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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1:42:474222 
제47회. 吹簫跨鳳(취소과봉), 背秦立君(배진입군)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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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47회 吹簫跨鳳 令狐失信(취소과봉 영호실신)

퉁소로 부른 봉황을 타고 하늘에 올라 선녀가 된 농옥과

영호에서 섬진과의 신의를 버리고 영공을 세운 조돈

1. 농옥취소(弄玉吹簫)

- 소사(簫史)로부터 배운 퉁수소리로 부른 봉황을 타고 선녀가 된 농옥-

마침내 섬진의 목공은 융적(戎狄)의 땅20여 국을 합쳐 서융의 백주(伯主)가 되었다. 주양왕은 윤무공을 사자로 보내 서융을 복속시킨 업적을 축하하며 금으로 만든 북을 하사했다. 그때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주나라까지 여행을 할 수 없었던 목공은 공손지를 대신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게 했다. 그 해에 요여가 병으로 죽자 목공이 매우 애통해 했다. 목공은 맹명시를 우서장(右庶長)에 명하여 요여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 주나라에 사자로 다녀온 사이에 요여의 자리에 맹명시가 임명된 것을 본 공손지는 목공의 마음이 맹명시에 쏠려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들었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청하자 목공이 허락했다.

한편 섬진의 목공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그 아이가 태어날 때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옥돌을 목공에게 바쳤다. 목공이 장인에게 명하여 갈고 닦도록 해서 그 안에서 푸른색을 띄운 참으로 아름다운 옥을 얻었다. 어린 딸이 돌이 되어 돌잔치를 하던 중 쟁반에 여러 가지 물품을 놓고 그 중에 한 가지를 집어 들도록 했다. 그 어린 여아는 다른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옥만을 집어 노리개로 삼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여아의 이름이 농옥(弄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아가 점점 나이가 들자 그 자태가 천하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총명하기가 그지없었다. 또한 생황(笙簧)①에 정통하여 달리 선생에게서 배우지도 않고 스스로 음조를 깨우쳐 불었다. 목공이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장인을 불러 그 옥을 갈아 생황을 만들어 농옥에게 불게 하자 그 소리는 마치 봉황이 우는 소리와 같이 아름다웠다. 농옥을 사랑한 목공은 누각을 여러 채 지어 이름을 봉대(鳳樓)라 부르고 그곳에 살도록 하고 다시 봉루 앞에 높은 대를 짓고 봉대(鳳臺)라고 이름 지었다. 농옥의 나이15세가 되어 목공이 좋은 배필을 구해 주려고 하자 농옥이 목공 앞에서 스스로 맹세했다.

「반드시 생황을 잘 불어 내가 부는 생황 소리에 화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만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 시집을 가지 않겠습니다.」

목공이 좌우에게 명하여 생황을 잘 부는 사람을 찾게 하였으나 그런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옥이 누각 안의 처소에서 창문의 주렴을 걷고 한가롭게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마치 거울과 같은 맑은 달이 떠 있었다. 시녀에게 향을 피우게 한 농옥은 파란 옥으로 깎아 만든 생황을 가져오게 하여 창가에 앉아서 불기 시작했다. 청초한 생황 소리는 누각 밖으로 퍼져나가 하늘에 닿는 듯 하더니 솔솔 불어오는 미풍을 타고 갑자기 농옥의 생황소리에 화답이나 하는 듯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나는 듯도 하여 농옥이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생각하여 즉시 생황 불기를 중단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우렸으나 동시에 그 소리도 멈추어 버렸다. 단지 그 여음만이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내는 소리처럼 끊어지지 않고 은은하게 들려왔다. 산들 바람을 맞으며 망연하게 서 있는 농옥에게는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전한 마음이었다. 누각의 방 안에서 밤이 깊어지도록 서성거리다가 달은 기울고 향불은 다 타버려 할 수 없이 생황을 침상 머리맡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옹성의 서남쪽 하늘에서 문이 열리고 오색의 노을빛이 마치 대낮처럼 비추더니 한 사람의 미장부가 새의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역시 새털로 짜서 만든 옷을 입고 오색찬란한 봉황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봉대(鳳台) 위에 내렸다. 미장부가 농옥을 향해 말했다.

「나는 태화산(太華山)②의 주인인데 상제가 나에게 명하여 당신과 혼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게 되어 금년 중추절에 혼인식을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꿈속에 나타나서 알려주니 그리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미장부는 즉시 허리에서 붉은 옥으로 만든 퉁소를 꺼내어 란간을 기대고 불기 시작했다. 오색찬란한 봉황이 그 피리 소리에 맞춰 울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봉황이 우는 소리와 퉁소 소리가 어울려 마치 한 소리처럼 들리며 오음 중 궁(宮)과 상(商)이 조화를 이루어 종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번갈아 가며 나는 소리 같았다. 농옥의 정신이 혼미해지며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이 곡의 이름은 무엇이라 합니까?」

꿈속의 미장부가 대답했다.

「이 곡은 《화산음(華山吟)》중 《제일농(第一弄)》이라 합니다. 」

농옥이 다시 물었다.

「이 곡을 배울 수 있습니까?」

미장부가 대답했다.

「앞으로 서로 혼인할 인연인데 어찌 가르쳐 드릴 수 없겠소?」

말을 마치고 앞으로 다가온 미장부가 농옥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은 마치 생시의 일처럼 생생했다. 아침이 되어 그 꿈 이야기를 목공에게 말했다. 즉시 맹명시를 불러 꿈속의 미장부를 그림으로 그리게 한 목공은 그림을 지니고 태화산에 가서 그 미장부를 찾도록 했다. 맹명시가 태화산 가까이 와서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자기가 찾는 사람에 대해 묻고 다녔다. 농부 중 한 사람이 태화산을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산꼭대기에 명성암(名聲岩)이라고 있는데 그곳에 기인 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난7월15일 그곳으로 올라가 오두막집을 짓더니 혼자 살면서 매일 산에서 내려와 술을 사가지고 혼자 마시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반듯이 퉁소를 한 곡조 부는데 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져 그 퉁소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소리에 취해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맹명시가 태화산을 올라가 명성암에 이르자 과연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머리에는 새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몸에는 학의 깃털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백옥과 같이 하얀 얼굴에 주단같이 붉은 입술, 세속의 분진에서 벗어난 듯한 고고한 기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맹명시는 그가 기인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맹명시가 이름과 성을 묻자 그가 대답을 했다.

「성은 소(簫)이고 이름은 사(史)입니다. 귀하는 어떤 분이시기에 이곳까지 왕림하셨습니까?」

「나는 이 나라의 우서장(右庶長)의 직책을 맡고 있는 백리시(百里視)라는 사람입니다. 저의 군주께서는 사랑하는 딸이 있는데 그 배필을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생황을 잘 부는 그녀는 자기의 배필이 될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부는 생황소리에 화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음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음률에 조예가 매우 깊으시다는 소문을 저의 군주께서 들으시고 선생을 청하여 한 번 그 소리를 듣고자 저에게 명하여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음률에 대해 조금 알고는 있다 하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리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는데 공연히 욕됨만을 입을 것만 같아 감히 제가 명을 따를 수 없겠습니다.」

「저와 같이 가서 우리 군주님을 뵙고 퉁소를 한 번 부신다면 모든 일은 자연히 밝혀질 것이니 부디 사양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맹명시의 간청에 소사가 산에서 내려가 목공을 배알하겠다고 허락했다. 즉시 두 사람은 산위에서 내려와 맹명시가 타고 온 수레에 같이 올라 옹성(雍城)으로 되돌아 왔다. 맹명시가 먼저 목공을 배알하고 태화산에서 소사를 만나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고 목공 앞으로 인도하여 알현하게 했다. 봉대에 머물고 있던 목공에게 소사가 절을 올렸다.

