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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2:30:354968 
제79회. 遊說天下(유세천하) 會稽之恥(회계지치)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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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79회 遊說天下 會稽恥辱(유세천하 회계치욕)

노나라를 떠나 천하의 제후들에게 유세를 행하는 공자와

회계에서 오왕에게 치욕을 당한 월왕 구천

1. 隣國有聖 我國之懮 (인국유성 아국지우)

- 이웃나라의 성인은 우리나라의 우환이다.

한편 제경공 일행은 협곡에서 노정공(魯定公)과 회맹을 맺고 임치성으로 돌아왔으나 며칠 후에 안영이 노환으로 죽었다. 몇 날을 슬피 울며 제나라 조정에 인물이 없음을 걱정하던 경공은 다시 공자를 임용한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공이 놀라 조당에 나가 말했다.

「노나라가 공자를 임용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틀림없이 천하의 패권을 노릴 것이다. 패권을 다투는 일이란 필시 땅을 두고 싸우는 일인데 그 첫 번째 대상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우리 제나라가 아니겠는가? 그 화가 제나라에 가장 먼저 미칠 것인데 참으로 걱정되는 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부 여미가 경공이 걱정하는 소리를 듣고 나와 말했다.

「주군께서 노나라가 공자를 등용하는 일을 걱정하시면서 어찌하여 막지 않으십니까?」

「노나라가 이제 금방 공자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우리가 어떻게 공자가 노나라의 정사를 맡아보지 못하도록 막는단 말인가?」

「신은 듣기에 나라가 크게 다스려져 국내사정이 안정이 되면 반드시 나라 안에 교만한 마음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청컨대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한 여자 악사를 노나라에 보내면 노후는 기뻐하며 악사들을 받아 들여 즐기느라 틀림없이 정사를 태만히 하고 공자를 멀리 할 것입니다. 노후가 자기를 멀리하면 공자는 필시 노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 것입니다. 그 때는 주공께서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女樂文馬(여악문마)

- 아름다운 여악사와 채색말에 현혹되어 정사를 팽개친 노후 -

경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여미에게 명하여 시중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용모가 아름다운 20세 미만의 여인들 중에서 80명을 뽑아 10대로 나누어 각기 아름다운 비단 옷을 입히고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그 노래의 곡명은《강락(康樂)》이라 하는데 곡조와 춤사위를 새로 만들어 예전에는 본적이 없는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노래와 춤을 여자 악사들에게 가르치기를 다하자 다시 좋은 말 120필에 금으로 만든 마구를 채우고 정교한 조각을 새긴 말안장을 얹힌 후에 말들의 털색을 각기 다른 색으로 준비했다. 그 120필의 말들이 움직일 때 멀리서 보면 마치 비단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듯 보였다. 드디어 아름다운 여자 악사 80명과 예물을 실은 말 120필이 끄는 수레 30대에 싣고 노나라에 보내어 노후에게 바치도록 했다. 이윽고 노나라의 남문 밖에 당도한 제나라 사자는 비단 천막을 두 곳으로 나누어 치게 하고 동쪽 천막에는 말들을 묶어 두게 했고 서쪽 천막에는 여자 악사를 머물게 했다. 그리고 나서 노성으로 들어가 먼저 제후의 친서를 노정공에게 바쳤다. 정공이 제나라의 국서의 봉함을 뜯고 읽었다.

『제나라의 저구(杵臼)가 머리를 숙여 존경하는 노 현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제가 협곡에서 현후 전하께 무례를 범하여 그 마음 아직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후 전하께서 저의 사과하는 마음을 너그러이 받아 주시어 마침내는 두 나라가 수호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나라의 많은 국사로 노심초사 하시는 노후 전하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자 악사 10대를 보내오니 여흥을 즐기시는데 쓰시기 바랍니다. 양마 120필은 또한 예물을 실은 수레를 끌기 위함이니 존경하는 좌우의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시어 그들을 그리는 저의 마음을 표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변변치 못한 예물이나마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노나라의 상국 계손사는 공자로 인하여 나라가 크게 다스려져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자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도 잊어버리고 사치와 오락만을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제나라가 성대하게 치장을 한 아름다운 여자 악사를 보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것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즉시 백성들이 입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심복 몇 사람과 함께 수레에 타고 아무도 몰래 남문을 빠져나가 제나라 여자 악사들이 머물고 있는 막사를 찾았다. 그때 마침 여자 악사들은 열을 크게 지어 가무를 연습 중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는 지나가는 구름이라도 멈추게 하는 듯 하고 춤을 추는 모양은 마치 향기 나는 바람을 일으키기는 듯이 황홀했다.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러갔다 하며 춤을 추는 여자 악사들의 화려한 모습은 사람들의 넋을 빼앗는 천상에서 노니는 선녀들 같아 도저히 이 세상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계손사가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또한 그들의 용모는 모두 천하절색에 화려한 비단 옷으로 치장하고 있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는 감각이 없어지고 다리에는 힘이 빠져 노곤해 지면서 눈동자가 풀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멍하게 벌어졌다. 이윽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가자 계손사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혼백이 나가 버렸다. 노정공이 그날 하루 동안 세 번이나 불렀지만 계손사는 여자 악사들의 가무에 넋이 나가 그 부름에 응하지 못했다. 계손사는 다음 날이 되자 곧바로 입궐하여 정공을 배알했다. 정공은 계손사에게 제나라에서 온 국서를 보여주며 읽어보도록 했다. 계손사가 국서를 다 읽고 나서 말했다.

「이것은 제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마음에서이니 물리치지 마십시오.」

정공도 역시 제나라 여자 악사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던 참이라 계손사에게 슬며시 물었다.

「제후가 보내 온 제나라 여자 악사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남문 밖에 거하면서 열을 지어 가무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어가를 움직여 가보시겠다 하시면 제가 마땅히 모실 수 있겠지만 단지 백관들도 같이 따라 나서겠다고 하면 일이 번거롭게 되니 차라리 미복으로 한번 가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법복을 벗어버리고 평민복장으로 바꿔 입은 정공과 계손사 두 군신이 각기 작은 수레를 타고 남문을 향하여 달려 나갔다. 그들의 일행이 이윽고 남문 밖 서쪽에 친 비단 장막에 당도하였다. 제나라 사신 일행 중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정공과 계손사의 모습을 보고 장막 안으로 달려가 보고하였다.

「노나라 군주가 우리 제나라 여자 악사들의 가무를 구경하시고자 평복 차림으로 친히 왕림하셨습니다.」

제나라의 사자가 여자 악사들에게 온갖 기예를 발휘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도록 독려했다. 노래 소리는 더욱 아름다워졌고 춤을 추던 여인들의 옷소매는 한층 요염하게 보였다. 십대로 이루어진 80명의 여자 악사들이 순서에 따라 나오고 들어가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노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진실로 귀와 눈을 빼앗겨 제나라 사신의 접대에 응할 겨를도 없이 자기들도 몰래 신이 나서 어깨춤을 추었다. 그때의 일을 노래한 시가 있다.

노래 한 곡에 금 덩어리가 한 개씩 떨어지고

절묘한 춤 한 마장에 옥구슬이 한 쟁반 생겼다.

단지 80명의 아름다운 여자 악사들로 인하여

노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一曲嬌歌一塊金(일곡교가일괴금)

一番妙舞一盤琛(일번묘무일반침)

只因十隊女人面(인지십대여인면)

改盡君臣兩個心(개진군신양개심)

제나라의 사자를 따라왔던 종자들이 정공과 계손사를 동쪽의 비단 천막으로 데려가 그곳에 메어 있던 양마들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정공이 보고 말했다.

「오늘 와서 내가 평생보기 드문 구경을 이미 했는데 또다시 말 따위의 일을 논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 날 밤에 정공이 궁궐로 다시 돌아와서 잠을 청했으나 귀에서는 낮 동안에 보았던 아름다음 노래 소리가 맴돌고, 또한 아름다운 무희들이 자기 침상 곁에 누워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제나라에서 보내 온 여자 악사들과 양마 120필에 싣고 온 예물에 대해 군신들과 의논했다가는 군신들이 혹시 반대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한 정공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계손사 한 사람만을 불러서 입궁 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미녀들과 양마를 보내 준 제후의 은혜에 감격하였다는 내용의 답서를 쓰도록 명했다. 그 편지의 내용은 구태여 모두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다시 황금 백일을 제나라 사자에게 하사한 정공은 제나라에서 보내 온 여자 악사들과 양마를 모두 궁궐 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에 80인의 여자 악사들 중 30인은 계손사에게 주고 양마 120필은 모두 마굿간 일을 돌보는 어인(圉人)에게 맡겨 돌보게 하였다. 정공과 계손사가 새로이 제나라의 아름다운 악사와 무희를 얻어 각자 나누어 갖고는 낮에는 가무를 즐기고 밤에는 그 여인들과 잠자리를 같이하여 3일을 계속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아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3. 因膰去魯 遊說天下(인번거노 유세천하)

- 제사고기로 인해 노나라를 떠나 천하의 제후들에게 유세하는 공자 -

공자가 그 일에 대해 소식을 듣고 마음이 처연해 지며 장탄식을 하였다. 그때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子路)가 곁에 있다가 공자에게 말했다.

「노군이 정사에 태만해하니 선생님께는 이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교외에서 드리는 노나라의 제일 큰 제사의 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일 노군이 큰 예의를 잊지 않고 있기만 한다면 노나라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할 것이다.」

이윽고 제를 드리는 날이 되자 정공이 제사를 주재하여 제례는 행했으나 의식이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공은 예전과 다름없이 국사를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식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제사 음식을 담당한 관리가 정공이 있는 궁궐로 가서 궁문을 두드리며 남은 음식의 처분에 대해 물었으나 정공은 모두 계손사와 상의해서 처분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계손사는 다시 그 일을 자기 가신과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했다. 제사를 지내는 교외까지 따라 나섰다가 저녁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온 공자는 그때까지도 제사 음식이 자기 집에 당도하지 않은 것을 보고 자로에게 말했다.

「내가 가슴에 품은 뜻을 세상에 펼치지 못함은 바로 하늘의 뜻인 것 같다.」

자로에게 거문고를 가져오라고 해서 뜯으며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 여자들의 노래 소리에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되었구나!

