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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三駕服鄭(삼가복정), 因歌逐主(인가축주)
양승국   (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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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61회 三駕服鄭 因歌逐主(삼가복정 인가축주)

어가를 세 번 움직여 정나라를 굴복시켜 패주가 된 진도공과

노래를 전해 듣고 군주를 쫓아낸 위나라의 손림보

1. 척궤파성(擲几破城)

- 궤를 내던져 부하장수들을 분발시켜 복양성을 함락하다. -

진나라와 여러 제후국들의 군사들이 복양성을 포위한지 24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평지에 물이 세 자 높이 까지 차게 되었다. 순언과 범개 두 장수가 군심이 동요될까 우려되어 중군의 순앵에게 와서 말했다.

「본래 조그만 성이라서 쉽게 함락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출전을 자청했으나 복양성을 공격한지 24일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고 다시 여름의 우기로 접어들어 장차 홍수가 날까 우려됩니다. 우리 주둔지의 서쪽에는 포수(泡水), 동쪽에는 설수(薛水), 동북쪽에는 곽수(漷水)가 있어 모두 사수(泗水)①로 흘러들어 갑니다. 만일 비가 쉬지 않고 계속 와서 세 강이 범람하게 되면 그때는 군사를 퇴각시키기도 어렵게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잠시 군사들을 거두어 돌아갔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공격해야 될 것 같습니다.」

순앵이 크게 화를 내며 자기가 기대고 앉았던 궤를 두 장수를 향해 집어던지면서 소리쳐 꾸짖었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말하기를 ‘성은 비록 적지만 견고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도 어린 녀석들이 주제넘게 나서서 복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주공 면전에서 자임하고 나서서 이 늙은이를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았느냐? 복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한지가 오래 되었건만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서 어쩌다 오는 비를 핑계로 군사를 퇴각시키려는 수작은 무슨 경우냐? 올 때는 너희들이 주장해서 출동했지만, 갈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오늘 너희들에게 7일 간의 말미를 주겠으니 그 안에 반드시 복양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만약 함락을 시키지 못하면 너희들이 직접 쓴 군령장에 따라 참수형에 처하겠다. 속히 물러가 복양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나를 만나 볼 생각을 하지 말라!」

두 장수가 놀라 얼굴이 흙빛이 되어 그저 “녜, 녜”하고 대답만 연거푸 하면서 순앵의 장막 안에서 물러 나왔다. 두 사람이 자기들의 군영에 당도하여 막하 장수들에게 말했다.

「원수께서 기일을 정하여 엄명을 내리셨다. 만일 우리가 7일 안에 성을 깨뜨리지 못하면 우리 두 명의 목을 치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들도 역시 그대들에게 기한을 정하여 6일 내에 성을 함락시키라는 령을 내리겠다. 령을 어길 때는 그대들의 목을 먼저 베고 다음에 우리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여 군법에 따르겠다.」

여러 장군들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눈치만 살피는데 순언과 범개가 또다시 말했다.

「군중에는 농담이 없다. 우리 두 사람이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주야로 공격하겠다. 앞으로의 싸움에서는 전진만 있을 뿐이지 후퇴는 없다.」

순언과 범개는 노(魯), 조(曹), 주(邾) 세 나라의 군사들에게도 령을 전하여 일제히 공격하기로 시간을 정했다. 이윽고 강물이 어느 정도 빠져나갈 때를 기다려 순언과 범개가 초거를 타고 사졸들 대열에 앞장서서 복양성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적군의 화살과 돌이 그들 앞으로 비 오듯이 쏟아졌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경인 날에 공격을 개시하여 5일 만인 갑오 날에 이르자 복양성 안의 화살과 돌이 모두 떨어지게 되었다. 순언이 성벽을 타고 먼저 기어오르자 범개가 그 뒤를 따랐다. 각국의 장수와 병졸들도 역시 개미 떼처럼 성벽에 붙어서 성 위로 기어 올라갔다. 운반은 성안으로 진입한 당진의 군사들과 시가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지앵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복양의 군주 운표(妘豹)가 군신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지앵은 운표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 종족들을 모두 군중에 머물게 했다. 당진군이 성을 재공격하여 함락시킬 때까지는 불과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다. 만일 지앵이 자기가 기대고 앉아 있던 궤를 던져 노기를 표현함으로 해서 두 사람의 장수들을 야단치지 않았다면 이때의 출병에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염옹(髥翁)이 시를 써서 이일을 이야기했다.

부월을 차고 단에 서면 천지에 무서운 것이라곤 없는데

하찮은 비장들이 왈가왈부하며 감히 권위를 넘보는가?

대장군 한 사람이 궤를 던져 삼군을 떨게 하니

우뚝 솟은 철옹성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너뜨렸구나!

仗鉞登壇無地天(장월등단무지천)

偏裨何事敢侵權(편비하사감침권)

一人投机三軍懼(일인투궤삼군구)

不怕隆城鐵石堅(불파융성철석견)

한편 당진의 도공(悼公)은 복양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걱정하여 공성전을 돕기 위해서 정예군사 2천 명을 선발하여 직접 인솔하고 복양성으로 향해 출발했다. 도공의 행렬이 위나라의 도성 초구(楚邱)에 이르렀을 때 지앵이 이미 복양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공은 곧바로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어 복양의 땅을 송나라 상수(向戍)의 봉읍으로 정했다고 통지했다. 상수가 송나라 평공과 같이 초구에 와서 도공을 배알하고 복양성을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사양했다. 도공이 하는 수 없이 복양의 땅을 송나라에 귀속시키도록 했다. 송과 위 두 나라 제후들이 각각 도공을 위해 잔치를 크게 벌였다. 지앵은 도공에게 복양성 전투 때 용감히 싸운 노나라의 세 장수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도공은 세 장수에게 각각 병거와 갑옷을 하사했다. 제후군들을 각각 자기들 나라에 돌려보낸 도공은 복양성의 군주가 초나라를 도운 죄를 물어 성주의 직에서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그 종족들 중 현자를 뽑아 곽성(霍城)②에서 머무르게 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가 죽은 운반의 제사를 지내주도록 했다. 그해 가을 신군부장 순회(荀會)가 죽자 도공은 사마 위강이 군법을 제대로 집행한 공로를 인정하여 공석이 된 신군부장으로 임명하여 육경의 반열에 들게 했다. 위강의 후임에는 장로(張老)를 임명했다.③

그해 겨울 제2군이 정나라 정벌을 위해 출동하여 우수(牛首)④에 주둔하고 호뢰에는 군사를 증파하여 수비를 더욱 굳게 했다.

2. 삼가복정(三駕服鄭)

- 어가를 세 번 움직여 정나라를 심복시킨 진도공 -

그때 정나라에서는 대부 울지(尉止)가 란을 일으켜 공자비(公子騑), 공자발(公子發) 및 공자첩(公子輒) 등을 서궁의 조당에서 살해했다. 공자비의 아들 공손하(公孫夏)와 공자발의 아들 공손교(公孫僑)⑤가 각기 문중의 사병을 동원하여 울지를 공격했다. 세가 불리하게 된 울지는 북궁으로 도망쳤다. 공손채(公孫蠆)가 사병을 거느리고 와서 울지를 공격하고 있던 공손하와 공손교의 군사들과 합류하여 도왔다. 울지의 일당들을 색출하여 모조리 죽인 세 사람은 공자가(公子嘉)를 상경으로 세웠다. 정나라의 변란이 당진군 진영에 전해지자 란염(欒檿)이 순앵을 찾아와 말했다.

