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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회. 葉公定楚(엽공정초) 滅吳稱覇(멸오칭패)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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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83회 葉公定楚 滅吳稱覇(엽공정초 멸오칭패)

백공 미승을 죽여 초나라를 안정시키는 엽공 심제량과

오나라를 멸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 월왕 구천

1. 欲加之罪 何患無詞(욕가지죄 하환무사)

- 죄를 주려고 하는데 핑계거리가 없음을 걱정하랴? -

한편 위장공(衛庄公) 괴외(蒯聵)는 위나라의 부고에 있던 금은보화를 출공(出公) 첩(輒)이 도망갈 때 모두 가져가 버려 혼량부와 함께 상의하여 되찾아오려고 했다. 혼량부가 장공에게 말했다.

「태자 질(疾)과 도망친 출공과는 모두 주군의 자식들입니다.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도망간 망군을 택하여 후사로 정하지 않으십니까? 망군을 부르신다면 그가 달아날 때 가져 간 금은보화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때 조그만 어린 내시 한 명이 혼량부의 말을 듣고 몰래 태자 질을 찾아가 고했다. 태자질이 장사 몇 명과 함께 돼지 한 마리를 수레에 싣고 장공에게 가서 위협하여 잡은 돼지의 피를 발라 절대로 도망간 출공을 불러들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강제로 시켰다. 또한 혼량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맹세도 하게 했다. 장공이 태자질에게 말했다.

「첩을 불러 드리지 않는 일은 쉬우나 량부와 같이 복위를 꾀하면서 내가 맹세하기를 그가 죽을죄를 세 번을 지어도 용서한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그를 죽이겠다는 맹세는 하지 못하겠다.」

「혼량부로 하여금 죽을죄를 네 번 짓게 해서 죽이면 됩니다. 그러니 맹세하십시오.」

장공이 허락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장공이 새로이 호랑이 가죽으로 장막을 세우고 여러 대부들을 불러 낙성식을 행하려고 했다. 혼량부가 자색의 옷을 입고 여우털로 만든 갖옷을 겉에 걸치고 락성식에 와서는 갖옷을 벗더니 허리에 찬 칼을 풀지도 않고 식사를 했다. 태자질이 장사를 시켜 혼량부를 잡아 막사 밖으로 끌로 나갔다. 양부가 항의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것이오?」

태자질이 혼량부의 죄를 열거했다.

「신하가 군주를 뵈러 올 때는 항상 관복을 착용하여야 하며 식사를 할 때는 필히 허리에 찬 칼을 풀어놓아야 된다. 그러나 너는 자색의 평상복을 입고 왔으니 그 죄가 하나라! 또한 갖옷을 입었으니 그 죄가 둘이라! 칼을 풀지 않고 식사를 했으니 그 죄가 셋이다.」

혼량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주군께서 내가 죽 죄를 지어도 세 번을 용서하여 주시기로 하셨소.」

태자질이 말했다.

「도망친 군주가 자식의 신분으로 그 부친에게 항거하였으니 그 자는 대역무도하고 또한 불효한 자라. 네가 그런 대역불효한 자를 불러들여 다시 군주로 세우려고 했으니 그 죄가 넷이다.」

량부가 태자질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를 길게 내밀고 형을 받았다. 후일에 장공의 꿈속에 머리는 풀어헤치고 북면하여 무서운 귀신으로 변한 혼량부가 나타나 시끄러운 소리로 말했다.

「나는 혼량부다. 나는 원통하게 죽었다.」

장공이 꿈에서 깨어나서 복대부(卜大夫) 서미사(胥弥赦)를 시켜 그 꿈의 길흉에 대해 점을 치게 했다. 서미사가 대답했다.

「그 꿈은 그다지 흉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장공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상반되는 말을 했다.

「원귀가 화를 무섭게 내고 있으니 몸은 조만 간에 죽게 되고 나라는 위급하게 되리라는 징조다!」

그리고 나서는 그는 황급히 송나라로 달아나 버렸다.

괴외가 위후의 자리에 선지 2년이 되도록 당진에 래조를 가지 않아 당진이 노하여 상경 조앙(趙鞅)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정벌하러 왔다. 위나라 사람들이 장공을 쫓아냈다. 장공은 태자질을 데리고 융국(戎國)으로 달아났으나 융인들이 받아 드리지 않고 태자와 함께 죽였다. 위나라 사대부들이 공자 반사(盤師)를 옹립하여 새로운 군주로 세웠다. 당진군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제나라의 진항(陳恒)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해서 반사를 사로잡고 공자기(公子起)를 세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위나라 대부 석포(石圃)가 공자기를 쫓아내고 다시 옛날 장공에 의해 쫓겨난 출공 첩을 데려와 군위에 복위시켰다. 첩이 환국하고 나서 석포를 쫓아냈다. 출공과의 관계가 나빠진 위나라의 여러 대부들이 출공을 공격했다. 출공은 쫓겨나서 월나라로 도망쳤다. 위나라 대부들은 상의하여 공자묵(公子黙)을 새로 세웠다. 이가 위도공(衛悼公)이다. 이때부터 위나라는 당진에 신하의 예로써 복종하였고 위나라의 국세는 더욱 쇠약해져서 오로지 당진의 조씨들 힘에 의지하게 되었다.

2. 백공란초(白公乱楚)

- 초나라에 내란을 일으키는 백공승 -

한편 초(楚)나라에서는 태자건의 아들 백공(白公) 미승(羋勝)은 오자서의 도움으로 오나라에서 귀국하여 초나라의 변경 지방에 봉지를 받아 살고 있었으나 정나라는 자기 부친을 죽인 원수라는 것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그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마음뿐이었다. 단지 백공의 은인인 오자서가 옛날에 정나라를 정벌하다가 이미 그 죄를 용서하였고 지금은 정나라가 오히려 초나라를 섬기고 있는 차제에 감히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을 수 없어 백공은 어쩔 수 없이 가슴속에 묻어 놓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기원전 489년 소왕(昭王)이 재위 27년 만에 죽자 영윤 자서(子西)와 사마 자기(子期)는 월녀의 소생 태자장을 받들어 초왕으로 세웠다. 이가 초혜왕(楚惠王)이다. 자신이 태자건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백공승은 자서가 자기를 불러 초나라의 정사에 같이 참여시켜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서는 결국 백공승을 부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봉록도 늘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백공승은 자서의 처사에 앙앙불락했다. 그런 와중에 오왕이 오자서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백공승이 말했다.

「이제야 부친의 원수인 정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게 되었다.」

그는 즉시 사람을 자서에게 보내 군사를 청하며 말했다.

「정나라 놈들이 나의 부친에게 독수를 뻗쳐 죽인 일은 영윤도 익히 아시고 계십니다.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는 자를 어찌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영윤께서 만약 무고하게 정나라 놈들에게 돌아가신 저의 부친을 애통하게 생각하신다면 한 떼의 군마를 일으켜 정나라의 죄를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승이 앞장서서 종군하여 정나라를 정벌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진실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자서가 거절하며 백공의 사자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우리 초나라는 새로운 왕이 선지 얼마 되지 않아 인심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소! 공은 잠시 때를 기다리기 바라오!」

백공승이 오나라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핑계를 대고 가신 중에 심복인 석걸(石乞)을 시켜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어 가병들을 훈련시켰다. 그런 다음 다시 자서에게 청하여 자기의 사병들만을 이끌고 선봉이 되어 정나라를 정벌하겠다고 했다. 자서가 허락했다. 백공승의 군사가 미처 출병하기도 전에 당진의 조앙이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는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자서가 허락하고 군사를 이끌고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다. 당진의 군사들은 초나라가 출병한 소식을 듣고 곧 바로 군사를 거두어 되돌아갔다. 자서가 정나라와 동맹을 맺고 돌아왔다. 백공이 노하여 말했다.

「정나라를 정벌하지 않고 오히려 정나라를 구원하니 이것은 영윤이 나를 심히 기만하는 짓이다. 내 마땅히 영윤을 먼저 죽이고 나서 정나라를 정벌하리라!」

백공은 이어서 풍양(灃陽)에 사는 종인 백선(白善)을 불러 자기의 뜻을 말했다. 백선이 듣고 말했다.

「그대의 뜻을 따르면 나라를 어지럽혀 그 임금에게 불충하게 되고 그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일신의 사사로움만 따지면 그것은 종족에게 너무 몰인정한 처사라 할 것이다.」

그는 즉시 백공으로부터 받은 관직과 록을 버리고 채소와 약초를 기르며 밭에다 물을 주면서 일생을 마쳤다. 초나라 사람들이 그 밭을 이름하여 ‘백선장군의 약초 밭 (白善將軍葯圃)’이라고 불렀다. 백공은 자기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백선에 대해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백선이 없다고 해서 영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그는 즉시 석걸을 불러 자기의 뜻을 말하며 의논했다.

「그대에게 500명의 장사들을 주면 영윤과 사마를 죽일 수 있겠는가?」

「500명의 장사들로는 두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초도의 남쪽에 웅의료(熊宜僚)라는 장사가 살고 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을 얻는다면 가히 500명의 장사들과 맞먹을 수 있습니다.」

백공이 즉시 석걸과 동행하여 초성의 남쪽에 살고 있던 웅의료를 만나러 갔다. 웅의료가 크게 놀라 말했다.

「고귀하신 왕손께서 무슨 일로 친히 몸을 굽혀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대와 함께 대사를 이루고자 함이네!」

백공은 웅의료에게 자기를 기만한 자서를 죽이려는 뜻을 말했다. 웅의료가 듣고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영윤은 나라에 큰공을 세운 분이고 또한 이 의료와는 아무런 원수 진 일도 없어 제가 어찌 감히 죽일 수 있겠습니까? 공의 뜻을 받들 수 없겠습니다.」

백공이 노하여 칼을 뽑아 의료의 목을 겨누며 말했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그러나 의료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이 의료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마치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일과 같은데 어찌 그리 화를 내십니까?」

백공이 즉시 칼을 땅에 던져 버리고 한탄하며 말했다.