「신은 산속에 사는 일개 필부라 예의와 법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소사의 생김새가 단아하여 세속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목공은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목공은 즉시 소라를 가까이 불러 다가오게 한 후에 물었다.

「내가 들으니 퉁소를 잘 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생황도 역시 잘 부는가?」

「신은 단지 퉁소만 불 수 있으며 생황은 불 수 없습니다.」

「나는 생황을 잘 부는 사람을 내 딸의 배필로 찾고 있는 중이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퉁소와 생황은 같은 종류의 악기가 아니라 하니 그대는 내 딸의 배필이 아닌 것 같다.」

목공이 맹명을 불러 소사를 데리고 나가게 했다. 농옥이 듣고 시녀를 보내어 목공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퉁소와 생황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 근본이 같습니다. 손님이 스스로 퉁소를 잘 분다하는데 한 번 불게 하여 들어보시지도 않으시고 어찌 그냥 돌려 보내려 하십니까?」

목공은 그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즉시 소사를 다시 불러들여 퉁소를 불어보도록 명했다. 전당으로 들어온 소사가 붉은 색을 띠고 있는 퉁소를 허리춤에서 꺼냈다. 소사의 퉁소에서 뿜어내는 은은한 빛이 붉은 광선으로 변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희귀한 보물이었다. 첫 곡을 불자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두 번째 곡을 연주하자 오색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곡이 세 번째에 이르자 백학이 날아와 피리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공중에서 날개로 춤을 추고 공작새 여러 쌍이 후원으로 날아들고 그 뒤를 따라 온갖 새들도 모여들어 노래로 화답하더니 시간이 흐르자 모두 사라졌다. 목공이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때 주렴을 치고 방안에 있으면서 소사가 퉁소를 부는 모습을 몰래 살펴본 농옥 역시 매우 기뻐하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야 말로 나의 진정한 부군이로다!」

목공이 다시 소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생황과 퉁소가 화음을 어떻게 맞추는지 아는가? 그리고 생황과 퉁소는 그 시작이 어떠한지 알고 있는가?」

「생황이라는 이름의 생(笙)은 생긴다는 뜻의 생(生)이니 여와(女媧) 수인씨(燧人氏)③가 만들었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취하여 새롭게 기를 발생하게 하고 그 음률은 육률(六律) 중 양성(陽聲)의 태족(太簇)④에 해당하는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소(簫)라는 이름은 즉 엄숙하다는 뜻의 숙(肅)이라,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⑤가 만들었는데 사물의 도리를 취하여 엄숙하고 청아한 기운을 내게 하며, 그 소리는 열두 가지 음률 중 음성(陰聲)의 중려(仲呂)에 해당하는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라!」

「신이 알고 있는 것은 퉁소뿐이라 퉁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복희씨가 대나무를 여러 개 엮어서 퉁소를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들쑥날쑥 하게 되어 마치 봉황새의 날개와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그 퉁소에서 나는 소리는 매우 아름다워 마치 봉황새의 울음소리와 같았습니다. 큰 것은 『아소(雅簫)』라고 하는데 대나무로 된 관을23개로 엮어서 만들었고 그중 제일 긴 관은4촌 정도 됩니다. 적은 것은 『송소(頌簫)』라 하는데 대나무 관을16개로 엮어서 만든 것으로 그중 길이가 제일 긴 것은2촌이 됩니다. 그 관들을 모두 통 틀어서 소관(簫管)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그 소관에 밑바닥이 없는 것을 퉁소(洞簫)라 합니다. 그 후에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께서 영륜(伶倫)⑥을 보내 곤계(昆谿)⑦의 땅에서 베어 온 대나무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피리(笛)를 만들어 불게 했는데 그 소리 역시 봉황이 우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피리는 퉁소와는 달리 모양이 매우 간단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소관의 모양이 너무 번거롭다고 생각하여 대나무 관 한 개로 소(簫)를 만들어 불게 하였습니다. 한편 그 길이가 큰 것은 소(簫)라 하고 짧은 것은 관(管)이라 합니다. 지금의 소(簫)라고 부르는 악기는 옛날에 말하는 소하고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소를 불면 어찌하여 진귀한 날짐승들이 몰려드는가?」

「통소의 모양은 비록 간편해 졌으나 그 소리는 변하지 않아 한 번 불면 마치 봉황이 우는 소리 같습니다. 그리고 곧 봉황은 뭇 날짐승들의 왕이라 소의 소리를 듣게 되면 모든 날 짐승들이 왕의 소리로 알고 날아들기 때문입니다. 옛날 순임금께서 퉁소의 소리를 즐겨하셨는데 봉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와 인사를 올렸다고 했습니다. 봉황조차도 이러 했을지언정 한낱 다른 뭇 날짐승들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사의 말이 마치 물 흐르듯이 막힘이 없고 그 목소리는 크고 낭랑하였다. 목공이 더욱 기뻐하며 소사에게 말했다.

「과인에게는 농옥이라는 사랑하는 딸이 있는데 음률에 사뭇 정통하여 음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코 시집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보건데 내 딸을 그대의 아내로 주고 싶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소사가 얼굴에 엄숙한 기색을 띄우며 절을 올리고 사양했다.

「신 소사는 깊숙한 산골짜기에 살던 이름 없는 야인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존귀하신 공주님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내 딸이 면전에서 맹세를 하기를 ‘생황의 음률에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시집을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오늘 보니 그대의 퉁소는 능히 천지간을 통하고 만물에 이치를 꿰뚫고 있으니 오히려 생황의 음률에 정통하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하다 하겠다. 항차 내 딸이 옛날에 꿈을 꾸기를 오늘8월15일 중추절에 하늘이 혼인을 맺어 준다고 했으니 그대는 절대 사양하지 말라!」

소사가 다시 절을 올리며 감사의 말을 올렸다. 목공이 태사에게 점을 쳐서 길일을 택하여 혼인의 날을 잡게 했다. 목공의 명을 받아 점을 친 태사는 하늘의 달이 둥글게 되면 땅에는 그 둥근 달처럼 사람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그날 중추절이 대길이라고 하였다.

목공이 즉시 좌우에게 명하여 소사를 목욕탕으로 데려가 몸을 깨끗이 씻게 한 후에 새로운 의관을 하사하여 갈아입히고 봉루로 보내어 농옥과 부부의 관계를 맺게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화목한 부부가 되어 함께 살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목공이 소사에게 중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소사가 조당의 관리들과 반열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국정에는 전혀 관여를 하지 않고 하루의 대부분을 봉루에 기거하면서 불로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단지 간혹 가다가 술만 몇 잔씩 마시며 살았다. 농옥도 소사를 따라 선식의 방법을 따라 배워 역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화식을 끊을 수 있었다. 소사가 농옥에게 『래봉(來鳳)』이라는 곡을 퉁소로 부는 법을 가르쳤다. 농옥에게 퉁소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약 반년이 되었을 때, 어느 날 밤 갑자기 부부가 달밤에 퉁소를 불었다. 그러자 곧이어 봉대의 왼쪽에 자주 색의 봉황이 몇 마리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다시 오른쪽에는 붉은 용이 나타나 몸통을 둥글게 틀면서 앉았다. 소사가 농옥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원래 하늘나라에 살던 신선이었소. 상제께서 인간들의 사적이 문란하게 되자 나에게 명하여 그것들을 정리하도록 하셨소! 즉시 나는 하늘에서 내려와 주나라 선왕17년5월5일 주나라의 소씨 집안에서 태어나 그 셋째 아들이 되었소. 주선왕(周宣王) 말년⑧에 이르러 사관의 뒤가 끊기자 내가 즉시 그 뒤를 이어 전적(典籍)의 끊겨지고 누락된 부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내어 앞과 뒤를 연결시켜 놨소. 주나라 왕실에서 나에게 역사를 끊어지게 하지 않은 공이 있다고 하여 나에게 소사(簫史)라를 이름을 하사했소. 오늘이 내가 태어난 날로 부터110년이 되는 날이요⑨ 상제가 나에게 화산의 주인으로 명하여 그대와는 전생의 연분이 있기 때문에 퉁소의 소리로써 짝을 맺게 했소. 그러나 이제 인간 세상에 더 이상 너무 오래 머무를 수 없게 되어 지금 용과 봉황이 우리를 모셔가려고 날아왔소. 당신도 나와 함께 용과 봉황을 타고 하늘나라로 같이 올라갑시다.」

농옥이 듣고 그 부친에게 작별의 인사를 드리려고 하자 소사가 말리며 말했다.