「변란이 일어난 틈을 타고 쳐들어가면 정나라는 우리에게 대항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신속히 진격하여 정나라를 얻으십시오.」

「상대국의 내정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공격하는 행위는 옳지 않은 일이다.」

지앵은 오히려 정나라에 대한 공세를 잠시 늦추도록 했다. 이윽고 당진국의 호의를 알게 된 공자가가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자 지앵이 허락했다. 초나라의 영윤 자낭(子囊) 공자정(公子貞)이 군사를 끌고 정나라를 구원하려 왔을 때는 당진의 군사들은 이미 모두 퇴각해 버린 뒤였다. 그러자 정나라는 당진과의 화의를 파기하고 또다시 초나라와 맹약을 맺었다. 사서에 ‘진도공이 정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세 번 어가를 움직였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번의 출동은 그 세 번 중 첫 번째에 해당했다. 그때가 주영왕 9년, 기원전 563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해 여름철에 당진의 도공은 정나라가 여전히 복종하지 않자 다시 제삼군을 출동시켜 정나라를 정벌하게끔 했다. 송나라 상수의 군대가 먼저 정나라 도성의 동문에 당도하였고 위나라 상경 손림보(孫林父)도 군사를 끌고 와서 정나라 북쪽 변경에 예(郳))나라 군사들과 함께 진영을 세웠다. 진나라 신군원수 조무와 그 부수 위강은 정나라 도성 서쪽 근교에 진을 치고, 중군원수 지앵은 본대의 대군을 북림(北林)의 서쪽으로 우회하여 남문 쪽에 주둔한 후에 각 방면의 군사와 날짜를 정해 일시에 정나라를 포위하기로 했다. 정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다시 화의를 청했다. 순앵이 정나라의 화의 신청을 받아 들여 곧바로 군사들을 송나라 땅으로 퇴군 시켰다. 정간공이 친히 송나라의 박성(亳城)⑥으로 왕림하여 당진 및 제후국 군사들을 호군했다. 이어서 간공은 순앵 등과 삽혈의 의식을 행하고 맹약을 맺은 후에 각기 군사를 이끌고 헤어졌다. . 이것이 세 번의 출병 중 두 번째였다.

정나라가 다시 당진과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초공왕은 대노하여 공자정을 섬진에 보내 군사를 청해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그때 초공왕의 부인은 섬진 경공(景公)의 여동생으로 두 나라는 서로 인척관계를 맺어 동맹을 맺고 있었다. 섬진의 경공은 대장 영첨(嬴詹)으로 하여금 전차 300승을 인솔하고 가서 초나라를 돕게 했다. 공왕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형양성(滎陽城)⑦을 향하여 출발하면서 말했다.

「이번에 정나라를 멸하지 않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

한편 박성 북쪽에서 당진과 맹약을 맺고 귀국한 정간공은 이번에는 거꾸로 조만간에 닥쳐올 초나라의 정벌을 예상하고 군신들을 불러 대책을 마련하려고 했다. 여러 대부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야흐로 당진의 세력이 초나라보다 강력합니다. 그러나 당진의 군사들은 출병할 때는 늦장을 부리며 천천히 하지만 퇴군할 때는 매우 신속합니다. 두 나라가 지금까지 직접 교전하여 자웅을 정하지 못한 관계로 아직까지 병화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당진이 온힘을 다하여 우리나라를 위하여 싸운다면 초나라는 당해 내지 못하고 반드시 싸움을 피할 것입니다. 오늘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당진만을 섬겨야합니다.」

공손사지(公孫舍之)가 계책을 내놓았다.

「당진이 우리 정나라를 위해서 전력을 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격분시켜야 합니다. 당진군의 방향을 송나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선수를 써서 송나라를 공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진과 관계가 가장 좋은 나라는 송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에 송나라를 공격하면 당진은 저녁에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당진이 능히 제후국들과 힘을 합하여 우리나라를 쳐들어온다면 초나라는 정녕코 당진을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초나라에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여러 대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대단히 훌륭한 계책입니다.」

정나라의 군신들이 회의를 계속 하고 있던 중에 초나라 군대가 섬진의 원병과 회동하기 위해 정나라로 향하여 행군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첩자가 전했다. 공손사지가 기뻐하며 말했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보고 당진을 섬기라고 하는 뜻이다.」

여러 사람들이 공손사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사지가 대답했다.

「섬진과 초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면서 공격해오면 정나라는 전쟁터가 되어 폐허가 되고 맙니다. 두 나라 연합군이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오기 전에 도중에 마중하여 우리와 같이 송나라를 공격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당진으로 붙었을 때 초나라로부터의 공격을 면할 수 있으며, 둘은 당진을 격분시켜 군사를 하루라도 빨리 출동하게끔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일거양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간공이 공손사지의 계책을 받아 들여 그로 하여금 밤을 도와 속도가 빠른 경거(輕車)를 타고 정나라 남쪽의 국경 쪽으로 보내 초군을 마중하게 했다. 사지는 영수를 건너 30여 리도 못 가서 초나라 군사를 만나게 되었다. 공손사지가 마차에서 내려 초공왕의 어가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공왕이 공손자시를 보자 얼굴에 노기를 띠면서 말했다.

「정나라가 수시로 맹약을 배반하고 신의를 저버리니 내가 이번에는 그 죄를 물으러 왔다. 너는 무슨 일로 여기 까지 왔느냐?」

「우리나라 군주께서는 그 동안 베풀어주신 대왕의 은혜를 결코 잊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대왕의 위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평생토록 폐하의 보살핌 아래 있고자 하며 폐하의 그늘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포학한 당진이 송나라와 힘을 합쳐 쳐들어와 우리나라의 강토를 유린하기를 그치지 않아 저희 군주께서는 사직이 끊어질까 두려워하여 대왕을 계속 받들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잠시 그들과 화의를 맺고 그들의 군사들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당진의 군사가 이미 물러갔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대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초나라의 속국입니다. 대왕께서 우리들의 진실된 마음을 오해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저희 군주께서는 저를 특별히 보내 대왕을 영접하게 하여 우리의 마음속 충정을 아뢰도록 소신에게 명하셨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우리 정나라를 위하여 송나라에 군사를 보내 우리나라를 침범한 죄를 물어주신다면 저희 군주께서는 대왕의 말고삐를 잡고 선봉이 되어 견마지로를 다 함으로써 앞으로는 배신하지 않겠다는 뜻을 명명백백히 맹세하고자 합니다.」

성이 났던 공왕이 얼굴 표정을 바꾸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의 군주가 만약 나를 따라 송나라를 정벌하는데 종군하겠다면 과인은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소신이 행장을 꾸려 대왕을 뵈려 떠날 때 저희 군주께서는 우리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해서 동쪽 국경에서 대왕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감히 대왕의 군사 보다 늦게 도착할 수 없어서 입니다.」

「비록 일이 그렇다고 하지만 우리 초군을 돕기 위해 출전한 섬진군의 대장 서장(庶長) 무(武)와 형양성에서 회동하기로 약속했으니 잠시 기다렸다가 섬진군과 합류해서 송나라를 공격하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섬진의 도성인 옹성(雍城)은 이곳에서 너무 멀뿐만 아니라 반드시 당진과 주나라 땅을 밟아야만 저희 정나라에 당도 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한 사람의 사신을 섬진군 군영에 보내시어 군사들의 행군을 중지시켜 주도록 하옵소서. 대왕의 위엄과 사기가 충천한 초나라의 군사에 저희 정나라 군사가 앞장서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서융의 오랑캐 군사를 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공왕이 사지의 말을 기쁘게 받아 들여 사람을 보내 섬진군을 돌아가게 하고 자기는 공손사지와 함께 정나라 동쪽 국경으로 향해 갔다. 초군의 행렬이 신(莘)⑧이라는 곳의 들판에 이르렀을 때 정간공이 군사를 끌고 와서 초공왕을 배알했다. 두 나라 군사가 힘을 합하여 송나라를 공격하여 많은 인명과 재물을 약탈한 후에 돌아갔다. 송평공이 상수를 당진에 사자로 보내 초와 정 두 나라와 힘을 합하여 송나라 변경을 공격하여 크게 노략질해 간 일을 고했다. 도공이 과연 크게 노하더니 그 날로 즉시 군사를 일으켜 출동하여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이번에 출동해야 할 군사들은 제1군 이었다. 지앵이 나와서 도공에게 상주했다.