그 여자들이 주군을 넋을 빼앗아

내일이 수포로 돌아갔구나!

근심일랑 버리고 유우자적이나 하다가

때가 되면 돌연히 저 세상으로 갈꺼나?

彼婦之口(피부지구)

可以出走(가이출주)

彼女之謁(피녀지알)

可以死廢(가이사폐)

優哉游哉(우재유재)

聊以卒歲(요이졸세)

공자는 노래를 부르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행장을 꾸려 노나라를 떠났다. 자로와 염유가 노나라의 벼슬을 버리고 공자의 뒤를 따랐다. 이때부터 노나라는 다시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후세의 사관이 시를 지어 이 일을 두고 노래했다.

붉은 연지가 예리한 창검보다 강했던 이유는

교묘한 여미의 계략 때문만은 아니었고

국세가 쇠약해질 운명은 하늘의 명 때문이었으니

어찌 노나라가 홀로 패업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幾行紅紛勝鋼刀(기행홍분승강도)

不是黎弥巧計高(부시여미교계고)

天運凌夷成瓦解(천운능이성와해)

豈容魯國獨甄陶(개용노국독견도)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다. 위영공(衛靈公)은 기뻐하며 공자 일행을 맞이하고 나서 공자에게 싸움에 임하는 진법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이 구(丘)는 싸움에 대한 학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 공자가 다시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가면서 광읍(匡邑)을 지나게 되었다. 광읍의 백성들이 양호와 비슷하게 생긴 공자의 용모를 보고 양호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서 몰려와 공자의 일행을 둘러쌌다. 자로가 앞으로 나가 대항해서 싸우려고 하자 공자가 말리며 말했다.

「내가 광읍의 사람들에게 원수 진 일이 없는데 이렇듯 사납게 우리를 향하여 달려드는 이유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참으면 스스로 오해가 풀릴 것이니 잠시 기다리도록 하라!」

공자는 즉시 그 자리에 앉더니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그때 위영공의 명을 받은 사자가 공자의 뒤를 쫓아와서 돌아오라는 영공의 유지를 전했다. 그때서야 광읍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공자에게 사죄를 하고 물러갔다. 공자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가서 위나라의 현인 거원(蘧瑗)①의 집에 묵었다.

4. 矯命駕車 食桃啖君(교명가거 식도담군)

- 미자하(彌子瑕)가 위영공의 어가를 훔쳐타고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이다. -

한편 남자(南子)라고 불리던 위영공의 부인은 송나라 출신의 여인이었다. 용모는 아름다웠지만 행실은 음탕한 여자였다. 그녀는 위영공에게 시집을 오기 전 송나라에서 살고 있었을 때 이미 송나라의 공자조(公子朝)와 사통하고 있었다. 공자조 역시 남자로써 찬하의 미남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미남미녀가 서로 사랑하여 그 사이가 부부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 남자가 위영공에게 시집을 와서 괴외(蒯聵)②라는 아들을 낳아, 지금은 이미 장성하여 위나라의 세자가 되었음에도 옛날 송나라의 공자조와의 옛정을 그 때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위나라에는 이름이 미자하라는 또 한 사람의 천하미남이 살고 있었다. 평소에 위영공의 총애을 얻게 된 미자하는 그 곁에서 모시게 되었다. 위나라의 법에 군주의 수레를 훔쳐 타는 사람은 발을 잘랐다. 그런데 어느 날 미자하의 모친이 병이 나서 집안사람이 밤중에 와서 알리자 미자하는 군주의 명이라고 속이고 어가를 타고 모친에게 달려갔다. 위영공이 듣고 미자하가 어질다고 하면서 말했다.

「참으로 효자로다! 어머니를 뵙기 위해 다리를 잘리는 죄를 짓는 일도 마다않는구나!」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복숭아를 먹다가 남긴 반을 영공의 입에 넣어 주자 영공이 즐겨 받아먹으며 곁의 사람들에게 미자하의 충성을 자랑하며 말하였다.

「자하가 나를 사랑하기를 이렇듯 극진히 하는구나! 복숭아를 먹다가 그 맛이 별미라서 차마 혼자 다 먹지 못하고 나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해주었도다!」

나라의 군신들이 속으로 웃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영공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리기 시작한 미자하는 못하는 짓이 없었다. 영공이 자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남자가 질투를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가끔가다가 송나라의 공자조를 위나라로 불러 남자와 만나게 해 주었다. 더러운 소리가 궁내에 가득 찼음에도 영공은 전혀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세자 괴외가 자기 모친의 음행을 심히 부끄럽게 생각하여 가신 중에 희양속(戱陽速)이라는 사람을 자기가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릴 때 궁 안으로 데리고 가서 남자를 죽여 공실의 추문을 없애려고 하였다. 남자가 사전에 괴외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영공에게 세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영공이 듣고 괴외를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괴외는 위나라에서 쫓겨나자 송나라로 들어갔으나, 송나라는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괴외는 할 수 없이 당진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 영공이 괴외의 아들 첩(輒)을 세자로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우리 군주와 만나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사방의 군자들은 필히 우리 군주의 부인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부인께서 공자를 뵙고 싶어합니다.」

공자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사양하다가,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들어가 남자를 만났다. 공자가 부인은 휘장 안에 앉아 있었다. 공자는 남자를 향해 북면하여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드렸다. 남자도 휘장 안에서 절을 두 번 올렸다. 부인의 허리에 찬 패옥들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공자가 부인을 만나고 나와서 말했다.

「내가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이왕 만나게 되었으니 예로 대해 주었을 뿐이다.」

자로가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공자가 하늘에 맹세를 하며 말했다.

「내가 한일이 만일 잘못이라면 하늘이 용납하지 않으리라! 하늘이 용납하지 않으리라!」

위나라에 돌아와 머문 지 한 달여가 되었을 때, 영공이 남자와 같은 수레를 타고 환관(宦官) 옹거(雍渠)를 시자(侍者)로 태워 궁문을 나섰다. 영공이 공자를 다른 수레에 타게 하고 뒤따르게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시내를 지나갔다. 위영공 부처와 공자가 한 수레를 타고 시정을 지날 때 백성들이 보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말은 다음과 같았다.

미색은 군주의 수레에 같이 타고

덕인은 뒷수레에 타고 따르는구나!

同車者色耶(동거자색야)

從車者德耶(종거자덕야)

공자가 노래 말을 듣고 한탄하였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예쁜 여인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공자가 위영공의 행동에 실망하여 위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로 갔다. 이 해에 노정공이 죽었다. 이 때가 노정공 재위 15년으로 기원전 495년, 공자의 나이 57세 되던 해였다.

5. 在陳絶糧(재진절량)

- 진나라에서 양식에 떨어져 곤궁한 처지에 빠진 공자 -

공자가 다시 행장을 꾸려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가서 제자들과 큰 나무 밑에서 예에 대해 공부했다. 송나라의 사마 환퇴(桓魋)도 역시 그 잘 생긴 용모로 송경공(宋景公)에게 총애을 받아 얼마 전에 송나라의 요직에 임용되었기 때문에 공자가 송나라에 머무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환퇴가 사람을 시켜 그 큰 나무를 베어 버리고 이어서시 공자를 죽이기 위해 별도로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환퇴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공자는 옷을 바꾸어 입고 몰래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를 경유하여 당진(唐晉)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공자의 일행이 하수에 이르렀을 때 조앙(趙鞅)이 당진의 현신 두주(竇犨)③와 순화(舜華)④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였다.

「새나 짐승들도 같은 동류는 서로 상하게 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사람이 하는 짓이 금수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공자는 즉시 당진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다. 공자가 위나라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위영공이 죽었다. 백성들이 괴외의 아들인 세자 첩을 세워 위군으로 삼았다. 이가 위출공(衛出公)이다. 영공에게 쫓겨난 괴외도 역시 당진의 도움을 얻어 양호(陽虎)와 함께 척(戚) 땅을 습격하여 그것에 머물면서 복국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위나라는 아버지와 자식간에 군위를 놓고 다투는 형세가 되었다. 당진은 괴외의 편을 들었고 제나라는 첩의 편을 들었다. 부자지간이 서로 싸우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생각한 공자는 다시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갔으나 그곳도 여의치 않아 채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공자가 진(陳)과 채(蔡) 두 나라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초소왕은 사람을 보내 공자를 초빙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진과 채 두 나라 대부들이 모여서 의논하며 말했다.

「공자는 현자(賢者)다! 그가 비난하고 풍자하는 것들은 모두가 제후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대해서이다. 그는 오랫동안 진(陳)과 채(蔡) 두 나라를 오가며 머물면서 그의 뜻과는 맞지 않은 생활을 영위한 우리 두 나라의 대부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대국인 초나라가 오늘 공자를 초빙하는 목적은 그를 쓰기 위해서인데 그렇게 되면 진과 채 두 나라의 국정을 맡고 있는 우리들이 위험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즉시 군사들을 동원하여 들판에서 공자를 포위하고 초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막았다. 진채 두 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양식이 떨어진지 3일이 지났지만 공자는 거문고의 현을 뜯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의 개봉부(開封府)⑤와 진주(陳州)⑥의 경계 상에 상락(桑落)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땅에 아직 높은 고대가 남아 있다. 고대의 이름을 액대(厄臺)라 하는데 당시에 공자가 초나라로 가다가 양식이 떨어져 액난을 당하자 그 곳에 앉아 거문고를 뜯었던 곳이다. 송조 때의 유자 유창(劉敞)⑦이 이때 공자가 당한 어려운 처지에 대해 시를 지어 노래했다.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여행객이여!

3일을 굶어 죽음이 목전에 달했구나!

하늘이 목탁을 연마시키려는 뜻이라고 했지만

어찌 어리석은 진채의 신하들에게 시켰단 말인가?

