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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子鱄出奔(자전출분) 慶封獨相(경봉독상)
양승국   (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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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66회 族滅寧喜 季札論音(족멸영희 계찰논음)

군주를 세운 공만을 믿다가 멸족당한 영희와

중원 제후국들의 노래소리를 듣고 국운을 예언한 계찰

1. 爲臣執君 名不可居(위신집군 명불가거)

- 신하를 위해 그의 군주를 붙잡아 둠은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다. -

한편 식작이 위나라 군사들 중 가려 뽑은 정예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모씨의 땅으로 쳐들어가 당진의 수비군들을 습격했다. 3백 명의 당진국 수비군 대부분을 죽이고 모씨의 땅을 점령한 식작은 사람을 위나라에 보내 승전소식을 전하고 그곳에 주둔하며 손림보의 본거지인 척읍을 공략할 시기를 엿보았다. 한편 위나라 군사들이 이미 척읍의 동쪽 변경인 모씨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손림보는 손괴로 하여금 옹서(雍鉏)와 함께 구원병을 이끌고 가서 당진의 군사들을 구하도록 하였다. 모씨의 땅으로 진군하던 손괴는 도중에 당진의 수비병들이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또한 위군을 이끌고 있는 장수는 제나라에서 출신의 용장 식작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손괴는 감히 앞으로 나가 위군과 대적하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여 손림보에게 복명했다. 손림보가 화를 내며 말했다.

「무서운 귀신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하물며 사람인 바에야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일개 식작 한 사람도 대적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위나라의 대군이 몰려오면 그때는 어찌 막겠는가? 너는 다시 모씨의 땅으로 가서 위나라의 군사들을 막아라. 만약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면 앞으로 나를 볼 생각을 말아라!」

손괴가 손림보의 면전에서 물러 나와 마음속으로 고민한 끝에 옹서와 상의하였다. 옹서가 말했다.

「식작은 만부부당의 용력을 갖고 있는 장수라서 정면으로 싸우게 되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유인계를 써야합니다.」

손괴가 식작을 잡기 위한 계책을 말했다.

「모씨의 땅 서쪽에 이름이 어촌(圉村)이라는 곳이 있소. 사방에 수목이 무성한 가운데에 있는 촌락 안에는 작은 토산이 하나 있는데 내가 사람을 시켜 그 토산에 굴을 파서 함정을 만들어 놓고 풀로 위를 덮어놓고 있겠고. 그 동안에 장군은 먼저 군사 백 명을 이끌고 그에게 싸움을 걸어 마을 입구까지 유인해 오시오. 나는 토산 위에서 군사들을 데리고 주둔하고 있다가 식작이 나타나면 그에게 온갖 욕을 퍼부어 그를 격분시키겠소. 그는 틀림없이 우리 군사들을 얕보고 나를 잡으러 토산 위로 기어오를 것이오.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우리의 계략에 떨어져 함정에 빠진 그를 사로잡을 수 있소.」

옹서가 손괴의 말을 쫓아 백여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모씨의 땅으로 갔다. 옹서와 그의 군졸들은 마치 적군의 동정을 정탐하러 왔다가 우연히 식작의 군사들을 만난 것처럼 꾸미고 일부러 두려운 모습으로 가장하고는 방향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기의 용력을 과신하고 있던 식작은 옹서의 군사들이 수효가 적은 것을 얕보아 영채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다만 자기가 데리고 있던 수십 인의 갑병만을 데리고 속도가 빠른 경거를 타고 옹서의 뒤를 추격했다. 옹서가 길을 이리저리 꾸불꾸불 돌아 식작을 유인하여 어촌 입구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촌락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탈길을 따라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식작이 혹시 숲 속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수레를 멈추라고 지시하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니 촌락 안의 토산 꼭대기 위에 한 무리의 보졸들이 주둔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수효는 대략 2백 명쯤 되어보였다. 군졸들이 한 사람의 장군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장군은 신체가 매우 작았고, 동으로 만든 투구에 비단으로 엮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체구가 작은 장수가 식작의 이름을 부르더니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해댔다.

「네 놈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제나라에서 버림받았고, 다시 당진의 란씨들이 데려가 써먹지도 못했던 폐물인 주제에, 오늘 우리 위나라로 도망쳐 들어와 빌어먹는 주제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느냐? 우리 손씨들은 위나라의 8대에 걸친 충신의 집안이라는 사실을 너는 모를 것이다. 네 놈이 감히 우리들을 범하니 진실로 세상의 높고 낮은 도리도 모르는 짐승과 같은 놈이로다!」

식작이 듣더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위나라 병사들 중에 손괴를 알아보는 자가 있어 식작에게 고했다.

「저 놈은 손상국의 큰아들 되는 손괴라는 자입니다.」

「손괴를 사로잡는다면 손림보를 절반은 잡는 일과 같으리라!」

식작이 살펴보니 그 토산은 그다지 가파르지도 그리고 별로 높지도 않았다. 식작이 수레를 모는 마부에게 소리쳤다.

「저 놈들이 있는 토산 위로 병거를 전속력을 다해 빨리 몰아라!」

식작이 거느리던 거마가 질주하여 곧바로 토산 밑에 이르렀다. 이어서 계속 흉맹한 기세로 토산 위를 향해 달려 함정 위에 다다른 수레와 말이 한꺼번에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식작의 용력을 제어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손괴는 미리 궁노수를 함정 옆에 대기 시켜 놓았다가 식작이 함정 안으로 떨어지면 일제히 화살을 쏘도록 했다. 가련하게도 천하의 맹장 한 사람이 변변치 못한 용렬한 사람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마치 ‘물 항아리는 우물가에서 깨지고 용맹한 장수는 군진의 막사 안에서 죽는 법이다.’①라는 말과 같았다. 이에 대해 쓴 시가 있다.

무명의 손괴는 이미 도망치기 바빴는데

귀신같은 장군을 누가 감히 대적하겠는가?

단지 한 번 격분시키니 기적이 이루어 졌으니

남아란 신의로써 스스로를 강하게 해야 함이다!

無名孫蒯已奔忙(무명손괴이분망)

神勇將軍孰敢當(신용장군수감당)

只因一激成奇績(지인일격성기적)

始信男兒當自强(시신남아당자강)

손괴가 갈고리로 식작의 시체를 땅위로 끌어올려 그의 목을 베어 내어 모씨에 주둔하고 있던 위군의 진채로 달려가 적군에게 보이고 공격을 감행했다. 대장을 잃은 위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모씨의 진채를 탈환 후에 척읍으로 돌아간 손괴는 손림보에게 식작의 수급을 바치며 승전을 고했다. 손림보가 듣고 말했다.

「당진이 만일 나에게 그들의 수비 군사들을 구하지 않은 일을 추궁한다면 나는 변명할 말이 없다. 차라리 싸움에 이겼음을 숨기고 오히려 졌다고 고하는 편이 낫겠다.」

손림보는 즉시 옹서를 당진으로 보내 위나라가 쳐들어와 당진이 보내 준 3백의 군사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고하게 했다. 위나라가 그들의 군사들을 모두 죽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진평공은 대노하여 정경 조무에게 명하여 중원 제후국들의 대부들과 군사들을 전연(澶淵)의 땅으로 불러 연합군을 결성하여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위험을 느낀 위헌공은 영희를 대동하고 당진의 도성 신강성으로 들어가 손림보가 옛날 자기를 나라 밖으로 쫓아 낸 일을 호소하였다. 진평공이 위헌공과 영희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제나라 대부 안영이 제경공에게 말했다.

「당진의 군주가 손림보를 위해 위후를 가두었는데 이후로는 다른 나라의 권신들도 모두 뒤를 따를 것입니다. 주군께서 당진에 가셔서 헌공을 풀어 주도록 청해 옛날 우리가 헌공을 받아들여 래성(萊城)에 머물게 하여 베푼 덕을 잊지 않게 하십시오.」

경공이 안영의 말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즉시 사절을 정나라에 보내 정간공(鄭簡公)과 약속하여 같이 당진에 가서 헌공의 석방을 당진의 군주에게 청하기로 했다. 이윽고 당진국에 당도한 제경공과 정간공이 함께 위후(衛侯)의 석방을 청했다. 진평공은 비록 두 나라 군주들이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당진국을 방문한 성의에 마음이 움직이기는 했으나 손림보가 먼저 와서 한 이야기가 있었던 관계로 쉽게 헌공을 풀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경공을 수행한 안영이 아무도 몰래 숙향을 찾아가 말했다.

「당진은 천하 제후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제후들의 나라에 환란이 있으면 도와주고 잘못이 있으면 고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약한 나라는 붙들어 주어야 하며 강폭한 나라는 눌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맹주의 직분입니다. 손림보가 당초에 그의 군주를 쫓아냈을 때 당진은 그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위나라의 신하를 위해 그 나라의 군주를 가두어 놓고 있어 다른 나라의 군주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옛날 상국의 문공께서 원훤(元咺)의 말을 잘못 들어 위성공(衛成公)을 붙잡아다가 왕성으로 데려가 가두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천자께서 나라의 군주를 가두는 일은 순리가 아니라고 싫어하여 문공은 할 수 없이 성공을 풀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후를 잡아다 천자에게 부탁해서 가두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천자도 불가한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항차 제후가 제후를 붙잡아서 가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간하지 않는 행위는 신하된 자들이 무리를 지어 그 군주를 억누르고 있는 일을 용인하는 태도는 명분이 없는 행위입니다. 이 안영은 당진국이 백업(伯業)의 직위를 잃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감히 대감에게 이렇게 몰래 찾아와 말씀드립니다.」

숙향이 조무에게 안영의 말을 전하여 간하게 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평공은 위헌공을 석방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영희만은 여전히 석방하지 않았다. 우재곡이 헌공에게 권하여 여자 악공 20인을 곱게 단장시켜 당진에 보내 영희를 속죄하게 했다. 당진의 군주가 기뻐하며 마침내 영희도 석방했다. 영희가 돌아와 예전처럼 나라의 모든 일을 전결하고 아무 것도 헌공에게 품하지 않았다. 여러 대부들이 용무가 있을 때에는 결국은 영씨들의 사저에 가서 품의를 해야 했으며 헌공은 두 손을 놓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2. 族滅寧喜(주멸영희)

- 위나라의 정권을 오로지한 영희룰 멸족시켜 식언한 위헌공 -

한편 송나라의 상수(向戍)는 당진의 조무와 친교가 두터웠고 또한 초나라의 영윤 굴건(屈建)과도 서로 매우 친했다. 초나라에 친선 사절로 가게 된 상수는 옛날 화원(華元)이 당진과 초나라 사이를 화평하게 하려고 시도했던 일을 굴건에게 말했다. 굴건이 듣고 말했다.

