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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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0 23:59:218945 
제3회. 身亡國破(신망국파) 東遷洛邑(동천락읍)
양승국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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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3-2. 서주를 구원한 4제후국과 동천하는 주나라s.jpg  (484.9K)   download : 207
일반

제3회 身亡國破 東遷洛邑(신망국파 동천낙읍)

몸은 죽고 나라를 망하게 한 주유왕과

나라를 동쪽의 락읍으로 옮긴 주평왕

1. 신망국파(身亡国破)

- 몸은 죽고 나라는 망하다-

유왕에게 표장를 올린 신후는 심복을 호경에 보내 반응을 살피게 했다. 신후의 심복은 유왕이 괵석보를 대장으로 삼아 불원간에 군사를 이끌고 신국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밤을 도와 돌아와 신후에게 보고했다. 대경실색한 신후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군사가 많지 않은데, 왕이 보낸 군사들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대부 여장(呂章)이 진언했다.

「천자가 무도하고 백성들은 모두가 원한으로 가득 차 있어, 왕실은 고립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견융은 강력한 군사를 보유하고 있는 강국입니다. 주공께서 속히 편지를 써서 견융주의 군사를 빌려 함께 호경으로 진격하여 왕비를 구하고 천자의 자리를 태자에게 전하게 하십시오. 주군이 이루게 되는 공업은 이윤(伊尹)①과 주공의 업적에 필적할 것입니다. 기선을 제압하여 실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대의 말이 심히 합당하다.」

신후는 즉시 편지를 써서 황금과 비단을 가득 실은 수레와 함께 사자에게 주어 견융에 가서 군사를 빌려 오도록 했다. 신국의 사신을 접견한 견융주는 신후의 청을 허락하고 호경을 공격하는 날짜를 정했다. 신후는 편지에 견융주가 만일 호경을 깨뜨린다면, 주나라의 창고에 있는 금은과 비단은 모두 융주가 차지해도 좋다고 약속했다.

융주가 말했다.

「중국의 천자가 실정하고 국구(國舅)인 신후가 나를 불러 무도혼군을 죽이고, 동궁을 도와 천자로 세우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바다.」

융주는 곧바로 융병1만5천을 동원하여 삼대로 나누어 패정(孛丁)을 우선봉, 만야속(滿也速)을 좌선봉으로 임명하고, 융주 자신은 중군을 맡았다. 출전하는 융병의 창과 칼은 길을 덮고 정기는 하늘을 가렸다. 신후 역시 융병을 돕기 위하여 본국의 병사를 일으켜, 거침 없는 기세로 호경을 향해 쳐들어갔다. 융주와 신후는 군사들을 신속히 움직여 유왕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전광석화와 같은 행동으로 왕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물과 식량을 끊었다. 유왕이 변란이 난 것을 듣고 놀라서 말했다.

「기밀이 누설되어 화가 먼저 당도했다. 우리가 기병하기 전에 융병이 먼저 군사를 움직여 여기까지 쳐들어 왔으니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는가?」

괵석보가 계책을 냈다.

「대왕께서는 속히 사람을 여산에 보내 봉화를 올리도록 명하십시오.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에서 내응하여 협공하면 반드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유왕이 그 말을 따라 사람을 보내 봉화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제후들의 구원병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옛날 봉화를 보고 달려 와서 놀림을 받았던 제후들이 또다시 자기들을 희롱하기 위하여 올리는 봉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왕은 구원병도 오지 않고 견융병들은 밤낮으로 성을 공격해 오자 괵석보에게 말했다.

「적세가 강한지 약한지 아직 모르고 있다. 경이 한 떼의 군사를 끌고 출전하여 한 번 시험해 보기 바란다. 짐이 젊은 용사들을 뽑아 경의 뒤를 잇겠다.」

괵석보는 원래 싸움에 능한 장수가 아니었으나 오로지 왕의 명을 따라 병거200승(乘)②을 끌고 성문을 열고 쇄도해 나갔다. 군사를 끌고 진군해 오는 괵석보의 모습을 진루 위에서 본 신후가 융주에게 말했다.

「저놈이 임금을 속여 나라를 그르친 도적입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융주가 부하 장수들을 보고 외쳤다.

「누가 출진하여 저 놈을 잡아오겠느냐?」

패정이 앞으로 나와 자원했다.

「소장에게 맡겨 주십시오.」

융주의 허락을 받은 패정이 칼을 휘두르며 말을 박차고 나가 괵석보가 있는 곳으로 곧바로 내달려 나갔다. 칼싸움이 십여 합도 안 되어 석보는 패정의 칼을 맞고 목이 잘려, 병거 아래로 굴러 떨어 졌다. 괵석보가 죽자 융주와 만야속이 군사를 끌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공격하여, 수많은 주나라 병사들의 목을 베고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이윽고 호경성 안으로 돌입한 견융군은 봉화대에 불을 지르고 저항하는 수비군을 모두 살해하려고 했다. 신후가 황망히 융병들의 앞을 가로막고 저지하려고 했으나 융병들은 아무도 신후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주나라 군사들을 살육했다. 유왕이 성내의 군사를 정비하여 융병들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성중에 대란이 일어나 싸우려는 투지를 잃어버린 군사들은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다. 할 수 없이 유왕은 포사와 백복을 작은 수레에 같이 태우고 궁궐의 뒷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사도 정백이 뒤따라 나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왕께서는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폐하의 어가를 호위하겠습니다.」

가까스로 북문을 빠져나간 유왕 일행은 여산을 바라보고 산길을 따라 대열을 지어 앞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만난 윤구가 말했다.

「견융이 궁궐을 불사르고 창고를 약탈했습니다. 제공(祭公)은 이미 란전 중에 전사했습니다.」

유왕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팠다. 여산에 당도한 정백 희우(姬友)가 봉화를 올리라고 명령하자, 봉화의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구원병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견융병들이 유왕의 뒤를 쫓아 여산 밑에 당도하여 여궁을 포위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무도혼군아,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유왕과 포사가 놀라서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정백이 유왕을 향해 말했다.

「일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목숨을 바쳐 어가를 보호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가겠으니, 전하께서는 일단 제후의 나라로 가서 몸을 맡기신 후에 다시 후일을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유왕이 절망감에 사로잡혀 정백에게 호소했다.

