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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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2:30:044731 
제78회. 夾谷却齊(협곡각제) 墮城伏法(타성복법)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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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78회夾谷却齊 伏法聞人(협곡각제 복법문인)

협곡의 회맹에서 제나라의 불손함을 물리치고

요설을 퍼뜨리고 다니는 문인(聞人)을 법에 따라 처형한 공자

1. 노국문정(魯国紊政)

- 삼환(三桓)은 군주를 능멸하고 가신들은 다시 삼환을 능멸하다.

한편 제경공은 초나라를 정벌할 능력이 없는 당진에게 천하의 인심이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자기가 당진을 대신하여 패자가 되려는 마음이 더욱 급하게 되었다. 경공은 즉시 위(衛)와 정(鄭) 두 나라를 규합하여 스스로 맹주라 칭했다. 이어서 경공은 옛날에 계손의여(季孫意如)에 의해 군위에서 쫓겨난 노소공(魯昭公)을 다시 노후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나 의여가 완강하게 항거하며 경공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제나라의 힘만으로는 불가하다고 생각한 노소공은 할 수 없이 마음을 고쳐먹고 당진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진의 대신 순력(荀躒)이 의여로부터 뇌물을 받고 역시 노소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공은 나라 밖에서 방황하다가 병이 들어 객사했다. 의여는 즉시 태자 연(衍)을 폐하고 그 동모제 무인(務人)과 상의하여 소공의 서자인 공자 송(宋)을 세워 군위에 앉혔다. 이가 노정공(魯定公)이다. 계손씨가 당진의 순력에게 뇌물을 바쳐 서로 통하게 되어 노나라는 자연히 당진을 섬기게 되었다. 제경공이 대노하여 국씨 집안의 대신 국하(國夏)를 장수로 삼아 수시로 노나라 영토를 침략했다. 그러나 노나라는 반격할 힘이 없었다. 그 사이에 얼마 후에 의여가 죽고 계강자(季康子) 사(斯)가 그 뒤를 이었다. 노나라는 소공 때부터 계손씨(季孫氏),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등 삼환씨(三桓氏)에 의해 이미 삼분되어 있었다. 삼환이란 노환공(魯桓公)의 세 아들들 후손들을 말한다. 삼환씨들은 노나라의 땅을 삼분하여 모두 자신들의 영지로 삼은 후에 각기 가신들을 보내 다스리게 했음으로 노나라 공실에 속한 신하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그러자 다시 삼환씨 가신들도 각기 권력을 빼앗아 자기들 마음대로 휘둘러 그 주인들을 능욕했다. 근자에 이르러 계강자 사(斯), 맹의자(孟懿子) 무기(无忌), 숙손무숙주구(叔孫武叔) 주구(州仇)가 이끄는 삼가가 정립하여 있었지만 각각의 가신들이 삼가의 봉지에 거주하면서 직접 다스려 모든 것을 자기들 사유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삼가의 종주들이 아무리 호령을 해도 가신들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세 집안은 모든 힘을 자기들 가신들에게 빼앗겨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계손씨의 종읍(宗邑)인 비(費)① 땅의 읍재(邑宰)는 공산불뉴(公山不狃)였고, 맹손씨의 종읍인 성(郕)② 땅의 읍재는 공렴양(公斂陽)이었다. 숙손씨는 종읍이 후(郈)③ 땅이었는데 공약막(公若藐)이 그 읍재로 있었다. 삼가는 공히 그 종읍들의 담벽을 높이 쌓아 성을 축조했는데 모두가 삼가의 사유재산으로 축조하여 그 견고하기가 곡부의 도성과 같았다. 그 세 명의 읍재 중 계손씨의 공산불뉴가 가장 세력이 크고 흉포한 자였다. 다시 그에게는 자가 화(貨)인 양호(陽虎)라는 가신이 한 명 있었다. 어깨는 수리처럼 벌어졌고 넓은 이마에 신장은 아홉 자가 넘은 장대한 체구의 양호는 힘이 장사였고 지모도 출중했다. 계손사(季孫斯)가 처음에 심복으로 삼아 그를 자기 집안의 일을 맡아보는 집사의 일을 시켰으나 후에 계씨 집안의 일을 전단하여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부리고 은혜를 베풀었다. 계손씨들은 오히려 양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그때 노나라에는 소정(小正)④ 벼슬을 하고 있던 묘(卯)라는 자가 있었는데 위인이 박학하고 무엇이든지 한번 들으면 잊어 먹는 일이 없는 기억력이 비상한 자였다. 교언에 능한 그를 사람들은 그를 널리 들어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 문인(聞人)’이라고 불렀다. 삼환씨 사람들은 그를 높이 받들었다. 소정묘(小正卯)는 같은 일에 대해서도 면전에서는 옳다고 하고 등을 돌리면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표리가 부동하게 행동하고 다녔다. 삼가의 사람들을 만나면 군주를 잘 보좌한 공로가 있다고 그들을 칭송하고, 양호(陽虎) 등을 만나면 다시 군주의 세력을 강하게 하고 삼환씨의 세력을 억제해야 한다고 했다. 삼환씨의 가신들에게 노후를 받들어 삼가를 호령하라고 사주하여 그들의 상하를 마치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하지 못하도록 이간 시켰으나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말을 듣고 즐거워만 했지 아무도 그의 간교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맹의자 무기(无忌)⑤는 곧 중손확(仲孫玃)의 아들이고 중손멸(仲孫蔑)의 손자였다. 중손확이 살아 있었을 때 공자의 이름을 사모한 그는 아들 무기를 보내 예학을 공부하라고 시켰다.

2. 聖人孔子(성인공자)

- 기원전 551년 공상(空桑)에서 태어나는 공자

공중니(孔仲尼)라는 사람은 이름이 구(丘)라 했는데 그 부친은 숙량흘(叔梁紇)이다. 그는 옛날 추읍(鄒邑)⑥의 대부로써 복양성(偪陽城) 싸움에서 현가식 성문을 밑에서 두 손으로 받쳐 올린 용사였다⑦. 숙량흘은 노나라 시씨(施氏) 집안의 딸에게 장가를 갔으나 딸만 많이 낳고 아들은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첩을 얻어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름을 맹피(孟皮)라 했다. 맹피가 어릴 때 발에 병이 들어 결국은 성인이 되자 폐인이 되었다. 숙량흘이 다시 후사를 얻기 위해 안씨(顔氏) 집안에 구혼을 청했다. 안씨에게는 딸이 다섯이 있었는데 모두가 시집을 가기 전이었다. 안씨가 숙량흘의 나이가 이미 들어 달갑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의 딸들에게 물었다.

「누가 추대부에게 출가하겠느냐?」

딸들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징재(徵在)라고 부르던 가장 어린 딸이 나와서 자원하며 대답했다.

「여자의 길이란 집에 있을 때 부모의 뜻에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단지 부친의 명을 따를 뿐인데 어찌하여 싫고 좋음을 물으십니까?」

안씨가 징재의 말을 기특하게 여겨 즉시 그녀를 숙량흘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했다. 징재가 숙량흘에게 출가해서 같이 살았으나 부부사이에 아들이 없어 서로 걱정했다. 부부가 같이 하늘에 기도를 하기 위해 니산(尼山)의 계곡으로 갔다. 징재가 니산에 오르자 초목의 잎들이 그녀를 향해 꼿꼿이 일어서더니, 기도를 마치고 내려올 때는 잎사귀들이 밑으로 향하였다. 그날 밤 흑제(黑帝)가 징재의 꿈에 나타나서 당부의 말을 했다.

「너는 성인(聖人)을 낳으리라! 산달이 다가 오거든 반드시 공상(空桑)8)이 있는 곳을 찾아가 낳아야 하느니라!」

징재가 꿈에서 깨어난 그날 태기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징재가 황홀지간에 꿈을 꾸었다. 노인들 다섯이 뜰에 줄을 지어 서 있으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들은 다섯 별의 정령이라고 했다. 그들은 짐승 한 마리를 끌고 있었는데 크기는 마치 작은 소만하고 뿔은 하나고 몸통의 무늬는 용의 비늘 같았다. 그 짐승이 징재를 향하여 엎드리더니 옥으로 만든 자 하나를 토해 냈다. 옥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 있었다.

「물의 정령 아들이여! 쇠약해진 주왕실을 대신할 지위 없는 왕이 될지어다.」⑨

징재가 비록 꿈속에서였지만 기이하다고 생각하여 비단 실로 만든 끈을 풀어 그 짐승의 뿔에 메어 주었다. 징재가 잠에서 깨어 숙량흘에게 그 꿈 이야기를 했다. 숙량흘이 듣고 말했다.

「그것은 필시 기린(麒麟)이라는 짐승일 것이오.」

이어서 산달이 다가오자 징재가 숙량흘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공상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는 곳이 있습니까?」

「남산에 빈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 굴은 돌로 만든 문이 있으나 물이 없어 사람들이 그 굴을 공상이라고 부르고 있소.」

「제가 장차 그곳에 가서 해산을 해야 되겠습니다.」

숙량흘이 징재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징재가 옛날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즉시 징재가 침구를 챙겨서 남산의 빈 동굴로 갔다. 그날 밤 푸른색 용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남산의 좌우를 지키고 다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두 사람이 이슬을 그릇에 받아 모아서 징재의 몸을 씻긴 다음 얼마간 같이 있다가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 징재가 이어 공자를 낳았다. 동굴의 돌로 만든 문에서 갑자기 맑은 샘물이 흐르기 시작했는데 그 물은 따뜻했다. 징재가 그 물로 갓 태어난 아이를 목욕시켰다. 목욕을 끝내자 샘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때가 주영왕 21년, 기원전 551년으로 노양공 22년의 일이었다.⑩

오늘날도 곡부시 남쪽 28리 되는 곳에 여릉산(女陵山)이라고 있는데 그곳이 공자가 태어난 공상이다. 공자는 날 때부터 용모가 다른 사람과는 달리 특이했다. 입술은 소를, 손바닥은 호랑이를 닮았고 어깨는 원앙새처럼 넓었다. 뒷등은 고기등처럼 생겼으며 입과 인두는 넓었고 정수리는 그 가운데는 낮고 주변은 튀어나왔다⑪. 그의 부친 숙량흘이 공자의 생김새를 보고 말했다.