「초나라가 섬진에 원병을 청한 이유는 해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군사들을 출동시켜서 그 피로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 년에 두 번 정벌에 나선다면 초나라가 어찌 우리나라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출정하면 반드시 정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마땅히 우리 군사의 강한 모습을 정나라에 보여줌으로 해서 그들의 다시는 배반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옳으신 말씀이오!」

진도공은 즉시 송(宋), 노(魯), 위(衛), 제(齊), 조(曺) 거(莒), 주(邾),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郳)" 등 11개 국의 제후군들을 대대적으로 규합하여 일제히 정나라 경계로 쳐들어가서 신정성 동문 밖에 진채를 세웠다. 당진과 각 제후국의 군사들이 이르는 곳마다 정나라 백성들의 포로와 전리품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이번의 출전은 당진의 도공이 정나라를 복종시키기 위해 세 번에 걸친 출병 중 마지막 번째였다. 정간공이 공손사지에게 말했다.

「경의 계획대로 당진을 격분시켜 과연 군사가 신속히 당도했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오?」

「신이 한편으로는 당진의 군주를 알현하여 화의를 청하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초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초나라가 군사를 신속하게 출동시키면 당진과 교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렸다가 싸움에서 이긴 나라와 맹약을 체결하고 조공을 바치며 받들면 됩니다. 만일 초나라가 군사를 못 보낸다면 우리는 당진과 수호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통고하고, 당진군 진영에 많은 재물을 준비하여 조공을 바치면 당진은 반드시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초나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간공이 사지의 말을 따라 시행토록 했다. 이어서 대부 백병(伯騈)을 시켜 당진군의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서를 써서 공손양소(公孫良霄)와 태재 석착(石𤟭)에게 주어 초나라에 보내 공왕에게 전하게 했다. 정나라의 국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진군이 또 다시 우리나라에 쳐들어 왔습니다. 열 한 나라의 제후들이 각기 군사를 내어 그 군사의 수가 매우 많아 정나라의 멸망이 눈앞에 당도했습니다. 대왕께서 부디 병사를 내어 그들에게 초나라의 위엄을 보여 당진과 제후국들의 군사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해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초나라가 저희를 구해 주지 않는다면 저희는 어쩔 수 없이 당진으로부터 안전을 찾아야 합니다. 대왕께서 우리를 가엽게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공왕이 크게 화를 내며 공자정을 불러 그 계책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의 병사들은 송나라를 토벌하고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숨도 고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어찌 또다시 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정나라를 당진에 양보했다가 후에 다시 도모해야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공왕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공손양소와 석착을 군부에서 결박하여 감금하고 정나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염선이 이 일을 두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진초가 정나라를 다투다가 대를 이어 원수가 되었는데,

진군은 질풍처럼 달려왔으나 초군은 휴식을 취해야 했다.

정나라 사자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잡아 가두었는가?

모두가 순앵의 분군지책(分軍之策) 때문이었다.

楚晉爭鋒結世仇(초진쟁봉결세구)

晉兵迭至楚兵休(진병질지초병휴)

行人何罪遭拘執(행인하죄주구집)

始信分軍是善謀(시신분군족선모)

도공이 이끄는 당진군이 소어(蕭魚)에 당도하여 진채를 세웠다. 정나라의 사자 백병이 당진군의 진영에 당도하여 도공을 배알하였다. 도공이 보고 성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화의를 맺고 놓고도 나를 기만한 적이 이번 한 번뿐만이 아니다. 이번에도 그대가 온 목적은 우리 군사들의 예기를 누그러뜨릴 속셈이지 않은가?」

백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희 군주께서는 이미 사람을 별도로 초나라에 파견하여 그들과의 맹약을 파기한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고 있겠습니까?」

「내가 너희들을 성심과 신의로서 대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반복하여 두마음을 품고 신의를 저버린다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제후들의 공분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너는 속히 돌아가 그대의 군주와 상의하여 상세하고 확실하게 뜻을 정하고 난 후에 다시 와서 고하기 바란다.」

「저희 군주께서는 이미 목욕재계하고 저를 사신으로 보낸 이유는 저희 정나라의 장래를 군후께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군후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너희들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맹약을 맺도록 하겠다.」

도공은 즉시 신군원수 조무에게 백병과 같이 정나라 도성에 들어가서 정간공과 삽혈을 행하고 맹약을 맺도록 명했다. 정간공도 역시 공손사지에게 명하여 조무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도공을 배알하고 자기와의 회견날짜를 받아 오라고 했다. 그해 겨울 12월에 정간공이 친히 당진의 군중에 당도하여 여러 제후들과 회동하였다. 간공은 삽혈을 행하여 맹약 맺기를 청하자 도공이 말했다.

「두 나라간의 맹약은 옛날에 이미 맺었습니다! 정백께서 신의가 있다면 하늘이 굽어보고 있을 터인데, 구태여 또다시 삽혈을 하면서 맹약의 의식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도공은 곧바로 령을 내려 정나라 포로들의 결박을 풀어서 돌려보내고 동시에 모든 군사들에게 정나라의 백성이나 재물을 추호도 범하지 못하게 령을 내려 만일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또한 호뢰를 지키던 수비군들도 모두 철수시키고 정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중원의 여러 제후들이 간했다.

「정나라는 아직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또다시 맹약을 배반한다면 호뢰와 같은 성을 다시 쌓아 지키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 나라의 군사들이 수없이 출동을 해서 오랫동안 노고가 쌓였을 뿐만 아니라 언제 전쟁이 끝날지 기한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마땅히 정나라와 우호관계를 다시 시작하는데 있어서 나는 진심을 다하여 대하고자 합니다. 내가 정나라를 저버리고자 하지 않는데 정나라가 나를 저버리기야 하겠습니까?」

당진의 도공은 정간공을 향하여 다시 말했다.

「나는 정나라가 싸움을 치르느라 고통을 많이 받고 있어 지금은 두 나라가 서로 병사들을 쉬게 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알고 있습니다. 금후로는 정나라가 당진을 섬기던 초나라를 섬기던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기 바랍니다. 우리를 섬기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정간공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모든 제후들의 우두머리이신 군후께서 사람을 이렇듯 진심으로 대하시니 비록 금수라 할지라도 감읍할 텐데 항차 사람의 탈을 쓰고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저희가 또다시 맹약을 배반한다면 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

간공이 인사를 하고 정나라로 돌아갔다. 다음날 공손사지를 시켜 사은의 예물로 악사 3인, 여자악공 16인, 가종(歌鐘) 32개 , 장구와 북[박경(鎛磬)] 한 쌍, 바느질 잘하는 여인 30인, 초거(軘車)와 광거(廣車) 50대, 갑옷과 무기를 적재한 수레 100대를 바쳤다. 도공이 예물들을 받아들여 그중 여자 악공 8인과 가종 12개를 위강에게 주며 말했다.

「경이 나에게 융적의 여러 종족들과 화의하도록 깨우쳐 주어 중화의 여러 나라를 바르게 이끌게 했소. 그 결과 여러 제후들이 나의 옆에 모이게 해서 즐거움을 같이 나눌 수 있게 되었소. 이 즐거움을 경과도 같이 이 나누고자 함이니 결코 사양하지 말기 바라오.」

또한 병거 100승 중 삼분의 일을 떼어 순앵에게 하사하면서 말했다.

「경은 과인에게 분군의 계책을 내어 초나라를 피폐하게 하여, 이윽고 오늘에 이르러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정나라를 얻게 되었소. 이것은 모두가 경의 공로라고 할 수 있겠소!」

위강과 순앵 두 사람이 도공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의 말을 하였다.

「이 일은 모두가 주군의 영명하심과 여러 제후들의 노고 때문에 이루어졌음이지 어찌 감히 저희들의 공로하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두 경이 아니었으면 어찌 과인이 이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겠소? 경들은 결코 사양하지 마시오!」

두 사람이 도공의 하사품을 받았다. 이후에 열 두 나라의 병사들은 같은 날에 모두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도공은 다시 사신을 각 나라에 보내 군사를 출동시켜 준 노고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제후들에게 표했다. 중원의 제후들은 모두가 기뻐하였다. 이때부터 정나라는 당진에 귀속되어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되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노래했다.

반복무사한 정나라는 교활한 원숭이 같았는데

당진의 한 장군이 군사들에게 호미를 들려 속여서

정나라를 24년만에 당진의 품에 돌아오게 만들었다.

한 명의 충신이 전쟁보다 보다 낫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음이라!.