四海棲棲一旅人(사해서서일여인)

絶糧三日死生隣(절량삼일사생린)

自是天心勞木鐸(자시천심노목탁)

豈關陳蔡有愚臣(개관진채유우신)

공자의 일행이 양식이 없어 계속 고통을 당하고 있다가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신장이 9척이나 되는 괴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몸에는 비단 옷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쓴 괴인이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손에는 과를 들고서 공자를 향하여 큰소리를 치며 꾸짖자 주위가 그 목소리로 찌렁찌렁 울렸다. 자로도 역시 손에 과를 들고 들판으로 나가 그 대한을 상대하여 싸웠다. 그 대한의 힘은 대단하여 자로가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 공자가 옆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한참 살펴보더니 자로를 향해 소리쳤다.

「자로야 그 대한의 옆구리를 찔러라!」

자로가 공자의 말을 듣고 들고 있던 극으로 괴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괴한은 갑자기 힘이 빠지더니 손이 늘어지며 이어서 땅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괴한은 즉시 점어(鮎魚) 즉 메기로 변했다. 제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무릇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나이가 들면 그 기가 쇠하게 되어 많은 정령들이 변해 요괴가 되는 법이다. 그 요괴를 이미 죽였으니 어찌 괴이타 하겠는가?」

공자가 명하여 제자들에게 그 메기를 삶도록 하여 허기를 채우게 했다. 제자들은 메기를 삶아 먹고 기운을 차린 뒤 모두 기뻐하며 말했다.

「하늘이 우리가 굶어 죽지 않도록 메기를 보내 주셨구나!」

기운을 차린 공자는 자공을 초나라에 보내 진채 두 나라 군사들의 방해를 받아 초나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다. 초소왕이 군사를 보내 공자를 맞이해 갔다. 공자는 비로소 진(陳)과 채(蔡) 두 나라 사이에서 빠져 나와 초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자를 맞이한 초소왕은 그를 천사(千社)⑧ 땅에 봉하려고 했다. 초나라의 영윤(令尹) 자서(子西)⑨가 말했다.

「왕의 신하 중 제후들에게 사신으로 보낼만한 사람이 자공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의 신하 중 재상으로서 보필 받을만한 사람 중 안회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이 거느린 장수 중 자로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의 신하 중 재여(宰予)만큼 일을 잘하는 장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초나라의 조상이 주왕으로부터 처음 봉해졌을 때⑩ 그 봉지는 사방 오십 리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공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치국(治國) 방법에 통달하여 주공(周公)⑪과 소공(召公)⑫의 이룬 공업에 밝으니, 만일 왕께서 공자를 불러 쓰신다면 어찌 초나라가 당당하게 세세대대로 다스려온 사방 수천 리의 땅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주문왕(周文王)은 풍(酆)에 주무왕은 호(鎬)⑬에 도읍하여 사방 백리의 땅에서 출발했으나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공자가 우리 초나라에서 봉함을 받아 그 땅을 얻게 되면 어진 제자들의 보좌를 받아 나라가 크게 번성할 것인데 그것은 우리 초나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소왕이 자서의 말을 듣고 공자를 봉하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그해가을 초소왕이 성보(城父)로 출전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초나라에 미치광이 접여(接與)⑭가 공자의 곁을 지나가며 노래를 불렀다.

鳳兮 鳳兮(봉혜, 봉혜)

봉황새야! 봉황새야!

何德之衰(하덕지쇠)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해 졌던 말인가?

往者不可諫兮(왕자불가간혜)

지난날의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來者猶可追也(래자유가추야)

앞날의 잘못이야 피할 수 있으리!

已而已而(이이,이이)

그만두어라!

今之從政者殆而(금지종정자태이)

지금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위태로울 진데!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접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히 몸을 피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가 없었다.

노애공 6년 기원전 489년은 공자의 나이 63세 때다. 그 해에 공자가 초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돌아갔다. 위출공이 공자를 등용하여 위나라의 국정을 맡기려고 하였으나 공자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 노나라는 계손사가 죽고 그의 아들이 비(肥)가 그 뒤를 이어 상국이 되었다. 계손비(季孫肥)가 사람을 보내어 계손씨 종족으로 공자를 따라 나선 염유(冉有)를 불렀다. 공자가 그의 제자인 염유를 따라 노나라로 돌아갔다. 노나라는 돌아온 공자를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한 대부의 예로써 대했다. 공자의 제자로써 자로(子路), 자고(子羔) 두 사람은 위나라에 남아 벼슬을 하고 자공(子貢), 염유(冉有), 유약(有若), 복자천(宓子賤)은 노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이것은 모두 나중의 일이다.

6. 齊女墳(제녀분)

- 고향을 그리다가 향수병에 걸려 죽은 합려의 며느리 소강(小姜) -

한편 오왕 합려는 초나라 군사를 파한 이래로 그 이름이 중원에 진동하게 되었다. 오나라로 돌아온 합려는 그 후로 즐거운 일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궁궐을 크게 증축하고 다시 도성 안에 별도로 장락궁(長樂宮)이라는 별궁을 축조하고 고소산(姑蘇山) 자락에 높은 누각을 지었다. 고서산(姑胥山)의 북동쪽 30리 되는 곳에 산성을 쌓고 오도의 서문(胥門) 밖 굽이쳐 돌고 도는 계곡 길을 따라 고소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뚫었다. 봄과 여름에는 성 밖의 고소산성에서, 가을과 겨울에는 도성 안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옛날 월나라에 의해 침략을 당한 일을 기억해 낸 합려는 그들을 정벌할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초와 제 두 나라가 통호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합려가 노하여 말했다.

「제와 초가 수호를 한다고 하니 이것은 우리 오나라 북쪽 변경의 우환 거리가 새로 생겼음이다.」

합려가 우선 제나라를 정벌한 후에 월나라를 치려고 했다. 상국 자서가 합려에게 말했다.

「이웃나라끼리 하는 수호는 늘상 있는 일입니다. 제나라가 아직은 초나라를 도와 우리 오나라에 해로움을 끼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갑자기 군사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정벌할 수 없습니다. 오늘 태자파의 원비께서 돌아가셨음에도 아직 그 계실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대왕께서는 사자를 제나라에 보내 태자의 혼사를 구하시어 제나라와 수호를 맺으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제나라가 우리의 청혼을 거절하면 그때 가서 정벌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합려가 자서의 말을 쫓아 대부 왕손락(王孫駱)을 사자로 제나라에 보내 태자파의 혼사를 청하도록 했다.

그때는 이미 나이가 70이 넘어 기력이 쇠잔하게 된 제경공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스스로 일을 주재 할 수 없었다. 제나라의 궁중에는 시집을 가지 않은 여자아이는 단지 어린 갓난 여아 한 명뿐이었는데 그 여아는 도저히 시집을 보낼 수 없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그 때는 제나라에는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현명한 신하도 없었고 그렇다고 오나라의 공격을 막아 낼만한 장수도 또한 없었다. 그래서 오나라의 청을 거절할 경우 그들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와서 옛날에 초나라가 입은 전화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제경공은 초나라와 맺은 수호에 대해 후회막급했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라 어쩌는 수가 없었다. 모사 여미도 역시 제경공에게 오나라의 청혼을 받아들여 그들의 분노를 사면 안 된다고 말했다. 경공이 할 수 없이 그의 나이 어린 딸 소강(小姜)을 오나라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왕손락이 오나라로 돌아가 합려에게 제나라가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복명했다. 합려가 다시 왕손락을 제나라에 보내 폐백을 예물로 바치게 하고 소강을 맞이해 오도록 했다. 경공은 나이 어린 딸을 매우 사랑했지만 오나라도 매우 두려워하여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며 말했다.

「만약 평중이나 양저가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어찌 한갓 오나라 따위로 걱정을 하겠는가?」

경공이 대부 포목(鮑牧)을 향해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과인을 위해 나의 어린 딸을 오나라에 데려다 주고 오기 바라오! 소강은 나의 사랑하는 어린 딸이니 오왕에게 잘 보살펴 주도록 부탁하시오!」

포목과 왕손락이 제나라의 어린 소강을 모시고 길을 떠날 때가 되자 경공이 친히 소강을 안아서 수레에 태우고 남문 밖까지 따라가 전송을 한 후에 돌아갔다. 포목이 소강을 모시고 오나라에 당도하여 오왕에게 제후가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포목은 또한 오자서가 어진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와 교분을 맺고 서로 두터운 우정으로 사귀게 되었다.

한편 소강은 나이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태자파와 혼인을 한 후에도 그녀는 마음속으로 오직 부모 생각만 하게 되어 매일 밤낮으로 흐느껴 울기만 했다. 태자파가 계속 달랬지만 소강은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다가 결국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게 되었다. 합려가 듣고 불쌍하게 여겨 즉시 북문의 성루를 개조하여 극히 화려하게 꾸민 다음 그 이름도 제나라를 볼 수 있다는 뜻의 망제문(望齊門)이라 고치고 소강에게 명하여 그 위에 올라 놀 수 있도록 했다. 소강이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북쪽을 쳐다보았으나 제나라가 보이지 않자 마음속의 슬픈 마음이 더욱 깊어져 그녀의 병은 더욱 심해졌다. 그녀가 죽음에 임하여 태자파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첩은 우산(虞山)⑮의 꼭대기에 오르면 저희 제나라가 있는 동해가 보인다 하니 제가 죽으면 그곳에 묻어 주어 만약에 혼백이 있다 한다면 그나마 한 번 제나라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자파가 그 부왕인 합려에게 말하여 소강을 우산의 꼭대기에 상자 지냈다. 지금도 상숙현(常熟縣) 북쪽의 우산 꼭대기에는 소강의 무덤이 있고 또한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바로 그녀가 죽어서 나마 제나라를 쳐다 볼 수 있게 세운 정자다. 명초의 장홍(張洪)이라는 시인이 《제녀분(齊女墳)》이란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다.

남풍은 사납게 불고 북풍은 잔잔한데

장강의 야심 많은 오나라가 제나라에 청혼을 했다.

국경을 넘을 때 황금 천냥을 주어 보내겠지만

도중에 흘린 눈물은 만 번도 더 되었으리라!

南風初勁北風微(남풍초경북풍미)

爭長諸姬復娶齊(쟁장제휘부취제)

越境定須千兩送(월경정수천양송)

半途應拭萬行啼(반도응식만행제)

고향이 그리워 먼 고대에도 마다 않고 올랐고

한을 품고 묻힌 무덤이 낮아 일어나기 싫다 했다!