「그대는 진정으로 용사다! 내가 한번 그대를 시험해 봤느니라!」

그는 즉시 웅의료를 자기의 수레에 태우고 돌아와 상빈의 예를 갖추어 음식을 먹을 때나 출입을 할 때나 언제나 행동을 같이 했다. 웅의료가 백공의 은혜에 감격했다. 마침내 그는 백공의 뜻을 받들겠다고 허락했다.

그때 오왕 부차가 중원의 황지에 제후들을 불러 놓고 회맹을 주재하자 초나라가 오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변경의 관리들에게 경계를 내려 병장기를 손질하여 오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했다. 백공승은 오나라가 초나라를 습격한다는 핑계를 대며 거꾸로 오나라의 변경을 습격하여 얼마간의 재물과 포로들을 노획하고 돌아와서는 그것을 대대적으로 과장해서 자랑하며 말했다.

「오나라 군사들을 크게 물리치고 그들의 투구와 병장기들을 노획해 왔습니다. 원컨대 초나라 궁궐의 뜰에서 대왕께 전리품을 바치는 의식을 열어 국위를 높이고자 합니다.」

자서가 백공의 음모를 모르고 허락했다. 백공이 자기 휘하의 무장한 갑병들을 모두 동원하여 수레 백여 승에 노획품을 가장한 병장기들을 가득 싣게 하고 다시 천 명의 장사들을 모두 함거에 실어 오나라의 포로로 꾸며 초도로 압송하여 개선식을 올리려고 했다. 혜왕이 전당에 올라 백공에게서 승전보고를 받고 자서와 자기는 혜왕 곁에 시립했다. 백공승이 왕을 알현하는 의식을 끝내자 혜왕이 전당으로 오르는 계단 밑에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두 사람의 장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백공에게 물었다.

「저 장수들은 누구인가?」

「저의 부하 장수인 석걸과 웅의료입니다. 지난번 오나라를 정벌할 때 공을 세웠습니다.」

이어서 백공이 손을 흔들어 두 사람을 전당으로 올라오라는 신호를 했다. 두 사람이 큰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여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에 혜왕 곁에 서 있던 자기가 보고 큰 소리로 외쳐 꾸짖었다.

「여기는 왕이 계시는 어전이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은 단지 머리를 조아리는 절만을 허락하고 전당으로는 올라오지 못하게 되어 있다. 빨리 물러가지 못할까?」

석걸과 웅의료가 자기가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계단을 올랐다. 자기가 왕의 호위무사들에게 명하여 두 사람을 막으라고 했다. 웅의료가 손을 들어 한번 휘젓자 호위무사들은 모두가 양쪽으로 넘어졌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은 번개처럼 전당에 올라섰다. 석걸은 칼을 빼어 들고 자서를 찌르고 웅의료는 자기를 공격했다. 백공이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 장사들은 어찌하여 일제히 전당으로 뛰어 올라 싸움을 돕지 않느냐?」

백공이 외치자 함거에 갇혀 있던 척 했던 천명의 장사들은 일제히 수레에 싣고 왔던 병장기들을 집어 들고 벌떼처럼 전당으로 올라왔다. 백공이 혜왕을 붙들어 꼼짝 못하게 했다. 석걸이 격투 끝에 자서를 사로잡아 결박하자 전당에 모여있던 백관들은 놀라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원래 힘이 센 장사였던 자기는 즉시 전당 뒤에 진열되어 있던 극을 뽑아 웅의료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웅의료가 칼을 던져 버리고 자신을 향해 찌르려는 자기의 극 한쪽 끝을 붙잡고 빼앗아 버렸다. 자기가 다시 웅의료가 던져 버린 칼을 주어서 그의 어깨를 베었다. 의료 역시 자기에게서 빼앗은 극으르 자기의 복부를 찔렀다. 두 사람이 서로 붙들고는 놔주지 않고 뒤엉켜 몇 번 구르더니 전당 밑으로 떨어져 두 사람이 같이 죽었다. 석걸에게 결박당한 자서가 백공을 보고 말했다.

「옛날 오나라에서 빌어먹고 있던 너를 내가 골육의 정을 못 잊어 데려와 공의 작위를 내려 주어 은혜를 베풀었는데 어찌하여 은혜를 저버리고 이렇듯 반역을 저지르는가?」

「정나라는 나의 부친을 죽인 원수의 나라이다. 그런데 너는 오히려 정나라를 구해 주고 그들과 우호를 맺었다. 따라서 너는 나의 원수인 정나라와 다름이 없다. 내가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너에게 입은 사사로운 은혜에 어찌 연연해하겠느냐?」

자서가 한탄하며 말했다.

「내가 옛날에 엽공(葉公)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구나!」

백공승이 칼을 뽑아 자서의 목을 치고 그 시체를 조당에 늘어놨다. 석걸이 백공에게 말했다.

「왕을 죽이지 않았으니 대사가 이루어 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면 그만이다.」

백공이 즉시 혜왕을 잡아서 고부(高府)라는 곳에 감금해 두도록 좌우에게 명했다. 백공은 왕자 계(啓)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왕자계가 거절했다. 백공이 계를 죽였다. 석걸이 백공에게 스스로 왕위에 오르라고 권했다. 백공이 말했다.

「아직도 나를 반대하는 현공(縣公)들이 많이 있으니 모조리 불러들여 우리 편으로 만들던가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야만 내가 왕위를 차지할 수 있음이다.」

백공은 즉시 자기가 데려온 군사들을 태묘에 진을 치고 주둔하게 했다. 대부 관수(管修)가 무장한 가병들을 이끌고 쳐들어와 백공을 공격했다. 양측이 3일 간을 싸운 끝에 관수와 그 가병들은 모두 백공이 거느린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어공(圉公) 양(陽)이 고부의 담장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밤중에 몰래 잠입하여 혜왕을 등에 업고 빠져 나와 소왕의 부인이 사는 궁궐에 숨겨 두었다.

3. 엽공정초(葉公定楚)

- 엽공 심제량이 백공의 란을 진압하고 초나라를 안정시키다. -

한편 도성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엽공 심제량(沈諸梁)은 엽 땅의 모든 군사들과 가병들을 이끌고 초도로 향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군했다. 그의 일행이 초도의 근교에 이르자 백성들이 몰려와 길을 막으며 맞이했다. 백성들은 엽공이 몸에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말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갑옷과 투구를 입지 않으셨습니까? 도성 안의 백성들은 마치 부모를 찾는 갓난아이처럼 공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일 역적들의 화살을 잘못해서 맞기라도 해서 공의 몸이 상한다면 백성들은 무엇을 바라고 살 수 있겠습니까?」

엽공이 백성들의 말을 따라 즉시 갑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투구를 썼다. 다시 행군을 계속하여 성벽 가까이 다가갔을 때 다시 한 떼의 백성들이 엽공을 영접하러 나왔다. 백성들이 엽공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투구를 쓰고 계십니까? 백성들은 흉년에 굶주려 양식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공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백성들이 만약에 공의 얼굴을 본다면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나듯이 비록 늙은이라 하더라도 모두 죽을힘을 다하여 공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어찌하여 공은 얼굴을 투구로 온통 가려 백성들로 하여금 의심하는 마음을 들게 하여 힘들여 싸우려는 생각을 들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엽공은 백성들의 말을 듣고 다시 투구를 벗어 던지고 앞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엽공은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자기에게 기우려 졌다고 생각하고 즉시 대패기(大旆旗)를 자기의 수레에 세웠다. 잠윤고(箴尹固)는 그때 백공의 부름을 받아 자기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성안으로 향하다가 엽(葉)이라고 쓴 대패기를 보고 즉시 방향을 돌려 엽공의 뒤를 따라 성안으로 향했다. 성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엽공이 대패기를 높이 세우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자 성문을 활짝 열고 엽공과 그 군사들을 맞아 들였다.

엽공이 엽성에서 데려온 군사와 성안의 백성들을 이끌고 태묘에 주둔하고 있던 백공과 그 군사들을 공격했다. 석걸이 군사를 끌고 나와 엽공을 맞이하여 싸웠으나 당해 내지 못하고 크게 패했다. 석걸은 싸움에서 지자 백공을 부축하여 수레에 태우고 용산(龍山)으로 달아났다. 두 사람이 다른 나라로 달아나려 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주저하는 사이에 엽공과 그 군사들이 뒤를 추격해 왔다. 백공승이 스스로 목을 메어 자결했다. 석걸이 백공의 시신을 거두어 용산의 후면에 묻었다. 엽공의 병사들이 당도하여 석걸을 생포했다. 엽공이 석걸에게 물었다.

「백공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그렇다면 그 시체는 어디에 있는가?」

석걸이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엽공이 발이 세 개 달린 가마솥을 가져오게 하여 불을 지펴 물을 끓이라 하고 석걸을 그 앞으로 데려가 말했다.

「두 번 다시 묻지 않겠다. 백공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가? 말하지 않으면 끓는 물에 삶아 죽이겠다.」

석걸이 듣고 일어나더니 스스로 옷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일을 이룬다면 몸은 귀하게 되어 상경이 되고 그렇지 않고 일을 못 이루게 되면 당연히 죽게 되는 것은 곧 하늘이 정한 도리라! 내가 어찌 죽은 사람의 뼈를 팔아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말을 마친 석걸은 즉시 가마솥 안으로 뛰어들었다. 석걸의 몸뚱이는 삽시간에 익어 버렸다. 백공승의 시체가 묻힌 곳은 결국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석걸이 비록 옳지 못한 일을 따르기는 했지만 역시 기개가 있는 장부라 할 수 있었다. 엽공은 혜왕을 맞이하여 복위시켰다. 그때 진(陳)나라가 초나라에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의 변경을 침략해 왔다. 엽공이 혜왕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여 멸했다. 자서(子西)의 아들 자녕(子寧)에게 그 부친의 직위인 영윤의 자리를 잇게 하고 자기(子期)의 아들 자관(子貫)은 사마의 직을 계승하게 했다. 엽공 자신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무런 벼슬도 하지 않고 엽 땅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초나라의 정세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이 일은 주경왕(周敬王) 42년 기원전 478년의 일이었다.