「이 아이는 니산(尼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구나!」

그래서 공자의 이름을 니산의 언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구(丘)라 하고 자는 중니라 했다. 중니가 태어난 지 얼마 후에 숙량흘이 죽었다. 그의 모친 징재가 홀몸이 되어 중니를 키웠다. 공자가 이미 성인이 됨에 따라 그의 신장은 아홉자 육촌12)에 이르게 되자 사람들이 중니를 ‘ 키다리(長人)’이라고 불렀다. 중니에게는 덕이 있어 아무리 배워도 싫어하는 법이 없었다. 공자가 열국을 돌아다니며 제자를 길러 천하에는 중니의 제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열국의 군주들은 중니의 명성을 듣고 공경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국정을 담당한 권신들과 귀척들은 중니가 국사를 맡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세상의 군주들은 결국 그를 불러다 쓸 수 없었다. 중니가 노나라에 있을 때, 맹손무기가 계손사에게 공자를 천거하면서 말했다.

「지금 안팎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우리 노나라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공자를 불러 정사를 맡겨야만 합니다.」

계손사가 공자를 불러 종일토록 이야기하였는데 공자의 마음 속은 마치 큰 강이나 바다와 같아 실로 그 뜻을 헤아려 도저히 엿볼 수 없었다. 장시간의 대화로 인해 피로해진 계손사가 내실로 들어가 옷을 바꿔 입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자기의 봉읍인 비읍에서 사람이 달려와 고했다.

「우물을 파다가 땅 속에서 큰 항아리(부:缶)⑬를 하나 파냈는데 그 안에는 양 같은 짐승 한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짐승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계손사가 공자의 학문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봉읍에서 온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르고는 다시 공자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돌아가서 자리에 좌정한 후에 물었다.

「우리 집안의 봉읍에서 우물을 파다가 땅 속에서 개를 닮은 짐승을 한 마리 발견했습니다. 그 짐승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혹시 알고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것은 필시 개가 아니라 양의 형상을 닮았을 것입니다.」

계손사가 놀라 물었다.

「어떻게 그것이 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산에 사는 귀신은 기(夔)⑭14)와 망량(魍魎)⑮이라 하고 물에 사는 귀신은 용망상(龍罔象)⑯, 땅 속에 사는 귀신은 분양(羵羊)⑰이라 합니다. 우물을 파다가 땅 속에서 얻었다 하니 그것은 필시 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분양이 틀림없습니다.」

「어찌하여 그 괴물을 분양(羵羊)이라고 부릅니까?」

「그것은 수컷도 아니고 암컷도 아니고 다만 그 형태만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손사가 즉시 비에서 온 사람을 불러 땅 속에서 나온 괴물의 모습에 대해 물었다. 비에서 온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 괴물은 과연 암수를 구별할 수 없었다고 했다. 계손사가 크게 놀라 말했다.

「중니의 학문은 아무도 따르지 못하겠구나!」

계손사가 이어 공자를 중도(中都)⑱의 재(宰)로 삼았다. 이 일로 인하여 공자에 대한 소문이 초나라에까지 전해져 초소왕이 공자에게 예물을 들려 사람을 보내 옛날에 자기가 청발수(淸發水)를 건널 때 강물 속에서 얻은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과일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사자에게 대답했다.

「그것의 이름은 평실(萍實)입니다. 껍데기를 쪼개서 안에 있는 과실은 먹을 수 있습니다.」

사자가 다시 물었다.

「선생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옛날에 초나라에 갈 때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어린 동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초왕이 강물을 건너다 평실을 얻었네!

크기는 말통만 하고 붉기는 작렬하는 해와 같았네!

껍질을 벗겨 먹어 보니 감미롭기가 꿀과 같구나!

楚王渡江 得萍實(초왕도강 득평실)

大如斗赤如日 (대여두 적여일)

剖而嘗之 甛如蜜(부이상지 감여밀)

그래서 제가 이 노래를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초나라 사자가 물었다.

「그 평실이라는 과일은 다시 구해 먹을 수 있습니까?」

「평실이라는 과일은 뿌리가 없이 강물 위를 떠다니다가 우연히 서로 얽혀 열매를 맺는 식물입니다. 비록 천년을 기다린다 해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진귀한 물건입니다. 이것은 곧 흩어진 것이 다시 모이거나 쇠한 것이 다시 부흥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가히 초왕께 경하를 드릴만한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사자가 돌아와 공자의 말을 초소왕에게 전했다. 소왕이 듣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공자가 중도(中都)를 맡아 다스리자 크게 다스려져 사방의 모든 제후들이 사람을 보내 공자가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게 하여 그것을 법으로 삼았다. 노정공⑲이 공자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서 사공(司空)⑳으로 삼았다.

3. 陽虎之亂(양호지란)

- 노나라의 양호가 란을 일으키다.

주경왕(周敬王) 19년 즉 기원전 500년, 노나라에서 양호(陽虎)가 정권을 잡기 위해 란을 일으켰다. 그때 숙손씨 문중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던 숙손첩(叔孫輒)은 비읍(費邑)의 읍재 공산불뉴(公山不狃)와 교분이 두터웠다. 두 사람과 모의한 양호는 먼저 계손씨와 중손씨들을 죽여 제거한 다음 공산불뉴는 계손사의 자리에, 숙손첩은 숙손씨들의 종주에, 자신은 맹손무기의 자리를 대신하여 노나라의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 한편 평소에 공자의 어짐을 경모한 양호는 공자를 불러 자기의 문하에 두어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다. 양호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불렀으나 공자는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다시 양호가 삶은 돼지를 공자의 집으로 보냈다. 양호로부터 음식을 받은 공자가 말했다.

「양호가 나를 회유하기 위해 음식을 보내 왔는데 내가 가서 거절하는 말을 해 주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그가 직접 와서 나를 강요할 것이다.」

공자가 즉시 제자 한 사람을 양호의 집에 보내어 그가 외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자기의 명패를 양호의 집 문 안으로 던져 넣고 돌아오게 하였다. 양호는 결국 공자의 뜻을 굽힐 수 없었다. 공자가 맹손무기를 찾아가 조용히 말했다.

「양호가 필시 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은 계손씨입니다. 대부께서는 미리 대비를 하고 있어야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무기는 공자의 말을 듣고 노성의 남문 밖에 자기의 집을 새로 짓는다고 핑계를 대고 재목들을 날라다 방책을 세우고 목장에서 가축을 키우는 힘께나 쓰는 장사 300명을 뽑아 고용하였다. 겉으로는 공사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으나 실은 양호가 난을 일으킬 때를 대비한 것이다. 또한 성읍의 읍재 공렴양(公斂陽)에게 사람을 보내어 병장기를 정비한 후에 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락을 받으면 즉시 밤낮으로 달려 구원을 오라고 당부해 두었다.

그해 가을 8월 노나라가 체제(禘祭)㉑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게 되자 양호는 제례가 끝난 다음 날 교외의 창포 밭에서 잔치를 열어 계손사를 초청했다. 무기가 듣고 말했다.

「양호가 계손사를 위해 잔치를 연다고 하니 수상한 일이로구나! 이것은 필시 음모가 있음에 틀림없다.」

맹손무기는 즉시 사람을 자기의 봉읍에 보내 공렴양에게 자기의 명을 전하게 했다. 그는 공렴양으로 하여금 그 날 중으로 무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곡부성의 동문을 우회하여 남문으로 달려오라고 하고 자기는 방책에 머물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이윽고 잔치 날이 되자 친히 계손씨 부중으로 간 양호는 계손사에게 자기가 준비한 잔치에 참석해 주기를 청했다. 양호를 태운 수레가 계손사가 탄 마차의 앞을 인도하고 양호의 동생 양월(陽越)은 그 뒤에서, 그리고 좌우에도 모두 양씨 일당들이 호위하였다. 단지 임초(林楚)라는 마부한 사람만은 대를 이어 계씨 집안의 문객 노릇을 한 사람이었다. 계손사가 마음속으로 변이 있을까 의심이 일어 임초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는 능히 이 수레를 남문 밖에 있는 맹손씨 별장으로 몰고 갈 수 있겠느냐?」

임초가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행렬이 큰 대로에 이르렀을 때 임초가 갑자기 말고삐를 낚아채더니 수레의 방향을 성의 남문 쪽으로 바꾼 후에 채찍으로 계속 말을 때려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놀라 전 속력으로 달렸다. 양월이 뒤따라오다가 달아나는 계손사의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마차를 멈추어라!」

임초가 못 들은 체 하고 계속해서 채찍으로 때리자 말이 속도를 내어 마차는 더욱 빨리 달렸다. 양월이 노하여 활에 화살을 메겨 임초를 향해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양월도 역시 계손사가 탄 마차를 뒤쫓기 위해 채찍으로 말을 휘두르다가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말채찍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양월이 땅에 떨어진 채찍을 주어 들었을 때는 계손사의 마차는 이미 멀리 사라져 버린 다음이었다. 계손사가 남문 밖으로 나가 곧바로 맹손무기가 세운 채책(寨冊) 안으로 들어갔다. 계손사가 채책의 문을 닫으라고 명한 후에 큰 소리로 외쳤다.

「맹손은 빨리 나와 나를 구하시오!」

활과 화살로 3백의 장사들을 무장시킨 맹손무기는 채책 안에 숨어서 양호의 무리들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양월이 일당들을 이끌고 채책 앞으로 달려와 공격하였다. 3백의 장사들은 일제히 채책 안에서 화살을 쏘았다. 수많은 양월의 부하들이 화살에 맞아 땅위에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양월은 몸에 화살을 무수히 맞고 숨이 넘어갔다.

한편 양호가 계손사의 마차를 인도하기 위해 앞서 달려가다가 마차가 보이지 않자 즉시 방향을 왔던 길로 돌려 큰길에 다시 나와 사람들에게 물었다.

「상국이 탄 마차를 보았는가?」

길 가던 사람이 말했다.

「말이 갑자기 놀란 것 같더니 남쪽으로 향해 달려갔습니다.」

양호가 미처 다른 말을 다 물어 보기도 전에 양월을 따라갔던 패졸들이 달려와 사건의 전말을 고했다. 그때서야 양호는 그의 동생이 도망치는 계손사를 쫓아갔다가 활에 맞아 죽고 계손사는 이미 맹손씨들이 새로 지은 별채로 들어가 숨어 버린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양호가 대노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노정공을 붙잡아 나오다가 마침 궁궐로 오고 있던 숙손주구(叔孫州仇) 마저도 붙잡아 정공과 같이 그들 행렬에 앞세웠다. 궁궐의 모든 병사들과 숙손씨들의 가병들을 동원한 양호는 남문 밖 맹손씨의 별채를 공격했다. 맹손무기가 3백 명의 장사와 함께 양호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양호가 명을 내려 별채를 두르고 있던 목책을 불사르라고 했다. 계손사가 듣고 크게 두려워했다. 맹손무기가 하늘을 쳐다보니 그때가 마침 중천에 떠 있는 해를 보고 계손사를 향해 말했다.