저 늘어진 잡초에 맺힌 이슬은 제녀의 눈물이러니

누가 그녀의 눈물로 그녀의 고향 땅을 적셔줄꼬?

望鄕不憚登臺遠(망향불선등대원)

埋恨惟嫌起冢低(매한유혐기총저)

蔓草垂垂猶泣露(만초수수유읍로)

倩誰滴向故鄕泥(천수적향고향니)

태자파가 제녀를 그리워 하다가 그 역시 병이 들어 얼마 있지 않아 그 뒤를 따라 죽었다.

7. 闔閭敗死(합려패사)

-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합려 -

태자가 죽자 합려는 여러 공자 중에서 택하여 태자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자서를 불러 상의하려고 했다. 그때 전태자파에게는 전부인에게서 얻은 부차(夫差)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미 26세의 나이가 된 부차는 타고난 풍채가 영웅의 기상이 있어 한 사람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부차는 조부 합려가 후사를 세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자서에게 달려가 청했다.

「나는 태자였던 부친의 적장자입니다. 세자를 다시 세운다면 내가 아니면 누구를 세울 수 있겠소? 내가 태자가 되고 안 되고는 상국의 한 마디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자서가 부차를 태자로 천거하겠다고 허락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합려가 자서를 불러 태자를 세우는 일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자서가 합려에게 말했다.

「후계는 적자로 세워야만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적자인 태자는 불행히도 재위에 오르기도 전에 죽었지만 아직 그의 적자인 부차가 있습니다. 」

「내가 부차의 생김새를 보니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인자하지 못하오. 그에게 후사를 넘겨주었다가 사직을 지키지 못할까 걱정이오.」

「부차는 신의로써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예의에 밝습니다. 또한 부친이 죽으면 그 아들이 뒤를 잇게 됨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법도입니다. 어찌 의심하십니까?」

「과인이 경의 말을 따르겠으니 경은 정성을 다하여 부차를 보좌하도록 하시오!」

합려는 즉시 부차를 태손으로 세운다고 공포했다. 부차가 자서의 집에 들려 머리를 숙여 감사의 말을 올렸다.

주경왕(周敬王) 24년 즉 기원전 495년 합려는 나이가 이미 들어 성격이 더욱 조급해졌다. 월나라에서는 윤상이 죽고 그의 아들 구천이 뒤를 이었다는 소식을 전해졌다. 합려가 즉시 월나라가 상을 당해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공격하려고 했다. 자서가 말했다.

「월이 비록 우리 오나라를 기습한 죄는 있지만 그들이 상을 당한 틈을 타서 하는 공격은 상서롭지 못한 짓입니다. 마땅히 그들이 상을 마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합려가 듣지 않고 자서와 태손 부차를 오도에 남아 도성을 지키라 하고 자기는 백비(伯嚭), 왕손락(王孫駱), 전의(專毅) 등과 함께 오나라의 정예 군사 3만 명을 동원하여 오도의 남문으로 나가 월나라를 바라보고 출병했다. 오나라의 침략을 받은 월왕 구천은 친히 군사를 독려하여 대장에는 제계영(諸稽郢)을, 선봉에는 영고부(靈姑浮)를, 주무여(疇无餘)와 서안(胥犴)은 각각 좌우익으로 삼아 북쪽으로 나와 취리(檇里)⑯에서 오군과 조우했다. 월군은 오군 진영 10리 앞에 진영을 세워 대치 상태로 들어갔다. 두 나라 군사들은 서로 몇 번에 걸쳐 전투를 벌렸으나 승부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합려가 대노하여 즉시 오나라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대산(五臺山) 기슭으로 진영을 옮기고는 월나라 군사들이 해이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모든 군사들에게는 명령 없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경계령을 내렸다. 구천이 높은 고지에 올라 오나라의 진영을 살펴보았다. 오군 진영이 대오가 정연하고 과갑(戈甲)이 정예한 모습을 보고 제계영에게 말했다.

「적군의 군세가 매우 성하니 결코 가볍게 움직이면 안 되겠다. 계략을 세워 오나라의 진영을 교란시켜야만 하겠다!」

구춴은 즉시 대부 주무여와 서안을 시켜 결사대를 조직하게 했다. 그는 결사대를 두 대로 나누어 좌대 5백 명에게는 창을, 우대 5백 명에게는 극을 들게 하여 고함을 크게 지르면서 오나라 진영을 향하여 돌진하게 했다. 오나라 진영에서는 월나라의 결사대가 돌격해 오는 모습을 보고도 전연 흐트러지지 않고 진영 안에 있던 병사들이 노궁을 들고는 철벽과 같은 견고한 진채에 의지하여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월나라의 결사대들은 세 번이나 오나라 진영으로 돌격을 감행했으나 도저히 오군의 방어벽을 돌파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자기 진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구천이 다른 방법을 궁리해 봤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제계영이 구천에게 조용히 말했다.

「죄수들을 한번 써 보시지요?」

구천은 제계영이 말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다음 날 비밀리에 군령을 내려 군중에서 죄를 지어 참수형에 처해지게 될 죄수들을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하자 그 수효가 300 명에 달했다. 죄수 300명을 3대로 나누어 모두 웃통을 벗게 한 다음 칼 한 자루씩을 목덜미에 꽂고 행군하여 오군 진영 앞에 멈추게 했다. 죄수들의 맨 앞에 선 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군주이신 월왕께서 자기의 힘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상국인 오나라에 죄를 얻은 결과 오왕께서 친히 군사를 내어 우리를 토벌하러 오셨습니다. 신등은 감히 목숨을 바쳐 원컨대 월왕을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 죄 값을 치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맨 앞의 죄수가 말을 마치자 그 뒤에 도열하고 있던 죄수들이 차례대로 가지고 있던 칼로 자기 목을 찔러 죽기 시작했다. 오나라 병사들로써는 이러한 광경을 본적이 없어 심히 기괴하게 생각하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 광경을 주시하여 보고서는 서로 간에 말을 전했으나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오군의 진영이 월나라의 죄수들의 자살 소동으로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고 이어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자 주무여와 서안이 거느린 좌우 결사대가 각기 방패와 단검을 들고 휘파람 소리를 내며 돌진해 왔다. 오나라 군사들의 마음이 황망해져 대오가 흩트려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구천이 본부의 대군과 제계영의 우군 및 영고부의 좌군을 이끌고 월나라의 좌우 결사대의 뒤를 따라 오나라의 진영에 돌격을 감행했다. 오나라의 왕손락이 결사적으로 제계영의 월나라 우군을 막았다. 영고부도 장도를 들고 오나라 진영에 뛰어 들어 좌충우돌하며 유린하다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오왕 합려를 발견했다. 장도를 휘두르며 합려에게 달려든 영고부는 합려의 등 뒤로 다가가서 번개 같이 장도를 휘둘러 합려의 오른 발목을 자르려고 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칼이 빗나가 단지 합려의 발가락 몇 개를 자를 수 있었다. 영고부의 칼에 합려의 신발이 벗겨져 수레 밑으로 떨어졌다. 합려의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 마침 전의가 군사를 이끌고 당도하여, 합려의 목숨을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의는 영고부의 맹공을 막아내면서 합려를 구하느라 몸에 중상을 입었다. 왕손락은 합려가 부상을 당했음을 알고 감히 제계영과의 싸움을 계속할 생각을 버리고 군사를 황급히 거두어 퇴각시켰다. 승세를 탄 월나라 군사들이 뒤를 추격하면서 오군의 참살했다. 이 싸움으로 오나라 군사들은 반수 이상이 전사했다. 합려도 영고부가 휘두른 장도에 발가락을 잘려 몸에 중상을 입고 즉시 군사를 돌려 오나라 진영으로 회군했다. 영고부는 합려의 피 묻은 신발을 주워 구천에게 바치자 구천이 크게 기뻐했다.

오왕 합려는 나이가 이미 늙어 부상으로 인한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다 7리쯤 갔을 때 큰 소리를 한번 외치더니 숨어 넘어가 죽었다. 백비가 합려의 시신을 모시고 먼저 앞서고 왕손락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병을 막으며 서서히 회군하여 오도에 당도했다. 월나라 군사들도 역시 더 이상 오군의 뒤를 추격하지 않았다. 후의 사관이 합려가 쉴 새 없이 군사를 동원하여 싸움을 일으켜 전장에서 화를 당해 죽음에 이르게 된 일에 대해 시를 지어 논했다.

초는 무찌르고 제는 제어 했다고 기고만장하다가

다시 월나라를 넘보아 군사를 일으켰다.

전쟁을 즐기다가 종내에는 싸움 중에 목숨을 잃으니

일이란 순리에 따라야지 날뛰면 안 되는 법이니라!

破楚能齊意氣豪(파초능제의기호)

又思呑越起兵刀(우사탄월기병도)

好兵終在兵中死(호병종재병중사)

順水叮嚀莫放篙(순수정녕막방고)

오나라 태손 부차가 성 밖으로 나와 합려의 시신을 맞이하여 돌아와서 상복을 입고 장례를 주재하고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 합려를 파초문(破楚門) 밖의 해용산(海涌山)에 장사 지내기 위해 공인들 징발하여 산허리에 커다란 굴을 뚫었다. 이어서 전제가 합려를 위해 왕료를 죽일 때 사용했던 어장검을 같이 묻고 그 외에 칼과 갑옷 6천 점을 부장했다. 또한 금과 옥으로 만든 노리개를 무덤 안에 가득 채워 합려의 시신과 함께 묻고 나서 무덤 공사를 위해 징발했던 공인들을 모두 죽여 같이 순장했다. 공사가 끝난 3일 후에 합려의 능을 멀리서 쳐다본 어떤 사람이 그 위에 하얀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합려의 묘가 있는 산을 호구산(虎丘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식자들은 백호가 나타나 능을 지킨 것은 금은보화의 기운이 나타난 징조라고 했다. 후에 진시황이 사람을 시켜 합려의 묘를 파헤쳐 어장검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그때 칼을 찾기 위해 판 곳은 바로 깊은 연못이 되어 지금은 그곳을 호구검지(虎丘劍池)라 부르고 있다. 합려를 구하다 중상을 입은 전의도 얼마 있지 않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결국은 죽었다. 그의 묘도 호구산 후면의 합려의 곁에 묻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부차가 그의 조부인 합려의 장례를 마치고 그의 장자 우(友)를 태자로 삼았다. 부차가 그의 시종 열 사람에게 명하여 서로 번을 갈아 가며 궁 안의 뜰 안에 서 있다가 부차가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큰 소리로 부차의 이름을 부르며 외치게 했다.