「짐이 숙부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이 이 지경까지 왔습니다. 짐과 포비 모자의 목숨은 모두가 오로지 숙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정백이 즉시 사람을 여궁 앞으로 보내 불을 놓아 융병을 유인하게 한 후에 그 틈을 노려 유왕을 끌고 여궁 후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나왔다. 정백은 손에 자루가 긴 창을 잡고 선두에서 서서 길을 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유왕과 포사 모자가 따르고 윤구는 후위를 맡았다. 유왕이 일행이 얼마쯤 갔을 때 소장 고리적(古里赤)이 이끄는 견융병 일단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정백이 대노하여 이빨을 악물고 고리적을 맞이하여 싸웠다. 서로 교전하기 수 합만에 정백이 고리적을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렸다. 정백이 흉맹스럽게 싸우는 모습을 본 융병들이 놀라서 잠시 흩어졌다. 그 틈을 타서 정백이 유왕의 일행을 이끌고 다시 약 반 리 정도 앞으로 더 나아갔을 때 뒤쪽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뒤를 돌아 확인해보니 견융군의 선봉장군 패정이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해 오고 있었다. 정백이 윤구를 불러 어가를 보호하여 먼저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기는 후위를 맡아 추격군을 막으면서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견융의 철기병이 종횡무진으로 달려와 양대로 나누어 정백을 에워쌌다. 철기병에게 포위된 정백은 전혀 두려운 기색도 없이 잡고 있던 창을 신출귀몰하게 휘두르자 앞에선 융병들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견융주가 사면에서 활을 쏘라고 군사들에게 지시하자, 화살이 우박처럼 쏟아져 주나라의 지혜로운 신하가 화살을 수없이 맞고 죽었다. 그 사이에 좌선봉 만야속이 유왕의 어가를 붙잡아 견융주 앞으로 끌고 왔다. 곤룡포와 옥대를 한 유왕을 알아본 견융주가 병거 안에 꽂혀 있는 칼을 뽑아 백복과 같이 단칼에 베어 죽여 버렸다. 어가에 같이 타고 있던 포사는 미색에 혹하여 죽이지 않고 본진으로 보내 장막 안에 가둬 두도록 하여 후에 돌아가 음락을 즐기려고 했다. 윤구는 어가 안에서 숨어 있다가 융병에게 발각되어 밖으로 끌려 나와 참수 당했다. 유왕은 그때까지 모두11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 뽕나무로 만든 활과 풀로 엮어 만든 전통을 만들어 팔려고 했던 남자가 청수하 강변의 요녀를 수습하여 포국으로 도망가서 키웠고 이 요녀가 성장하여 포사가 되었다. -

포사는 왕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적실의 왕후를 기만, 능멸하여 금일 유왕의 몸을 망치게 하고 나라를 파국으로 이끌었다. 옛 동요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은 뜨고 해가 지니

뽕나무 활과 기초풀로 엮어 만든 전통으로

주나라가 망하는구나!

月將升日將沒(월장승 일장몰)

檿弧簊箙(염호기복)

實亡周國(실망주국)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미 선왕 때에 정해진 하늘의 운수에 의한 것이다.

동병(東屛) 선생이 시를 지어 이 일을 노래했다.

포사의 웃음을 자아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써 보더니

요동치는 봉화의 불빛으로 여인의 얼굴은 붉게 물들여졌다!

제후들을 희롱하여 믿음을 잃어도 무사할 줄 알았던가?

강융을 멸하는 것이 나라의 복임을 가르쳤어야 함이라!

多方圖笑掖庭中(다방도소액정중)

烽火光搖粉黛紅(봉화광요분대홍)

自絶諸侯猶似可(자절제후유사가)

忍敎國祚喪姜戎(인교국조상강융)

또 농서거사(隴西居士)가 노래한 시가 있다.

여산에서 포비가 한번 웃으니 견융이 화가 났다.

활과 화살을 노래한 동요가 이미 징조를 나타내자

18년 만에 드디어 보복을 받는 구나!

돌고 도는 응보의 조화는 누가 주관하는가?

驪山一笑犬戎嗔(여산일소견융진)

弧矢童謠已驗盡(호시동요이험진)

十八年來猶報応(십팔년내유보응)

挽回造化是何人(만회조화시하인)

윤구 등 생을 좋지 못하게 마감한 간신들에게 경계를 주기 위해 쓴 시가 있다.

교묘한 말로 남을 중상하여 암군을 미혹시켜

부귀를 평생 누리려고 온갖 짓을 다했건만

하루아침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주륙을 당하여

천추에 망령된 신하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巧話讒言媚暗君(교화참언미암군)

滿圖富貴百年身(만도부귀백년신)

一朝騈首同誅戮(일조병수동주륙)

落得千秋罵妄臣(락득천추매망신)

또 다른 한 수의 시는 정백 희우의 충절을 노래했다.

괵석보와 윤구는 모두 전란 중에 죽었는데

정환공은 그날 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세 사람은 모두가 주나라 왕실을 위해 죽어

백골이 되었지만 누구의 것에서 향기가 나는가?

石父捐軀尹氏亡(석보연구윤씨망)

鄭桓今日死勤王(정환금일사근왕)

三人總爲周家死(삼인총위주가사)

白骨風前那个香(백골풍전나개향)

한편 성안에 남아있던 신후는 궁궐 안에서 화기가 치솟자 신국의 병사들을 끌고 궁궐 안으로 들어가 불을 끄게 하고 냉궁에 갇혀있던 신비를 꺼내어 내궁으로 옮겼다. 순시를 돌던 신후는 경대에 이르렀지만 유왕과 포사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경대에 있던 궁인 하나가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미 북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유왕의 일행이 여산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한 신후는 황급하게 뒤를 쫓다가 도중에 여산에서 되돌아오는 융주의 거마와 마주치자 각기 그 노고를 물었다. 혼군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융주로부터 듣고 신후가 크게 놀라 말했다.

「나는 원래 왕의 사악한 행동을 고쳐주려고만 했거늘, 뜻하지 않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후세에 임금에게 불충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남겼구나!」

신후가 급히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을 내려 유왕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융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국구가 한 일은 아녀자의 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소!」

2. 사로제후 근왕흥병(四路諸 侯勤王興兵)

- 왕성을 구하기 위해 출동하는 사로제후-

융주와 같이 호경의 성안으로 돌아와 잔치를 열고 융주와 그 군사들을 접대한 신후는 부고의 보물들을 모두 꺼내 바치고 다시 금은과 비단을 백성들에게서 더 거두어 열 대의 마차에 실어 융주에게 주었다. 융주는 신후를 통해서 수많은 재물을 받고서도 만족하지 않고 주유왕을 잡아서 죽인 일을 세상에 다시없는 큰 전공을 세운 쾌거로 생각하여 군사들과 함께 호경에 머물며 매일 종일토록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좀처럼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신후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신후가 궁리 끝에 밀서 세 통을 삼로 제후에게 보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왕실을 구원하라고 요청했다. 그 삼로 제후란 북로는 당진(唐晉)의 군주 진문후(晉文侯) 희구(姬仇), 동로는 위무공(衛武公) 희화(姬和), 서로는 섬진(陝秦)③의 군주 영개(嬴開)였다. 또한 정나라에도 사람을 보내, 융족과의 싸움 중에 전사한 정백의 죽음을 세자 굴돌(掘突)에게 알리고 본국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부군의 원수를 갚으라고 했다.