「우리는 이미 신선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사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하오! 어찌 가족들과 미련의 끈을 끊지 않으려고 하시오?」

마침내 소사와 농옥은 각기 적룡과 봉황을 타고 봉대 위로 날라 멀리 하늘나라로 올라가버렸다. -오늘날 좋은 사위를 얻었다는 뜻의 ‘승룡(乘龍)’이라는 말은 이 일에서 생겼다.- 그날 밤 사람들은 태화산에서 들려오는 봉황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다음날 아침 궁중의 시자들이 농옥의 부부가 없어진 사실을 목공에게 고했다. 목공이 망연자실하더니 곧이어 한탄의 말을 하였다.

「신선이 있다 하더니 과연 거짓이 아니로다! 아직도 용과 봉황이 남아서 나를 태우려고 온다면 나는 군주의 자리를 헌 짚신 버리듯이 하리라!」

목공이 즉시 주위에게 명하여 태화산에 가서 그들의 종적을 한번 찾아보게 했으나 아무런 소식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다시 소사가 묵었던 명성암에 사당을 짓게 하고 해마다 거르지 않고 술과 과일을 바쳐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지금도 그 사당을 소녀사(簫女祠)라고 하는데 사당에 제사를 지낼 때는 봉황새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육조(六朝) 때 포조(鮑照)라는 문인이 지은 《소사곡(簫史曲)》이라는 시가 있다.

소사(簫史)는 항상 어린 모습이었고

농옥 또한 항상 동안이었다.

화식을 버리고 신선이 되어

구름을 불러 타고 높은 하늘로 올랐다.

簫史愛小年(소사애소년)

嬴女吝童顔(영녀린동안)

火粒愿排棄(화립원배기)

霞霧好登攀(하무호등반)

용은 날아 하늘 높이 숨고

봉황은 진나라 관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시간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퉁소 소리를 들어야만 다시 오려나!

龍飛逸天路(용비일천로)

鳳起出秦關(봉기출진관)

身居長不返(신거장불반)

簫聲時往還(소성시왕환)

또 강총(江總)이라는 시인도 이 일에 대해 역시 시를 읊었다.

농옥은 진나라 군주 딸이고

소사는 동자의 모습을 한 신선이었다.

중추절의 밝은 달이 떠있을 때 인연을 맺고

다시 하늘로 날아가니 봉루는 텅텅 비었구나!

弄玉秦家女(농옥진가녀)

簫史善處童(소사선처동)

來時兔̀月滿(래시토월만)

去后鳳樓空(거후봉루공)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띠고 부르니

공중을 떠다니던 퉁소소리가 또다시 들리는 구나!

서로 동남동녀의 모습을 한 신선을 기약하고

자욱한 안개 속의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密笑開還斂(밀소개환렴)

浮聲咽更通(부성열갱통)

相期紅粉色(상기홍분색)

飛向紫烟中(비향자연중)

2. 삼량순장(三良秦殉葬)

- 죽음에 임하여 삼량을 순장시킨 진목공-

이때부터 목공은 병사와 전쟁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를 싫어하고 세상의 모든 일을 초연하게 생각하여 국정은 모두 맹명시에게 전임하고 매일 마음과 몸을 수련하여 무위의 상태가 되어 신선이 되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공손지도 세상을 떴다.

맹명시가 차씨의 삼형제 엄식(奄息), 중행(仲行), 침호(鍼虎)가 모두 인자하고 덕을 갖었다고 해서 목공에게 천거했다. 나라 안의 백성들은 그들을 삼량(三良)이라고 호칭했다. 목공이 그들을 모두 대부의 벼슬에 임명하고 예를 갖추어 공경했다. 다시3년이 지난 주양왕31년2월 말일, 봉대에 앉아서 달을 쳐다보며 그의 딸 농옥을 생각하던 목공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는지 등등을 생각하다가 깜빡 잠이 들어 꿈속에서 소사와 농옥을 보게 되었다. 이윽고 한 마리의 봉황새가 목공을 태우더니 달나라에 있는 광한궁(廣寒宮)으로 날라 가 그 위를 배회하며 구경시켰다. 맑고찬바람에 뼛속 까지 깊이 사무친 목공은 몸서리치며 꿈에서 깨어났으나 곧이어 한질에 걸리고 말았다. 자리에 누운 지 수 일만에 목공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람들은 목공이 신선이 되기 위해 죽었다고 말했다.

목공은 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래 모두39년 만인 그의 나이69세에 죽었다. 옛날 당진의 헌공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목공은 아들 앵(罃)을 낳아 태자로 세웠었다. 태자 앵이 목공의 뒤를 이어 섬진국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강공(秦康公)이다. 목공의 시신은 옹(雍)에 묻혔다.

그때 섬진국은 서융의 습속에 따라 산 사람을 순장했는데 모두177명이나 되었다. 차씨 삼형제도 그 숫자에 포함되어 산채로 목공의 묘에 묻히게 되어 죽었다. 나라 안의 백성들이 차씨의 죽음을 『<황조(黃鳥)』라는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그 시는 『시경(詩經)·국풍(國風)』 중 『진풍(秦風)』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꾀꼴꾀꼴 꾀꼬리 가시나무에 앉았네!

누가 목공을 따라갔나? 차씨의 아들 엄식이로다.

차씨의 아들 엄식이여, 백사람보다 낫도다!

무덤에 임했을 때는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었겠지

푸른 하늘이여, 어찌하여 훌륭한 분을 죽였는가?

대속할 수만 있다면 우리 백 사람의 몸도 바칠텐데!

交交黃鳥止于棘(교교황조 지우극)

誰從穆公子車奄息(수종목공 자거엄식)

維車奄息百夫之特(유거엄식 백부지대)

臨其穴惴惴其慄(임기혈 췌췌기율)

彼蒼者天殲我良人(피창자천 섬아양인)

如可贖兮人百其身(여가속혜 인백기신)

꾀꼴꾀꼴 꾀꼬리 뽕나무밭에 앉았네!

누가 목공을 따라갔나? 차씨의 아들 중항이라네!

차씨의 아들 중항이여! 백 사람보다 낫도다!

무덤에 임했을 때 부들부들 떨었겠지

푸른 하늘이여! 어찌하여 훌륭한 분을 죽게 했는가요?

대속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백 사람의 몸이라도 바칠텐데

交交黃鳥之于桑(교교황조 지우상)

誰從穆公子車仲行(수종목공 자거중행)

維車仲行百夫之防(유거중항 백부지방)

臨其穴惴惴其慄(임기혈 췌췌기율)

彼蒼者天殲我良人(피창자천 섬아양인)

如可贖兮人百其身(여하속혜 인백기신)

꾀꼴꾀꼴 꾀꼬리, 가시덤불 위에 앉고요

누가 목공을 따라갔나? 차씨의 아들 침호라네!

차씨의 아들 침호여, 백 사람을 당할 분이로다

무덤에 임했을 때, 부들부들 떨었겠지

푸른 하늘이여! 어찌하여 훌륭한 분을 죽게 했는가요?

대속할 수만 있다면, 백 사람의 몸이라도 대신했을 것을!

