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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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6 이일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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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1:57:156466 
제60회. 分軍肆敵(분군사적), 三將鬪力(삼장투력)
양승국   (1644)
 제60회-기기원전 570년 구자지전 시의도와 초오정세도.jpg  (594.2K)   download :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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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60회 分軍肆敵 偪陽鬪力(분군사적 복양투력)

군사를 나누어 적군을 지치게 만든 순앵과

복양성 싸움에서 용력을 뽐낸 노나라의 세 장군

1. 悼公圖覇(도공도패)

- 패업을 도모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진도공 -

주간왕 13년, 기원전 572년 여름 4월에 초공왕은 우윤 공자임부의 계책을 받아들여 친히 대군을 인솔하여 정성공과 힘을 합하여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어석 등의 송나라 오대부들을 향도로 삼은 초군은 팽성(彭城)①을 공격하여 일거에 함락시켰다.

초공왕은 어석 등에게 전차 300승을 주어 팽성을 지키게 하고 회군을 하면서 당부했다.

「당진이 오나라와 국교를 맺어 왕래가 잦은데 이것은 초나라로서 참기 어려운 일이다. 팽성은 당진과 오나라가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내가 많은 군사를 주둔시켜 그대들을 돕게 하겠으니 이곳을 지키라! 이 땅은 앞으로 나아가면 송나라 땅을 빼앗아 그대들의 봉읍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물러나서 지키면 당진과 오 두 나라의 왕래를 막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그대들은 온 마음을 다해서 이곳을 지켜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라!」

초공왕은 오대부들을 팽성에 남겨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해 겨울 송나라 성공(成公)은 대부 노좌(老佐)에게 군사를 주어 팽성(彭城)을 공격하여 탈환하도록 명했다. 어석 등의 오대부들이 수비병을 지휘하여 송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싸워 노좌를 패퇴 시켰다. 팽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 영윤 공자영제가 초군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송군대장 노좌는 자기의 용맹을 뽐내기 위해 경솔하게 초군 진영 깊숙이 쳐들어갔다가 화살을 맞고 싸움 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영제가 승세를 타고 군사를 휘몰아 송나라 도성으로 쳐들어갔다. 송성공이 크게 놀라 우사 화원을 당진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했다. 당진의 중군원수 한궐이 도공에게 말했다.

「옛날 선군이신 문공(文公)께서는 송나라를 구원하고부터 패주(覇主)가 되셨습니다. 흥망성쇠의 때가 있으니 지금 군사를 한번 움직인다고 하면 다른 제후들도 출병 못한다고는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궐의 진언을 받아들인 진도공은 그 즉시 사자들을 각국에 보내 제후들로 하여금 군사를 징발하여 참전하도록 했다. 도공이 직접 대장 한궐, 순언, 란염 등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라 태곡(台谷)②이라는 곳에 이르러 진을 쳤다. 초장 공자영제는 당진의 구원병이 출동하여 팽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싸움을 피해 퇴각해 버렸다. 그 다음해 주간왕 14년, 기원전 571년에 당진의 도공이 송(宋), 노(魯), 위(衛), 조(曺), 거(莒), 주(邾), 등(滕), 설(薛) 등의 여덟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송나라의 오대부가 점령하고 있는 팽성을 포위했다. 송나라 대부 상수(向戍)가 사졸들을 여러 대의 초거 위에 오르게 해서 성루를 향해 외치게 했다.

「어석 등의 오대부들은 우리의 군주를 배반한 도적놈들이라 하늘이 용서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오늘 당도한 20만의 당진군도 너희들의 조그만 성을 밟아 깨트려 풀 한 포기도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하늘의 순리를 안다면 어찌하여 역적을 잡아 바치고 항복하여 무고하게 당하는 도륙을 면하지 않느냐?」

군사들이 초거를 타고 성 주위를 돌면서 계속 외쳤다. 이윽고 얼마 후에 어석 등의 잘못을 알게 된 팽성의 백성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팽성을 지키던 초나라 수비군의 수는 비록 많았지만 어석 등이 소흘히 대했음으로 아무도 힘을 다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당진의 도공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성을 수비하던 초군들은 모두가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한궐은 어석을 생포하고, 란염과 순언은 어부(魚府)를, 송나라 상수는 상유인(向爲人), 상대(向帶), 노중(魯仲)을, 노나라의 대부 중손멸(仲孫蔑)은 인주(鱗朱)를 잡아 각기 도공에게 바쳤다. 도공이 다섯 대부를 모두 참수에 처하고 그 족속들은 하수 동쪽의 호구(壺邱)③라는 땅에 이주시켜 살게 했다.

팽성을 탈환한 진도공은 승세를 타고 군사들을 정나라로 이동시켜 그 죄를 묻고자 했다. 초나라 우윤 임부(任夫)가 정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송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를 공격하고 있던 제후 연합군들이 다시 군사를 돌려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임부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물리쳐 초나라로 돌아갔다. 이에 중원의 제후국 연합군들도 각기 흩어져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 해에 주간왕이 죽고 세자 설(泄)이 주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주영왕(周靈王)이다. 영왕은 태어날 때부터 콧수염을 달고 나와서 주나라 사람들은 그를 자왕(髭王)이라고 불렀다. 자왕 원년은 기원전 572년이다. 이해 여름에 정나라 성공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었다가 병세가 위독하게 되자 공자비(公子騑)를 불러 당부의 말을 했다.

「초나라 임금이 우리나라를 구하려다가 한쪽 눈을 잃고 말았소. 나는 그 은혜를 감히 잊지 못하겠으니 내가 죽더라도 경들은 절대로 초나라에 등을 돌리지 마시오!」

정성공은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공자비 등이 세자 곤완(髡頑)을 받들어 정나라의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정희공(鄭僖公)이다. 정나라의 새 군주가 당진국에 복종하지 않자 진도공은 제후들을 척(戚)④이라는 곳에 모두 모이게 해서 정나라를 정벌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노나라 대부 중손멸(仲孫蔑)이 계책을 내 놓았다.

「정나라에서 제일 험한 땅은 호뢰(虎牢)⑤로써 초와 정 두 나라가 서로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입니다. 이곳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한 후에 군사들을 주둔시켜 압박을 가하면 정나라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초나라에서 하희와 함께 도망 쳐와 당진에서 대부의 직을 받아 벼슬살이를 하고 있던 무신도 계책을 내었다.

「초와 오 두 나라는 강수(江水)와 한수(漢水)로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신이 옛날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우리와 같이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조했습니다. 오나라가 여러 번 초나라의 동쪽에 있는 속국들을 침략하여 초나라가 시달림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시 사신을 보내 오나라로 하여금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한다면 초나라의 동쪽 국경은 오나라 때문에 소란스럽게 됩니다. 어찌 북쪽의 우리와 정나라를 놓고 다툴 수 있는 여유가 있겠습니까?」

도공은 두 사람의 계책을 모두 받아 들여 남과 북에서 양동작전을 펼치 시행하도록 했다. 그때 제나라 영공(靈公)은 자기 대신 세자 광(光)과 상경 최저(崔杼)를 함께 척 땅의 회맹에 참석시켜 당진의 명을 받들게 했다. 도공은 아홉 나라 제후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호뢰에다 큰 성을 쌓게 하고 보루를 더 높이 했다. 제후국들 중에서 대국은 1000명, 소국은 500에서 300명 씩 군사들을 차출하여 호뢰성을 굳게 지키도록 했다. 정희공이 과연 두려워하여 당진에 수호사절을 보냈다. 도공은 정나라의 수호의 청을 허락하고 곧바로 본국의 신강성으로 귀환했다.

2. 外擧不避仇 內擧不避親(외거불피구 내거불피친)

- 밖의 원수나 집안의 아들을 가리지 않고 인재라면 천거했던 기해(祁奚) -

그때 중군정위(中軍正尉)를 맡고 있던 기해가 나이 칠십이 넘어 은퇴를 하겠다고 고했다. 도공이 기해에게 그 후임에 대해 물었다.