정백의 세자 굴돌은 방년23세로 신장이 팔 척이고 그 풍모가 영준했다. 부친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굴돌은 애통함과 분노를 머금고, 곧바로 흰 도포를 입고 명주 허리띠를 두른 후에 전차3백 승을 이끌고 밤을 도와 호경을 향해 진군했다. 견융의 탐마가 이를 알고 바람같이 달려와 보고하자 견융주는 융병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이윽고 왕성밖에 당도한 굴돌은 곧바로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다. 공자성(公子成)이 간했다.

「우리 군사는 밤을 도와 급히 달려와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땅히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굳게 지키는 동안, 여러 제후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모두 당도하면 그때 힘을 합하여 공격하는 것이 만전을 기하는 방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는 급한 생각에 굴돌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우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굴돌은 공자성의 간함을 물리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원수가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견융의 군사들에게는 교만한 마음이 가슴에 가득 들어있는 차제에 내가 우리 군사들의 예기로 융병들의 해이함을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만일 제후들의 군사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린다면 어찌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해이해 지지 않겠는가?」

굴돌이 곧바로 군사들을 휘몰아 왕성 밑에까지 달려갔다. 성 위에는 깃발도 세워지지 않았고 북소리도 나지 않아 융병들은 전연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굴돌이 크게 외쳤다.

「금수의 무리들아! 성 밖으로 나와서 나와 한번 싸워 보지 않겠느냐?」

왕성 위에서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굴돌이 좌우에게 성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그때 갑자기 뒤 쪽의 숲 속 깊은 곳에서 큰 북소리가 나며 한 떼의 군사가 일어나 쇄도해 왔다. 그들은 곧 견융주가 계책을 세워 미리 성 밖에 매복시킨 군사들이였다. 굴돌이 놀라서 황망히 창을 잡고 말머리를 뒤로 돌려 배후에서 쳐들어오는 융병들에게 대항했다. 그러자 왕성 위에서도 큰북이 울리더니 성문이 활짝 열리며 일단의 군사들이 튀어나와 정나라 군사들을 협공했다. 정나라 군사들 앞에는 패정이, 뒤에서는 만야속이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감행했다. 융병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정나라 군사들은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융병은30여 리를 추격하다가 되돌아갔다. 굴돌이 간신히 패잔병을 수습한 후에 공자성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싸움에서 패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자성이 말했다.

「여기서 위(衛)나라의 복양(濮陽)④이 멀지 않습니다. 위후는 나이가 많을 뿐 아니라 성실하여 일을 담당할만한 지략이 있습니다. 위후와 힘을 합해 후일을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굴돌이 공자성의 말을 따라 군사들에게 복양을 향하여 진군하라고 명했다. 행군을 시작한지 이틀째 되는 날, 전방에서 먼지가 일어나며 멀리서 무수히 많은 병거가 꿈틀거리는 담장과 같은 모습을 하고 진격해 오고 있는 행렬이 보였다. 다가오는 병거 대열의 중간에 한 사람의 군주가 좌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비단옷에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차고 회색의 얼굴에 머리는 백발이었는데 과연 그 자태가 신선과 같았다. 그 사람은 바로 위무공(衛武公) 희화(姬和)였다. 위무공은 당시 이미80세를 넘긴 노인이었다. 굴돌이 병거를 멈추고 앞으로 나가 소리쳐 말했다.

「나는 정나라의 세자 굴돌입니다. 견융이 군사를 동원하여 호경을 범하여 저희 부친께서는 전사하였고, 우리 군사도 또한 패하여 군주께 구원을 청하러 가는 중입니다.」

위무공이 두 손을 높이 들어 읍을 하면서 말했다.

「세자는 안심하기 바랍니다. 나는 우리 위나라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왕성을 구하러 왔습니다. 당진과 섬진의 군사들도 머지않아 이곳에 당도할 예정입니다. 어찌 견양의 무리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상견례를 끝낸 굴돌은 선두를 위무공에게 양보하고 병거와 병사들의 방향을 돌려 다시 호경으로 향하게 했다. 위와 정 두 나라의 군사들이20리쯤 진군한 후에 양대로 나누어 진을 치고 정탐병을 보내어 당진과 섬진 두 나라의 군사들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도록 했다. 정탐병이 돌아와 보고했다.

「도성의 서쪽에 나팔과 북소리가 크게 나고 전차 소리가 땅을 진동시켜 가서 살펴보니 비단 깃발에 쓴 글자가 ‘섬진(陝秦)’ 이었습니다.」

위무공이 굴돌에게 말했다.

「섬진의 작위는 비록 부용(附庸)⑤이나 융족의 습속에 익숙해 있고, 그 병사들은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여 융족들이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다시 북쪽으로 갔던 정탐병이 돌아와 보고했다.

「당진의 군사들도 역시 당도하여 왕성의 북문에 진을 쳤습니다.」

위무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두 나라의 군사가 당도했으니 대사는 이미 이루어 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위무공이 즉시 사람을 보내 당진과 섬진 두 나라의 군주들과 상면하기를 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두 나라 군주들이 위무공의 진영에 당도하여 서로간의 노고를 치하하던 중 온몸에 소복을 입고 있는 굴돌을 보고 당진과 섬진 두 나라 군주가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위무공이 대답했다.

「이 사람은 정나라의 세자 굴돌입니다.」

이어서 정백 우가 견융과의 싸움 중에 유왕과 같이 죽은 일을 자세하게 말해 주자, 두 나라 군주들이 듣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위무공이 계속해 두 나라 군주를 향해 말했다.

「노부가 나이만 많이 먹고 아는 것은 없지만 오로지 신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켜달라는 요청을 사양치 못하고 힘을 다하여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감히 도성을 침입한 북방의 오랑캐를 소탕하고자 하니 모든 일은 상국(上國)의 처사에 따르겠습니다.」

섬진의 양공(襄公)이 말했다.

「견융의 목적은 여자와 재물을 노략질하여 이미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시에 당도했으니 그들은 분명히 우리 군사들에 대한 방비를 미처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밤 삼경(三更)⑥에 우리의 군사들을 동남북(東南北) 세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케 하고 서문만은 비워두어 그들이 퇴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은 후에 정세자를 매복시켜 그들이 도망쳐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뒤를 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위무공이 대단히 훌륭한 계책이라고 말하면서 찬성을 표했다.

