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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1:58:246347 
제62회. 諸侯圍齊(제후위제) 計逐欒盈(계축란영)
양승국   (1455)
 제62회 기원전 557년 제후연합군의 제나라 정벌전과 평음지역 시의도 복사 사본.jpg  (810.2K)   download : 93
일반

제62회 諸侯圍齊 計逐欒盈(제후위제 계축란영)

제후들은 군사를 합하여 제나라를 포위하고

당진의 세가들은 계략을 꾸며 란영을 쫓아냈다.

1. 참정(慙丁)

- 스승의 스승을 모욕하여 목숨을 잃은 윤공타 -

윤공타는 유공차의 말을 듣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위헌공의 뒤를 쫓아갔다. 윤공타가 20여 리를 앞으로 달려서야 비로소 위후의 일행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공손정이 윤공타를 향하여 무슨 이유 때문에 다시 뒤를 따라 왔느냐고 물었다. 윤공타가 말했다.

「나의 스승인 유공께서는 그대와 사제지간의 정리를 생각해서 놓아주었다. 나는 곧 유공의 제자라, 그대로부터는 아무런 은혜를 받은 바 없으니 마치 길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어찌 사사로운 정을 이끌려 그 주인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이미 유공에게 궁술을 배웠다 했으니 그렇다면 유공은 궁술은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사람으로서 어찌 그 근본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대는 속히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 사제지간의 좋은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라!」

윤공타가 공손정의 말을 듣지 않고 활에 화살을 재더니 공손정을 향하여 곧바로 당겼다. 공손정이 당황해 하지 않고 잡고 있던 말고삐를 헌공에게 넘겨주고 자기 앞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손을 위로 한 번 올려 가볍게 받아 쥐었다. 공손정은 윤공타가 쏜 화살을 자기의 활에 재어 윤공타를 향하여 다시 쏘았다. 윤공타가 급히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화살은 이미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왼쪽 어깨에 꽂혀 관통을 해 버렸다. 윤공타가 아픔을 참지 못하고 활을 버리고 달아났다. 공손정이 다시 화살 한 대를 쏴서 윤공타의 목을 꿰뚫어 죽였다. 윤공타를 따라온 수행 군사들이 놀라서 병거도 버리고 달아났다. 헌공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말했다.

「만약 그대의 귀신같은 활 솜씨가 아니었더라면 과인의 이 한 목숨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공손정이 다시 말 고삐를 잡고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10여 리를 갔는데 다시 후면에 병거 소리가 진동하여 처다 보니 나는 듯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아 자기들을 잡으러 오는 추격군으로 보였다. 헌공이 말했다.

「다시 추격군이 오는 것 같은데 어찌 달아 날수 있을꼬?」

황급한 마음에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뒤따라 달려오고 있던 병거들이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 그들은 곧 죽음을 무릅쓰고 어가를 호위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던 헌공의 동모제 공자전(公子鱄)과 그 가병들이었다. 헌공이 비로소 겨우 마음을 놓고 한 달음에 달려 제나라에 당도했다. 제영공(齊靈公)은 위헌공을 래성(萊城)①에 있는 공관에 묵도록 배려했다. 이때가 주영왕 13년으로 기원전 557년, 위헌공 재위 18년째 되는 해였다. 위헌공이 대신들을 예를 갖추지 않고 함부로 대해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군주의 자리에서 쫓겨나 제나라로 망명하게 된 일을 송나라 때 유학자 한 사람이 시를 지어 한탄했다.

군주란 하늘처럼 존귀하고 신과 같이 빛나는 존재인데

무엇 때문에 남의 신하된 자가 감히 군주를 쫓아내는가?

이때부터 군신간의 강령이 없어지게 되었으니

원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尊如天地赫如神(존여천지혁여신)

何事人臣敢逐君(하사인신감축군)

自是君綱先缺陷(자시군강선결함)

上梁不正下梁蹲(상량부정하량존)

2. 諸侯伐齊(제후벌제)

- 패권에 도전하는 제나라를 정벌하는 제후연합군 -

한편 위헌공을 축출한 손림보는 영식과 상의하여 공자표를 모셔다 위나라 군주로 삼았다. 이가 곧 위상공(衛殤公)이다. 손림보는 사자를 당진에 보내 헌공이 무도하여 쫓아내고 유덕한 공자를 군주로 세웠다는 사실을 고했다. 당진의 도공이 중행언(中行偃)에게 물었다.

「위나라 사람들이 한 사람의 군주를 쫓아내고 다시 한 사람의 군주를 세웠으니 이것은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위헌공 간(衎)의 무도함은 제후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근자에 위나라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스스로 원하여 공자표를 자신들의 군줋 세웠으니 우리는 그저 모르는 척하면 되겠습니다.」

도공은 중행언의 말을 따랐다. 당진의 군주가 위나라의 손림보와 영식에게 그 군주를 쫓아낸 죄를 묻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제영공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당진의 군주가 패주로써의 직분에 매우 태만하구나! 내가 이번 기회를 타서 패업의 뜻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겠는가?」

제영공은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노나라의 북쪽 변경지방의 성읍(郕邑)②을 포위하고 주변의 땅에서 대대적으로 노략질을 한 후에 귀환하였다. 그때가 주영왕 14년 기원전 558년의 일이었다.

원래 제영공은 처음에 노나라 여인 안희(顔姬)를 부인으로 맞이했으나 그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안희의 몸종인 종희(鬷姬)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광(光)이라 했다. 영공이 광을 태자로 세웠다. 또한 비천한 신분으로써 영공의 총애를 받게 된 비첩(嬖妾)에 이름이 융자(戎子)라고 있었다. 그녀도 역시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융자의 동생 중자(仲子)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아(牙)라 했다. 융자는 공자아(公子牙)를 자기 자식으로 삼았다. 제영공에게는 다른 희첩의 아들로 저구(杵臼)가 있었지만 공자아 이외는 사랑하지 않았다. 융자가 영공의 총애를 믿고 공자아를 태자로 세워주기를 청하자 영공이 허락했다. 융자의 동생 중자가 영공에게 간했다.

「태자광을 세자로 세운지 이미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제후들의 회합에 참석하여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가 되었습니다. 오늘 광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한다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게 되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일을 당하실 것입니다.」

「태자를 세우고 폐하는 일은 모두 나의 마음에 달려있음인데 누가 감히 따르지 않는단 말인가?」

영공은 즉시 태자광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즉묵(卽墨)③을 지키라고 했다. 태자광이 임지로 출발하자마자 영공은 광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한다는 전지를 내렸다. 공자아를 태자로 새로 세운 제영공은 상경 고후(高厚)를 태부로 삼았다. 또한 용력과 지혜를 겸비한 시인(寺人) 숙사위(夙沙衛)를 소부로 삼아 태자가 된 공자아를 돌보도록 했다. 제나라가 태자광을 폐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양공(魯襄公)은 사자를 보내 태자가 무슨 죄를 지어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났는지를 물어 보게 했다. 노나라 사자에게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던 영공은 오히려 노나라가 장차 광을 도와 제나라의 국권을 다투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영공은 이 일로 해서 더욱 노나라를 원수같이 생각했다. 제나라는 우선 먼저 군사를 보내어 노나라를 위협하고, 후에 광을 죽이려고 했다. 이처럼 영공은 무도하기가 그지없는 위인이었다.