「그 일은 매우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제후들이 각기 무리를 지어 편을 가르고 있으니 이것 때문에 우리가 비록 화의를 맺고 싶었어도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당진과 초나라가 그들의 속국으로 하여금 상호 조빙하게 할 수 있어 다 같이 한 집안을 이룰 수만 있다면 중원에서의 전쟁은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상수는 굴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말했다. 초나라에서 돌아온 상수는 다시 당진국을 방문하여 당진과 초 두 나라의 군주는 송나라에서 서로 만나 전쟁을 중지하겠다는 맹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당시 초나라는 공왕 때부터 오나라의 빈번한 침입으로 국경이 편안한 날이 없었다. 굴건은 당진과 우호조약을 맺은 후에 오나라의 침략에 전적으로 대비하려고 생각했다. 또한 당진도 역시 초나라가 빈번히 정나라를 침입하여 매 번마다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느라 국력의 소모가 막대했다. 당진의 국정을 맡고 있던 조무는 초나라와 화의를 맺어 몇 년 동안이라도 군사들을 쉬게 하려고 했다. 두 나라가 흔연히 상수의 말에 따랐다. 곧이어 두 나라가 각기 자기들의 속국에 사자를 보내어 날짜를 통고하여 회맹에 참석하라고 전했다.

이윽고 당진의 사자가 위나라에 당도하여 송나라에서 열리는 회맹에 참석하라고 통고했다. 영희는 헌공에 고하지도 않고 자기 독단으로 결정하여 석오에게 회맹에 참석하라고 명했다. 헌공이 듣고 대노하여 공손면여에게 자기의 심정을 호소하였다. 면여가 말했다.

「신이 예로써 상국의 허물을 책하겠습니다.」

면여가 즉시 영희를 찾아가 말했다.

「회맹에 관한 대사를 어찌하여 주군께 고하지도 않으셨습니까?」

영희가 발끈한 얼굴로 면여에게 말했다.

「옛날에 자선(子鮮)이 나에게 약속한 것이 있는데 내가 어찌 근근한 다른 신하와 같단 말이오!」

면여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못하고 돌아와 헌공에게 보고했다.

「영희의 무례함은 너무 심합니다. 어찌하여 죽이지 않으십니까?」

「만약에 영희의 힘이 없었으면 오늘날 내가 어찌 위후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소! 그리고 영희에게 한 약속도 실은 모두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지키지 않을 수 없소!」

「신은 주공의 각별한 은총에 받았으나 아직까지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해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우리의 가병들로 영씨를 공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성공한다면 주군에게 이로운 일이 될 것이며 혹시라도 실패한다 해도 그 후환은 신 혼자서 감당하여 주공과는 무관하게 될 것입니다.」

「경은 잘 판단하여 행하되 그 누가 과인에게 미치면 절대 안 될 것이오!」

면여가 즉시 물러 나와 그의 종제인 공손무지(公孫無地)와 공손신(公孫臣)을 찾아가 의논했다.

「주군을 아랑곳하지 않고 위나라의 정사를 자기 멋대로 주무르고 있는 상국의 만행을 너희들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주공께서는 사사로이 한 약속에 발목이 잡혀 그저 참기만 할뿐 아무 말도 못하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씨의 세력이 커지게 되면 옛날 손씨들이 당한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겠는가?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무지(無地)와 신(臣)이 일제히 면여를 향하여 말했다.

「죽여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이미 이를 주공에게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만약에 우리들이 변란으로 위장하여 군사들을 동원하여 영희를 죽이는데 다행히 성공한다면 그것은 주군의 홍복이며 만약 우리가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면 나라 밖으로 도망치면 그뿐이다.」

무지가 나서서 대답했다.

「우리 형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면여가 그들과 삽혈의 의식을 행하여 서로 간에 신의를 어기면 안 된다고 맹세했다.

이윽고 해가 바뀌어 때는 주영왕 26년 기원전 546년이 되었다.

영희는 자기 집에서 신년잔치를 벌리기 위해 여러 군신들을 초청했다. 무지가 면여에게 말했다.

「영희가 신년 잔치를 벌인다고 하는데 틀림없이 경계가 소흘할 것입니다. 제가 앞서서 쳐들어가 시험해 보겠으니 형님은 사태를 보신 후에 뒤따르시기 바랍니다.」

「점을 한번 쳐봐야 되지 않겠는가?」

「일이란 행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지 어찌 점괘 따위에 달려 있겠습니까?」

공손무지와 공손신이 그의 가병(家兵)들을 모두 동원하여 무장을 시킨 후에 영씨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영씨의 집 대문 앞에는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 기관이라는 것은 땅을 파서 깊은 굴을 만든 후에 그 위를 나무판자로 덮고 별도로 나무를 사용하여 기계를 만들어 나무판자와 연결해 놓은 장치다. 만약 누가 그 기계의 튀어나온 부분을 건들게 되면 그 기계가 작동하여 판자가 내리 앉으면서 사람을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장치였다. 낮 동안은 기계의 작동을 멈추었다가 밤에만 도적을 잡기 위해 가동시켰다.- 그날은 신년 잔치가 열리는 날이라 대문을 지키던 가속들이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배우들의 놀이를 관람하느라 대신 기관을 작동시켜 도둑을 막으려고 했다. 공손무지가 그것도 모르고 기계를 건드리자 기관이 작동하게 되어 깊은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영희가 크게 놀라 도적을 잡기 위해서 급히 뛰어나와서 구덩이 안의 침입자를 끌어내었다. 공손무지가 사로잡히자 공손신이 그를 구하기 위해 과(戈)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으나 영씨들의 가병들 숫자가 워낙 많아 중과부적으로 당해 내지 못하고 싸움 끝에 살해되었다. 영희가 무지에게 물었다.

「너는 누가 시켜서 나를 죽이러 왔느냐?」

무지가 눈알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욕을 했다.

「네 놈은 공을 과신한 나머지 기고만장하여 신하로써 불충하니 우리 형제가 작심하여 사직을 위하여 네 놈을 죽이려고 한 것뿐이다. 일이 이미 틀어졌으니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 어찌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가 일을 행했겠느냐?」

영희가 노하여 무지를 정원의 기둥에 묶어 놓고 채찍으로 때려 배후를 캐려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목을 쳐서 죽였다. 영희의 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재곡은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수레를 타고 달려와 대문을 두드렸다. 영희가 대문을 열고 우재곡을 맞이하려고 하는 찰나에 그 동안 가병을 끌고 영희 집 앞에 숨어 있던 공손면여가 그 틈을 타서 영희의 집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면여는 대문 앞에서 우재곡을 죽이고 그의 목을 잘랐다. 영씨의 집은 대란이 일어났다. 영희가 경황 중에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이냐?」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하는데 구구한 이름을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영희가 겁을 먹고 달아나자 면여가 뒤따라가 영희가 들고 있던 칼을 뺏어 들고 계속해서 그 뒤를 추격했다. 영희는 도망가다가 대청의 기둥을 붙들고 세 바퀴나 돌다가 면여의 칼을 맞고 그 아래에서 죽었다. 면여는 영희의 집안 식구 및 친척, 그리고 집안의 모든 가복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고 난 후에 헌공에게 가서 고했다. 헌공은 영희와 우재곡의 시체를 끌고 와서 조문에 늘어놓아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명했다.

3. 자전출분(子鱄出奔)

- 위헌공의 식언으로 평생 위나라 곡식을 먹지 않은 공자전 -

공자전이 듣고 조문으로 달려와 영희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며 말했다.

「실신(失信)을 한 사람은 주공이 아니라 그대를 속인 사람은 바로 나다! 그대가 죽었으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위나라의 조당에 서 있을 수가 있겠는가?」

공자전이 하늘을 향하여 길게 세 번 외친 후에 즉시 조문 밖으로 뛰어나와 자기 집에 가서 우마차에 자기의 처와 어린 자식을 태우고 당진을 향해 길을 떠났다. 헌공이 사람을 시켜 공자전의 뒤를 쫓아가 도중에 만나 위나라에 머물라고 종용했으나 공자전은 듣지 않았다. 공자전의 일행이 제구성의 북쪽에 있던 하수의 나루터에 이르게 되었다. 헌공이 다시 대부 제오(齊惡)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공자전의 뒤를 쫓게 하였다. 제오가 공자전을 뒤쫓아 가서 위나라에 남아 있으라는 위후의 간곡한 뜻을 전했다. 공자전이 말했다.

「영희가 살아나기 전에는 나는 위나라에 돌아 갈 수 없소!」

제오가 여전히 강요하기를 그만 두지 않자 공자전이 살아 있는 닭을 한 마리 손으로 잡더니 그가 보는 앞에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닭 모가지를 자르며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맹세하였다.