4. 笠澤一戰 夫差自刎(입택일전 부차자문)

- 입택의 한 번 싸움으로 자살하는 부차 -

오왕 부차가 월나라 군사들이 물러난 후로 주색에 빠져 나라의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월왕 구천은 염탐꾼을 통해 알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오나라는 매년 계속해서 흉년이 들어 민심은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는 보고를 접한 월왕은 오나라를 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그 즉시 월나라의 모든 병사들을 동원하여 이끌고 오나라 정벌 길에 나섰다. 월왕이 탄 수레가 월성의 교외를 막 통과하려는데 길 가운데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배를 크게 부풀리면서 마치 화가 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커다란 두꺼비를 보았다. 구천이 보고 수레의 횡목(橫木)에 기대에 일어나 숙연한 자세를 취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구천의 그런 행동을 보고 물었다.

「왕께서는 무엇에게 그렇게 경의를 표하시는 것입니까?」

「저 화가 잔뜩 난 두꺼비의 모습이 마치 투지만만한 병사처럼 보여 내가 일어나 경의를 표하고 있는 중이다.」

군사들이 듣고 모두 칭하의 말을 올렸다.

「우리의 왕께서 화를 내고 있는 하찮은 미물인 두꺼비에게 조차도 경의를 표하셨다. 우리는 수 년 간에 걸쳐 훈련을 해 왔는데 어찌 저 화난 두꺼비만도 못하겠는가?」

병사들은 서로 격려하며 필사의 의지로 싸움에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월나라의 백성들이 싸움터에 나가는 그들의 자제들을 월성의 근교까지 따라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간에 다짐하며 전송했다.

「이번에 출정하여 오나라를 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구천이 백성들의 하는 말을 듣고 군중에 조칙을 내렸다.

「부자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들은 그 아비 되는 자는 돌아가도 좋다. 형제가 같이 군중에 있는 자들은 그 형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집에 계시는 부모를 모실 형제가 없는 사람은 돌아가 부모를 공양하라. 몸에 질병이 있어 싸움이 벌어지면 적군을 이길 수 없는 자는 고하라! 약도 주고 죽도 끓여 주리라!」

월나라 군사들은 월왕이 베푼 은혜에 감사하여 일제히 우뢰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월나라 군사들이 행군하여 이윽고 강구(江口)에 이르자 군중에서 죄를 지은 자들을 참수형에 처하여 군법을 엄하게 시행하자 군사들의 마음은 매우 숙연해졌다.

월나라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오왕 부차 역시 오나라의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출병하여 강상(江上)에서 월나라 군사들을 막으려고 했다. 월나라 군사들은 강남에 오나라 군사들은 강북에 각각 진을 치고 대치했다. 월왕 구천은 군사를 좌우 이군으로 나누어 범려로 하여금 우군을 맡게 하고 문종으로는 좌군을 맡게 했다. 사대부 자제들로 편성된 근위군 6천 명은 월왕의 중군에 속하게 했다. 월왕 구천은 다음 날 강을 건너 오나라 진영을 공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날이 어두워지자 좌군에 속한 모든 군사들에게 함매를 물린 후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 5리 되는 곳에 머물러 있다가 밤이 깊어지면 갑자기 북을 크게 울리며 오나라 진영을 공격하라고 했다. 다시 우군에 속한 군사들에게도 역시 함매를 물리게 한 후 강을 건너서 10리 되는 곳까지 나아가 머물다가 좌군이 공격을 개시하면 오나라 진영의 배후에서 협공을 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좌우 양군은 모두 큰북을 힘껏 두드려 그 소리가 그 일대에 모두 들릴 수 있도록 강조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오나라 군사들은 하늘을 진동시키는 북소리를 듣고 그것이 월나라 군사들이 공격하는 신호인 줄 알았다. 오나라 군사들이 황망 중에 횃불을 올려 주위를 밝혔으나 미처 주위의 어둠을 밝히기도 전에 또 멀리서 나는 북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전후 양군이 서로 호응하여 오군을 포위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부차가 크게 놀라 급히 령을 전하여 오나라 군사들을 두 대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해 오는 월나라 군사들을 막게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월왕이 쟁이나 북소리도 울리지 않고 아무도 몰래 근위군 6천 명을 친히 이끌고 어둠 속에서 곧바로 오나라 중군 막사를 들이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다. 그때는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단지 전후좌우에는 모두 월나라 군사들 천지인 것 같아 오나라 군사들은 도저히 당해 내지 못하고 몸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구천이 다시 삼군을 정비하여 친히 인솔하고 오군의 뒤를 바싹 뒤쫓아 입택(笠澤)②에 이르자 오나라 군사들도 대오를 갖추어 대항했다. 다시 싸움이 벌어졌으나 오군은 당해내지 못하고 패주했다. 오나라의 백전노장 왕자 고조(姑曹)와 서문소(胥門巢) 등은 싸움 중에 전사했다. 부차가 밤새도록 도망쳐 간신히 오성에 입성하여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려고 했다. 구천이 횡산(橫山)을 넘어 진격했다. 횡산은 지금의 월래계(越來溪)다. 월나라 군사들은 서문(胥門) 앞에 성을 쌓아 월성(越城)이라 부르고 오성을 포위하여 장기전에 대비했다. 월왕이 오성을 오래 동안 포위하자 오성의 백성들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부차가 할 수 없이 화의를 청하기 위해 백비를 월나라 진영에 사절로 보내려고 했으나 백비는 병을 칭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부차가 왕손락을 사자로 보냈다. 왕손락은 웃통을 벗고 무릎으로 월왕 앞으로 기어가 화의를 청한다는 오왕의 뜻을 전했다.

「전하의 외로운 신하 부차는 옛날에 회계 땅에서 대왕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때 부차는 대왕의 명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대왕과 화의를 맺고 오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대왕께서 군사를 내어 저를 죽이려 하신다는 뜻을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도 저와의 회계의 일을 생각하시어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구천이 말을 듣고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화의를 허락하려고 했다. 범려가 간했다.

「군왕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정사에 매진하여 이때를 기다리기를 20년이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화의를 받아들여 그 동안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려 하십니까?」

범려의 완강한 반대로 인하여 구천은 마음을 바꾸어 오나라가 청한 화의를 거절했다. 오나라의 사자가 계속해서 일곱 차례나 다녀갔지만 범려와 문종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북소리를 크게 울리게 하여 군사들을 진군시켜 오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나라 군사들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문종과 범려는 서문(胥門)을 부수고 성안으로 진격하려 계책을 짰다.

그날 밤 오나라의 성 남문 위에 오자서의 머리가 마치 큰 수레바퀴처럼 빛나고 두 눈에는 번개가 일고 머리털은 사방으로 흩날려 그 빛이 십리에 뻗친 광경을 보았다. 월나라 장수들이나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하던 싸움을 멈추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이 깊어지자 남문 쪽에서 폭풍이 일고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 번개가 치며 돌맹이가 날고 모래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에 날린 돌멩이들은 쇠뇌에서 쏘아 대는 화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월나라 군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돌멩이에 맞은 사람들은 죽거나 중상을 입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배를 묶어 둔 밧줄이 끊어져 배들이 물길을 타고 밑으로 떠내려갔다. 문종과 범려가 마음이 급하게 되어 웃통을 벗은 맨몸으로 밖으로 나와 세차게 휘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남문을 쳐다보고 머리를 조아려 무수히 절을 하며 죄의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얼마 후에 비바람이 멈추었다. 문종과 범려가 안으로 들어와 침상에서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동시에 꿈을 꾸었다. 그들의 꿈속에서 자서가 백마가 끄는 병거를 타고 다가왔다. 그는 마치 생시처럼 의관을 위엄 있게 차려입은 매우 늠름한 모습이었다. 오자서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옛날 이미 너희들 월나라가 틀림없이 쳐들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나의 머리를 동문에 걸어 놓으라고 부탁하여 그대들이 오는 모습을 살피려고 했지만 오왕이 나의 부탁을 듣지 않고 남문에 걸어 놓았다. 그러나 나의 충성심은 아직 변하지 않아 내 머리 밑으로 입성하는 너희들을 두고만 볼 수 없어 비바람을 일으켜 물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월나라가 오나라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하늘이 정해준 바라 내가 어찌 그것을 막을 수 있으리오? 너희들이 도성 안으로 입성하려 한다면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 동문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내가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길을 열어 성안까지 통하게 해주리라!」

두 사람이 꿈에서 깨어 같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시 월왕에게 가서 꿈 이야기를 고하고 사졸들을 시켜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물길을 파게 했다. 월나라 군사들이 판 물길이 사문(蛇門-南門)과 장문(匠門-東門) 사이에 이르게 되자 갑자기 태호의 물이 출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솟구쳐 올라 파도가 되어 서문(胥門-西門)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거센 물결은 이윽고 나성(羅城) 안에 큰 구멍을 하나 뚫어 놓았다. 그 구멍을 통하여 전어(鱄魚), 부어(䱐魚) 등 큰 물고기들이 무수히 성안으로 파도에 밀려들어갔다. 범려가 말했다.