노나라가 사자를 당진에 보내 제나라가 쳐들어와 사태의 위급함을 알렸으나 그때 마침 도공이 병이 들어 노나라를 구할 수 없었다. 그해 겨울에 당진의 도공이 마침내 죽었다. 주영왕 14년 기원전 558년의 일로써 당진의 도공은 15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당진의 군신들이 세자 표(豹)를 받들어 뒤를 잇게 했다. 이가 당진의 평공(平公)이다. 노나라가 다시 도공의 문상과 평공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숙손표(叔孫豹)를 사절로 보내 제나라의 침략을 고하고 원군을 파병하여 제나라의 군사를 물리쳐 주기를 청했다. 당진의 집정 중행언이 듣고 말했다.

「잠시 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제후들을 모이게 하고 그때 만약 제후(齊侯)가 회맹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제후들의 군사들을 이끌고 토벌하여도 늦지는 않으리라!」

다음 해인 주영왕(周靈王) 15년은 기원전 557년으로 당진의 평공 원년이다. 그 해에 평공은 제후들을 추량(溴梁)④의 땅으로 대거 소집했다. 제영공은 직접 오지 않고 상경 고후를 대신 참석시켰다. 순언이 대노하여 고후를 잡아서 가두려고 하자 그 사실을 미리 알게 된 고후는 중도에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영공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수비하는 군사들을 포위한 후에 그곳을 지키는 수장 장견(臧堅)을 죽였다. 숙손표가 다시 당진에 달려와 나라의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군을 청했다. 평공이 중행언에게 명하여 제후들의 군사를 소집하여 당진의 군사들과 합쳐 대거 제나라를 정벌군을 일으키게 했다.

순언이 군사들의 점고를 끝내고 그날 밤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노란 옷을 입은 사자를 보았는데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서 순언을 붙들어 대질 심문을 하려고 했다. 순언이 사자의 뒤를 따라 가자 이윽고 커다란 대전 밑에 이르게 되었다. 대전의 옥좌에는 몸에 곤룡포를 입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쓴 사람이 단정하게 좌정하고 있었다. 사자가 명하여 순언을 붉은 색 섬돌 밑에 꿇어앉게 하였다. 그런데 그곳에는 자기처럼 꿇어 앉은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살펴보니 려공(厲公), 란서(欒西), 정활(程滑), 서동(胥童), 장어교( 長魚矯), 그리고 삼극(三郤) 및 일반 여러 사람들이었다. 순언이 마음속으로 매우 놀랐다. 서동과 삼극이 서로 말다툼을 오랫동안 하는데 그 시시비비가 분명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자 옥졸이 들어와서 삼극과 서동을 데려가고 자기와 함께 남은 사람들은 려공, 란서, 정활 등 네 사람뿐이었다. 려공은 자기가 시해 당한 일의 시말을 말하면서 그 억울함을 상제에게 호소하자 란서가 자기를 변호했다.

「손을 직접 써서 시해 한 자는 정활이지 내가 아니오.」

정활이 말했다.

「모든 일은 란서와 순언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단지 그들의 명을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어찌 모든 죄를 저에게만 씌우려고 하십니까?」

대전의 상좌에 앉아 있는 상제가 전지를 내리면서 말했다.

「당시는 란서가 정사를 맡아 하고 있던 때라! 마땅히 그 죄가 맨 앞에 있으니 지금부터 5년 이내에 란씨의 자손을 끊어지게 할 것이다!」

려공이 듣고 노하여 말했다.

「내가 죽게 된 것은 순언이 란서를 도왔기 때문인데 어찌 순언 혼자만이 무죄라 할 수 있습니까?」

말으 마친 려공이 몸을 일으키더니 과를 들어 순언의 목을 쳤다. 꿈속에서 순언의 목이 잘려 땅으로 떨어졌다. 순언은 손으로 자기의 목을 주어서 몸에 맞추고는 대전의 문을 뛰어 나왔다. 그때 마침 문 앞에서 경양(梗陽)⑤ 땅의 무당 영고(靈皐)를 만났다. 그가 순언을 보고 물었다.

「당신의 목이 어째서 비틀어 져 있습니까?」

영고가 순언의 목을 붙들고는 똑 바로 맞추려고 하였다. 목을 맞추는데 고통이 너무 심하여 소리를 지르다가 와중에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순언이 꿈이 너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조당에 나와서 과연 꿈속에서처럼 영고를 만나게 되었다. 즉시 영고에게 자기 수레에 타라고 명하고는 지난밤에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설명했다. 영고가 듣고 말했다.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한이 원수의 몸에 이미 미치고 있으니 죽음 이외는 방법이 없는 듯 합니다.」

「조만간에 동쪽의 제나라에 출병해야 하는데 그 임무는 완수할 수 있겠소?」

「동쪽의 제나라에서 부정한 기운이 매우 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벌하면 되면 필시 이길 수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비록 돌아가시기는 하겠지만 싸움에서는 이길 수 있습니다.」

「제나라를 이길 수만 있다면 비록 죽는다 한들 무슨 한이 있겠소!」

순언은 당진의 군사를 이끌고 하수를 건너 각 제후들 군사들과 노나라에 있는 제(濟)⑥땅에서 회동했다. 당진(唐晉), 송(宋), 노(魯), 위(衛), 정(鄭), 조(曹), 거(莒), 주(邾),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등 모두 12제후국들의 거마들이 제나라를 향하여 행군을 시작했다. 제영공은 상경 고후에게 태자 아를 보좌하여 나라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최저(崔杼), 경봉(慶封), 석귀보(晳歸父), 식작(殖綽), 곽최(郭最), 시인 숙사위(夙沙衛) 등의 장수들과 대군을 일으켜 임치성을 나와 평음(平陰)⑦에 주둔하였다. 평음성의 남쪽에 방(防)이라는 고을이 있었는데 그곳에도 제법 의지할 만한 성곽이 있었다. 제영공은 석귀보를 시켜 방성의 성 밖에 해자를 대대적으로 파게 하여 정예병을 뽑아 지키게 했다. 방성 주위에 판 해자의 폭은 물경 일 리나 되었다. 사인 숙사위가 한 가지 계책을 영공에게 내 놓았다.

「열 두 나라 제후국 병사들의 마음이 각기 다르니 그들이 처음 당도하였을 때 마땅히 그 중 한 나라의 군사를 공격하여 패퇴시키면 남은 제후국들의 군사들은 자연히 사기가 꺾여 싸우려는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만약 싸우고 싶지 않으시다면 차라리 험준한 지세의 요충지를 지켜야지 구차한 방읍의 성곽과 해자만을 믿으시면 안됩니다.」

제영공이 듣지 않고 말했다.