「성읍의 군사들이 당도할 때가 되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기가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목책 밖 동쪽에서 한 사람이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앞장서 달려오면서 목책을 향해 자기들이 왔음을 소리쳐 알렸다.

「나의 주인을 어떤 자가 해치려 하느냐? 이 공렴양이 용서하지 않겠다.」

양호가 듣고 대노하여 자루가 긴 과를 움켜잡고 공렴양과 싸우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 사람의 장수가 각기 자기들의 무예를 뽐내어 5십 여 합을 싸웠다. 양호는 싸울수록 더욱 기세가 사나워지는데 비해 공렴양은 기력이 떨어져서 양호와 더 이상 대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숙손주구가 양호의 뒤에서 갑자기 되돌아서더니 소리쳤다.

「양호가 싸움에서 졌다!」

주구가 소리를 친 다음 재빨리 자기의 가병들을 데리고 정공을 호위하고 서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궁궐에서 차출한 병사들도 역시 숙손주구를 의 뒤를 따라 달아났다. 무기가 장사들을 이끌고 목책 밖으로 나와서 양호를 뒤에서 협공하였다. 그때 마침 계손씨의 가신 점월(苫越)도 그들의 가병들을 이끌고 계손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자 양호는 고립되어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일이 이미 잘못되어 물건너 간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과를 거꾸로 들더니 수레의 방향을 돌려 도망쳐 환양관(讙陽關)㉒으로 들어가 농성하였다. 세 집안의 가병들이 힘을 합쳐 환양관을 공격하자 양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내문(萊門)을 불태우라고 명했다. 삼가의 가병들이 불을 피해 잠시 물러난 틈을 이용하여 양호는 불길 속을 뚫고 환양관을 탈출하여 제나라로 도망쳤다. 양호는 제경공을 알현하고 자기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다스렸던 환양의 땅을 바친다고 하면서 제나라로부터 군사를 빌려 노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대부 포국(鮑國)이 경공에게 간했다.

「노나라는 얼마 전에 공모라는 현인을 등용하여 내정을 정비한 관계로 가볍게 대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양호를 붙잡아서 그가 바친 환양의 땅과 같이 돌려보내어 공모의 환심을 사 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경공이 포국의 말을 쫓아 양호를 붙잡아서 함거에 실어 제나라 서쪽 변경지방을 통과하여 노나라로 호송하게 하였다. 양호가 호송 중에 자기를 지키던 군사들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한 후에 틈을 노려 치거(輜車/짐수레)를 빼앗아 타고 송나라로 도망쳤다. 송나라가 양호를 광(匡)㉓ 땅으로 보내어 살게 했다. 양호가 광 땅에 살면서 주위의 백성들을 못살게 괴롭히자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양호를 죽이려고 했다. 양호가 광 땅에서 쫓겨나 다시 당진으로 도망쳐 조앙(趙鞅)㉔의 가신이 되어 그를 섬겼다. 이것은 후일의 일이다.

송조 때 유자 한 사람이 양호가 가신으로써 자신의 주인을 도모하고 나라를 훔치려고 반역을 꾀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양호가 대역죄를 저질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양호의 주인이었던 계손씨도 자신의 군주를 내쫓고 노나라의 정사를 전단했다. 양호가 곁에서 계손씨의 참란한 행위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주인들의 행위를 본받아 반역을 일으켰으니, 이것은 곧 하늘의 이치가 항상 그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라, 결코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유자가 시를 지어 이를 한탄했다.

당시 계씨들이 힘없는 주군을 능멸하고 쫓아냈는데

오늘 다시 계씨들의 가신들이 주인에게 반역을 꾀했다.

충신이건 간신이건 모두가 자업자득이나니

앞 수레의 굴러가는 소리가 뒷 수레에 미침이라!

當時季氏凌孤主(당시계씨능고주)

今日家臣叛主君(금일가신반주군)

自作忠奸還自受(자작충간환자수)

前車音響後車聞(전거음향후거문)

그 유자가 다시 말했다.

『노나라는 혜공(惠公) 치세 때부터 제후의 신분으로 천자의 예절과 음악을 참람하게 사용하였고, 그 후에는 심지어 대부의 신분인 삼환의 집안에서조차도 노후의 행위를 본받아 천자만의 예악인 팔일무(八佾舞)㉕를 즐기고 옹철(雍徹)㉖을 연주하도록 했다. 대부들도 그 군주를 안중에 두지 않고 행동했음으로 가신들 역시 주인들을 본받아 대부들을 무시한 것이다. 주인과 가신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패역(悖逆)을 저지르게 되었음은 옛날부터 그 뿌리가 깊은 것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쓴 시가 있다.

천자가 즐기는 구성㉗을 연주하고 간척무㉘를 추게 하니

묻노니 그 누가 양호의 참람한 짓에 단서를 주었는가?

나라 안에서 반역의 무리가 생겨나지 않게 하려면

다시 한 번 주관(周官)㉙에 기록된 예악을 읽어보기 바란다.

九成干戚舞團團(구성간척무단단)

借問何人啓僭端(차문하인계참단)

要使國中无叛逆(요사국중무반역)

重將禮樂問周官(중장례악문주관)

4. 夾谷却齊(협곡각제)

- 협곡의 회맹에서 제나라의 의도를 분쇄하고 노나라의 자존심을 지킨 공자 -

양호를 노나라로 호송 중에 놓쳐 버린 제경공은 노나라 사람들이 양호를 받아들인 자기를 비난할까 걱정했다. 그는 즉시 사자를 보내 자기의 편지를 노정공에게 전하게 했다. 양호를 붙잡아서 노나라로 호송 중에 달아난 일의 시말을 설명하고, 제와 노 두 나라 군주가 양국의 경계에 있는 협곡산(夾谷山)㉚에서 서로 병거를 이끌고 가서 회맹을 행하여 두 나라는 영원히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맹약을 맺자고 청했다. 노정공이 편지를 받고 즉시 삼가의 대부들을 불러 상의했다. 맹손무기가 말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남을 속이기를 잘하니 주공께서는 가볍게 가시면 안 됩니다.」

계손사가 나섰다.

「제나라가 여러 번 우리나라의 경계를 침범하여 우리가 어려움을 많이 당해 왔는데 어찌 그들의 청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정공이 계손사의 말대로 회합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물었다.

「과인이 만약 회맹을 하기 위해 간다면 누구를 데려가면 좋겠소?」

맹손무기가 대답했다.

「신의 스승이었던 공모를 데려가십시오.」

정공이 즉시 공자를 불러 정공이 제경공과 회합하는 의식의 상례(相禮)㉛를 맡아 주관하도록 명했다. 정공이 몰고 갈 병거와 어가가 준비가 되어 길을 떠나려고 할 때 공자가 정공에게 상주했다.

「신이 듣기에 문관이 주관하는 회맹을 할 때는 필히 무력이 준비가 되어야 하며 또한 싸움을 하러 갈 때는 문관이 준비가 되어 그 뒤를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무의 일은 서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 제후가 자기나라를 떠나 타국에 갈 때는 반드시 문관과 무관을 동시에 대동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송양공이 우(盂) 땅에서 회맹할 때㉜의 일을 거울삼으시기 바랍니다. 청컨대 좌우 사마를 모두 데려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십시오.」

정공이 공자의 말을 따라 대부 신구수(申句須)를 우사마로 락기(樂頎)를 좌사마로 삼아 각기 병거 500승 씩을 인솔하여 정공의 원행을 수행하도록 했다. 또한 대부 자무환(玆无還)에게 다시 병거 300 승을 이끌고 출동하여 회맹장에서 10리 되는 곳에 주둔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했다.

노정공의 행렬이 회맹 장소인 협곡산에 당도했을 때는 제경공이 먼저 와서 회맹을 하기 위한 삼층으로 된 간단한 제단을 만들어 놓고 노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경공은 제단의 오른 쪽에다 막사를 지어 머무르고 있었고 노정공은 제단의 왼쪽에다 막사를 세웠다. 제나라 병사들의 수가 대단히 많고 그 위세가 강대한 모습을 본 공자도 역시 신구수와 락기에게 명하여 노후의 곁을 바싹 붙어서 호위에 만전을 기하도록 당부했다. 그때 제나라 진영에는 여미(黎弥)라는 대부가 있었다. 지략이 뛰어나다고 해서 양구거가 죽은 다음부터 경공이 특별히 총애하고 있었다. 그날 밤 여미가 경공에게 알현을 청하자 경공이 불러서 물었다.

「경이 이렇게 밤이 깊은 시각에 알현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오?」「제와 노 두 나라가 원수 사이가 된 지는 어제오늘이 아닙니다. 노나라가 어질고 덕이 높은 공자를 임용하였으니 장차 우리 제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되어 금일의 회맹을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이 공모라는 위인을 보니 예는 조금 알고 있다고는 하나 용력을 구비하지 못해 싸움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는 듯합니다. 내일 주공께서 노후를 면담하는 예를 마치신 후에 열국의 음악들을 연주하게 하여 노후의 마음을 즐겁게 하시시기 바랍니다. 악공으로 변장시킨 다시 래(萊)㉝ 땅의 오랑캐 300명을 불러 회맹장에 입장시킨 후에, 북을 두드려 소리를 크게 내게 하고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노후와 공모를 같이 붙잡으신다면 신은 군사들을 인솔하여 제단 밑의 노나라 군사들과 신료들을 쫓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노나라의 군주와 신하의 목숨은 우리들의 손에 떨어질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그들을 하시고 싶으신 대로 처분하실 수 있으니 이는 군사를 일으켜 정벌해서 세운 공업 못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의 실행여부는 마땅히 안상국과 의논해서 실행하도록 하시오.」

「상국께서는 평소에 공모와 두터운 교분을 맺고 계십니다. 만약 상국이 이 일을 알게 되시면 틀림없이 소신의 계획을 행하지 못하게 막으실 것입니다. 청컨대 신이 혼자서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과인이 경의 청을 허락하니 경은 조심하여 일을 처리하기 바라오.」

여미가 경공 앞에서 물러 나와 래읍의 오랑캐 군사들과 다음 날에 거사를 하기로 아무도 몰래 약속했다. 이윽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두 나라 군주들이 제단 밑에 만나서 서로 읍으로 인사를 행한 후에 제단 위에 올랐다. 제나라 쪽에서는 안영이 노나라 쪽에서는 공자가 상례로 나와서 각기 그들 군주의 뒤를 따랐다. 두 나라의 군신들이 각기 제단 위로 올라가 서로 인사를 나눴다. 태공과 주공의 서약(誓約)㉞을 말하고 각기 자기들이 가지고 온 폐옥과 비단을 교환하였다. 선물을 주고받는 의식이 끝나자 제경공이 먼저 노정공을 향해 말했다.