「경을 대신할 사람을 천거해 주기 바랍니다.」

「해호(解狐)가 가할 줄 아룁니다.」

「내가 듣기에 해호는 경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던데 어찌하여 그를 추천하시오?」

「주군께서는 저를 대신할 사람을 물으셨지 저의 원수에 대해 물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도공이 즉시 해호를 기해의 후임으로 임명했으나 관직에 부임도 하기 전에 갑자기 폭질로 죽고 말았다. 기해를 다시 부른 도공이 물었다.

「해호 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기오(祁午)라면 능히 직책을 다할 수 있습니다.」

「기오는 경의 아들이 아닙니까?」

「주공께서는 해호의 후임에 대해 물으셨지 저의 아들에 대해 물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군부위를 맡고 있던 양설직(羊舌職)마저도 죽고 없습니다. 경이 차제에 설직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도 한 명 천거해 주기 바랍니다.」

「양설직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는데 각각 적(赤)과 힐(肹)⑥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어질어서 현인이라고 할 만합니다. 주군께서 그 형제 중 한 사람을 불러 양설직의 일을 맡기십시오.」

도공이 기해의 말을 쫓아 기오를 중군정위로 하고 양설적을 부위로 임명했다. 당진의 모든 대소 신료들은 도공의 행위에 대해 기뻐하며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3. 鳩玆之戰(구자지전)

- 구자에서 시작되는 초오(楚吳)의 백년전쟁 -

한편 무신(巫臣)의 아들 무호용(巫狐庸)은 도공의 명을 받아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그는 오왕 수몽(壽夢)을 만나 오나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청했다. 수몽이 무호용의 청을 받아들여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세자 제번(諸樊)을 대장으로 삼아 강구(江口)에서 수군을 훈련시켰다. 초나라 첩자가 이 사실을 알고 돌아와 영윤 공자영제에게 보고했다. 영제가 공왕에게 오나라에 대한 대책을 말했다.

「지금까지 오나라의 군사가 초나라 강역을 침범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한 번만이라도 우리 강역을 침범하게 내버려두면 후에 반드시 다시 쳐들어 올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오나라를 정벌하여 그 후환의 뿌리를 뽑아버려야만 우리의 동쪽 변경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영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공왕은 수병을 모집하여 사열한 후에 정예병 2만 명을 뽑아 공자영제에게 주어 오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영제가 이끄는 초나라의 수군은 장강의 물길을 타고 내려가 구자(鳩玆)⑦를 점령한 후에 잠시 머물러 군사를 재정비하여 계속해서 오나라 땅 깊숙히 진격하려고 했다. 부장으로 있던 사납고 용감한 장수 등요(鄧廖)가 영제를 찾아와 말했다.

「장강은 물살이 세차서 나아가기는 쉽지만 물러 나오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소장에게 얼마의 군사를 떼어 주시면 먼저 진군하여 싸움에서 이길 경우는 물론 오도(吳都)를 향해 진격을 계속하겠지만 싸움에 질 경우에도 크게 꺾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수께서는 학산기(郝山磯)⑧에 주둔하고 계시다가 기회를 보아 본진의 군사를 움직이시면 만전을 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영제가 등요의 계책을 따라 먼저 갑병 300명과 명주 전포로 무장한 군사 3000명을 내주었다. 등요에게 내 준 초나라의 군사들은 모두가 용감하고 힘이 장사여서 혼자서 열 명이라도 당해 낼 수 있는 정예병들이었다. 초나라의 크고 작은 전투선 100여 척이 일성포향을 울리면서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 동쪽을 바라보고 나아갔다. 그 사이 오나라 정탐선은 구자의 함락 소식을 가지고 돌아가 세자 제번에게 초나라의 침입을 보고했다. 제번이 듣고 말했다.

「구자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초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동진해 올 것이다. 그에 대한 준비를 해야 되겠다.」

제번은 즉시 그이 첫째동생 이매(夷昧)를 시켜 전투선 수십 척을 이끌고 양산(梁山)⑨의 동쪽과 서쪽으로 적을 유인하라고 명하고 둘째 동생 여제(餘祭)에게는 채석기(采石磯)⑩에 매복시켰다. 이윽고 등요의 초군이 학산기를 지나자 양산 쪽에서 오나라의 전투선이 나타났다. 오나라의 함선을 발견한 초나라의 전투선들은 앞을 향해 전속력으로 맹렬히 돌진해 갔다. 초나라의 장수 이매는 싸우는 척하다가 곧바로 거짓 패하여 장강의 동쪽을 향해 도망쳤다. 등요가 이매를 추격하여 채석항(采石港) 부근에 당도하자 기다리고 있던 제번의 대군과 조우하여 곧바로 접전에 들어갔다. 쌍방의 함선이 어우러져 혼전에 들어가 본격적인 전투를 벌리기도 전에 채석항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며 여제의 복병이 뒤에서 협공을 해와 앞뒤에서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초나라 장수 등요는 얼굴에 화살을 세 발이나 맞았으나 뽑아버리고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그때 다시 초군을 유인했던 오나라의 이매가 몽동대함(艨艟大艦)⑪의 진로를 바꾸어 항진하여 초나라 함선의 전면에 나타났다. 이매 휘하의 병사들은 모두 오나라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병들이었다. 몽동대함을 타고 있었던 이매의 오군은 큰 창으로 초군의 함선을 짓찧어 그 중 대부분을 전복시켰다. 등요는 힘이 다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오나라 군사들에게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오나라 군사들이 등요를 죽였다. 초나라 군사들 중 살아서 도망간 자는 갑병(甲兵) 80명과 명주전포를 입은 군사 300명이 전부였다. 초군 대장 공자영제는 패전의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채석항 싸움에서 패전한 사실을 숨기고, 구자의 싸움에서 승리한 전공만을 상주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나라 세자 제번은 채석항 싸움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모든 오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진군하여 구자의 초나라 본영을 세차게 공격했다. 영제가 구자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여 초나라로 쫓겨 왔다. 구자는 다시 오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영제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병을 얻어서 초나라 도읍인 영도에 당도하기도 전에 중도에서 죽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를 노래했다.

누가 오인에게 전차전과 궁술을 가르쳤는가?

이로써 초나라의 동쪽 변경에서는 전화가 시작되었다.

초나라의 갑병이 포로가 되고 명장이 죽은 원인은

옛날 무신의 종족들을 무고하게 죽였기 때문이었다.

乘車射御敎吳人(승차사어교오인)

從此東方起戰塵(종차동방기전진)

組甲成禽名將死(조갑성금명장사)

當年錯著族巫臣(당년착저족무신)

4. 和戎五利(화융오리)

- 융족을 융화시켜 다섯 가지 이로움을 얻다. -

초공왕은 영제가 죽자 그 후임으로 우윤 임부(任夫)를 올려 영윤으로 삼았다. 임부는 천성이 탐욕스러워 초나라의 속국에 재물을 공공연히 요구했다. 진성공(陳成公)이 참지 못하고 원교(轅僑)를 당진에 사자로 보내 그 속국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당진의 도공은 여러 제후들을 계택(鷄澤)⑫이라는 곳에 모이게 하여 회맹을 행하고 다시 척읍(戚邑)으로 옮겨 재차 회맹했다. 오나라 군주 수몽도 척읍의 회합에 참석했다. 이로써 당진의 위세는 천하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초공왕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등지고 당진을 섬기게 된 이유를 알게 되자 분노하여 그 죄를 임부에게 물어 죽였다. 공왕은 임부의 동생 자낭(子囊) 공자정(公子貞)을 영윤으로 기용하여 그의 뒤를 잇게 했다. 이윽고 공왕은 군사를 대대적으로 사열하고 병거 500승을 동원하여 진(陳)나라 정벌 길에 나섰다. 그때가 기원전 569년 초공왕 22년으로써, 진나라에서는 성공(成公)이 죽고 세자 약(弱)이 그 뒤를 이어 진후(陳侯)의 자리를 잇고 있었다. 이가 진애공(陳哀公)이다. 진애공은 초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화의를 신청하고 다시 초나라를 섬기겠다고 맹세했다. 당진의 도공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를 얻기 위해 초나라와 전쟁도 불사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무종국(无終國)⑬의 임금인 가보(嘉父)가 대부 맹락(孟樂)을 당진에 사신으로 보내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각각 100장씩을 바치면서 고했다.