交交黃鳥止于楚(교교황조 지우초)

誰從穆公子車鍼虎(수종목공 자거침호)

維車鍼虎百夫之禦(유거침호 백부지어)

臨其穴惴惴其慄(임기혈 췌췌기율)

彼蒼者天殲我良人(피창자천 섬아양인)

如可贖兮人百其身(여가혹혜 인백기신)

후세 사람들은 차씨 삼형제를 삼량이라고 임용한 후에 다시 순장을 시켜 그들을 죽인 목공의 행위는 자기가 죽은 뒤의 진나라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나 송나라 때의 소동파만은 글을 지여 진목공의 무덤에 바쳤는데 그 생각하는 바가 다른 사람들 보다 뛰어났다.

「성의 동문으로 나가 백보도 되지 않은 곳에 탁천(橐泉)이라는 샘물이 있다. 목공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옛날에는 이곳이 성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섬진의 백성들은 목공의 무덤을 이곳을 표시로 삼아 알았다. 옛날에 목공이 살아 있었을 때 맹명을 세 번이나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는데 어찌 그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삼량을 살려 두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곧 옛날 전한(前漢) 때 제 나라의 전횡(田橫)⑩이 죽자 그를 따르던3백 명이나 되는 사람도 같이 따라 죽었듯이 이 세 사람도 목공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단지 밥 한 끼만 얻어먹어도 보답을 위해 능히 그 몸을 버렸는데 오늘날은 그와 같이 행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던 관계로 옛날 사람들의 일을 의심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의 행함을 우리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으니 지금 우리의 생각으로 옛날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지어다!⌟

3. 趙盾執政(조돈집정)

- 집정이 되어 당진국을 부흥시키는 조돈-

한편 당진의 양공은 군주의 자리에 오른 지6년째 되던 해인 주양왕29년에(전623년) 그의 어린 아들 이고(夷皐)를 세자로 세웠다. 그 해에 조쇠(趙衰), 란지(欒枝), 선차거(先且居), 서신(胥臣) 등이 차례로 계속해서 죽었다. 네 명의 경(卿)직에 있던 중신들의 죽음으로 그 자리가 비게 되었다. 양공은 병거와 군사들을 대거 이(夷) 땅에 모이게 하여 새로 편제한 이행(二行)을 폐하고 옛날처럼 삼군으로 군제를 개편했다. 양공이 중군을 사곡(士穀)과 양익이(梁益耳)를, 상군은 기정보(箕鄭父)와 선도(先都)를 각각 주수(主帥)와 부수(副帥)로 임명하려고 하자 선차거(先且居)의 아들 선극(先克)이 간했다.

「호씨(狐氏)와 조씨(趙氏) 두 가문은 우리 당진에게 공을 크게 세운 중신들의 집안입니다. 그 후예들을 쓰지 않고 버리시면 안 됩니다. 현재 벼슬이 사공에 불과한 사곡은 양익이와 더불어 싸움에 나가 아무런 전공을 세운 바가 없는데도 그들에 중군을 맡기려고 한다면 여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복종하지 않을까 걱정되어서입니다.」

양공이 선극이 간언을 받아 들여 즉시 호석고를 중군원수로 삼고 조돈은 그 부수로 했다. 또한 기정보(箕鄭父)는 상군원수에 순림보(荀林父)는 그 부수로, 하군원수에는 선멸(先蔑)을, 그 부수에는 선도(先都)를 임명했다. 이윽고 중군원수가 된 호석고가 등단하여 군사들에게 령을 내리는데 지휘를 자기 생각대로 할뿐 아니라 방약무인하여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호석고의 심복으로 군사마에 있는 유병(臾騈)이 보고 간했다.

「이 병이 듣기로는 전쟁을 앞둔 군사들이 서로 화목해야만 싸움에서 승리를 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삼군의 원수와 부수들은 모두 싸움터에서 뼈가 굵은 숙장들이 아니고 권문세가들 출신들입니다. 원수께서는 마땅히 마음을 비우시고 찾아가 서로 상의하시면서 항상 겸양하고 남의 뒤에 서려는 마음가짐으로 대해야만 합니다. 무릇 강직한 자세는 스스로 자부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인해 초나라의 자옥(子玉)이 우리 당진과의 싸움에서 패하게 된 것입니다.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호석고가 듣더니 노하여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제 군사들에게 령을 처음으로 내리려는 마당에 필부가 어찌 이렇게 감히 어지러운 말을 하여 군심을 태만히 할 수 있단 말인가?」

호석고가 좌우에게 소리쳐 유병에게 채찍 백대의 형을 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불만을 갖게 되었다.

한편 사곡과 양익이는 선극이 자기들의 기용을 방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한을 품게 되었다. 선도도 선극으로 인하여 상군원수의 직을 얻지 못했다 하여 역시 한을 품었다. 그때 양처보는 보빙사절로 위(衛)나라에 가 있었던 바람에 삼군의 새로운 인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나라에서 돌아와 중군원수에 호석고가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양처보는 비밀리에 양공을 찾아가 상주했다.

「호석고는 성격이 강직하여 항상 남의 윗자리에만 앉으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군원수의 직을 맡을 만한 재목이 아닙니다. 신이 옛날에 자여가 이끄는 신상군의 부수로 있을 때 그의 아들 조돈을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조돈이 정말로 어질고 그 재주가 뛰어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릇 어진 사람을 받들고 재주 있는 사람을 임용하는 일은 나라의 전범(典範)입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중군원수를 뽑으실 때 어찌하여 조돈과 같은 사람을 택하지 않으셨습니까?」

양처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양공은 즉시 그를 시켜 병거와 군사들을 동(蕫)⑪ 땅에 다시 소집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것이 중군원수를 바꾸기 위해 사전에 취한 조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호석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중군의 장수들이 서 있는 반열의 제일 앞자리에 섰다. 양공이 호석고의 자를 부르며 말했다.

「가계(賈季)는 들으시오! 예전에는 과인이 조돈으로 하여금 그대를 보좌하도록 하였지만 이제는 그대가 조돈을 보좌하기 바라오!」

호석고가 감히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예,예’ 라고 대답하며 뒤로 물러 설수 밖에 없었다. 양공이 즉시 조돈을 중군원수에 제수하고 호석고를 부수로 삼았다. 그러나 상군과 하군은 아무도 바꾸지 않고 예전처럼 그대로 두었다. 조선자(趙宣子) 돈(盾)은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국정을 맡게 되었다.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형법을 바로잡았으며 형옥의 일을 옳게 가리고 조세의 체납이나 탈세를 엄히 감독했다. 또한 대차 관계에는 증서를 사용하게 했으며 종래의 악정을 철폐하고 귀천상하의 질서를 근본으로 삼고 있어야할 직관이었으나 폐지되었던 직책을 복구시키고 초야에 묻혀있는 인재들을 찾아내 발탁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제도가 정해지자 그것들을 태부 양처보와 태사(太師) 가타(賈佗)에게 맡겨 당진국 전역에 시행케 하여 일정한 법도로 삼게 했다. 나라 안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어떤 사람이 양처보에게 말했다.

「자우(子孟)의 말은 사심이 없는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하겠으나 그로 인하여 중군원수의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으로부터 원한을 사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인데 어찌 감히 사사로운 원한을 살 것을 염려하여 몸을 사린단 말이요!」

그리고 얼마 후 호석고가 양공에게 독대를 청하고 들어와 물었다.

「주공께서 저의 선친이 세우신 공로를 생각하시어 불초한 소생으로 하여금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셨는데 갑자기 다시 바꾸시니 신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희 선친이신 호언께서 세우신 공로가 조쇠보다 크지 않아서 그리 하셨는지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이유가 있으신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양처보가 과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민심을 얻지 못하여 대장의 재목이 되지 못한다고 간언하여 중군원수의 직을 바꾸게 되었소.」

호석고가 듣고 입을 굳게 다물며 양공 앞에서 물러났다.