한편 도성 안에 있던 신후는 사국의 병사들이 당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속으로 대단히 기뻐했다. 즉시 소주공(小周公) 훤(咺)과 비밀리에 만나 상의했다.

「사국의 군사들이 성을 공격가시 시작하면 우리는 성문을 열고 내응을 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융주에게는 금은보화와 비단을 우선봉 패정으로 하여금 본국으로 가져가도록 권하여 융병의 군세를 약화시키고 좌선봉 만야속에게는 남은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가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조언했다. 견융주는 신후의 말을 호의로 받아 들여 그대로 따랐다. 견융주의 명을 받아 동문 밖으로 나가 진을 치고 위나라 군사들과 대치하고 있던 만야속은 다음날 교전하기로 약속했다. 이윽고 시간이 삼경이 되자 위나라 군사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만야속의 진채를 습격했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만야속은 큰칼을 들고 말에 올라타 황급히 적을 막았다. 융병들은 와중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혼자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만야속은 같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승세를 탄 삼로 제후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왕성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성안에서 호응한 신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성문이 들어 올리자 삼로의 군마들은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성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이것은 모두가 신후의 계략이었다. 융주가 잠결에 깨어나 안장도 챙길 겨를이 없이 말 위에 올라타더니 서쪽의 성문을 향해 달렸다. 융주를 따르는 군사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성문을 빠져나간 융주는 얼마가지 못해 정세자 굴돌에 의해 길을 가로 막혀 바야흐로 위급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패잔병들을 수습한 만야속이 달려와 정나라 군사들과 혼전을 벌리는 사이에 융주는 간신히 몸을 빼어 도망칠 수 있었다. 정세자 굴돌이 도망가는 융주를 감히 더는 추격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성안으로 들어와 제후들과 합류했다. 시간은 어느 사이에 흘러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융주(戎主)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포사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호증(胡曾)선생이 시를 지어 한탄했다.

수놓은 비단옷을 몸에 휘감고 국모라고 칭했다.

오랑캐 막사 안에서 다시 자태를 뽐냈지만

결국은 싸움 중에 목메어 죽는 고통을 면하지 못했다.

왕비가 되려고 다툰 것은 쾌락을 즐기기 위함이었건만!

錦繡圍中称國母(금수위중충국모)

腥膻隊里作番姿(성단대리작번자)

到鬪不免投繯苦(도투불면투환고)

爭似爲妃快樂多(쟁사위비괘락다)

3. 영립평왕(迎立平王)

- 태자 의구를 모셔와 천자로 세우다. -

신후가 잔치를 크게 벌려 사로 제후를 환대했다. 음식을 먹고 있던 중에 갑자기 좌장 격에 해당하는 위무공이 젓가락을 내던지며 일어나서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다.

「천자는 죽고 나라는 망했는데 어찌하여 그대들은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연회석 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일어나 두 손을 높이 올려 읍을 하며 말했다.

「원컨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위무공이 뒤를 이어 말했다.

「나라에는 하루도 임금의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됩니다. 지금 태자가 신국에 있으니 마땅히 받들어 왕위를 잇게 해야 합니다. 여러 제후님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진양공이 자리에 일어나 찬동했다.

「군후님의 말씀은 문무(文武)와 성강(成康)⑦의 뜻에 합당하다 하겠습니다.」

정세자 굴돌이 뒤를 이어 말했다.

「소자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이번에 태자를 모셔오는 일을 맡게 해주시면 원컨대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어 선친이 맡아 하셨던 사도(司徒)의 직무를 대신하고 싶습니다.」

위무공이 크게 기뻐하며 술잔을 높이 들어 굴돌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 사이에 명을 내려 표문을 쓰게 하여 신왕을 모셔오기 위한 어가를 준비하게 했다. 사로의 제후들이 모두 병사를 내어 태자를 모셔오는 일을 도우려고 하자 굴돌이 말했다.

「적군과 싸우러 나가는 것도 아닌데 구태여 많은 사람이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신후가 굴돌에게 청했다.

「신왕을 모시러 갈 때 이곳에 있는 우리 신나라 병거300승도 함께 본국으로 인솔해 가주셨으면 합니다.」

정세자 굴돌이 군사를 이끌고 주나라의 비어있는 왕위에 태자 의구를 모셔와 앉히기 위해 신국을 향해 행군했다.

한편 신국에 머물면서 매일 번민에 쌓여있던 태자 의구는 그때까지 국구가 본국에 출정한 결과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정세자 굴돌이 도착하여 신후와 여러 제후들이 연서한 표장을 가지고 와서 태자를 영접하여 호경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태자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 크게 놀랐다. 굴돌로부터 그 동안 호경에서 일어난 일과 유왕이 이미 견융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구는 부자지간의 정으로 인하여 자기도 모르게 목을 놓아 큰 소리로 울었다. 굴돌이 태자에게 아뢰었다.

「태자께서는 마땅히 사직의 중함을 깨달으셔서 하루라도 빨리 왕위에 올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 시켜야 합니다.」

태자가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오늘 불효자라는 이름을 천하로부터 얻었지만, 일이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서둘러 여장을 갖추어 떠나도록 하겠소.」

태자와 정세자 일행은 쉬지 않고 행군을 서둘러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호경에 도착했다. 소주공 훤이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서 태자를 위해 궁궐을 청소했다. 신후가 위, 당진, 섬진 등 삼국의 제후와 일반 문무백관을 이끌고 성문 밖30리까지 마중 나가서 태자와 정세자 일행을 영접했다. 제후들이 태사로 하여금 점을 쳐 길일을 택하여 태자를 모시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전쟁 중에 파손되어 황폐해진 궁전의 모습을 본 태자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처연해져 눈물을 흘렸다. 이어서 태자는 신후를 찾아가 노고를 치하하고 제후들이 보낸 표장을 받아 왔다고 말했다. 마침내 태자는 천자의 복식으로 옷을 갈아입고 묘당으로 나아가 선조들에게 고한 후에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주평왕(周平王)이다. 평왕이 전당에 오르자, 여러 제후들과 문무백관들이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신후를 전당으로 오르게 한 평왕은 그의 작위를 공으로 올린다고 선언하며 말했다.

「폐위되어 버림받은 나로 하여금 대위를 잇도록 한 것은 모두가 국구이신 신후의 덕분입니다.」

신후가 사양하며 아뢰었다.

「상벌이 분명하지 못하면 나라의 정사가 바르게 서지 않습니다. 폐허가 된 도읍이나마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왕실을 구원한 제후들의 공 때문입니다. 신이 견융을 복종시키지 못하고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오히려 만 번 죽어 마땅한데 어찌 감히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후가 세 번에 걸쳐 공작의 작위를 완강히 사양하자 평왕은 할 수 없이 유왕이 삭직한 작위를 복위시켜 후작으로 했다. 위무공이 앞으로 나와 다시 아뢰었다.