「그처럼 깊고 넓은 해자를 적군의 전차들이 어찌 건너올 수 있겠는가?」

한편 순언은 제나라 군사들이 방성 앞에 판 큰 해자에 의지하여 지키려는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제나라 군사들이 이렇게 해자를 크게 판 것은 우리들을 두려워하고 있어 감히 싸울 생각을 못하고 있음이다. 내 마땅히 저들의 해자를 돌파할 계책을 세우리라!」

중행언은 즉시 노와 위 두 나라 병사들에게 명령을 전하여 수구(須句)⑧로 가는 길을 취하게 하고 주와 거나라 병사들은 성양(城陽)⑨의 길을 취하게 한 후에 모두 낭야(瑯琊)⑩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당진과 나머지 제후국들이 평음성을 함락한 소식을 듣게 되면 다시 진격을 시작하여 기(杞)나라를 통과하여 제나라 도성인 임치성 밑에서 당진군의 본대와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사국의 병사들이 령을 받고 각기 길을 취하여 진격하였다. 순언은 다시 사마 장군신(張君臣)을 시켜 험준한 지세의 요충지의 모든 산과 늪지에 기치를 빽빽이 세워 허장성세를 이룬 후에 다시 풀 더미를 묶어 사람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옷과 갑옷을 입혀 빈 수레 위에 세웠다. 다시 수레의 끌채에 통나무를 매달아 달리게 하자 땅 위에서 일어난 먼지가 온 천지를 가렸다. 다시 군사들 중에서 힘이 센 장사를 선발하여 각기 큰 기를 들게 하고는 병거 위에 태워 달리게 하자 온 산의 골짜기에는 기치가 빽빽이 들어차게 되어, 마치 온 산골짜기는 군사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순언과 사개는 휘하의 중군 및 송과 정 두 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가운데 길을, 조무와 한기는 휘하의 상군 및 등(縢)과 설(薛) 두 나라 군사를 이끌고 오른쪽 길을. 위강과 란영은 휘하의 하군 및 조(曹), 기(杞), 소주(小邾) 등 3국의 군사를 이끌고 왼쪽 길을 취하여 진격하도록 했다.

제후연합군의 모든 병거에는 각기 나무와 돌을 싣게 하고, 모든 보졸들에게는 각기 포대에 흙을 가득 담은 후에 등에다 짊어지도록 명령하여 방성(方城)을 향해 진격하도록 했다. 당진 및 각 제후국들의 연합군들 행렬이 방읍의 성곽 앞을 지키는 해자에 이르자 삼로의 군사들이 일제히 포성을 울려 호응한 후에 각기 수레에 실은 나무와 돌을 해자에 부리게 하고 다시 보졸들이 지고 왔던 흙 포대 수만 개를 던져 넣으니 해자는 삽시간에 메워져 평평하게 되었다. 이어 큰 칼과 도끼를 높이 쳐든 수많은 군사들이 방읍의 성곽을 향해 돌격했다. 제나라 병사들은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태반이 죽거나 다쳤다. 간신히 포로의 신세를 면한 방읍의 수장 석귀보(晳歸父)가 몸만 빼서 도망쳐 제영공이 주둔하고 있던 평음성으로 달려가 보고했다.

「당진의 군사들이 해자를 메우고 앞으로 돌진해 오고 있습니다. 적군의 세가 너무 커서 도저히 대항할 수 없습니다.」

3. 私怨擒將(사원금장)

- 사사로운 원한으로 자국의 용장을 적국의 포로로 만든 제나라의 시인 숙사위 -

영공은 얼굴에 두려운 기색을 띄우며 즉시 평음성 앞에 있는 무산(巫山)에 올라 적진을 관찰하였는데 산곡과 늪지 중 지세가 험한 요충지에는 모두가 기치가 펄럭이고 거마가 요란하게 이리저리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영공이 크게 놀라 말했다.

「제후연합군들의 수효가 어찌 저리도 많단 말인가! 잠시 피하는 편이 좋겠다.」

영공이 옆에 있는 여러 장수들을 향하여 물었다.

「누가 후위를 맡아 본대의 철군을 돕겠는가?」

숙사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신에게 일지의 군마를 주시면 후위를 맡아 적의 추격군을 끊어 주공의 근심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영공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앞에서 도열하고 있던 장수 두 명이 나오더니 영공을 향하여 말했다.

「당당한 제나라에 어찌 용기 있는 장수가 한 사람도 없다 하시어 일개 환관 따위에게 그 군대의 후위를 맡게 하십니까? 여러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습니다. 소장 두 사람이 후위를 맡겠사오니 숙사위는 주공이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의 장수들이란 곧 식작(殖綽)과 곽최(郭最)인데 모두가 만부부당의 용기와 힘을 갖춘 장사들이었다. 영공이 듣고 말했다.

「장군들이 후위를 맡는다면 과인은 적군의 추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식작과 곽최 두 장군들의 말을 듣고 영공이 숙사위 자기를 쓰지 않자 얼굴에 수치심을 가득 띄우고 물러나서 할 수 없이 본대를 따라 앞서서 철군했다. 숙사위가 이끄는 대열이 대략 20여 리쯤 후퇴하여 석문산(石門山) 어귀에 이르렀는데 지세가 험하여 양쪽 편에 큰 바위가 솟아 있고 단지 그 가운데로는 조그만 길이 하나 나 있었다. 식작과 곽최 두 사람에게 원한을 품게 된 숙사위는 그들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방해하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그는 제나라 군사들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던 말 30여 필을 모두 죽여 그 소로에 쌓은 후에 계속해서 큰 수레 몇 대를 서로 연결하여 마치 성곽처럼 만들어 그 산을 통하는 길을 막아 버렸다. 이윽고 식작과 곽최 두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의 후위를 맡아 천천히 퇴각하여 석문산 협로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죽은 말들이 쌓여 있고 큰 수레로 입구를 막아 퇴로가 막혀 있어 말을 끌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필시 우리들에게 앙심을 품은 숙사위가 고의로 한 짓이 틀림없다.」

두 장수들은 황급히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죽은 말들을 치워 길을 뚫으려고 했다. 그러나 전면에 큰 수레가 막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말을 한 필 한 필 들어서 빈 공터로 옮기는 일이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군사들의 수효는 비록 많았지만 그 길이 너무 좁아 힘이 있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윽고 제나라 군사들 배후에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며 당진의 사나운 장수 주작(州綽)이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두 장수가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왔다. 식작이 수레를 뒤로 돌려 대항하려고 하는 순간 주작이 쏜 화살이 날아와 그의 왼쪽 어깨에 꽂혔다. 옆에 있던 곽최가 활을 재어 주작을 쏘아 식작을 구하려고 하자 식작이 손을 들어 곽최을 제지하였다. 식작이 자기편 동료에게 자기를 겨누고 있던 활을 쏘지 말라고 제지하는 주작의 행동을 보고 역시 더 이상 손쓰기를 멈추고 두 장수의 해동거지를 주시했다. 식작이 여유 있게 왼쪽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 던져 버리고는 주작을 향하여 말했다.

「거기 계시는 장수는 누구십니까? 능히 이 식작의 어깨를 맞출 수 있었으니 그대도 역시 장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원컨대 우리 서로 통성명이나 합시다.」

주작이 대답했다.

