있습니다. 오나라는 경봉의 죄를 묻지도 않고 그를 중용하고 경씨 족속들을 모이게 하여 주방(朱方)의 땅에 살게 하여 그들의 재부는 옛날 제나라에 있을 때 보다 많다고 합니다. 제나라 사람들이 듣고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나라와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원수의 나라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군사를 움직여 오나라를 정벌하면서 경봉을 잡아 죽여 천하의 명분을 얻는다면 이것은 일거양득의 일입니다.」

「좋은 계책이오.」

초왕은 오거의 말대로 수많은 군사들과 병거를 회맹장 앞에 도열시켜 그 세력을 과시함으로써 제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이것이 초왕이 주재한 신 땅의 회맹이었다.

10. 란적천토(亂賊天討)

- 란적이 하늘의 이름을 빌려 란적을 토벌하다. -

회맹에 참가한 제후들 중에 서(徐)나라 군주의 부인은 오왕의 딸 소생이라 초왕이 그가 오나라에 붙을까 의심하여 방안에 구금시켰다. 구금된 지 3일이 되자 서자(徐子)는 초왕에게 오나라를 정벌하는 초군의 향도가 되겠다고 청했다. 초왕이 서자를 풀어 주었다. 이어서 대부 굴신(屈申)에게 군사를 주어 여러 제후들의 군사들과 함께 이끌고 출병하여 오나라를 공격하라고 명했다. 굴신이 주방을 공격하여 경봉은 사로잡고 나머지 경씨 종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굴신이 계속 진군해서 오나라의 도성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오나라가 방비를 굳건히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라도 싸움에서 지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군사를 물리쳤다. 굴신이 돌아와 사로잡은 경봉을 초왕에게 바쳤다. 영왕이 경봉을 길거리에서 처형하여 제후들에게 공개적으로 자기의 공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오거가 간하며 말했다.

「신이 듣기에 결백한 자만이 저자거리에서 죄인을 처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경봉을 공개적으로 처형할 때 그의 죄를 밝히신다면 경봉이 승복을 하지 않고 오히려 대왕을 비난한다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영왕이 듣지 않고 경봉에게 부월(斧鉞)을 등에 짊어 지게하고 포승줄에 묶어 군중 앞으로 끌고 나와 제후들 앞에 세웠다. 군리가 경봉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자기를 따라 자신이 저지른 죄를 외치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국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혹시라도 군주를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능멸했으며, 제나라 대부들을 강박하여 하늘에 맹세하게 만든 이 경봉과 같은 사람은 되지 말기 바라오!』

경봉이 군리의 말이 끝나자 여러 제후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 나라 대부들은 들으시오. 혹시라도 조카 웅미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초공왕의 서자 위(圍)와 같은 사람은 되지 마시오!」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영왕이 경봉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며 황급히 군리에게 황급히 참수하라고 명했다. 호증 선생이 시를 지어 한탄했다.

란적이 다시 란적을 벌주어 죽인다고 하니

세가 불리해서 죽기는 했지만 승복이야 했겠는가?

초왕 웅건은 하늘 대신 경봉을 죽인다고 했지만

하징서를 죽였던 장왕의 업적에야 미치겠는가?

亂賊還將亂賊誅(란적환장란적주)

雖然勢屈肯心輸(수연세굴긍심수)

楚虔空自夸天討(초건공자과천토)

不及庄王戮夏舒(불급장왕륙하서)

신 땅에서 회맹을 끝내고 영도에 돌아온 초영왕은 주방을 파한 후에 승세를 타고 오나라 땅 깊숙이 쳐들어가지 않고 바로 회군한 굴신의 행위에 대해 괴이쩍게 생각했다. 그는 결국 혹시 두 마음을 품고 있지나 않을까 의심한 나머지 굴신을 죽였다. 영왕은 굴신의 대부 직을 아들 굴생이 잇게 했다. 한편 원파를 당진에 보내 모셔온 당진의 공녀를 자기의 부인으로 세웠다. 영왕은 당진에서 돌아온 원파를 계속해서 영윤의 직에 머물도록 했다.