「포사 모자는 선왕의 총애를 믿고 도덕을 어지럽혔고, 괵석보와 윤구 등은 임금을 속여 나라를 그르치게 하였으니, 그들의 몸은 비록 죽었다고 하지만 마땅히 그 죄를 추궁해야만 합니다.」

평왕이 위무공의 말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다시 위무공 희화는 작위를 공으로 하고, 당진의 문후(文侯) 희구(姬仇)에게는 하내(河內)에 있는 왕실 전용의 채전(采田)을 봉읍으로 더하여 주었다. 또한 정백 우는 왕을 구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 공을 기리어 환(桓)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자 굴돌로 하여금 그 작위와 봉지를 잇게 함과 동시에 팽전(祊田)⑧ 천경(千頃)⑨를 더하여 주었다. 섬진의 양공(襄公)은 원래 주왕실이 직접 다스리는 부용국의 영주였으나, 작위를 올려 일약 백작으로 하고 제후의 대열에 서게 했다. 소주공 훤은 태재(太宰)의 직에 임명했고, 신비는 태후가 되었다. 포사와 백복은 모두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괵석보, 윤구, 제공 등은 그들의 조상들이 나라에 끼친 공훈과 왕을 모시고 전란 중에 죽은 것을 참작하여, 단지 본인들의 작위를 삭탈하고, 자손들로 하여금 옛날의 작위를 잇도록 허락했다. 또한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 할 수 있도록 방을 붙여 포고하게 하는 동시에 전란 중 피해를 입은 호경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위문했다. 이를 노래한 시가 있다.

이날에 이르러서야 백관들이 은혜로운 임금을 만났고

만백성이 태평성대가 왔다고 기뻐했다.

이것은 주나라가 여러 대에 걸쳐 쌓은 공덕 때문이다.

이로써 주나라는 바로 잡혀 중흥을 바라보게 되었다.

百官此日逢恩主(백관차일봉은주)

萬姓今朝喜太平(만성금조희태평)

自是累朝功德厚(자시누저공덕후)

山河再整望中興(산하재정망중흥)

그 다음날 제후들은 조당에 나와 평왕이 베풀어 준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 이에 평왕은 다시 위무공을 사도(司徒)에, 정백 굴돌을 경사(卿士)⑩에 임명하여 왕도에 남아 태재 직의 소주공 훤과 함께 주왕실의 정사를 보좌하게 했다. 신후와 당진의 문후 두 사람은 융적(戎狄)이 본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초조한 나머지 평왕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자기나라로 급히 돌아갔다. 신후가 자기 본국으로 떠나기 전에 풍모가 영준한 정세자 굴돌에게 그의 다른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신후의 딸은 무강(武姜)이라 불렀다.

4. 동천낙읍(東遷洛邑)

- 동쪽의 낙읍으로 나라를 옮겨 동주시대를 열다.-

한편 호경에서 한바탕 대란을 크게 일으킨 후에 본국으로 돌아간 견융주는 비록 제후들들의 협공에 의해 패퇴하기는 했지만 그 경험으로 중원의 지리에 익숙하게 되었고 또한 군사들의 예봉은 여전히 살아 있어 다시 한 번 주나라를 노려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주나라 부고의 재물들을 모두 주겠다는 신후의 약속을 믿고 주나라를 공격했으나 급하게 쫓겨나는 바람에 결국은 애쓴 것에 비해 노획품을 챙기지 못해 마음속으로 원한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융주는 나라 안의 군사를 모두 크게 일으켜 주나라 변경지방을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기풍(岐豊)⑪지방의 절반 이상의 땅을 견융의 영토로 만들었다.

견융이 주나라 변경으로부터 점차로 호경을 향하여 압박해 오니, 날마다 왕성을 향하여 전화를 알리는 봉화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궁궐도 견융이 쳐들어와서 태워 버린 이후 아직 절반도 복구되지 않아, 담장은 무너지고 건물의 기둥은 부러져 그 모습이 매우 처량했다. 평왕이 생각하기를 첫째는 호경의 창고가 모두 비어 궁궐을 복구할 만한 여력이 없었고, 둘째는 견융이 다시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하여 자연히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천도할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평왕이 조회를 끝내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성왕(成王) 때 호경에다 도읍을 정하고 또 낙읍에 궁궐을 지어 동도(東都)로 정했소. 이에 대한 연유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한 소리로 아뢰었다.

「낙읍은 천하의 중심이며 사방에서 조공을 드리러 오기 쉽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옛날 성왕께서 소공(召公)⑫에게 명하여 터를 잡게 하시고 주공에게 명하여 성을 쌓아 동도(東都)라 했습니다. 그곳 궁실의 구조와 제도가 이곳 호경의 것과 같아서 천자가 매번 천하의 제후들과 조회를 할 때는, 동도로 순행하여 제후들을 접견한 이유는 곧 백성들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견융이 호경을 핍박하여 화가 언제 닥쳐올지 예측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내가 락읍으로 천도를 할까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평왕이 속내를 말하자 태재훤이 진언했다.

「견융의 침략으로 궁궐은 불에 타서 폐허로 변해 다시 복구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구작업을 시작하면, 백성들을 혹사시키고 국가재정은 탕진되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됩니다. 견융이 그 틈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면 막을 수 없습니다. 락읍으로의 천도는 견융의 침략에 대비하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견융의 침입을 두려워한 문무 양반의 신료들은 일제히 한 소리로 아뢰었다.

「태재의 말이 심히 온당합니다.」

오로지 사도 위무공만이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길게 탄식만을 연발하면서 머리를 수그리고 서 있었다. 평왕이 묵묵히 서있는 위무공을 향해 말했다.