鄭人反覆似猱狙(정인반복사노저)

晉伯偏將詐力鋤(진백편장사력서)

二十四年歸宇下(이십사년귀우하)

方知忠臣勝兵戈(방지충신승병과)

한편 섬진의 경공은 초공왕의 통지를 받고 회군하던 섬진군에게 명을 내려 당진군의 본국을 공격하여 정나라를 구원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수를 도하하여 당진국의 영토로 진입한 섬진군은 역(櫟)⑨땅에서 당진의 수비군을 격파했으나 정나라가 당진에게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본국으로 회군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주영왕(周靈王) 11년, 기원전 561 년에 오나라의 군주 수몽이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수몽이 그의 네 아들 제번(諸樊), 여제(餘祭), 이매(夷昧), 계찰(季札) 등을 침상 앞으로 불러 당부하였다.

「너희들 사 형제 중 막내인 계찰이 가장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계찰로하여금 나의 뒤를 잇게 하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크게 창성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계찰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고 했으나 계찰이 막무가내로 고사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죽게 되면 제번은 여제에게 왕위를 전하고 여제는 이매에게, 이매는 계찰에게 전하도록 하여 절대로 그 아들들에게 전하지 말도록 하라. 그렇게 해서 계찰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면 사직으로서는 큰 다행일 것이다. 나의 명을 어긴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불효라 비록 몸은 지하에 있겠지만 내가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수몽이 말을 마치고 죽었다. 제번이 왕위를 계찰에게 넘겨주려고 말했다.

「이것은 부친의 유언이니 네가 이 나라의 왕위를 이어야하겠다.」

「이 동생은 부왕이 살아 계실 때에도 세자의 자리를 사양했었습니다. 이제 부왕이 돌아가셨는데 제가 어찌 왕위를 받겠습니까? 형님께서 만일 다시 한 번 더 저에게 왕위를 물려주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신다면 이 동생은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살겠습니다.」

제번은 할 수 없이 오나라의 왕위 승계 방법은 형제상속이라고 천명하고 부왕의 명에 따라 오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당진의 도공이 수몽의 죽음에 대한 조문과 제번의 즉위에 대한 축하의 사절을 보내 왔다.

다시 그 다음 해 즉 주영왕 20년, 기원전 560년에 당진의 6경들 중 순앵(荀罃), 사방(士魴) 및 위상(魏相)이 연이어 죽었다. 도공이 면산(綿山)⑩에서 군사들을 대대적으로 열병하고 범개를 중군원수로 임며하여 순앵의 뒤를 잇도록 하고자 했으나 범개가 사양하며 말했다.

「백유(伯游)가 저보다 연장입니다. 」

백유는 순언의 자다. 도공이 즉시 순언을 중군원수의 직에 명하고 범개를 부수로 했다. 그리고 한기를 상군원수로 삼고자 했으나 한기 역시 사양하며 도공에게 말했다.

「신은 조무보다 어질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공은 조무를 순언이 맡고 있었던 상군원수에, 한기를 그 부수로 삼았다. 란염은 옛날처럼 하군원수에 두었고 위강을 그 부수에 명했다. 신군은 마땅한 사람이 없어 그 대장을 임명하지 못했다. 도공이 말했다.

「설사 우리가 좋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나 대장에 임명하여 그 직위를 남발할 수는 없다!」

도공은 즉시 명령을 발하여 신군에 속한 군리들로 하여금 그 관속과 군졸 및 병거들을 이끌고 하군에 가게 하여 그곳에서 종군하게 하였다.⑪ 여러 대부들이 모두 말했다.

「주공께서 사람을 쓰는데 신중하기가 이와 같구나!」

도공은 당진의 모든 관리들로 하여금 그 맡은 바 직책에 전념하게 하여 아무도 감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당진은 이후로 크게 다스려져 문공과 양공 때의 치세를 부흥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신군은 아예 폐하고 그 군속과 병졸들을 모두 삼군에게 분산 편입시켜 후작국으로서의 제도를 따랐다.

3. 역림지역(棫林之役)

- 역림에서 다시 싸우는 당진과 섬진 -

그해 가을 9월에 초나라 공왕이 죽고 세자 소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가 곧 초강왕(楚康王)이다. 오왕 제번이 대장 공자당(公子黨)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에 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정벌하도록 했다. 초나라 장수 양요기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공자당을 활로 쏘아 죽였다. 오나라 군사들은 패하여 돌아갔다. 오왕 제번이 사자를 당진에 보내어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사실을 고했다. 도공이 제후들을 불러서 모이게 하고 그 대책을 의논하게 했다. 대부 양설힐(羊舌肹)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오나라가 초나라의 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공격하였다가 싸움에서 진 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일이니 동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섬진과 당진은 국경을 접한 이웃나라로써 대대로 혼인을 하여 좋은 관계를 맺어 왔는데 근자에는 초나라에 붙어 우리와 싸우고 있던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쳐들어와 우리 군사들을 역(櫟) 땅에서 파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이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섬진을 정벌하여 공을 이룰 수가 있다면 초나라의 세력은 더욱 고립시킬 수 있습니다.」

양설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도공은 순언에게 명하여 당진의 삼군에 속한 군사들과 정(鄭), 노(魯), 송(宋), 제(齊), 위(衛), 거(莒), 주(邾),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 등 12개 국 대부들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섬진을 정벌하도록 했다. 친정에 임한 도공은 당진의 국경에 이르자 그곳에서 머물며 첩보를 기다리기로 했다. 당진과 12제후국의 연합군들은 하수를 건너 섬진의 영토 안으로 호호탕탕 쳐들어갔다. 섬진의 경공은 당진과 제후국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독약이 든 포대 몇 개를 경수(涇水)의 상류에 풀게 했다. 노나라 대부 숙손표(叔孫豹) 휘하의 군사들과 거나라 군사들이 함께 앞장서서 경수를 건너는 도중에 물을 마셨다가 적지 않은 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을 본 다른 나라 군사들은 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다. 정나라 대부 공자교(公子蟜)가 위나라 대부 북궁괄(北宮括)에게 말했다.

「기왕에 우리가 남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공자교가 정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북궁괄이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제후들의 군사들은 모두 경수를 건너게 되어 역림(棫林)⑫에 영채를 세웠다. 이어 첩자가 돌아와 섬진군의 동태를 보고했다.

「섬진의 군사들이 다가와서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순언 즉 중행언이 각 군에게 령을 내리며 말했다.

「내일 새벽닭이 우는 시각에 출정하되 내 말의 머리가 향하는 곳으로 진군하라!」

하군원수 란염은 평소에도 중행언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는데 그가 내린 령을 전해 듣고는 화를 내며 말했다.

「군사를 움직일 때는 마땅히 각 군의 대장들을 불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은 후에 진퇴를 확실히 해야 하거늘 순언이 즉흥적으로 독단하여 어찌 삼군에 속한 많은 군사들에게 그가 탄 승마의 머리가 가는 곳으로 진격하란 말인가? 나 역시 하군원수라 나는 말머리는 동쪽을 향하게 하겠다.」

즉시 동쪽으로 진로를 바꾸어 하군의 본부병을 이끌고 경수를 다시 건너가 버렸다. 란염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 버리자 하군부장 위강이 보고 말했다.

「나는 하군원수에 속한 부장의 몸이라 내가 감히 중행언을 따를 수 없구나!」

위강도 역시 남은 하군의 군사를 이끌고 경수를 건너 란염의 본대로 합류했다. 어떤 사람이 란염이 한 말을 중행언에게 전했다. 중행언이 전해 듣고 말했다.

「내가 령을 분명하게 전하지 못했으니 그 허물은 나에게 있다 하겠다. 내가 내린 령이 이미 서지 않았으니 어찌 이번 싸움에서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중행언이 즉시 명하여 여려 제후국들의 군사들은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본국의 군사들 역시 철군하게 하였다. 그때 하군의 융우(戎右)⑬로 종군하고 있던 란염의 동생 란침(欒鍼) 혼자만은 유독 회군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범개의 아들 범앙에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출정한 목적은 섬진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는데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가면 우리의 치욕은 더 커지게 되지 않겠는가? 더욱이 우리 형제가 함께 이번 싸움에 종군했음에도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돌아 갈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나와 함께 섬진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진영으로 달려가 싸울 수 있겠는가?」

「그대가 나라의 치욕을 그토록 염두에 두고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마다할 수 있겠는가?」

즉시 두 사람은 자기들 휘하의 병사들을 규합하여 중행언을 따라 경수를 건너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쪽에 있는 섬진군의 진영을 향하여 달려갔다.