「부차야! 너는 월왕 구천이가 너의 조부를 죽인 원수임을 잊었느냐?」

그러면 부차는 즉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가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부차는 스스로 경계하고 근신하고자 했다. 부차는 오자서와 백비에게 명하여 일지의 군사를 이끌고 태호에서 수병을 조련하라고 명하고 다시 나머지 군사들은 영암산(靈岩山)에 활터를 만들어 활쏘는 연습을 시켰다. 삼년상이 끝나면 그 즉시 월나라를 공격하여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 그때가 주경왕 24년 즉 기원전 496년의 일이었다.

8. 六卿相攻 二卿奔齊(육경상공 이경분제)

- 당진의 6경이 서로 싸워, 그 중 2경이 제나라로 달아나다. -

그때 당진은 경공(頃公)이 나라를 잘못 다스렸음으로 육경들이 파당을 지어 권력을 다투느라 상호간에 싸움이 심했다. 중행인(中行寅)과 사길석(士吉射)은 서로 화목하여 두 집안이 혼사를 함으로써 서로 친하게 되자 한불신(韓不信)과 위만다(魏曼多)가 두 사람 사이를 시기했다. 순력에게는 이름이 양영보(梁嬰父)라고 부르는 총애하는 가신이 한 명 있었다. 순력이 그를 육경의 자리에 임명하려고 했다. 양영보는 순력의 총애를 믿은 나머지 중행인을 쫓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했다. 순력도 역시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상경 조앙(趙鞅)⑰에게는 먼 조카뻘이 되는 조오(趙午)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오는 한단을 식읍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오의 모친은 순력의 여동생이니 조오는 순력에게 생질이 되는 셈이었다. 그 전해에 위영공과 제경공이 작당하여 당진에 반기를 들자 조앙이 당진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위나라가 두려워하여 나라의 호구 5백 호를 바쳐 죄의 용서를 빌었던 적이 있었다.조앙이 위나라 백성들을 한단으로 옮겨 살게 하고 그들을 위나라에서 바친 공물이라는 뜻의 위공(衛貢)이라 불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앙이 5백 호의 위공들을 진양(晉陽)⑱으로 옮겨 그곳의 빈 땅을 채우려고 했다. 조오는 위공들이 자기의 명을 듣지 않을까 걱정하여 조앙의 명을 즉시 받들지 않았다. 자기의 명을 거역했다고 생각한 조앙이 노발대발하며 즉시 조오를 진양으로 유인한 후에 잡아서 죽였다. 조앙이 자기의 생질을 유인하여 살해했다고 화를 낸 중행인이 자신과 가까운 사길석과 상의하여 두 집안이 같이 힘을 합하여 조씨들을 공격하여 조오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조씨 문중에 동안우(董安于)라는 모신이 있었다. 그는 조앙이 조오를 잡아 죽일 때 진양에 있으면서 성을 지키고 있었다. 중행인과 사길석 두 집안이 힘을 합하여 장차 조씨들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들은 동안우는 그 즉시 강도로 달려와서 조앙에게 고했다.

「범씨⑲와 중행씨⑳가 서로 작당하여 란을 일단 일으키면 진압하기 힘들게 됩니다. 공께서는 마땅히 대비를 해야 합니다.」

「당진의 국법은 란을 먼저 일으킨 자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소. 그들이 먼저 란을 일으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움직여도 늦지 않소!」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많이 다치게 됩니다. 차라리 제가 혼자 그들을 먼저 공격했다가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동안우가 혼자 감당하겠습니다.」

조앙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동안우가 듣지 않고 사병들을 모아 무장을 시키고 중행인과 사길석이 동정을 살폈다. 두 사람은 조앙 측에서 사병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성안의 백성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동안우가 사병을 모아 무장시키고 있는 목적은 바로 우리를 해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종족의 군사를 일으켜 합친 후에 조씨들을 공격하기 위해 조씨부를 포위했다. 그러나 동안우가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씨 종족의 사병을 이끌고 두 종족들의 포위망을 뚫고 조앙을 호위하면서 조씨들의 종읍(宗邑) 진양성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두 집안의 군사들이 진양성까지 추격하여 공격해 오지나 않을까 걱정한 조앙이 성벽을 높이고 경비를 삼엄하게 했다. 순력이 한불신과 위만다를 불러 말했다.

「육경의 수장 중행인과 사길석이 주군의 명도 없이 조씨들을 제멋대로 작당하여 쫓아냈으니 앞으로 우리 당진의 정사는 모두 그 두 집안에 속하게 되지 않겠소?」

두 사람이 대답했다.

「어찌 주군의 명도 없이 란을 일으킨 죄를 물어 토벌하지 않으십니까?」

즉시 정공에게 달려가 중행인과 사길석의 죄를 고하고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청한 삼가의 수장들은 각기 그들 집안의 사병들을 동원하여 정공의 명을 앞세워 중행인과 사길석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행인과 사길석도 그들의 가병을 이끌고 결사적으로 대항했기 때문에 삼가의 군사들은 싸움에서 쉽게 이길 수 없었다. 삼가의 공격이 주춤해진 사이에 사길석과 중행인은 자기들의 근거지에서 나와 정공을 납치하기 위해 공궁으로 진군하자 한불신이 재빨리 사람을 시켜 시중으로 나가서 성안의 백성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게 했다.

「범씨와 중행씨가 모반하여 주군을 납치하려고 한다!」

백성들이 그 말을 믿고 각기 자기들 집에서 병장기를 들고 정공을 구하기 위해 달려 나왔다. 지씨, 한씨, 위씨등 삼가는 백성들의 도움으로 범씨와 중행씨의 병사들을 물리쳤다. 중행인과 사길석이 중과부적으로 싸움에서 패하여 조가(朝歌)로 달아나서 공실에 저항했다. 한불신이 정공에게 고했다.

「범씨와 중행씨가 먼저 란을 일으켜 우리들이 힘을 합하여 쫓아냈습니다. 조씨들은 대대로 우리 당진국에 커다란 공을 세운 집안입니다.마땅히 그 수장인 조앙을 불러 다시 옛날의 자리를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정공은 한불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즉시 진양으로 도망친 조앙을 불러 그의 작위를 돌려주었다. 순력의 총신 양영보가 중행인의 자리를 대신하여 육경의 자리에 앉고 싶어하자 순력이 양영보를 위해 조앙과 상의했다. 조앙이 다시 순력이 부탁한 일을 동안우에게 의견을 물었다. 동안우가 말했다.

「지금 우리 당진의 정사는 너무 많은 집안에서 관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에 양영보를 경으로 세운다면 그것은 곧 달아난 또 다른 중행인이나 사길석을 세우는 일과 같습니다.」

조앙이 동안우의 건의에 따라 순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기가 육경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은 동안우가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양영보가 노하여 순력에게 말했다.

「한씨와 위씨들이 조씨들과 한 무리가 되어 지금은 우리 지씨들만 고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씨들이 믿고 있는 바는 오로지 모신 동안우의 머리인데 어찌하여 동안우를 제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동안우를 제거할 수 있는가?」

「동안우가 먼저 사사로이 사병을 모집하여 무장을 시켰기 때문에 범씨와 중행씨들을 격분시켜 란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먼저 란을 일으킨 자를 논한다면 동안우가 그 첫 번째 입니다.」

순력이 양영보의 말을 듣고 조앙에게 가서 그 잘못을 따졌다. 조앙이 두려워하여 순력의 말을 전하자 동안우가 말했다.

「신이 옛날에 일이 잘못되면 모든 일은 제가 혼자서 감당하겠다고 맹세한 일이 있으니 신이 죽는다면 조씨 집안은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죽음은 곧 영원히 사는 것과 같습니다.」

동안우가 즉시 조씨부에서 물러 나와 자기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조앙이 동안우의 시신을 시정에 전시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게 만든 후에 사람을 순력에게 보내 고하게 했다.

「동안우가 이미 자기의 죄를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순력이 즉시 조앙과 결맹하여 서로가 해치지 않기로 했다. 조앙이 사람을 시켜 아무도 몰래 동안우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그의 신위를 조씨들의 종묘에 안치하여 조씨 문중에 대한 그의 충성에 보답했다.

중행인과 사길석이 조가에 오랫동안 머물자 당진에 반대하는 제후들이 그들의 힘을 빌려 당진을 공격하려고 했다. 조앙이 여러 번 군사를 내어 중행인과 사길석을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제(齊), 노(魯), 정(鄭), 위(衛) 등의 나라에서 양식을 보내 주어 두 사람의 군사들을 도왔기 때문에 조앙은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다.

중항씨와 범씨들이 조가에 의지하여 농성하기 시작하여 3년 만인 주경왕(周敬王) 30년 즉 기원전 490 년에서야 조앙이 한, 위, 지 삼가의 군사들과 힘을 합하여 조가를 다시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다. 중행인과 사길석이 조가에서 한단으로 도망치더니 다시 백인(柏人)㉑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백인성도 떨어지고 그 족인과 가신인 범고이(范皐夷)와 장유삭(張柳朔)은 모두 전사하고 예양(禮讓)만은 순력 즉 지력(智躒)의 아들 지갑(智甲)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예양은 지갑의 아들 지요(智瑤)에게 구명을 청하여 목숨을 구하고 이어 지씨(智氏)의 가신이 되었다. 중행인과 사길석은 백인성에서 도망쳐 제나라로 망명했다. 이로써 누대에 걸쳐 당진의 공실에 충성을 바치며 공을 세웠던 두 유력한 세가는 몰락하여 타국으로 망명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중행인은 순림보로부터 5대고 범길석는 사위(士蔿)로부터 7대에 해당했다. 순씨와 사씨들은 그 조종이 모두 당진의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대대세세로 이어져 왔으나 그 자손이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지금에 이르러 집안이 망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당진의 육경은 이후부터 조(趙), 한(韓), 위(魏), 지(智) 사경만 남게 되었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고 염선이 이를 두고 시를 지었다.

