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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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회. 吹簫乞吳(취소걸오) 進炙刺王(진자자왕)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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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3-1회. 전519년, 초오의 계보싸움 시의도.jpg  (384.7K)   download : 90
일반

제73회 吹簫乞市 進炙刺王(취소걸시 진자자왕)

오성에서 피리를 불며 걸식하는 오자서(伍子胥)와

생선구이 속에 숨긴 비수로 왕료를 찔러 죽인 전제

1. 投水自盡 絕疑保密(투수자진 절의보밀)

- 강물에 몸을 던져 오자서의 의심을 푼 어부(漁父). -

오원 일행을 배에 태워 장강을 건네주고 또한 음식을 구해 먹인 후에 다시 오원이 감사의 뜻으로 주는 칼도 한사코 받지 않았던 어옹과 서로 헤어지려는 순간 가던 길을 멈춘 오원이 몸을 다시 돌려 어옹에게 자기를 만난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는 부탁했다. 혹시라도 뒤에 초나라의 추격병이 있을까 걱정이 된 나머지 오원이 마지막으로 한 당부의 말은 어옹이 베푼 인정을 불신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어옹이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덕으로써 그대를 대했건만 그대는 아직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에 초나라의 추격병이 나와 상관없이 별도로 강을 건너 그대 뒤를 쫓게 된다면 내가 어찌 그 일을 해명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음으로써 그대의 의심하는 마음을 없어지게 하겠노라!」

어옹이 말을 마치자 배를 묶어 둔 줄을 풀고 강 가운데로 노를 저어 나아가 키를 뽑고 돛은 떼어 강물 속으로 던져 버리더니 배를 뒤집어엎어 그 자신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후세의 사관이 이를 두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목숨을 구해 도망쳐 낚시로 몇 년을 숨어 지내던 와중에서도

일엽편주 한 척으로 초나라의 망명객을 무사히 건너 주었다.

다른 사람의 의심을 덜어 주기 위해 즐거이 목숨을 끊어

이름 없는 고기잡이 노인은 천고에 이름을 전했다!

數載逃命隱釣綸(수재도명은약륜)

扁舟渡得楚亡臣(편주도측초망신)

絶君後慮甘君死(절군후려감군사)

千古傳名魚丈人(천고전명어장인)

지금도 무창(武昌) 동북의 통회문(通淮門) 밖에 해검정(解劍亭)①이라고 있다. 그때 오자서가 허리에 찬 칼을 풀어서 어옹에게 주려고 했던 장소이다. 오원은 어옹이 스스로 물에 빠져 죽는 모습을 보더니 한탄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살려 주었는데 나는 그대를 죽게 만들었구나! 참으로 슬픈 일이로다!」

2. 乞食浣紗女(걸식완사녀)

- 뢰수의 빨래하는 처녀에게 걸식하는 오자서 -

오원과 공자승이 곧이어 오나라 경계에 들어서서 길을 계속 가다가 율양(溧陽)②이라는 곳에 당도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못 먹고 굶으면서 길을 계속 걸어왔기 때문에 배가 고파 할 수 없이 음식을 얻기 위해 구걸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길을 가던 중 뢰수(瀨水)③가에서 빨래를 하던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여인 곁에는 밥이 담긴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오원이 발길을 멈추고 말을 건넸다.

「부인께서 저에게 약간의 밥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여인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였다.

「첩은 홀어미를 모시고 살다가 나이가 30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찌 처녀의 몸으로 감히 지나가는 과객에게 밥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길을 가다가 노자가 떨어져 궁벽하게 되어 먹지 못해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부디 얼마간의 밥으로 목숨을 구하려고 합니다. 부인께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덕행을 행하시는데 구태여 예의를 따질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오원의 풍모가 웅대하고 기품이 늠름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소첩의 눈에 손님의 풍모를 보아하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 사소한 예의에 구애받아 손님의 곤궁한 처지를 앉아서 쳐다만 볼 수 있겠습니까?」

빨래하던 처녀가 밥이 든 대광주리와 함께 사발을 꺼내어 무릎을 꿇고 바쳤다. 오자서와 공자승이 광주리에서 밥을 한 그릇을 담아서 먹더니 젓가락을 놓고 먹기를 멈추었다. 여인이 보고 말했다.

「손님은 먼 거리를 오면서 오랫동안 먹지 못해 매우 배가 고파 보이는데 어찌하여 배불리 먹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먹기를 계속하여 광주리 안에 든 밥을 다 먹어 버렸다. 오자서가 밥을 다 먹고 나서 헤어지려고 하는 순간에 여인에게 당부의 말을 하였다.

「부인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구했으니 그 은혜를 나의 가슴속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나는 실은 목숨을 구해 도망쳐 온 망명객이라 만일에 부인께서 다른 사람을 만나시거든 절대 제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그 여인이 오원에게서 당부의 말을 듣자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슬픈 일이로다! 첩은 홀로 된 모친을 모시느라 나이가 30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몸을 정결히 지켜 추호도 실수를 한 적이 없는 처녀의 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밥을 바치고 또한 외간 남자와 말을 주고받았으니 그것은 이미 내가 예의를 버리고 절개도 버리게 된 결과가 되어버렸는데, 손님께서는 어찌 그리도 다른 사람에게 박절하게 대하십니까? 손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가던 길을 계속 가십시오.」

오원이 작별의 말을 하고 길을 가다가 다시 머리를 돌려 뒤돌아보니 그 여인이 큰돌을 하나 가슴에 품고서 뢰수에 뛰어 들어 스스로 빠져 죽었다. 후세 사람이 그 여인을 찬양하는 글을 지었다.

율수의 남쪽 강변에

빨래를 하던 여인이 있었다.

오로지 모친을 봉양하느라

남자와는 말도 나누어 보지 못했다네!

溧水之陽(율수지양)

擊綿之女(격면지녀)

惟治母餐(유치모찬)

不通男語(불통남어)

그러다가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어

그녀의 대광주리를 서슴없이 풀어

그로 하여금 배불리 먹였건만

청백한 그 여인은 절개가 꺾이어

矜此旅人(긍차여인)

發其筐筥(발기광거)

君腹雖充(군복수충)

吾節已窳(오절이유)

강물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부녀자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밝히어

결코 마르지 않는 뢰수와 더불어

이 아름다운 여인의 절개는 천고에 빛났다!

捐此孱軀(연차잔구)

以存壺矩(이존호구)

瀨水不竭(뢰수불갈)

玆人千古(자인천고)

오원은 그 여인이 뢰수에 몸을 던져 빠져 죽는 것을 보자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손가락 끝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돌 위에 20자의 글을 썼다.

빨래를 하던 그대에게 내가 음식을 구걸하였다.

나는 배불리 먹고 그대는 물에 빠져 죽었네

십 년 후에는

내 반드시 천금으로 보답하리라!

尒浣紗我行乞(이완사아행걸)

我腹飽尒身溺(아복포이신익)

十年之后(십년지후)

千金報德(천금보덕)

3. 俠客專諸(협객전제)

- 협객 전제와 의형제를 맺는 오자서 -

글을 다 쓰고 난 오원은 후에 사람들의 눈에 띠일까 걱정되어 글씨를 흙으로 덮었다.

오원의 일행이 율양을 지나서 다시 300여 리를 앞으로 나아갔는데 땅 이름이 오추(吳趨)④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그들이 오추의 시내에 들어서자 이마가 튀어나오고 눈이 움푹 들어간 장사 한 사람이, 길거리에서 마치 굶주린 호랑이처럼 사나운 기세에 천둥번개 같은 목소리로 바야흐로 상대방의 등치가 큰 사람과 한 바탕 싸움을 벌이려고 하던 참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힘들여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려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그치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길가의 집에서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한 부인이 나와 그 장사를 향하여 불렀다.

「전제(專諸)야, 싸움을 그만 두지 못할까?」

그 소리를 들은 장사는 마치 무섭고 두려워하는 기색을 하며 즉시 손을 거두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원이 보고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여 그 곁에 사람에게 물었다.

「저와 같은 장사가 어찌하여 부인을 그렇게 무서워합니까?」

곁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저 사람은 이 마을의 유명한 장사라, 만인을 상대할 만한 힘을 갖추어 어떤 힘센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평생 의로운 일만을 즐겨 왔습니다. 이번에도 그가 불의한 일을 보게 되자,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문을 열고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부인은 그의 모친이고 그 부인으로부터 전제라고 불린 사람은 바로 그 장사의 이름입니다.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여 그 모친이 하는 말을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으며 비록 그가 매우 노했다고는 하나 그 모친이 말하자 즉시 싸우려는 생각을 멈춘 것입니다.」

오원이 찬탄해 마지않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진실로 열혈남아로다!」

다음날 오자서는 전제의 집을 방문했다. 전제가 나와 맞이하며 그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오원이 자기의 성과 이름을 말하며 또한 지금까지 당해 온 억울한 일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오원의 이야기를 들은 전제가 말했다.