「나는 당진국의 장수 주작이라는 사람이오!」

「소장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나라의 이름있는 장수 식작이오. 장군은 세상사람들이 ‘흰소리하지 말아라, 이작(二綽)이 두렵지 않느냐?’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나와 장군은 다 같이 그 용기와 힘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 있으니 대장부는 대장부를 알아주는 바라 어찌 서로 해치는 일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 장군의 말은 심히 합당하다고 하겠으나 단지 우리는 각기 그 주군을 위해 싸워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장군이 만약 기꺼이 결박을 받아 항복한다면 내가 힘을 다하여 장군의 목숨을 구하도록 하리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소?」

「장군이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맹세를 하리라. ‘만약 내가 두 장군의 목숨을 보전하게 하지 못한다면 원컨대 함께 죽으리라!」

「이 곽최와 식작 두 사람의 목숨을 오늘 장군에게 맡기겠소.」

식작이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이 짝을 지어 포승을 받았다. 식작과 곽최 두 장수를 따르던 군사들도 모두 주작이 거느린 당진군에게 항복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 일을 논했다.

식작과 곽최는 용맹스러운 호랑이 같은 장수들인데

좁은 산길에서 적군을 만나 용맹을 펼치지 못했다.

사원으로 인해 군사는 패하고 장수는 사로잡히게 하여

나라를 욕보인 자는 하잘 것 없는 환관이었다.

綽最赳赳二虎臣(작최규규이호신)

相逢狹路志難伸(상봉협로지난신)

覆軍擒將因私怨(복군금장인사원)

辱國依然是寺人(욕국의연시사인)

당진의 장수 주작이 식작과 곽최를 붙잡아다가 중군에 갖다 바쳐 군공에 올리면서 한편으로는 두 사람은 용기가 있는 장수들이라 살려 두면 장차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순언에게 말했다. 순언은 두 사람을 잠시 중군에 가두어 놓고 싸움이 끝나고 본국에 회군하게 되면 그때 처리하기로 하였다. 당진과 여러 제후들의 연합군이 평음성을 출발하여 주변의 여러 성곽들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둔 체 곧바로 임치성 외곽에 당도하였다. 한편 행군로를 크게 우회하여 낭야의 길을 통하여 진격했던 노(魯), 위(衛), 주(邾), 거(莒) 네 나라 병사들도 거의 같은 시간에 임치성 외곽에 당도하여 본대에 합류했다. 범앙(范鞅)이 선봉을 자처하여 임치성 외곽의 옹문(雍門)을 먼저 공격했다. 옹문 앞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범앙이 갈대에 불을 질러 옹문을 같이 불 태웠다. 주작도 휘하의 군마를 이끌고 공격에 가담하여 신지(申池)의 대나무 숲을 불태웠다. 순언이 이끄는 당진과 각 제후국들의 연합군들은 일제히 화공을 하여 임치의 외곽성은 모두 불에 태워 무너뜨리고 드디어 임치성의 내곽(內廓) 밑에 당도하여 사면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당진군과 제후연합군이 일제히 지르는 함성이 온 땅을 진동시켰다. 당진군이 쏘는 화살이 성루 위에까지 날아오자 성중의 백성들은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제영공도 매우 두려워하여 아무도 몰래 좌우에게 명하여 수레를 준비하게 하여 동문을 열고 성문 밖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상경 고후가 알고 급히 영공 앞으로 뛰어오며 허리에 찬 검으로 말고삐를 끊으며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다.

「당진과 중원 제후국들의 연합군이 비록 정예하다고는 하나 이미 우리나라에 깊숙이 들어왔는데 어찌 그들이라고 문제가 없겠습니까? 우리가 굳게 지키기만 하면 머지않아 그들도 지쳐서 스스로 군사를 물리쳐 철군하게 되어있습니다. 주공이 이 성을 버리고 일단 떠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어 우리나라의 도성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입니다. 원컨대 앞으로 10일만 더 머무르고 계시다가 우리의 힘이 다하고 군세가 꺾일 때가 된다면 그때 성문을 빠져나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영공이 즉시 생각을 바꾸어 성 밖으로 달아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 고후가 군사들과 백성들을 독려하여 온 힘을 기우려 성을 굳게 지켰다.

한편 제후연합군이 제나라를 포위한지 6일 째 되던 날에 갑자기 정나라 본국에서 정간공에게 보내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곧 대부 공손사지(公孫舍之)와 공손하(公孫夏)가 연명하여 보낸 기밀스럽고 긴급한 내용의 편지였다. 정간공이 봉함을 뜯고 편지를 꺼내어 읽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신 사지(舍之)와 하(荷)는 주군의 명을 받들어 자공(子孔) 공자가(公子嘉)과 함께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자공이 반역의 뜻을 품고 아무도 몰래 독단으로 초나라에 사람을 보내 내통하고, 초나라의 군사를 불러 들여 우리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고 자신은 이미 초나라와 내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 초나라의 병사들이 이미 어릉(魚陵)⑪에 당도하여 조석지간에 정나라에 당도할 예정입니다. 일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으니 주야를 불문하고 회군하시어 사직을 구하십시오.』

정간공이 크게 놀라 즉시 정나라 본국에서 보낸 편지를 들고 중군 막사로 가서 당진의 평공에게 바쳤다. 평공이 순언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순언이 말했다.

「우리의 군사들이 진군 중에 주변에 있던 제나라의 성채를 공격하지 않고 또한 싸우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와서 임치성을 포위 공격한 이유는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높을 때를 이용하여 북소리 한 번으로 임치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나라는 자기들의 도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그들의 군사들은 하나도 상하지 않고 온전해 있습니다. 또한 정나라가 초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만약 우리가 정나라를 잃게 된다면 그 허물은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일단은 철수하여 정나라를 구하는 편이 옳을 줄 압니다. 이번의 출정에 비록 제나라의 도성은 파하지 못했다고는 하겠으나 제후(齊侯)의 간담을 서늘하도록 혼을 내주었으니 앞으로는 감히 다시는 노나라를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4. 師曠驟歌(사광취가)

- 노래를 불러 미래의 일을 알아맞친 당진의 악인 사광(師曠) -

평공이 순언의 말을 옳다고 받아들여 즉시 임치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군사를 물리쳤다. 정간공은 당진의 평공에게 감사의 말을 한 후에 먼저 정나라로 서둘러 돌아갔다. 이윽고 중원 제후국들의 군사 행렬이 축가(祝柯)⑫에 이르러 숙영했다. 그때 평공은 초군과의 싸움에 대해 걱정한 나머지 제후들과 술을 마실 때에도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사광(師曠)이 곁에 있다가 말했다.

「신이 초나라와의 싸움에 대한 길흉을 노래 소리로 한번 점을 쳐보겠습니다.」

사광이 즉시 남풍(南風)에 이어 다시 북풍(北風)을 연주하였다. 북풍의 음악 소리는 평화롭고 듣기가 좋았으나 남풍의 소리는 마치 죽은 소리와 같아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광이 연주를 끝내고 평공에게 말했다.

「남풍은 앞으로 잘 나가지 못하고 그 소리가 거의 죽는 듯하여 이것은 스스로 화를 취할 형상입니다. 3일 내에 마땅히 좋을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 사광이라는 사람은 자는 자야(子野)라 했는데 그는 곧 사리에 밝은 당진의 제일가는 악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심취하여 열심히 하였으나 깨우칠 수가 없어 사광이 한탄하였다.