그해 겨울에 오왕 이매가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에 쳐들어 와서 극(棘)㉕, 력(櫟)㉖, 마(麻)㉗땅을 공격하여 주방에서의 원수를 갚았다. 초영왕이 대노하여 다시 제후들의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오나라로 쳐들어가 갔다.

그때 옛날 오나라에게 당한 침략에 대해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음을 항상 한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월왕 윤상 역시 대부 상수과(常壽過)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돕게 했다. 이윽고 초나라 장수 원계강이 선봉이 되어 수군을 이끌고 작안(鵲岸)㉘에 먼저 당도하였으나 오나라 수군과 싸워 패하고 말았다. 초영왕이 듣고 원계강을 돕기 위해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나예(羅汭)㉙로 진격했다. 오왕 이매가 그의 종제인 궐요(蹶繇)를 초나라 진영에 사자로 보내 호군하게 했다. 영왕이 노하여 궐요를 죽여 그 피를 받아 군사들이 치는 북에 바른 후에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영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 물었다.

「당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길흉에 대해 점을 치지 않았는가?」

「쳐봤는데 점괘가 대단히 길하게 나왔다.」

영왕의 사자가 다시 물었다.

「우리 왕이 너를 죽여서 그 피로 군사들의 북에 바르려고 하는데 어찌 점괘가 길하게 나왔다고 하는가?」

「오나라에서 쳐본 점은 사직에 관한 일이라 어찌 한 사람만의 길흉만을 이야기했겠는가? 우리 오왕께서 이 요(繇)를 보내어 초군을 호군하라고 하신 목적은 나로 하여금 초나라 왕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 이로써 우리 오나라가 초나라에 대한 방어태세의 완급을 조절하기 위해서이다. 초왕이 만약 초군을 호군하기 위해 오나라의 사자로 온 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해 준다면 우리 오나라의 군사들로 하여금 경계태세를 느슨하게 만들 것이며, 그렇지 않고 만약에 사신을 죽여 그 피를 받아 지내고 북에 바른다면 우리 오왕께서는 진노하시어 방비를 더욱 단단히 하여 초나라의 공격을 물리치고도 여력이 남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점괘가 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자가 돌아가 영왕에게 보고하자 영왕이 말했다.

「그 사람은 참으로 현자로다.」

영왕은 즉시 궐요를 풀어 주게 하여 오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윽고 초나라의 대군이 오나라 경계에 당도했으나 오나라의 방비가 매우 엄중하여 도저히 그 경계를 뚫고 쳐들어 갈 수가 없었다. 영왕이 곧 한탄하며 말했다.

「옛날 내가 굴신을 억울하게 죽였구나!」

어쩔 수 없이 곧바로 군사를 물리쳐 영도로 돌아온 영왕은 오나라에 쳐들어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대규모 공사를 일으켜 그것에 대신하려고 했다. 초나라의 풍부한 물산과 제도를 제후들에게 과시하고자 어마어마하게 큰 장화궁(章華宮)란 이름의 궁궐을 지었다. 그 크기는 가로 세로가 공히 40리고 그 한 가운데에 높이가 30인(仞)㉚에 달하는 대를 세워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영왕은 그 대 이름을 장화대(章華臺)라고 지었으나 사람들은 삼휴대(三休臺)라고도 불렀다. ― 삼휴대라고 부른 연유는 장화대가 너무 높아 그 대를 오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첫 계단을 올라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는 세 번을 쉬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음이다. ― 장화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간 궁실과 정자들은 모두가 지극히 화려하고 장엄하였다. 그리고 궁실과 정자들의 바깥쪽에 담장을 둘러치고 그밖에는 백성들을 살게 하였다. 죄를 짓고 나라 안이건 나라 밖이건 도망친 자들을 모두 소환하고 귀국시켜 그 죄를 용서하고 장화궁을 축조하는 인력으로 썼다. 장화궁의 축조하는 공사가 끝나자 초왕은 사자를 천하의 제후들에게 보내어 소집한 후에 함께 장화궁의 락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려고 했다.