「산융족이 세운 북방의 여러 나라는 제환공이 북정한 이래 지금까지 평온하게 지내 왔으나 섬진과 연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중원에 백주가 없어진 틈을 타서 또다시 준동하여 우리나라의 변경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저희 군주께서는 당진의 군주 전하가 영명하시어 장차 환공과 문공의 백업을 계승하려는 포부를 품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당진의 위엄과 덕을 선전한 결과 융족의 여러 나라가 진정으로 맹약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저희 군주께서는 저로 하여금 상국에 보내 군주님의 명을 받들게 하였으니 부디 가부간 결정하셔서 분부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도공이 여러 중신들을 불러 모아 상의하게 하자 모두가 하나같이 말하였다.

「융(戎)과 적(狄)은 믿을 수 없는 종족들입니다. 맹약을 맺기보다는 정벌함이 옳을 줄 압니다. 옛날 제환공이 패자로 있을 때 먼저 산융을 정벌하고 난 후에 다시 형만을 평정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승냥이 같은 성정을 갖고 있어 무력이 아니면 제압할 길이 없어서였었습니다.」

그런데 사마 위강(魏絳) 한 사람만은 그 의견이 달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당진국으로써는 제후들과의 회맹을 주재하는 일은 실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행하는 일이라 아직 패업이 공고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군사를 일으켜 융족의 여러 나라를 정벌한다면 초나라가 반드시 우리의 허를 찔러 중원의 여러 제후국들을 침략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후들은 우리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에 붙게 됩니다. 이적(夷狄)들의 나라는 짐승과 같으며, 제후국들은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지금의 형세로 보아 우리가 이적을 정벌하는데 국력을 소모한다면 그 결과 금수의 나라는 얻게 되지만 형제의 나라를 잃는경우와 같습니다. 그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융족과 화의를 맺어 초나라의 북진에 대비해야 합니다.」

「융족들과 화의를 맺을 수 있겠는가?「

「융족과 화의를 맺게 되면 다섯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융과 우리 당진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그 땅은 광활하며 값이 싸고 재물은 귀합니다. 재물을 팔아 땅을 사서 우리의 영지를 넓힐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로움입니다. 융족이 우리의 변경을 침입하는 행위를 그만 두게 할 수 있어 변경에 사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농업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이로움입니다. 군사를 내지 않고도 덕을 멀리 까지 베풀 수 있습니다. 그 세 번째 이로움입니다. 융과 적이 우리들을 섬기게 되면 천하가 진동하게 되어 이를 두려워한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그 네 번째 이로움입니다. 또한 북쪽 변방에 대해서 근심을 덜어 마음 놓고 남쪽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이로움입니다. 융족과 화의를 맺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도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위강을 사신으로 임명하여 융족과 화의를 맺도록 했다. 위강은 맹락과 동행하여 먼저 무종국으로 들어가 그 국왕 가보와 함께 융족과의 화의를 맺는 일을 상의했다. 가보는 즉시 산융족의 여러 나라 군주들을 불러 무종국으로 모이게 하여 삽혈의 의식을 행한 후 맹약을 맺게 했다.

「근자에 이르러 당진의 군주가 중원의 맹주로서 백업(伯業)을 이어 받고자 한다. 여러 융족의 나라는 당진의 군주와 한 약속을 잘 받들고, 북방을 방위하며, 당진의 영토를 침략하여 배반하지 말 것이며 각자 자기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기로 한다. 만일 이 맹약을 배반한다면 천지신명께서 용서하지 않으리라!」

여러 융족의 군주들이 맹약을 맺고 모두가 기뻐했다. 그들은 그 보답으로 자기 나라의 땅에서 나는 각각의 특산물을 위강에게 선물로 바쳤다. 그러나 위강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융족의 군주들이 모여 위강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상국의 사신이 참으로 청렴하구나!」

융족의 군주들은 위강을 이전보다 더욱 존중하게 대했다. 위강이 당진으로 돌아와 그 회맹 결과를 도공에게 보고했다. 도공은 위강의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

5. 朝晋暮楚 擇强則事(조진모초 택강즉사)

- 아침에는 당진을 저녁에는 초나라를 받들다가 강약이 구별되면 강국을 골라 받들어야 한다. -

그때 초나라의 새로운 영윤 공자정이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여 진(陳)나라의 항복을 받아 내고 다시 그 군사들을 움직여 정나라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옛날에 당진이 정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인 호뢰에 큰 성을 쌓고 많은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초군은 정나라에로의 진격로를 사수(汜水)를 건너 호뢰로 통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허나라 쪽으로 돌아 영수(潁水)를 건너 쳐들어갔다. 정희공(鄭僖公) 곤완(髡頑)이 크게 놀라 정나라의 육경을 모두 모이게 해서 대책을 세우도록 했다. 그 육경 중 공자비(公子騑), 공자발(公子發), 공자가(公子嘉)는 정목공의 아들로서 희공의 할아버지 항렬이며, 선친의 작위를 물려받아 경이 된 공자첩(公孫輒), 공자거질(公子去疾)의 아들인 공손채(公孫蠆), 공자희(公子喜)의 아들 공손사지(公孫舍之) 등의 세 사람은 희공의 아저씨 항렬이었다.⑭ 그 육경들은 모두 희공보다 항렬이 높았고 희공이 즉위하기 훨씬 이전부터 정나라의 실권을 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희공이란 위인은 성격이 오만무례했음으로 인해 정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모두 서로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 중 상경으로 있는 공자비와는 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그 대책을 의논할 때 희공은 당진의 구원군이 올 때까지 굳게 지키자고 했다. 공자비가 그 의견에 반대하며 말했다.

「‘멀리 있는 물은 가까이 다가오는 불을 끌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당진을 버리고 초나라를 섬겨야 합니다.」

「초나라를 따르다가 당진의 군사가 당도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진이건 초나라이건 어느 한 나라가 우리를 더 동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라고 해서 두 나라 중 한 나라만을 택해서 섬겨야 되는 법은 없습니다. 오로지 강한 나라만을 섬기면 됩니다. 오늘 이후부터 위문품과 재물을 가지고 국경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초군이 오면 초나라와 맹약을 맺고 당진군이 오면 당진과 맹약을 맺으면 됩니다. 두 강대국이 서로 다투면 언젠가는 반드시 한쪽이 크게 꺾이게 됩니다. 강약이 구분이 된 두 나라 중에 강한 나라를 택하여 섬기게 되면 백성들은 전화의 참변을 면할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희공이 공자비의 계책을 반대하며 말했다.

「경의 의견을 따르게 된다면 정나라는 아침저녁으로 맹약만을 맺느라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지 않겠소?」

희공은 공자비의 말을 듣지 않고 사신을 당진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공자비의 뜻을 거슬리는 것을 꺼려한 대부들 중 아무도 사신의 임무를 맡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희공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당진으로 들어가 구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희공은 당진으로 길을 가던 중에 날이 어두워지자 역사에 들려 투숙했다. 공자비는 자기 문객 중 한 사람을 몰래 역사에 들여보내 희공을 암살했다. 희공이 당진국으로 가던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급사했다고 둘러댄 공자비는 희공의 5살 난 아들 가(嘉)를 정나라의 새로운 군주로 세웠다. 이가 정간공(鄭簡公)이다. 공자비는 즉시 사람을 초나라 군영에 보내 정나라의 뜻을 전했다.