「노 사도께서는 어찌하여 홀로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위무공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노신의 나이는 이미 팔십이 넘었습니다. 대왕께서 나이 먹은 몸을 버리지 않으시고 육경의 대열에 세워 깊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알고도 말하지 않으면 임금에게 불충이 되고, 또한 여러 대신들의 의견과 다른 말을 한다면 동료들과 불화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비록 동료들로부터 죄를 얻을지언정, 감히 임금에게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릇 호경의 왼쪽에는 효함(殽函)⑬이 있고, 오른쪽에는 촉(蜀), 농(隴)이 있어 뒤로는 산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강을 끼고 있으며 기름진 평야가 천리에 달합니다. 천하를 굽어볼 수 있는 형세를 하고 있어 이만한 땅이 없습니다. 그러나 낙읍은 비록 천하의 중심이 되는 곳이지만, 지형은 평탄하여 사면으로부터 적의 침입을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로 선대의 왕께서 비록 도읍을 두 곳에 두셨지만, 서도인 호경에 머물러 천하에 위엄을 진동시켰고 동도는 천자께서 순시할 때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곳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호경을 버리고 락읍으로 천도한다면, 왕실은 자연히 쇠락할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견융이 기풍의 땅을 침략하여 그 세가 심히 흉맹스러워 호경을 위협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궁궐은 파괴되어 대부분이 폐허로 변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짐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함은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입니다.」

「신후가 승냥이 같은 견융을 왕성에 끌어들여 문 앞에 들어 눕게 한 행위는 커다란 실책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성문을 열고 도적을 맞이하여 궁궐을 태우게 하고, 선왕을 죽게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주나라는 견융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수 없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오늘부터라도 뜻을 높이 세우시어 스스로 국세를 강하게 만들고 근검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한편 병사들에게 무술을 연마하게 하고 훈련을 시켜 강력한 군사로 키우십시오. 그 힘으로 북벌남정(北伐南征)한 선왕(宣王)을 본받아 융주를 사로잡아 종묘에 바쳐 전날에 당한 수모를 갚아야만 합니다. 만약 견융을 두려워하여 참으면서, 원수를 피해 호경을 버리고 락읍으로 나라를 옮겨 간다면, 그것은 즉 우리 주나라가 견융을 두려워하여 한 걸음 후퇴하는 일이 되고, 견융은 이와는 반대로 한 걸음 다가와서 우리의 강역을 잠식하게 됩니다. 어찌 기풍의 땅에 한하는 문제이겠습니까? 옛날에 요임금과 순임금께서는 제위에 계실 때, 띠로서 지붕을 이으시고 흙으로 계단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라를 세운 우왕께서는 비천한 궁궐에서 거하셨지만 누추하다고 불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읍의 장엄함이 어찌 궁궐에만 달려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태재훤이 위무공의 말에 이의를 달았다.

「노 사도의 말씀은 지금처럼 변란시대에는 맞는 말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부왕께서는 정사를 태만히 하시고 윤리를 저버려, 오랑캐의 침입을 자초하셨습니다. 그 일은 이왕지사 큰 재앙이 되어 지나간 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왕께서 전란 중에 타버린 궁궐을 청소하여, 다만 위엄만을 갖추려 해도 나라의 부고가 텅텅 비고, 군사는 적고 약하여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견융을 마치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일단 오랑캐의 기병이 전열을 길게 하고 침입해 온다면 민심이 와해되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짓게 될 것인데, 누가 그 죄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왕을 포함한 대소 신료들이 천도로 마음을 이미 정해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위무공이 한 가닥 희망을 갖고 말했다.

「신후가 이미 견융을 능히 부를 수 있었으니, 물러가게 하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그 계책을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좋은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

낙읍으로의 동천 문제로 조당에 의견이 분분할 때 국구 신후가 위급함을 알리는 표문을 사람 편에 보내 왔다. 평왕이 표문을 펼쳐 읽었다.

「견융이 침략을 그치지 않고 우리 신나라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 같습니다. 부디 왕께서는 제가 태후의 부친이라는 점을 고려하시어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표장을 읽은 평왕이 선언했다.

「국구도 자기를 돌볼 여지가 없는데 어찌 짐을 돌볼 여력이 있겠는가? 동쪽으로의 천도를 짐은 이미 결심했다.」

평왕이 곧 태사에게 명하여 천도를 할 날짜를 잡게 하자 위무공이 평왕을 향해 말했다.

「만약 왕께서 먼저 가버리시면,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그것은 바로 제가 맡고 있는 사도의 직분에 태만하게 되는 일입니다. 마땅히 사전에 방문을 거리에 붙여, 백성들에게 알려야만 하겠습니다.」

평왕의 허락을 받은 위무공은 그 즉시 속관에게 명해 방문을 거리에 붙여 백성들에게 공포하도록 했다.

「어가를 따라 동쪽으로 옮겨 살고자 원하는 자는 속히 여장을 꾸려 같이 갈 수 있도록 하라.」

다시 위무공은 사관에게 제문을 쓰게 하여 먼저 동쪽으로 천도하는 연유를 종묘에 고하게 했다. 이윽고 택일한 날짜가 되자 대종백이 종묘의 신주를 안고 마차를 타고 먼저 동쪽을 향하여 출발했다. 섬진의 양공이 평왕이 락읍으로 동천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군사를 끌고 와서 어가를 호위했다. 백성들은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아이는 업고 하여 행렬을 따라 오는데 그 수가 많아 헤아릴 수 없었다.

옛날 주선왕이 야밤에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깜빡 잠이 들어 꿈속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크게 세 번 웃고, 또 크게 세 번 곡한 후,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종묘의 신주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가슴에 안고 동쪽으로 유유히 가버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크게 세 번 웃은 것은 포사가 여산에서 봉화로 제후들을 희롱한 일을 뜻하고, 크게 세 번 곡한 것은 유왕, 포사, 백복이 모두 전란 중에 죽은 일을 의미했다. 또한 신주를 묶어서 동쪽으로 가버린 것은, 지금 동도로의 천도를 뜻하니 그때의 꿈이 하나도 맞지 않은 바가 없었다. 또한 주선왕 때 태사 백양보가 물러나면서 점을 치고 다음과 같은 점괘를 선왕에게 바친 일이 있었다.

곡하고 웃고 웃고 또 곡하다.

양(羊)이 귀신(鬼神)에게 잡혀 먹히고

말이 개를 만나 쫓겨다니니

신중하고 신중 할지어다

뽕나무 활에 풀로 엮어 만든 전통(箭筒)이로다.

哭又笑笑又哭(곡우소 소우곡)

羊被鬼呑(양피귀탄)

馬逢犬逐(마봉견축)

愼之愼之(신지신지)

檿弧簊箙(염호기복)

양이 귀신에게 잡혀 먹혔다는 점괘는 기원전782년, 선왕46년 기미년(己未年)에 선왕이 귀신을 만나 죽은 일을 말하고 말이 개에게 쫓긴다는 괘는 기원전771년, 유왕11년 경오년(庚午年)에 견융이 쳐들어 온 일을 말한다. 이때에 이르러 서주가 망하고, 하늘이 정한 수명을 다하니 역시 백양보의 점은 신통하다고밖에 말할 수밖에 없겠다.

< 제4 회로 계속>

주석

①이윤(伊尹): 은(殷)나라 탕왕(湯王)을 도와 하나라 걸왕(桀王)을 토벌하고 은왕조를 세운 창업공신이다.