「이 전과 그 처자식은 이후로는 다시는 위나라 땅을 밟지 않을 것이며 위나라의 곡식도 입에 대지 않겠다. 만일 내가 이 맹세를 어기게 된다면 하늘이 나를 이 닭처럼 비명에 죽게 만들리라!」

제오가 보고 더 이상 강권해 봐야 쓸데없는 일인 줄 알고 할 수 없이 제구성(帝丘城)으로 돌아갔다. 공자전의 일행은 하수를 건너 당진의 땅으로 가서 한단에 숨어살았다. 그는 한단에서 가속들과 신발을 삼아 팔아 곡식과 바꾸어 먹고살면서 죽을 때까지 위(衛)라는 말은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를 칭송했다.

타향은 어찌 되었던 고향보다 못한 법인데

신발을 삼아 바꾼 양식이니 배가 얼마나 고팠겠는가?

단지 한 번 약속한 말은 금석보다 더 무거운지라

군주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구천인과의 약속을 지켰다.

他鄕不似故鄕親(타향불사고향친)

績屨粟然竟食貧(적구속연경식빈)

只爲約言金石重(지위약언금석중)

違心恐負九泉人(위심공부구천인)

제오가 돌아와 헌공에게 복명하였다. 헌공은 한탄해 마지않으면서 곧 바로 명을 내려 영희와 우재곡의 시신을 거두어 납관을 하도록 하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런 다음 헌공이 면여를 영희 대신 정경으로 세우려고 하자 그가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인망이 태숙보다 중하지 않으니 태숙을 정경으로 세우시기 바랍니다.」

헌공이 태숙의(太叔儀)를 정경으로 삼아 위나라의 정사를 맡았다. 이후로는 위나라의 내정은 잠시 안정되었다.

4. 미병지회(彌兵之會)

- 진초(晉楚)가 군사행동을 중지한다는 맹약을 맺다. -

한편 송나라 좌사(左師) 상수(向戍)가 미병지회(彌兵之會)②를 주창하며 열국의 사자들이 한 곳에 만나 서로 간의 의견을 나누고자 하였다. 당진의 정경 조무와 초나라의 영윤 굴건이 군사를 이끌고 먼저 송나라 땅에 당도하자 그 밖의 열국 대부들도 줄을 이어 계속 도착하였다. 당진의 속국인 노(魯), 위(衛), 정(鄭) 세 나라는 당진이 세운 진영의 왼쪽에서 진채를 세우고 초나라의 속국인 채(蔡), 진(陳), 허(許) 세 나라는 초나라 진영의 오른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각국의 군사들이 진영을 세워 자리를 잡게 되자 수많은 병거에 의지해 성벽을 대신 한 후에 각기 한쪽씩을 차지했다. 송나라는 물론 회의가 열리는 땅의 주인이라 다른 제후국처럼 진영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대부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여 다음과 같이 의논을 정했다.

『一. 각 속국들은 날짜를 정하여 상시적으로 조빙사절을 보내되 초의 속국들은 당진에 조공을 행하고 당진의 속국들은 초나라에 조공을 행한다.

二. 그 공물과 예물들의 양은 예전의 반으로 줄이고 다시 그것들을 반으로 똑같이 나누어 양쪽에 바치기로 한다.

三. 그 밖의 대국에 속하는 제와 섬진은 당진과 초나라에 필적할 만한 나라인 관계로 어느 한쪽에 속하지 말고 중립을 지키고 서로 간에 상관하지 않기로 한다.

四. 당진의 속국 중 소국에 해당하는 주(邾), 거(莒), 등(滕), 설(薛)과 초나라의 속국 중 소국인 돈(頓)③, 호(胡)④, 심(沈)⑤, 미(穈)⑥나라 중 유력한 나라는 스스로 택하여 조빙을 할 수 있으며 무력한 나라는 두 나라 중 한 나라를 택하여 부용국(附庸國)이 되던가 아니면 이웃의 가까운 나라에 합치던가 스스로 판단하여 행한다.』

이어서 각 나라 대부들은 송나라 도성 수양성 서문 밖으로 나가 제단을 설치한 후에 삽혈의 의식을 행하여 맹세하려고 했다. 초나라 영윤 굴건이 아무도 몰래 갑병을 동원하여 회맹장을 범하고 당진의 조무를 습격한 후에 살해하려고 했으나 백주리가 완강하게 간하여 행하지 못했다. 조무가 초나라의 갑병들이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숙향(叔向)과 상의하여 초나라에 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 숙향이 말했다.

「원래 이 회맹은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모임이라 이름도 미병지회라 했습니다. 그들이 먼저 열국의 제후들에게 신의를 잃어버리면 그 누가 그들에게 복종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단지 굳게 지키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윽고 맹세의 의식을 거행하려는 날이 되자 초나라의 굴건은 자기가 제일 먼저 삽혈을 해야 한다고 중재를 맡고 있던 상수에게 말하여 당진 측에 전하게 했다. 상수가 당진 측의 진영을 찾아오기는 했으나 감히 초나라 측의 요구 사항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상수를 따라온 종자가 상수를 대신해서 말했다. 조무가 듣고 말했다.

「옛날에 우리 당진의 선군이신 문공께서 천토(踐土)의 땅에서 천자의 명을 받으시어 천하의 열국들이 복종한 이래 당진국은 하화(夏華)의 여러 나라들의 윗자리에 임하게 되었다. 형만의 나라가 어찌 우리 앞에 설 수가 있겠는가?」

상수가 다시 초나라 진영에 가서 조무의 말을 굴건에게 전했다. 굴건이 다시 말했다.

「천자의 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초나라도 역시 주천자 혜왕(惠王)으로부터 명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의논할 때 말하기를 초와 당진은 역량이 비슷한 필적(匹敵)이라 했다. 당진이 열국 간의 회맹을 오랫동안 주재해 왔으니 이번에는 마땅히 우리 초나라에 양보를 해야 할 차례가 아닌가? 만약에 옛날과 마찬가지로 당진이 앞장선다면 그것은 다시 우리 초나라의 힘이 당진보다 약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게 된다면 어찌 당진과 우리 초나라를 역량이 서로 비슷하다는 필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수가 다시 당진의 진영으로 가서 굴건의 말을 전했다. 조무가 여전히 자기의 생각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숙향이 조무에게 말했다.

「맹회를 주재하는 권능은 덕으로써 해야지, 힘으로 하는 법이 아닙니다. 만약에 덕을 갖추고 있음에도 삽혈을 나중에 한다 해서 제후들이 받들지 않는다고 할 수 없으며 또한 덕이 없음에도 비록 삽혈을 먼저 한다고 해도 제후들은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회맹은 싸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름을 미병지회라 했는데 무릇 미병이란 천하의 이로움을 위한 것입니다. 삽혈의 순서를 가지고 계속 다투다가는 결국은 군사들이 동원되어 싸움이 일어납니다. 쌍방 간에 서로 군사를 동원하여 전쟁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천하의 제후들에게 신의를 잃는 행위이며 그리되면 천하 열국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우리들의 뜻을 그르치게 됩니다. 원수께서는 이번에는 선삽(先歃)을 초나라에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조무가 양설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초나라에게 선삽을 양보했다. 열국의 대부들이 초나라를 필두로 순서에 따라 삽혈을 행하고 이어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때 위나라를 대표하여 회맹에 참석했던 석오는 영희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히 위나라로 귀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조무를 따라 당진으로 들어가 그곳에 머물며 살았다. 이후로 당진과 초나라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게 되었다.

5. 引狼入室(인랑입실)

- 집안싸움에 이웃의 늑대를 불러들이지 말라!

한편 제나라의 우상 최저는 장공을 시해하고 경공을 세워 그의 위세는 제나라를 진동시켰다. 좌상 경봉은 그 성격이 술을 좋아하고 또한 사냥을 즐겨하여 항상 임치성에는 붙어 있을 때가 없었다. 자연히 최저가 혼자서 조정의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였다. 최저는 날이 갈수록 제멋대로 정사를 처리하며 기고만장해졌다. 이에 경봉은 최저에 대해 질시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최저는 옛날 당강에게 그 소생인 최명을 적자로 세워 자기의 뒤를 잇게 하겠다고 약속은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장자인 최성이 옛날 장공을 시해 할 때 호위 무사 중의 한 명인 공손오와 싸우다가 한쪽 팔이 부러져 불구가 된 일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차마 최명의 일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최성이 최저의 뜻을 짐작하고 자기가 먼저 최씨 집안의 적자를 최명에게 양보한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최읍(崔邑)⑦을 식읍으로 주면 그곳에서 노후를 보내겠다고 했다. 최저가 최성에게 최읍을 주겠다고 허락했다. 그러나 그 말을 전해들은 동곽언과 당무구가 최저를 찾아와 반대하며 말했다.

「최읍은 최씨들의 종읍입니다. 필히 적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최저가 최성을 다시 불러서 말했다.

「내가 원래 최읍을 너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동곽언과 당무구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최성이 물러 나와 그의 동생 최강을 불러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 최강이 듣고 최성을 부추겼다.

「적자의 자리까지 내 주었는데 한 읍도 아까워하며 내주지 못한단 말입니까? 지금은 부친이 살아 계시는데도 동곽언 등이 이렇듯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고 있는데 만약 부친이 돌아가시기라도 하신다면 우리 형제들은 그들에게서 노비 한 명이라도 얻어 부릴 수 있겠습니까?」

「잠시 이 일을 좌상에게 호소하여 우리를 위해 부친께 힘써 주라고 부탁해 보자.」

최성과 최강 두 사람이 경봉을 찾아가 접견을 청했다. 경봉이 안으로 부르자 두 사람은 최읍의 일에 대해 호소했다. 경봉이 듣고 말했다.