「우리가 그 동안 당진을 섬긴 것은 곤완의 뜻에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곤완은 이미 죽고 없어 원컨대 상국을 섬기고자 하니 군사를 물리쳐 주기 바랍니다.」

초군 대장 공자정이 정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여 맹약을 맺은 후에 군사를 물리쳐 본국으로 돌아갔다.

6. 분군사적(分軍肆敵)

- 군사를 나누어 적군을 지치게 만들다. -

당진의 도공은 정나라가 다시 초나라에 붙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여러 대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금일에 이르러 진과 정이 모두 우리를 배반하니 어느 나라부터 정벌해야 하는가?」

순앵이 앞으로 나서서 진언했다.

「진나라의 땅은 좁기도 하거니와 중원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백업의 성패와는 무관한 곳입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중원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중추와 같아 백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복종을 시켜야 합니다. 진과 같은 나라는 열을 잃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과 같은 나라는 하나라도 잃을 수 없습니다.」

중군원수 한궐이 순앵의 말이 맞다고 했다.

「자우(子羽)의 식견이 매우 훌륭합니다. 정나라를 평정할 사람은 순앵이 적임이겠습니다. 신은 기력이 이미 쇠하고 나이도 이미 칠십이 넘어 중군의 부월(斧鉞)을 순앵에게 넘겨줄까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도공이 불허하자 한궐이 다시 완강하게 청했다. 도공이 마지못해 한궐의 청을 받아들였다.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를 자청한 한궐의 뜻을 도공이 허락한 것이다. 순앵은 한궐의 뒤를 이어 당진군의 중군원수가 되어 대군은 통솔하고 정나라 토벌에 나섰다. 군대가 호뢰에 이르렀을 때 정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와 맹약을 청해 왔다. 순앵이 화의의 청을 받아들여 맹약을 맺고 회군했다. 그러자 초공왕이 친히 대군을 끌고 정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쳐들어왔다. 다시 정나라가 초나라에 항복을 하자 화의를 맺고 돌아갔다. 도공이 화를 내며 여러 대부들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정나라 놈들이 반복무상하여 군대가 가면 복종하고 군대가 철수하면 다시 배반하니 어떻게 하면 정나라를 단단하게 붙들어 놓을 수 있는가?」

순앵이 대답했다.

「우리가 정나라를 붙들어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초나라와 그 힘을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나라를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초나라를 제압해야 합니다. 초나라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이일대로(以逸待勞)의 전법을 써야 합니다.」

「이일대로 전법이란 무엇인가?」

「군사란 자주 움직이면 안 되는 법이고 자주 움직이면 피로하게 됩니다. 제후들도 자꾸 소집하여 부르면 안 됩니다. 자꾸 소집하면 원망을 듣게 됩니다. 안으로는 피로하게 되고 밖으로는 원망을 듣게 되어 이런 정황 하에서 초나라와 싸운다면 이기기 힘들게 됩니다. 신이 청하옵건대 우리 사군(四軍)의 군사들을 삼대(三隊)로 나누고, 다시 제후국들의 군사들도 역시 셋으로 편성하여 각각 우리의 삼대에 속하게 합니다. 우리 군사들이 한 번 출정할 때마다 일대만 출동시키고 그 다음에는 다음 이대를 출동시키는 방법으로 출입하여 초군이 진격해 오면 우리는 퇴각하고 초가 퇴각하면 우리는 진격해서 우리의 일대가 초나라의 전대를 견제하게끔 합니다. 그렇게 되면 초군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으며 또한 쉬고 싶어도 쉴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움직이는데 초군은 진군과 철군을 반복하느라 길 위에서 고생을 많이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전 속력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지만 초군은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초군을 피곤하게 하면 정나라를 공고하게 붙들어 둘 수 있습니다.⑮

「참으로 훌륭한 계책이오!」

도공은 즉시 순앵에게 명해 곡량(曲梁)⑯에 군사를 집합시켜 당진의 군제를 재편성하게 했다. 순앵은 사군 체제를 삼분하여 윤번제로 개편했다. 순앵이 단상에 올라가 전군에게 각기 자기 소속부대로 이동 명령을 내렸다. 단상에는 ‘中軍元帥智(중군원수지)’라고 쓴 황적색의 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 순앵의 본성은 순씨이나 중군원수기에 지(智)로 쓴 이유는 순앵과 순언은 숙질간으로서 모두 원수의 직에 있어 군중에서 같은 성을 쓰면 군사들이 소속을 분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앵의 부친 순수는 식읍이 지(智)⑰였고 순언의 부친 순경(荀庚)은 옛날 당진이 군제를 삼군삼행으로 증편했을 때 중행원수에 임명된 적이 있어서 지(智)씨와 중행(中行)씨로 따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순앵을 지앵(智罃)으로 하고 순언을 중행언(中行偃)으로 부르게 하여 군사들이 서로 혼동하는 일이 없게 했다. 이것은 모두 순앵이 군사를 지휘하는 방법이었다. 단하에는 군사들이 삼군으로 편제되어 도열했다.

제일군의 대장은 상군원수 순언을, 그 부장에는 한기(韓起)를 임명하여, 노(魯), 조(曹), 주(邾)⑱ 3국의 군사들을 속하게 하고, 중군부수 범개로 후위를 맡게 하여 보급품을 지원하도록 했다. 제이군은 하군원수 란염을 대장으로, 사방(士魴)을 부장으로 하고, 제(齊), 등(縢)⑲, 설(薛)⑳ 등의 3국 군사들을 속하게 했으며, 중군 상대부 위힐(魏頡)로 하여금 후위를 맡게 했다. 계속해서 제삼군은 신군원수 조무를 대장으로, 위상(魏相)을 부장으로 하고, 송(宋), 위(衛), 예(郳)㉑ 3국의 병사들을 속하게 하고, 중군 하대부 순회(荀會)로 하여금 후위를 맡게 하여 제삼군의 보급품을 담당하게 했다.㉒

순앵은 일군, 이군, 삼군의 순서로 출정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중군의 장병들도 삼대로 나뉘어 윤번제로 각 군의 후위를 맡아 계속 반복하여 출정했다. 정나라의 맹약을 받아 오는 것만으로 전공을 세웠다고 인정하기로 초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은 허락하지 않았다.

7. 魏絳明法(위강명법)

- 위강이 군주의 동생에게 군법을 적용하다. -

공자 양간(楊干)은 약관 19세로 도공이 사랑하는 동모형제였다. 도공이 양간을 새로이 중군원수의 융어로 임명했다. 나이가 어려 혈기가 방장하고 전장에 나가서 싸워 본 경험이 없었다. 그는 당진군이 정나라를 정벌한다는 소리를 듣고 공을 세울 기회라고 생각하여 잔뜩 벼르고 있었다. 당장 한 떼의 군사를 단독으로 지휘하여 앞으로 나아가 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앵(智罃)이 자기를 써 주지 않고 초군과의 일체의 접전을 허락하지 않자 마음속에 한줄기의 혈기가 끓어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양간은 곧바로 달려가서 지앵에게 사력을 다해 싸워 공을 세워 보겠노라고 하면서 선봉을 자청했다. 지앵이 양간을 만류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 분군의 계책을 쓴 목적은 군사의 용병을 빨리하기 위해서이지 싸움을 하여 전공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군사를 분군하여 이미 각자의 임무가 정해 졌으니 공자께서는 비록 용기는 가상하시나 지금은 참으셔야 되겠습니다.」

양간이 그래도 지앵의 말에 승복하지 않고 선봉에 서기를 고집했다. 지앵이 어쩔 수 없이 양간의 청을 허락하고 말았다.