한편 섬진의 경공은 대장 영첨(嬴詹)과 공자무지(公子無知)로 하여금 병거 400승을 이끌고 역림(棫林)에서 50리 되는 곳으로 가서 영채를 세워 주둔하도록 명하고, 사람을 보내 당진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섬진군 진영 앞 동쪽 끝에서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더니 한 떼의 병거가 무리를 지어 자기들 앞으로 진격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공이 황급히 공자무지로 하여금 군사들을 이끌고 영채를 나가 요격하도록 명했다. 용기백배한 란침이 섬진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자 범앙이 옆에서 도왔다. 당진군의 선두에서 돌진하던 란침이 섬진군의 갑병 10여 인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섬진군이 당하지 못하고 병장기를 수습하여 자기 진영으로 후퇴하려고 하다가 적장의 뒤에 후속부대가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북소리를 울려 군사들을 한 곳으로 모은 후에 란침을 에워쌌다. 범앙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란침에게 말했다.

「섬진의 군세가 너무 커 우리가 당할 수 없으니 이만 물러나는 편이 좋겠소.」

그러나 란침은 범앙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윽고 섬진의 대장 영첨이 대군을 몰고 란침이 싸우고 있는 곳에 당도하였다. 란침은 다시 몇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였으나 몸에 화살을 7대나 맞고서는 힘이 다해 죽었다. 범앙은 가까스로 섬진군의 포위망을 뚫고 있는 힘을 다하여 병거를 몰아 간신히 목숨을 건져 경수를 건너 진을 치고 있던 당진군의 본대에 합류했다. 란염은 혼자만 돌아 온 범앙에게 물었다.

「내 동생 침은 어떻게 되었는가?」

「싸움 중에 이미 죽었습니다.」

자기 동생이 싸움 중에 전사했다는 말을 들은 란염은 대노하여 과를 손에 잡더니 범앙을 향해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범앙이 감히 란염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중군 막사 안으로 도망쳤다. 란염이 계속 뒤를 쫓자 범앙은 몸을 숨겼다. 범앙의 부친 범개가 란염을 맞으면서 물었다.

「사위는 어찌 화를 그리 심하게 내는가?」

-란염의 처는 란기로 곧 범개의 딸이었기 때문에 사위라고 부른 것이다.-

란염이 노기발발하며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처남이 제 동생을 꾀어서 섬진의 진영으로 싸우러 갔다가 내 동생은 싸우다가 죽었으나 처남은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처남이 제 동생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인께서는 반드시 처남을 다른 나라로 쫓아내야만 제가 화를 풀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 나라에 살다가 제 눈에 띄게 된다면 처남은 반드시 제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의 내막은 내가 모르는 바이나 사위의 분노가 그렇듯 높으니 내 마땅히 앙을 다른 나라로 쫓아내리라!」

범앙이 장막 뒤에서 그 부친이 하는 말을 듣고 막사의 후문을 통하여 탈출하여 섬진으로 도망쳤다. 섬진의 경공은 범앙이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범앙이 일의 내막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경공이 대단히 기뻐하며 범앙을 객경의 예로써 대하였다.

4. 진진통호(晉秦通好)

- 범앙의 활약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통하는 섬진과 당진 -

어느 날 경공이 범앙에게 물었다.

「당진의 군주는 어떠한 사람이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줄 알며 그 신하를 잘 알아 적재적소에 쓸줄 아는 군주입니다.」

「대부들 중에는 누가 가장 어질다고 할 수 있소?」

「조무는 글을 잘하고 덕이 많은 사람입니다. 위강은 용기있는 사람이지만 어지럽지 않으며, 양설힐은 역사에 밝습니다. 장로는 믿음이 깊고 지혜가 있으며 기오는 일에 임하여 결코 허둥대는 법이 없습니다. 또한 신의 부친 범개는 일의 요체를 능히 식별할 수 있는 분이라 모두가 일세를 풍미할 만한 인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공경대부들 역시 모두 정령과 법규에 익숙하여 그 맡은바 직책을 잘해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은 감히 이 앙이 가볍게 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진의 어떤 세가가 먼저 망하겠는지 알 수 있겠소?」

「란씨들이 가장 먼저 망할 것입니다.」

「란씨들이 너무 교만하기 때문이오?」

「란염이 비록 교만하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그의 당세까지는 미치지 않겠으나 그의 아들 대에 가면 틀림없이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찌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오?」

「죽은 란서는 백성들을 돌보고 선비들을 사랑하여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란무자(欒武子) 서(書)가 시군의 죄를 지었지만 오히려 나라 안에서는 그 일로 란무자를 비난하지 않고 그의 높은 덕을 기려 공경했습니다. 옛날 소공(召公)을 사모하던 백성들은 소공이 쉬었던 감당나무⑭까지도 사랑했습니다. 하물며 그 자식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란염이 죽게 된다면 사정은 바뀔 것입니다. 비록 란염이 선행을 베풀기는 했지만 백성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선친 란서가 베푼 덕도 이미 란염에게는 먼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란염에게 원한을 갚고자 하는 사람들이 필시 들고일어날 것입니다.」

경공이 탄식하며 말했다.

「경은 가히 사람의 존망을 손금 보듯이 읽어 내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소.」

섬진의 경공은 즉시 범앙의 일을 범개에게 알리기 위해 섬진의 서장(庶長) 무(武)를 사절로 보내 당진과 옛날처럼 수호를 맺고 다시 범앙의 작위를 돌려 달라고 청했다. 도공이 허락하여 범앙은 당진에 귀국할 수 있었다. 도공은 범앙과 란염 두 사람을 공족대부에 명하고 한편으로는 란염에게 유지를 내려 범앙에게 원한을 품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후로 섬진과 당진이 통하여 싸우지 않게 되어 춘추시대가 끝날 때 까지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 이를 두고 지은 시가 있다.

동서의 이웃나라가 몇 대에 걸쳐 혼인을 맺어오다가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어 매일 서로 싸우게 되었으나

이제는 군사를 대신한 옥백이 오고가게 되었으니

옛날부터 이웃끼리 화친함은 좋은 일이었다.

西鄰東道世婚姻(서린동도세혼인)

一旦尋仇鬪日新(일단심구투일신)

玉帛旣通兵革偃(옥백기통병혁언)

從來好事是和親(종래호사시화친)

그 해에 란염이 죽고 그의 아들 란영(欒盈)이 사위하여 하군부장을 맡았다.

5. 因歌逐主(인가축주)

- 노래로 인해 그 군주를 쫓아낸 위나라의 상경 손림보 -

한편 위헌공(衛獻公)의 이름은 간(衎)이라 했다. 주간왕 10년, 즉 기원전 576년에 그의 부친 위정공(衛定公)의 뒤를 이어 위나라의 군위에 올랐다. 헌공은 정공의 상중에 있으면서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모친 정강(定姜)은 그가 세자로 있을때부터 군주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틈나는 대로 누누이 간했지만 헌공은 듣지 않았다. 이윽고 헌공이 위나라의 군주 자리를 물려받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헌공은 날이 갈수록 더욱 방종해졌다. 헌공이 총애하는 자는 모두 중상모략만을 일삼는 아첨배였다. 그리고 그가 즐겨하는 일은 고작 북을 치거나 사냥을 하는 것밖에 없었다. 정공의 치세 때는 그의 동모제인 공자흑견이 형의 총애를 믿고 정사를 독단했었다. 흑견에게는 공손표(公孫剽)라는 아들이 있었다. 표가 부친의 작위를 이어 받아 대부가 되었다. 공손표는 제법 권모와 지략을 갖추고 있는 자였다. 상경 손림보와 아경 영식(寧殖)은 무도한 헌공에게 실망하며 공손표와 손을 잡았다. 손림보는 또한 비밀리에 당진과도 통해 밖으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리고 나라 안의 부고에 들어 있는 명기와 폐백 및 보물들을 모두 척(戚)⑮땅으로 옮기고 자기의 처자들을 데려다 살았다. 헌공은 손림보가 반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였으나 첫째는 증거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둘째는 그의 큰 세력을 두려워하여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헌공이 손림보와 영식 두 경과 점심을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두 경이 모두 아침 일찍 조복으로 갈아 집고 궁문 앞에서 서서 헌공이 들어오라는 명을 내리기만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와서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궁중에서도 밖으로 나와 자기들을 부르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두 경이 마음 속으로 의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두 경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에 허기가 매우 졌다. 그들은 기다리다 지쳐 궁문을 두드려 헌공의 알현을 청했다. 궁문을 지키는 내시가 나와 말했다.