「이것은 자서가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 주는 바다.」

그들은 즉시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오성에는 당시의 파도로 생긴 구멍이 문이 되었는데 이름하여 전부문(鱄䱐門)이라 했고 또 물위에 봉초(葑草)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해서 봉문(葑門)이라고도 하고 그곳을 흐르는 물을 봉계(葑溪)라 했다. 이것은 오자서의 영혼이 나타났다는 유적이 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성안에 있던 부차는 결국은 월나라 군사들이 입성했으며, 또한 백비는 이미 월군에게 이미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즉시 왕손락과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성문을 빠져 나와 양산(陽山)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도망가느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배가 고파 허기가 지게 되어 정신이 혼미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좌우에 따르던 사람들이 벼이삭을 구해 비벼서 껍질을 벗긴 다음 부차에게 가져다 바쳤다. 부차가 받아서 입에 넣고 씹었다. 다 삼킨 다음 허리를 굽혀 개울가의 물을 마시면서 좌우의 사람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먹은 것은 무엇이냐?」

좌우에 따르던 사람들이 대답했다.

「벼이삭을 따서 껍질을 벗긴 생도(生稻)입니다.」

부차가 말했다.

「옛날 공손성(公孫聖)이 ‘익은 음식도 먹지 못하고 창황히 도망치리라!’라고 했는데 그 말이 과연 맞는 말이었구나!」

왕손락이 부차를 재촉했다.

「이제 허기를 면했으니 빨리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앞에 조금만 가면 깊은 계곡이 있으니 그곳이라면 잠시나마 몸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꾼 요사스러운 꿈이 이제 이루어져 죽음이 이미 조석지간에 달려 있게 되었는데 잠시 피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부차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양산에 머물렀다. 부차가 다시 왕손락을 향해 말했다.

「내가 옛날에 공손성을 죽이고 그 시체를 토막 내 이 산등성에 내다 버리라고 했는데 아직도 그의 혼백이 여기에 남아 있지 않겠는가?」

「왕께서 한번 불러 보시지요.」

부차가 큰 소리로 외쳐 불렀다.

「공손성!」

산 속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차가 다시 계속해서 세 번을 부르자 세 번 계속해서 답했다. 부차가 마음속으로 두려운 생각이 들어 즉시 양산을 떠나 간수(干隧)③라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한편 구천은 천 명의 군사를 선발하여 추격하여 부차가 숨어 있는 곳에 당도하여 여러 겹으로 철통같이 에워쌌다. 부차가 편지를 써서 활에 메달아 월나라 군중을 향해 쏘았다. 월나라 군사들이 주워 문종과 범려에게 가져다 바쳤다. 두 사람이 부차가 쓴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듣기에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을 잘하는 개는 삶겨 죽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적국이 멸망하면 그 지혜 있는 신하들도 틀림없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④ 대부들은 어찌하여 오나라의 명맥을 잇게 하여 스스로의 여생을 도모하지 않으십니까?」

문종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서를 써서 역시 화살에 메어 부차가 농성하고 있는 곳을 향해 쏘았다. 부차가 답서를 찾아 읽었다.

『오나라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 충신 오자서를 죽였다.

둘째 직언을 올린 공손성을 죽였다.

셋째 간사하고 아첨만을 일삼는 백비를 중용하여 그의 말을 따랐다.

넷째 아무 죄도 없는 제(齊)와 진(陳) 두 나라에 정벌을 여러 차례 감행했다.

다섯째 오와 월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나라인데 무단히 침범했다.

여섯째 월왕이 친히 오나라의 전왕을 죽였음에도 그 원수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놓아주어 화근을 키웠다.

이처럼 커다란 잘못을 여섯 가지나 행하고도 어찌 패망을 면하려 하는가? 옛날에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주었건만 오나라가 받지 않아서 이제는 하늘이 오나라를 월나라에 내려 주었는데 월나라가 어찌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겠는가?』

부차가 문종의 답장에서 커다란 잘못 여섯 가지 항목을 읽고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과인이 구천을 죽이지 않고 선왕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망각했으니 그것은 바로 불효를 행했음이라! 그래서 하늘이 우리 오나라를 버리고 월나라에 주려고 함이라!」

「신이 다시 한 번 월왕을 찾아보고 대왕의 목숨을 간절히 청해 보겠습니다. 」

「과인이 오나라를 다시 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행히 부용(附庸)이라도 허락을 받아 자자손손이 월나라를 받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기 바라오!」

왕손락이 월나라 군영에 당도하여 월왕을 뵙기를 청했으나 문종과 범려가 들여보내지 않았다. 구천이 멀리서 오나라의 사자가 입견을 하지 못하자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마음 속 한 구석에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월왕이 사람을 시켜 부차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과인이 군과 옛날 같이 지낸 정을 생각하여 용동(甬東)⑤의 민호 500호를 주어 여생을 보내게 해 주겠소.」

부차가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말을 월왕에게 전하게 했다.

「군왕께서 다행히 오나라의 죄를 용서하더라도 오나라는 역시 군왕을 받드는 한 개의 고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나라의 사직을 뒤엎고 종묘를 폐한 후에 단지 5백 호의 민호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늙어 다른 나라에서 도망쳐 온 백성들과는 열을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겠습니다.」

월나라 사자에게 자기가 스스로 죽겠다고 말해 놓고도 부차는 자결하지 않았다. 구천이 화가 나서 문종과 범려에게 말했다.

「두 경은 어찌하여 부차를 잡아다 죽이지 않소?」

두 사람이 같이 구천의 말에 답했다.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군주 된 자를 잡아다 죽일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주공께서 스스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오나라를 망하게 함은 하늘의 뜻이니 부차를 죽이는 일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구천이 두 대부의 말을 듣고 즉시 보광검(步光劍)을 짚고서 군사들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말하여 부차에게 전하게 했다.

「세상에 만세를 사는 군주는 없으며 누구든지 한 번은 꼭 죽는 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 월나라 군사들의 칼에 피를 묻혀야 하겠는가?」

부차가 전해 듣고 크게 탄식하며 사방을 둘러보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충신 오자서와 공손성을 죽여 놓고도 이재서야 그 뒤를 따르려고 하니 이는 너무 늦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만약에 죽은 사람이 넋이 살아 있어 지하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면 내가 오자서와 공손성을 볼 면목이 없으니 반드시 세 겹의 비단으로 내 얼굴을 감아서 묻도록 하기 바란다.」

부차가 말을 마치자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자기의 목을 스스로 찔러 죽었다. 왕손락이 자기의 옷을 벗어 오왕의 시신을 덮어 주고 그 옆에서 자기의 허리띠를 나무에 걸어 목메어 죽었다. 구천이 두 사람의 시신을 양산에 후하게 장사지내게 했다. 다시 군사들에게 명하여 각기 흙 포대 한 개씩을 짊어지게 하여 두 사람의 무덤에 부리도록 하여 잠깐 사이에 커다란 봉분이 생기게 되었다. 그후 부차의 세 아들들에게는 용미산(龍尾山)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오산리(吳山里)라고 불렀다. 시인 장우(張羽)⑥가 시를 지어 한탄했다.

옛 성터의 서쪽의 무너진 대(臺)에 홀로 올라서니

어가가 다녔던 길은 처량하게 되어 초목도 슬퍼하는구나!

황폐한 무덤에는 금빛 나는 호랑이도 보이지 않는데

무너진 담장 위에서는 밤 까치 소리만 높구나

荒臺獨上故城西(황대독상고성서)

輦路凄凉草木悲(연로처랑초목비)

廢墓已無金虎蛙(폐묘이무금호왜)

壞墻時有夜鳥啼(괴장시유야조제)

채향경 물길 따라 놀던 사슴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향섭랑의 옛 자리에는 돌벼만 무성하게 자랐구나!

어디로 가야 오원의 넋을 볼 수 있겠는가?

자욱한 안개 속에 지는 달이여!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구나

采香徑斷來麋鹿(채향경단래미록)

響屧廊空變黍離(향섭랑공변서리)

欲弔伍員何處所(욕조오원하처소)

淡煙斜月不堪題(담연사월불감제)

양성재(楊誠齋)⑦는 《소대조고(蘇臺弔古)》라는 시를 지어 부차의 어리석음을 노래했다.

높고 높은 네 개의 탑은 구름 뚫어 높이 솟았고

강 건너 줄지어선 설봉들은 볼수록 새롭구나!

탑 위에 올라서면 삼백 리를 볼 수 있다고 말했는데

어찌하여 월나라의 육천 군사는 보지 못했을꼬?

揷天四塔雲中出(삼천사탑운중출)

隔水諸峰雪後新(격수제봉설후신)

道是遠瞻三百里(도시원첨삼백리)

如何不見六千人(여하불견육천인)

호증(胡曾) 선생의 시도 있다.

오왕은 자기의 힘과 재능을 과신하여 패자를 구하며

고소대의 술과 미녀를 탐하여 취해 지내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당강 위의 떠 있던 달이

하루아침에 월나라 병사들을 서쪽으로 보냈다.

吳王恃覇逞雄才(오왕시폐영웅재)

貪向姑蘇醉綠醅(탐향고소취록배)

不覺錢塘江上月(불각전당강상월)

一宵西送越兵來(일소서송월병래)

원조(元朝) 때의 문인 살도랄(薩都剌)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창문(閶門)의 수양버들 봄바람에 나부끼는데

호수 가 궁전 깊은 뜰 안의 꽃들은 울어 붉은 이슬 맺었다.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는 해마다 성곽에 가득 차지만

길가는 행인의 눈에는 관왜궁이 보이지 않는구나!

閶門楊柳自春風(창문양류자춘풍)

水殿幽花泣露紅(수번유화읍로홍)

飛絮年年滿城郭(비서연년만성곽)

行人不見館娃宮(행인불견관왜궁)

당조(唐朝)의 시인 육구몽(陸龜蒙)은 서시(西施)를 노래했다.

한밤중에 관왜궁은 싸움터로 변하여

연회석의 향기에 피비린내가 섞였다.