당진의 육경은 이합집산하여 남거나 망했으니

이는 모두 파벌을 지어 서로 힘을 다툰 탓이었다.

남은 네 가문의 마음은 더욱 급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두 가문을 남겨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六卿相幷或存亡(육경상병혹존망)

總是私門作主張(총시사문작주장)

四氏瓜分謀愈急(싸씨과분모유급)

不如留却范中行(불여유각범중행)

중행인과 범길석이 두 종족들을 이끌고 제나라에 망명한 해는 주경왕 40년 기원전 490년이었다.

9. 會稽之恥(회계지치)

- 회계산에서 오왕에게 항복하여 치욕을 당하는 월왕 구천 -

한편 이야기는 앞으로 다시 돌아가 주경왕(周敬王) 26년 즉 기원전 494년 봄 2월, 합려의 탈상을 끝낸 오왕 부차는 태묘에 고한 후에 온 나라의 모든 힘을 기우려 군사를 일으켜 자서를 대장으로 백비를 부장으로 삼아 태호로부터 수로를 이용하여 남하하여 월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오나라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여긴 월왕 구천이 군신들을 불러 대책을 세운 뒤에 군사를 이끌고 도성을 나와 오나라로 쳐들어 가 선발제인(先發制人)의 작전으로 오군을 막으려고 했다. 초나라 출신으로 월나라에 들어와 대부에 봉해진 자를 소백(少伯)이라고 부르는 범려(范蠡)가 군신들의 반열에서 나와 구천을 향해 말했다.

「오나라는 우리와의 싸움에서 그들의 군주가 전사했음을 수치로 여기고 그 원수를 갚고자 하늘에 두고 맹세를 하면서 탈상의 기일만을 기다린 끝에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오나라의 모든 국력을 쏟아 일제히 쳐들어오는 그들의 기세를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군사를 한 곳으로 모아 굳게 지키십시오.」

대부 문종(文種)은 자를 회(會)라 했는데 역시 반열 중에서 나와 말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만약 우리가 오나라를 높이고 우리를 낮추어 사과의 말을 올리고 화의를 청하면 오나라 군사들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연후에 별도의 계획을 세워 도모하십시오.」

「지키거나 아니면 원수의 나라와 화의를 하라고 하는 두 분의 말 모두는 우리가 취할 방도가 아니오. 무릇 우리 월나라와 오나라는 대대로 내려온 불구대천의 원수의 나라라, 그들이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음에도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

말을 마친 구천은 그 즉시 월나라 국내의 전 장정들을 동원한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수로를 이용하여 북쪽으로 나아가 태호로 진입하여 고소성을 기습하려고 했다. 월군을 태운 함선이 초산(椒山) 어귀에 이르자 오나라 군선이 나타나 교전에 들어갔으나 오군이 당하지 못하고 사상자 백 여 구를 남겨 두고 슬그머니 퇴각하기 시작했다. 구천이 승세를 타고 오군의 뒤를 추격하여 몇 리를 앞으로 나아가자 마침내 부차가 이끄는 오나라의 수군 본대와 조우했다. 두 나라 군사들은 포진을 수상에서 함선을 정열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에 마침내 교전에 들어갔다. 부차가 전투선의 선두에 서서 북채를 잡고 친히 북을 두드려 오군의 사기를 북돋우자 오군은 용기백배하여 사기가 충천했다. 두 나라 군사들이 어우러져 한참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북쪽에서 큰바람이 불고 파도가 휘몰아치는 와중에 자서와 백비가 각기 여황(餘皇)이라는 오나라의 가장 큰 전투선을 타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순풍에 돛을 올리고 짓쳐 오면서 강궁과 쇠뇌에 화살을 재어 월나라 함선을 향해 마치 우박이 쏟아지듯이 쏘아댔다. 월군운 바람을 안고 싸워야 했기 때문에 순풍을 타고 돌격해 오는 오나라 함선의 맹공을 막아낼 수 없어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군은 달아나는 월군의 뒤를 3대로 나누어 추격했다. 월나라 장수 영고부(靈姑浮)는 자기가 타고 있던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익사하고 서안(胥犴)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승승장구한 오군은 월군의 뒤를 쫓아 시살하는데 얼마나 많은 군사들이 죽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구천이 고릉(固陵)㉒으로 달아나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지만 오군이 뒤 따라와서 겹겹이 에워싸고 성안으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를 모조리 끊어 버렸다. 월왕을 고릉성에 가두고 포위망을 구축한 부차가 기뻐하며 말했다.

「10일도 못 가서 월나라 군사들은 모두 갈증이 나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부차는 고릉성 안의 산정에 맑은 샘물이 있고 샘물에는 또한 맛있는 물고기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구천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산정의 샘물에서 고기 수 백 마리를 잡아서 부차에게 선물로 가져다주라고 했다. 오왕 부차가 크게 놀랐다. 구천은 범려에게 고릉성에 남아 굳게 지키라 명하고 자기는 나머지 잔병을 데리고 부차가 방심한 틈을 타서 월나라 도성 부근에 있던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쳤다. 회계산으로 들어간 구천은 부상을 입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군사들을 점고하여 보니 고작 5천여 명에 불과했다. 구천이 보고 한탄했다.

「부왕 이래 30년 동안 이렇게 싸움에서 참패하기는 처음이로다! 범려와 문종 두 대부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이 이 지경이 되었구나!」

오나라 군사들이 기세를 올려 고릉성을 한층 더 세차게 공격했다. 자서는 고릉성의 오른 쪽에 백비는 왼 쪽에 진채를 치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고릉성을 공격했다. 범려가 고릉성의 위급함을 하루에 세 차례나 구천에게 고했다. 월왕이 크게 두려워하자 문종이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화의를 청하면 혹시 성사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구천이 말했다.

「오나라가 우리의 화의 요청을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나라의 태재 백비라는 위인은 재물을 탐하고 여자를 좋아하며 또한 남의 공을 시기하고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질투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서와 같이 오나라를 섬기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자서를 시기하고 있습니다. 오왕이 자서의 엄격함을 두려워하고 백비에 빠져 있습니다. 만약에 아무도 몰래 백비에게 항복하는 편지를 보내고 동시에 많은 재물로 백비의 환심을 사서 친하게 되면 백비는 우리가 요청한 화의를 오왕에게 전할 것이며, 오왕은 평소에 총애하고 있는 백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서가 비록 우리의 계책을 간파하고 막으려하겠지만 결국은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이 태재를 만나면 무엇으로 뇌물을 바치겠소?」

「군중에 없는 것은 여자입니다. 미녀를 힘껏 구하여 바쳐야 합니다. 만약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면 백비는 마땅히 우리가 바치는 미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구천이 밤을 도와 사람을 급히 도성으로 보내 가장 예쁜 궁중의 미녀를 뽑게 했다. 모두 여덟 명을 골라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얼굴은 예쁘게 단장한 미인을 준비한 후에 별도로 백벽 2십 쌍과 황금 천일을 준비하여 고릉성을 포위하고 있던 백비의 영채를 찾아 밤을 기다려 들어가 접견을 청했다. 백비가 처음에는 만나기를 거절하였으나 잠시 사람을 시켜 문종의 찾아온 행색을 살피게 했다. 이윽고 월나라의 사자가 그에게 바칠 물건을 가지고 왔다는 보고를 받더니 즉시 불러서 접견을 허락했다. 백비가 앉아서 문종을 맞았다. 문종이 무릎을 꿇고 월왕의 말을 전했다.

「저희 주군이신 구천께서 나이가 어려 무식한 소치로 대국을 섬기는데 소홀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저희 주군께서는 이미 후회해마지 않으시고 계십니다. 원하건대 월왕께서 나라를 들어 오나라의 신하가 되고자 하였으나 오왕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치 않으시고 받아 드리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월왕께서는 태재님께서 쌓은 공덕이 태산만큼이나 높고, 밖으로는 오나라를 지키는 간성이시며 안으로는 오왕 전하가 가장 신뢰하는 분임을 소문을 들어 아시고, 미천한 신하인 이 문종을 시켜 먼저 태재님의 영문에 머리를 조아려 청하옵건대 태재님의 천금같은 말씀 한마디를 빌려 오왕 전하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고자 이렇게 태재님을 뵈러 왔습니다. 비록 변변치 않은 예물이오나 너무 보잘것없다 허물하지 마시고 받아 주시옵소서. 이 후로는 마땅히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더 많은 예물을 준비하여 바치겠습니다.」

문종이 말을 마치고 뇌물의 목록을 적은 장부를 백비에게 바쳤다. 백비가 짐짓 얼굴에 화를 내는 듯한 기색을 띄우고 말했다.

「너희나라는 조석지간에 파멸하여 모든 월나라의 소유는 우리 오나라에 속하게 될 터인데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오히려 이런 구구한 물건으로 나를 회유하려고 하니 어리석은 짓이 아니냐?」

문종이 정색하고 백비에게 말했다.

「월나라가 비록 싸움에서 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회계에는 싸울 만한 군사가 5천 명 정도는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 이기지 못하더라도 창고에 쌓인 재화들은 모두 불에 태우고 몸은 타국으로 피신하게 되면 옛날 오나라의 침략을 당해 재물을 모두 불태우고 타국으로 피신한 초왕의 전례를 따르면 될 뿐인데 어찌 월나라의 모든 재물이 그리 쉽게 오나라의 소유가 된다고 하십니까? 게다가 설사 오나라가 월나라의 재물을 모두 소유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왕실의 소유가 되어 여러 제장들과 함께 태재에 돌아가게 되는 몫은 우리가 가진 재물의 십분의 일도 채 못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월나라에게 화의가 이루어지도록 주선해 주신다면 우리 군주님이 의탁하는 사람은 오왕 전하가 아니라 실제로는 태재님이 되어 봄과 가을에 매년 왕궁을 거치지 않고 먼저 태재부에 공물을 바치겠습니다. 그리되면 태재님 혼자서 월나라의 재물을 누리시게 되니 다른 장수들은 얻는 재물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궁지에 몰린 맹수는 마치 성난 황소와 같아 성을 의지하여 결사 일전한다면 승리도 결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백비가 문종의 말이 가슴에 닿아 부지중에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문종이 다시 손을 들어 미인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바치며 말했다.