「그대들 부친께서 오로지 동곽언과 당무구의 말만 듣고 있으니 내가 비록 그대들을 위해서 말을 해준다 한들 듣겠는가? 후일에 두 사람이 자네들 부친을 해칠지도 모르는 일인데 어찌하여 없애 버리지 않고 있는가?」

최성과 최강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저희들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단지 힘이 미치지 못하여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걱정하여 아직까지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만 물러가고 그 사이에 궁리를 한 후에 다시 만나서 상의하기로 하세나!」

경봉은 최씨 형제들이 물러가자 노포별을 불러 최씨 형제들이 한 말을 전하면서 그의 의견을 물었다. 노포별이 듣고 말했다.

「최씨 집안의 분란은 경씨 집안의 경사입니다.」

경봉은 노포별의 말에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최씨 형제들이 경봉을 찾아와서 또다시 동곽언과 당무구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놓았다. 경봉이 두 사람을 부추기며 말했다.

「그대들이 만약에 두 사람을 없애기 위해 손을 쓰겠다고 한다면 내 마땅히 갑사를 빌려주어 돕겠다.」

최씨 형제가 허락하자 경봉은 군사들 중에서 가려 뽑은 정예로운 갑사 백 명을 각종 병장기를 들려서 최씨 형제들에게 주었다. 최씨 형제들이 크게 기뻐하며 밤이 되기를 기다려 자기 집의 가정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게 해서 자기 아버지가 거하고 있는 최씨부 근처에 여기저기에 잠복시키고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최씨 형제들은 동곽언과 당무구가 평소에는 언제나 최저에게 들려 아침 문안을 드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형제는 최씨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이 나타나자 매복하고 있던 갑병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달려들어 극으로 무수히 찔러서 죽여 육젓을 만들어 버렸다. 최씨부 대문 앞에서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최저는 당황한 나머지 급히 측근을 불러 수레를 대령하도록 했다. 그러나 수레를 모는 노복들은 변란에 놀라 모두 도망쳐 숨어 버리고 단지 말을 돌보고 있던 어인(圉人)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최저는 할 수 없이 어인에게 명하여 수레를 내오라고 명하고 어린 동자를 어자로 삼아 경봉의 집으로 달려갔다. 최저가 경봉을 보더니 곡을 하면서 집안에서 변란이 났음을 호소하였다. 경봉이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면서 놀래는 표정으로 말했다.

「최씨와 경씨 집안은 비록 동성은 아니지만 실은 한 집안이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식놈들이 어찌 감히 하늘 높은 줄 모른단 말입니까? 경께서 만약 그들을 토벌하시겠다면 내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하여 도와 드리겠습니다.」

최저는 경봉이 진심으로 자기를 도우려한다고 믿었다. 최저가 경봉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말했다.

「만약 저 두 아들놈을 없애버리고 최씨 집안을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내가 명에게 좌상을 부친의 예로써 대하라고 이르겠소.」

경봉이 즉시 자기 집의 가갑을 모두 끌어 모은 후에 노포별에게 인솔하게 하고는 따로 그를 불러 은밀히 당부했다. 경봉에게서 밀명을 받은 노포별이 갑사들을 끌고 최저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갑사들을 이끌고 다가오는 노포별의 모습을 본 최씨 형제들은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 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려고 하였다. 노포별이 두 사람을 유인하게 위해 경봉에게서 지시 받은 대로 말했다.

「저는 좌상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대들을 돕기 위해서지 해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최씨 형제들이 말했다.

「그렇다면 최명이란 놈을 없애 버리려고 왔습니까?」

「들어가서 말씀 드리겠소!」

최씨 형제들이 최씨부의 대문을 열자 노포별과 갑사들이 대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최씨 형제들은 노포별이 이끌고 온 정예로운 갑사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최성과 최강이 노포별을 향하여 물었다.

「좌상께서 뭐라고 명을 내리셨소?」

「좌상이 그대들 부친의 간청을 받아들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 목을 베어 오라고 하셨다.」

노포별이 갑사들에게 큰 소리로 호령하였다.

「빨리 손을 써서 저 두 놈들의 목을 베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

최성과 최명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그들의 목은 땅에 떨어져 버렸다. 노포별이 갑사들을 풀어 최씨부를 뒤져 그 안에 있는 모든 재물과 거마와 복식 및 제기 등을 하나도 남김없이 노략질하여 수레에 실은 후에, 다시 대문과 집을 모조리 부셔 버렸다. 당강이 내실에 있다가 놀라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단지 최명만이 변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밖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화가 그의 몸에 미치지 않고 있었다. 노포별이 최성과 최강 형제의 목을 수레에 메달고서 돌아와 최저에게 복명 하였다. 최저가 두 아들의 목을 보더니 한편으로는 분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였다. 최저가 노포별에게 물었다.

「혹시 내실을 놀라게 하지나 않았는가?」

「부인은 그때 마침 잠이 깊이 드시어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최저가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띄우며 경봉을 향해 말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저 어린 동자가 수레를 모는데 서투르니 수레를 잘 모는 어자 한 사람만 내주기 바라오.」

노포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상국을 위해 수레를 몰겠습니다.」

최저가 경봉을 향하여 재삼 감사의 말을 올리고 수레에 올라 경봉과 헤어졌다. 최저가 이윽고 자기의 집 앞에 당도하여 쳐다보니 대문이 크게 열려 있고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중당(中堂)을 거쳐 내실로 들어갔는데 창문은 모두 떨어져 있었고 방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 텅텅 비어 있었다. 대들보에 목매달려 걸려 있던 당강은 그때까지 밧줄을 끌러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최저가 놀라 혼비백산하여 노포별을 불러 그 까닭을 물어 보려 했으나 노포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온 집안을 뒤져 최명을 찾았으나 그 역시 발견할 수가 없었다. 최저가 땅 위로 주저앉으며 목놓아 큰소리로 통곡하면서 허공을 향해 외쳤다.

「내가 오늘 경봉이라는 놈에게 속아 온 집안이 절단이 나 버렸구나! 어찌 내가 이 세상을 살 수 있으리오!」

최저도 역시 당강의 옆에서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 최저는 당한 참화는 실로 처참하였다. 염옹이 시를 지어 최저의 일을 한탄했다.

옛날에는 마음을 같이하여 반역을 꾀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다투어 서로 싸우는구나!

최저의 집안이 처참하게 망했다고 말하지 말라!

간웅들 중 곱게 죽는 자들이 몇이나 있는가?

昔日同心起逆戎(석일동심기역융)

今朝相軋便相攻(금조상알편상공)

莫言崔杼家門慘(막언최저가문참)

幾個奸雄得善終(기개간웅득선종)

최씨 집안에서 혼자 남게 된 최명은 밤이 되자 폐허가 되어 버린 자기 부중에 잠입하여 최저와 당강의 시신을 거두어 관 하나에 넣어, 수레에 싣고 성 밖에 있는 최씨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조상들 무덤 중 한 개를 파고 구덩이를 만든 후에 관을 묻고 다시 흙으로 덮어 예전처럼 보이게 하였다. 단지 마구간 일을 보던 어인 한 사람만이 최명의 일을 거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랐다. 일을 마치자 최명은 노나라로 도망쳐 그곳에서 살았다.

한편 경봉은 경공에게 최저를 토벌했다고 고하며 말했다.

「최저가 실은 선군을 시해하여 제가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공은 단지「예, 예」소리만 연발하며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후로 경봉이 혼자서 제나라의 정사를 오로지했다. 경봉은 경공의 명으로 송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진수무(陳須无)를 데려왔다. 제나라에 돌아온 진수무가 나이를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자 그 아들 진무우(陳无宇)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주영왕 26년 기원전 546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6. 神箭殉國(신전순국)

- 서구(舒鳩)⑧의 싸움에서 순국한 신전장군 양요기 -

그 동안 오와 초 두 나라는 수차에 걸쳐 서로 치고 받고 싸우다가 초강왕 때에 이르자 드디어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수군을 대대적으로 훈련시킨 후에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오나라에도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나라의 수군은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오왕은 여제로 왕위에 오른 지 2년 째 되는 해였다. 그는 싸움에 임하여 용맹스럽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초나라의 수군이 오나라의 영토를 침략해오자 여제는 상국 굴호용(屈狐庸)을 시켜 초나라의 속국 서구(舒鳩)를 회유하여 초나라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 이어 서구가 반기를 들자 초나라 영윤 굴건은 군사를 이끌고 서구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나섰다. 신전장군(神箭將軍) 양요기가 자청하여 선봉을 청했다. 굴건이 만류하며 말했다.

「장군은 이미 나이가 들어 연만하십니다. 서구와 같은 작은 나라를 정벌하러 가는데 어찌 이기지 못할까 근심을 하겠습니까? 노장군은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시고 몸을 보전하십시오.」

「우리가 서구를 공격하면 오나라는 반드시 서구를 구하기 위해 원군을 보낼 것이요. 내가 수차에 걸쳐 오나라 군사들을 물리친 경험이 있으니 오군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오! 내가 이번에 꼭 종군하고 싶으니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원이 없겠소!」

굴건은 양요기가 ‘죽어도 원이 없겠다.’라고 하는 말을 듣자 마음이 더욱 측은해져 허락을 못했다. 양요기가 거듭 청하며 말했다.

「나는 선왕께서 알아주시는 은혜를 입어 항상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으나 아직 내 몸을 묻을 만한 땅을 찾지 못해 그 일을 항상 한으로 여기고 있소! 근자에 이르러 나의 수염과 머리털은 변하여 이미 하얗게 세어 버렸고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창문 밑에 누워 병이라도 나서 허무하게 죽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중이오. 진실로 내가 하릴 없이 죽게 된다면 그것은 곧 영윤이 나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오.」

굴건은 양요기의 결심이 굳어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결국 그의 청을 허락하고는 대부 식환(息桓)으로 하여금 곁에서 돕게 했다. 양요기가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여 리성(離城)⑨에 당도하자 오왕의 동생 이매가 상국 굴호용과 같이 리성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식환은 굴건의 본대를 기다리자고 했으나 양요기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말했다.