「공자께서 간곡하게 계속 청하시니 그렇다면 신군의 후위를 담당하고 있는 중군 하대부 순회(荀會)의 대열에 들어가서 종군하시기 바랍니다.」

「신군은 세 번째로 출병을 하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란 말이오? 제발 제일군에 배속하여 주기 바라오.」

순앵은 일군에 속해달라는 양간의 청을 물리쳤다. 양간이 자기가 도공의 친동생이라는 친척관계를 믿고 곧바로 본부의 전차병과 병졸이 있는 곳으로 가서 직접 일대를 편성하여 중군부장 범개 부대의 뒤에 열을 지어 도열했다. 그때 지앵의 장령을 받들어 대오를 엄하게 단속하고 있던 위강은 양간이 오와 열의 순서를 뛰어 넘어 멋대로 구는 모습을 보자 고수에게 북을 크게 울리게 한 후에 여러 장병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양간이 고의로 장령을 위반하여 행군의 대오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군법을 논하면 이것은 참수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주군의 친동생이라는 점을 참작하여 본인에 대한 처벌은 잠시 뒤로 미루고 그의 어자에게 군법을 집행하여 군정을 바로 잡겠다.」

위강은 즉시 군교에게 명하여 양간의 어인을 붙잡아 참수하고 그의 목을 단하에 걸었다. 이윽고 중군의 분위기가 숙연하게 되었다. 양간은 도공의 동복동생이라 그 형을 믿고 평소에 교만방자하여 군법을 몰랐다. 자기가 데리고 다니던 어인이 끌려가 참수를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 양간이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십분 겁이 났으나,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화가 나기도 했다. 전차에서 내려 말로 바꿔 탄 양간은 군영을 뛰쳐나가 곧바로 도공에게 가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위강이 자기를 욕보여 여러 제장들을 대할 면목을 잃었다고 고해 바쳤다. 도공이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상세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위강이란 놈이 나의 동생을 욕 보였으니 그것은 나를 욕보인 것과 같다. 그 놈을 필히 죽여서 두 번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도공은 즉시 중군부위 양설직을 불러 위강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양설직이 입궁하여 도공을 알현하고 말했다.

「위강은 지절이 있는 사람입니다. 일이 생기면 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죄가 있으면 그 형벌을 달게 받는 사람입니다. 군사를 점고하는 일이 이미 끝났으니 반드시 스스로 와서 자기의 죄를 고할 것입니다. 신이 구태여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과연 위강이 궁궐에 당도하여 오른 손에는 장검을 왼쪽 손에는 상주문(上奏文)을 들고 조당으로 들어가 대죄하려고 했다. 궁문을 지나 오문(午門)에 이르는 사이를 걷는 중에 위강은 도공이 사람을 시켜 자기를 잡아오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강은 즉시 상주문을 자기의 종자에게 맡겨 도공에게 올리라 명하고는 자기는 들고 있던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때 마침 하군부수 사방(士魴)과 중원 제후들과의 일을 주관하는 주후대부(主侯大夫) 장로(張老)가 지나가다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려고 하는 위강에게 황급히 달려들어 그가 들고 있던 칼을 빼앗으면서 말했다.

「사마가 입조한 소식은 우리도 들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양간 공자의 일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이 주공에게 간하려고 이렇게 급히 달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사마는 어찌하여 자기의 귀중한 목숨을 경솔하게 다루려고 하십니까?」

위강은 도공이 대노하여 양설직을 불러서 자기를 잡아오게 했다는 일을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두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이 일은 국가의 공적인 일입니다. 사마가 군법을 집행한 일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하필이면 자기의 몸을 망치려고 합니까? 종자에게 상주문을 올리게 할 필요가 없이 우리가 같이 들어가서 주청을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이 조문에 이르자 우선 사방과 장로가 먼저 조당에 들어가서 도공을 뵙기를 청하고 위강의 상주문을 받쳤다. 도공이 상주문의 겉봉을 뜯고 읽었다.

「주군께서 신을 불초하지 않다고 생각하셔서 중군사마의 직을 맡게 하셨습니다. 신은 ‘삼군에 대한 명령은 원수만이 내릴 수 있으며 원수의 권한은 명령을 내리는 데 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령이 내려졌는데 지켜지지 않고 명을 발하였는데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곡(河曲)㉓의 싸움에서는 공을 이룰 수 없었고, 필성(邲城)에서는 초나라에게 패했습니다. 신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군법에 의해 처단한 행위는 사마의 직책에 충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은 주군의 동생 되는 사람을 욕보여 그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주군 앞에서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하시어 군후의 동기간의 정을 천하에 밝히시기 바랍니다.」

상주문을 다 읽고 난 도공이 사방과 장로에게 급히 물었다.

「지금 위강은 어디 있는가?」

두 사람이 대답했다.

「지은 죄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던 위강을 신 등이 말려 궁문 밖에서 대죄하고 있습니다.

도공이 얼굴에 두려운 기색을 띄고 자리에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궁문 밖으로 뛰쳐나가 위강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과인이 한 말은 형제지간의 사사로운 정이고 그대의 행동은 군사에 관한 공적인 행위요. 내가 동생 교육을 잘못 시켜서 군법을 범하게 했으니 과실은 나한테 있어 경과는 무관한 일이라 하겠소. 경은 속히 일어나 직책을 다하도록 하시오!」

양설직이 도공의 옆에 서 있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주군께서 이미 위강이 죄가 없다고 하셨으니 위강은 속히 물러가지 않고 무엇하고 있는가?」

위강이 즉시 땅에 엎드려 자기의 죄를 벌하지 않은 처사에 감사의 말을 드렸다. 양설직, 사방, 장로가 동시에 땅에 엎드려 인사를 드리며 하례의 말을 올렸다.

「군께서 목숨을 걸고 법을 지키는 이와 같은 훌륭한 신하를 두셨으니 어찌 백업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겠습니까?」

네 사람이 일제히 도공에게 인사를 하고 궁궐문 밖으로 나갔다. 도공이 회궁하여 양간을 호되게 꾸짖었다.

「예법도 모르는 놈이 나에게 참소하여 훌륭한 신하 한 명을 죽일 뻔했다」

도공은 옆에 있던 내시에게 명하여 양간을 공족대부(公族大夫) 한무기(韓無忌)에게 압송하여 세 달 동안 그에게서 예를 배우라고 명령하고, 예절을 제대로 익힌 후에나 자기를 상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간이 부끄러운 기색을 띄고 도공의 안전에서 물러났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 일을 논했다.

무친한 군법을 감히 어지럽히려 했으니,

중군사마의 얼굴이 추상 같이 무서웠다.

백업에의 뜻을 연마하고 있던 진도공이

충신을 칼 아래서 죽게 내버려두었겠는가?

軍法無親敢亂行(군법무친감란행)

中軍司馬面如霜(중군사마면여상)

悼公伯志方磨勵(도공백지방마려)

肯使忠臣劍下亡(긍사충신검불망)

8. 偪陽鬪力(복양투력)

- 복양성 싸움에서 용력을 뽐낸 노나라의 세 장수 -

지앵이 분군하여 정해진 순서에 의해 정나라 정벌에 나서려는 순간 궁정의 심부름하는 신하가 와서 말했다.

「송나라에서 국서를 보내 왔습니다.」

도공이 문서를 받아서 겉봉을 뜯고 읽었다. 초와 정 두 나라가 서로 합심하여 빈번히 군사를 일으켜 복양성(偪陽城) 동쪽 길을 경유하여 송나라 경계를 침범하고 있다고 위급을 알려온 문서였다. 상군원수 순언이 나아가 청했다.

「초나라가 정나라와 진나라를 얻어 다시 송나라를 침범하니 그 뜻은 우리 당진국과 패업을 놓고 다투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복양성은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는 길목입니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먼저 복양성으로 진격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당진군이 팽성을 공격할 때 참전하여 공을 세운 송나라의 상수(向戍)를 그곳에 봉해 우리의 부용(附庸)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복양성을 점령한 후에 팽성의 상수에게 수비를 맡겨 초나라 행군로를 차단하는 작전도 한 가지 계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순언의 말에 지앵이 우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복양성은 비록 작은 성이지만 그 성이 매우 견고하여 만약 포위하여 공격하여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여러 제후들의 웃음거리만 되지 않겠느냐?」

중군부장 범개가 지앵의 말을 받아 순언의 말에 찬동했다.