「이 여덟 명의 미인은 모두 월나라 궁전에서 선발하여 데려왔습니다. 저희 주군이 목숨을 구하는 은혜를 입게 된다면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해서 민간에 있는 미인들을 다시 구해 바쳐 태재님의 시중을 들도록 하겠습니다.」

백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종을 향해 말했다.

「대부가 우영의 자서에게 가지 않고 내가 지휘하는 좌영으로 달려 온 이유는 내가 남의 위험을 이용하여 해코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오. 내가 내일 아침 대부를 오왕 앞으로 인도하여 지금 의논하는 했던 바를 대왕께 청하여 허락을 얻도록 해보겠소!」

백비는 그 즉시 월나라에서 보내 온 미녀와 보화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문종을 자기의 진영에 머물게 하면서 손님의 예로써 대했다. 다음 날 아침 백비가 문종과 함께 중군에 있던 부차를 찾아가 접견을 청했다. 백비가 먼저 부차가 묶고 있는 막사에 들어가 준비한 대로 월왕 구천이 대부 문종을 시켜 항복을 청해 왔다고 보고했다. 부차가 얼굴색을 바꾸어 화를 내며 말했다.

「월과 우리 오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라 어찌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이오?」

「대왕께서는 옛날에 손무가 한 말을 잊으셨습니까? 군사는 곧 흉기라 잠시 사용하는 일은 가하나 오랫동안 쓸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월나라가 우리 오나라에 죄를 지었음으로 인해 그들이 우리를 받들겠다고 항복을 청해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월왕 구천이 오나라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 그의 첩도 역시 오나라의 첩이 되는 법이옵니다. 월나라가 그들이 가진 보물과 진기한 집기들은 모두 우리 오나라에 바쳐 대왕께 청하는 목적은 종사나마 끊어지지 않고 계속 지낼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에서입니다. 무릇 우리가 월나라의 항복을 받아 드리는 일은 실제로는 이로움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월나라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우리가 너그럽다는 이름을 천하로부터 얻는 일입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으니 우리 오나라는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이 고릉성을 함락시킨 후에 궁지에 몰려 회계산으로 들어간 월왕을 쫓아가 꼭 죽이려고 하신다면 월왕은 종묘사직을 불사른 후에 처자를 죽이고, 나라의 진기한 보물들은 강물에 던진 후에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오나라에 끝까지 대항하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이 대왕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만 상하게 됩니다. 월왕을 죽임으로써 도대체 나라에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월나라의 사절로 왔다는 문종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막사 밖에서 대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차가 즉시 문종을 막사 안으로 불러들여 접견을 허락했다. 문종이 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기어서 부차 앞으로 나와 자기가 사자로 온 뜻을 다시 말하는데 그 태도가 공손하기가 그지없었다. 부차가 듣고 말했다.

「너의 군주 부부가 나의 신하와 첩이 된다고 청했다는데 과연 그들이 나를 따라 오나라에 가서 나를 모실 수 있다는 말인가?」

문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미 대왕의 신하와 첩이 되기를 청했는데 죽거나 살거나 대왕 옆에 있으면서 모시기를 어찌 마다 하겠습니까?」

백비가 문종의 말을 거들었다.

「구천 부부는 오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나라는 월나라를 용서했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월왕 부부를 우리 오나라에 포로로 잡아가는 실리까지 취할 수 있는데 대왕께서는 무엇을 더 얻으시려고 하십니까?」

부차가 즉시 월왕 구천의 항복을 받아 들였다. 마침 오왕 막사에 우영에 있던 사람이 있다가 부차가 월왕의 항복을 받아 드리는 모습을 보고 돌아가 오자서에게 보고했다. 자서가 급히 중군 막사로 달려가 부차의 곁에 서 있는 백비와 문종의 모습을 보았다. 자서가 얼굴에 노기를 가득 띄우며 부차를 향해 말했다.

「대왕께서는 이미 월나라의 항복을 받아 들이셨습니까?」

「이미 허락했소!」

자서가 놀라 연달아 큰 소리로 외쳤다.」

「불가, 불가한 일입니다.」

자서가 지르는 큰 고함 소리에 놀란 문종은 서 있던 자리에서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서 공손한 모습을 취하며 자서가 하는 말을 듣고자 했다. 자서가 부차에게 간했다.

「월과 오 두 나라는 서로 이웃해 있는 나라라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오나라가 월나라를 없애지 않는다면 월나라는 반드시 우리 오나라를 없애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우리가 섬진과 당진을 공격하여 싸움에서 이겨 그 땅을 얻었다 해도 우리는 그곳을 다스릴 수 없고 그들의 병거를 얻는다 해도 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월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얻는다면 우리는 그곳에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오나라의 사직에 이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포기하시면 안 되는 일입니다. 하물며 오왕 구천은 선왕 합려님을 돌아가시게 한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그 죽이지 않고 어찌 태묘에 들어가 선열 앞에 맹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부차가 자서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고 단지 백비의 얼굴만을 쳐다 볼 뿐이었다. 백비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상국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옛날 무왕께서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건국하실 때 제후의 나라들을 뭍과 물에 같이 봉하셨으니, 오와 월은 물로 서로 친하게 지내고, 섬진과 당진은 뭍으로 왕래하여 친선을 도모하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월 땅에 거할 수 있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배도 이용할 수 있음인데, 오와 월 두 나라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섬진(陝秦), 당진(唐晉), 제(齊), 노(魯) 등은 모두 뭍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내륙의 나라들이라 그들 각각의 나라에게 있어서는 모두 거 할 수 있는 땅이 되어 그들의 병거도 역시 사용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그 네 나라 역시 장차 한나라로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더욱이 선왕 합려님을 돌아가시게 한 원한만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나, 상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초나라는 부친과 형을 죽인 원수의 나라라, 우리의 선왕을 돌아가시게 한 월나라에 비할 바가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상국께서는 초나라를 멸하지 않고 그렇게 재빨리 초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였습니까? 오늘 월왕 부부가 모두 우리 오나라에 들어와 대왕을 곁에서 모시겠다는 일은 초나라가 겨우 미승(羋勝)을 받아들인 것과는 그 격이 다릅니다. 상국은 스스로 충효의 일을 행했으면서 오히려 대왕에게는 각박한 이름만을 얻게 하고자 하니 어찌 충신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부차가 백비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태재의 말이 옳소! 상국은 잠시 물러가 있도록 하시오. 월나라가 공물을 바쳐 오면 내 마땅히 그대에게도 나누어주리라!」

자서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하여 그 얼굴이 흙빛이 되어 한탄하며 말했다.

「내가 옛날 피리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지금은 참으로 후회되는 구나! 결국은 저런 망녕된 자와 일을 같이 하게 된 결과가 되어 버렸구나!」

오자서가 안타까워 한탄하는 말을 끊이지 못하면서 어쩌는 수 없이 부차의 막사를 나가면서 대부 왕손웅(王孫熊)을 보고 말했다.

「월나라는 10년이면 다시 일어 서게 되고 다시 십년이면 그들은 지금의 일을 교훈으로 삼아 일으킨 국력으로 우리 오나라의 궁정을 파괴하여 연못으로 만들 것이오!」

왕손웅은 오자서의 이 의미심장한 말을 믿지 않았다. 자서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며 자기의 영채인 우영으로 돌아갔다. 부차가 문종에게 명하여 월왕에게 가서 항복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전하게 하자 문종이 다시 오나라 중군 막사에 들려 감사의 말을 올렸다. 부차가 문종에게 월왕 부부가 오나라에 언제 올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문종이 대답했다.

「저희 주군께서 대왕께서 죽이지 않으시고 용서를 받은 은혜를 입어 잠시 도성으로 들어가서 한숨을 돌린 후에 월나라 도성의 모든 보화와 자녀들을 수습하여 오나라에 데려가 대왕께 바려고 하오니 대왕께서는 말미를 조금만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저희 주군이 대왕의 믿음을 저버린다 한들 어찌 대왕으로부터 죽음을 피해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부차가 허락하여 월왕은 5월 중순까지 오나라에 들어와 부부가 같이 오왕을 모셔야 한다고 약정했다. 부차가 이어 왕손웅을 시켜 문종을 호송하여 같이 월나라 도성인 회계로 들어가서 월왕이 약조한 기일에 맞추어 행차를 재촉하도록 했다. 태재 백비는 오나라 군사 만 명을 데리고 오산(吳山)에 주둔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기일이 지나도 월왕의 일행이 오지 않으면 월나라를 멸하고 돌아가 부차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부차는 대군을 이끌고 오도로 돌아갔다.

< 제 80회로 계속 >

주석

①거원(蘧瑗)/ 춘추 때 위나라의 대부인 거백옥(蘧伯玉)을 말한다. 이름은 원(瑗)이고 자가 백옥(伯玉)이다. 위헌공 18년 기원전 559년 위헌공이 그 신하에게 쫓겨나자 그도 란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위나라에 돌아와 위상공(衛殤公), 위양공(衛襄公)을 모시며 어진 이름을 얻었다. 영공의 서자 사어(史魚)의 추천으로 다시 조정에 나와 영공의 총애를 받았다. 오나라의 계찰(季札)이 중원을 유람하기 위해 위나라에 들려 「 거백옥이야 말로 군자로다!「라고 말했다.」 공자와 교유하였고 공자 논어에 두 번 나온다. 처음은 헌문(獻文) 26편에 나오고 두 번 째는 위영공 6편에 ‘ 군자로다,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에 나아가고, 도가 없을 때는 거두어 물러나는 구나!(君子再擧伯玉. 邦有道 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

②괴외(蒯聵)/ 위영공(衛靈公)의 아들로 위장공(衛庄公 : 재위 기원전 480 - 478년)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78년에 죽었다. 괴외가 태자였을 때 영공이 총애하는 남자를 죽이려고 하다가 미수에 끝나자 죽음을 피하여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다시 당진으로 들어가 조간자(趙簡子)에 몸을 의탁했다. 조간자는 괴외를 척읍(戚邑)에 머물게 했다. 영공이 죽자 그의 아들 첩(輒)이 뒤를 이었다. 첩이 위출공(衛出公)이다. 그는 위나라에 들어가 군위를 빼앗으려고 했으나 위나라 국인들의 저항으로 싸움에서 패하고 다시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동북에 있던 숙(宿) 땅으로 도망쳐 그 땅을 의지하여 지켰다. 기원전 480년 공회(孔悝) 등의 지원을 받아 위나라로 들어와 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아들 출공(出公) 첩(輒)은 노나라로 달아났다. 장공이 즉위하자 즉시 당진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조간자가 군사를 동원하여 위나라 도성을 포위하자 싸움 중에 살해되었다.