그해 가을8월에 양공이 병이 나서 몸져 누웠다.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짐작한 양공이 태부 양처보와 상경 조돈 및 여러 신하들을 침상 앞으로 불러 놓고 당부했다.

「과인이 선군이 이룩하신 백업을 이어 받아 적(翟)을 파하고 섬진을 정벌하여 우리나라 군사들의 정예로운 사기를 꺾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해왔다고 하겠소. 불행히도 내가 명이 길지 못하여 조만간에 여기 있는 여러 경들과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었소. 태자 이고(夷皐)는 나이가 아직 어리니 경 등은 마땅히 온 마음을 다하여 보좌하여 이웃 나라들과는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절대 맹주의 자리를 잃지 않도록 하기 바라오!」

여러 신하들이 절을 다시 올리고 양공의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양공이 죽었다. 다음날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받들어 당진의 군주로 세우려고 하자 조돈이 반대하며 말했다.

「섬진과 적(翟)이 그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고 있는 다난한 이때 어린 사람을 군주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오늘 두기(杜祁)의 소생 공자옹(公子雍)이 섬진에서 벼슬을 살고 있으니 만일 그를 우리 당진의 군주로 세우게 되면 섬진과과 우호를 맺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이도 많아 종실의 어른도 됩니다. 마땅히 모셔와 군위를 잇게 해야 합니다.」

반대하는 중신들이 한 명도 없음을 본 호석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공자옹보다는 진(陳)나라 살고 있는 공자락(公子樂)를 후계로 세워야 합니다. 그 모친 진영(辰嬴)은 진백의 사랑하는 딸일 뿐 아니라 선군이신 문공께서 사랑하셨던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진나라는 우리 당진과는 좋은 사이를 맺어왔습니다.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때 모셔 올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나라는 작고 멀리 떨어진 나라입니다. 섬진은 크고 가까이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진(陳)나라에서 군주를 모셔오게 된다면 섬진과의 사이가 더욱 멀어지게 되나 만약에 섬진에서 모셔온다면 옛날에 맺었던 원한들을 모두 풀어버릴 수 있습니다. 반드시 공자옹을 모셔와 군주로 삼아야만 합니다.」

조동의 말에 여러 중신들이 찬동하자 조돈은 즉시 선멸을 정사로 사회(士會)를 부사로 삼아 섬진에 가서 양공의 부음을 전하게 하고 동시에 공자옹을 모셔와 당진의 군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선멸과 사회가 사자의 임무를 띠고 섬진으로 출발하려고 하는 순간 순림보가 찾아와 선멸에게 말했다.

「현재 양공의 부인과 태자가 모두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군주를 모시러 다른 나라로 가서 혹시라도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장차 변란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사백(士伯)께서는 어찌하여 병을 핑계하고 사자의 임무를 사양하지 않으셨습니까?」

선멸이 대답했다.

「당진의 정사에 관한 일은 모두 조씨들 수중에 있는데 무슨 변이 생긴단 말이오!」

선멸과 헤어진 순림보가 도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 말했다.

「‘벼슬을 같이 살면 동료가 된다’ 했듯이 나는 동료의 입장에서 사백에게 내 마음을 다해 충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갔으니 비록 그가 이곳을 출발하기는 했지만 돌아올 수는 없으리라!」

선멸과 사회는 이윽고 사자의 임무를 띠고 섬진으로 떠났다. 한편 호석고는 조돈이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자 격분하며 말했다.

「호씨와 조씨는 다 같이 당진에 큰 공을 세운 집안들인데 지금은 호씨는 없고 조씨만 있게 되었다.」

호석고는 사람을 몰래 진(陳)나라에 보내어 공자락을 불러와 장차 당진의 군주자리를 다투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알고 조돈에게 고했다. 조돈은 조씨 집안의 문객 공손저구(公孫杵臼)에게 가병을 주어 중도에 매복하고 있다가 공자락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죽이도록 했다. 공자락이 당진국으로 돌아오던 중에 조돈의 가병들에게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호석고가 더욱 격분하여 말했다.

「당진의 정권이 자맹의 손에 넘어간 원인은 양처보가 천거했기 때문이다. 양처보의 집안은 그 세력이 미미하여 다른 종족들은 그를 돕지 않을 것이다. 오늘 양처보는 성 밖으로 나가 교외에 묶으면서 선군의 장례를 지낼 준비를 주관할 예정이다. 그런 양처보는 기회를 보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조돈이 공자락을 죽였으니 내가 처보를 죽인다 한들 무슨 잘못이 되겠는가?」

그는 즉시 그의 동생 호국거를 불러 양처보를 살해하기 위해 모의했다. 호국거가 듣고 말했다.

「이 일을 저에게 맡겨 주시면 나 혼자의 힘만으로도 능히 처리 할 수 있습니다.」

호국거는 곧바로 그의 가복를 데리고 양처보의 집으로 가서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강도로 위장하고 담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양처보는 촛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었다. 호국거가 다짜고짜 양처보에게 달려들어 칼로 찔렀으나 단지 그의 팔을 찔렀을 뿐이었다. 양처보가 놀라 밖으로 달아나자 호국거가 쫓아가서 뒤에서 칼로 쳐서 살해하고는 그의 목을 잘라가지고 성안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양처보를 모시던 종자가 그를 죽인 사람이 호국거임을 알고서 조돈에게 달려가 그 일을 알렸다. 조돈이 거짓으로 믿지 않는 척 하며 양처보의 종자를 심하게 야단쳤다.

「양태부는 도적들에게 살해 되었는데 어찌 아무 죄도 없는 호국거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느냐?」

조돈은 즉시 사람을 시켜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 이것은 그해 가을9월 달의 일이었다.

날자가10월 달로 접어들어 겨울이 되자 양공의 장지를 곡옥에 정하고 그 장례를 치르려고 했다. 양공의 부인 목영(穆嬴)이 태자 이고(夷皐)와 함께 나와서 양공의 장례 행렬을 따라와서 조돈에게 말했다.

「선군이신 양공께서 무슨 죄가 있고 또 선군의 정당한 후계자인 어린 태자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한 덩어리의 고기 덩어리를 버리듯이 내치고 하필이면 다른 나라에서 군주를 모셔온단 말이오?」

조돈이 듣고 말했다.

「나라의 군주를 세우는 일은 이 조돈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나라의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장례가 끝나자 양공의 신위를 받들어 태묘에 모셨다. 조돈이 태묘 앞에서 여러 대부들을 향하여 말했다.

「선군께서는 형벌과 상을 분명히 하시어 제후들의 패주(覇主)가 되셨습니다. 선군의 시신이 든 관을 채 묻기도 전에 호국거라는 놈이 제 멋대로 양태부를 죽이니 신하된 자가 모두 이렇듯 망동을 일삼으면 우리 신하들 중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소? 이 일은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오!」

조돈은 즉시 사구(司寇)를 시켜 호국거를 잡아와 그 죄를 밝혀 참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사람을 호국거의 집에 보내 양처보의 목을 찾아 가져오게 하여 관에서 꺼낸 시신에다 실로 꿰매어 붙인 후에 장례를 다시 치르게 했다. 동생 호국거가 끌려가 처형되자 혹시 양처보를 살해한 일은 자신이 꾸민 음모라는 사실을 조돈이 알고 있지 않을까 두려워한 호석고는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말 한 마리가 끄는 조그만 마차를 타고 적국(翟國)으로 달아나 적주 백돈(白暾)에게 몸을 의탁했다. 당시 적국은 적주의 자리에 오른 백돈이 원래 하수와 낙수 사이에 살던 종족들을 이끌고 하수를 도하하여 동쪽으로 이주하여 태항산(太行山) 서쪽 산록에 있었다. 사서에는 백돈의 적국을 백적(白狄)이라고 칭했다.