「오나라 군사들은 수전에 강한데 지금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왔다. 오군은 활을 쏘면서 하는 육상전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들의 진영을 미처 갖추지 못한 틈을 타서 우리가 갑자기 급습하면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양요기는 활과 화살 다발을 들고 사졸들의 앞에 서서 적군을 향해 앞으로 진격했다. 양요기가 화살을 쏘면서 앞으로 나가는데 그 화살을 맞은 오나라 군사들은 어김없이 죽어 나갔다. 오나라 군사들이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다. 오군의 뒤를 추격하던 양요기는 굴호용을 만나자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나라를 배신한 놈아! 네 놈이 무슨 염치로 나를 쳐다 볼 수 있느냐?」

양요기가 활을 쏘려고 화살을 재는데 수레를 타고 있던 굴호용이 말을 쏜살같이 몰아 앞으로 달려가 사라져 버렸다. 그의 행동은 마치 바람과 같았다. 양요기가 놀라며 말했다.

「오나라 군사들은 병거도 잘 모는구나! 활을 빨리 쏠 것을 그랬구나!」

양요기가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사면에서 오나라의 철엽거(鐵葉車)가 달려와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 양요기는 철엽거 속에 갇혀 꼼짝 못하게 되었다. 철엽거를 타고 있는 오나라 군사들은 모두가 강남에서 가려 뽑은 활쏘기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오나라 군사들이 양요기를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양요기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옛날 초군이 언릉에서 당진군과 싸울 때 양요기가 활솜씨를 너무 뽐내자 초공왕은 ‘활솜씨를 너무 과신하면 필시 활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되는 법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양요기는 과연 초공왕의 예언대로 활에 맞아 전장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패잔병을 수습한 식환은 굴건의 본대로 돌아와 양요기의 죽음과 패전을 보고했다. 굴건이 한탄하며 말했다.

「양숙은 일부러 죽을 곳을 찾아 전장에 나섰음이다!」

굴건은 즉시 정예군사들을 서산(栖山)에 매복시키고 별장 자강(子疆)을 시켜 자신의 가병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오나라 군사들과 교전하면서 유인해 오도록 시시했다. 오나라 장수와 미처 10여 합도 교봉을 나누기 전에 자강은 못이기는 척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굴호용이 혹시 복병이 있을 까 의심하여 추격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매는 높은 곳에 올라가 먼 앞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보이지 않으니 모두 철수한 것 같다!」

이매가 굴호용의 말을 듣지 않고 초군의 뒤를 추격하여 앞으로 진격하다가 서산 어귀에 이르자 도망가던 자강이 뒤돌아서서 반격함과 동시에 서산 밑에 매복하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오나라 군사들을 협공해 왔다. 이매는 초군의 포위망 속에서 돌격을 감행하여 포위망 밖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겹겹이 둘러싼 초군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굴호용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초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이매를 구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싸움에서 패하여 돌아갔다. 굴건은 서구를 멸망시켰다.

7. 上下其手(상하기수)

- 손을 위아래로 향해 지체 높은 사람에게 아첨한 초나라의 백주리(伯州梨) -

다음해 즉 주영왕 27년 기원전 545년, 초강왕은 다시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섬진에 원군을 청했다. 섬진의 경공은 그의 동생 공자침(公子鍼)을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초나라를 돕게 했다. 오나라가 많은 군사로 강구(江口)를 지켰기 때문에 초와 섬진의 연합군은 수로가 막혀 진격할 수 없었다. 초나라는 일단 일으킨 정벌군의 방향을 정나라로 돌렸다. 정나라가 초나라를 배반하고 오랫동안 당진을 받들고 있다는 이유로 즉시 군사를 돌려 정나라로 향하게 했다. 초나라 장수 천봉수(穿封戍)는 정나라 진영으로 쳐들어갔다가 정나라의 장수 황힐(黃頡)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때 강왕의 동생 공자위(公子圍)가 전장에 나왔다가 천봉수에 의해 포로로 잡힌 황힐을 보고 탈취하여 자기의 전공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천봉수는 공자위에게 정나라 포로를 넘겨주지 않았다. 공자위는 오히려 강왕을 찾아가 호소했다.

「내가 황힐을 사로잡아 데리고 오는데 천봉수란 놈이 나에게서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천봉수가 황힐을 묶어서 데려와 강왕에게 바치면서 그도 역시 공자위가 자기의 공을 가로채려 했다고 고했다. 강왕은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태재 백주리(伯州犁)에게 판결을 맡겼다. 백주리가 말했다.

「정나라의 포로는 미미한 시정 사람이 아니라 고귀한 신분의 대부입니다. 그에게 물어 봐도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주리가 황힐을 뜰 안으로 데려와 단 아래 세우고 자기는 그의 오른쪽에 서고 공자위와 백주리는 그 왼쪽에 서게 하였다. 백주리가 두 손을 들어 위를 가리키면서 황힐을 보며 말했다.

「이쪽에 계시는 분은 공자위라고 하시는데 우리 대왕의 동생 되는 분이시다.」

다시 두 손을 들어 아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에 계시는 또 한 분은 천봉수라 하는데 곧 우리의 방성(方城)⑩ 교외의 현을 다스리는 수장이다. 이 두 분들 중 누구에게 사로잡혔는가? 솔직하게 대답하기 바란다.」

백주리가 말할 때 공자위를 가리킬 때는 손을 위를 향하고 천봉수를 가리킬 때는 손을 밑으로 향하고 있음을 본 황힐은 백주리가 공자위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황힐이 눈을 크게 뜨더니 공자위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이 힐은 저 분 공자님을 만나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천봉수가 옆에 서 있다가 듣고 대노하여 뜰 가상 자리의 무기집에서 과를 꺼내들고 공자위를 찔러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공자위가 놀라 달아나자 천봉수가 계속해서 그 뒤를 쫓아갔으나 잡지 못했다. 백주리가 다시 그들의 뒤를 따라가서 두 사람을 달래어 다시 뜰 안으로 데려왔다. 강왕에게 그 사연을 고하고는 그 공을 둘로 나누어 두 사람에게 주고 다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화해를 하도록 했다. 이 일은 백주리가 공자위를 가리킬 때는 손을 위로하고 천봉수를 가리킬 때는 손을 밑으로 하여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사람의 잘못을 왜곡시켜 비호한다[순사곡비(徇私曲庇)].’를 뜻하는 ‘상하기수(上下其手)’라는 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후에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이를 두고 한탄하였다.

참수나 금장의 공적은 반드시 진위를 가려야 하거늘

은밀히 귀천을 알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아첨했다.

막사 안의 논공행상이 모두가 이와 같이 행해졌으니

세상에 그 누가 기꺼이 공정한 도리를 지키겠는가?

斬擒功績辨虛眞(참금공적변허진)

私用機門媚貴臣(사용기문미귀신)

幕府計功多類此(막부계공다류차)

肯持公道是何人(긍지공도시하인)

8. 季札論音(계찰논음)

- 중원제후국들의 노래소리를 듣고 국운을 예언한 계찰 -

한편 오나라의 이웃에 월(越)⑪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월나라 군주의 작위는 자작이었다. 하나라 우왕(禹王)의 후예 중 무여(無余) 때에 이곳에 봉해지고 하조(夏朝) 때부터 주조(周朝)를 거쳐 모두 30대를 지나와 지금 윤상(允常)의 대에 이르게 되었다. 윤상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부지런하여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월나라는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오나라가 이를 두려워하여 여제가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는 해 즉 기원전 544년에 군사를 동원하여 월나라를 정벌했다. 여제는 월나라의 종인(宗人)⑫을 붙잡아 와서 그 다리를 자른 후에 여황(余皇)이라는 큰 배의 문을 지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제가 배를 타고 놀다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월나라의 종인이 여제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자고 있던 그를 찔러 죽였다. 여제를 호종 했던 사람들이 달려와 종인을 죽였다. 여제의 뒤를 이어 오왕의 자리에 오른 이매는 나라의 정사를 모두 그의 동생 계찰(季札)에게 맡겼다. 전쟁을 억제하고 산업을 일으켜 백성들의 생활을 편하게 만든 계찰은 이어서 중원의 제후국들과 통호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나라를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다고 이매에게 상주했다. 이매가 계찰의 말을 따라 그를 중원제후국에게 친선사절로 보냈다.

먼저 노나라에 당도한 계찰은 악사들에게 주나라의 음악을 청해《주남(周南)》⑬과 《소남(召南)》⑭을 듣더니 말했다.

「아름답도다! 주왕조의 기초가 이미 다져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가 없구나! 그러나 곡 중에는 백성들이 근면하며 애쓰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구나!」

다시《패풍(邶風)》,《용풍(鄘風)》,《위풍(衛風)》⑮를 부르자 말했다.

「아름답구나! 깊고 그윽하도다! 근심에 차 있으나 곤궁하지 않다. 내가 들으니 위강숙(衛康叔)과 위무공(衛武公)⑯의 덕행이 이와 같다고 하더니 이 노래는 아마도 위(衛)나라의 노래가 아닌가?」

악사들이 《왕풍(王風)》을 노래했다.

「아름답도다! 그 마음은 비록 근심하나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것은 동쪽으로 옮겨 온 주나라의 노래가 아닌가?」

악사들이 계속해서《정풍(鄭風)》을 노래했다.

「노래의 성색이 매우 쇠약하니 국가의 정령이 까다로워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겠다. 아마도 이 나라가 제일 먼저 망하지 않겠는가?」

다시 악사들이 《제풍(齊風)》을 노래했다.