③두주(竇犨)/ 자는 명독(鳴犢)으로 춘추 대 당진의 대부다. 일찍이 어진 이름을 얻어 조간자를 도와 당진의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으나 후에 조간자(趙簡子) 앙(鞅)에 의해 피살되었다.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당진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황하의 나루에서 두명독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면서 <추조(陬操)>라는 노래를 작곡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④순화(舜華)/ 춘추 때 당진의 대부 두주와 어진 이름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간자를 도와 당진의 정권을 장악하도록 했으나 후에 조간자가 뜻을 얻은 후 살해했다. 공자가 듣고 두주와 함께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추조(陬操)>라는 곡을 만들었다.

⑤개봉부(開封府)/ 북송의 수도로써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를 말한다.

⑥진주(陳州)/현 하남성 진현(陳縣) 일대

⑦유창(劉敞)/ 북송의 문학가로 서기 1019년에 태어나서 1068년에 죽었다. 자는 원보(元父), 임강(臨江) 신유(新喩 : 지금의 강서성 신여현(新餘縣)) 사람이다. 인종(仁宗) 6년 서기 1046년에 진사에 급제했다. 지제고(知制誥)가 되어 거란으로 사신으로 갔다. 요나라 사람들은 유창이 천하의 산천도로와 기이한 짐승의 형상을 잘 아는 것을 알고 탄복했다. 사신의 임무를 끝내고 돌아와 양주(揚州)의 지현(知縣)이 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올라가 한림원(翰林院) 시독학사(侍讀學士)가 되었다. 다시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가 되었고 이어서 남경의 어사대(御史臺) 판관(判官)을 지냈다. 그가 죽자 생도들이 「공시선생(公是先生)」이라는 시호를 지어 바쳤다.

⑧천사(千社)/ 고대에 25 호(戶)를 일리(一里)라 하고 매 일리마다 제사를 지 낼 수 있는 제단을 만들어 이를 일사(一社)라 했다. 따라서 천사의 땅이라 함은 이만 오천 호가 있는 땅을 말한다.

⑨자서(子西)/ 초소왕(楚昭王) 때의 영윤 공자신(公子申)을 말함. 초평왕(楚平王)의 서제다. 평왕이 죽자 영윤 낭와(囊瓦)가 그를 초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따르지 않고 평왕의 어린 아들 세자 진(珍)을 세웠다. 소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혜왕(惠王) 2년 (기원전 487년)에 그는 오나라에 망명하여 살고 있던 태자건(太子建)의 아들 미승(羋勝)을 불러 소(巢) 땅에 봉하고 백공(白公)으로 호칭하였다. 후에 난을 일으킨 백공(白公) 미승(羋勝)에게 살해당했다.

⑩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제후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의 오등급의 작위를 주어 봉했다. 그 중 자(子)과 남(男)은 그 봉지가 사방 오십 리에 불과했다. 초나라는 자작(子爵) 국에 해당했다.

⑪주공(周公)/ 주무왕(周武王)의 동생 주공단(周公旦)을 말한다. 무왕을 도와 주나라 창업에 지대한 공을 세워 후에 노(魯)나라에 봉해졌다.

⑫소공(召公)/ 이름은 희석(姬奭)이며 주나라의 창업공신인 삼공(三公) 중에 한 사람이다. 삼공(三公)이란 태공 여상(呂尙), 주공(周公) 희단(姬旦), 소공(召公) 희석(姬奭)을 말한다. 어린 성왕(成王)을 위해 주공 단(旦)을 도와 주나라를 안정시켰다. 후에 연(燕)에 봉해졌다.

⑬풍호(酆鎬)/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서쪽의 주나라 도성이다. 풍(酆)은 풍수(酆水) 강안에, 호(鎬)는 호수(鎬水) 강안에 있었다.

⑭접여(接與)/ 춘추 때 초나라의 은사(隱士). 성은 육(陸)이고 이름은 통(通)이다. 접여(接輿)는 그의 자(字)이다. 일부러 미친 척하여 세상을 피해 다녔으며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어 양식을 해결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楚狂接輿(초광접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공자(孔子)가 그의 나이 62세 때인 초소왕(楚昭王)이 재위하던 기원전 488년에 초나라에 들렸을 때 접여는 공자가 타고 지나가던 수레 옆에서 공자를 비웃으며 노래했다.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히 몸을 피해 달아났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⑮우산(虞山)/ 현 강소성(江蘇省) 상숙현(常熟縣) 부근. 오도(吳都)였던 소주시(蘇州市) 북쪽 약 40키로, 장강 남쪽 약 10키로에 위치해 있음.

⑯취리(檇里)/ 지금의 절강성 해녕시(海寧市) 경내에 있었던 고을

⑰조씨고아 조무(趙武)의 아들은 조경숙(趙景叔)이고 조앙은 조경숙의 아들이다.

⑱진양(晉陽)/ 현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남쪽에 있던 성읍으로 조씨들 영지의 도성에 해당한다.

⑲범씨(范氏)/ 사회(士會)가 섬진(陝秦)에서 돌아오자 당진의 군주가 민심을 일신시키기 위해 사회를 현자(賢者)의 표상(表象)으로 삼은 후에 그에게 범(范: 현 산동성 범현 일대)땅에 봉했다. 사회의 아들인 사개(士匃)는 성씨를 식읍의 지명을 따라 범씨로 개칭했다. 즉 사길석(士吉射)은 범길석이다.

⑳순씨(荀氏), 중행씨(中行氏), 지씨(智氏)

당진의 도공(悼公)때 중군원수(中軍元帥)에 순앵(荀罃)이, 상군원수(上軍元帥)에는 순앵의 조카인 순언(荀偃)이 임명되자 군사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순앵은 봉읍이 지(智)에 있었던 관계로 지앵(智罃)으로 개성(改姓)하고 순언은 그 부친인 순경(荀庚)이 당진의 군제가 삼행(三行)이었을 때 중행원수(中行元帥)였기 때문에 성을 중행으로 바꾸어 중행언(中行偃)이라 했다. 즉 이때부터 순씨(荀氏)들은 지씨(智氏)와 중행씨(中行氏)로 나뉘게 되었다. 순인(荀寅)은 중행씨고 순력(荀躒)은 지씨(智氏)다. 후에 당진이 한(韓), 위(魏), 조(趙) 삼진(三晋)으로 나뉘어 기존의 섬진, 초, 제와 연이 합하여 전국칠웅의 시대가 열리는데 그 계기를 만든 인물인 지무자(智武子) 지백(智伯)은 순력의 손자이다.

㉑백인(柏人)/ 지금의 하북성 형태시(邢台市) 융요현(隆堯縣) 경내에 있던 고을로 춘추 때는 당진의 소속이었다가 전국 때는 조나라 영토가 되었다.

㉒고릉(固陵)/ 지금의 절강성 소산시(蕭山市) 경내로 전단강 남안에 건설된 월나라의 군항이다.

[펑설]

변란이 오래되면 치세가 그리워지고, 치세가 와서 나라가 안정이 되면 교만한 풍조가 생긴다. 교만한 풍조는 다시 변란으로 이끈다. 역사가 계급사회로 진입한 이래, 그와 같은 악순환을 계속해 왔다.

공자가 노국의 대사구가 되어 문무를 겸용하여 한손으로는 예를 들어 주공의 덕을 널리 전파하고 다른 한손으로는 법을 들어 노국의 내란을 평정했다.

그러나 제경공의 입장에서는 제나라의 인접국인 노나라가 강성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강성한 노나라가 제나라에 위협이 되는 경우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경공은 공자가 노나라를 강성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나라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공자를 쫓아는 내는 일이라고 한 대부 여미(黎彌)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방법으로서 미녀와 아름다운 말을 노나라에 보내 그 군주로 하여금 국정에 태만하게 함으로 해서 공자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어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제경공이 쓴 방법은 참으로 교묘하다고 할 수 있다. 10대(隊)로 이루어진 여인들은 노나라의 군신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노나라 군주는 여색에 빠지고 공자는 결국 기원전 498년 노나라를 떠나 열국을 떠돌아다녔다. 흥기하던 노나라는 다시 쇄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공자는 철학가다. 그는 고대인들의 정신생활과 중국인들의 전통문화 특히 주례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에 대한 인식을 하고 그 해결을 위한 방법을 설파했다. 그의 도(道), 인(仁), 예(禮)의 실천을 통한 완전인격의 완성은 단지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해서는 실현하기 어렵고,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얻는 것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하면서 노정공같은 통치자 역시 미인이나 좋은 말 같은 것들만을 탐닉해서는 자기완성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노정공의 무능으로 노나라가 모처럼만에 부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지만 자기의 철학적인 관점을 포기하는 않았던 공자는 노나라를 버리고 제후국으로 유세를 떠났다.

전화를 알리는 봉화가 하루도 쉬지 않고 있던 사회의 대변혁 시기에 있어서, 완전인격에 관한 그의 주장은 비록 그 정신에 대해서는 폄하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도(道), 인(仁), 예(禮)라는 항목은 제후들부터 냉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공자의 철학과 사상은 변혁을 원하는 신흥계급에게는 유리했지만,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제후들에게는 결코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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