서시는 타다 남은 촛불이 다 타기 전에

군왕을 위해 눈물 흘리며 달아나기를 청했다.

半夜娃宮作戰場(반야왜궁작전장)

血腥猶雜宴時香(혈성유잡연시향)

西施不及燒殘蜡(서시불급소잔사)

猶爲君王泣數行(유위군왕읍수행)

5. 滅吳稱覇(멸오칭패)

- 오나라를 멸하고 패자의 자리에 오르다. -

한편 월왕 구천이 고소성에 입성하여 오왕의 보좌에 앉아서 백관들의 치하를 받았다. 백비도 역시 나와서 백관들의 반열에 서서 옛날에 자기가 월왕을 위해 주선한 은혜가 있음을 자부하고 얼굴에 덕색을 가득 띄우고 있었다. 구천이 백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는 오나라의 태재가 아닌가? 과인에게 어찌 감히 허리를 굽히는가? 그대의 군주는 양산에 묻혀 있는데 어찌하여 따라가지 않았는가?」

백비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띄우며 조당에서 물러갔다. 구천이 장사를 시켜 백비를 뒤따라가서 죽인 후에 그의 집안사람들도 잡아 멸족시켰다. 백비와 그의 집안을 멸족시킨 구천이 말했다.

「내가 오자서를 위해 그의 원수를 갚아 그의 충성심에 대한 보답을 했음이다!」

구천이 오나라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이어서 병사들을 이끌고 강수와 회수를 건너 제(齊), 당진(唐晉), 송(宋), 노(魯) 네 나라 제후들과 서주(舒州)⑧에서 회맹하고 주왕실에 사자를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그 때 주나라에서는 경왕이 죽고 태자 명인(名仁)이 뒤를 이었다. 이가 주원왕(周元王)이다. 원왕이 사자를 보내 구천에게 곤룡포와 면류관 및 규벽과 동궁호시(彤弓弧矢)를 하사하며 동방의 방백(方伯)에 봉했다. 구천이 명을 받자 제후들이 모두 사자를 보내어 치하의 말을 전했다. 그때 진(陳)나라를 멸한 초나라는 월나라가 시비를 걸어올까 두려워하여 월나라에 조빙 사절을 보냈다. 구천이 회상(淮上)⑨의 땅을 초나라에 돌려주고 노나라에는 사수 동쪽의 땅 100리를 떼어 할양해 주었다. 그는 다시 송나라에게도 옛날 오나라가 빼앗은 땅을 돌려주었다. 제후들이 감복하여 월나라를 패자로 받들었다. 월왕이 다시 오나라에 돌아와서 사람을 회계에 보내 중원의 패자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하대(賀臺)를 짓게 하여 옛날에 자기가 오나라에서 당한 치욕을 씻고자 하였다. 다시 오나라의 궁궐 안에 있던 문대(文臺)에 연회를 마련하여 술을 내오라고 이른 다음 군신들과 같이 기쁨을 같이 즐겼다. 악공에게 명하여 《벌오(伐吳)》라는 노래를 짓게 하고 악사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져와 연주하여 노래를 부르게 했다. 《벌오》의 노래 말은 다음과 같았다.

귀신같은 우리 대왕님!

병사들을 길러 위엄을 천하에 떨치셨네!

무도한자를 죽이려 때를 물으셨네

대부 문종과 범려가 나와 아뢰었네

오나라가 충신 오자서를 죽였으니

지금 오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언제 할 것이냐고 말했네

吾王神武蓄兵威(오왕신무축병위)

欲誅無道當何時(욕주무도상하시)

大夫種蠡前致詞(대부종여전치사)

吳殺忠臣伍子胥(오살충신오자서)

今不伐吳又何須(금불벌오우하수)

훌륭한 신하들이 하늘의 뜻에 따라 계책을 모으니

한번 싸움에 천리의 영토를 넓히셨다네

크고 큰 공훈으로 상이(常彛)⑩를 받으시고

상을 내리시는데 인색하지 않으시고

벌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으시니

군왕과 신하들은 같이 술잔을 높이 들어 즐기네

良臣集謀迎天禧(양신집모영천희)

一戰開疆千里余(일전개강천리여)

恢恢功業勅常彛(회회공업칙상이)

賞無所吝罰不違(상무소인벌불위)

君臣同樂酒盈卮(군신동락주영치)

6. 可與患難 不與共樂(가여환란 불여공락)

- 환란을 같이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 누릴 수 없는 월왕 -

문대에 모인 여러 신하들이 소리 높여 웃어 가며 크게 기뻐하는데 구천만은 오로지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띄우지 않았다. 범려가 보고 혼자 한탄하며 말했다.

「월왕이 지금이 있게 된 공로를 신하들에게 돌리지 않고 오히려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갖고 있구나!」

다음날 범려가 월왕을 배알하고 물러나기를 청하며 말했다.

「신이 듣기에 ‘그 주군 된 자를 잘 모시지 못하여 욕을 보게 만든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대왕께서 회계에서 오왕에게 욕을 당하실 때에도 신이 죽지 않고 그 욕됨을 참은 이유는 장차 월나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에 이르러 대왕께서는 이미 오나라를 멸하셨으니 옛날 회계에서 군왕께 입힌 욕됨에 대한 죄를 면하시게 하시어 원컨대 이 늙은 몸을 용서하여 강호에 물러나게 하여 여생이나마 보내게 해 주시면 백골난망이겠습니다.」

월왕이 듣고 마음이 처연하게 되어 흘리는 눈물로 옷을 적시며 말했다.

「과인이 경의 도움에 힘입어 오늘이 있게 되어 이제야 비로소 경에게 그 보답을 하려는데 어찌하여 과인을 버리고 물러나겠다고 하시오? 이곳에 머무른다면 나와 함께 나라를 같이 다스려 부귀를 누리게 되겠으나 만약에 내 곁을 떠난다면 남아 있는 경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겠소.」

「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하나 신의 처자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저의 처자를 죽이고 살리는 일은 오로지 대왕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신은 더 이상 관계하지 않겠습니다.」

그날 밤 범려는 고소성의 제녀문(齊女門)을 통하여 성밖으로 나가 조각배를 구해 타고 삼강(三江)을 건너 오호(五湖)로 들어가 달아나 버렸다. 지금도 오도의 제녀문 밖에 지명이 려구(蠡口)라는 곳이 있는데 범려가 조각배를 타고 달아난 포구이다.

다음날 월왕이 사람을 보내 범려를 불렀으나 범려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월왕이 정색하며 노기를 띄우고 문종을 향해 말했다.

「범려의 뒤를 쫓아가 잡아올 수 있소?」

「범려는 귀신도 예측하기 힘든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뒤를 따르게 해도 잡아올 수 없습니다.」

문종이 월왕에게서 물러 나와 집에 당도하자 어떤 사람이 와서 편지 한 통을 전했다. 받아서 겉봉을 뜯어보니 범려가 친필로 쓴 편지였다. 문종이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부는 지난 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겨 죽게되고 적국을 멸하게 되면 모신(謀臣)은 죽게된다’⑪는 오왕이 한 말을 잊었습니까? 월왕이라는 위인은 내가 살펴 보건대 그 상이 목이 길고 입이 새처럼 뾰쪽하게 생겼으니 인내심은 강하나 남의 공을 시기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는 환난을 같이 할 수는 있지만 영화는 같이 누릴 수 없는 법입니다.⑫ 지금 떠나지 않으면 화가 머지않아 대부의 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문종이 읽기를 마치고 답장을 써서 보내려고 하였으나 편지를 가져온 사람이 어느 사이에 사라져 버려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범려의 말이 납득이 안 되어 심기가 불편하게 된 문종은 깊이 믿지 않으며 홀로 탄식하며 말했다.

「소백(少伯)이 어찌하여 그 근심하는 바가 이렇게 지나치단 말인가?」

그리고 며칠 후에 월왕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월나라 도성 회계성으로 돌아왔다. 구천이 서시를 월나라에 데리고 왔음을 알게 된 월왕의 부인은아무도 몰래 사람을 시켜 서시를 납치하여 부대에 넣고 돌멩이를 매달아 깊은 강물 속에 던져 죽이라고 명하며 말했다.

「이 년은 나라를 망하게 한 요물이라! 어찌 내가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후세 사람들은 이런 일을 모르고 와전하여 범려가 서시를 배에 태워 같이 태우고 가다가 오호에 이르자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했다. 심지어는 이런 와전에 근거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시구도 있다.

서시를 데려간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월왕을 그르쳐 망국으로 이끌지 않을까 염려한 때문이라

載去西施豈無意(재거서시개무의)

恐有傾國誤君王(공유경국오군왕)

그러나 어찌 범려의 입장에서 조각배를 구해 단신으로 그 처자까지도 버려 가며 도망치는데 하물며 오나라의 총비를 끼고 아무도 몰래 달아날 리 만무한 일이다. 또 어떤 사람은 월왕이 서시의 미색에 현혹될까 걱정하여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가다가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데 그것도 역시 또한 터무니없는 말이다. 나은(羅隱)⑬이라는 시인이 서시의 원통함을 변명해 주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집안이나 나라나 각기 정해진 운명이 있는 법인데

사람들은 어찌 모든 허물을 서시에게만 돌리는가?

서시가 만약 오나라를 망하게 했다면

월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은 또한 누구란 말인가?

家國興亡自有時(가국흥망자유시)

時人何苦咎西施(시인하고구서시)

西施若解亡吳國(서시약해망오국)

越國亡來又是誰(월국망래우시수)

한편 월왕은 범려가 세운 공을 생각하여 범려가 버리고 간 처자들을 거두어 백 리의 땅을 봉지로 주고 다시 솜씨가 좋은 공인을 시켜 범려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자기의 자리 왼쪽에 세워 두고는 살아 있는 범려를 대하듯 했다.