「오공께서 그런 큰 원한을 갖고 계시다면 어찌하여 오왕을 찾아뵈어 군사를 빌려 원수를 갚지 않으십니까?」

「아직 나를 오왕 앞으로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 감히 스스로 찾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기회를 얻어 뜻하시는 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누추한 저희 집을 방문하신 뜻은 저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까?」

「그대의 효행을 내가 존경하여 친구로 삼고자 함이오!」

전제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오원을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그의 모친에게 고하고 즉시 오원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오원이 전제보다 두 살이 연상이라 전제가 오원을 형님이라 불렀다. 전제가 다시 그의 처를 불러 오원에게 인사를 올리게 하고 닭을 잡고 기장으로 밥을 지어 접대하면서 마치 골육을 새로 만난 것처럼 기뻐하였다. 오원과 공자승은 전제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오원이 전제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동생과 이곳에서 작별을 고하고 오도(吳都)에 들어가 오왕에게 출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겠네.」

「오왕은 용기는 있으나 교만합니다. 차라리 현자들과 친하고 선비들을 존대하는 공자광(公子光)을 찾아가십시오.」

「동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새겨 둠세! 후일 내가 동생의 도움이 필요하여 부르면 절대 거절하지 말기 바라네!」

전제가 허락했다. 오원과 공자승은 전제와 작별을 고하고 오도를 향하여 길을 출발했다.

4. 吹簫乞食(취소걸식)

- 퉁소를 불며 오나라 시정에서 걸식하는 오자서 -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계속 길을 가서 매리(梅里)⑤라는 곳에 당도하였는데 조그만 고을이라 성곽은 낮았고 시정은 조밀하지 못했지만 수륙의 요충지라 오고가는 배들과 수레소리는 제법 요란하였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오자서는 미승(羋勝)을 교외의 외딴 곳에다 숨겨 놓고 자기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에 얼굴에는 시커먼 숯으로 칠하고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손에는 반죽(斑竹)⑥으로 만든 피리를 들고 시중에 돌아다니면서 불며 구걸행각을 했다.

오자서야! 오자서야!

산과 물을 건너 송나라와 정나라로 갔건만

아무도 의탁할 데가 없었네!

천신만고 끝에 이곳에 왔건만

내 마음은 더욱 처량해 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겠는가!

伍子胥! 伍子胥(오자서, 오자서)

跋涉宋鄭身無依(발첩송정신무의)

千辛萬苦凄復悲(천신만고처복비)

父仇不報何以生爲(부구불보하이생위)

오자서야! 오자서야!

소관을 한번 넘다가

머리칼과 눈썹이 하얗게 변했고

수없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마음만 더욱 서러워지지만

형의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伍子胥! 伍子胥!(오자서, 오자서)

昭關一渡變須眉(소관일도변수미)

千驚萬恐凄復悲(천경만공처복비)

兄仇不報何以生爲(형구불모하이생위)

오자서야! 오자서야!

갈대밭에서 배를 타고 대강을 건너고

율양의 냇가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에 당도하였으나

피리를 불며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마음만 더욱 처량해 지는구나!

이 몸의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살아서 무엇하리요?

伍子胥! 伍子胥!(오자서,오자서)

蘆花渡口溧陽溪(로화도구율양계)

千生萬死及吳陲(천생만사급오수)

吹簫乞食凄復悲(취소걸식처복비)

身仇不報何以生爲(신구불보하이생위)

그러나 매리의 저잣거리에는 오자서의 노랫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주경왕 25년은 오왕 요(僚) 7년으로써 기원전 520년의 일이었다.

한편 오나라 공자광은 곧 오왕 제번(諸樊)의 아들이었다. 옛날 부왕인 제번이 죽을 때 그 뒤는 당연히 자기가 이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제번의 부왕이었던 수몽(壽夢)이 죽을 때 했던 유명에 따라, 오나라 왕위를 막내 계찰(季札)에게 넘겨주기 위해 그 형제들 순서에 의해 여제(餘祭)와 이매(夷昧)로 잇게 되었다. 드디어 여제와 이매가 죽게 되어 그 차례가 계찰이 되었다. 그러나 계찰은 사양하며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 왕위는 마땅히 제번의 아들인 공자광이 이어야 되었으나 이매의 아들인 왕료가 욕심을 내어 왕위를 광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가 차지하고 말았다⑦. 공자광이 마음속으로 승복을 하지 않고 가슴 한가운데에는 왕료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군신들은 왕료와 같은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같이 일을 도모할 측근들이 없어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관상을 잘 보는 피리(被離)라는 사람을 얻게 된 공자광은 그를 오도(吳都)의 관리로 천거하고는 그에게 호걸들을 수소문하여 발견하면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는 오원이 피리를 불며 오도의 저자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피리는 그 소리가 매우 애처로워 다시 한 번 귀를 기우려 들은 결과 그 노래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피리가 피리소리를 찾아 밖으로 나와 오원을 보자 크게 놀라 말했다.

「내가 수많은 사람들의 관상을 보아 왔지만 아직까지 이와 같은 상을 보지 못했다.」

피리가 오원에게 읍을 한 후에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상좌에 앉기를 청했다. 오원이 사양하며 감히 상좌에 앉지 못했다. 피리가 오원에게 말했다.

「제가 들으니 초왕이 충신 오사를 죽이자 그의 아들 오자서는 쫓기는 몸이 되어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하는데 혹시 귀하가 그 사람이 아닙니까?」

오원이 주저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피리가 다시 오원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귀하를 해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관상을 보니 귀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귀하의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대로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오원이 사실대로 피리에게 고했다. 그런데 피리의 옆에 있던 시자가 피리를 불면서 다니던 미친 사람이 초나라의 망명객인 오자서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 사실을 오왕 요에게 고했다. 오왕이 피리에게 오원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명했다. 피리는 사람을 시켜 아무도 몰래 공자광에게 오원의 일을 알리고 목욕시키고 옷을 바꾸어 입힌 오원을 데리고 궁궐에 들어가 오왕을 알현했다. 오원의 풍모가 하도 기이하여 몇 마디 말을 나누어 번 결과 그가 매우 현능한 사람임을 알게 된 왕료는 즉시 오원을 대부의 직에 임명했다. 다음날 오원이 입조하여 오왕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고 그의 부친과 형이 억울하게 죽은 일을 호소했다. 그때 오원은 원한에 사무쳐 격분한 나머지 이빨을 갈고 눈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튀었다. 왕료는 오원의 기개를 장하게 여기고 또한 그가 당한 억울한 일에 대해서 동정하는 마음이 일어 장차 군사를 내어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허락했다.

한편 공자광은 피리의 통보를 받기 전에도 평소에 오원이 지용을 겸비한 인재라고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오원을 거두어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했으나 오원이 먼저 왕료에게 알현을 하러 갔다는 소식을 접한 공자광은 왕료가 그를 중용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 안절부절 하다가 왕료를 찾아가 말했다.

「제가 들으니 초나라의 망명객 오원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다는데 왕께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십니까?」

「어질고 또한 효성이 있는 사람이오.」

「무슨 연유로 그렇게 보셨습니까?」

「그는 용력과 기개가 매우 비상한 사람이오. 과인이 그와 함께 나라의 일에 대해 한번 의논하며 살펴본 결과 그의 말에는 빈틈이 하나도 없었소! 이것은 그가 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그의 부친과 형의 원한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 나에게 군사를 빌려 달라고 하니 이것으로 그가 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왕께서는 그가 원수를 갚을 수 있게 군사를 빌려주신다고 허락하셨습니까?」

「과인은 그의 처지가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이미 허락했소.」

「만승의 군사를 이끌고 계시는 왕께서 어찌 한낱 필부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허락하셨으니까? 지금 우리 오나라는 초나라와는 창칼을 맞대고 피를 흘리며 싸우기를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승리도 취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오자서를 위해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필부의 원한을 나라의 수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가 싸움에서 이긴다면 오자서로써는 그의 원한을 풀 수 있어 호쾌한 일이 되겠지만 불행히도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우리의 치욕을 더욱 깊게 됩니다. 왕께서는 대 허락하시면 안 되는 일입니다.」

왕료는 공자광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즉시 초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취소했다. 오원은 공자광이 입조하여 오왕에게 출병을 만류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공자광의 뜻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나라 밖의 일에 대해 반대함은 당연한 일이다.」

오자서는 즉시 왕료에게서 받은 대부의 직책을 사양했다. 공자광이 다시 왕료에게 말했다.

「자서는 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여 대부의 직을 받지 않으니 아마도 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듯 합니다. 곁에 두고 쓰시지 마십시오.」

그래서 왕료는 오원을 소원하게 대했고 다시 그가 사양한 대부의 직을 되돌려 주지 않고 거둬들였다. 오원에게는 단지 양산(陽山)⑧의 땅에 있는 전답 100무만을 하사했을 뿐이었다.

5. 夫魚在千仞之淵(부어재천인지연), 而入漁人之手者(이이입어인지수자), 以香餌在也(이향이재야).

- 천길의 깊은 연못의 고기가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은 어부의 손에 향기로운 미끼가 있기 때문이다. -

오원과 공자승이 양산의 들판에서 밭을 갈았다. 공자광이 아무도 몰래 양산에서 밭일을 하고 살고 있는 오원을 찾아와 양식과 포백을 주면서 물었다.

「귀하가 오초(吳楚) 두 나라의 경계를 돌아다닐 때 혹시 귀하와 비슷한 용력과 재주를 갖춘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까? 」

「제가 어찌 이 나라의 재사들을 다 만나 볼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단지 전제라는 사람을 만났었는데 그야말로 진정한 용사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귀하가 소개를 해 준다면 내가 용사 전제와 교우관계를 맺고 싶소.」

「전제는 이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살고 있으니 지금 당장 부르면 내일이라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미 재주와 용기를 갖춘 선비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어찌 감히 그를 부를 수 있겠소? 내가 지금 당장 그가 사는 곳으로 찾아가 볼까 하오.」

이어서 공자광과 오원이 수레를 함께 타고 전제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때 전제는 길모퉁이에서 돼지를 잡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그는 수레 한 대가 쏜살같이 자기 앞으로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전제가 달려오던 수레를 피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수레가 그 앞에 멈춰 서더니 그 안에서 오원이 머리를 내밀며 전제를 보고 소리쳐 불렀다.