「주공은 후원 뒤뜰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고 계시니 두 분 대부들께서 만약 상견을 하시고 싶으시면 직접 찾아가 뵙기 바랍니다.」

손림보와 영식이 마음속으로 크게 노하여 배고픔을 참고 궁궐의 후원으로 곧바로 걸어 들어가 보니 헌공은 사냥 나갈 때 쓰는 모자를 쓰고 그의 활 선생인 공손정(公孫丁)과 함께 활쏘기 시합을 하고 있었다. 헌공이 두 사람이 자기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사냥모자도 벗지 않고 활을 어깨에 걸치고 두 사람을 향하여 다가오면서 물었다.

「두 경들께서는 오늘 어쩐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

손림보와 영식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주공께서점심을 같이 먹자고 약속하시어 저희들은 주공의 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 말씀이 계시지 않아 여태껏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군의 명을 거슬리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과인이 활쏘기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경들과 한 점심약속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소. 두 분 경들께서는 이번에는 그냥 돌아가시고 내가 날짜를 다시 잡아 다음에 점심을 한번 하기로 합시다.」

헌공이 말을 마치자 그때 마침 후원의 하늘 위로 한 떼의 기러기가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가고 있었다. 헌공이 보고 공손정에게 말했다.

「그대와 나 두 사람 중 누가 더 많이 저 기러기를 쏘아 맞출 수 있는지 내기를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헌공에게서 받은 치욕을 가슴에 품고 영식과 함께 물러 나온 손림보가 말했다.

「주공이 유희에 탐닉하고 소인배들에게 둘려 쌓여 대신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례하게 굴고 있소. 우리들은 앞으로 머지않아 주공으로부터 화를 면하기 힘들 것 같은데 어찌해야 하겠소?」

「주군이 무도하니 앞으로 있을 화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도 힘들 것입니다. 어찌 남에게 화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내 뜻은 공자표(公子剽)를 새로운 군주로 세웠으면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십니까?」

「대감의 말이 심히 합당합니다. 대감과 제가 뜻을 같이하여 기회가 오면 거사를 행하기로 합시다.」

두 사람이 말을 마치고 헤어져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손림보가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끝내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자기의 봉지인 척읍으로 달려가서 가신 유공차(庾公差)와 윤공타(尹公佗)를 몰래 불러들이고 가병들을 무장시켜 거사를 위한 만반의 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의 큰아들 손괴(孫蒯)를 헌공에게 보내 정황을 엿보게 했다. 손괴가 위나라 도성으로 들어가 조당에서 헌공을 배알하고 거짓으로 말했다.

「신의 부친께서 갑자기 몸살이 나서, 잠시 하상(河上)에 머물며 몸조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신 와서 문후를 올립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헌공이 듣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대의 부친의 몸살은 일전에 나로 인하여 너무 오랫동안 배를 곯았기 때문인 듯 하다. 내가 오늘은 그 아들까지 굶게 만들 수 없음이라!」

헌공이 즉시 내시에게 명하여 술과 음식을 내와 손괴를 접대하라 시키고 다시 악공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여 술을 권하라고 했다. 태사(太師)가 헌공에게 물었다.

「무슨 곡으로 불러야 합니까?」

「<교언(巧言)>⑯의 마지막 장은 세상일을 제법 잘 풍자하고 있다. 그 노래가 어울릴 것 같다.」

태사가 헌공에게 상주했다.

「그 곡의 노래말은 상서롭지 못하여 연회의 즐거운 분위기를 해칠까 두렵습니다.」

사조(師曺)가 헌공 옆에 있다가 태사를 향해 큰소리로 외쳐 꾸짖었다.

「주군께서 듣고 싶으시다 하여 부르라고 하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원래 사조는 북과 거문고에 정통한 악공이었다. 옛날 헌공은 사조에게 북과 거문고를 타는 방법을 자기의 애첩에게도 가르치라고 명했다. 그러나 헌공의 애첩은 사조의 가르침에 잘 따르지 않았다. 사조가 헌공의 애첩을 채찍으로 10여대를 때렸다. 애첩이 눈물을 흘리며 헌공에게 사조가 자기를 채찍으로 때렸다고 하소연했다. 헌공은 사조를 붙잡아 와서 그 애첩이 보는 앞에서 채찍으로 300대를 때리게 했다. 그 일로 해서 사조는 가슴속에 한을 품고 있었다. 그날 헌공이 부르라고 명한 《교언(巧言)》의 마지막 장은 대단히 상서롭지 못한 노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옛날의 원한 때문에 고의로 태사에게 부르게 하여 손괴의 노여움을 일으키려고 했다. 곧이어 태사가 목소리를 길게 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기 저 사람은 누가인가?

하수의 물가에 산다고 하네!

완력도 용기도 없으면서

덮어놓고 분란의 불씨를 일구네!

彼何人斯(피하인사)

居河之麋(거하지미)

無拳無勇(무권무용)

職爲亂階(직위란계)

다리는 부어 올라 종기가 났으니,

그대 용기는 무엇에 쓰겠는가?

하는 일이라고는 모략뿐이니,

그대와 같은 무리가 얼마나 되랴?

旣微且尰(기미차종)

爾勇伊何(이용이하)

爲猶將多(위유장다)

爾居徒幾何(이거도기하)

헌공이 《교언》의 마지막 장을 부르게 한 이유는 손림보가 하상에 머물면서 모반을 꾀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노랫말을 들려줌으로 해서 그에게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교언》의 노랫말을 들은 손괴는 좌불안석이 되어 어찌할 줄 몰라 하더니 오래 앉자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가겠다고 고했다. 헌공이 손괴를 행해 말했다.

「너는 돌아가거든 태사가 부른 노랫말을 기억했다가 너의 부친에게 전해라! 너의 부친은 비록 하상에 있다 하지만 그가 반란을 꾀하는지 휴식을 꾀하는지 과인은 이미 알고 있음이라! 부디 근신하여 좋은 마음으로 살아야 몸에 든 병을 낳을 수가 있지 않겠는가?」

손괴가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말만 반복하고 헌공의 면전에서 물러났다.

손괴가 척읍으로 돌아와 헌공의 말을 전했다. 손림보가 말했다.

「주공이 나를 대하기를 참으로 심히 태만히 하는 구나! 나는 결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대부 백옥(伯玉) 거원(蘧瑗)은 위나라 사람들이 존경하는 현자다. 만약 내가 그의 지지를 얻어 거사를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손림보는 곧바로 아무도 몰래 위나라 도성으로 잠입하여 거원을 찾아가 자기의 뜻을 말했다.

「주공이 포학무도한 군주라는 사실을 당신도 다 알고 있는 일이요. 주공이 계속 정사를 등한히 하고 폭정을 펼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다면 어찌하려고 하시오?」

「신하된 자로서 그 군주를 모시는 방법은, 간하여 그 군주가 받아들이면 다행스러운 일이고,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나면 되는 것이지 다른 방법은 모르오.」

거원의 단호한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한 손림보는 위나라 도성에서 빠져 나와 척읍으로 되돌아갔다. 거원은 그 날 바로 짐을 싸서 노나라로 달아났다.