「과인에게는 천하의 음악을 연주 할 수 있는 악공들이 있습니다. 원컨대 군과 같이 한번 즐겼으면 합니다.」

경공이 즉시 래이(萊夷) 출신의 병사들을 단 위에 오르도록 명한 후에 그들의 토속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다. 그러자 제단 밑에서 북소리가 크게 진동하더니 래이의 오랑캐 병사 300명이 방울이 달린 털로 만든 깃발을 휘두르며 마치 벌떼가 몰려들 듯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모두 짐승의 깃털로 지은 오랑캐 옷을 입고 모(矛)와 극(戟) 및 칼과 방패를 손에 들고는 한편으로는 입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는데 서로 화답하여 끊이지가 않았다. 그들이 제단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노정공이 놀라 얼굴이 흑색이 되었다. 그러나 정공의 곁에 있던 공자는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곧바로 제경공의 면전으로 다가가더니 소매를 들어 인사를 한 다음 말했다.

「두 나라의 군주님들이 서로 만나 우호를 맺기 위해 우리 중화의 예를 행하고 있는 좋은 자리에서 어찌하여 오랑캐 습속인 이적(夷狄)의 음악을 연주케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의식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명하여 물러가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미의 계교를 알지 못하고 있던 안자가 경공의 곁에 있다가 그 역시 청했다.

「공모가 하는 말은 예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경공이 크게 부끄러워하여 급히 소매를 저어 래이의 오랑캐 병사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여미가 제단 밑에서 몰래 숨어 있으면서 오로지 래이의 병사들이 손을 쓰기를 기다려 일제히 일어나려고 하다가 오히려 경공이 명령을 받고 제단 위에서 물러나는 래이의 병사들을 하릴 없이 쳐다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여미가 마음속으로 분기가 치밀어 즉시 본국에서 데려온 광대를 불러 분부하였다.

「단상 위에서 연회가 무르익으면 내가 너를 불러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면 너는 《폐구(敝笱)》㉟>라는 시를 부르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희롱하여 만약 노나라 군주나 신하들이 웃기거나 노하게 하면 내가 너에게 중상을 내리리라!」

원래 폐구는 문강(文姜)의 음란한 생활을 노래한 시가다. 폐구를 부르게 하여 노나라 군신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마음을 품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광대에게 분부를 마친 여미가 계단을 통하여 제단 위로 올라가 제경공에게 청했다.

「청컨대 궁중의 노래를 부르게 하여 두 분 군주님의 만수무강을 빌도록 하려 하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궁중의 음악은 오랑캐의 노래가 아니니 속히 악사에게 부르게 하라!」

여미가 제후의 명이라고 전하자 이상야릇한 옷을 입고 얼굴에는 물감을 칠한 배우와 곱사등 20여 명이 각각 남자와 여자로 분장한 후에 이대로 나뉘어 단 위로 올라와 노후의 면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또 한 쪽에서는 좌우로 어지러이 돌며 춤을 추면서 폐구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음탕하기 그지없는 곡조만을 골라 부르며 한편으로는 시시덕거렸다. 공자가 칼을 손으로 붙잡고 눈을 치켜뜨더니 제경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필부들이 제후를 희롱하니 그 죄 죽어 마땅합니다. 원컨대 제나라의 사마를 불러 법을 집행하옵소서!」

경공이 공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사이에 광대와 곱사등들이 여전히 희롱하며 춤을 추며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공자가 보고 말했다.

「두 나라가 이미 통호하여 형제의 나라와 다름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노나라의 사마는 또한 제나라의 사마도 된다고 하겠습니다.」

공자가 즉시 소매를 들고서 손을 휘두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신구수와 락기는 어디에 있는가?」

두 사람의 장군이 나는 듯이 달려 제단에 올라 남녀 이대로 분장한 광대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 두 사람을 붙잡아다 제단 밑으로 끌고 나와 참수해 버렸다. 회맹장에 나와 있던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매우 놀랐다. 노정공이 불안하여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즉시 몸을 일으켜 제단 밑으로 내려갔다. 제단 밑에 숨어 있던 여미가 처음에는 노정공의 앞을 막아 붙잡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마음을 이내 고쳐먹고 목을 잔뜩 움츠리며 제단 밑에서 물러갔다. 여미가 노정공의 앞을 가로막고 붙들지 못한 이유는 첫째 공자에게 단호한 수단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둘째는 노나라 장수 신구수와 락기가 영웅의 기개가 있는 듯 했으며 셋째는 회맹장의 십리 밖에 노나라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5. 君子其過 謝之以質(군자기과 사지이질)

- 군자는 잘못 했을 때 물질로써 사과하는 법이다. -

회맹이 끝나고 제경공이 자기의 막사로 돌아와서 여미를 불러 그의 경솔함을 나무랐다.

「노후의 상례인 공모라는 사람의 예를 행하는 법은 옛날의 법도에 추호도 어긋나지 않았는데 그대는 외람되이 나로 하여금 오랑캐의 습속에 끌어 들여 망신을 당하게 하였다. 과인이 원래 노나라와 수호를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번 회맹을 제안했는데 오늘 너 때문에 오히려 노나라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여미가 황공하여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죄의 말 밖에는 다른 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안자가 옆에 있다가 제경공에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소인은 그 잘못을 깨달으면 글로써 사과한다 했고 군자는 잘못 했을 때 예물로써 사과한다고 했습니다.㊱ 우리의 문양(汶陽)㊲ 땅 중 원래 노나라 소유였다가 우리 땅이 된 곳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가 환(讙) 땅으로써 양호가 우리에게 도망쳐 오면서 바쳤으니 의롭지 못하게 취한 땅이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운(鄆)㊳ 땅인데 군위에서 쫓겨난 노소공이 살다가 자기의 복위를 조건으로 바쳐 우리 땅이 되었고, 세 번째는 귀음(龜陰)㊴의 땅으로 곧 선군이신 경공(頃公)께서 당진의 위세를 빌려 강제로 빼앗다시피 한 땅입니다. 이 세 곳의 땅은 모두 원래는 노나라의 땅으로 옛날 선군이신 환공의 치세 때 조말이 회맹장의 제단에 올라와 칼을 들고 위협하여 이 땅을 단지 돌려주겠다는 약속만을 받아 냈을 뿐이지 결국은 문양의 땅은 노나라에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노나라 사람들이 아직도 그 일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번 기회에 그 세 곳의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어 그 잘못을 사과한다고 하시면 노후는 필시 기뻐하여 제나라와 노나라의 우호 관계는 더욱 단단해 질 것입니다.」

경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안자에게 명하여 세 곳의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라고 하였다.

이 때가 주경왕 24년 즉 기원전 495년의 일이었다. 후세의 사관이 이 일을 두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래이를 시켜 북소리와 휘파람으로 공연히 소란만 떨었으나

회맹을 하는 제단 앞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했겠는가?

예에 밝은 사람이 또한 용기도 제법 갖추었으니

세 곳의 땅을 찾는 대가로 두 나라는 평화를 찾았다.

紛然鼓噪起萊戈(분연고조기래과)

无奈壇前片語何(무나단전편어하)

知禮之人偏有勇(지례지인편유용)

三田賣得兩君和(삼전매득양군화)

그 사관이 다시 시를 지어 제경공이 마음을 비워 진심으로 자기의 잘못을 사과한 행위는 그가 제환공 이래 다시 패업을 이룰 수 있었던 현군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노래했다.

회맹의 단에서 여미의 말을 듣고 일을 그릇 칠 뻔했으나

신하가 간하자 군주가 따라 두 가지를 얻었다.

잘못을 사과하기 위해 준 세 고을을 너무 애석해 하지 말라

중화와 오랑캐에 천고에 이름을 빛내지 않았는가?

盟壇失計聽黎弥(맹단실계청여미)

臣諫君從兩得之(신간군종양득지)

不惜三田称謝過(불석삼전칭사과)

顯名千古播華夷(현명천고파화이)

문양의 땅은 원래 옛날 노희공(魯僖公)㊵ 때 계우(季友)㊶에게 하사한 땅이었는데 오늘 그 땅이 비록 노나라가 돌려받았다고는 하나 실은 계우의 후손들인 계씨들에게 돌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래서 계손사는 문양의 땅을 돌려받게 된 것에 대해 공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계손사가 구음의 땅에 성을 쌓고 공자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그 성의 이름을 사성(謝城)으로 부르게 하였다. 계손사가 다시 정공에게 품하여 공자를 대사구의 직에 임명하게 했다.

6. 天將大雨 商羊鼓舞(천장대우 상양고무)

- 하늘에서 큰비가 내릴 것 같으면 상양이 나타나 춤을 춘다.-

그때 제나라의 남쪽 변경에 큰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길이가 약 삼장이나 되고 몸은 온통 시꺼먼 털로 덮고 있었으며 부리는 길고 다리는 하나였으며 두 날개를 흔들며 들판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야인들이 보고 달려가 잡으려고 했으나 그 새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북쪽 하늘을 향하여 날아가 버렸다. 계손사가 그 괴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그 새의 이름은 곧 상양(商羊)이라고 합니다. 북해의 해변에서 태어난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릴 것 같으면 그 곳에 상양이 나타나 춤을 춥니다. 상양이 춤을 추던 곳은 필시 큰비가 내려 재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 노나라와 제나라가 접한 국경지역에 해당하는 곳이니 미리 준비를 해야만 그 재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계손사가 듣고 문양의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경계를 주어 제방을 새로 쌓고 집을 수리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3일이 채 못 되어 과연 하늘에서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문수가 범람하였다. 그러나 노나라 땅에 살던 백성들은 공자의 말을 듣고 미리 준비를 했기 때문에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 일이 제나라에 전해지자 제경공은 공자가 귀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공자의 박학함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를 성인(聖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를 두고 지은 시가 있다.