4. 장적교여(長翟僑如)

- 적족의 천하장사 교여를 잡은 지혜로운 노나라의 대부 숙손득신

그때 적국에는 이름이 교여(僑如)라는 키가 크고 힘이 쌘 장사가 한 명 있었다. 신장이 한장 오척⑫에 달해 사람들은 그를 장적(長翟)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힘은 천균(千鈞)⑬의 무게를 들 수 있었고 머리와 얼굴은 마치 쇠로 된 것처럼 단단하여 기왓장이나 돌멩이로 내리쳐도 상처를 줄 수 없었다. 백돈이 그를 불러 장군으로 삼아 노나라를 쳐들어가게 하였다. 노나라의 군주는 문공(文公)은 대부 숙손득신(叔孫得臣)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교여를 막게 했다. 그때는 찬 기운이 온 하늘을 덮고 있던 한겨울이었다. 대부 부보종생(富父終甥)이 장차 눈이 쏟아져 폭설이 내릴 것이라고 짐작하고 숙손득신에게 계책을 말했다.

「장적은 그 용력이 매우 사납고 비상하니 단지 지혜로써 만이 그를 잡을 수 있습니다. 절대 힘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부보종생이 즉시 교여가 진군할 때 취할 길을 택하여 그 길 가운데에 깊은 함정을 여러 곳에 파고 그 위를 풀잎과 거적을 깔아 덮은 후에 다시 그 위에 흙을 뿌렸다. 그 날 밤 종생의 짐작대로 과연 큰 눈이 내려 온 땅을 하얗게 덮어버려 어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종생이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교여가 주둔하고 있던 진채를 공격했다. 교여가 진채 밖으로 나와 맞서 싸우려고 하자 종생이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교여가 용기백배하여 부보종생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함정을 팔 때 자기만이 알아 볼 수 있게 표시를 해 두었던 종생은 그 함정을 피해 달아 날 수 있었다. 종생의 뒤를 계속해서 쫓던 교여는 드디어 깊은 함정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함정 주위에 매복하고 있던 득신과 그 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교여의 뒤를 따라오던 적병(翟兵)들을 막고 있는 사이에 종생이 과로 함정에 빠진 교여의 목을 베어 죽였다. 노나라 군사들이 교여의 시체를 함정에서 꺼내 큰 수레에 싣고 노성으로 들어가자 보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마침 첫아들을 얻은 득신은 자기의 아들 이름을 교여(僑如)라고 지어 자기의 군공을 기념하고자 했다. 이어서 노(魯), 제(齊), 위(衛) 세 나라가 즉시 연합군을 일으켜 적국을 정벌하였다. 적주 백돈은 도망치다가 죽어 이로써 백적(白翟)이라는 나라는 멸망했다. 호석고는 적적(赤翟)의 종족이 세운 로국(潞國)으로 가서 그 대부 풍서(酆舒)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한편 호석고가 로국으로 옮겨 살고 있다는 소식을 조돈이 듣고 말했다.

「가계(賈季)와 우리 선친께서는 같이 나라 밖을 떠돌아다니며 선군을 좌우에서 보좌하여 그 공이 적지 않은데 내가 비록 국거는 죽였지만 가계마저 죽일 수 있었겠는가? 그가 죄를 두려워하여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고 하나, 혼자 몸으로 적적이 세운 조그만 나라 로국(潞國)에 빌붙어 사는 곤궁한 처지를 내가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조돈은 즉시 유병(臾騈)에게 명하여 그 처자를 로국으로 데려다 주라고 했다. 유병이 자신 집안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로국을 향하여 출발하려 하는데 집안의 가정들이 모두 반대하며 말했다.

「옛날에 이(夷) 땅에서 군사들을 사열할 때 주인께서는 충심으로 호석고 원수를 위해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그에게 모욕을 당했었습니다. 이 원한을 아직 갚지 못했는데 오늘 조돈 원수께서 주인님을 시켜 그 처자와 비자들을 데려다 주라고 시키니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준 기회입니다. 마땅히 모두 죽여서 그때의 한을 푸십시오.」

유병이 듣고 말했다.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조돈 원수께서 나로 하여금 호원수의 가솔들을 데려다 주라고 나에게 맡기신 이유는 나를 믿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조돈 원수께서 보내라고 하는 가솔들을 오히려 내가 죽인다면 원수는 나에게 노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이 빠진 어려움을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사는 것은 또한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유병은 즉시 호석고의 처자를 맞이하여 수레에 타게 하고는 그들의 가재를 모두 장부에 등재한 다음 수레에 싣고 친히 국경까지 나와서 환송했는데 잃어버리거나 남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호석고가 듣고 한탄하면서 말했다.

「내가 어진 사람을 몰라 봤으니 이렇게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 것도 마땅한 일이로다!」

조돈이 이때부터 유병의 인품을 다시 인식하게 되어 언젠가는 중용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5. 令狐失信(영호실신)

- 영호에서 섬진군을 공격하여 신의를 저버린 조돈-

한편 선멸이 사회와 같이 섬진에 당도하여 공자옹을 모셔가 당진의 군주로 세우기 위해 사자로 왔다고 섬진의 군주 강공(康公)에게 말했다. 강공이 기뻐하며 두 사람을 향하여 말했다.

「나의 선군께서 두 번이나 당진의 변란을 평정하셨는데 과인의 대에 와서도 다시 공자옹이 당진의 군주가 된다고 하니 이것으로 당진의 군주는 대대로 우리 섬진이 세우게 되었소!」

강공은 즉시 백을병에게 병거400승을 내주어 공자옹을 당진까지 호송하라고 명했다.

이때 양공의 부인 목영은 장례를 곡옥에서 치른 후에 궁궐로 돌아와서는 매일 아침마다 이고를 가슴에 품고 전당에 나와 통곡을 하면서 여러 대부들을 향하여 외쳤다.

「선군의 적자인 이 아이를 어찌하여 버리는가?」

어느 날 아침 조례가 파하기를 기다려 수레를 타고 원수부(元帥府)로 간 목영은 조돈을 보자 머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선군께서 임종하실 때에 이 아이를 경에게 맡기면서 마음을 다하여 보좌하라고 하셨습니다. 선군께서는 이미 세상을 뜨셨지만 당부하신 말씀은 아직 우리 귀에 생생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 구해 세우게 된다면 장차 이 아이를 어느 땅으로 보내 살게 하려고 합니까? 만약 이 아이가 군주의 자리에 앉지 못하면 우리 모자는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소!」

말을 마친 목영이 다시 곡을 하기 시작하더니 멈추지 않았다. 성안의 백성들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모두 동정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그 허물을 조돈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대부들도 역시 공자옹을 모셔와 당진의 군주로 세우는 일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걱정이 된 조돈이 극결(郤缺)과 상의했다.

「선멸과 사회가 이미 섬진으로 가서 공자옹을 모셔오고 있는 중인데 무슨 방법으로 다시 우리의 군주 자리에 태자를 앉힐 수 있겠소?」

「금일 어린 태자를 버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불러 군주의 자리에 앉히게 된다면 어린 태자가 장차 성장하게 될 경우 반드시 나라에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시급히 사람을 섬진으로 보내 사백에게 공자옹을 모시고 오는 일을 중지하라고 전하심이 상책입니다.」

「나라의 군위를 먼저 정하고 난 후에 사자를 보내야 명분이 설 것이오!」

조돈이 즉시 군신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이고를 받들어 당진의 군주로 세웠다. 이가 진영공(晉靈公)으로 그때 그의 나이는7살이었다. 백관들이 조당에 모여 영공의 즉위를 축하하고 배례를 행했다. 그때 변경을 지키던 관리가 올린 첩보가 당도하였다.

「섬진의 대군이 공자옹을 호송하고 이미 하하(河下)⑭에 당도하여 하수를 건너고 있습니다.」

여러 대부들이 놀라 말했다.