손림보가 가병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쳐들어가 구궁(邱宮)의 헌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헌공이 알고 두려워하여 사자를 림보에게 보내 화의를 맺자고 청했다. 림보는 헌공의 사자를 잡아서 죽였다. 헌공은 다시 사람을 시켜 영식이 순림보에게 호응하는 지의 여부를 살펴보도록 한 후에 북궁괄(北宮括)을 불렀으나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호위무사 공손정(公孙丁)이 곁에 있다가 말했다.

「사태가 매우 급하게 되었습니다. 속히 이곳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6. 射爲背師 不射爲戮(사위배사 불사위륙)

- 활을 쏘면 스승을 등지게 되고 쏘지 않으면 군주에게 죄를 얻어 죽게 된다. -

헌공은 즉시 궁궐을 지키는 갑사 200여 명을 모아 일 대를 이루고 활을 옆구리에 찬 공손정과 함께 자기를 따르게 했다. 헌공과 그 호위 군사들은 궁궐의 동문을 열고 나와 제나라를 향해 달아나려고 했다. 손괴와 손가(孫嘉) 두 형제가 군사들을 이끌고 헌공의 뒤를 쫓아가 하택(河澤)에서 따라 잡아 위헌공 일행을 공격했다. 헌공을 따라나섰던 200여 명의 군사들은 죽거나 아니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리고 곁에 남은 인원은 공손정을 위시한 10여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손정의 귀신같은 활 솜씨는 단 한 발도 빗나감이 없이 헌공 일행을 향해 접근해 오는 추격군을 명중시켜 죽이고 헌공을 보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달아나곤 했다. 손씨 형제는 감히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그들이 3리도 미처 가기도 전에 별도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던 유공차(庾公差)와 윤공타(尹公佗) 두 사람의 장수를 만났다. 두 장수가 손씨 형제에게 말했다.

「상국의 명령을 받들어 위후를 붙잡으러 가고 있습니다. 」

손괴와 손가 두 형제가 대답했다.

「위후를 따르고 있는 자들 중에서 활의 명수가 있으니 두 장군은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유공차가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 사람은 아마도 나의 스승 공손정일 것이다!」

원래 윤공타는 유공차에게서 궁술을 배웠고, 다시 유공차는 공손정에게서 궁술을 배워 세 사람은 같은 문하 사람이라 피차 서로간의 활 솜씨를 잘 알고 있었다.

윤공타가 손씨 형제의 말을 듣고 말했다.

「위후가 멀리 도망가지 못한 것 같으니 빨리 쫓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다.」

두 사람이 위후의 뒤를 쫓아 약 15리 정도 달려가자 먼 발치에서 그들 일행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 있었다. 그때 위후가 탄 수레의 어자가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공손정이 대신 말고삐를 잡고 수레를 몰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공손정은 멀리서 자기 일행을 쫓아오는 일행 중 한 사람은 자기의 제자 유공차임을 알아보고 헌공에게 말했다.

「지금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추격군의 장수 중 한 명은 신의 제자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어찌 해칠 수 있겠습니까? 주공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손정은 즉시 수레를 멈추고 유공차 일행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유공차가 헌공이 타고 있던 수레가 가까이 다가오자 곁에 있던 윤공타에게 말했다.

「과연 수레에 타고 있는 분은 나의 스승일세 그려!」

유공차는 즉시 수레에서 내려 멀리 있는 공손정을 향해 절을 올렸다. 공손정이 손을 높이 들어 답례하며 다시 손을 옆으로 젓더니 유공차에게 뒤로 물러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유공차가 수레에 올라타며 말했다.

「오늘의 일은 우리가 비록 스승과 제자 사이이지만 각기 그 주인을 위해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만약 활을 쏘게 되면 그것은 스승을 쏘는 행위이고, 그렇다고 쏘지 않으면 바로 주인을 배신하는 행위가 됩니다. 저에게 양쪽의 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유공차는 전통에서 화살을 빼어 들고 수레바퀴에 부딪쳐 화살촉을 떼어 내더니 공손정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스승님은 놀라지 마십시오!」

유공차는 계속해서 4개의 화살을 날려서 공손정이 타고 있던 수레 전면의 횡목(橫木)과 후면의 가로목 좌우 양쪽에 명중시키고 단지 수레에 타고 있던 헌공과 공손정을 맞추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유공차가 공적인 일을 수행했다는 의미와 함께 스승을 공경하는 개인적인 정리도 함께 표현한 행동이었다. 유공차는 4개의 화살을 쏘기를 마치자 공손정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스승님은 부디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유공차가 수레의 말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가자 공손정도 역시 수레를 몰아 제나라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헌공을 따라 잡은 후에 자기의 궁술을 발휘하여 공을 세우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윤공타는 자기의 스승인 유공차로 인해 감히 앞으로 나서서 못하고 있다가 돌아가게 되어 마음속에서 점점 후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윤공타가 유공차에게 말했다.

「스승께서는 공손정의 제자라 온정을 베풀었다 하겠지만 저는 당신의 제자이니 공손정과 저 사이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승의 은혜는 가볍다고 할 수 없지만 주인의 명은 더 중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무슨 면목으로 우리의 은혜로운 주인을 뵐 수 있겠습니까?」

「내 스승님의 궁술은 귀신의 솜씨와 같아서 초나라의 신궁 양요기(養繇基)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신 분이다! 너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 말아라!」

윤공타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수레를 되돌려 위후의 일행을 다시 쫓아갔다.

《제62회로 계속》

주석

①사수(泗水) : 지금의 산동성 신문현(新汶縣)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쪽의 곡부시(曲阜市)를 거쳐 미산호(微山湖)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서주시(徐州市)를 거쳐 동으로 흐르다가 동쪽의 기수(沂水)와 합류하고 다시 홍택호(洪澤湖)에 이르러 회수(淮水)와 합쳐졌던 강의 이름.

②곽성(霍城) : 지금의 산서성 곽현에 있었던 당진의 영토로서 분수 강안에 있었다.

③도공 10년 기원전 563년에 다시 개편한 당진의 군제표

군별(軍別)

원수(元帥)

부수(副帥)

중군(中軍)

순앵(荀罃)

범개(范匃)

상군(上軍)

순언(荀偃)

한기(韓起)

하군(下軍)

란염(欒黶)

사방(士魴)

신군(新軍)

조무(趙武)

위강(魏絳)

공족대부(公族大夫): 한무기(韓無忌) : 중군사마(中軍司馬) : 장로(張老), :중군상대부(中軍上大夫) : 위힐(魏頡) : 중군정위(中軍正尉) : 기해(祁奚) : 중군부위(中軍副尉): 양설직(羊舌職)

④우수(牛首) :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 남 40키로의 통허현(通許縣) 부근의 정나라 영토

⑤공손교(公孫僑) : 자산(子産)은 그의 자다.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522년에 죽었다. 공자보다 약 50년 앞선 사람이며 제나라의 안영(晏嬰)과 동시대 사람이다. 시호(諡號)는 성자(成子)다. 정간공(鄭簡公 : 재위 BC565-530년) 때 상경의 직책을 맡아 나라의 국정을 쇄신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미신을 타파하고, 전답의 경계를 정돈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으며, 안무정부(按畝征賦) 제도를 정립하여 부세의 혁신을 꾀하고, 성문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법률에 따라 다스렸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여 향교(鄕校)를 창시하였다. 정나라는 자산이 등장함으로 해서 과거 7-80년 간 당진과 초나라 사이에 끼어 패권 다툼의 와중에서 끊임없는 전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공자(孔子)가 자산에 대해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자산에게는 군자다운 점이 네 가지가 있었으니 자기가 일을 행할 때는 공손했으며, 윗사람 섬길 때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했으며 백성들을 다스릴 때는 은혜를 베풀고 또한 의를 행하게 하였다.(子謂子産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⑥박성(亳城) : 지금의 하남성 조현(曹縣) 남쪽에 있었던 춘추 때 송나라 영토로서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이 처음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⑦형양성(滎陽城) :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서 약 20키로에 있는 형양시(滎陽市) 경내에 있었던 춘추 때 정나라의 영토.

⑧신(莘) : 지금의 산동성 신현(莘縣) 경내 동북쪽에 있었던 춘추 때 위나라 성읍이다.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의 부인은 유신씨의 딸이다. 본문의 정과 송 두 나라 사이에 있다고 기술한 내용은 원작자의 잘못이다.