아무리 오전삼분㊷에 통달한 사람이라도

어찌 평실과 상양을 알 수 있었겠는가?

위대한 장수와 성인은 하늘에서 내리나니

공자의 아름다운 이름이 천하에 떨쳤다!

五典三墳漫究詳(오전삼분만구상)

誰知萍實辦商羊(수지평실판상양)

多能將聖由天縱(다능장성유천종)

嬴得芳名四海揚(영득방명사해양)

7. 公山不狃以费畔(공산불뉴이비반) 招纳孔子(초납공자)

- 비읍에서 란을 일으킨 공산불뉴가 공자를 초빙하다. -

계손사가 공자의 문하에서 인재를 구하자 공자는 그의 제자 중에서 중유(仲由)㊸와 염구(冉求)㊹를 정사를 돌볼 만한 사람이라고 추천했다. 계손사가 두 사람 모두 데려다 그의 가신으로 썼다. 그런 어느 날 갑자기 계손사가 공자에게 물었다.

「양호가 이미 타국으로 도망쳤다 하나 공산불뉴라는 자는 아직도 자기의 세력을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으니 이를 어찌 대비해야 하겠소?」

「그를 억누르려면 먼저 예를 밝혀야 합니다. 옛말에 신하된 자로써 군사를 기르면 안 되고 대부된 자는 백치(百雉)㊺의 규모를 가진 큰 성을 세우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방의 성을 다스리는 성주가 란을 일으킬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상국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의 성벽을 낮추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십니까? 나라의 상하 관계가 서로 안정되면 나라도 영원히 안정될 것입니다.」

계손사가 공자의 말을 합당하다고 여겨 맹손씨와 숙손씨들에게 공자가 한 말을 전달하게 했다. 맹손무기가 듣고 말했다.

「집안이나 나라에 모두 이로운 일인데 어찌 내가 사사로운 일에 연연하여 그 일을 행하는데 주저하겠는가?」

그때 제자들과 함께 나라의 정사를 맡아서 노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공자를 시기한 소정묘는 그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숙손첩을 시켜 공산불뉴에게 비밀리에 공자가 성벽의 높이를 낮추고 지방의 사병을 없애려고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공산불뉴는 편지를 받고 자기의 성의 견고함과 사병의 강함에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공자가 노나라 백성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공산불뉴는 그 역시 공자의 협조를 구하려고 편지와 함께 많은 비단을 예물로 보내 왔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노나라는 삼환씨가 정사를 마음대로 전단하기 시작한 이래로 군주의 힘은 약하고 신하의 권력은 강하게 되어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뉴가 비록 계손씨들의 가신으로 그들의 종읍을 지키는 성주에 불과하지만 실은 공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원컨대 계손씨들의 종읍인 비읍을 바쳐 공실의 신하가 되어 주군을 도와 강포한 자들을 제거하고 노나라 국정을 다시 옛날 주공께서 세우신 상태로 돌려놓겠습니다. 만일 그대가 나의 뜻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나를 보고 싶다면, 마차를 움직여 이곳 비읍으로 왕림하여 서로 얼굴을 맞대면서 장래의 일을 상의해보고 싶습니다. 변변치 못한 예물이나마 이곳으로 오는 수고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보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허물치 마시기 바랍니다.』

공자가 편지를 정공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불뉴가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공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이 한번 가서 그의 하여금 마음을 돌려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나라의 많은 일은 모두가 대사구의 행함에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내 곁을 떠날 수 있단 말입니까?」

정공의 허락을 받지 못한 공자가 즉시 편지와 예물을 불뉴에게 돌려보냈다. 공자가 자기의 초빙에 응하지 않음을 본 불뉴는 즉시 성읍(郕邑)의 읍재 공렴양(公斂陽)과 후읍(郈邑)의 읍재 공약막(公若藐)에게 자기의 거사에 참여하기를 권유하는 편지를 띄우고 마침내 비읍의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공렴양과 공약막은 공산불뉴의 청을 물리치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8. 후범반변(侯犯叛变)

- 후범이 숙손씨의 봉읍 후읍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

각설하고 후읍의 마정(馬正)㊻에 후범(侯犯)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활쏘기에 능했다. 평소에 후읍의 백성들이 후범의 용력을 두려워하여 복종하자 마음속으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품어 오고 있었다. 불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후범이 어인(圉人)을 시켜 공약막을 살해하고 스스로 후읍의 성주가 되었다. 그는 후읍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자기를 토벌하러 오게 될 군사들에게 대항하려고 하였다. 숙손주구는 후읍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맹손무기에게 알렸다. 무기가 주구에게 말했다.

「내가 마땅히 그대를 도와 반적을 소탕하리라!」

그렇게 해서 맹손씨와 숙손씨 두 집안이 연합하여 후범을 토벌하기 위해 가병들을 출동시켜 후읍을 포위했다. 후범이 후읍의 백성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하여 대항하자 후읍을 공격하던 두 집안의 많은 군사들만 죽고 그 성을 빼앗을 수 없었다. 무기가 주구에게 제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숙손씨 가신 중에 사적(駟赤)이라는 사람이 후읍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반란을 일으킨 후범을 따르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다. 후범이 사적을 믿고 신변 가까이 두었다. 사적이 후범에게 말했다.

「숙손씨가 사람을 제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고 있다 하는데 만일 제와 노 두 나라가 군사를 합하여 이곳을 공격해 오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 후읍을 제나라에 바쳐 항복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나라가 비록 겉으로는 노나라와 좋은 사이 같지만 속으로는 노나라가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있습니다. 후읍을 얻고 노나라를 압박할 수 있어 크게 기뻐한 제나라는 오히려 이 후읍보다 더 넓은 땅을 장군에게 줄 것입니다. 일이야 어찌되건 제나라의 다른 땅을 얻기만 하면 위험한 땅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되니 어찌 우리에게 이로움이 없다 하겠습니까?」

「그 계책이 참으로 좋소!」

후범이 즉시 사자를 제나라에 보내어 항복을 청하면서 후읍을 바치겠다고 했다. 제경공이 상국 안영을 불러 물었다.

「노나라의 숙손씨는 후읍의 토벌을 위해 우리에게 군사를 청하고 후범은 반대로 후읍을 들어 항복한다고 하니 과인은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소!」

「노나라와 새로이 수호를 맺은 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어찌 노나라의 반역자가 바치는 땅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숙손씨를 도와 후범을 토벌해야 합니다.」

제경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후읍은 곧 숙손씨들의 사적인 종읍이라 노후와는 무관한 일이요. 항차 숙손씨와 그 가신들이 서로 싸워 반목하게 되면 노나라로써는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 제나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소. 양쪽의 요청을 모두 받아들여 그들로 하여금 제각기 자기 갈 길로 가게 만들 작정이오.」

제경공은 즉시 대장군 사마양저를 불러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노나라와의 경계에 주둔한 후에 후읍의 정세를 살피라고 했다. 만약에 후범이 능히 숙손씨들을 물리친다면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후읍으로 보내 그의 항복을 받아들여 제나라로 데려오라 하고, 만약 숙손씨가 후범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게 된다면, 후읍을 공격하는 숙손씨를 돕도록 하여 상황의 변화에 따라 행동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것은 제경공의 간웅적인 면모를 보여준 행동이었다. 한편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는 후범을 보고 사적이 다시 말했다.

「얼마 전에 노나라와 회맹하고 수호를 맺은 제나라가 숙손씨와 우리 후읍 둘 중 어느 편을 도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마땅히 성문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스스로를 지키는데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후범은 일 개 힘이 센 필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적의 듣기 좋은 말을 철석같이 믿고 즉시 성안의 정예병들을 따로 뽑아 성문 밑에 배치하였다. 사적이 새의 깃털에다 글을 써서 화살에 메어 달아 성 밖에 주둔하고 있던 숙손씨와 계손씨들의 군영을 향해 쐈다. 군사들이 화살을 주어 주구에게 바쳤다. 주구가 화살을 받아 들고 깃털에 써있는 글을 읽었다.

「소신 사적은 역신 후범을 잡을 계책을 세워 이미 십의 칠팔은 성사가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성중에 변고가 생겨 혼란하게 되더라도 주인께서는 절대 놀라지 마십시오.」

주구가 크게 기뻐하여 무기에게 알리고 군사들을 엄하게 통제한 후에 성안에서의 변화를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후에 후범이 보낸 사자가 제나라에서 돌아와서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제후가 이미 우리의 항복을 받아들여 우리가 원하는 다른 고을의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후범에게 달려와 축하의 말을 올린 사적이 그 즉시 시중으로 나가 자기의 심복을 시켜 성중의 백성들 사이에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후씨가 장차 후읍의 백성들을 제나라에 넘기려고 보낸 사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조만간에 제나라 군사들이 당도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를 어찌 해야 하는가?」

갑자기 성안의 인심이 흉흉해 지더니 많은 사람들이 적사가 있는 곳으로 와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적사가 대답했다.

「나도 역시 그 소문을 들었소. 제와 노나라는 얼마 전에 새로이 수호를 맺어 땅을 차지하기는 서로 불편한 관계라 장차 후읍에 사는 백성들의 호구를 옮겨 제나라의 비어 있는 땅을 채우려고 할 것이요?」

‘안토중천(安土重遷)㊼’이라는 옛날 말은 고향을 떠나며 그 먹던 샘물을 등진다는 말이니 그 말을 듣고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여러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서로 전하여 후읍의 성민들은 각기 후범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사적은 후범이 술을 먹고 취해 쓰러지자 즉시 그의 심복 수 십 명에게 명하여 성 주위를 돌며 큰 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제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성 밖에 당도했다. 너희들은 속히 짐을 싸서 3일 내에 이 성을 버리고 제나라로 이주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사적의 심복들은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후읍의 성중에 있던 백성들은 크게 놀라 모두 후범이 묶고 있던 집 앞에 모였다. 백성들 중 노약자들은 땅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으나 청장년들은 모두가 이빨을 갈며 후범에 대해 원망하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범의 집안에 숨겨져 있는 갑옷과 병장기들을 발견한 성민들은 마치 기다리기나 하듯이 모두가 갑옷을 껴입고 병장기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후범의 집을 사면에서 포위하였다. 심지어는 성을 지키던 군사들도 모두 후범에게 반하여 성민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사적이 급히 달려와 후범에게 말했다.