②승(乘): 군비를 충당하는 국방비의 징수 단위로써의 승마(乘馬)를 뜻하며4마리의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 즉 병거 혹은 전차의 단위가 승이다. 수레를 끄는4마리의 말 중 바깥 쪽의 두 마리 말을 참(驂), 가운 데의 두 마리의 말을 복(服)이라고 하고 총칭하여 사(駟)라 했다. 수레에는 세 사람의 갑사가 타고 그 뒤를72인의 보졸이 따랐다.

주나라 군부(軍賦) 제도에 따라 각 제후국들은 토지와 인구의 분포에 따라 사방6리(혹은8리) 내에 거주하는324호를 단위로 하여 전시에1승의 전차를 군부(軍賦)로 제공하도록 하여 이를 승마(乘馬)라 했다. 승마를 제공할 수 있는 호수의 숫자에 비례해서 국력이 정해졌다. 그래서 만승지국(萬乘之國), 천승지국(千乘之國), 백승소국(百乘小國)이나 천자만승(天子萬乘), 제후천승(諸侯千乘), 대부백승(大夫百乘)이라고 칭해졌다.

③)진(秦): 진(秦)은 주나라 효왕(孝王)이 비자(非子)를 대부로 봉한 곳의 지명으로 처음에는 서견구(西犬丘)라고 불렀다. 서견구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예현(禮縣) 부근을 말한다. 후에 진나라는 주선왕에 의해 부용에 봉해졌다.

④복양(濮陽): 현 하남성 복양시(濮陽市)로써 춘추 때의 지명은 제구(帝丘)다. 위나라가 제구로 천도한 것은 견융이 침입으로 서주가 망한 이후 약150년 후의 기원전628년의 일이다. 여기서 사용한 복양이라는 지명은 위나라의 도성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복수(濮水) 이북의 땅을 영토로 갖고 있었던 위나라를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⑤부용(附庸): 세력이 미약한 제후국을 이르는 말. <예기(禮記)>에 따르면 영지가 사방50리를 넘지 못해 공(公), 후(侯), 백(伯), 자(子)남(男) 등의5등급 안의 제후에 들지 못하는 소국의 영주들의 호칭으로 천자에게 직접 조현을 올리지 못하고5등급 제후들이 조회를 드리러 갈 때 곁붙여서 해야만 했던 관계로 ‘부속하여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의미의 부용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즉 봉건제도 하의 질서로는 제후와 동급이기는 하지만 영토나 세력 면에서 독립된 제후 역할을 할 수 없는 소군주 내지 그들이 통치하는 작은 제후국들을 일컫는다. 춘추시대부터는 주로 당진, 초(楚), 섬진 등의 강대국들이 무력으로 자기 영토로 편입시킨 다수의 소제후국들을 지칭했다..

⑥삼경(三更): 새 벽 영시부터2시까지의 시간을 말함. 해가 지는 오후8시부터 다음 날 해뜨는6시까지를5등분하여 초경부터5경까지 시간을 정했음.

⑦ 문무(文武)와 성강(成康): 주나라 초기의 왕들로 문무는 문왕과 무왕, 성강은 성왕과 강왕이다.

⑧팽전(祊田): 세금을 받아 종족의 제사를 지내는 비용에 충당하는 전답.

⑨頃(경): 일경(一頃)은 춘추-전한 때의 단위로는182a로100무(畝)이며1무는55평이니1경은5,500평이다. 즉 천경은550만 평에 해당한다.

⑩경사(卿士): 서주시대 때 왕족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상대적으로 관료들의 수장이었던 무사(巫史)의 위치가 격하되었다. 당시 무사는 군사, 행정, 사법, 외교 등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왕족들의 견제를 받고 그 권력이 분산되었다. 이에 태사(太史) 요(寥)가 경사(卿士)가 되어 무사와 함께 같은 반열에 서게 되고 이로써 서주 시 관직에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후에 다시 무사가 갖고 있던 직무를 모두 장악하게 된 경사는 서주 말기 관직의 최고 수장이 되어 군사, 행정, 사법, 외교 등의 모든 직무를 관장했다.

⑪기풍(岐豊): 기(岐)는 현 섬서성 미현(眉縣)및 기산(岐山) 일대를 말하며 풍(豊)은 호경(鎬京) 이서쪽의 땅을 말한다. 즉 호경(鎬京) 이서 쪽은 모두 견융의 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⑫소공(召公) 석(奭): 주무왕을 도와 주왕조를 창건한 삼공 중의 한 사람이다. 삼공이란 태공(太公) 여상(呂尙), 주공(周公) 희단(姬旦), 소공(召公) 희석(姬奭)을 말하며 태공은 제(齊)에, 주공은 노(魯)에, 소공(召公)은 연(燕)에 봉해졌다.

⑬효함(殽函): 하남성과 산서성의 경계를 이루며 황하의 남쪽 강안에 솟아 있는 산맥의 이름으로 함곡관은 이곳을 지키던 유명한 요새 이름이다.

※미주1.

신국(申國)

《국어(國語)·주어(周語)》에 “제(齊)、허(許)、신(申)、여(呂)는 대강(大姜)에 유래되었다”고 했다. 삼국 때 오(吳)나라 위소(韋昭)의 해설에 따르면 네 나라는 모두 강성(姜姓)이고 신나라는 강융(姜戎)이라고 했다. 일찍이 지금의 섬서성 보계(寶雞) 미현(眉縣)과 그 이북 지방에 근거를 둔 제후국으로 오래 전부터 화하(華夏) 족과 서융(西戎)과의 사이에 섞여 살았다. 선주(先周) 때부터 희성(姬姓)의 주족(周族)들과 대를 이러 혼인관계를 맺었다. 주태왕(周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 왕계(王季), 문왕(文王)의 비는 모두가 대강(大姜) 출신이었다. 서주 후기 신국은 계속해서 주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주나라 조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주려왕 때 신계(申季)는 대신을 지냈다. 주려왕, 주선왕, 주유왕 모두 신국의 여인을 왕비로 맞이했다.

주이왕(周夷王), 주려왕(周厲王)의 폭정으로 쇠락해진 서주 왕조를 이은 주선왕(周宣王)은 윤길보(尹吉甫), 신백(申伯), 소호(召虎)등의 현인을 등용하여 국세를 회복하여 중흥을 이루었다. 주선왕은 이에 신백(申伯)을 사(謝)에 봉하여 남방의 초나라를 견제하도록 하고 주나라의 위세를 높이고자 빈번히 전쟁을 벌이다 재위36년(BC 792년)에는 서방의 우호세력인 강융(姜戎)을 갑자기 침략하여 한때 승리했지만 재위39년에 강융(姜戎)의 여러 나라들이 힘을 합하여 천무(千畝)에서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사(謝)는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당하현(唐河縣)으로 추정된다.