《제68회로 계속》

주석

①이락(伊洛) : 이수(伊水)와 락수(洛水) 두 강을 말한다. 하남성 복우산(伏牛山)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이수(伊水)와, 하남성 락남(洛南)에서 발원하여 락양(洛陽)을 관통하고 흐르는 락수(洛水)는, 언사시(偃師市) 부근에서 합쳐진 다음 다시 온현(溫縣) 앞에서 황하에 합류한다.

②구산(緱山)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언사시(偃師市) 남쪽의 구씨진(緱氏鎭)에 있다..

③부구(浮丘) : ①서한(西漢) 때의 제후국(諸侯國) 이름. 한무제 6년에 유불심(劉不審)을 봉했다고 하나 그 위치는 미상임.② 현 하남성 준현(濬縣) 서남 ③광동성 치서현(治西縣) 부근에 부구(浮丘)도인이 있어 득도(得道)하여 하늘로 올랐다는 설화가 있다.

④숭산(嵩山) : 중국 명산 오악(五嶽)중 중악(中嶽)에 해당하며 그 주봉을 태실(太室), 그 맞은편의 봉우리는 소실(小室)이라 한다. 태실봉은 해발 1,490m, 소실봉은 1,512m이다. 현 하남성 등봉현(登封縣)에 소재하며 그 산 어귀에 무예로 유명한 소림사(少林寺)가 있다. 전설상으로 산동성에 있었다는 숭산(崇山)과는 다른 산이다.. 오악(五嶽)은, 동악(東嶽)은 태산(泰山), 서악(西嶽)은 화산(華山), 남악(南嶽)은 형산(衡山), 북악(北嶽)은 항산(恒山)l다.

⑤동래(東萊) : 고대의 산 이름. 지금의 산동성 황현(黃縣) 동쪽에 있는 래산(萊山)을 말한다. 《사기(史記)․효무본기(孝武本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中國華山, 首山, 太實, 泰山, 東萊, 此五山 黃帝之所常游.』

⑥상제(嘗祭) : 천자와 제후들이 4계절에 맞추어 종묘에 지내는 제사 중에서 가을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禮記》는 『春礿夏禘(춘약하체),秋嘗冬蒸(추상동증)』이라 했고 《이아(爾雅)》는 『春祠夏礿(춘사하약),秋嘗冬蒸(추상동증)』이라 했다.

⑦ 읍강(邑姜) : 강태공(姜太公) 딸로써 무왕(武王)의 정비이며 성왕(成王)을 낳았다.

⑧주방(朱方) : 춘추 시 오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 경계. 초나라의 수군이 쳐들어 올 때 방어하던 장강 북안의 오나라 방어기지가 있던 전략적 요충지다.

⑨로읍(盧邑) : 현 산동성(山東省) 평음(平陰) 북 10키로, 제남시(濟南市) 서남 50 키로

⑩ 옹량(雍梁) : 현 하남성 장갈시(長葛市) 서 20키로

⑪행인(行人) : 중원제후국의 경우 다른 나라의 제후들을 접대하는 외교적인 일을 담당했던 지금의 외무장관에 해당했으나 오나라의 경우는 객경에 해당하여 타국 출신의 사람에게 주던 관직이었다.

⑫칠목(七穆) : 정목공(鄭穆公) 란(蘭)은 모두 1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자라탕으로 인하여 공자송(公子宋)에게 살해당한 영공(靈公) 이(夷)와 그 뒤를 이은 양공(襄公) 견(堅)의 2명의 군주와 도중에 죽은 자를 제외한 7명의 공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정목공 이후 정나라의 정사는 모두 7목의 출신에게 돌아가 군주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칠목에 해당하는 공자들의 이름과 자는 다음과 같다. 公子去疾(子良), 公子喜(子罕), 公子騑(子駟), 公子發(子國), 公子嘉(子孔), 公子偃(子游), 公子舒(子印)

⑬신대(新臺) : 위선공(衛宣公)이 세자인 급자(急子)의 부인으로 데려온 선강(宣姜)을 자기가 데리고 살기 위해 기수(淇水) 위에 지은 궁전. 위선공의 음행을 비난하며 부른 시가가 신대(新臺)라는 제목으로《시경(詩經)․국풍(國風)․패풍(邶風)》에 실려 있다. 본서 12회에 참조.