「이 형이 돌아왔네.」

전제가 황망 중에 칼 가는 일을 멈추고 오원이 마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마차에서 내린 오원이 곁에 있던 공자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분은 오왕의 사촌형님 되시는 공자광님이시네! 동생의 영명한 이름을 듣고 이렇게 특별히 찾아오셨으니 동생은 사양하지 말게나.」

「저는 시정의 골목에서 사는 보 잘 것 없는 백성일 뿐입니다. 본의 아니게 부덕한 제가 감히 대인으로 하여금 번거로움을 끼쳐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제가 공자광에게 읍을 한 후에 집안으로 모셨다. 전제의 집은 섶나무로 만든 사립문에 다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이었다. 공자광과 오자서는 그 집안으로 들어 설 때는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공자광이 먼저 절을 올리고 자기는 평생 전제와 같은 호걸들과 사귀고 싶었다는 뜻을 전했다. 전제가 맞절을 올려 답례했다. 공자광이 가지고온 황금과 비단을 전제에게 주었으나 전제는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 오원이 곁에 있다가 받으라고 강권하자 전제는 그때서야 할 수 없이 받았다. 이때부터 전제는 공자광 문하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공자광이 사람을 시켜 매일 고기와 양식을 보내고 면포와 비단은 달마다 보내 주었다. 또한 어떤 때는 공자광이 몸소 불시에 전제의 집을 찾아와 그 모친에게 문안을 드리곤 했다. 전제는 공자광의 은혜에 대해 매우 감격하였다. 어느 날 전제가 자기 집에 들른 공자광을 향해 물었다.

「저는 시골의 한 소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공자님께서 저희 가속들을 보살펴 주시는 은혜를 입고 있는데, 저는 그에 대한 보답을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저에게 시킬 일이 있다면 저는 오로지 공자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공자광이 즉시 좌우의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그가 왕료를 죽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전제가 듣고 말했다.

「선왕이신 이매가 죽고 그 아들이 자기의 자리를 찾아 스스로 그 뒤를 이었는데 공자께서는 무슨 이유로 그를 해치려고 하십니까?」

공자광은 조부 수몽이 죽을 때 오나라의 왕위를 부자지간으로 전하지 말고 형제지간으로 전하라고 한 유언을 상세하게 전했다.

「숙부 계찰님이 왕위를 사양했으니 왕위는 당연히 제번 왕의 적장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매 왕의 아들인 왕료가 그 지위를 이용하여 왕위를 스스로 차지하여 버렸소. 이 사람 광이 바로 제번 왕의 적장자요. 요가 감히 나를 제치고 왕위를 차지했지만 단지 내가 힘이 약하여 대사를 도모할 수 없어, 주위의 호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하오.」

「어찌하여 공자님은 측근들로 하여금 왕의 근신들에 종용하여 전왕의 명을 밝혀 지금의 왕을 왕위에서 퇴위토록 하시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자객을 길러 암살하여 선왕이 베푼 덕을 해치려고 하십니까?」

「왕료는 욕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세력을 믿고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르는 사람이오. 내가 만약 그 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그가 나를 해치려 들것이오. 이 광과 요는 양립할 수 없소.」

전제가 정색을 하며 의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단지 저에게는 노모가 아직 계셔 봉양을 해야 하는 몸이니 지금은 감히 제 목숨까지 바쳐서 공자님의 일을 돕지는 못하겠습니다.」

「나 역시 그대의 모친이 늙고 또한 그대의 아들은 아직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가 아니면 이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만약에 그대가 일을 맡아 다행히 성사된다면 그대의 아들과 모친은 바로 나의 아들과 모친이 될 것이오. 내가 마음을 다하여 노모를 봉양하고 어린 아들을 기르겠소. 어찌 감히 내가 그대의 은혜를 저버릴 수가 있겠소!」

전제가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무릇 일이란 가볍게 움직이면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하는 법이라 반드시 만전을 기해야만 합니다. 천 길의 깊은 연못의 고기도 어부의 손에 잡히고 마는 것은 어부의 손에 향기로운 미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왕료를 암살하시고자 하신다면 필히 왕료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먼저 주고 이어서 그 옆에 가까이 접근해야 합니다. 혹시 왕이 특별히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왕은 음식의 맛을 즐기는 사람이오.」

「음식 중 특히 즐겨 먹는 것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구운 생선이오.」

「제가 잠시 하직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대는 어디로 가려고 하오?」

「제가 생선구이를 맛있게 굽는 방법을 배워야만 오왕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제가 즉시 공자광에게 하직인사를 한 후에 생선 굽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태호(太湖) 가의 어촌으로 갔다. 어느덧 시간은 세 달이 지나가 이윽고 전제가 생선 굽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기가 구운 생선을 맛 본 사람들은 모두가 맛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게 된 전제는 어촌에서 돌아와 다시 공자광을 찾아왔다. 공자광은 전제를 자기 부중의 깊은 방안에 숨어 있게 하였다. 염옹이 이를 두고 시를 지었다.

사람들은 오자서를 강직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공자광에게 전제를 바쳐 아첨했다!

왕료에 대한 시해음모가 어디서 시작 되었는지를 알려면

세 달 동안 호반에서 생선 굽는 기술을 배울 때부터라고!

剛直人推伍子胥(강직인추오자서)

也因獻媚進專諸(야인헌미진전제)

欲知弑械從何起(욕지시계종하기)

三月湖辺學炙魚(삼월호변학자어)

6. 欲制鴻鵠(욕제홍곡), 必先去其羽翼(필선거기우익)

- 홍곡을 잡으려면 먼저 그 날개를 잘라라! -

공자광이 오자서를 불러 말했다.

「전제의 요리 솜씨는 이미 경지에 달했는데 어찌하면 오왕 가까이 보낼 수 있겠소?」

「무릇 사람들이 홍곡(鴻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이유는 홍곡에게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홍곡을 잡으시려고 하신다면 먼저 홍곡의 날개를 잘라내야 합니다. 왕료의 아들 경기(慶忌)는 그 근골은 무쇠처럼 단단하여 만부부당의 힘을 갖추고 손으로는 능히 날아가는 새를 잡을 수 있고 그 발로는 맹수를 때려잡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왕료가 경기를 늘 곁에 두고 있기 때문에 손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그의 동모제인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이 오나라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 비록 우리가 용을 붙들고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용기와 귀신도 모르는 기발한 계책이 있다 한들 어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공자님께서 왕료를 죽이려고 하신다면 우선 이 세 사람을 왕료 곁에서 떼어 내어 멀리 보내 놓은 연후에 일을 도모해야만 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비록 우리의 일이 일단 성사가 되었다 하더라도 공자께서는 두 다리를 뻗고 왕자리에 앉아 계실 수 없을 것입니다.」

공자광이 머리를 숙이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머리를 쳐들고 오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잠시 밭에 돌아가 있으면 그대의 말대로 일을 어느 정도 진행시켜 놓고 다시 만나 상의 드리도록 하겠소.」

오원이 즉시 작별의 인사를 올리고 자기가 살고 있던 산양의 밭으로 돌아갔다.

그해 기원전 520년에 주경왕이 재위 25년만에 죽었다. 경왕은 정비로부터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는 세자로써 이름이 맹(猛)이라 했고 차남은 이름이 개(匃)라 했다. 또한 두 적자보다 나이가 많은 서자에 이름이 조(朝)라는 아들이 있었다. 경왕이 조를 평소에 총애하여 대부 빈맹(賓孟)에게 부탁하여 세자를 다시 세우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일을 미쳐 행하기도 전에 경왕이 죽게 되었다. 경왕의 신하였던 유헌공(劉獻公) 지(摯)가 동시에 죽자 그의 아들 유권(劉券)이 부친의 작위를 이어 받았다. 유권의 자는 백분(伯蚡)이라고 했다. 평소에 빈맹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유권은 선목공(單穆公) 기(旗)와 공모하여 빈맹을 죽이고 세자 맹을 주왕으로 세웠다. 이가 주도왕(周悼王)이다. 평소에 왕자조와 사이가 좋았던 윤문공(尹文公) 고(固), 감평공(甘平公) 추(鰌), 소장공(召庄公) 환(奐)은 자기들 삼가의 가병들을 모아 상장 남궁극(南宮極)에게 주어 유권 일당을 공격하도록 했다. 유권은 양(揚)땅으로 도망치고 선기(單旗)는 왕맹(王猛)을 모시고 황(皇)땅으로 도망쳤다. 왕자조가 그의 무리에 속하는 욕힐(鄏肹)을 시켜 황(皇)땅에 가 있는 왕맹과 선기를 토벌하도록 했으나 욕힐은 오히려 싸움에서 패하여 죽었다.