「제나라로 옮겨 살게 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후읍의 성민들이 모두 들고일어났습니다. 장군에게는 아직 일단의 무장한 갑병들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 내어 주시면 그들을 이끌고 나가 백성들을 물리치겠습니다.」

「무장한 갑병들도 모두 백성들 편에 가담하여 내 주위에는 병사들이 한 명도 없소! 지금의 시급한 문제는 백성들로부터 화를 피하는 일이오!」

「제가 목숨을 걸고 장군의 출로를 열어 보겠습니다.」

사적이 집 앞으로 나가 여러 후읍의 백성들에게 소리쳐 말했다.

「그대들은 길을 비켜 후 장군이 나갈 수 있게 하라! 후 장군이 성 밖으로 나가면 제나라 군사들도 역시 당도하지 않을 것이다.」

후읍의 백성들이 사적의 말을 믿고 길을 내주자 사적이 앞서고 후범이 그 뒤를 따랐다. 또한 그의 가솔들 100여 명과 재물을 실은 십 여대의 수레가 후범의 뒤를 따랐다. 후범의 일행을 후읍의 동문으로 내보낸 사적은 노나라 군사들을 성안으로 맞이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맹손무기가 후범의 뒤를 추격하려 했으나 사적이 만류하며 말했다.

「신이 이미 후범에게 화를 당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만약 군사를 보내어 뒤를 쫓는다면 그 약속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맹손무기가 사적의 말을 듣고 후범의 뒤를 추격하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성안의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한 무기는 후읍의 성벽 높이를 세 자나 깎아 내리게 하고 후읍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운 사적을 읍재로 임명하여 공약막의 뒤를 잇게 했다. 후범이 후읍에서 도망쳐 나와 제나라에 당도하자 사마양저는 노나라 군사들이 이미 후읍으로 들어가 탈환했음을 알고 그 즉시 군사를 돌려 제나라로 돌아갔다. 숙손주구와 맹손무기도 노성으로 돌아갔다.

9. 費人襲魯(비인습노)

- 노나라 도성을 기습하는 비읍의 읍재 공산물뉴 -

한편 공산불뉴는 후범이 반란을 일으켜 숙손씨와 맹손씨가 합병하여 후읍을 공격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계씨는 이제 고립되어 노성은 이제 텅 비게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하면 노나라를 얻을 수 있다.」

불뉴는 즉시 비읍의 모든 장정들을 동원하여 노나라의 도성 곡부성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성안에 있던 숙손첩이 내응하여 성문을 열고 공산불뉴를 맞이했다. 노정공이 공자를 급히 불러 그 대책을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공실의 군사는 허약하기 때문에 동원하여 싸울 수 없습니다. 신이 주군의 어가를 몰아 계손씨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공자가 즉시 어가에 정공을 태우고 계씨들의 부중으로 달려갔다. 부중 안에는 견고한 고대가 있어 지킬만 하다고 생각한 정공이 그 안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사마 신구수와 락기가 공궁을 지키던 군사들 데리고 정공의 뒤를 따라 당도했다. 공자가 계손사에게 모든 계씨들 가병들의 지휘를 두 사마에게 맡기라고 말했다. 두 사마가 계씨들의 가병들은 고대의 좌우에 매복하라 명하고 공실의 군사들은 고대의 전면에 열을 지어 지키도록 했다. 공산불뉴가 숙손첩과 상의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이번에 거사를 일으킨 목적은 공실을 받들고 삼환의 권신들을 억누르기 위해서요. 노후를 받들어 모시지 못하고는 계씨들을 제압할 수 없소.」

불뉴가 이윽고 명을 발하여 일제히 공궁으로 쳐들어가 노후를 찾았으나 그때는 노후가 공궁을 빠져나간 후였다.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노후가 계씨부로 몸을 피신한 사실을 알았다. 불뉴가 즉시 군사를 움직여 계씨부를 공격했다. 계씨부의 고대 전면을 지키던 공실의 군사들은 불뉴 군사들의 기세가 등등한 모습을 보고 모두가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고대의 좌우에 매복하고 있던 계손씨들의 정예한 가병들이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 불뉴의 군사들을 향하여 공격해 왔다. 공자가 정공을 부축하여 고대 위에 나타나 비읍의 군사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우리 노나라의 군주님이 여기에 계시다. 너희들이 지금 반역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즉시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면 기왕의 죄는 묻지 않겠다!」

비읍의 군사들도 역시 공자가 성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병장기를 버리고 고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공산불뉴와 숙손첩은 더 이상 어찌 해볼 도리가 없어 즉시 그곳을 빠져 나와 오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10. 伏法小正卯(법복소정묘)

- 법을 밝혀 소정묘를 처형하는 공자 -

숙손주구가 후읍의 반란을 진압한 후에 곡부에 돌아와서 후성의 성벽 높이를 깎아 내렸다고 정공에게 고했다. 계손사도 역시 비성의 읍재에게 명하여 성벽의 높이를 낮추어 처음의 상태로 복원시키라고 하였다. 맹손무기 역시 성읍의 성벽을 낮추라고 읍재로 있던 공렴양에게 명했다. 공렴양이 다시 소정묘에게 그 가부를 물었다. 소정묘가 말했다.

「후읍과 비읍은 모두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 벌로써 성벽의 높이를 낮추었소. 만약 성읍(郕邑)도 두 고을의 예에 따라 성벽의 높이를 낮춘다면 반란을 일으킨 두 고을과 무엇이 다를 수 있겠소? 장군은 그저 ‘ 성읍은 곧 노나라의 북쪽 변경을 지키는 요새지라 성벽의 높이를 낮춘 후에 만일 제나라가 우리의 북쪽 변경을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막으려고 하십니까?’라고만 말하십시오. 그러면 명을 거역한 것이 되겠지만 반역의 죄로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오.」

공렴양이 소정묘가 일러준 말대로 성읍의 군사들에게 갑옷을 착용한 후에 모두 성벽 위로 오르게 한 후에 숙손주구에게 성벽을 깎아 내려 낮추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숙손씨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나라의 사직을 위해 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제나라 군사들이 저녁때라도 갑자기 쳐들어온다면 무엇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습니다. 결코 이 성의 벽돌 한 개라도 들어낼 수 없습니다.」

숙손주구가 공렴양의 말을 공자에게 전했다. 공자가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공렴양은 스스로 이런 말을 할 요량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는 필시 ‘문인(聞人)’이라고 불리는 소정묘의 생각입니다.」

계손사는 공자가 비읍의 반란을 진압한 공을 칭찬하며 자기는 공자의 덕에 만분지일도 못 미친다고 생각하고 노나라의 정사를 공자에게 맡겨 나라의 대소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공자의 의견을 물어 행했다. 공자가 노나라의 정사를 바로 잡기 위해 새로운 일을 행할 때마다 소정묘가 재빨리 말을 돌려 공자의 말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서정묘의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가 그 말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자가 조용히 정공에게 말했다.「노나라의 내정이 진작되지 않은 이유는 충신과 망신이 구별이 안 되어 자연히 상과 벌이 분명히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릇 좋은 종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나쁜 풀을 반드시 뽑아 버려야만 합니다. 원컨대 주군께서는 그가 더 이상 제멋대로 행동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태묘에 보관되어 있는 부월(斧鉞)을 꺼내어 궁궐의 뜰 양쪽으로 늘어놓고 소정묘를 치죄하려고 하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공이 허락하자 다음 날 군신들을 조정의 뜰 앞에 불러 모아놓고 성읍의 성벽을 깎아 내리는 일이 나라에 이로운가 아니면 해로운가를 의논하게 하고 공자는 단지 그 의견을 듣고 가부간을 결정하기로 했다.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성벽의 높이를 깎아 내려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깎아 내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소정묘가 공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성벽의 높이를 깎아 내려야 하는 이유를 여섯 가지를 나열했다.

첫째, 나라 안에는 군주가 둘일 수 없다.

둘째, 나라의 도성에 그 무게를 두어야 하고

셋째, 사문들의 세를 억제하여야 하며

넷째, 가신들이 발호 하는데 믿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며

다섯째, 삼가에 속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으며

여섯째, 우리 노나라가 혁신을 이루어 흥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 이웃나라가 주군을 가볍게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듣고 정공을 향해 말했다.

「묘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성읍은 이미 고립되었는데 어찌 능히 반란을 꾀하겠습니까? 더욱이 공렴양은 공실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인데 발호 운운하여 그를 모함하고 있습니다. 묘의 요사스러운 말은 국정을 문란하게 만들고 군주와 신하 간을 이간질하는 짓입니다. 마땅히 법에 따라 죽여야 합니다.」

군신들이 모두 앞으로 나와 정공을 향해 말했다.

「묘는 곧 노나라의 명성이 높은 ‘문인’입니다. 그의 말이 어쩌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는 하나 죽을죄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공자가 물러나지 않고 더욱 강렬한 어조로 말했다.

「묘라는 자는 거짓을 교묘하게 꾸며 참말처럼 말하고 그 행동은 정도에 벗어남에도 고치지 않고 옳다고 우기면서 한낱 헛된 이름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죽이지 않으면 노나라의 정사는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신은 사구라는 직책을 맡고 있으니 청컨대 부월의 형법을 행하려고 합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자가 말을 마치고 즉시 주위의 장사들에게 명하여 소정묘를 결박 지워 부월을 양쪽으로 늘어세운 조정의 뜰 가운데로 끌어내어 참수하고 말았다. 군신들이 놀래어 얼굴색이 변하고 특히 삼가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사관이 이 일을 두고 시를 지었다.

고화사(高華士)48)가 발호하자 태공이 죽였듯이

공자도 기어이 소정묘를 죽였다.

두 분 성인들의 옳은 눈이 없었다면

세간 사람들은 두 사람의 헛된 책만을 읽게 되었음이라!

養高華士太公誅(양고화사태공주)

孔子偏將小正除(공자편장소정제)

不是聖人開正眼(부시성인개정안)

世間盡讀兩人書(세간진독양인서)

소정묘가 죽고 나자 공자가 품고 있던 뜻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노정공과 삼가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비우고 공자의 말에 따랐다. 공자가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예의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며 염치(廉恥)를 배양하였다. 백성들은 걱정할 것이 없게 되어 이윽고 노나라는 치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3개 월도 채 못 되어 노나라의 풍속이 크게 변하여 시장에서 돼지나 새끼 양을 사고 팔 때에 거짓으로 값을 부르지 않았으며 남녀가 길을 갈 때 좌우로 나뉘어 유별했다. 또한 길을 가다가 흘린 물건을 주어 자기 소유로 만드는 행위를 수치로 여기게 되었다. 소문을 듣고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노나라로 몰려들었으나 노나라 백성들은 그들에게 항상 음식을 내어 모자라지 않게 접대했음으로 모두가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태평성대를 맞이한 노나라 백성들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곤룡포를 입으시고

장보관(章甫冠)49)을 쓰신 성인께서

저의 집에 친히 왕림하셨네

장보관에 곤룡포라

사사로움이 없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도다

袞衣章甫(곤의장보)

來適我所(래적아소)

章甫袞衣(장보곤의)

慰我無私(위아무사)

이 노래의 가사가 제나라에 전해지자 제경공이 크게 놀라 말했다.