⑭호안국(胡安國) : 서기 1074년에 태어나서 1138년에 죽은 송나라 때의 학자다. 자는 강후(康侯)다. 복건성 숭안현(崇安縣) 출신으로 무이(武夷) 선생이라고도 불렀다. 1097년 진사, 태학박사가 되었고, 고종 때 급사(給事)에 이르렀으나 관직에서 물러났다. 송나라가 남쪽으로 나라를 옮겨 남송을 세운 후, 송나라 학문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정이천(程伊川 : 燎)과 정명도(程明道 : 顥)를 말하는 이정자(二程子) 중 정이천을 사숙하여 독자적인 학문의 세계를 세웠다. 이정(二程)의 학문을 명확히 규명하는 데 힘써 왕안석(王安石)이 춘추(春秋)를 폐한 것에 불만을 품고 춘추 연구에 20여 년 동안 몰두하여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 30권을 저술했다. 남송 초기에 완성된 이 책은 양이복수론(攘夷復讐論)의 논조가 강해 청나라 때 금서가 되었으나 원명(元明) 두 왕조 때에는 춘추 삼전(三傳 : 즉 左氏傳, 公羊傳, 穀梁傳)에 버금가는 경전으로 중요시 되었다. 그 밖에 <자치통감고요보유(自治通鑑擧要補遺)>, <문집(文集)> 등이 있다.

⑮괵(虢) :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峽市) 남안에 있었던 제후국인 북괵을 말한다. 기원전 665년 당진의 헌공(獻公)이 펼친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에 의해 망하고 영토와 백성들은 모두 당진에 병합되었다. 주문왕의 동생이 봉해진 제후국이었다.

⑯우읍(芋邑) : 토란이나 서류 등의 구근류를 재배하는 왕실 전용의 전답이 있는 고을이나 그 위치는 미상이다.

⑰궁구윤(宮廐尹) : 초나라 궁중의 마굿간과 말을 관리하던 관리의 장.

⑱겹(郟) : 지금의 하남성 겹현(郟縣) 동남

⑲계(啓) : 하나라를 세운 우(禹) 임금의 아들. 곰으로 변하여 황하의 치수공사를 하고 있던 우를 본 그의 아내는 도망가다가 돌이 되었다. 그때 우의 아내는 계(啓)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돌로 변한 그의 아내의 배가 점점 커져 이윽고 그녀의 배가 갈라져 계(啓)가 태어났다.

⑳균대(鈞臺)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우현(禹縣) 부근에 있던 하나라의 별궁

㉑경박(景亳) : 지금의 하남성 조현(曹縣) 부근. 상(商)은 창건해서 멸망할 때의 도읍지였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까지 포함하여 그 도읍을 7번 바꾸었는데 경박(景亳)은 창건기 때의 도읍이었다.

㉒맹진(孟津) :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북 20키로 지점의 맹진현(孟津縣) 부근. 맹진(孟津)은 중국 역사상 황하를 건너는 유명한 도선장(渡船場)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제후들을 소집하여 맹진에서 하늘에 맹세의 의식을 치르고 황하를 건너 진군하던 중 군사들의 행군하는 모습에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회군하고 그 2년 후에 다시 출정하여 목야(牧野: 현 하남성 신향시(新鄕市) 북)의 들판에서 은나라 군사들을 무찌르고 주나라를 세웠다.

㉓풍(酆) : 주나라 도읍인 호경(鎬京) 옆 서쪽에 세운 별궁(別宮)이 있던 고을. 풍수(酆水) 강안(江岸)의 세운 별궁이라 풍(酆)이라 했다.

㉔도산(涂山) : 현 안휘성(安徽省) 방부시(蚌埠市) 부근.

㉕극(棘) : 지금의 하남성 영성현(永城縣) 서북 20키로 되는 곳으로 송나라 도성이었던 상구시(商丘市) 동남쪽의 수수(睢水) 강안의 고을이다.

㉖력(櫟) : 지금의 하남성 신채시(新蔡市) 경내에 있었던 당시의 초나라 성읍

㉗마(麻) : 지금의 안휘성 탕산(砀山)

㉘작안(鵲岸) : 지금의 안휘성 동릉시(銅陵市) 북쪽 장강(長江)의 강안(江岸) 부분을 일컫는 말이다.