당진의 경공(頃公)은 왕실에 대란이 일어난 것을 듣고 대부 적담(籍談)과 순력(荀躒)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황 땅으로 가서 왕을 도와 왕성으로 모시게 했다. 윤고도 역시 왕자조를 경(京)땅에서 주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왕맹(王猛)이 죽자 선기와 유권은 다시 그의 동생 왕자 개(匃)를 주왕으로 세워 적천(翟泉)의 땅에 머물렀다. 이가 주경왕(周敬王)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왕개(王匃)를 동왕이라 하고 왕자조를 서왕이라 했다. 두 왕이 서로 싸워 죽고 죽이기를 6년이 넘도록 끝나지가 않았다. 얼마 후에 소환이 병으로 죽고 남궁극이 벼락에 맞아 죽자 인심이 갑자기 흉흉해졌다. 당진의 대부 순력(荀躒)이 다시 제후들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경왕을 모시고 낙읍으로 쳐들어가 대항하는 윤고(尹固)를 사로잡자 왕자조의 군사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소환의 아들 소은(召嚚)은 자기 아버지와는 달리 사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오히려 왕자조를 공격했다. 왕자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초나라로 달아났다. 이윽고 제후들은 성주(成周)에 성을 다시 쌓고 경왕을 모셔와 주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경왕은 소은의 반복된 배신을 벌하여 윤고와 함께 시정에서 참수형에 처했다. 주나라 사람들이 쾌재를 불렀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다.

7. 계보지전(鷄父之戰)

- 오나라가 계보에서 초군을 크게 물리치다. -

주경왕(周敬王) 즉위 원년이며 오나라 왕료 재위 8년째 되던 해는 기원전 519년이다. 초나라 태자건의 생모는 초평왕에게 쫓겨난 이래로 채나라 경계의 운양(鄖陽)⑨ 땅에 살고 있었다. 이 해에 비무극은 그녀가 오원과 내통하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평왕에게 간하여 잡아다 죽이려고 했다. 태자건의 모가 알고 몰래 사람을 오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오왕 요가 공자광에게 군사를 주어 운양에 가서 태자건의 모를 모셔 오라고 명했다. 공자광이 이끄는 오나라 군사들이 종리(鍾離)에 이르자 초나라 장수 원월(薳越)이 군사를 이끌고 계보(鷄父)⑩에 주둔하여 공자광의 행군을 가로막고 한편으로는 영도에 사람을 보내 급보를 띄워 구원을 청했다. 초평왕은 영윤 양개(陽匃)를 대장으로 삼아 진(陳), 채(蔡), 호(胡), 심(沈), 허(許), 돈(頓) 등 여섯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원월을 도와 공자광의 초군을 막도록 했다. 호국의 군주 곤(髡)과 심국의 군주 영(郢)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고 진나라는 대부 하교(夏嚙)를 보냈으며 채, 허, 돈 삼국도 대부들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돕도록 했다. 이윽고 육국의 제후군을 이끌고 계보에 당도한 양개는 호, 심, 진 삼국의 병사들은 우군으로, 돈, 허, 채 삼국의 병사들은 좌군으로 삼고, 원월의 초나라 대군은 중군이 되어 오군의 침입에 만반의 대비를 갖추었다. 오나라 공자광도 본국에 급보를 띄어 원군을 청했다. 오왕 요가 공자 엄여을 데리고 만 명의 대군과 죄인으로만 구성된 3천의 군사를 친히 이끌고 계보(鷄父)의 땅에 당도하여 진채를 세웠다. 두 나라 진영이 교전 일을 정하기도 전에 초나라 영윤 양개(陽匃)가 갑자기 폭질로 급사했다. 원월이 제후국들의 군사들을 양개를 대신하여 지휘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공자광이 왕료에게 말했다.

「초나라의 대장이 죽어 그 군사들의 사기가 이미 꺾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후들이 이끌고 온 군사들의 수효가 비록 많다고는 하나 모두가 소국들이라 초나라의 위세를 무서워하여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선 것뿐입니다. 호와 심 두 나라의 군주는 직접 참전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나이가 어리고 실전 경험이 없는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또한 진나라의 하교는 용기는 제법 있다 하나 계략을 쓸 줄 모르며, 오랫동안 초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는 돈, 허, 채 3국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불복하고 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싸우려는 투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일곱 나라가 같이 참전하기는 했으나 마음이 한결 같지 않아 초나라 대장의 령은 위엄이 서지 않고 있으니 만약에 우리가 군사를 나누어 먼저 호, 심, 진 3국으로 이루어진 우군 진영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달아나기 바쁠 것이고 제후국 군사들이 무너지면 초나라 본국 군사들의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어 그들로부터 전승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청컨대 먼저 우리의 약함을 보여 적군을 유인한 후에 우리의 정예병들을 후방에 배치하여 진세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공자광의 계책을 따fms 왕료가 즉시 오나라 군사들을 3대로 나누어 자기는 중군을 맡고 공자광은 좌군을 엄여는 우군을 맡게 했다.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진영을 굳게 지키도록 한 오왕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명했다. 이윽고 왕료가 명을 내려 먼저 죄인으로 구성된 3천 명의 군사를 출전시켜 초나라 우측 진영을 향하며 대오도 갖추지 않은 상태로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 때는 가을철인 7월 그믐날이었는데 그믐날은 싸움을 하지 않았던 관습이 당시에는 있었다. 호자 곤(髡), 심자 영(逞), 그리고 진나라의 대부 하교 모두는 오나라가 감히 그믐날의 관습을 깨고 쳐들어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오나라 병사들이 돌격해 오는 소리를 듣게 된 3국의 군사들은 허둥대며 진영의 문을 열고 앞으로 나가 적군을 맞이해 싸우려고 했다. 오나라의 군사들은 죄인으로 된 군사들이라 기율도 없이 어떤 자는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자는 중간에 멈추고 하여 각기 제멋대로 행동했다. 3국의 병사들은 산만하고 어지럽게 진격해 오는 오나라 군사들을 보고 서로 간에 공을 다투어 도망가는 오나라 군사들을 대오도 갖추지 않은 채 추격하였다. 좌군을 이끈 공자광이 혼란한 틈을 타서 앞으로 진격하다가 하교를 만났다. 공자광이 손에 들고 있던 극을 한번 휘두르자 하교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호자와 심자 두 군주는 마음이 황망하게 되어 활로를 찾아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엄여가 이끄는 좌군마저 당도하여 앞길을 가로막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두 나라 군주는 마치 투망에 걸린 새의 처지가 되어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호자와 심자는 오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오군과 싸우다가 죽은 3국의 병사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고 살아서 생포된 갑사들은 800여 명이 넘었다. 공자광이 소리쳐 호와 심 두 군주를 끌어내어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사로잡은 갑사들은 풀어 주어 초나라 좌군으로 보내어 자기가 한 말을 퍼트리게 했다.

「호, 심 두 나라의 군주와 진나라 대부가 모두 오나라 군사들에게 잡혀 죽었다.」

허, 채, 돈 3국의 장수와 병사들은 놀라 간담이 서늘해져 감히 나가 싸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각기 살길을 찾아 도망쳐 버렸다. 왕료가 좌우의 이군과 군사를 합쳐 태산과 같은 기세로 초나라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초나라 대장 원월의 중군은 미처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휘하의 군사들 대부분은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오나라 병사들이 도망치는 초군의 뒤를 불시에 공격했다. 들판에 가득 찬 초군의 시체에서 흐르는 피는 내를 이루었다. 원월은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50여 리를 도망쳐서야 오나라 추격병의 사정권에서 벗어 날수 있었다. 공자광이 채나라 경계로 진격하여 운양 땅으로 곧바로 들어가서 태자건의 생모인 초부인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왔다. 채나라 사람들은 오나라 군사들에게 감히 항거하지 못했다.

한편 원월이 패잔병을 수습하니 원래 거느렸던 병력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공자광이 자기의 좌군만을 이끌고 초부인을 데리러 운양으로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밤낮으로 달려 공자광의 뒤를 쫓아 채나라에 당도하였으나 오나라 병사들은 이미 운양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뒤였다. 원월은 오나라 병사들의 뒤를 추격할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내가 군왕으로부터 소관의 문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던 신하 한 명도 잡지 못하여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싸움에서도 크게 패하여 일곱 나라의 군사들을 잃었다. 더욱이 채부인까지도 놓쳤으니 내가 지은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공은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지은 죄가 세 가지나 되니 무슨 면목으로 군왕을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원월이 말을 마치더니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초군이 계보에서 오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양개는 폭사하고 원월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초평왕은 강대한 오나라의 군세를 마음 속으로 매우 두려워했다. 그는 낭와(囊瓦)를 영윤으로 삼아 죽은 양개(陽匃)의 뒤를 잇게 하였다. 낭와가 평왕에게 계책을 올려 원래 영성은 성곽이 낮고 협소하여 그 동쪽 외딴 곳에 기존의 성보다 높이가 일곱 자가 더 높고 크기가 20리나 더 넓은 대성을 다시 축조하여 옛날의 성 이름은 기산(紀山)의 남쪽에 위치했다 해서 기남성(紀南城)으로 이름 짓고 새로 지은 성의 이름은 옛날대로 영성이라 하고 사람들을 옮겨 살게 했다. 다시 기남성 서쪽에 우익을 삼기 위해 성을 쌓아 맥성(麥城)이라 했다. 세 성이 마치 품(品)자 모양을 취하고 있어 유사시에 서로 호응하도록 하여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도록 했다. 초나라 백성들이 이를 낭와의 공이라고 칭송했다. 좌사마 심윤수(沈尹戍)가 이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며 빈정댔다.

「자상(子常, 낭와의 자)이 덕으로써 정사를 돌보지 않고 공연히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만 고생시켰을 뿐이다! 만약에 오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면 비록 영성이 10개가 있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8. 평왕지사(平王之死)

- 평왕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오자서 -

낭와가 계보에서의 싸움의 원수를 갚고자 전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하고 수군을 주야로 훈련시켰다. 훈련을 시작한지 3개월이 되자 군사들이 어느 정도 수전에 익숙해졌다. 낭와가 수군을 이끌고 장강의 흐름을 타고 오나라 경계까지 갔다가 무력을 시위하고 돌아왔다. 이때 초나라 군사들이 수로를 이용하여 오나라의 변경을 침범한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광은 오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오나라 국경을 향해 밤낮으로 행군했다. 이윽고 공자광이 오나라 경계에 이르렀으나 그때는 이미 낭와는 군사들과 함께 자기 나라로 후퇴한 뒤였다. 공자광이 말했다.