범려가 오호를 통해 바다로 나간 후에 오래 동안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사람을 자기의 처자가 살고 있는 곳에 보냈다. 그 사람은 범려의 가족들을 데리고 제나라로 들어갔다. 그때는 이미 제나라로 들어가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바꾼 범려는 출사하여 벼슬이 상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 제나라의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으로 이주하여 목축을 일으켜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스스로를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했다.

7. 천금지자(千金之子) 불사우시(不死于市)

- 부잣집 아들은 길거리에서 죽지 않는다 -

도주공(陶朱公), 즉 범려가 도 땅에서 살면서, 늦은 나이에 막내아들을 낳았다. 이 막내아들이 장성할 때 쯤 해서 둘째아들이 초나라에 여행 갔다가 시비 끝에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범려가 소식을 듣고 말했다.

「사람을 죽였다면,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천금을 가진 부자집의 아들은 거리에서 죽지 않는다.』라고 했다.」

범려는 막내아들에게 초나라에 가서 소식을 알아보라고 당부의 말을 이른 다음 천 일(鎰)의 황금을 준비하여 갈색의 용기 안에 넣어 소가 끄는 수레 한 대에 싣고 가도록 했다.

이윽고 막내아들이 출발하려고 하자 장남이 나서서 자기가 가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범려가 그 청을 들어주지 않자 장남이 말했다.

「장남은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지금 동생이 죄를 지어 그를 구하려 가는데 장남을 보내지 않고 막내를 보내니 그것은 아버님께서 제가 불초한 자식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

장남이 말을 마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범려의 부인이 장남을 위해 말했다.

「지금 막내를 보낸다 한들 둘째를 살려서 데려 올지는 모르는 일인데, 그 보다 먼저 장남이 죽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범려는 할 수 없이 장남을 보내면서 자기 둘째아들에 대한 선처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써서 초나라의 현인 장(莊)선생에게 전하라고 주었다. 장선생은 옛날 범려가 초나라에 살 때 친구로 지내던 사람이었다. 범려가 장남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너는 초나라에 당도하면 지금 가지고 가는 황금을 전부 장선생에게 전하라. 장선생이 이르는 대로 하고, 심사숙고하여 절대로 그와 다투지 말라.」

드디어 장남이 동생을 구하기 위해 초나라로 길을 떠날 때 그는 별도로 범려 모르게 수백 금의 황금을 준비해 가져갔다.

마침내 장남이 초나라에 당도해서 장선생의 집을 찾았다. 장선생의 집은 성곽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명아주풀이 무성한 길을 헤치고 간신히 그 집 문 앞에 당도한 장남은 장선생의 누추한 집을 보고 그의 가세가 매우 빈한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남은 범려가 일러준 대로 편지와 함께 황금 천일을 장선생에게 주었다. 황금을 받고 편지 읽기를 마친 장선생이 장남을 향해 말했다.

「가능하면 하루라도 빨리 이 나라를 떠나게. 절대 이 도성에 머물면 안 되네. 동생이 석방되더라도 절대로 그 연고를 알려고 해도 안 되네.」

장선생의 집에서 나온 장남은 초나라의 도성을 떠나지 않고 장선생 몰래 도성에 묶을 곳을 마련하여 머물면서 범려 몰래 개인적으로 가져간 황금을 초나라의 궁중에서 높은 관직을 살고 있던 귀인에게 바쳤다.

한편 장생이라는 사람은 비록 누추한 집에서 빈한하게 살고 있었지만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이라고 초나라에 명성이 있어 초왕 이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도주공이 보낸 황금을 받은 이유는 그가 재물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이 성사된 후에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어 그에 대한 신용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장선생은 그 부인에게 황금에 대해 당부의 말을 했다.

「이 황금의 주인은 도주공이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미처 이 황금을 도주공에게 전해주지 못하게 되거든 당신이 나를 대신해서 전해주시오. 절대로 마음대로 손대지 마시오.」

그러나 범려의 장남은 장선생이 그가 준 황금으로 자기 동생을 석방하는데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줄로 생각했다. 이윽고 잔선생이 시간을 내어 초왕을 찾아가 말했다.

「제가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해 보니 어떤 별 하나가 그 자리를 옮겼는데, 그것은 우리 초나라에 매우 불길한 징조입니다.」

평소에 장선생을 믿고 있었던 초왕은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대책을 물었다. 장선생이 대답했다.

「오로지 덕을 베푸는 일만이 그 불길한 징조를 없앨 수 있습니다.」

초왕이 장선생에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돌아가 쉬시기 바랍니다. 말씀하신 바를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초왕은 장선생을 보내고 나서 왕명을 내려 삼전지부(三錢之府)⑭를 모두 봉하도록 했다. 범려의 장남에게서 뇌물을 받았던 귀인이 뜻밖의 왕명을 받고 깜짝 놀라 그를 찾아가 조만 간에 대사면령이 발하게 된다고 알렸다. 대사면령이 내리게 될 줄은 어떻게 알았냐고 장남이 묻자 그 귀인이 대답했다.

「초나라 왕들은 옛날부터 사면령을 내릴 때는 언제나 삼전지부(三錢之府)의 문을 봉해 왔소. 어제 저녁에 왕이 삼전지부의 문을 봉하라는 명을 내렸소.」

범려의 장남은 사면령이 내리면 그 동생도 마땅히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되는데 장선생에게 준 황금 천일은 너무나 큰 재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생을 석방하는데 아무런 힘도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장남은 곧바로 장선생의 집을 찾아갔다. 장선생이 놀라 물었다.

「자네는 아직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가?」

범려의 장남이 대답했다.

「원래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동생의 일을 부탁하러 왔었습니다만, 지금 사면령이 내려 동생이 스스로 풀려나게 되었음으로 하직 인사를 드리려고 이렇게 들렸습니다.」

장선생은 장남이 옛날 자기에게 준 황금을 찾기 위해 왔음을 알고 말했다.

「뒷방에 그대가 준 황금이 그대로 있으니 가지고 가게나.」

장남이 즉시 뒷방으로 들어가 황금을 취하고 떠나면서 스스로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기뻐했다.

젊은 사람에게 농락당했다고 생각한 장선생은 즉시 궁궐로 들어가 초왕을 배알하고 말했다.

「신이 전에 말씀드리기를 어떤 별이 움직여 나라에 불길한 징조가 있어 이를 막기 위해서는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오늘 신이 집밖으로 나와 길을 걷는데 길가의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도(陶) 땅의 부자 주공(朱公)의 아들이 사람을 죽여 우리 초나라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 집안사람이 많은 황금을 가지고 왕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바쳐, 지금 행하려고 하는 사면령도 대왕이 덕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도주공의 아들을 위해 행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초왕이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과인이 비록 부덕한 사람이 될지언정, 어찌 도주공의 아들 한 사람만을 위해 덕을 베풀 수 있단 말이오!」

초왕이 즉시 왕명을 발하여 도주공의 막내아들을 먼저 처형하라고 명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사면령을 내렸다. 도주공의 장남은 결국 동생의 시신을 찾아서 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갔다.

장남이 집에 이르자 그 모친과 마을 사람들은 막내아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나 유독 범려 만은 오히려 웃음 지으며 그 장남에게 말했다.

「나는 원래 네가 동생을 살려서 데려오지 못할 줄 알았다. 네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돈을 쓸 줄을 모르고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고생을 같이 겪어 어렵게 살아왔다. 그래서 너는 재물을 버리는 일을 참지 못한다. 그러나 네 막내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이미 부자였기 때문에 좋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토끼나 잡으러 다녔다. 그러니 어찌 그가 돈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기나 했겠느냐? 따라서 네 동생은 쉽게 재물을 버리고 또한 아까워 할 줄 모른다. 옛날 내가 막내를 보내려고 했던 이유는 그가 능히 재물을 버릴 수 있어서였고 장남인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살아오지 못하게 된 것은 다 하늘이 뜻이니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떠나고 난 다음 날부터 동생의 시신이 오기만을 밤낮으로 기다렸다.」

범려는 세 번이나 나라를 옮기고도 그때마다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단지 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름을 얻었다. 범려가 도(陶) 땅에서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러 세상에 전했다 도주공은 《치부기서(致富奇書)》라는 책을 써서 후세에 전하기도 했다. 그 후에 오나라 사람들이 범려를 오강(五江)에다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범려를 제사 지내기 위해 서진 때의 장한(張翰)이 지은 사당과 당조 때의 육구몽(陸龜蒙)이 지은 사당을 합쳐 삼고사(三高祠)라고 한다. 송조 때의 시인 유인(劉因)이 시를 지어 이 일을 비난했다.

사람들은 오나라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오나라를 멸한 적국의 재상을 이렇듯 숭상하는가?

나라가 망한 지 천년이 되도록 그 한을 잊지 못한다면

삼고사의 제사는 자서에게 바쳐야 옳지 않겠는가?

人謂吳痴信不虛(인위오치신불허)

建崇越相果何如(건숭월상과하여)

千年亡國無窮恨(천년망국무궁한)

只合江邊祀子胥(지합강변사자서)

8. 토사구팽(兎死狗烹)

- 구천의 의심을 사서 토사구팽 당하여 목숨을 잃은 문종 -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하고 대업을 이루게 되었음에도 구천은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은 물론 단 한 뼘의 땅도 떼어 분봉하지 않았다. 자연히 옛날 신하들과는 자연히 사이가 멀어져서 서로가 얼굴을 맞대는 기회가 적게 되었다. 계예(計倪)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그 직에서 물러나고 예용(曳庸) 등도 역시 나이가 들었음을 이유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났다. 문종은 마음속으로 범려가 편지를 써서 한 말이 생각이 나서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입조하지 않았다. 월왕의 측근 중에 문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 참소하는 말을 했다.