「참으로 아릅답구나! 음조가 넓고 웅장하니 깊고 멀구나! 진실로 대국의 기풍이 있구나! 동해에 있는 나라를 나타내니 아마도 강태공의 유풍이 아니겠는가? 국가의 앞날을 감히 뭐라고 예측할 수 없도다!」

《빈풍(豳風)》을 듣고 말했다.

「도량이 넓고 크며 마음을 편하고 거리낌 없이 만들어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으니 이것은 아마도 주공이 동쪽을 정벌할 때의 노래이겠다.」

악사들이 《진풍(秦風)》을 노래했다.

「이것은 중화의 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 중국화에 노력한다면 나라는 날이 갈수록 창대해지겠다. 창대하게 되면 지극한 경지까지 이르게 되어 능히 주왕조처럼 창업을 할 수 있겠다.」

《위풍(魏風)》을 노래했다.

「아름답구나! 가락의 곡조가 넓고 크구나! 또한 너그럽고 평화롭구나! 소박하고 평이하니 이와 같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 군주는 능히 명군이 되겠다.」

《당풍(唐風)》을 노래했다.

「사려하는 바가 깊구나! 이것은 아마도 도당씨(陶唐氏)의 유풍이겠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이 그 생각하는 바가 깊고 앞날을 멀리 내다보겠는가? 아름다운 덕을 지닌 사람의 후손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진풍(陳風)》을 연주하자 계찰이 듣고 말했다.

「나라에 좋은 군주가 없으니 어찌 나라가 능히 망하지 않고 오래도록 지킬 수 있겠는가?」

계속된 《회풍(鄶風)》 이하 다른 지방의 노래에 대해서는 더 이상 평론을 하지 않았다.

이어서 악사들이 《소아(小雅)》⑰를 노래했다.

「아름답도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 맺혔구나! 그러나 반역하지 않고 떠나지 않으며, 원망하나 말하지 않으니 그것은 주나라의 덕이 쇠미해졌을 때의 노래가 아닌가? 아마도 주나라 초기의 유풍들이 남아서이겠다.」

악사들이 계속해서 《대아(大雅)》를 연주하자 계찰이 말했다.

「관대하며 화목하다! 곡조가 잘 어울려 마음이 편안하다. 완곡하나 또한 강건하니 아마도 문왕의 덕행이 배어 있기 때문인 것이 아닌가?」

《송(頌)》⑱을 연주하자 말했다.

「노래가 지극한 경지에 달했다. 곧고 힘차나 거만하거나 불손하지 않다.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지나치지 않으며 복잡하지 않다. 박자가 긴밀하나 절박하거나 다급하지 않다. 곡조는 느릿하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변화가 풍부하나 어지럽지 않다. 곡조가 반복되어 싫증이 나지 않고 애달프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즐겁지만 지나치자 않아 방종하지 않다. 그 소리는 마치 성인의 지혜와 같아 아무리 사용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겠고, 소리가 잠시 쉬어가더라고 아주 멈추지 않는다. 오성(五聲)⑲과 팔풍(八風)⑳이 조화를 이루어 어울리면서도 박자에는 절도가 있고 선율에는 법도가 있으니 이 음악들은 모두가 성인들의 덕이 배어 있구나!」

이어서 계찰이 《상소(象箾)》㉑와 《남약(南籥)》㉒이라는 무곡(舞曲)을 감상하고 나서 말했다.

「아름답구나! 그러나 어딘가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구나!」

계속해서《대무(大武)》㉓를 관람하고 말했다.

「참으로 아름답도다! 주나라가 번성한 모습은 마치 이와 같았으리라!」

《소호(箾濩)》㉔가 뒤를 이어 계속해서 연주되자 계찰이 감상을 말했다.

「그렇게 홍대(弘大)한 덕을 베푼 탕임금과 같은 성인도 여전히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성인이 된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계찰은 계속해서《대하(大夏)》㉕를 듣고 말했다.

「아름답도다! 백성을 위해 그렇게 고생을 했음에도 스스로는 덕을 베푼 바가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우임금이 아니고서 그 누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초소(招箾)》㉖를 듣고 말했다.

「덕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도다! 참으로 위대하도다! 마치 세상만물을 덮는 하늘과 같고, 세상만물을 감싸 안는 땅과 같도다! 비록 지극한 덕이 있다해도 이보다 더한 덕은 없을 것이다! 이제 춤과 음악을 더 볼 필요가 없겠다. 설사 다른 음악이 있다해도 내가 어찌 감히 더 이상의 음악을 구할 수 있으리오!」

계찰이 노나라를 떠나 사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나라로 갔다. 안영(晏嬰)을 만나 권고했다.

「대부는 빨리 그대의 봉읍과 관직을 내놓으시오. 봉읍과 관직이 없어야만 대부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환난에서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오. 제나라의 정권은 장차 귀속되는 데가 따로 있을 것이오. 귀속되기 전까지는 환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오.」

안영은 계찰의 말을 쫓아 진환자(陳桓子)㉗를 통해 그의 봉읍과 관직을 돌려주어 후에 일어난 란씨와 고씨 사이에 일어난 환란㉘에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계찰이 다시 제나라를 떠나 사자로 정나라에 갔다. 자산(子産)을 보자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이 말했다.

「지금 정나라의 집정㉙이 사치하고 방종하니 장차 내란이 일어날 것이오. 내란이 진정되면 정나라의 정권은 그대의 손에 들어갈 것이오. 그대가 정나라의 집정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부디 예에 따라 신중한 마음으로 임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정나라는 망하게 되오.」

계찰이 정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들어가, 거원(蘧瑗)㉚, 사구(史狗)㉛, 사추(史鰌)㉜, 공자형(公子荊)㉝, 공숙발(公叔發)㉞, 공자조(公子朝)㉟ 등의 많은 현자들을 만나 기뻐하며 말했다.

「위나라에 이렇듯 군자가 많으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이 없겠구나!」㊱

계찰이 다시 위나라를 떠나 당진국으로 가던 중에 숙읍(宿邑)㊲에 이르러 역사에 머무는데 종으로 연주하는 음악소리를 듣고 말했다.

「참으로 괴이하도다! 내가 듣기에 재주가 있으나 덕이 없으면 반드시 그 몸에 화가 미친다고 했다. 이곳의 대부 손문자(孫文子)㊳는 그 군주에게 죄를 지었음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는 것도 부족할 처지일 텐데 어떻게 오히려 음악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손문자가 이렇듯 근신하지 않고 지내는 태도는 마치 언제 뜯길지 모르는 막사 위의 제비둥지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자기로 인해 원통하게 죽은 군주의 시신이 담긴 관이 아직 안장도 되지 않았는데 어찌 음악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계찰은 말을 마치고 곧바로 그곳을 떠났다. 손문자가 그 말을 듣고 죽을 때까지 금(琴)과 슬(瑟)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계찰이 당진국에 들러 조문자(趙文子) 무(武), 한선자(韓宣子) 기(起)㊴, 위헌자(魏獻子) 서(舒)㊵를 만나 말했다.

「당진국의 정권은 먼 훗날 아마도 당신들 세 가문에 돌아갈 것이오.」

이어서 계찰이 당진국을 떠나려고 하면서 숙향(叔向)을 만나 말했다.

「그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고 행하시오. 당진국의 국군은 사치하고 방종하나 좋은 신하들이 밑에 많고 또한 대부들은 부유하나 비록 먼 훗날이지만 나라의 국권은 장차 한위조(韓魏趙) 삼가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오. 당신은 사람됨이 강직하니 반드시 사려 깊게 행동하여 그 화를 면하시오.」

10, 계찰괘검(季札掛劍)

- 보검을 서자의 무덤에 바쳐 죽은 사람과도 약속을 지킨 계찰 -

계찰이 중원의 제후국으로 사신의 임무를 띠고 북쪽으로 출발할 때 맨 처음 서국(徐國)㊶의 군주를 만났다. 서국의 군주가 계찰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계찰이 마음속으로 서군의 뜻을 알았으나 중원의 제후국을 들려 사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검을 서군에게 주지 못했다. 다시 귀국길에 올라 서국을 지나가게 되었으나 그 때는 서군이 이미 죽고 난 후였다. 그래서 그는 서군의 무덤을 찾아가 허리에 찬 보검을 풀어 무덤 주위의 나무 가지 위에 걸어 놓고 오나라로의 귀국 길에 올랐다. 계찰의 종자가 말했다.

「서군이 이미 죽었는데 그 보검을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계찰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이미 보검을 서군에게 주기로 마음속으로 허락했는데 지금 비록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느냐?」

《제67회로 계속》

주석

①瓦罐不離井上破(와관불리정상파), 將軍多在陣前亡(장군다재진전망).

②미병지희(弥兵之會) : 원래 열국의 제후들이 군사를 거느리지 않고 비무장 수행원들만 대동하여 모이는 회맹을 의미했으나 후에 당진과 초 두 나라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남북간의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만나는 회맹을 의미하게 되었다.

③돈(頓) : 지금의 하남성 상수현(商水縣) 동남에 있었던 소 제후국. 후에 진(陳)나라의 압박에 의해 하남성 항성(項城)으로 이주했다. 주경왕(周敬王)24년 기원전 496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땅은 병합되었다.

④춘추와 서주 때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부양시(阜陽市)에 있었던 귀성(歸姓) 제후국. 하남성을 가로 질러 안휘성에서 회수(淮水)와 만나는 영수(穎水)의 하류 강안에 있었다. 주경왕(周敬王) 24년 기원전 496년 초소왕(楚昭王)에 의해 멸망당했다.

⑤심(沈) : 지금의 하남성 평여(平輿)에 있었던 희성(姬姓) 제후국. 주문왕의 아들 계재(季載)가 처음으로 봉해진 나라였으나 춘추시대 초반에 채나라에 멸망했다가 다시 초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⑥미(麋) : 지금의 하남성과 접경 지역인 섬서성 백하현(白河縣) 부근에 있었던 한수(漢水) 강안의 소 제후국이다.