「초나라가 무력을 시위하고 방금 돌아갔으니 초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의 경계가 느슨해 졌을 것이다.」

공자광은 즉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군사들을 밤에만 이동시켜 소(巢) 땅을 기습하여 멸하고 다시 군사를 이동시켜 종리(鍾離)마저 폐허로 만든 후에 개선했다. 두 고을이 오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초평왕은 크게 놀란 나머지 마음속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주경왕 4년 즉 기원전 516년에 평왕의 병세가 위독하게 되어 낭와와 공자신(公子申)⑪을 침상 앞으로 불러 태자진(太子珍)을 부탁하고 죽었다. 자가 자서(子西)인 공자신은 초평왕의 동생이다. 낭와가 백극완을 불러 평왕의 후사 문제를 상의했다.

「태자진은 나이가 너무 어리고 또한 그의 모는 태자건의 부인으로 데려온 여인이라 올바른 후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소. 자서(子西)가 나이도 많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을 세우는 일은 명분에 따르는 순리이며 또한 신(申)은 어진 사람이니 그를 초왕으로 삼는다면 나라가 잘 다스려져 안정을 찾을 수 있소. 마땅히 자서를 옹립하여 초나라의 사직을 지켜야 하오.」

백극완이 낭와가 한 말을 공자신에게 전했다. 공자신이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만약 태자를 폐한다면 그것은 군왕의 아름답지 못한 행위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결과가 될 뿐이오. 지금의 태자는 섬진(陝秦)에서 온 여인의 소생이고 그의 모친은 이미 초나라 부인으로 섰으니 어찌 그가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적자가 아니란 말이오? 적자를 버려 선왕의 유명을 저버린다면 나라 안팎에서 우리를 비난 할 것이오. 영윤이 이로써 나를 꾀어 나의 몸에 화를 끌어들이려고 하니 그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소! 그가 다시 한 번만 더 나를 초왕으로 올린다고 말한다면 내가 반드시 그를 죽이고 말겠소!」

낭와가 공자신의 한 말을 전해 듣고 두려워하여 즉시 태자 진으로 하여금 평왕의 장례를 주재하게 하고 초왕의 자리에 올렸다. 초왕의 자리에 오른 태자는 그 이름을 진(珍)에서 진(軫)으로 고쳤다. 이가 곧 초소왕(楚昭王)이다. 낭와는 예전처럼 영윤으로 하고 백극완은 좌윤으로, 언장사를 우윤으로 비무극은 왕이 태자로 있었을 때 사부였던 관계로 옛날 은혜를 생각하여 그도 같이 국정에 참여하게 했다.

한편 정정공(鄭定公)은 오나라 사람들이 초부인을 데려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주옥으로 만든 비녀와 귀걸이를 보내어 태자건이 정나라에서 죽은 한을 달래게 하였다. 초부인이 오나라에 당도하자 오왕이 오도의 서문 부군에 큰집을 주어 미승으로 하여금 모시며 살게 했다. 오원은 평왕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가슴을 두 손으로 치면서 대성통곡하면서 하루 종일 울음을 끝이지 않았다. 공자광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초왕은 곧 그대의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땅히 쾌재를 불러야 할텐데 오히려 통곡을 하니 그 연유는 무엇이오?」

「내가 우는 이유는 초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의 머리를 베어 효수를 하여 나의 한을 풀어야 되는데, 그가 집안에서 편안히 죽었음을 원통하게 생각해서 입니다.」

공자광이 듣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호증 선생이 시를 지어 논했다.

부친과 형님의 원한을 미처 갚기도 전에

음탕한 도적은 자기의 안식처⑫에서 죽었구나!

손에 들고 있던 칼로 사무친 원한을 갚을 수 없어

슬픔은 쌓이고 귀밑머리만 더욱 하얗게 되는구나!

父兄寃恨未曾酬(부형원한미증수)

已報淫狐獲首丘(이보음호획수구)

手刃不能償夙愿(수인불능상숙원)

悲來霜鬢又添秋(비래상빈우첨추)

9. 진자자왕(進炙刺王)

- 생선구이 속에 감춘 어장검으로 왕료를 죽이는 전제 -

자기가 직접 원수를 갚지 못한 채로 평왕이 평안하게 죽었음을 한탄하여 3일 밤낮을 한숨도 자지 않고 괴로워 하다가 마음속으로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낸 오원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공자광을 찾아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대사를 거행하는데 아직 그 기회를 잡지 못하셨습니까?」

「밤낮으로 궁리를 하고 있으나 아직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소!」

「지금 초나라는 왕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고 또한 조정에는 이렇다 할 지모 있는 신하들이 없습니다. 공자께서는 오왕에게 상주하여 초나라의 상을 틈타 군사를 서쪽으로 출정시켜 초나라를 제압한 후 천하를 제패하라고 하십시오.」

「만약 왕료가 나를 초나라 정벌군의 대장으로 삼으면 어찌해야 하오?」

「공자께서 실수한 척하여 수레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시면 오왕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낼 것입니다. 그때 공자께서 엄여와 촉용을 대장으로 천거하고 다시 공자 경기(慶忌)는 정․위(鄭衛) 두 나라에 보내 그들과 결맹하여 초나라를 같이 공격하라고 하십시오. 이것은 한 개의 그물에 세 마리의 새를 잡는 계책이니 오왕이 죽음은 바로 눈앞의 일이 될 것입니다.」

「세 사람의 날개와 같은 존재를 비록 멀리 보냈다고는 하나, 연릉(延陵)⑬에 사시고 계시는 나의 숙부 계자(季子)님이 아직 오왕을 모시고 있는데, 나의 찬탈 행위를 보고 용납하지 않으면 어찌 해야 하겠소?」

「오나라와 당진은 서로 우호관계에 있습니다. 다시 오왕에게 말하여 계자를 당진의 친선사절로 보내어 중원의 정세를 엿보고 오라고 하십시오. 오왕은 단지 큰일만을 좋아하고 원래 지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그는 틀림없이 공자님의 말씀대로 따를 것입니다. 계자가 먼 나라로 사자로 갔다고 돌아 올 때쯤이면 대세는 이미 정해져 어찌 그가 다시 폐립에 관한 일을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공자광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오원에게 절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얻을 수 있었음은 하늘이 나를 도왔기 때문이오!」

다음날 공자광이 입조하여 왕료에게 초나라에 국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정벌하면 많은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상주했다. 왕료가 두말하지 않고 공자광의 말을 따랐다. 다시 공자광이 말했다.

「이번 정벌전은 제가 마땅히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제가 실수로 수레에서 떨어져 발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 이번에게 제가 출전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대장으로 삼아야 하오?」

「이번 출전은 나라의 큰일이라, 측근의 믿는 신하가 아니면 불가합니다. 왕께서 스스로 생각하시어 택하십시오.」

「엄여와 촉용이면 어떻습니까? 」

「그 두 사람이라면 가하다고 봅니다.」

공자광이 다시 왕료를 향해 말했다.

「원래부터 당진과 초 두 나라는 천하를 가운데에 두고 남북 간에 쟁패전을 벌린 결과 우리 오나라는 그들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당진은 이미 쇠퇴해졌고 초나라도 우리에게 여려 번 싸움에서 진 관계로 제후들은 어느 나라를 따라야 하는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북쪽의 당진과 남쪽의 초나라가 지배했던 천하의 패권은 동쪽에 있는 우리 오나라로 넘어오려는 찰나에 있습니다. 만약에 공자 경기를 정위 두 나라에 보내 그곳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릉의 계자(季子)님을 당진에 친선사절로 보내 중원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이곳에서 수군의 훈련에 전력을 기울이고 보군으로 그 뒤를 받친다면 대왕께서는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료가 듣고 크게 기뻐하여 엄여와 촉용에게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정벌하라 명하고 계찰은 당진에 친선사절로 보냈으나 공자 경기만은 보내지 않고 자기 측근에 머물게 했다.

한편 엄여와 촉용은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수륙 양로를 이용하여 서쪽의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여 초나라의 잠읍(潛邑)⑭을 포위했다. 잠읍의 수장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할뿐 나와서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초도에 보내 사태의 위급함을 알렸다. 그때는 초나라는 소왕이 선지 얼마 되지 않아 군주는 어리고 신하들은 서로 눈치 보기에 바빠, 오나라의 군사들이 잠읍을 포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은 온통 시끄럽게만 굴었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자신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오나라가 우리의 국상을 틈타 공격해 왔는데 만약에 우리가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막지 않는다면 우리의 약점을 보이는 결과가 되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우리 초나라 영토를 더욱 깊숙이 쳐들어오려는 생각을 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한시라도 빨리 좌사마 심윤수로 하여금 보군 1만 명을 이끌고 가서 잠읍을 구하게 하고 다시 좌윤 백극완에게 수군 1만 명을 이끌고 회예(淮汭)⑮에서 물살을 타고 하류로 내려가 오나라 군사들의 퇴로를 끊게 하십시오. 앞과 뒤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는 오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우리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초소왕이 크게 기뻐하여 백극완과 심윤수 두 사람을 대장으로 삼아 수륙 양로로 진격하여 잠읍을 구하도록 했다.