「우리가 섬진에게 신의를 잃었으니 이를 어떻게 사죄한단 말인가?」

조돈이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가 만약 공자옹을 세웠다면 즉 섬진의 군사들은 우리에게 손님이 되었겠지만 그러나 이미 우리가 공자옹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에게 적국의 군사가 되는 것이오! 사람을 보내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 회군을 청하면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군사를 내어 그들을 무찔러야 하겠소!」

조돈이 즉시 상군원수 기정보(箕鄭父)에게는 도성에 남아서 영공을 보호하도록 명하고 그 자신은 중군원수가 되어 적적으로 도망친 호석고를 대신하여 선극을 부수로 임명했다. 순림보는 부수 없이 혼자 상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하군도 역시 그 부수를 맡고 있었던 선멸이 섬진에 사자로 가 있었기 때문에 선도가 혼자 지휘하도록 했다. 삼군을 정돈하여 섬진의 군사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출동한 조돈은 근음(菫陰)⑮이라는 곳에 주둔하고 영채를 세웠다. 섬진의 군사들은 이미 하수를 건너 동쪽으로 행군하여 영호(令狐)의 땅에 진채를 세우고 있었다. 섬진군은 그들 앞에 당진군이 진군하여 진채를 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마도 공자옹을 환영하기 위하여 나온 군사라고 짐작한 나머지 전혀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선멸이 섬진군의 진영을 나와 당진의 진영으로 가서 조돈을 만났다. 조돈은 선멸에게 태자 이고가 당진의 군주로 섰다는 사실을 알렸다. 선멸이 눈을 크게 뜨고 조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공자옹을 모시고 오라는 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오늘 다시 태자를 세우고 우리의 앞길을 막는 자는 또한 누군가?」

선멸이 소매자락을 털며 밖으로 나오더니 순림보를 보더니 말했다.

「내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지금 와서 일이 이 지경이 되었소!」

순림보가 선멸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대는 당진의 신하라! 당진을 버리고 어디로 갈려 한단 말인가?」

「내가 명을 받아 섬진에 가서 공자옹을 모셔오게 되었으니 나의 주인은 공자옹이라! 섬진의 군주는 나의 주인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내가 스스로 앞서 말한 말을 뒤집고 구차하게 고향으로 도망쳐 부귀를 바라겠는가?」

말을 마친 선멸이 곧바로 섬진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조돈이 보고 말했다.

「사백이 당진의 진영에 남아 있으려고 하지 않으니 내일은 필시 섬진군은 우리 진영을 향해 공격해올 것이다. 차라리 우리가 오늘 밤을 틈타 섬진군의 진채를 기습한다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 우리가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조돈이 즉시 령을 내려 말에게 먹이를 주고 군사들은 잠을 자게 한 후에 밥을 배불리 먹였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군사들의 입에 함매(銜枚)를 물리고 질풍같이 섬진의 진채를 향해 돌격을 감행하도록 했다. 당진군이 섬진군의 영채에 이르렀을 때는 시간은 어느덧 삼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진군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북과 나팔 소리를 일제히 내며 섬진의 진영으로 쇄도해 쳐들어갔다. 잠을 자다가 놀라 깨게 된 섬진군은 병거를 끄는 말에는 미처 마구와 보호구를 얹을 틈도 없었으며 군사들은 무기를 찾지도 못했다. 섬진군은 사방으로 달아나기 바빴다. 당진군은 달아나는 섬진군의 뒤를 쫓아 고수(刳首)⑯까지추격했다. 섬진군의 대장 백을병은 죽을힘을 다해 싸워 섬진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공자옹은 란군 중에 죽고 말았다. 선멸이 한탄하며 말했다.

「조돈은 우리를 배반했으나 우리는 섬진을 배신할 수 없도다!」

선멸은 곧바로 섬진으로 달아났다. 사회도 역시 한탄하며 말했다.

「나와 사백(士伯)은 명을 같이 받아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사백은 이미 섬진으로 달아났으니 나 혼자 당진으로는 갈수 없겠노라!」

사회 역시 섬진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섬진의 강공이 두 사람 모두에게 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순림보가 조돈에게 말했다.

「옛날 가계가 적 땅으로 도망치자 상국께서는 동료의 정을 생각하시어 그의 처자와 노비들을 그가 있는 적적 땅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날 사백과 수계(隨季) 역시 나와는 동료 간의 정이 깊다고 할 수 있는데 원컨대 상국이 옛날에 친구에게 행한 일을 저에게도 행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백중(荀伯重)께서 의를 생각하는 마음은 내 뜻과 같소!」

조돈이 즉시 령을 내려 선멸과 사회 양가의 가족들과 권속 및 가재들을 거두어 모두 섬진의 두 사람에게 보내주었다. 호증 선생이 시를 지어 조돈과 순림보의 처사를 칭송했다.

누가 국경 밖으로 친구의 처자의 노비들을 보내 주었는가?

그것은 단지 친구를 위한 의로운 마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근자의 세상은 인정이 서로 시기만 하고 각박하기만 하니

친구의 정리는 옛 사람들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알겠는가?

誰當越境送妻孥(수당월경송처노)

只爲同僚義氣多(지위동료의기다)

近日人情相忌刻(근일인정상기각)

一般僚誼却如何(일반요의각여하)

다시 염옹이 시를 지어 조돈이 경솔하게 섬진에서 공자옹을 모셔오라고 해놓고 손님으로 온 섬진의 군사를 공격한 일을 비난하였다.

바둑을 두는데도 반드시 몇 번 생각하고 두어야 하거늘

적자를 두고 어찌하여 외국에서 군주를 구했는가?

손님으로 모셔놓고 금새 도적이라고 바꾸기를 반복했으니

나라를 위한 조돈의 책략은 먼 앞날을 헤아리지 못했다.⑰)

弈棋下子必躊躇(혁기하자필주저)

有嫡如何又外求(유적여하우외구)

賓寇須臾成反復(빈구수유성반복)

趙宣謀國是何籌(조선모국시하주)

영호의 싸움에서 당진군의 각 군 장수들은 포로와 전리품을 모두 얻어 공을 세우게 되었지만, 단지 선극(先克)의 부하 장수중 용맹하다던 괴득(蒯得)) 만이 자기의 용기만을 믿고 앞뒤 안 가리고 앞으로 전진하다가 섬진군에 반격을 받고 싸움에 패하여 오히려 병거5승을 잃어 버렸다. 선극이 군법에 의해 그를 참수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를 위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참수형만은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선극은 조돈에게 다시 청하여 그의 전답과 녹봉을 몰수하도록 했다. 괴득이 그 일로 인해 선극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한편 기정보(箕鄭父)와 사곡(士穀) 및 양익이(梁益耳)는 평소에 서로 친분이 있었다. 조돈이 중군원수가 되고부터 병사에 관한 권한을 잃어버리게 된 사곡과 양익이 두 사람은 기정보와 자주 만나 마음속의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때 조돈이 섬진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출정을 간 사이에 도성의 수비를 맡게 된 기정보가 사곡과 양익이를 만나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조돈은 군주를 폐하고 올리고 하는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안하무인이 되었소. 오늘 섬진이 많은 군사를 보내어 공자옹을 호송하여 이곳을 오고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양쪽의 군사들이 서로 대치하게 되면 그렇게 빨리 두 나라 군사들이 흩어지지 않게 될 것이요! 그때 우리가 조돈을 반대해서 란을 일으켜 이고를 폐하고 공자옹을 받아들여 당진의 군주로 세운다면 당진의 대권은 모두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오!」

그들은 상의를 마치고 계획을 정했다.