⑦최읍(崔邑) : 지금의 산동성 제양현(濟陽縣) 동 약 10키로에 있었던 고을 이름. 제양현은 산동성의 성도(省都)인 제남시(濟南市)에서 북쪽으로 50키로 떨어진 곳에 있다.

⑧서구(舒鳩) : 지금의 안휘성 합비시(合肥市) 서남의 서성시(舒城市)부근에 있었던 춘추 때 초나라 령의 고을이었다.

⑨리성(離城) :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동쪽의 임회진(臨淮鎭)의 종리(鐘離)를 말한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음.

⑩방성(方城)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에 있었던 신성(申城)의 동북 약 30키로에 있었던 초나라의 국경도시. 이곳에 관문을 설치하여 중원국들의 침입을 막았다. 전국시대에 이르자 초나라는 중원국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장성을 쌓았다.

⑪월(越) :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선조는 우(禹)임금의 후예로 하후제(夏后帝) 소강(小康)의 서자다.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는 단발에 몸에는 풀잎으로 엮은 옷을 두르고 백성들을 끌어 모아 성읍을 이루며 살았다. 그 후 20세가 지나자 윤상(允常)의 대에 이르렀다. 윤상이 오왕(吳王) 합려(闔閭)와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웠다. 윤상이 죽고 그 아들이 뒤를 이었다. 이가 월왕 구천이다.

⑫종인(宗人) : 종백(宗伯)에 해당하는 월나라의 관직으로 종실의 사무를 관장했던 육경의 하나다.

⑬주남(周南) : 주공단(周公旦)이 남방으로 원정나갔다가 채집한 고대 중국의 남방에서 불리웠던 시가집으로 시경의 맨 처음 장이다.

⑭소남(召南) : 주공과 같이 남방으로 원정 나간 소공(召公) 석(奭)이 모은 시가다. 소공은 후에 연(燕)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소공의 덕을 칭송한 감당(甘棠)이라는 시가가 수록되어 있다.

⑮패(邶), 용(鄘), 위(衛) :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그 땅에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봉했다. 이어서 무왕이 죽고 주공단(周公旦)이 섭정을 행할 때 은나라의 반란을 우려한 주공(周公)은 그 땅을 삼분하여 그의 세 동생들에게 감시를 하게 하고 그들을 삼감(三監)이라 불렀다. 삼감은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이다. 그러나 삼감은 주공단이 주나라의 정사를 전단한다고 생각하여 무경 녹보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주공이 은나라의 반란을 진압하고 녹보와 관숙은 죽이고 채숙과 곽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했다. 이어서 은나라 유민들의 일부는 그들의 옛날 거주지였던 상 땅으로 옮기고 주왕의 서형이었던 미자개(微子開)를 봉한 다음 송(宋)이라 불렀다. 한 편 은나라의 옛 땅에는 주공의 동생 강숙(康叔)을 봉하고 이어서 패(邶)와 용(鄘) 땅은 위나라에 복속되었다.

⑯위무공(衛武公)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주선왕 16년 기원전 812년에 즉위하여 758년에 죽었다. 서주말 춘추 초기 때 위나라의 군주로 희성(姬姓)에 이름은 화(和)다. 리후(釐侯)의 아들이고 공백(共伯)의 동생이다. 주유왕(周幽王) 11년 견융(犬戎)이 쳐들어와 유왕을 살해하자 무공은 군사를 이끌고 호경으로 가서 주왕실을 보호했다. 평왕이 동천하여 낙읍으로 그 도성을 옮길 때 작위가 공(公)으로 올려졌다. 재위 52년 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⑰소아(小雅) : 시경의 한 편으로 아(雅)는 대아(大雅)와 소아로 구분되는데 공경대부가 위정자의 실정을 근심하고 비난한 시가가 수록되어있다. 소아는 향연에서 불렀던 노래이고, 대아는 군신들이 조당에서 국사를 논할 때 불렀던 노래이다.

⑱송(頌) : 송은 원래 제사에서 연주하는 노래이다. 따라서 조상의 공덕을 찬미하고 제사를 드리는 자손의 공손한 모습을 노래했으며, 또 제사에 참가한 제후를 칭송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송(周頌) 31편, 노송(魯頌) 4편, 상송(商頌) 5편, 모두 40편으로 구성되어있다.

⑲오성(五聲) :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다섯 음계를 말한다.

⑳팔풍(八風) : 팔방지풍의 약자로 여덟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총칭하는 말이다. 즉 팔방이란 동서남북, 동북, 동남, 서북, 서남 등의 방위를 뜻하며 그 바람이 불어오는 시기에 따라 입춘, 입하, 입추, 입동, 춘분, 추분, 하지, 동지의 8절기로 나누었다. 이에 중국 고대인들은 그 팔풍의 소리를 모방하여 음악을 작곡했다.

㉑상소(象箾) : 무공(武功)을 세우는 모습을 나타내는 춤곡으로 소(箾)는 춤추는 사람이 손에 쥐고 부는 퉁소를 말한다.

㉒남약(南籥) : 상전이 무공(武功)을 찬양한 춤곡인 반면, 남약은 문덕을 기리기 위한 춤곡이다. 약(籥)은 피리 모양의 관악기다.

㉓대무(大武) :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할 때 그의 무공(武功)을 기리기 위해 주공(周公)이 만든 무곡이다.

㉔소호(箾濩) : 상나라를 세운 탕(湯)임금이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한 공적을 찬양한 무곡.

㉕대하(大夏) : 하나라를 창건한 우(禹)임금의 덕을 찬양한 무곡.

㉖초소(招箾) : 소소(韶簫), 혹은 대소(大韶)라고도 하며 약칭하여 소(韶)라고 한다. 순임금이 요임금의 공덕을 찬미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며 공자가 제나라에 있을 때 그 태사(太師)에게서 이 곡을 듣고 진미(盡美)라고 했다가 다시 진선(盡善)이라고 하며 석 달 동안을 고기 맛을 모르고 지냈다고 했다.

㉗진환자(陳桓子) : 춘추 때 제나라의 대신 진무우(陳無宇)를 말한다. 무예가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다. 제장공(齊庄公)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장공을 시해한 최저(崔杼)를 경봉(慶封)이 죽이고 제나라의 정권을 오로지 하자 제경공(齊景公) 3년 그의 부친 진문자(陳文子) 진수무(陳須無)와 함께, 포씨(鮑氏), 고씨(高氏), 란씨(欒氏) 등이 힘을 합하여 경봉을 공격했다. 경봉은 삼가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노나라로 도망쳤다가 다시 오나라로 갔다. 그 부친 진수무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대신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잡았다. 봉지의 백성들로부터 부세를 걷을 때는 작은되로, 곡식을 꾸어 줄 때는 큰되로 하여 백성들의 인심을 사기 시작해 그의 5대 손인 전화(田和) 대에 이르러 강씨의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전씨의 나라로 만들었다.

㉘란고지란(欒高之亂) : 좌전 소공10년 기사에 제나라의 란씨(欒氏)와 고씨(高氏) 두 종족과 진씨(陳氏)와 포씨(鮑氏) 두 종족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안영(晏嬰) 진과 포 두 종족의 편을 들어 란을 진압했다. 이에 란고 두 종족은 노나라로 망명했다. (연의 68회)

㉙정나라의 당시 집권자 백유(伯有) 양소(良宵)를 말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인 연의 67회 참조

㉚거원(蘧瑗) : 원(瑗)은 이름이고 자는 백옥(伯玉)이다. 춘추 때 위나라 대부로 위헌공(衛獻公) 18년 기원전 559년 헌공이 그 신하에게 쫓겨나자 그도 란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위나라에 돌아와 위상공(衛殤公), 위양공(衛襄公)을 모시며 어진 이름을 얻었다. 영공이 서자 사어(史魚)의 추천으로 다시 조정에 나와 영공의 총애를 받았다. 오나라의 계찰(季札)이 중원을 유람하기 위해 위나라에 들려 「 거백옥이야 말로 군자로다!「라고 말했다.」공자와 교유하였고 공자 논어에 두 번 나온다. 처음은 헌문(獻文) 26편에 나오고 두 번 째는 위영공 6편에 ‘ 군자로다,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에 나아가고, 도가 없을 때는 거두어 물러나는 구나!(君子再擧伯玉. 邦有道 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

㉛사구(史狗) : 춘추 때 위나라 사람으로 거원(蘧瑗) 및 사추(史鰌) 등과 함께 위나라의 어진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다.

㉜사추(史鰌) : 사어(史魚)라고도 하며 자가 자어(子魚)이다. 춘추 때 위나라의 사관으로 곧은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공자가어(孔子家語)란 책에 시간(屍諫)이란 고사가 전해진다. 사어가 병이 깊어 죽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위영공에게 거백옥의 현명함을 알고 자주 천거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고 오히려 불초한 미자하(彌子瑕)를 중용했다. 이에 자어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예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거든 시신을 창문 밑에 놓아두라고 유언했다. 영공이 조문을 와서 보고 괴이하게 여겼다. 그 자식으로부터 전말을 알게 된 영공은 마침내 미자하를 추방하고 거백옥을 등용했다. 즉 사어는 죽어서도 자신의 시신을 갖고 임금의 잘못을 간했다고 하는 말이 시간(屍諫)의 어원이다. 논어 위영공편에 공자가 칭송한 말이 있다. 子曰 直哉 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곧은 사람이여,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화살과 같이 곧았고, 도가 없을 때도 화살같이 곧았도다!’).