「팽성의 싸움은 우리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가 우리의 동맹국 송나라를 포위하여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윽고 우리가 호뢰(虎牢)에 성을 쌓아 정나라로 통하는 길을 끓자 초나라가 다시 송나라를 침입하여 그 원수를 갚으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약 정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송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단단히 단속해 놓아야만 합니다. 순언의 계책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대 두 사람은 복양성을 틀림없이 함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순언이 비장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우리 두 사람에게 모든 일을 맡겨 주십시오. 만약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면 군령을 달게 받겠습니다.」

범개가 순언의 말을 받았다.

「백업이 이루어지려면 불리한 형세도 유리하게 변한다고 했습니다. 어찌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미리부터 걱정하십니까?」

지앵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즉시 제일군을 정나라로 보내는 대신 복양성으로 바꿔 진군시켰다. 조(魯), 조(曹), 주(邾) 3국의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제후연합군이 복양성 밑에 당도하자 노나라의 장군 맹손멸(孟孫蔑)은 그의 부하 장수 숙량흘(叔梁紇), 진근보(秦菫父), 적사미(狄虒彌) 등을 이끌고 복양성 북문에 진영을 세우고 공격할 채비를 갖추도록 했다. 복양의 대부 운반(妘斑)이 그 군주인 운표(妘豹)에게 계책을 내 놓았다.

「성의 북문을 열고 노군진영을 향해 우리가 거짓으로 가장하여 성문을 열고 출전했다가 곧바로 성안으로 퇴각한다면 노군은 틀림없이 우리 뒤를 추격해 올 것입니다. 노군의 추격대가 반쯤 성안으로 들어 왔을 때 성문을 내려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성안에 들어와 있는 군사들을 공격한다면 우리는 서전에서 이겨 이후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습니다. 또한 노나라가 우리에게 패하면 조나 주 두 나라도 반드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고 결국 당진군의 사기도 크게 꺾일 것입니다.」

복양(偪陽)의 군주 운표가 운반의 계책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복양성 북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복양군이 출격하여 노나라 진영을 향해 돌격해 왔다. 노나라의 세 장수는 자기들의 용력을 믿고 앞으로 달려나가 복양군을 요격하려고 하자 복양군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성을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노나라의 세 장수와 군사들은 복양군의 뒤를 추격하여 모두 복양성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노군이 모두 성안으로 모두 진입하기도 전에 복양성 성벽 위에서 나팔소리가 크게 들리고 성문이 위에서 내려와 닫히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그 밑을 통과하던 숙량흘 머리위로 성문이 떨어졌다. 숙량흘이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과를 땅에 던져버리고 위에서 떨어지는 성문을 두 손으로 받쳐 들어 서서히 올렸다. 노군의 후위에서 따라오던 군사들이 징을 두드려서 후대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자 근보와 사미 두 장군이 변고가 있는 줄 알고 두려워하여 급히 방향을 돌려 회군하려 했다. 그러자 성안에서 다시 나팔과 북소리가 진동하더니 운반이 한 무리의 병졸과 전차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려는 노군의 뒤를 추격해 왔다. 복양의 장수가 노군을 쫓다가 눈을 들어 앞쪽을 바라보니 성문 밑에서 한 거인이 성문을 손으로 바쳐 들고 노나라의 군졸들과 장수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운반이 깜짝 놀라 생각하며 혼자 말했다.

「저 성문은 위에서 밑으로 떨어뜨려 닫는 현가식(懸架式)이라 성문이 떨어질 때의 힘은 천근에 해당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붙들고 견딜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가 오히려 저 장수가 대문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성안으로 들어 올 수 없게 되어 밖에서 오고 가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 난처하게 되겠다.」

운반은 전차를 멈추고 멀리서 노나라 장수가 어떻게 하나 그 거동을 관망했다. 숙량흘은 노나라 군사가 모두 성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문을 받쳐 들고 있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노나라의 유명한 상장 숙량흘이 여기 있다. 성 밖으로 아직까지 나가지 못한 군사들이 있다면 내가 이 성문을 놓기 전에 빨리 빠져나가라!」

그러나 성안의 복양군사들 중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순간 운반이 활에 화살을 장전하여 숙량흘을 향하여 쏘려는 순간 성문을 잡고 있던 숙량흘은 두 손을 놓으면서 그 세를 이용하여 옆으로 살짝 비켜서서 피했다. 현가식 성문은 땅으로 떨어져 성문을 막아 운반은 하릴없게 되어버렸다.

본영으로 무사히 되돌아온 숙량흘이 진근보와 적사미에게 자기의 힘을 자랑하며 말했다.

「두 분 장군의 목숨은 저의 이 팔의 힘 때문에 살아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진근보가 승복하지 않고 대꾸했다.

「만약 퇴군을 명하는 징소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복양성 안으로 쳐들어가 성을 이미 함락시켰을 것이오.」

적사미도 가만있지 않고 호언했다.

「내일 싸움에서 내가 혼자서 복양성을 공격하여 노나라 사람의 기개를 보여 줄 테니 잘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날이 되자 노군의 대장 맹손멸이 대오를 다시 정비하여 백여 명의 군사를 일대로 하여 연달아 성 쪽으로 진격시켜 성 위을 향하여 싸움을 걸게 했다. 적사미가 공손멸에게 말했다.

「제가 백 명으로 이루어진 일대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 도움 없이 단신으로 공격해 보이겠습니다.」

그는 즉시 큰 전차 바퀴 한 개를 뽑아서 그 위에 갑옷을 둘러씌워 방패로 삼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자루가 긴 창을 꼬나 잡은 후에 비호처럼 성 쪽으로 달려갔다. 복양성 위의 군졸들이 성 밑에서 용력을 뽐내는 노나라 장수를 보고 갈포 한 필을 풀어서 성 밑으로 늘어뜨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들이 성 위로 쉽게 올라 올 수 있도록 갈포를 풀어놓았다. 누가 감히 갈포를 타고 성 위로 올라와 진정한 용기를 보여 주겠는가?」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노나라 군사 대열 중에서 한 장군이 큰소리로 말하면서 뛰어 나왔다.

「그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는 바로 진근보였다. 근보가 면포를 잡고 손을 좌우로 바꿔 가며 삽시간에 성첩(城堞)㉔에 거의 올라서게 되었다. 그 순간 복양성의 군졸들이 칼로 면포를 자르자 진근보가 허공에서 곤두박질 쳐서 땅바닥으로 떨어 졌다. 높이가 십여 장이 되는 복양성 위에서 다른 사람이 떨어졌다면 죽지 않았으면 중상을 당했을 터였다. 그러나 진근보는 전연 내색하지 않고 먼지를 툭툭 털며 태연히 일어나 성위의 복양성 군사들을 쳐다보았다. 성위의 복양성 군사들이 갈포를 다시 밑으로 내리면서 외쳤다.

「다시 한 번 올라 와 보겠느냐?」

진근보가 큰 소리로 답했다.

「다시 못 오를 이유도 없다.」

근보는 다시 성 위에서 늘어뜨린 갈포를 붙잡고서 성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복양성 군사들이 또다시 칼로 갈포를 짤라 버리자 진근보가 땅위로 떨어졌다. 근보는 땅바닥을 딛고 곧바로 일어났다. 성 위의 군사들이 갈포를 세 번째로 내리면서 진근보를 향해 외쳤다.