「우리 제나라는 필시 노나라에 병합되고 말겠구나!」

《제 79회로 계속》

주석

①비(費)/ 현 산동성(山東省) 임기(臨沂) 북서(北西)쪽 40키로의 비현(費縣) 부근.

②성(郕)/ 원래 주무왕의 아들 성숙무(成叔武)가 현 산동성 곡부(曲阜) 북쪽 25키의 영양현(寧陽縣) 경내에 봉해진 제후국으로 후에 노나라 소속의 고을이 되었다. 정장공(鄭庄公)과 제희공(齊僖公) 때 연합군을 결성하여 공격할 때 멸망당하고 제나라의 위성국(衛星國)이 되었다. 후에 다시 노나라에 편입되어 노나라 삼환씨 중의 하나인 맹손씨(孟孫氏)의 식읍(食邑)이 되었다.

③후(郈)/ 현 산동성 곡부시 북서쪽 약 50키로에 있었던 고을로 숙손씨의 식읍이다.

④소정(小正)/ 관원들의 잡일을 거들어 주던 하급 관리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급사에 해당한다.

aa,,/bb // b v⑥추읍(鄒邑)/ 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에 있었던 중소제후국으로 맹자(孟子)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⑦숙량흘(叔梁紇)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는 60회 내용 참조

⑧공상(空桑)/ 속이 빈 뽕나무를 말한다. 우임금의 아들 계(啓)와 탕왕을 도와 은나라를 세운 이윤(伊尹)도 공상에서 태어났다.

⑨水精之子, 繼衰周而素王

⑩기원전 551년 공자가 태어날 때 각 주요 제후국의 형세

노(魯) : 양공(襄公) 22년으로 당시의 노나라 정세는 삼환씨(三桓氏)의 세력이 군주를 능가하였고 세 가문은 다시 그들의 가신(家臣)들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제(齊) : 장공(庄公) 3년으로 당진의 란영(欒盈)이 망명해 왔다. 안영(晏嬰)과 전문자(田文子)가 당진과의 우호관계를 걱정하여 간했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3년 후인 기원전 548년에 최저와 경봉이 장공을 시해하고 경공(景公)을 세웠다.

당진(唐晉) : 평공(平公) 7년으로 그 한 해 전에 범씨 종족이 란씨종족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숙향 양설힐(羊舌肹)이 연루되자 기해(祁奚)가 나서서 구명하였다.

섬진/ 경공(景公) 26년으로 다음 해인 기원전 550년 경공이 당진의 도성을 찾아가 평공과 회맹하여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그 다음 해에 약속을 깨뜨렸다.

초(楚)/ 강왕(康王) 9년으로 강왕에게는 4명의 동생이 있었다. 6년 후에 강왕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겹오(郟敖)가 초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강왕의 동생인 공자위가 살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공자위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영왕이 서(徐)나라를 정벌하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그의 세 동생이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영왕은 방황하다 객사했다. 영왕의 막내인 기질(棄疾)이 그의 형 공자비(公子比)를 죽게 만들고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평왕이다. 이 일은 공자의 나이 16세 때 일어났다.

오(吳)/ 제번(諸樊) 10년이다. 오왕 수몽이 죽으면서 그의 네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형제상속을 원칙으로 하여 왕위가 그의 막내인 계찰에게 차례가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계찰은 차례가 돌아왔지만 오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연릉은 그의 봉지이다.

정(鄭)/ 간공(簡公) 15년으로 자산 공손교(公孫喬)가 재상이 되어 당진과 초나라의 분쟁으로 인한 백여 년간의 병화에서 벗어나 치세를 이루고 있었다.

⑪牛唇虎掌,鴛肩魚脊,海口輔喉,頂門狀如反宇

⑫9자6촌/ 춘추 때 길이의 단위는 소척과 대척이 있었다. 소척 한 자는 18cm이고 대척은 22.5cm 이며 한 촌은 2.25cm이다. 즉 공자의 신장은 176cm 정도라고 봐야 한다.

⑬부(缶)/ 용량을 말하는 단위 혹은 큰 항아리. 1부(缶)는 4곡(斛), 1곡(斛)은 10두(斗)다.

⑭기(夔)/ 고대 전설에 나오는 다리가 하나이고 뿔이 달리지 않은 소의 형상을 한 동물이다. 황제(黃帝)가 판천(阪泉)의 뜰에서 군신(軍神) 치우(蚩尤)와 싸울 때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기(夔)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수(雷獸)의 뼈로 북채를 만들었다. 우렁찬 북소리에 힘을 얻은 황제가 거느린 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치우를 물리칠 수 있었다.

15) 망량(魍魎)/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산의 정령.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낼 수 있어 그 소리로 사람을 미혹시키는 귀신을 말한다.

16) 용망상(龍罔象)/ 용의 모습을 하고 물 속에 살면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귀신.

17) 분양(羵羊)/ 양의 모습을 하고 땅속에 사는 귀신

18) 중도(中都)/ 지금의 산동성 문상현(汶上縣)으로, 곡부시 서쪽 약 50키로에 있었던 고을로 당시 문상현 일대는 계손씨의 봉지였다.

19)노정공(魯定公)/ 삼환씨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그들의 반격을 받고 쫓겨난 노소공(魯昭公)의 뒤를 이어 노후의 자리에 올랐다. 기원전 509년에 올라 495년에 죽었다. 공자는 이어서 정공에 의해 대사구(大司寇)에 임명되어 제경공과 회견하는데 상례로 따라갔던 해가 기원전 500년이다. 공자가 노나라의 사공의 자리에 임명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0세가 넘어서였다.

20) 사공(司空)/ 고대 중국의 토목공사를 담당한 관리의 장

21) 체제(禘祭)/ 5년에 한 번씩 지내는 큰 제사. 천자만이 지내게 되어 있는 의식이나 주공이 세운 공이 천자에 못지 않다고 하여 특별히 주공에게만은 지내게 하여 주공의 후손인 노나라가 관례로 행하였다.

22)환양관(讙陽關)/춘추 시 노나라 땅으로써 지금의 산동성 태안현(泰安縣) 남.곡부시 정북 약 50km 지점의 안가장(安駕庄)에 있던 고을로서 당시 제와 노 두 나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문수(汶水)를 건너기 위해서는 지나야만 했던 관문이 있었다.

23) 광(匡)/ 춘추 때 송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언릉시(郾陵市) 동남 약 40키에 있었다. 노나라의 양호가 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송나라로 몸을 피하자 송군은 양호를 이곳에 봉해 살게 했다. 후에 공자가 이곳을 지나다가 양호로 오해받아 곤경을 치른 곳이다.

㉔조앙(趙鞅)/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75년에 죽은 춘추말 당진국의 정경(正卿)으로 시호는 조간자(趙簡子)이다. 당진국 공실의 세력이 쇠퇴하자 순인(荀寅)과 범길석(范吉射)이 조씨들을 공격했다. 그는 진양(晉陽)으로 달아났다. 후에 정경의 자리에 복귀한 조앙은 조씨의 가병을 동원하여 범씨와 순씨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두 종족은 조가(朝歌)와 한단(邯鄲)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이에 지(智), 한(韓), 위(魏) 등의 3가와 힘을 합쳐 조가와 한단을 압박했다. 4가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범씨와 순씨들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후에 범개(范匃)가 제정한 형서(刑書)를 철정(鐵鼎)에 새겨 조씨들이 다스리던 지역의 정치와 경제를 개혁함으로 해서 조가들의 세력을 증대시켰다. 그의 아들 조양자 때 한위조(韓魏趙) 삼가는 지가(智家)를 멸하고 당진국을 삼분해 전국시대를 열었다.

㉕팔일무(八佾舞)/ 천자만이 즐길 수 있는 춤으로써 무희들이 가로 세로 각기 8 줄로 늘어서서 64명이 추었다. 참고로 제후는 육일(六佾)로 6x8="48명," 대부는 사일(四佾)로 4x8="32명," 사(士)는 이일(二佾)로 2x8="16명이" 추는 춤을 즐길 수 있었다. 논어의 편명(篇名)이기도 하다.

㉖ 옹철(雍徹)/ 옹(雍)은 옹(雝)과 통하며 팔일무(八佾舞)를 출 때의 반주곡으로써 시경 송(頌) 중 제 2장 7편 주송신공(周頌臣工)의 한편이다. 철(徹)은 철(撤)과 통하며 제사를 끝내고 제기를 거두는 의식을 말한다. 논어 팔일무(八佾舞) 편에 “옹(雍)을 부르며 철(徹)한다.”라는 구절에서 옹철(雍徹)이라 했다.

㉗구성(九成)/ 음악이 가지고 있는 9가지 뜻으로 옛날에는 이 아홉가지의 뜻이 합하여 음악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음.

㉘간척무(干戚舞)/ 방패와 도끼를 들고 추는 춤으로써 천자만이 즐길 수 있었다.

㉙주관(周官)/ 《<주례(周禮)》> 혹은 《<주관경(周官經)》>이라고도 한다. 고대에는 주공의 작품으로 인식되었으나 지금은 동한 초의 학자 유흠(劉歆)의 위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전편은 모두 6편으로 천관(天官)은 치국에 관하여, 춘관(春官)은 교육에, 춘관은 예에, 하관은 정무에 관하여, 추관은 형별에 관하여, 동관은 지방행정에 관하여 각각 기술하였다.

㉚협곡산(夾谷山)/ 현 산동성 래무시(萊蕪市) 남 약 20키로

㉛상례(相禮)/제후들이 회합할 때 제후를 대신하여 예를 행하는 의전을 담당하는 직위.

㉜우(盂)땅의 회맹/ 송양공(宋襄公)이 주양왕(周襄王) 13년 기원전 638년에 현 하남성 수현(壽縣) 부근인 우(盂) 땅에서 주재한 회맹으로써 군사를 대동하지 않고 비무장으로 참석했다가 초성왕(楚成王)을 수행하여 군사들을 몰래 끌고 온 성득신(成得臣)에게 사로 잡혀 초나라로 납치된 일을 말한 것임. 자세한 내용은 연의(演義) 34회 내용 참조.