㉙나예(羅汭) : 지금의 호남성 상음현(湘陰縣)의 율라수(帥)가 굽이치는 곳이다. 《좌전·소공(左傳昭公) 5년 주에 “楚子以馹至於羅汭”와 “楚師濟於羅汭”라는 기사가 있다. 。

㉚인(仞) : 옛날 길이의 단위. 일인(一仞)은 약 7-8자에 해당 함. 춘추 때 한 자는 약 22-23cm이니 1인은 1m 50cm에서 65cm이니 30인은 즉 48-55미터에 해당한다.

[평설]

당진과 초 두 나라에 정전협정이 발효되자 당진의 경우 패권국의 지위롤 지키는데 수세적인 입장에 서게 된 반면, 초나라는 오히려 공세적이 되어 기세가 등등했다.

당진과 초가 강화를 맺어, 국제 정세가 상대적으로 소강상태로 들어가게 되자 각 제후국들은 내부적으로 갈등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제나라에서는 노포계(盧蒲癸)가 당시의 실권자인 경봉(慶封)을 쫓아내는 정변을 일으켰고, 정나라에서는 공손흑(公孫黑)이 실권자인 양소(良宵)를 살해하여 칠목 간의 갈등이 발새했다. 또한 채(蔡)나라에서는 세자 반(般)이 그의 부군(父君)인 채경공(蔡景公)을 시해했다. 여러 나라에서 내란이 발생했음에도 진평공(晉平公)은 방관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대했다. 그러나 송나라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에 대해서는 전연(澶淵)에 대거 제후들을 소집하여 제후국들에게 막대한 재물을 각출하게 하여 송나라를 돕도록 했다. 제후국들이 위험에 빠지면 구해주고 넘어지려고 하면 부축해 주어야하는 책임을 지고 있던 패권국이 지금으로 말하면 적십자사가 하는 구호운동이나 하는 처지로 떨어지게 되었다. 진평공 그런 자세는 당진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은 크게 추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는 반대급부적으로 오히려 패권국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공자위는 정나라를 방문할 때 군주만이 행하는 격식을 사용했으며 자기의 부인을 맞이한다는 구실로 정나라를 기습하려고 기도했다. 또 괵(虢) 땅에서 제후들이 회맹을 행할 때 송나라에서 체결한 맹약을 다시 낭독함으로 해서 당진국이 맹회를 주재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마침내 초나라에 귀국한 공자위는 초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초왕의 자리에 오른 영왕은 당진과 초가 패권을 공동으로 행사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을 파기하고 초나라 단독으로 중원을 제패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당진국의 경내에서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가 당진국의 공녀를 부인으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 초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당진국은 초나라의 요구에 빠짐없이 응했다. 영왕은 이어서 기원전 539년 제나라 군주를 시해한 경봉(慶封)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초영왕이 제후들을 대거 소집하여 회맹을 연 목적은 각 제후들을 위협하여 오나라 정벌전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초나라의 그와같은 행동은 당진국이 자세를 낮추며 자기들의 입지를 보존하려고 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하지만 초영왕도 초국의 동쪽에서 새로 일어난 오(吳)나라의 국력을 과소평가한 잘못을 저질렀다. 초왕의 오나라 정벌전은 초강왕(楚康王 : 재위 전559-545년)이 기원전 546년에 새로 창건한 수군을 이용한 정벌전과, 다시 다음 해인 전545년에 섬진군과 함께 행한 정벌전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오나라 국도(國都)에는 접근하지도 못하고 군사력만 허비하고 말았다. 이뿐만 아니라 그해 겨울 오왕 이매(夷昧)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변경을 공격했다. 초영왕은 다시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제후군들과 함께 출동했으나 다시 오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초영왕의 무공은 덕과 의에 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했고, 다시 당시로써는 전무후무하게 화려하고 웅장한 장화대(章華臺)를 지어 제후들에게 그 위세를 과시하는데 국력을 모두 소진하여 결국은 패자의 자리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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