「문종은 자기의 공은 큰데 상이 적어 마음속으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병을 핑계 대고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월왕은 옛날부터 문종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으나 오나라가 없어진 다음부터 문종의 재능이 소용없게 되고 오히려 그 재능으로 란을 일으키게 되면 아무도 그를 당해 낼 수 없다고 걱정하여 마음속으로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를 죽일 만한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노나라에서는 계손씨, 맹손씨, 중손씨 등의 삼환씨와 노애공(魯哀公) 사이에 틈이 벌어져 애공은 삼가를 토벌하기 위해 월나라의 군사를 빌리기 위해 조빙한다는 명분으로 친히 월나라를 방문했다. 구천은 마음속으로 문종이 걱정이 되어 군사를 내어 노애공을 돕지 못했다. 노애공은 결국은 노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월나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천이 갑자기 병문안을 한다고 하면서 병상에 누워 있는 문종을 방문했다. 문종이 할 수 없이 병상에서 일어나 월왕을 맞이했다. 구천이 허리에 찬 칼을 풀어 옆에 세워 두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과인이 듣기에 ‘뜻 있는 선비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단지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가고 있지 않은가!만을 걱정한다.⑮’라고 했소. 경은 나에게 옛날 오나라를 멸하는 계책 일곱 가지를 말했는데 과인은 그 중에 세 가지만을 행했소. 그 세 가지 계책만으로도 오나라를 멸하였으니 나머지 네 가지 계책은 어디다 쓸 작정이오?」

「신은 그 계책이 어디에 소용이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그 네 가지 계책을 이미 죽어 지하에 묻힌 오나라의 왕들을 위해 사용하면 어떻소?」

월왕 구천이 말을 마치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의 가마를 타고 가 버렸다. 월왕은 그가 앉을 때 풀어 놓은 칼은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두고 갔다. 문종이 칼을 들고 살펴보니 칼집의 겉에 촉루(屬鏤)라는 새겨진 글을 보고, 그 칼은 바로 오왕 부차가 오자서에게 주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사용한 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문종이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옛말에 ‘너무 큰 공은 보상받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옛날에 소백(少伯)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은 월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다시 스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세 후에 사람이 있어 나를 자서와 같은 반열에 놓을 것이니 그렇게 원망만 할 일은 아니로다!」

문종은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촉루검으로 배를 갈라 죽었다. 월왕은 문종의 죽음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그 시신을 와룡산(臥龍山) 밑에 묻게 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산을 종산(種山)이라고 불렀다. 문종을 장사지내고 일 년 후에 해수가 들이닥쳐 산허리에 구멍이 크게 뚫려 문종의 무덤이 갈려졌다. 어떤 사람이 자서와 문종이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 바닷물의 풍랑을 따라 헤엄쳐 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오늘도 전당강(錢塘江)에는 해조(海潮)가 밀려들어 올 때면 앞에 오는 물결을 자서라 하고 뒤에 오는 물결은 문종이라고 한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문종을 노래했다.

충성스러운 신하 문종이여!

치국의 인재였다.

세 가지 계책으로 오나라를 망하게 했으나

그 한 몸은 월나라를 위해 죽었다.

忠哉文種(충재문종)

治國之杰(치국지걸)

三術亡吳(삼술망오)

一身殉越(일신순월)

범려와 같이 물러나지 않아

그 몸은 오자서의 뒤를 밟게 되었다.

천년 세월이 지났건만 그 기운은 생생하니

바다의 파도만 첩첩이 밀려오는구나!

不共蠡行(불공려행)

寧同胥滅(영동서멸)

千載生氣(천재생기)

海潮疊疊(해조첩첩)

구천은 재위 27년만에 죽었다. 그때는 주원왕 7년의 일로써 468년의 일이었다.

8. 天之所興 雖踐必貴(천지소흥 수천필귀)

- 하늘이 일으키면 비록 그 소생이 천하다 하나 반드시 귀하게 되는 법이다.-

한편 당진의 정사는 육경에 의해 행해지다가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가 멸문 된 후부터는 지(智), 조(趙), 한(韓), 위(魏) 등의 네 가문에 의해 다스려졌다. 지씨(智氏)는 원래 중행씨(中行氏)와 같이 순씨의 성이었음으로 그 족속들과는 구분하기 위해 옛날에 지앵(智罃)의 일로 하여 성씨를 지(智)로 바꾸어 불렀다. 그때는 지요(智瑤)가 당진의 정사를 맡고 있어 그를 부르기를 지백(智伯)이라 했다. 당진의 네 가문이 제나라에서 전씨들이 제후를 시해하고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음에도 제후들 중 아무도 그 죄를 토벌하지 않음을 보고 자신들도 서로 비밀리에 각기 자립하기로 의논했다. 사가는 각기 당진의 영토를 쪼개 만든 봉읍을 자기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출공(出公)이 직접 다스리는 영지가 오히려 사가들 한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보다 그 크기가 작었으나 출공으로써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다음은 그 네 종족 중 조씨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당시 조씨들의 수장은 시호가 조간자(趙簡子)로 불리우는 조앙(趙鞅)이었다. 조앙에게는 몇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이름이 백노(伯魯)라 했고 가장 나이가 어린 아들의 이름은 무휼(無恤)이라 했다. 그러나 무휼은 천비의 소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앙은 성은 고포(姑布) 씨에 이름은 자경(子卿)이라는 관상에 능한 사람이 당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불러 자기의 아들들의 관상을 봐 달라고 청했다. 자경이 조앙의 아들들의 관상을 보고 나서 말했다.

「제가 본 사람 중에는 장군감이 한 명도 없습니다.」

조앙이 한탄하며 말했다.

「우리 조씨 일문은 머지않아 망하겠구나!」

「제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길 가운데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하나 보았는데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부중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그 아이도 공의 아들이 아닌지요?」

「그 아이는 나의 어린 아들 무휼이라고 합니다만 천비가 낳은 소생이니 관상을 보아 무엇하겠소?」

「하늘이 버리면 비록 귀하다 하나 반드시 천해 지는 법이며 하늘이 일으키면 비록 그 소생이 천하다 하나 반드시 귀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 아이의 골상은 여러 자제 분들과는 특이하게 생겼으니 제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대감께서는 한번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조앙이 사람을 시켜 무휼을 불러 방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자경이 불려 온 무휼의 관상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높이 들어 읍을 한 다음 말했다.

「참으로 장군이 될 상입니다.」

조앙이 보고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앙이 그의 아들들을 모두 불러 그들의 학문을 물었다. 무휼만이 물음에 꼬박꼬박 답하고 조리가 분명하여 그때서야 조앙은 무휼이 지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어서 백노를 폐하고 무휼을 세워 적자로 삼았다.

하루는 정나라가 래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백이 노하여 조앙과 힘을 합하여 정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그때 마침 조앙이 병이 들어 무휼을 자기 대신 군사를 끌고 출정하여 지백을 돕게 했다. 지백이 술자리에서 술을 잔에 가득 딸아 무휼에게 주면서 마시기를 권했다. 원래 술을 마시지 못했던 무휼이 사양하며 마시지 않았다. 지백이 술에 취해 화를 내며 술잔을 무휼의 얼굴에 던졌다. 무휼의 얼굴은 술잔에 맞아 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조씨 부중의 장수들과 무사들이 모두 노하여 지백을 공격하여 살해하려 했다. 무휼이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조그만 치욕이니 내가 잠시 참겠다.」

지백이 군사를 데리고 당진으로 돌아가서 오히려 무휼이 잘못했다고 조앙에게 말하여 무휼을 적자의 자리에서 폐하라고 권했다. 조앙이 듣지 않았다. 이때부터 지백과 무휼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앙의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에 가까워지자 무휼을 불러 당부의 말을 했다.

「앞으로 당진에서는 난리가 일어날 터인데 그때는 오로지 진양성(晉陽城)⑯만이 믿고 의지할 수 있음을 너는 명심해야 한다.」

조앙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무휼이 조앙의 뒤를 이었다. 이가 조양자(趙襄子)다. 이때는 주정정왕(周貞定王) 11년 즉 기원전 458년의 일이었다.

옛날 조양자의 누이는 대(代)나라로 시집을 가서 대왕의 부인이 되었다. 양자의 그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미처 상복을 벗기고 전에 북쪽의 하옥산(夏屋山)⑰에 올라 잔치를 벌리고 대왕을 초청했다. 양자(襄子)가 요리사로 하여금 구리로 만든 국자를 들고 대왕과 그 시종들에게 음식을 바치며 술을 따르게 했다. 이윽고 주연이 무르익게 되자 양자가 아무로 몰래 이름이 락(犖)이라는 요리사로 하여금 구리로 만든 큰 국자로 대왕과 그 시종들을 쳐서 죽이도록 했다. 연회석 상에 대왕을 격살한 조양자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대국(代國)의 땅을 평정하고 조씨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양자의 누이가 본국에 있다가 그 부군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호소를 하다가, 그녀의 비녀를 뾰쪽하게 갈아 찔러 죽었다. 대나라 사람들이 이를 가엾게 여겨 그녀가 죽은 곳의 이름을 마계산(摩笄山)⑱이라고 불렀다. 양자는 점령한 대 땅에 백로의 아들 주(周)를 봉해 대성군(代成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백로는 양자의 형으로써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그의 부친 조간자에 의해 폐위되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 일을 사죄하는 의미로 주를 대 땅에 봉한 것이다.