「음악에 아직도 정통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마음속에 너무나 많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 이유는 보이는 것이 많기 때문이리라!」

사광은 즉시 쑥 잎을 태워 그 연기를 두 눈에 쬐어 멀게 한 후에 음악에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천기(天氣)의 차고 비는 이치를 능히 살필 수 있게 되었고 음양의 일어나고 없어지는 이치와 하늘의 일이건 인간사이건 모두 통하게 되어 점을 한번 치게 되면 추호도 오차가 없었다. 풍각(風角)⑬과 새 울음소리로 점을 쳐서 그 길흉을 마치 손금 읽어 내듯이 알아맞혔다. 후에 당진의 태사(太師)로 임명되어 음악을 관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도 평공이 사광을 매우 신임을 했던 관계로 평공이 전투에 나가면 반드시 데리고 다녔다. ―

평공이 사광의 말을 듣고 일단은 군사들에게 영채를 세워 기다리게 하고 사람을 시켜 멀리까지 나가 정탐을 해 오게 하였다. 3일이 채 못되어 정탐을 하러 나갔던 사람이 정나라 대부 공손채(公孫蠆)와 같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초나라 군사들은 이미 물러갔습니다.」

평공이 초나라 군사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러간 연유를 물었다. 공손채가 대답했다.

「초나라는 자낭(子囊)⑭대신에 자경(子庚)⑮이 영윤이 된 이후로 선대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 정나라 대부 공자가(公子嘉)가 아무도 몰래 초나라와 내통한 후에, 초나라 병사들이 정성 밖에 당도하면 그들을 막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성 밖으로 나가 호응하기로 약조했습니다. 공손사지와 공손하 두 분께서 공자가의 음모를 미리 알고 갑사를 동원하여 성문의 출입을 엄중하게 통제한 결과 공자가는 감히 성밖으로 나가 초병들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자경이 초나라의 대군을 거느리고 영수(潁水)를 건넜으나 그때까지 정나라로부터 내응한다는 소식을 받지 못하자 즉시 어치산(魚齒山)⑯ 밑에 진채를 세워 둔병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봤습니다. 그때 마침 어치산 주위에는 큰 우박이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려 초나라 진영은 물에 잠겨 그 깊이가 한 자가 넘게 되었습니다.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가 높은 언덕을 찾아 기어올라 빗물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추위가 극심하게 밀려와 초군 중 태반이 얼어 죽게 되자 초나라 사졸들의 원성이 자자하게 되어 군심이 흉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자경은 할 수 없이 군사들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저희 군주께서는 공자가의 죄를 물어 이미 처형하고 상국과 여러 제후국들의 군사들에게 번거로운 수고를 끼치게 될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이 채(蠆)를 밤낮으로 달리게 하여 군주님께 고하게 하셨습니다.」

평공이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자야는 진실로 음률을 통하여 천하정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로다!」

평공은 즉시 초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러 왔다가 아무런 공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제후들에게 알리고 각기 자기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사신이 시를 지어 사광이 음률에 통달한 것을 찬양하였다.

남풍의 노래가 끝나자 다시 북풍을 불러

남북 양국의 길흉을 손금 보듯이 알았다.

음률에 정통하여 천지의 조화를 꿰뚫고 있었지만

사광은 원래 앞 못 보는 소경의 대종이었다.

歌罷南風又北風(가파남풍우북퐁)

便知兩國吉和凶(편지양국길화흉)

音當精處通天地(음당정처통천지)

師曠從來時瞽宗(사광종래시고종)

그때가 주영왕 17년 기원전 555년 겨울 12월의 일이었는데 당진의 군사들이 하수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는 해가 바꾸이어 주영왕 18년 봄이 되었다.

당진의 군사들이 행군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순언이 행군 도중에 머리에 부스럼이 나더니 그 고통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저옹(著雍)⑰의 땅에 머물러 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중행언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2월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나 결국은 상처가 터지고 눈알이 튀어나와 죽었다. 머리가 땅에 떨어진 꿈과 경양(梗陽) 땅의 무당의 말이 그때가 되어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었다. 식작과 곽최 두 사람은 순언이 죽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감옥을 부수고 탈출하여 제나라로 돌아갔다. 범개가 순언의 아들 순오(荀吳)와 함께 그 영구를 수레에 싣고 당진으로 귀국했다. 평공은 순오로 하여금 중행언의 뒤를 잇게 하여 대부로 임명하고 범개를 중군원수에, 순오를 중군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중행씨로 사용했던 성씨를 옛날의 순씨로 바꾸어 칭하게 했다.

그해 여름 5월에 제나라에서는 영공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대부 최저(崔杼)와 경봉(慶封)이 상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온거를 끌고 가서 즉묵에 머물고 있던 폐태자 광(光)을 모셔 오게 하고 경봉 자신은 집안의 갑사들을 이끌고 태부 고후의 집으로 가서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경봉을 맞이하러 문 밖으로 나온 고후를 경봉이 잡아서 죽였다. 태자광이 최저와 같이 입궁하여 융자(戎子)를 죽이고 다시 공자아마저 죽였다. 병상에 누워 있던 영공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입으로 피를 몇 되나 토하고 난 다음에 이어서 숨이 끊어졌다. 그 뒤를 태자광이 이어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제장공(齊庄公)이다. 제영공을 총애를 받았던 시인 숙사위는 그의 가속들을 이끌고 도망쳐 고당(高唐)⑱의 땅으로 들어갔다. 장공이 경봉에게 군사를 끌고 숙사위의 뒤를 추격하도록 명했다. 숙사위가 고당성을 의지해서 반기를 들었다. 장공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가서 고당성을 포위한 후에 계속해서 공격하였으나 한 달이 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고당성 안에는 이름이 공루(工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제법 용기가 있어 힘을 쓸 줄 알았다. 숙사위가 그에게 고당성의 동문을 지키도록 했다. 숙사위가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공루는 즉시 성루에 올라 장공이 있는 진채를 향해 편지를 써서 활에 메달아 쏘아 보냈다. 밤이 깊어지면 자기가 고당성의 동북 모서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실의 군대가 성루로 오를 수 있도록 맞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장공이 편지의 내용을 믿지 못하고 주저하자 식작과 곽최가 청했다.

「그들이 이미 일방적으로 한 약속이라 반드시 내응이 있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저희 두 사람이 오늘밤에 그곳으로 가서 고당성에 올라 그 환관 놈을 생포하여 석문산에서의 원한을 풀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분 장군들은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마땅히 같이 가서 호응을 해 드리리라!」

식작과 곽최가 군사를 이끌고 고당성의 동북 모퉁이에 당도하여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성 위에서 갑자기 긴 밧줄이 몇 개가 밑으로 내려왔다. 식작과 곽최는 각기 밧줄을 잡고서 성 위로 올라갔다. 군사들이 그들 뒤를 이어 계속 성 위로 올랐다. 공루가 식작의 앞에 서서 달려가 숙사위를 생포하였다. 곽최가 성문으로 달려가 깨뜨려 열자, 제나라 군사들이 성안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성안에 큰 혼란이 일어나서 쌍방간에 혼전이 벌어진 끝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한 식경 만에 성은 평정되었다. 제장공이 입성하자 공루가 식작과 같이 숙사위를 포승줄에 묶어 데려왔다. 장공이 숙사위를 보더니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이 환관 놈아! 과인이 너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너는 오히려 나이 어린 사람을 도와 장자인 태자를 폐하게 했느냐? 오늘 네가 세운 공자아는 어디 있느냐? 너는 공자아의 소부라 지하에 가서 공자아를 보좌해야 되지 않겠느냐?」

숙사위가 머리를 늘어뜨리고 아무 대답도 못했다. 장공이 명하여 끌어내어 참수형에 처한 후에 그 시체를 육젓으로 만들어 이번 토벌전에 종군한 제나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이어서 숙사위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공루를 고당성의 수장으로 명한 후에 군사를 이끌고 임치성으로 돌아갔다.