섬서성 미현에 봉해졌던 서신국(西申國)

황하 중류지역 일대에 흩어져 살던 숙제(叔齊)의 후손들이 후에 황하를 건너 지금의 섬서성 서단의 부풍(扶風)으로 이주했다가 주목왕(재위 전1022-975년)이 서쪽을 순행할 때 숙제의 자손들이 협조하여 공을 세웠음으로 후작의 작위를 받아 신후(申侯)라 칭해졌다. 역사상 이를 서신국이라고 부른다. 서신국의 도성은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미현(眉縣)으로 후에 신융(申戎) 혹은 강씨지융(姜氏之戎) 등으로 불리웠다.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에 따르면 서신후(西申侯)는 종주(宗周) 치하에서 서수(西陲)를 다스리면서 정치적인 기반을 닦아 주왕실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 번성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군사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서주 말 주유왕11년(전771년),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희의구(姬宜臼)가 그의 모친과 함께 서신국으로 도망쳐 신후의 도움을 청했음으로 신후는 증국(鄫國) 및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서주의 도성으로 진공하여 주유왕을 살해하여 서조왕주롤 멸했다. 그 신후는 실제 상 서신의 군주로 주나라와 왕도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남양의 신백(申伯)이 아니었다. 주환왕(周桓王) 희림(姬林) 16년(전704년) 전헌공이 평양(平陽)으로 천도할 때 서신국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은 병탄되었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왕족과 국인들은 나라 이름을 성씨로 삼아 신씨로 했다.

남양(南陽)의 남신국(南申國)

주성왕(周成王) 희송(姬誦)이 즉위하고 주공 희단이 정사를 보좌할 때(전1103-1081년), 백이(伯夷)의 후예들을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경내의 여(呂) 땅에 봉하고 신국을 세웠다. 작위는 백작으로써 그 군주를 신백으로 부르고 여(呂) 땅은 신국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신국은 남신국이다. 남신국의 군주들은 대를 이어 서주왕조의 경사(京司)를 지내고 주선왕 재위시(전827-784년) 문무를 겸비한 신백이 주선왕을 보좌하여 주나라를 중흥시킨 공을 크게 세웠음으로 주선왕은 신백을 회하(淮河) 상류지역에 증봉하고 소백(召伯)에게 명하여 새로운 도읍인 사성(謝城)을 건설하게 했다. 당시 주선왕은 신백을 남쪽의 봉지로 보내면서 초나라 세력의 북진을 방어하여 남양의 땅을 보위하라는 명을 내렸다. 신백은 사읍에 거처하면서 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 사읍은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완성(宛城)이다. 당시 서주의 현능한 재상 중산보(仲山甫)는 신백의 덕을 찬양하기 위해 숭고(崧高)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숭고는 시경의 대아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남신국은 춘추 때인 주장왕(周莊王) 9년(전688년)에 초나라의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선 초문왕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은 초나라에 병합되어 후에 초나라의 중원진출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신국의 귀족들과 국인들은 자신들의 성을 신(申)으로 삼았다.

※진나라의 호칭문제

진(秦), 진(晉), 진(陳)의 호칭문제로써 당진(唐晉)과 섬진(陝秦), 진(陳)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하면 秦은 친, 晉은 진, 陳은 찬이다. 문제는 진진(晉秦) 두 나라가 춘추시대 전 기간을 통해 강대국으로 군림하면서 황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해 혹은 협력하고 혹은 분쟁을 일으켜 쉴 새 없이 접촉했기 때문이다. 호칭을 할 때마다 한자를 병기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원전과는 달리 두 나라의 호칭을 당진과 섬진으로 해서 독자들의 혼란을 막고자 했다.

1. 당진(唐晉)

진(晉)은 주무왕의 뒤를 이은 성왕이 그 동생 당숙우(唐叔虞)가 봉해진 나라로 지금의 산서성 일대와 하남성 황하 이북의 서쪽 지역을 관할로 했다. 진(晉)의 원래 지명 당(唐)은 요임금의 나라 이름이었다. 후에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司馬炎)이 나라 이름을 진(晉)으로 정한 것은 사마씨의 근거지가 태원 부근이었고 또 이연(李淵)이 세운 당나라도 이씨들의 근거지가 산서성 태원 이었음으로 때문에 나라 이름도 당이라고 했다. 당진은 진문공(晉文公) 이래 춘추시대 전 기간을 통해 패자로 군림하다가 춘추말기 당진의 거족인 한(韓), 위(魏), 조(趙) 삼가(三家)가 공실을 삼분하여 각각 나라를 세워 기존의 섬진(陝秦), 제(齊), 초(楚), 연(燕) 등의 네 나라와 전국시대를 열었다. 이 일곱 나라를 전국칠웅이라고 한다.

2. 섬진(陝秦)

진(秦)은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天水市) 일대에서 발흥한 나라로 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나라다. 성은 영(嬴)이다. 섬(陝)은 그 유래가 주무왕의 동생 주공단으로 올라간다. 기원전13세기 경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주왕조를 창건했으나 나라의 기초를 완성하기 전에 죽고 그의 아들은 성왕은 아직 어렸다. 이에 주공이 소공과 협조하여 주나라를 섬(陝)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로 양분하고 섭정이 되어 해당지역을 각각 통치했다. 후에 성왕이 장성하자 두 사람은 섭정의 자리에 물러나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즉 주공은 섬의 동쪽인 섬동지역을 다스리고 소공은 섬의 서쪽 지역인 섬서지역을 다스렸기 때문에 지금의 섬서성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섬(陝)은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의 옛 지명이다. 진진(晉秦) 두 나라의 구분을 위해 당진과 섬진으로 표기했으나 전국시대에서는 당진과 진(陳) 두 나라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섬진만 존재했기 때문에 진이라고 표기했다.

3. 진(陳)

진(陳)은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창건하고 제후들을 봉할 때 인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순임금의 후손을 찾아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 일대에 봉한 나라다. 춘추시대 전 기간을 통해 약소국으로 당진과 초나라에 번갈아 위성국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춘추말기 결국은 초나라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춘추초기 국내에서 발생한 내란으로 인해 공자 진완(陳完)이 제나라로 망명하여 제환공으로부터 대부에 임명되고 전(田)이라는 봉지를 받았다. 이에 성을 전씨로 바꾼 진완의 후손들은 번영을 계속하여 제나라의 정권을 전단하다가 결국 기원전385년 강성의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전씨의 나라를 세웠다. 진완이 제나라에 망명한 해는 기원전672년이고 진완의 후손 전화(田和)가 제나라의 국권을 빼앗아 군주의 자리에 오른 해는 기원전386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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