⑨역(櫟) : 지금의 산서성 하곡부(河曲部) 영제현(永濟縣) 남 10키로

⑩면산(綿山) : 지금의 산서성 개휴시(介休市) 동남쪽의 있는 산이름으로 춘추 때 개산(介山) 혹은 면상산(綿上山)을 말한다. 해발 2400미터 되는 높은 산으로 개자추가 은거했다가 불에 타 죽은 곳이다.

⑪기원전 560년, 진도공(晉悼公) 13년 축소개편한 군제표

군별

원수(元帥)

부수(副帥)

중군(中軍)

순언(荀偃)

범개(范匃)

상군(上軍)

조무(趙武)

한기(韓起)

하군(下軍)

란염(欒黶)

위강(魏絳)

⑫역림(棫林) : 위수(渭水)와 합류하는 경수(涇水)의 서쪽 강안에 있던 고을이며 그 반대편인 동쪽 강안에는 경양(涇陽)이 있었다.

⑬융우(戎右) : 차우장군(車右將軍)을 말함. 대장의 병거에 타는 전투무사

⑭소공(召公)이 쉬었던 감당(甘棠)나무 : 소공은 주나라를 일으킨 삼공 중의 한 사람이다. 삼공이란 주공(周公) 단(旦), 태공(太公) 망(望), 소공(召公) 석(奭)을 말한다. 주공은 노(魯), 태공은 제(齊), 소공은 연(燕)에 봉해졌다. 주무왕(周武王)이 죽자 나이 어린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이 소공과 같이 섭정했다. 주공은 섬(陝) 땅 서쪽의 땅인 성주를 다스리며 그 치소를 낙읍에 두었고 소공은 서주의 왕도가 있는 섬 땅 서쪽인 종주(宗周)를 다스렸다. 소공이 종주를 다스릴 때 백성을 사랑하여 항상 민정을 시찰하였는데 그가 피로하여 쉴 때는 민가에서 들어가 쉬면 민폐를 끼친다고 하여 밖에 있는 감당나무 밑에서 쉬곤 하였다. 백성들이 소공의 덕을 기리어 감당나무를 보호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다. 시경 소남(召南) 중에 감당이라는 노래가 실려 있다. 주공단과 소공석은 성왕이 장성하자 섭정을 마치고 주나라의 통치권을 성왕에게 돌려주었다. 소공석은 후에 연에 봉해져 연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시경(詩經)․소남(召南)․감당(甘棠)》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蔽芾甘棠(폐불감당) 우거진 감당나무

勿剪勿伐(물전물벌) 자르지도 베지도 말라

召伯所茇(소백소발) 소백께서 주무시던 곳이다.

蔽芾甘棠(폐불감당) 우거진 감당나무

勿剪勿敗(물전물패) 자르거나 꺾지도 말라

召伯所憩(소백소게) 소백께서 쉬시던 곳이다.

蔽芾甘棠(폐불감당) 우거진 감당나무

勿剪勿拜(물전물배) 자르지도 쓰러뜨리지도 말라

召伯所說(소백소설) 소백께서 말씀하시던 곳이다.

⑮척(戚) :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북 10키로에 있었던 춘추 때 위나라의 영토.

⑯교언(巧言) :《시경(詩經)․소아(小雅)》의 한 편이다. 간신들의 참언을 듣고 도적을 신임하고 충신을 죽인 주유왕(周幽王)을 풍자한 시가다.

[평 설]

당진과 초나라가 패권을 놓고 다툴 때, 섬진(陝秦)은 오랫동안 초나라의 동맹국으로 머물렀다가 기원전 562년에 이르러서 역(櫟) 땅에서 침입한 당진과 제후 연합군을 물리쳤다. 당시 초와 섬진의 연맹은 이미 파기되었기 때문에 당진국의 신료들 일부는 오나라롤 적극적으로 도와 초나라에 대한 공세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오나라가 초공왕의 상중인 초나라를 공격했다는 이유를 들어 오나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유가 상중인 나라를 공격하여 스스로 패전을 자초했음으로 오나라를 지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당진이 채택한 전략은 참으로 진부했다. 그런 진부한 관념으로 인해 오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당진국은 오나라가 초군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섬진에 대한 군사작전을 행함으로 해서 초나라의 한쪽 팔을 자르려고 했다. 당진국이 취한 전략은 정확하게 그 핵심을 찔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섬진에 대한 정벌전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전략만 낭비하고 만 결과를 초래했다. 비록 제후들의 연합군을 결성하기는 했지만, 정벌전의 결과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행동은 맹목성을 띄고 있었다.

제후군이 하수를 도하하여 섬진의 경계로 들어와 진격하여 경수(涇水)에 이르자 섬진은 경수의 상류지역에 독약을 살포했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작전을 구사했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섬진군은 생화학전을 시도한 것이다. 그 물을 마신 노(魯)와 거(莒) 두 나라의 많은 군사들이 독극물에 중독이 되어 죽자 다른 제후군들은 감히 경수를 도하하지 못했다. 제후군을 이끌고 있던 당진군의 수뇌부는 이런 사태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행히 선봉을 맡았던 정나라 군사들이 앞장서서 전진하자 당진군도 어쩔 수 없이 경수를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제후군들이 역림(棫林)에 당도하여 영채를 세우고 다음 날 행할 군사작전에 대해 토론하다가 당진군 장수들 사이에 의견이 충돌되어 당진의 하군이 제후군 진영에서 이탈하여 회군해 버렸다. 당진군의 지휘부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가 결국은 제후군들을 해산시켜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다른 한편 퇴군 명령을 접한 당진의 한 장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단지 만용만으로 섬진군 진영으로 돌격하여 분전하다가 힘이 다하자 죽고 말았다. 섬진군이 반격하자 당진군은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당진군 지휘부에서 싸움이 일어나 그 여파로 범앙(范鞅)은 섬진국으로 망명을 해야만 했다. 당진국이 제후국들을 규합하여 구성한 섬진에 대한 정벌군은 군사전략상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당진국으로는 그와 같은 실패는 결과적으로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범앙은 단지 당진국 군부에서 일어난 내홍으로 살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섬진에 투항했지 당진국을 배반한 것은 아니었다. 섬진의 군주와 대면하게 된 범앙은 진도공은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쓸 줄 아는 군주’, ‘ 현군(賢君)’이라고 칭송하고 다시 당진의 여러 대부들에 대해서도 그 인물됨을 평했다. 범앙은 섬진의 군주가 당진의 여러 대부들 중 누가 제일 먼저 망하겠느냐는 질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란(欒)씨가 제일 먼저 망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범앙의 조리있는 설명을 듣게 된 진경공(晉景公)은 그를 ‘흥망성쇄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당진과의 통호를 결정했다. 범앙은 섬진과 당진 양국으로 하여금 무력을 사용하는 대신, 옥백(玉帛)을 주고받음으로 해서 통호를 하게 만들었다. 진실로 ‘모로 쳐도 바로 맞은 격(歪打正着)’ 즉 ‘ 망외의 소득을 얻은 경우’가 되었다.

범앙의 고사는 무력으로 이루지 못하는 일을 대화로도 이룰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역림(棫林)의 싸움은 효산(崤山)의 싸움 이래 당진국에 적대적이 되었던 섬진국과 통호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적대국이 되어 측면으로부터 받았던 섬진국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당진국은 초나라와의 쟁패전에 전력을 기우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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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4-05-11 1600
[일반] 제59회. 胥童大亂(서동대란) 趙氏復興(조씨부흥)

제59회 胥童大亂 趙氏復興(서동대란 조씨부흥) 당진의 나라 안을 크게 어지럽히는 서동과 조씨 집안이 다시 일으키고 죽은 정영(程嬰) 1.
양승국 04-05-11 1643
[일반] 제58회. 魏相迎醫(위상영의) 神弓養叔(신궁양숙)

제58회 魏相迎醫 神弓養叔(위상영의 신궁양숙) 진백을 설득하여 명의를 빌려온 당진의 위상(魏相)과 춘추 제일의 명궁(名弓) 양요기(養繇基) 1.
양승국 04-05-11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