「또다시 한 번 더 해 볼 테냐?」

근보가 더욱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여기에서 물러난다면 사내자식이 아니다.」

근보는 조금 전에 한 것과 똑같이 갈포를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복양성의 군사들은 근보가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이 성 위에서 내려뜨린 갈포를 다시 붙잡고 기어오르자 당황해 하며 황급히 면포를 칼로 잘라 버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근보가 이미 성 위로 거의 다 올라왔을 때였다. 근보가 복양성의 군사 한 사람을 붙잡아 밑으로 던져 버렸다. 그 군사는 땅에 널브러져 거의 반죽음이 되었다. 근보도 역시 잘려진 갈포와 함께 성 밑으로 떨어 졌으나 바로 다시 일어나더니 외쳤다.

「어째서 갈포를 다시 내려 보내지 않느냐?」

성 위의 군사들이 대답했다.

「장군의 뛰어난 용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히 갈포를 다시 내릴 수 없습니다.」

근보는 뒤이어 잘라진 갈포 세 자락을 들고 와서 군사들에게 보여주면서 자기의 용기를 과시했다. 여러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았다. 맹손멸이 세 장수의 용력에 대해 감탄하면서 말했다.

「옛말에 ‘호랑이 같은 장수’라는 말이 있는데 이 세 사람을 두고 한 말인 듯 하구나!」

하나 같이 흉맹한 노나라 장수들의 모습을 살펴본 운반은 감히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군민들에게 전력을 다하여 굳게 지키기만 하라고 당부했다. 당진과 각 제후의 군사들이 복양성을 4월 병인(丙寅) 날 포위하여 24일이 지난 5월 경인(庚寅) 날이 되도록 쉴 새 없이 공격하였으나 복양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공격하는 측에서는 피로가 쌓여 지치게 되었으나 수비하는 측에서는 아직도 여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큰비가 내려 평지에 물이 차서 세 자 높이 까지 올라왔다. 군사들이 놀라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난리로 인해 군중에 무슨 변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한 순언과 범개는 함께 동행하여 중군원수의 막사를 찾아가 순앵을 뵙고 회군해야겠다고 말했다.

<61회로 계속>

주석

①팽성(彭城) :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徐州市)를 말한다. 서주시는 산동성 및 안휘성과의 접경 지역인 미산호(微山湖) 남단에 있는 교통 중심지다. 진(秦)나라가 망하고 한초(漢楚)가 다툴 때 항우가 이곳에 도읍했다.

②태곡(台谷) : 지금의 산서성 진성시(晉城市) 남 10키로 대구향(大口鄕)에 있었던 당시 당진의 영토

③호구(壺邱) : 지금의 하남성 신채시(新蔡市) 남 10키로

④척(戚) :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북 10키로에 있었던 춘추 때 위(衛)나라의 영토. 당시 황하의 남안에 있었다.

⑤호뢰(虎牢) : 현 하남성 공의시(鞏義市)와 형양시(滎陽市) 사이에 있는 사어구(沙魚溝)라는 황하 남안(南岸)에 있던 성읍으로 춘추시대 때 초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는데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관문(關門)으로서 남과 북의 강국 초나라와 당진(唐晉) 사이에 벌어진 중원 쟁탈전에서 전략상 요충지가 되었다. 한초(漢楚)가 천하를 놓고 쟁패할 때 유방과 항우가 격전을 치른 곳인 성고(成皐)의 옛 이름이다. 당조(唐朝)의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⑥양설힐(羊舌肹) : 당진의 도공(재위 전573-558)과 평공(平公 : 재위 전557-532년) 때의 인물로 평공 때 정경을 지냈다. 희성(姬姓)에 양설씨(羊舌氏)이고 이름은 힐(肹)이다. 숙향(叔向)은 그의 자이며 숙향(叔嚮)이라고도 한다. 봉읍은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洪洞縣) 경내의 동남에 있었던 양(楊)이었다. 그래서 그를 양힐(楊肹)이라고도 불렀다. 당진의 무공(武公)의 자손인 양설대부(羊舌大夫) 돌(突)의 후예이다. 당진의 도공(悼公) 말년에 태자 표(彪)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태자 표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자 그의 직급은 상대부로 오르고 태부가 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태자 표가 평공(平公)이다.

⑦구자(鳩玆) : 지금의 안휘성 무호시(蕪湖市)를 말함. 장강의 남안에 자리잡고 있는 오나라의 전략적 요충지 임.

⑧학산기(郝山磯) : 안휘성 무호시(蕪湖市)의 장강에 임한 강변의 이름. 기(磯)라는 말은 강변에서 강안으로 쭉 뻗어 들어간 바위나 자갈로 이루어진 백사장을 의미한다.

⑨9) 양산(梁山) :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무호시(蕪湖市) 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 동양산(東梁山), 장강 건너편에 동양산과 마주보고 있는 산 이름을 서양산(西梁山)이라 했다.

⑩채석기(采石磯) : 지금의 안휘성 마안산시(馬鞍山市) 북쪽으로 흐르는 장강 가운데 섬에 있었던 백사장을 말한다.

⑪몽동(艨艟) : 고대 중국의 전투선. 소가죽을 겉에 씌우고 전후좌우에 활을 쏠 수 있는 창을 내었음.

⑫계택(鷄澤) : 지금의 하북성 한단시(邯鄲市) 서쪽 10키로

⑬무종국(無終國) : 지금의 천진시(天津市) 계현(薊縣)에 있었던 북융족(北戎族)이 세운 나라 이름. 본서 21회 참조

⑭정희공(鄭僖公)과 육경(六卿)과의 관계표

이 름

僖公과의

關係

備考

공자비

公子騑

자사

子駟

목공

穆公

조숙

祖叔

목공의 아들

공자발

公子發

자국

子國

상동

상동

상동

공자가

公子嘉

자공

子孔

상동

상동

상동

공손첩

公孫輒

자이

子耳

공자언

公子偃

당숙

목공의 손자

공손채

公孫蠆

자교

子蟜

공자거질

公子去疾

상동

상동

공손사지

公孫舍之

자전

子展

공자희

公子喜

상동

상동

⑮모택동이 그의 유명한 게릴라전 사대전법을 착안했다는 순앵(荀罃)의 이일대로(以逸待勞)전법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兵不可以數動, 數動則疲 ; 諸侯不可屢勤, 屢勤則怨. 內疲而外怨, 以此御楚, 臣未見其勝也. 臣請擧四軍之衆, 分而爲三, 將各國亦分派配塔. 每次只用一軍, 更番出入, 楚進則我退, 楚退則我復進, 以我之一軍, 牽楚之全軍. 彼求戰不得, 求息又不得, 我無暴骨之凶, 彼有道涂之苦. 我能亟往彼不能亟來, 如是而楚加疲, 鄭可固也』- 순앵. 『적진아퇴(敵進我退), 적지아요(敵止我擾), 적피아격(敵避我擊), 적퇴아진(敵退我進).』- 모택동

⑯곡량(曲梁) : 지금의 산서성 심현(沁縣) 경내에 있었던 당진 소유의 땅

⑰지(智) : 황하가 북쪽에서 흐르다 동쪽으로 90도 직각으로 꼬부라지는 곳 사이의 산서성 쪽과 산서성을 대각선으로 관통하여 황하와 합류하는 분수(汾水) 사이의 땅을 하곡(河曲)이라 하는데 순씨들의 식읍은 이 하곡부의 남단에 있었다.

⑱주(邾) :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동남쪽의 추촌(陬村)에 있었던 조성(曺姓)의 제후국으로 후에 산동성 비(費), 추(鄒), 등(滕), 제녕(濟寧), 금향(金鄕) 등으로 전전하다가 전국 초기 때 초나라에 병합되었다. 추(鄒) 땅으로 이주했을 때에는 나라 이름을 추(鄒)로 이름을 바꾸었다. 맹자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⑲등(滕) : 지금의 산동성 등주시(滕州市) 서남의 등성촌(滕城村) 일대에 있었던 희성(姬姓)의 중소제후국. 주문왕(周文王)의 아들 착숙(錯叔) 수(繡)가 서주 초기에 봉해졌다. 춘추 말기에 월(越)나라에 망했다가 곧이어 복국했으나 후에 송나라에 의해 망했다. 지금도 등성현에 그 성지(城址)가 남아있다. 등주시는 미산호(微山湖) 중간의 동안에 있는 도시임.