㉝래(萊)/ 현 산동성 청도시 북쪽 약 50키로의 래서(萊西), 래양(萊陽) 부근의 고을로 동이족의 거주지이다. 안영(晏嬰)이 이곳 출신이다.

㉞태공(太公)과 주공(周公)의 서약(誓約)/ 제(齊)에 봉해진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과 노(魯)에 봉해진 주공단(周公旦)은 원래 다 같이 주나라의 개국공신으로써 그 사이가 매우 친하였다. 두 사람이 그들의 후손들에게 당부하기를 제와 노 두 나라는 계속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절대 싸우지 말라고 서로 맹세한 것을 말한다.

㉟폐구(敝笱)/ 《시경(詩經)․국풍(國風)․제풍(齊風)》에 수록되어 있는 시가의 제목이다. 문강(文姜)의 음란함을 노래한 시가로써 원문은 본서 14회 참조

㊱小人之其過, 謝之以文, 君子之其過, 謝之以質

㊲문양(汶陽)/ 산동성 태산(泰山)에서 발원하여 태안시(泰安市) 서쪽을 우회하여 문상시(汶上市)와 제녕시(濟寧市)를 거쳐 미산호(微山湖)로 흘렀던 춘추 때 제나라와 노나라를 갈랐던 문수(汶水) 주변의 땅을 총칭한 지명으로 《시경(詩經)․제풍(齊風)》에 문강이 노와 제나라를 오가기 위해 건넌 강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㊳운(鄆)/ 현 산동성 운성현(鄆城縣) 동부와 기수현(沂水縣) 북부 일대의 땅

㊴구음(龜陰)/ 지금의 산동성 신태현 서남 40키로의 구산(龜山)의 북쪽을 말한다. 구산의 남쪽은 사수현(泗水縣)과 접하고 있다. 음(陰)은 산의 북쪽을 가리키며, 양(陽)은 남쪽을 뜻한다.

㊵노희공(魯僖公)/ 기원전 659년에 노후의 자리에 올라 33년간 재위하다가 기원전 627년에 죽었다. 노환공의 손자이며 장공(庄公)의 아들이다. 장공의 서제 경보(慶父)가 장공의 뒤를 이은 민공(湣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노후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으나 노나라의 국인들이 들고일어나 그를 죽이려고 했다. 이에 경보는 거(莒)나라로 달아났다. 이어서 그는 장공의 막내아들인 계우(季友)의 옹립에 의해서 노후의 자리에 올랐다. 노나라의 군주가 된 희공은 계우를 상국에 임명하여 나라의 정사를 모두 맡겼다. 노나라는 치세를 이루게 되어 국인들이 노희공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시경(詩經)․노송(魯頌)》에 실려 있는 4수의 시가는 모두 노희공의 공덕을 찬양한 노래이다. 노희공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연의 22회 내용 참조.

㊶계우(季友)/ 노장공의 막내 동생으로 삼환씨(三桓氏) 중 계손씨(季孫氏)의 시조다. 노희공(魯僖公)을 옹립하여 노후의 자리에 앉히고 이어 상국이 되어 노나라에 치세가 오도록 했다. 식읍은 문양(汶陽)과 비(費) 땅이다. 연의 22회 참조.

㊷오전삼분(五典三墳)/ 삼황오제 시대를 기술한 책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삼분이라 함은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시대를, 오전(五典)라 함은 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시대에 대한 일을 기술한 책을 일컫는다.

㊸중유(仲由)/ 자로(子路)는 그의 자다.

㊹염구(冉求)/ 자(字)는 자유(子有)다. 공자보다 29년 연하이며 계손씨의 가재(家宰)가 되었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염구는 어진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천호의 백성과 백승(百乘)의 군사가 있는 고을을 다스릴만 하지만, 그가 어진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계강자가「자로는 어진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염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염구가 공자에게 「의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바로 행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자로가 다시「의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부형이 계시니 어찌 듣고서 바로 행하겠느냐?」라고 대답했다. 자화(子華)가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여「물음이 같은데 대답이 어찌하여 다릅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염구는 무슨 일이든 일단 머뭇거리는 사람이라 진취시켜 준 것이고, 자로는 남을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억제시켜 준 것뿐이다.」라고 대답했다.

㊺백치(百雉)/ 고대의 성벽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치는 높이 1장, 길이 3장이다. 즉 백치의 성이란 2.25m의 높이에 길이가 675미터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 쌓인 대성을 말한다.

㊻마정(馬正)/ 말의 관리를 주관하던 관리들의 책임자.

㊼안토중천(安土重遷)/오랫동안 살아온 곳은 쉽사리 떠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㊽고화사(高華士)/ 제태공 여상(呂尙) 때 제나라 사람으로 의를 핑계로 천자의 신하로 자처하지 않고 제후들과도 사귀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현인으로 받들었다. 태공이 사람을 시켜 세 번을 계속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태공이 고화사를 죽였다. 주공이 그와 같은 은사를 어째서 죽였냐고 묻자 태공은 ‘화사와 같은 자가 높여진다면, 제나라 백성들은 모두 은사 흉내를 낼 것이니 내가 어찌 제나라의 군주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㊾장보관(章甫冠)/ 은나라 사람들이 착용하던 까만 천으로 만든 모자의 일종. 치포관(緇布冠)이라고도 한다.

[평설]

‘협곡의 회맹에서 제나라의 음모를 물리치는 공자’ 편은 유가의 조종이며 대성인(大聖人)인 공자가 문(文)은 능히 치국을 행하고, 무(武)는 능히 나라를 보존하는 지혜와 재능에 대해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공자(孔子 : 기원전 551-479년)의 이름은 구(丘)고 자는 중니(仲尼)다. 주례를 옹호하고 인애(仁愛)를 주장했으며, 중용(中庸)을 설파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육가에 철학자다. 그의 사상은 중국의 문화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노소공(魯昭公 : 재위 전514-510년) 치세는 계(季), 맹(孟), 숙(叔) 씨 등의 삼환씨(三桓氏)가 노나라를 삼분하여 실제로 군주의 권한을 행사했던 시기로 군주의 존재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후에 다시 삼환씨의 식읍을 다스렸던 읍재(邑宰)들이 삼가의 명령을 듣지 않고 그 주인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 중에 계씨들의 가신 양호(陽虎)가 기원전 502년 계씨들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여 노후(魯侯)를 등에 업고 삼환씨들을 지배하여 노나라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 공자의 어진 이름과 재능을 사모하고 있던 양호가 공자를 초청하여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려고 했던 공자는 당연히 반역을 일으키려는 양호에게 몸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맹손씨의 종주 무기(無忌)에게 양호에 대한 방비를 굳게 하라고 조언했다. 공자는 양호의 란을 평정하는 데 공헌을 한 것이다.

기원전 501년 양호가 노나라에서 란을 일으켰다가 싸움에 지고 제나라로 달아났다. 양호를 이용하여 노나라를 정벌하려고 생각했던 제경공은 대부 포국(鮑國)이 건의를 받아들여, 노나라가 얼마 전에 기용한 공자의 학문이 예사롭지 않아, 그런 상황 하에서 노나라를 정벌한다고 해서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오히려 양호를 붙잡아 노나라에 압송하여 공자의 환심을 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공자를 임용한 노나라는 이로써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편 노나라로 압송되던 양호는 그를 제나라 군사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후에 탈출해서 당진국으로 달아났다. 이에 노국의 정사를 맡아 하고 있던 공자로부터 죄를 추궁 당할 것을 두려워한 제경공이 스스로 칭하던 패자의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랫동안 견지했던 노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우호적으로 바꿨다. 기원전 500년 제경공은 노정공(魯定公)에게 편지를 보내 제와 노 두 나라 경계에 있던 협곡(夾谷)이라는 곳에서 만나 우호협정을 맺자고 했다. 공자가 이 회맹에 참가함으로 해서 노나라는 다시 한 번 제나라부터 외교적인 승리를 취할 수 있었다.

노정공이 협곡으로 출발하려고 할 때 공자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방비하기 위해 정공에게 문사(文事)를 행할 때는 무력(武力)이 그 뒤를 받쳐주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무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회맹에 참가하여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된 송양공의 인의(仁義)를 예로 들었다. 그래서 노정공은 병거 천 승을 대동하고 회맹 장소에 가기로 결정했다. 공자의 문사무비(文事武備) 사상은 가장 보편적인 정치 이론이다.

제와 노 두 나라의 회맹이 열리기 직전에 제경공은 공자가 비록 예에 밝다고는 하지만 싸움의 일에는 익숙하지 않다는 그의 모사(謀士) 여미(黎彌)의 말을 듣고 회맹을 행할 때 노나라의 군주와 그 신하들을 사로잡아 노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려고 했다. 제와 노 두 나라의 군신들이 회맹단에 모두 오르자, 제경공은 음악을 들려주겠다는 구실로 각종 무기로 무장한 래이(萊夷)의 토인 3백 명을 일제히 단으로 오르게 했다. 이에 공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이 회맹을 거행하는데 연주하는 음악은 중국의 것이야 함에도 이적(夷狄)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제경공으로 하여금 래이의 토인들을 모두 단에서 물러가도록 명하게 했다. 다시 여미가 노나라 군주에게 모욕을 가할 목적으로 제나라의 배우를 단으로 오르게 하여 음란한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도록 만들었다. 이에 다시 공자가 제경공에게 청하여 그들을 모두 붙잡아 포승으로 묶어 법을 집행해야 한다고 청했으나 경공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가 한 번 소매를 들고 큰 소리로 외치자, 노나라의 두 장수가 비호같이 단 위로 올라와 제나라의 남녀 배우와 악대들을 끌어내어 그 목을 베어버리고 말았다. 공자는 그의 지혜와 용기로 제경공과 그 모신 여미의 음모를 분쇄하고 노나라의 안전과 위신을 지킨 것이다. 자기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했던 제경공은 노신 안영(晏嬰)의 건의를 받아들여 옛날 제나라가 침략하여 빼앗아 간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문사무비(文事武備)는 역사에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고,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는 양대 지주인 것이다. 문인인 공자는 문을 중요시 했지만, 그렇다고 무를 경시하거나 폐하지 않았다. 그가 역사의 경험으로 보아 문과 무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내린 결론은 역사에 진리로 남아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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