그때 당진의 상경 범개는 지난 번 제나라를 포위만 하고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다 하여 평공에게 청하여 다시 대군을 진발하여 제나라로 쳐들어갔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자마자 제영공이 죽었다는 소식에 접했다. 범개가 말했다.

「상중의 나라를 정벌하는 일은 옳지 않소.」

범개는 즉시 군사를 물리쳐 당진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알고 제나라에 보고하였다. 대부 안영(晏嬰)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당진이 출병했다가 우리가 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돌아 간 행위는 우리에게 인의를 베풀어 호의를 나타낸 것입니다. 마땅히 화의를 청하여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병화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자가 평중(平仲)이라고 부르는 안영이라는 사람은 키는 다섯 자를 넘지 못하였으나 그 사람은 곧 제나라에서 제일가는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장공 역시 자기가 제후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나라가 안정이 되지 않았고 또한 당진의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즉시 안영의 말을 따랐다. 장공이 당진에 사자를 보내 사죄하고 회맹을 맺기를 청했다. 당진의 평공은 열국의 제후들을 전연(澶淵)⑲에 모두 모이게 하였다. 평공은 범개의 주재 하에 제장공과 삽혈의 의식을 행하여 회맹을 한 후에 우호관계를 맺고 헤어졌다. 이후로 당진과 제나라는 일 년여 동안은 아무런 다툼이 없게 되었다.

5. 간모해자(姦母害子)

- 정욕에 눈이 멀어 아들을 모함하는 란기(欒祁) -

한편 하군부장 란영(欒盈)은 곧 란염의 아들이다. 란염은 다시 범개(范匃)의 사위였는데 범개의 딸이 란염에게 시집을 가서 이름을 란기(欒祁)라 불렀다. 란씨 종족들은 란빈(欒賓), 란성(欒成), 란지(欒枝), 란돈(欒盾), 란서(欒西), 란염(欒黶)을 거쳐 란영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당진의 경상(卿相)을 역임하여 귀하고 번성함에 있어서 다른 집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진의 문무 관원들의 반은 란씨 집안 출신이며 그 중에서 반은 란씨들이고 다른 반은 란씨 집안의 문객이거나 혼인으로 관계를 맺은 당우(黨羽)였다. 위씨(魏氏)로는 위서(魏舒)가, 지씨로는 지기(智起), 중행씨(中行氏)로는 중행희(中行喜), 양설씨로는 양설숙호(羊舌叔虎), 적씨(籍氏)로는 적언(籍偃), 기씨(箕氏)로는 기유(箕遺) 등 모두가 란씨들의 명성과 세력에 의지해서 란씨들과는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일당들이었다. 다시 란영은 소시 때부터 성격이 겸손하고 자기 수하에 있던 선비들에게 공경한 태도를 취하면서 가재를 털어서 그들을 도와 문객들과 교우를 맺어 왔기 때문에, 죽음도 불사하고 란씨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사람들이 무수히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 주작(州綽), 형괴(邢蒯), 황연(黃淵), 기유(簊遺) 등은 모두 그의 밑에 있는 용장들이었다. 또 독융(督戎)이라는 장사가 있었는데 능히 삼천 균(鈞)⑳을 들 수 있는 장사였다. 그가 한 손바닥에 두개의 과를 잡고서 상대방을 찌르면 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란영은 독융을 심복으로 삼아 외출을 할 때면 항상 곁에서 따르게 했다. 독융은 란영이 길을 걸을 때면 단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서 다녔다. 가신으로는 신유(辛兪)와 주빈(州賓) 등이 있었고 그밖에 란영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란염이 죽을 때 그 부인 란기는 나이가 갓 40이 되어 혼자 살 수 없었다. 란씨 집안의 가신 주빈이 여러 번 란씨들의 부중에 들어와 여러 가지 일들을 란영에게 고하는 모습을 란기가 병풍 뒤에서 엿보게 되었다. 란기는 주빈의 풍모가 자못 준수하여 아무도 몰래 시동을 주빈에게 보내어 자기의 뜻을 전하게 하고 불러와 정을 통했다. 란기는 집안의 좋은 기물이나 폐백 등을 챙겨서 모두 주빈에게 주었다. 란영이 평공을 따라 제나라 정벌전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비우자 주빈은 공공연히 부중에 숙식을 하면서 남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삼가 하지 않았다. 란영이 돌아와 모친의 음행을 들어 알게 되었으나, 자기 모친의 얼굴을 생각하여 그 일을 덮어 버리고 부중의 내외 문을 지키는 종복들을 불러 채찍으로 때려 벌을 주고, 가신들의 출입을 엄하게 단속하였다. 란기는 첫 번째로는 그 일로 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곧이어 란영에 대한 분노로 변했고, 두 번째 음욕을 절제할 수 없었으며, 세 번째는 그의 아들 란영이 주빈을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란기는 마침 범개의 생일날이 다가오자 란영에게 자기 친정아버지에게 생일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범씨들의 부중에 들렸다. 란기가 범개를 만나 기회를 엿보다가 말했다.

「란영이 장차 란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어찌 하시렵니까?」

범개가 듣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말하자 란기가 다시 말했다.

「란염이 옛날 저에게 말했습니다. ‘동생 란침을 죽인 범앙을 그대의 부친이 나라 밖으로 쫓아냈으나 얼마 후에 다시 나라에 돌아오게 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한 것도 다행이라 하거늘 지금은 오히려 주군의 총애를 받으며 오늘날 범씨 부자가 우리 당진국의 정사를 오로지 하고 있소. 범씨들은 하루가 다르게 번성하고 있는데 반해 란씨들은 갈수록 쇠미해 지고 있으니 내가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범씨들과는 세상을 같이 할 수 없겠노라!’ 그리고 지금 란염이 죽고 란영이 사위한 후로는 매일 밤 지기(智起), 양설숙호(羊舌叔虎) 등과 모여서 밀실에서 음모를 꾸며 여러 대부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들만의 사당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란영은 내가 그 일을 밖에 나가 발설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란씨들 부중의 문지기들에게 엄하게 문을 지키게 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못하게 해왔습니다. 오늘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 나와 이곳에 온 이유는 후일 란영의 일로 제가 아버님을 두 번 다시 못 뵙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범앙이 곁에 있다가 란기의 말을 도왔다.

「저도 역시 란씨 종족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누님의 말을 들으니 과연 그것이 사실인 듯 싶습니다. 란씨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미리 방비해야 합니다.」

6. 計逐欒盈(계축란영)

- 계략을 꾸며 란영 일족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는 당진의 세가들 -

아들과 딸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을 하여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 범개는 그 즉시 아무도 몰래 평공을 찾아가 상주하여 란씨들을 축축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평공이 다시 비밀리에 대부 양필(陽畢)을 불러 란씨의 일에 대해 물었다. 옛날부터 란염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범씨들과는 친하게 지내 왔던 양필이 평공에게 말했다.