⑳설(薛) : 지금의 산동성 등주시(滕州市) 남 설성(薛城)에 있었던 임성(任姓)의 중소제후국. 건국연대는 확실치 않고 전국 초에 제나라에 병합되었다. 후에 전영(田嬰)과 그 아들 전문(田文)의 봉읍이 되었다. 전문은 전국 사군자(四君子) 중의 한 사람인 맹상군(孟嘗君)이다. 춘추 때 조성된 성곽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크기는 동서로 2,480m, 남북으로 3,265m, 성곽의 평균 높이 4m, 그리고 가장 높은 곳은 7m에 달하고 있다. 1973년 동주시대 때 설국의 귀족 소유로 여겨지는 청동보(靑銅簠) 4건이 출토되었다.

㉑예(郳) : 지금의 산동성 등현(滕縣) 동쪽에 있었던 춘추 때 중소제후국. 주(邾)나라에 갈라져 나온 분국으로 소주(小邾)라고도 부른다.

㉒기원전 564년 당진의 도공 9년 이일대로(以逸待勞) 전법을 위해서 개편된 당진의 새로운 군제

군별

軍別

원수(元帥)

부수

副帥

제후국

諸侯國

후위(後衛)

직책職責

이름

姓名

직책職責

이름

제일군

第一軍

상군원수

上軍元帥

순언

荀偃

한기

韓起

노(魯).조(曺).주(邾)

중군부수

中軍副帥

범개

范匃

제이군

第二軍

하군원수

下軍元帥

란염

欒黶

사방

士魴

제(齊).등(媵).설(薛)

중군상대부

中軍上大夫

위힐

魏頡

제삼군

第三軍

신군원수

新軍元帥

조무

趙武

위상

魏相

송(宋).위(衛).예(郳)

중군하대부中軍下大夫

순회

荀會

㉓하곡(河曲)의 싸움 : 당진의 양공이 죽자 당시 당진국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조돈이 양공의 세자였던 이고를 제치고 섬진에 망명하고 있던 문공의 아들 공자옹을 모셔 와 당진의 군주로 삼으려고 했다. 당진의 요청을 받은 섬진의 강공은 기원전 620년 대장 서걸술에게 전차 400승의 군사를 딸려서 공자옹을 당진으로 호송하게 했다. 그 사이 당진의 국내 여론이 태자 이고에게 돌아가 할 수 없이 조돈은 이고를 당진의 군주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고를 군주로 세운 조돈은 군사를 이끌고 영호(令狐)에 주둔하고 있던 섬진군을 기습하여 섬진의 군사를 전멸시키고 공자옹은 싸움 중에 죽게 만들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섬진은 영호의 싸움 5년 후인 기원 615년에 군마를 정비하여 전차 500승을 직접 이끌고 황하를 건너 하곡에 주둔하여 조돈이 이끄는 당진군과 대치했다. 당시 조돈의 조카인 조천이 군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섬진의 군사를 격파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조천의 경솔한 행동으로 섬진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무사히 본국으로 회군할 수 있었다. 당시 조천이 군령을 무시하여 제멋대로 행동한 결과 당진군이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 48회 참조 )

㉔성첩(城堞) : 성가퀴. 성을 기어오르는 적군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말한다.

【평 설】

몇 번에 걸쳐 내란을 겪은 당진국은 진도공(晉悼公)이 즉위함으로 해서 비로소 내정의 안정을 찾아 정상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당진이 패업을 다시 이루기 위해 취한 전략은 제나라를 세력권으로 끌어들인 후에, 다시 초나라의 배후에 있는 오나라와 연합하여 중원 제후국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복종시키고, 중원을 향한 초나라의 지배권에 타격을 가하려고 했다.

진도공은 매년 쉬지 않고 출병한 결과 피로에 지친 당진군의 용병 방식을 바꾸었다. 당진이 새로 채택한 전략은 순앵(荀罃)이 고안한 사군삼분(四軍三分)의 용병 방법이었다. 초군을 기진맥진시켜 피로에 지치게 만든 이 전법은 참으로 교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군삼분 전법이라 함은 원래 상, 중, 하 삼군과 삼행(三行)에서 새로이 개편한 신군(新軍)을 3개 전투집단으로 재편성하여 전군을 출동하는 대신 윤번제로 일군만을 사용하여 초나라와의 전투에 임하게 하는 작전이었다. 그와 같은 편제에 의한 전법을 실제적으로 구사하자 과연 당진군 전력의 소모를 줄임과 함께 여러 가지 많은 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복양성(偪陽城)은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지나쳐야만 하는 전략적인 요충지다. 기원전 563년 초와 정 두 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진도공은 즉시 제일군을 복양성으로 출동시켰다. 당진군은 한 달여에 달하는 각고의 포위공격 끝에 결국은 복양성을 함락시켜 초군의 북상을 저지했다. 당진군은 송나라를 지키고 정나라 정벌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다.

다음 해인 기원전 562년, 당진군은 다시 제이군을 보내 정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정나라는 어쩔 수 당진국과 강화를 체결했다. 이윽고 초나라가 황급히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그 군사들을 출동시켜 당도하기를 기다렸다고 곧바로 퇴각해 버렸다. 초군이 정나라 경계에 당도했을 때는 당진군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정나라가 다시 초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도공은 제삼군을 출동시켰다. 정나라는 곧바로 당진군에게 항복했다. 해마다 몇 번씩 계속 출병하게 된 초군은 장기간의 행군으로 인해 피로에 지쳐 이윽고 단독으로는 군사행동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초나라는 할 수 없이 섬진에게 도움을 청해 정나라를 정벌할 수밖에 없었다.

순앵의 사군삼분 전법을 실전에 적용하여 윤번제로 출동한 결과, 초군을 피로하게 만들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후의 전쟁에 있어서 윤번을 정해 출동하는 작전은 적군을 피로에 지치게 만드는 목적으로 채용되었다.

초군을 피로에 지치게 만든 당진의 작전이 매우 고차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진초(晉楚) 지간에 끼어서 생존수단을 찾은 정나라의 수법은 참으로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당진의 제삼군이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당도하자 정나라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항복했다. 이에 피로에 지친 초나라는 정나라가 당진국의 세력권 하에 들어가는 갔음을 보고 섬진(陝秦)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윽고 초나라와 섬진의 연합군이 조만간에 정나라 국경에 진입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정나라는 그 곤경에 벗어나기 위해 당진군을 격분시켜 초나라와 교전에 들어가도록 부추기기로 방침을 결정했다. 정나라는 당진국의 우산 속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외교방침을 정한 것이다. 이에 정나라는 당진국의 전통적인 맹방인 송나라를 공격하고 그와 동시에 사자를 초군 진영에 보내 자기들이 당진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이유는 약소국인 처지에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정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당진과 송나라가 힘을 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는 경우라고 했다. 그래서 만일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해 준다면 정나라는 견마지로를 다하여 이후로는 절대로 초나라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정나라의 계약을 알지 못했던 초군은 그것이 정나라의 진심이라고 여기고 섬진의 군사를 돌아가게 하고, 정나라와 함께 송나라 경계를 침입하여 크게 약탈한 다음 돌아왔다.

당진의 군주가 과연 크게 노하여 정나라에 대한 정벌군을 일으켰다. 정나라는 일방으로 당진과 강화조약을 시도하고 다른 일방으로는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이때 초군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군사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결국은 정나라의 구원 요청에 응하지 못했다. 마침내 정나라는 강대한 당진국만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정나라는 초나라에 대해 구실을 먼저 찾았고, 초나라 역시 당진국에 붙은 정나라에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20여 년간 정나라는 당진과 초의 남북 양대국으로부터 병화를 받지 않게 되었다. 정나라의 생존 전략은 참으로 교묘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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