한편 엄여와 촉용이 잠읍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중에 첩자가 와서 보고했다.

「초나라의 구원병이 당도하고 있습니다.」

두 장수가 크게 놀라 군사를 두 대로 나누어 한 대는 성을 계속 포위하고 한 대는 초나라 구원병과 대적하려고 했다. 그러자 심윤수는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기만 할뿐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사방으로 군사를 보내어 길목마다 돌을 이용하여 보루를 쌓고 오군의 물길과 보급로를 끊었다. 두 장수가 크게 놀라고 있던 중 탐마가 다시 와서 보고했다.

「초나라 장수 백극완이 수군을 이끌고 회하(淮河)의 물줄기를 타고 회예에서 강구(江口)⑯로 나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오나라 군사들은 드디어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다. 촉용과 엄여는 즉시 영채를 두 곳으로 나누어 세우게 하여 기각지세을 이루어 초나라 군사들과 대치할 수 있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오도로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게 하였다. 촉용과 엄여 두 대장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사자가 당도하자 공자광이 왕료에게 상주했다.

「신이 옛날에 정나라의 군사과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북쪽에서 공격하여야 한다고 드린 말씀은 바로 이런 때를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경기를 정나라에 보낸다 해도 그렇게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왕료가 즉시 경기에게 명하여 정위 두 나라의 군사들을 규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 엄여와 촉용의 군사들과 호응하라고 명하고 즉시 길을 떠나도록 했다.

이윽고 왕료의 측근인 네 공자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나게 되고 단지 공자광만 국내에 남게 되었다.

오원이 공자광에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예리한 비수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전제를 써먹을 때가 왔습니다.」

「나에게 좋은 명검이 하나 있소. 옛날에 월왕 윤상이 명장(名匠) 구야자(歐冶子)를 시켜 다섯 개의 칼을 만들게 했는데 그중 세 개를 우리 오나라에 바쳤소. 칼 이름은 각각 제일검은 담로(湛盧), 제이검은 반영(磐郢), 그리고 제삼검은 어장(魚腸)이라 했소. 어장은 곧 비수이며 그 크기는 비록 짧고 가늘지만 쇠 덩어리를 마치 나무 조각처럼 자를 수 있어 실로 그 날이 예리하기 그지없소. 부왕 제번께서 나에게 물려주신 것이라 지금까지 귀한 보물로 생각하여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해 침상 머리맡에 숨겨 놓고 있소. 이 칼은 신물이라 요즈음에 이르러 밤이 되면 계속 빛을 내고 있소. 이는 아마도 스스로 자기가 사용될 시기를 알아채고 장차 왕료의 피를 먹고 싶어서인 것 같소.」

공자광이 즉시 어장검을 꺼내와 오원에게 보였다. 오원이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공자광은 즉시 전제를 불러 어장검을 주어 지니게 했다. 전제가 공자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뜻을 짐작하고 얼굴에 비장한 기색을 띄며 말했다.

「왕료가 공자님을 믿고 있으니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의 동생 둘은 멀리 떠나 있고 숙부인 계자와 왕의 아들 경기는 모두 사신의 임무를 띠고 나라 밖으로 나가 있어 그는 이제 고립무원이 되었는데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단지 이것은 나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 내가 감히 혼자서 결정할 수 없고 모친께 이 일을 품하고 허락하신다면 제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제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말을 올리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모친이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슬퍼하는가? 공자께서 무슨 까닭으로 너를 문하에 두었겠는가? 우리 온 집안 식구가 공자님의 큰 은혜를 입었는데 마땅히 그 덕에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충신과 효자 노릇을 같이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내 걱정은 절대 하지 말고 당장에 공자님에게 달려가라! 네가 만일 일을 성사시킨다면 너의 이름은 후세에 길이 남길 수 있고 나 역시 죽더라도 이름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히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지 않겠느냐?」

전제가 차마 떠나지 못하자 노모가 말했다.

「내가 시원한 냉수를 좀 마시고 싶으니 너는 우물에 가서 물을 한 그릇 떠 가지고 오너라!」

전제가 모친의 명을 받고 우물에 가서 물을 떠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노모가 방안에 없어 그 처에게 물었다. 그 처가 대답했다.

「어머님께서는 피곤하다고 하면서 누어서 쉬어야 하겠으니 아무도 떠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뒷방으로 가셨습니다.」

전제가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 뒷방의 창문을 뜯고 들어가서 보니 그의 노모는 침대 위에서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 염선(髥仙)이 이 일을 두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아들의 이름을 이루려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

결국은 효자를 충신으로 만들었다!

세간에는 별짓을 다하여 생을 탐해 일생을 망치는데

시골의 한 구구한 노부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구나!

愿子成名不惜身(원자성명불석신)

肯將孝子換忠臣(긍장효자환충신)

世間盡爲貪生誤(세간진위탐생오)

不及區區老夫人(불급구구노부인)

전제가 대성통곡을 한 바탕 한 다음에 시신을 염하고 납관을 한 후에 오추성(吳趨城) 서문 밖에 장사 지냈다. 장례를 끝낸 전제가 그의 처에게 말했다.

「내가 공자님의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감히 목숨을 걸고 돕지 못했던 이유는 단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소. 지금 노모께서 이미 돌아 가셨으니 내가 공자님에게 달려가 그의 급한 일을 도와야 되겠소. 내가 혹시 죽더라도 그대 모자는 필시 공자님이 가족처럼 보살펴 줄테니 결코 나를 붙잡아 둘 생각은 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전제는 즉시 공자광의 집으로 달려가 그를 접견하고 모친이 죽었음을 알렸다. 공자광이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말없이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다시 왕료를 암살할 일을 거론했다. 전제가 말했다.

「공자님께서 연회를 준비하고 오왕을 초대하십시오. 오왕이 만약 초대에 응한다면 일은 십중팔구는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공자광이 전제의 말을 듣고 입조하여 왕료를 배알하며 말했다.

「저희 집에 요리사가 한 명 태호에서 새로 왔는데 다른 요리사와는 달리 새로운 방법으로 생선을 구워 그 맛이 일품입니다. 청컨대 왕께서 저의 집에 한번 행차하시어 저로 하여금 생선구이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왕료는 생선구이를 매우 좋아하여 그 자리에서 흔쾌한 마음으로 허락하면서 말했다.

「내일 제가 형님의 집에 들려 생선구이 요리를 맛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요란하게는 준비하지 마십시오.」

공자광이 그날 밤 미리 갑사들을 지하의 방 속에 매복시켜 놓고 다시 오원에게 아무도 몰래 자객 100명을 데리고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부중에서 일이 나면 호응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공자광은 연회를 거창하게 준비시켰다.

다음날 아침 공자광이 다시 왕료에게 청하자 왕료가 입궁하여 그의 모친에게 고했다.

「공자광이 술상을 차려 놓고 나를 청한다고는 하나, 혹시 그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지나 않는지 걱정됩니다.」

왕료의 모가 말했다.

「광은 심기가 불편하여 항상 한을 품고 있는 기색을 얼굴에 띄며 살고 있다. 이번에 너를 그의 집으로 초청하는 일도 그리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거절하지 않았는가?」

「제가 거절하면 그와는 틈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해서 입니다. 만일에 대비해 준비를 엄하게 하고 그의 집에 간다면 두려울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왕료는 사자의 가죽으로 된 갑옷을 삼중으로 껴입고 앞뒤에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왕궁에서 떠나 곧바로 공자광의 집 대문 앞에 당도하였다. 왕료를 호위하는 군사들이 큰길을 가득 메우고 행진을 하는데 그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다. 왕료가 탄 어가가 공자광의 집 앞에 당도하자 광이 마중을 나와 절을 올렸다. 공자광의 집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좌정한 왕료 곁에 공자광도 같이 앉았다. 공자광의 집은 왕료의 측근들과 근신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또한 모두가 손에는 긴 자루의 극을 든 100명의 장사들은 칼을 허리에 차고 왕료의 뒤에 서서 철통같이 지키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음식을 나르는 요리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앞 뜰 밑에서 몸수색을 샅샅이 당한 후에라야 무릎걸음으로 다녀야 했으며 십여 명의 장사가 칼을 손에 쥐고 요리사들 옆에 바싹 붙어 감시했다. 요리사들이 음식을 상에 놓을 때는 얼굴을 쳐들어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며 그들이 나갈 때에는 다시 무릎걸음을 해야 했다. 공자광이 술잔에 바치며 존경의 뜻을 나타내다가 갑자기 발이 미끄러져 실족을 하면서 거짓으로 매우 고통이 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서 곧이어 왕료 앞으로 절뚝거리며 나와 말했다.