「려공을 시해한 사람은 실은 란서입니다. 란염이 그의 부친 란서의 흉악한 행위를 이어 받고 다시 오늘 다시 그의 아들 란영에게 전해졌읍니다. 란씨들이 백성들과 오랫동안 친근하게 지내온 이유는 그들의 마음속에 다른 뜻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란씨들을 제거하여 시군의 죄를 밝힘으로써 군주의 위엄을 세운다면 이것은 나라의 여러 대에 걸친 복이 될 것입니다.」

「란서가 선군(先君)을 세운 공이 있고 란영의 죄도 드러난 바가 없어 그를 쫓아내는 일은 명분이 없다고 보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란서가 선군이 군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목적은 군주를 시해한 죄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선군께서는 오히려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그의 국군을 시해한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도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면 장차 그 해가 자라 나라의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만약 란영이 죄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때 마땅히 그 추종자들을 잘라 내고 란영은 그 죄를 사하여 어디론가로 내보내십시오. 만약 그가 불복하여 반항한다면 그를 죽일 수 있는 명분이 얻을 수 있고, 그렇지 않고 그가 다른 곳으로 죽음을 피하여 도망친다면 그것은 주공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양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평공은 즉시 범개를 입궁시켜 란영에 대한 일을 의논하고자 하였다. 평공을 알현한 범개가 말했다.

「란영을 멀리 보내지 않고 그의 일당들을 먼저 잡아들이면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반란을 재촉하게 결과가 됩니다. 주군께서 란영을 저읍(著邑)으로 보내어 성을 쌓으라고 하십시오. 란영이 저읍으로 간다면, 주인이 없는 그 무리들이 되어 즉시 잡아들일 수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평공은 즉시 군명을 발해 란영을 저읍으로 보내 그곳에 성을 쌓으라고 했다. 란영이 평공의 명을 받고 임지로 출발을 하려는데 그 가신인 기유(簊遺)가 가지 못하게 말리면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란씨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장군께서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조씨들은 도안가의 참소로 하궁에서 변을 당할 때 란씨들이 외면했던 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으며, 중행씨들 또한 섬진을 정벌하러 갔을 때 돌아가신 부친이신 란염이 중군원수인 중행언의 명령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회군하여 란씨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범씨들은 범앙을 쫓아냈다는 일로 인하여 원망을 품고 있고, 지씨들은 지삭(智朔)이 요절하고 그 뒤를 이은 지영은 아직 나이가 어려 중행씨들의 말을 따르고 있으며, 주공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정정(程鄭) 역시 란씨들을 싫어하여 우리 란씨들은 당진의 여러 종족들 사이에 고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읍에 성을 축조하는 일은 그렇게 시간을 다투는 급한 일이 아님에도 하필이면 장군을 보내려고 하겠습니까? 장군께서는 저읍으로의 행차를 거절하시고 주군을 찾아뵙고 어떤 뜻으로 내린 명인지 살펴보신 후에 대책을 세우십시오.」

「일단 발해진 군주의 명은 거역할 수 없소. 이 영(盈)이 죄가 있다한다면 어찌 감히 도망가서 목숨을 구 할 수 있겠소? 또한 내가 만약 죄가 없다면 나라 안의 백성들이 나를 동정할 텐데 누가 나를 해칠 수 있겠소?」

란영은 즉시 독융으로 하여금 수레를 몰게 하여 신강성의 성문을 빠져 나와 저읍을 향해 달려갔다. 란영이 저읍으로 떠난 후 3일 째 되는 날, 평공이 조회를 주재하면서 여러 대부들에게 말했다.

「란서가 옛날에 시군의 죄를 저질렀는데 아직까지 그 죄를 바로 잡지 못했소. 오늘까지 그 자손들이 조당에 나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으니 그것은 과인의 치욕이라 할 수 있소. 이를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의견들이 있으면 말해 보기 바라오.」

여러 대부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땅히 란씨들을 조당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평공이 즉시 란서의 죄상을 글로 써서 도성의 성문 앞에 걸어 놓게 하고 대부 양필에게 군사를 끌고 가서 란씨 일족들을 쫓아내라고 명했다. 도성 안에 있던 란씨 종족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쫓겨나서 모두 란읍(欒邑)㉑에 모였다. 란락(欒樂)과 란방(欒魴)이 그 종족들과 주작, 형괴 등의 장사들을 이끌고 모두 신강성을 빠져 나와 란영이 있는 저읍으로 달려갔다. 기유, 황연(黃淵) 등과 함께 란씨들의 뒤를 따르려 던 양설숙호 일행은 성문이 이미 닫혀서 성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숙호와 그 일행은 공실의 군사들이 장차 성중의 란씨들 일당들을 수색하여 잡아들일 계획이라는 소문을 듣자 각기 그들의 가병들을 모아 한 곳에 집결시키고 상의한 결과 야밤을 틈타 성안을 혼란에 빠뜨린 후에 동문을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성 밖으로 탈출하기로 하였다. 조씨의 문객에 장갱(章鏗)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설숙호의 이웃에 살았다. 장갱이 양설숙호의 음모를 듣고는 조무에게 달려가 밀고했다. 조무는 그 즉시 달려가 그들의 음모를 범개에게 알렸다. 범개는 아들 범앙에게 명하여 갑사 300명을 끌고 가서 양설숙호의 집을 포위한 후 그 일당들을 모두 잡아오도록 했다.

《제63회로 계속》

주석

①래성(萊城) : 지금의 산동성 유방시(濰坊市) 서쪽 20키로에 있었던 고을이다.

②성읍(郕邑) : 원래 주무왕의 아들 성숙무(成叔武)가 지금의 산동성 산동성 곡부(曲阜) 북쪽 25키의 영양현(寧陽縣) 경내에 있었던 땅에 봉해진 제후국이었으나, 춘추 초기에 정장공(鄭庄公)과 제희공(齊僖公)에 의해 멸망하여 제나라의 위성국(衛星國)이 되었다. 후에 다시 노나라에 편입되어 노나라 삼환씨 중의 하나인 맹손씨(孟孫氏)의 식읍(食邑)이 되었다.

③즉묵(卽墨)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래서시(萊西市) 남서 약 30km 되는 곳의 평도현(平度縣) 경계의 동남

④추량(溴梁) :현 하남성(河南省) 제원시(濟源市) 북 약 15키로의 원성현(原成縣) 부근의 당진 소속의 고을이다. 원성(原城)은 원래 주나라 경사(卿士) 원백관(原伯貫)의 봉읍이었다. 주양왕(周襄王)이 원백관에게 군사를 주어 적국(翟國)의 군사를 막고자 하였으나 원백관(原伯貫)은 적군(翟軍)과의 싸움에서 패했다. 주양왕은 원백관에게서 원(原) 땅을 빼앗은 다음, 자기를 주나라 왕위에 복위시켜 준 진문공에게 원 땅을 포함한 찬모(攢茅), 번(樊), 온(溫) 등의 네 고을을 하사하였다. 본서 제 38회에 나오는 내용으로써 당진의 문공이 신의로써 원성의 백성들 마음을 산 후에 이곳에 조쇠(趙衰)를 봉했었다.