그때 당진의 출공은 나라의 정사를 지(智), 조(趙), 한(韓), 위(魏)씨들을 대표하는 사경이 전단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무도 몰래 사자를 제와 노 두 나라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진의 네 집안을 토벌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제나라의 전씨들과 노나라의 삼환씨들은 오히려 출공의 모의를 지백에게 고해 바쳤다. 지백이 대노하여 한강자(韓康子) 호(虎), 위환자(魏桓子) 구(駒), 조양자(趙襄子) 무휼(無恤) 등과 같이 사가의 군사들을 합하여 오히려 출공을 공격했다. 출공이 대항하지 못하고 제나라로 도망쳤다. 지백이 소공(昭公)의 증손자 교(驕)를 당진의 군주로 세웠다. 이가 진애공(晉哀公)이다. 이때부터 당진의 대권은 모두가 지백(智伯) 요(瑤)의 손으로 들어갔다. 지백이 이어서 당진의 군주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마음을 굳히고 그의 가신들을 불러 상의했다.

《제 IV부 오자서 끝》

주석

①엽공(葉公)/ 옛날 손무와 오자서가 지휘하던 오나라 군사들과 싸워 패하고 죽은 심윤수의 아들이 심제량을 말한다. 엽은 지금의 하남성 엽현(葉縣) 서남에 있던 고을 이름으로 춘추 때 초나라 령이다.

②입택(笠澤)/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송강현(宋江縣)을 말함.- 상해시 남단과 접해 있음.

③간수(干隧)

④狡免死而良犬烹, 敵國如滅, 謀臣必亡

⑤용동(甬東)/현 절강성(浙江省) 주산도(舟山島)를 말함.

⑥장우(張羽:1333-1385/ 원말명초에 활약했던 문인으로 자는 래의(来仪), 혹은 부봉(附凤), 호는 정거(静居),지금의 강서성 구강시(九江市)인 심양(浔阳) 출신이다. 후에 절강 호주(湖州)인 오흥(吳興)으로 옮겨 살았다. 고계(高啟)、양기(楊基)、서분(徐賁) 등과 함께 오중사걸(吳中四傑)이라고 불리웠다. 또 고계, 왕행(王行)、서분 등의 10명의 문인들과 함께 북곽십재자(北郭十才子)라고도 칭해졌다. 관직은 태상승(太常丞)에 이르렀고,송대의 화가 미씨부자(米氏父子)의 화풍을 공부하고 시풍의 필력은 호방하고 고아했다. 시집에는 정거집(靜居集)이 있고 화집에는 장우산수화(張羽山水畵)가 있다.

⑦양성재(楊誠齋)/ 서기 1127년에 태어나서 1206년에 죽은 남송 때의 시인 양만리(楊萬里)로 성제는 그의 호다.

⑧서주(舒州)/현 산동성(山東省) 미산호(微山湖) 동안(東岸)의 미산현(微山縣) 동 10키로 위치했던 고을로 서주(徐州)라고도 했다.

⑨회상(淮上)

⑩상이(常彛)/ 동제(銅製)로 만든 술 마실 때 사용하는 주기(酒器)로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보기로 여겼다.

⑪狡免死 走狗烹, 敵國破 謀臣亡

⑫長頸鳥喙, 忍辱妒功, 可與共患難, 不可與共安樂

⑬나은(羅隱: 833- 809년/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소간(昭諫)이고 스스로를 강동생(江東生)이라 불렀다.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부양현(富陽縣)인 신성(新城) 출신이다. 여항(餘杭)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 어려서부터 시재가 있었다. 시문으로 정치를 논하고 공경대부들을 풍자하기를 즐겨하여 당시의 지배계층의 미움을 받아 응시한 과거에 10번이나 낙방한 후로는 이름을 은(隱)이라고 바꿨다. 만년에는 진해(鎭海) 절도사인 전류(錢鏐)에게 의지하여 전당령(錢塘令), 저작랑(著作郞), 절도판관(節度判官) 등의 관직을 지냈다. 당나라가 망하자 후량의 신하가 되었던 전류의 추천으로 나은도 후량의 급사중(給事中)으로 출사했다가 이어서 염철발운사(鹽鐵發運使)로 재직 중 77세를 일기로 죽었다. 저서로는 <갑을집(甲乙集)> 10권과 <참서(讖書)>5권이 지금까지 전한다.

⑭삼전지부(三錢之府) : 금은동으로 만든 화폐를 저장해 두던 창고를 말한다.

⑮志士不懮其身之死, 而懮其道之不行

⑯진양성(晉陽城)/현 산서성 성도인 태원시(太原市) 남쪽 부근

하옥산(夏屋山)/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동북쪽으로 뻗어 있는 항산(恒山) 남쪽에 있었던 산 이름.

마계산(摩笄山)/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涿鹿縣) 동쪽에 있던 산이름이다. 탁록은 북경시 서북 쪽에 있다.

[평설]

기원전 478년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를 향해 최후의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이때 월나라의 실력은 더욱 강성해졌고, 황지의 회맹에 원정을 나간 틈을 이용하여 그 도성을 기습당한 오나라는 이와는 반대로 몇 년 동안 계속적으로 든 기근으로 인하여 싸움을 계속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나라는 결국은 월나라와 강화를 맺은 후에 즉시 군대를 해산하여 백성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대부분의 군사들을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게 한 조치는 오나라의 군사력을 더욱 약화시킨 결과가 되었다. 당시의 오월의 군사력을 비교해보면, 월나라는 오나라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아무 거릴낄 것 없이 오나라를 향해 진군한 월군은 지금의 소주시 동남 쪽의 오송강(吳淞江)인 강상(江上)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진채를 세웠다. 구천은 야음을 틈타 좌우군에게 강의 하류로 나아가 횃불을 밝히도록 명하여 양동작전을 펼쳤다. 오군이 하류의 적군을 막기 위해 군사를 양분하여 그 절반을 하류로 보낸 틈을 타고 자기 휘하의 중군을 움직여 일거에 강을 도하하여 오군을 크게 무찔렀다. 다시 뒤로 후퇴한 오군이 전열을 수습하여 입택에 진을 치자 월군이 추격하여 다시 오군 진영을 무너뜨렸다. 기원전 475년 고소성을 포위한 월군은 오랫동안 공격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고소성 이외의 오나라 땅에 오나라의 식량을 방출하여 전쟁으로 피폐된 백성들을 구제함으로 해서 그 백성들의 인심을 샀다. 기원전 473년 고소성은 스스로 무너지고 부차가 자살함으로 해서 마침내 오나라는 멸망했다.

구천이 오나라와 5년 동안 싸우면서 강온 양면작전을 사용했다. 오나라에 몇 년 동안 계속해서 기근이 들자 그때까지 비슷했던 두 나라의 국력은 현저하게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구천은 예상보다 빨리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강상에서의 양동작전은 오군으로 하여금 그 수비처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 해서 오군의 주력인 중군의 도하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적군을 고립된 성에 몰아넣고 도성 밖의 오국 백성들의 마음을 산 작전은, 양식을 쌓아 놓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주지 않은 부차의 행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로써 월왕 구천은 정치적인 면에서 오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월왕 구천의 그러한 행동은 최소한 오나라 백성들의 전면적인 저항을 불러오지 않았다. 그럼으로 아무리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군이라도 결국은 그 숫자가 소수일 때는 다수인 상대방에게 사로잡히게 되어있는 법이다. 결국은 월군이 고소성을 오랫동안 포위만 하고 공세를 펴지 않았지만 결국은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자 주원왕이 그를 동방의 패자로 임명했다.

구천은 기원전 491년에 오왕에 의해 석방되어 환국한 후에 와신상담(臥薪嘗膽), 현인을 임용하고 충언을 받아들여 나라의 생산력을 발전시켜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시작한 이래 20년 만에야 드디어 오나라를 멸하고 패자를 칭할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능굴능신(能屈能伸)한 자세와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으로 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결코 휴식을 취하지 않았던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오나라의 역사는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또 다른 역사의 희극적인 면을 보여준다. 당시 오나라가 막강한 초나라를 멸한 일은 제나 당진과 같은 패권국가도 결코 해내지 못한 역사상 이정표를 세운 위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오왕은 지나치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행동하여 초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잃음으로써 본의와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초나라의 복국을 허용해야만 했다.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는 북방의 대국 제나라를 공격하여 애릉에서 10만에 달하는 제군을 전멸시켜 오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계속해서 북방의 패권국인 당진과 황지(黃池)에서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부차는 협상과 위협을 병행하여 결국은 당진의 양보를 받아내고 중원의 패주 지위에 올랐다. 부차의 그와 같은 행동은 자기가 천하를 지배하는 패자임을 제후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또한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끝까지 단호하지 못하고 인정에 얽매어 구천을 석방하여 본국으로 놓아준 결과 마침내는 구천에 의해 오나라는 망하고 자신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패자라는 정상의 자리에 오른 오나라는 곧바로 깊은 연못으로 침몰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오(吳)라는 나라 이름은 이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나라가 그와 같이 나락으로 떨어진 주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은 전략상의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1. 당시 중국 천하의 정세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단지 중원의 패권만을 차지하는데 몰두하여 월나라로부터 반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2. 오나라의 군사력 중 대부분의 군사를 모두 몇 천리나 되는 장거리 원정에 동원하고, 단지 노약자로 이루어진 소수의 부대를 도성에 남겨 수비를 하도록 했다. 그와 같은 눈앞의 적만을 보고 배후의 적은 보지 못한 전력 배치는 월나라에게 그 허를 보여줌으로 해서 기습을 불러들였다.

3. 애릉(艾陵)의 싸움 직전에 제나라보다는 월나라를 먼저 정벌해야 한다는 오자의 건의를 무시했고 황지 회맹전에도 여전히 오나라의 제일 위험한 적국은 월나라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4. 월나라와의 강화를 맺은 후에 군사들을 쉬게 한다는 명목으로 대부분의 군사들을 해산했다.

5. 월나라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철옹성과 같았던 고소성(姑蘇城)과 입택(笠澤) 일대의 거미줄과 같이 형성된 수로에 의지해서 지구전을 전개함으로 해서 자신의 전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하고, 입택으로 나와 결전을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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