㉝공자형(公子荊) :춘추 때 위나라의 대부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22년에 죽었다. 희성(姬姓)에 이름은 형(荊)이고 자는 남초(南楚)다. 위헌공(衛獻公)의 아들로 당시 어진 이름으로 명성이 있었다. 공자가 논어 자로편에서 그를 「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曰苟合矣. 小有曰 苟完矣. 富有曰 苟美矣 (그는 살림살이를 잘했다. 처음 재신이 모이자 ‘ 약간 모았다.’라고 하더니, 조금 더 늘어나자 ‘ 대강 갖추었다.’라고 하였다. 부자가 되자 ‘ 그런대로 아름답다.)」라고 칭송했다. 기원전 522년 위나라 대부 제표(齊豹)가 란을 일으키자 그는 위영공 수레에 참승(驂乘)이 되어 외국으로 도망가다가 제표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㉞공숙발(公叔發) : 춘추 때 위나라 대부로 위헌공(衛獻公)의 손자다. 희성(姬姓)에 이름은 발(拔)이고 발(發)은 그의 자이며 시호는 공숙문자(公叔文子)다. 논어 헌문(憲文)에 공자가 공명가(公明賈)란 사람에게 공숙발이 「 不言, 不笑, 不取 (그분은 말씀이 없고 웃지도 않으며 재물을 받지 않는다.)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공명가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以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人不厭其取.(그 말을 전한 사람이 지나쳤습니다. 그 분은 때가 된 연후에야 말씀하심으로 사람들이 그 분의 말씀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즐거워할 만한 이치가 있은 연후에야 웃으심으로 남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것임을 아신 연후에야 재물을 받으심으로, 남들이 그 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㉟공자조(公子朝) : 춘추 때 위나라 대부로 희성(姬姓)에 이름은 조(朝)다. 위헌공의 아들로 주경왕 원년 기원전 544년 오나라의 계찰이 중원 제후국들을 주유할 때 그가 군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기원전 534년 위양공이 죽고 위영공이 새로 서자 그는 양공의 부인 선강(宣姜)과 사통했다. 주경왕 23년 기원전 522년 그 일이 탄로나자 죽음을 두려워한 공자조는 대부 제표(齊豹)와 작당하여 란을 일으켰으나 싸움에 패하고 당진국으로 달아났다. 다음 해인 기원전 521년 영공으로부터 사면을 받아 귀국하여 위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제와 당진의 군사들과 함께 반기를 든 송나라의 화(華)와 상(向) 두 종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일설에 의하면 계찰이 찬양한 공자조와 동일인이 아고 공손조(公孫朝)의 오기라 했다.

㊱계찰의 말은 위나라에는 현자들이 많아 나라가 오래 유지될 수 있다는 예언이다. 계찰이 중원 제후국에 사자의 임무를 띠고 방문한 해는 기원전 544년이고 그리고 100여년 후에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가 마침내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 중국은 통일되었으나 위나라만큼은 나라의 명맥을 계속 유지하다가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이세황제에 이르러서야 망했다. 즉 춘추 때 제후국들 중 위나라가 가장 오래 지탱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㊲숙읍(宿邑) : 위나라 대부 손림보(孫林父)의 식읍으로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북쪽에 있었다. 후에 손림보는 위나라를 배반하고 숙읍을 들어 당진에 바치고 그곳의 대부가 되었다. 손림보에 대한 이야기는 연의 제61회 참조.

㊳손문자 : 문자는 손림보(孫林父)의 시호다. 손림보가 그 군주인 위헌공을 공격하자 헌공은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쳤다. 손림보는 헌공의 사촌동생 표(剽)를 위후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위상공(衛殤公)이다.

㊴한선자(韓宣子)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14년에 죽었다. 춘추 때 당진국의 정경(正卿)으로 이름은 한기(韓起)다. 진도공 7년 기원전 566년에 당진국의 정경이 되어 그 봉읍을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沁陽縣) 부근으로 옮겨 그들의 근거지로 삼아 한씨들의 세력을 확장했다.

㊵위헌자(魏獻子) : 춘추 때 당진국의 정경으로 위서(魏舒)의 시호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09년에 죽었다. 위강(魏絳)의 손자로 진평공 때 대부로 임명되어 란영(欒盈)과 교분이 두터웠다. 후에 란영이 당시의 집정 범선자(范宣子) 개(匃)에 의해 축출당하자, 위서의 지원을 기대한 란영이 기원전 550년 자기들의 세력 근거지인 곡옥(曲沃)의 군사를 동원하여 당진의 도성인 강도(絳都)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가 범선자 범개의 아들 범앙에 의해 구금당함으로써 고립된 란영과 그 일족은 멸족을 당했다. 기원전 541년 순오(荀吳) 휘하의 장수가 되어 무종(無終)과 적인(狄人: 지금의 산서성 태원의 이민족)을 정벌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그곳의 지세가 험하여 전차전을 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전차를 모두 부수고 보병전을 전개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순오의 가신이 반대하며 허락하지 않자 그는 그 가신의 목을 베어 군중에 보이고 이어서 적인과의 싸움에서 대승했다. 후에 한선자의 뒤를 이어 정경이 되어 당진국의 공실 가문인 기씨(祁氏)와 양설씨(羊舌氏)를 멸족시키고 양가 소유의 봉읍인 10개 현을 몰수하여 위씨 가문의 서자 출신 중 10명의 현인을 천거하여 대부로 삼아 다스리도록 했다. 진경공(晉頃公)이 죽고 정공(定公)이 섰으나 계속해서 당진국의 정사를 맡았다.

㊶서국(徐國) : 서주 초에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강소성 사홍현(泗洪縣) 남쪽에 있었다. 고대 전설에 나오는 백익(伯益)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고도 하며 서주 초 때 서언왕(徐偃王)이 주나라에 반기를 들자 주목왕(周穆王)에 의해 멸망당했다. 후에 다시 복국되었다가 동주 주경왕(周敬王) 8년 기원전 512년 오왕 합려(闔閭)에 의해 망하고 그 땅은 오나라 영토에 합병되었다.

[평설]

황수(皇戍)가 추진한 미병(彌兵) 운동은 중국 고대 역사상 중요한 대사건이다. 미(彌)는 중지한다는 뜻이고, 병(兵)은 전쟁을 말한다. 즉 미병(彌兵)이라는 말은 전쟁을 중지하고 서로 강화조약을 맺는다는 뜻이다.

당진과 초의 패권 전쟁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그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팽팽하게 대치상태를 유지했다. 초나라는 공왕(共王 : 전590-560년)부터 강왕(康王 : 전559-545년) 대에 이르기 까지 쉴 새 없이 오나라로부터 침략을 받고 있었다. 초나라는 당진과 오가 연합하여 양면에서의 공격을 피하고, 오나라에 대한 대책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해 북방의 당진국과 수호를 맺고자 했다. 다른 한편 당진으로서는 수차례의 내란과 변경에서의 소란을 겪으면서 더욱이 초나라와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한 결과 국고가 바닥나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진문공(晉文公 : 전636-628년) 시대의 국력에 비해서도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초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어 몇 년 동안이나마 휴식을 취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당진과 초의 그와 같은 사정 하에서 기원전 546년 송나라의 황수(皇戍)가 초와 당진의 집정자들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하여 당진과 초의 두 나라 군주가 송나라에서 서로 회동하여 미병조약을 체결하라고 종용하자, 두 나라는 동의했다. 그 당시 당진과 초의 패권 쟁탈전의 결과 중원제후국들은 두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노(魯), 위(衛), 정(鄭) 3개 국은 당진에 속했고, 채(蔡), 진(陳), 허(許) 등은 초나라에 속하고 있었다.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던 송나라의 중재에 의해 당진과 초 두 나라는 정전협정을 맺었다. 당진이나 초나라에 속한 제후국들이 각기 그 맹주들에게 조현을 행하고 올리는 조공물은 절반 씩 나누기로 했다. 대국인 제(齊)와 섬진(陝秦) 등의 국가는 결맹에 참가한 국가 즉 당진과 초 두 나라와 같은 지위를 인정해서 당연히 초와 당진에 조빙(朝聘)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주(邾), 거(莒), 등(鄧), 설(薛) 등의 소국들은 당진의 세력권으로 들어갔으며, 돈(頓), 호(胡), 심(沈), 균(麇) 등의 소국은 초나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그 밖의 힘이 없는 소국들은 주변 국가의 부용국(附庸國)의 위치로 떨어졌다. 그와 같은 국가들의 등급 설정은 서주 시기처럼 되었으며 그런 등급구분은 당시 국제정치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 회의에서 초나라는 한결같이 그들이 중원제후국들의 맹주를 맡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에 당진국은 옛날의 전거를 인용해서 자기들은 주천자가 책봉한 패자라고 대항했다. 그러자 초나라도 주혜왕(周惠王)으로부터 패자로 책봉되었다고 반격했다. 회의의 진행 상황은 당진과 초가 이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에 오랫동안 중원의 맹주 역할을 했던 당진국이 초나라에게 양보함으로 정전협정은 체결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 해서 중소제후국들은 더욱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원래 진초 두 나라 중 한 나라를 택해 조공을 바쳐야 했으, 협정 후는 그것이 두 나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한 미병지회(彌兵之會)가 기원전 579년 송나라의 대부 화원(華元)에 의해 시도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진과 초 두 강대국은 좋거나 싫거나 함께 한다고 회맹을 열어 맹세를 행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4년 후에 분쟁이 일어나고 그 한 번의 분쟁은 30여 년 동안 계속되어 미병지회가지 계속된 것이다.

황수가 주창한 이때의 미병대회도 역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정전협정이 발효된 다음 해에 초강왕(楚康王)은 오나라를 정벌할 목적으로 섬진에게 출병을 요청했다가 그 창끝을 돌려 정나라를 침범함으로 해서 미병지회의 정전협정을 파기했다.

강대국들 끼리의 패권쟁탈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정전에 대한 기대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패권을 다투던 국가로서는 왕왕 정전협정은 그들이 다음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휴식기간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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