⑤경양(梗陽) : 산서성 청서현(清徐县)의 옛 지명이다. 춘추 때 청원(清源)과 서구(徐溝)의 땅은 기씨(祁氏)들의 식읍이었다. 진경공(晉頃公) 12년 기원전 514년 공실 집안인 기해의 손자와 숙향의 아들이 경공 앞에서 서로 비방하며 싸웠다. 육경들이 공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두 종족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경양을 포함한 그들의 봉지를 10개 현으로 만든 후에 그 땅에 자기들의 자녀들을 대부로 봉해 나누어가졌다.

⑥제(濟) : 춘추 때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濟寧市) 북서 40키로 지점에 대야택(大野澤)이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그 남쪽을 남제(南濟), 북쪽을 북제(北濟)라 했다. 이곳의 제(濟)라는 곳은 상황이 전개되는 것으로 봐서 북제(北濟)를 말한다.

⑦평음성(平陰城) : 지금의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동남 약 40키로의 제나라 소속의 고을로서 현재의 평음현 치소에서 동북으로 약 10키로 되는 곳에 있었다.

⑧수구(須句) : 지금의 산동성 동평현(東平縣) 경내, 태안시(泰安市)에서 서쪽 약 40키로 되는 곳의 제나라 영토

⑨성양(城陽) : 진(秦)나라가 망하고 초한(楚漢)이 천하를 놓고 다툴 때 한나라가 낭야군(瑯琊郡)을 나누어 성양군(城陽郡)을 설치했다. 동쪽으로는 산동성 거남(莒南), 남쪽으로는 임술(臨沭), 비현(費縣), 서쪽으로는 태산(泰山), 몽산(蒙山), 제남(濟南) 일대, 그리고 북쪽으로는 오련(五蓮) 일대를 관할했다.

⑩낭야(瑯琊) : 지금의 산동성 청도시(靑島市) 남 약 50키로에 있던 고을 이름으로 교남시(膠南市) 낭야향(瑯琊鄕) 경내.

⑪어릉(魚陵) : 지금의 하남성 평정산시(平頂山市) 북서 약 10키로. 백어산수고(白魚山水庫)의 북쪽

⑫축가(祝柯) : 지금의 산동성 역성(歷城) 서남쪽에 있었던 춘추 때 제나라의 성읍이다. 독양(督陽)이라고도 했다.

⑬풍각(風角) : 사방과 네 모퉁이의 바람을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오음으로 감별해서 길흉을 점치는 방술

⑭자낭(子囊) : 공자정(公子貞)의 자(字)이다. 초장왕(楚莊王)의 아들이며 공왕(共王)의 동생이다. 기원전 559년 병이 들어 죽을 때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자경(子庚)에게 영도(郢都)를 방어하기 위한 외성을 축성해야 한다고 유언했다. 초나라는 그의 말에 따라 영도의 북쪽과 서쪽에 기남성(紀南城)과 맥성(麥城)을 쌓았다.

⑮자경(子庚) :공자오(公子午)의 자로 초장왕의 아들이고 공왕의 동생이다.

⑯어치산(魚齒山) : 지금의 하남성 평정산시(平頂山市) 어릉(魚陵) 부근에 있던 산 이름.

⑰저옹(著雍) :위치 미상

⑱고당(高唐) : 지금의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서북쪽 약 40키로 되는 곳에 있는 지금의 고당현(高唐縣)

⑲전연(澶淵)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복양현(濮陽縣) 서북의 땅을 말한다. 서기 1004년 남송이 이곳에서 거란에게 매년 조공과 신하의 나라가 되기로 약속한 전연의 맹이 맺어진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⑳균(鈞) :일 균은 삼십 근을 말하며 한 근은 356그램임. 일균은 약 10키로에 해당함. 삼천균이라 함은 3만 키로그램 즉 30톤을 말함. 문맥으로 보아 삼천근의 잘못인 것 같음.

㉑란읍(欒邑)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석가장시(石家庄市) 남 약 30키로.

【평 설】

당진국이 패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초와 진 등의 장애가 되는 나라를 물리치는데는 성공했으나 다시 제나라의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패주로 자처한 진후(晉侯)가 자신의 군주를 쫓아낸 위나라의 신하들에게 죄를 묻지 않고 방관하자 제영공(齊靈公)은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던 노나라를 침범했다. 위헌공이 그 신하 손림보에게 쫓겨난 해는 기원전 559년이고 제영공이 노나라를 침범한 해는 기원전 558년의 일이다. 기원전 557년 당진의 평공이 제후들을 추량(溴梁)에 대거 소환했으나, 제영공은 회맹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노나라 변경을 침범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2년에 걸쳐 두 번이나 노나라를 공격했다. 제영공의 그와 같은 거동은 당진의 패권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을 의미했다. 기원전 554년 진평공은 제영공의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12제후국을 규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영공은 평음(平陰)에 주둔하면서 성 밖에 참호를 깊이파고 제후군들을 막으려고 했다. 제후연합군의 총대장이었던 중행언(中行偃)은 제군 진영의 급소를 찌르기 위해 노(魯)와 위(衛)의 군사를 일대로 하고, 다시 주(邾)와 거(莒)의 군사를 일대로 만들어 랑야(琅耶)로 크게 우회해서 임치성으로 곧바로 달려가게 하고, 나머지 제후군들은 삼군으로 편성하여 평음을 돌파해서 동진하여 제나라의 도성 임치성 밑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평음성 앞의 깊이 판 참호 앞의 산과 소택지의 험지에는 의병을 만들어 제군으로 하여금 제후군의 수효가 많음을 보이도록 했다. 그와 같은 중행언의 조치는 비교적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상중하 삼군을 좌중우 삼로의 길을 취해 진격하여 평음성의 참호 앞에 이르게 되자 군사들로 하여금 휴대시킨 나무, 돌무더기 및 흙더미를 부리게 했다. 참호는 순식간에 메워져 평지가 되자 그 위로 제후군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갔다. 참호를 지키던 제군은 평음성 안으로 들어가 항거하다가 결국은 성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당진군은 제후군의 선두에 서서 달아나는 제군의 뒤를 추격했다. 내부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던 제군은 붕괴되고 장수들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제후군들은 진격로 주변의 성곽을 불사르며 파죽지세로 임치성까지 진격했다.

만약 정나라에서 모반이 일어나 초군을 끌어들이는 변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제나라는 아마도 제후군들에 의해 멸망당할 수도 있었다. 당진국이 제후군들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할 때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평음성을 정면으로 공격할 때는 의병을 만들어 적군에게 아군의 강함을 보여주고, 편제를 엄격하게 조직해서 깊이 판 참호를 메웠으며, 패주하는 제군을 추격하는 도중에는 화공을 행함과 동시 각 부대 상호간의 협조를 밀접하게 유지하여 비교적 작전을 성공적으로 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간담이 서늘해진 제영공은 임치성을 버리고 제나라의 깊숙한 곳으로 도망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제나라의 대부 안영(晏嬰)은 당진이 다시 군사를 내어 제나라를 공격하러 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기원전 553년 새로이 즉위한 제장공에게 건의하여 당진국과 강화를 맺도록 건의했다. 이에 제나라는 당진국에 잘못을 빌고, 패권을 인정했다. 당진국은 제나라에 대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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