「제가 지난번에 다친 발이 다시 미끄러져 그 아픔이 뼛속 깊이까지 쑤셔 고통이 매우 심합니다. 아무래도 천으로 발을 단단히 감아야만 통증을 방지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다행히 왕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잠시 동안만 혼자 앉아 계시어 저로 하여금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다리를 동여 메고 난 후에 바로 나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형님께서는 저를 괘념치 마시고 편하신 대로 행하십시오.」

공자광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연회장에서 빠져 나와 내실로 들어간 후에, 이어서 지하의 밀실로 내려가 몸을 숨겨 버렸다. 잠시 후에 전제가 생선구이가 다 되었다고 고하며 요리를 손에 들고 연회장에 나타났다. 왕료를 호위하고 있던 장사들이 조금 전에 요리사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몸 검사를 철저히 했다. 그러나 아무도 생선의 뱃속에 어장검이 미리 숨겨져 있는 줄은 몰랐다. 장사들이 전제를 감시하며 무릎걸음으로 걷게 하고는 두 손으로 요리를 바쳐 들고 왕료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였다. 이윽고 전제가 왕료 앞에 이르자 갑자기 생선 뱃속에 든 어장검을 꺼내어 왕료의 가슴을 찔렀다. 손에다 온 힘을 주어 찔렀기 때문에 어장검의 칼날은 삼중으로 껴입은 단단한 갑옷을 뚫고 들어가 관통하여 등 뒤로 튀어 나왔다. 왕료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더니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왕료를 호위하던 장사들이 한꺼번에 일제히 달려들어 손에 들고 있던 칼과 극으로 전제를 찔렀다. 전제의 몸은 순식간에 토막이 나고 이어서 뭉그러져 처참하게 죽었다. 당중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공자광이 지하의 굴속에 있다가 일이 이미 성사되었음을 알고 즉시 같이 있던 갑사들에게 명하여 밖으로 출동시켰다. 양쪽의 갑사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공자광이 풀어놓은 갑사들은 전제가 이미 왕료를 죽였음을 알고 기세가 충천했지만, 왕료를 호위하던 장사들은 자기들이 모시던 왕이 죽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에 그 중의 반은 공자광 편의 갑사들에게 살해되고 나머지 반은 도망쳐 버렸다. 집 밖에서 경비를 서던 군사들도 대부분 오원이 거느린 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흩어져 도망쳤다.

10. 闔閭爲王(합려위왕)

- 합려가 오왕의 자리에 오르다. -

오원과 갑사들이 공자광을 받들어 수레에 올라 조당으로 들어가서 군신들을 모이게 했다. 공자광은 왕료가 선대들이 행한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왕이 된 죄를 명백히 밝혀 국인들에게 선포했다.

「오늘 이 광이 왕료를 죽인 이유는 왕위를 탐해서가 아니라 실은 왕료가 의를 지키지 않아서 이를 벌주기 위해서였다. 일단은 이 광이 대위를 섭정하고 있다가 계자가 돌아오시면 옛날 선군들의 뜻을 받들어 그를 왕으로 모시겠다.」

공자광은 즉시 왕료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으로써의 예를 갖추어 빈렴을 행하고 장사를 지내 주었다. 또한 전제의 시신도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 주고 그의 아들 전의(專毅)를 상경으로 봉했다. 계속해서 오원을 행인(行人)⑰의 직에 임명하여 손님의 예로 대하고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 오도의 관리 피리(被離)는 오원을 천거한 공로를 인정하여 역시 대부의 직에 제수하였다. 공자광은 오나라 부고에 쌓여 있던 재물과 양식을 꺼내어 불쌍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을 위무했다. 희광(姬光)은 공자 경기가 아직 나라 밖에 살아 있어 안심을 하지 못했다. 길을 잘 걷는 사람을 뽑아 그가 돌아 올 시기를 정탐하여 알아낸 공자광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강수 강안에 주둔하며 공자 경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경기는 귀국하던 중에 나라 안에서 변란이 난 소식을 듣고 공자광이 기다리고 있던 곳에 당도하기 바로 직전에 오던 길을 되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경기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공자광이 되돌아 달아나는 경기의 뒤를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타고 추격했다. 경기는 그가 타고 오던 수레를 버리고 말을 타고 달아나는데 마치 새가 나는 것처럼 빨라 공자광은 도저히 경기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공자광이 궁수들을 모이게 하여 경기에게 집중하여 활을 쏘도록 하였다. 경기가 손을 들어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내어 한 개의 화살도 경기를 맞추지 못했다. 공자광은 경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고 오나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관리에게 경기를 철저히 감시하라고 이르고는 즉시 오도로 되돌아 왔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당진으로부터 일을 마치고 돌아온 계찰은 왕료가 이미 죽은 사실을 알고 곧바로 그가 묻힌 묘소로 찾아가 상복을 입고 애도했다. 공자광이 왕료의 묘소에 애도를 드리고 있던 계찰을 찾아와 오나라의 왕위에 오르라고 청하면서 말했다.

「숙부님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한 것은 조부님의 뜻이었습니다.」

계찰이 듣고 말했다.

「네가 원하는 바를 얻고서 어찌하여 남에게 양보하는가? 어떻게 되었건 나라의 종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 백성들에게 폐위당하지 않고 능히 왕위에 오른 자라 할지라도 그는 곧 나의 군주로 생각하겠다.」

공자광이 더 이상 강권하지 않고 즉시 자신이 오왕의 자리에 오르고 자기의 호를 합려(闔閭)라 했다. 계찰은 예전처럼 물러나서 신하의 직분을 지켰다.

― 주경왕(周敬王) 5년 기원전 515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자서가 초나라의 성보(城父)에서 쫓기기 시작한 주경왕(周景王) 23년 즉 기원전 522년부터 7년이 경과한 때였다. ―

계찰은 오나라에서 왕위 다툼이 벌어져 시해 사건이 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연릉에 머물며 죽을 때까지 오도에 행차하지 않고 국정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계찰을 고결한 사람이라고 존경해 마지않았다. 계찰이 죽자 그를 연릉에 장사 지냈다. 후에 공자가 친히 가서 <유오연릉계자지묘(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비문을 썼다. 후의 사관이 글을 지어 계자의 덕을 찬미했다.

탐욕스러운 사람이 이익를 구하다가 죽으니

조그만 이익에 눈이 먼 것과 같도다!

춘추 때에 앞을 다투어 서로 시해하여

골육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貪夫殉利(탐부순리)

簞豆見色(단두견색)

春秋爭弑(춘추쟁시)

不顧骨肉(불고골육)

누가 저 계자처럼

시종일관 나라를 양보했던가?

요와 광은 태백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어 뵐 수 있겠는가!

孰如季子(수여계자)

始終讓國(시종양국)

堪愧僚光(감괴요광)

无慚太伯(무참태백)

송조때의 유생이 시를 지어 계찰이 왕위를 받지 않아 시역의 란이 일어났음은 그의 명성에 옥에 티라고 했다.

한번의 양보로 여러 사람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켰으니

형제간에 왕위를 전하라는 선조의 명을 저버리게 만들었다.

만약에 연릉의 계자가 부친의 뜻을 받들었다면

고소대에 사슴들이 멋대로 뛰어다닐 수 있었겠는가?

只因一讓啓群爭(지인일양계군쟁)

辜負前人次及情(공부전인차급정)

若使延陵成父志(약사연릉성부지)

蘇台麋鹿豈縱橫(소대미록개종횡)

한편 잠읍에서 초군에게 포위를 당해 위급한 처지에 놓인 엄여와 촉용은 요청한 구원병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그 계책을 세우지 못해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본국에서 공자광이 왕료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이 방성대곡을 한 바탕 한 후에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서로 상의했다. 엄여가 그의 동생 촉용에게 말했다.

「광이 이미 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갔으니 필시 우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초나라로 도망친다고 해도 또한 그들이 우리를 믿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것은 마치 돌아갈 집도 없고 도망갈 나라도 없는 형국이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촉용이 의견을 말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초나라 군사들에게 무한정 포위를 당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밤 야음을 틈타 오솔길을 이용하여 다른 나라로 일단 도망쳤다가 후일을 논하기로 하십시다.」

「초병이 앞뒤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어 그것은 마치 우리의 처지가 초롱 속에 갇힌 새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냐?」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우리의 두 진채에 령을 전하여 거짓으로 내일 초나라 군사들과 교전을 한다고 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옷을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 아무도 몰래 도망친다면 초나라 군사들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엄여는 촉용의 계책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두 진채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말에게 여물을 먹이게 하고 식사를 침상에 걸터앉아 먹도록 한 후에 군령이 내려지면 전투를 위해 포진을 하라는 군령을 내렸다. 엄여와 촉용은 측근의 심복 몇 사람과 같이 정탐병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본영을 벗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엄여는 서국(徐國)⑱으로 촉용은 종오(鍾吾)⑲로 갔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오나라의 두 진채는 주장이 없어진 사실을 알자 일대 혼란에 빠져 제각기 배를 빼앗아 타고 오나라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버린 무기와 병장기들은 모두가 백극완이 이끌고 있던 초나라 수군의 노획물이 되었다. 초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내란이 일어 난 틈을 타서 오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백극완이 말했다.

「오나라가 우리의 상중임을 기화로 쳐들어 온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었소. 우리가 어찌 그들의 불의한 행위를 본받을 수 있겠소?」

백극완은 즉시 심윤수의 군사와 함께 회군하여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노획한 전리품과 포로를 바쳤다. 초소왕은 백극완에게 공이 있다고 하여 노획한 전리품의 절반을 그에게 주었다. 소왕은 매사를 극완과 상의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대했다. 백근완을 시기한 비무극이 곧이어 한 가지 음모를 꾸며 극완을 해치려고 했다.

< 제 74회로 계속 >

주석

①해검정(解劍亭) : 지금의 무한(武漢) 삼진(三鎭) 중 남쪽에 위치한 무창의 동북쪽에 있는 통회문 밖에 있는 정자다. 이 해검정에서 오자서가 보검을 어옹에게 주었다는 말은 앞서 말한 오자서가 장강을 악저(鄂渚)에서 건넜다는 말과 함께 이 책의 줄거리 상 맞지 않는다. 오자서가 지금의 안휘성 성도인 합비 동쪽 약 100키로 지점에 위치한 소관을 넘어 장강을 건넌 지점은 지금의 무호시(蕪湖市)나 마안산시(馬鞍山市) 부근으로 보이나 원전의 경우 소관을 넘어 다시 소관과는 직선거리가 700키로 이상 되고 또한 오자서가 망명하려고 하는 오나라와는 정반대 쪽의 무한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어옹의 도움으로 장강을 건너 다시 오나라의 수도였던 강소성 소주시로 갔다는 내용은 당시의 원작자가 지리적인 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인 듯하다.

②율양(溧陽) : 현 강소성 남쪽 태호(太湖) 서쪽 약 30키로 지점에 율양시(溧陽市)라고 있다. 지금은 없어 졌지만 당시에는 양자강 강안 도시인 구자(鳩玆 : 현 蕪湖市)에서 태호로 이어지는 이름이 중강(中江 - 명대의 이름은 뢰수(瀨水))이라는 운하가 있었다. 율양은 중강(中江) 운하(運河)의 강안 도시였다.

③뢰수(瀨水) : 장강의 강안에 위치한 오나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구자(鳩玆)와 오나라의 도성(지금의 강소성 소주(蘇州))이 위치한 태호(太湖)와 통했다. 뢰수는 명나라 때의 이름이고 춘추전국 시대 때의 이름은 중강(中江)이다.

④오추(吳趨) : 강소성 소주시(蘇州市) 외곽으로 지금도 경내에 오추방(吳趨坊)이라는 지명이 있다.

⑤매리(梅里) : 상말주초(商末周楚) 오나라의 도성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무석시(無錫市) 매리촌(梅里村)으로 비정된다.

⑥반죽(斑竹) : 상비죽(湘妃竹)이라고 한다. 상강(湘江)은 현 호남성 남쪽 산악지역에서 발원하여 남동으로 흘러 동정호로 유입되는 양자강의 지류이다. 반죽은 상강(湘江) 주변에 나는 대나무로 겉에 얼룩무늬 반점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순임금이 순수 나갔다가 현 호남성 구억산(九嶷山) 자락인 창오(蒼梧)의 뜰에서 죽자 그의 두 부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그곳까지 찾아와 슬피 울다가 상수에 빠져 죽었다. 그때 두 부인이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묻어 얼룩무늬 대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해서 상비죽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⑦오나라 왕위 계승도

수몽(壽夢) 장자 제번(諸樊)▶ 자 공자광(후에 합려(闔閭)) ▶ 부차(夫差)

차자 여제(餘祭)

삼자 이매(夷昧)▶ 자 왕료(王僚)

사자 계찰(季札)

⑧양산(陽山) : 위치 미상

⑨운양(鄖陽) : 지금의 하남성 신채시(新蔡市) 남이다.

⑩계보(鷄父) : 지금의 안휘성과의 경계를 접하고 있는 하남성 고시현(固始縣) 남의 여집향이다.

⑪공자신 : 자가 자서(子西)로 춘추 때 초평왕의 이복동생이다.

⑫수구(首丘) : 여우는 죽을 때 자기가 최초로 살았던 굴로 찾아 든다. 수구는 최초로 살았던 굴을 뜻하는 말로 초평왕이 자기의 침실에서 편안히 죽었음을 뜻한다.

⑬연릉(延陵)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양자강 남쪽의 상주시(常州市) 경내의 연릉을 말한다. 계찰이 봉해진 땅이라 그를 연릉(延陵)의 계자(季子)라 불렀다.

⑭잠읍(潛邑) : 현 안휘성 성도(省都)인 합비시(合肥市) 남서 약 70키로의 잠현(潛縣)을 말한다.

⑮회예(淮汭) : 회수의 굽이치는 곳으로 지금의 안휘성 회남시(淮南市) 일대다.

⑯강구(江口) : 현 안휘성(安徽省) 영상현(潁上縣), 영수(潁水)가 회수(淮水)와 합류하는 곳

⑰행인(行人) : 옛날 춘추전국 시대 때 신하들이 군주를 접견하거나 군주가 신하들을 찾아가 만날 때의 일을 돌보던 관직. 즉 군주 곁에서 조근(朝覲) 및 조빙(朝聘)의 일을 맡아 하던 관리를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행인(行人)이라는 의미는 제삼국인으로써 오나라 정사를 맡았던 벼슬로 중원제후국의 경우 객경(客卿)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⑱서국(徐國) : 현 안휘성 사홍현(泗洪縣) 남의 회수(淮水)의 강안에 있었던 춘추 시 중소 제후국. 서주(西周)의 목왕(穆王) 때 이곳의 국왕인 서언왕(徐偃王)이 주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⑲종오(鐘吾) : 지금의 산동성과 경계지역인 강소성 신기시(新沂市)에 소재했던 중소제후국

[평설]

당진과 초나라의 패권전쟁은 당진국이 수행한 우회작전에 의해 그 진행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기원전 584년 오나라와 공수동맹을 맺음으로써 초나라는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와 초 양국의 싸움의 주된 원인은 영토 쟁탈전이었다. 당진국은 초나라에 우회작전을 구사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기원전 584년 오나라가 초나라 령인 주래(州來)에 대한 공격으로 발발한 두 나라간의 전쟁은 기원전 506년 초도(楚都) 영성(郢城)을 함락시킬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기원전 570년 초가 오를 공격하고, 다시 548년 오가 초에 반격을 가했다. 기원전 536년 초가 오나라의 동맹국 서(徐)를 공격하자 오나라가 출병하여 서를 구원했다. 초가 다시 방향을 바꿔 오를 공격하자 오는 초군을 방종(房鐘)에서 패주시켰다. 기원전 519년 오가 주래를 공격하자 초가 휘하의 제후국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오에 반격을 가해 주래를 구하기 위해 계보(鷄父)에서 싸웠다.

오와 초 사이에 벌어진 계보의 싸움에서 오나라가 1만 3천의 군사로 7국의 연합군으로 구성된 초군을 상대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원인은 다음과 같은 독창적인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1. 지피지기(知彼知己)

교전에 들어가기 전에 아군과 적군이 처한 입장을 정확히 분석했다. 비록 6국의 제후군을 규합한 초군은 숫적으로 월등히 우세했지만 제후군은 초나라의 강압에 의한 출전이었다. 그래서 오나라 진영은 참전한 군사들의 마음이 서로 같지 않다고 분석하고 각개격파 전술을 사용했다.

2. 시약은강(示弱隱强)

즉 약한 면을 노출시키고 강한 면을 숨겼다. 3천의 죄수들을 선봉에 세워 적군의 경각심을 분산시켜 아군의 전투력을 약한 것 처럼 보이게 했다.

3. 선타약적(先打弱敵)

적군의 약한 부대부터 공격했다. 초나라가 징발한 진(陳), 채(蔡), 호(胡), 심(沈), 허(許) 돈(頓) 등의 여섯 제후국들의 군사들은 그 전투능력이 각기 달랐다. 호(胡)와 심(沈) 두 나라는 그 군주들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으나, 그들의 나이가 모두 어려 싸움에 익숙치 않았고, 진(陳)나라 군대는 비록 용기는 있으나 무모한 사람이 지휘자로 있었다. 이 세 나라의 군대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초군의 우익을 맡았다. 오왕은 초군의 약적인 우익에 먼저 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4. 공기불비(攻其不備)

적이 미처 준비를 하기 전에 공격했다. 오군은 고대에 미신적인 행태로 행해졌던 그믐날에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공격했다. 그래서 오군은 적군이 대오를 갖추기도 전에 진(陳), 호(胡), 심(沈) 삼국의 군대를 붕궤시키고 그 지휘자 한 명은 살해하고, 두 명은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5. 살계경후(殺鷄儆猴)

포로를 죽여 적군에게 경각심을 갖게 했다. 서전에서 포로로 잡은 호(胡)와 심(沈) 두 군주를 적진 앞에서 참수함으로 해서 초군의 좌익을 담당하고 있던 허(許), 채(蔡), 돈(頓) 삼국의 군사들의 마음을 동요시켜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붕궤시켰다. 그 결과 초군의 좌우익을 담당했던 제후군들은 모두 제거되어 중군을 맡고 있던 초군은 고립된 것이다.

6. 합력공적(合力攻敵)

전력을 집중하여 적군을 공격했다. 오군은 좌중우 삼군의 병력을 집중하여 초군에게 맹공을 가했다. 이윽고 잔적이 도주를 시작하자 그 뒤를 추격하여 엄살함으로 해서 전과를 더욱 크게 했다.

7. 승기잠습(乘機潛襲)

기회를 기다렸다가 승기를 잡고 적지를 기습했다. 초나라의 수군이 위세를 떨치며 오나라의 영토를 침입했다가 돌아가기를 기다렸던 오군은 곧이어 그 뒤를 추격하여 초나라 경계로 진입하여 초나라 령인 소(巢)와 종리(鐘離) 두 고을을 점령했다.

손자병법 구지(九地) 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런 까닭에 용병을 하는 일은 먼저 적의 의도하는 바를 속속들이 알아내는데 있고, 적군을 상대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고 맞서게 되면 장막 안에서 작전을 세워 천리 밖에 있는 적장을 죽일 수 있다. 이런 작전을 소위 교묘한 지혜가 능히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故爲兵之事,在于佯順敵之意,幷敵一向,千里殺將,是謂巧能成事者也)』

초나라에 대해 오나라가 구사한 전략은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의 이론에 부합된다. 손무가 논술한 병법은 이와 같은 전쟁에 대한 원시적인 자료를 개괄함으로 해서 도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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