<제48회로 계속>

주석

①생황(笙簧) : 중국 묘족(苗族)이 만들었다는 악기로, 팔음(八音) 중 포부(匏部)에 속한다. 옛날에는 관수(管數)에 따라 따로 화(和)·생(笙)·우(竽) 등의 이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종류의 악기를 통틀어 생황이라고 한다. 이 악기에 김을 불어넣는 통은 옛날에는 박통[匏]을 썼으나 뒤에 나무통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으며 이 통의 위쪽 둘레에 돌아가며 구멍을 뚫고, 거기에 죽관(竹管)을 돌려 꽂았다. 그리고 죽관 위쪽 안에는 길쭉한 구멍을 뚫어 그것을 막으면 소리가 나고, 열면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다. 소리는 죽관 아래 끝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쇠청[金葉]을 붙여 숨을 내쉬고 들여 마실 때 일어나는 기류로 진동시켜 내며, 지(篪)나 단소가 따르지 못할 만큼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는 고구려·백제 및 조선시대의 생황류는 만드는 법과 부는 법에 어두워 현재는 만드는 사람이 없고 연주법도 바르지 못하다. 악기의 몸통에 붙인 대나무 관의 수효에 따라13개는 화(和), 17개는 생(笙), 36개는 우(竽)라 했다.(네이버백과사전)

②태화산(太華山) :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에 해당하는 화산(華山)을 말한다. 섬서성 화음현(華陰縣) 경내에 있는 명산으로 서안(西安)에서120키로 서쪽에 위치해 있다.

③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 : 여와(女媧) 수인씨(燧人氏),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를 합하여 삼황(三皇)이라 하는데 여와는 복희씨의 누이동생으로써 천지를 보수하고 인류를 창조한 조물주이다.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태고에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4개의 기둥이 부러지자, 대지는 조작조각 갈라지고 가는 곳마다 큰 화재와 홍수가 발생하였으며, 또한 맹수와 괴조가 횡행하여 사람들을 괴롭히자 여와가5색 돌을 녹여 하늘의 뚫린 구멍을 막고, 큰 거북의 다리를 잘라 하늘과 땅 사시의 기었기 때문에 지상은 다시 평안해 졌다」라고 했다. 한편 후한의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의하면 진흙으로 사람을 빚은 인류의 어머니라 했다.

④육율육려(六律六呂) : 십이 율 중 양성(陽聲)에 속하는 여섯 가지 음. 곧 황종(黃鐘), 태주(太簇), 고선(姑洗), 유빈(蕤賓), 이측(夷則), 무역(無射)을 말하며 음성(陰聲)인 육려(六呂)와 대칭 되는 것으로 그 두 가지를 총칭하여12율이라 한다. 12율은 각각 일 년의 달과 관련이 있는데 황종(黃鐘)은11월, 태주는1월, 고선은3월, 유빈은5월 이측은7월, 무역은9월에 육려인 대려(大呂)는12월, 협종(夾鐘)은2월, 중려(仲呂)는4월, 림종(林鐘)은6월, 남려(南呂)는8월, 응종(應鐘)은10월에 해당한다. 또한 아악의 다섯 음계와 관련하여 황종(黃鐘)은 궁(宮), 태주(太簇)는 상(商), 고선(姑洗)은 각(角), 유빈(蕤賓)은 섭징(變徵), 림종(林鐘) 치(徵), 남려(南呂)는 우(羽), 응종(應鐘)은 쌍궁(雙宮)에 해당한다. 고대의 주나라에서는 음악에는 정치의 잘 잘못이 반영되는 것으로 보았다.

⑤복희(虙羲) : 삼황(三皇)의 하나로 여동생인 여와(女媧)와 혼인하여 인류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는 음양 변화의 원리를 터득하여 주역의 시초가 된 팔괘(八卦)를 만들었고, 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짓는 모습을 모고 어망을 처음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숲 속에서 번개가 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불을 인간에게 전해주어 이를 이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전했다. 금(琴)과 슬(瑟)의 악기를 만들었다 했다. 화서씨(華胥氏)의 딸이 뇌택(雷澤) 속에 남아 있던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복희라 했다.

⑥영윤(伶倫) : 중국 상고시대 황제(黃帝) 때 악관(樂官)으로 영륜(伶綸)이라고도 한다. 황제가 그를 시켜 곤륜산의 해곡(嶰谷)에서 가져온 대나무의 두 마디에 구멍을 내어 퉁소를 만들게 하여 나오는 소리를 기준하여 황종(黃鐘)의 궁(宮)을 포함한12율을 제정했다.

⑦곤계(昆谿) : 곤륜산의 해곡(嶰谷)을 말한다.

⑧선왕17년은 기원전809년이고 선왕 말년은 기원전780년이다.

⑨원전의110년 째라는 글을 따랐으나 문장의 내용상 주선왕 원년은BC825년이고 그는 선왕17년인BC809년 생이다. 진목공은 주양왕31년 기원전621년에 죽었고 소사는 그3년 전인 주양왕28년 기원전624년에 농옥과 함께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즉 당시 소사의 나이는110세가 아니라185세다.-역자 주-

⑩전횡(田橫) : 한초(漢楚) 항쟁기 때 항우의 진영에 참가했던 제왕(齊王)으로써, 후에 항우를 이기고 한왕조를 창건한 한고조 유방이 그를 소환했다. 옛날 왕까지 한 신분으로 평민 출신의 유방에게 허리를 굽히는 치욕을 받을 수 없다하고 하면서 유방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자결하였다. 뒤를 따르던 두 사람의 장군과 그의 부하였던500명의 군사도 모두 전횡의 뒤를 따라 자살하였다.

⑪동(蕫) : 황하의 지류인 분수(汾水)와 속천(涑川)사이에 있던 곳. 현재 산서성 임의현(臨猗縣)북쪽 약10키로 지점

⑫춘추전국 시대 때 한자는 대척은22.5cm, 소척은18cm이다. 즉 교여의 신장 일장오척은 대척으로는 약3m 40cm이고 소척일 경우 2m 70cm이다. 소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⑬춘추전국 시대 때1균의 무게는30근이고, 1근은 약250그람이다. 즉1균은 약7.5kg, 천균은7.5톤이다.

⑭하하(河下) : 황하가 섬서성과 산서성을 가르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90도로 꺾이는 곳을 하곡부(河曲部)라 하고 하하(河下)는 꺾이기 전의 황하 하류지방을 말한다. 옛날 이곳에 섬서성에서 산서성으로 건너는 유명한 나룻터가 있었다.

⑮근음(菫陰) :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임의현(臨猗縣) 북서30키로 지점에 있었던 당진의 고을이름.

⑯고수(刳首) : 지금의 산서성 임의현(臨猗縣) 남서15키로 지점에 있었던 고을이름.

⑰여기서조돈이 구태어 이미 태자로 책봉된 이고(夷皐: 靈公)를 제치고 섬진에 가서 대부 벼슬을 하며 살고 있던 공자옹을 불러 당진의 군주로 삼고자 했던 이유는 첫째로 우선 그 동안 효산의 싸움 이래 사이가 악화된 섬진과의 외교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어 섬진으로 부터의 군사적인 위협을 불식하고 다시 서쪽 변경을 안정시켜 놓은 후에 중원으로 뻗어나는 초나라의 세력에 대항하여 당진의 패권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이후의 전개 과정을 보면 당진은 섬진의 지속적인 군사 행동으로 인하여 초나라의 중원국가에 대한 세력 확대를 저지할 수 있는 여유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영공의 군주로써의 자질을 의심했던 것 같다. 영공이 성장함에 따라 간신을 가까이 하고 현인들을 멀리하여 당진의 국정이 문란하게 되어 결국은 영공은 조돈의 사촌동생인 조천(趙穿)에게 시해되는 경과를 보면 이고를 제치고 공자옹을 세우려고 했던 조돈의 생각은 그의 탁월한 식견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염옹이 이 시로 조돈을 비난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하겠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부족한 것이다.-역자주-

[참 고]

1.포조(鮑照)

서기414년에 나서466년에 죽었다. 남북조시대 남송의 문학가. 자는 명원(明遠)이며 동해(東海: 지금의 강소성(江蘇城) 연운항시(連運港市)) 사람. 출신이 가난하고 미천하였지만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 일찍이 시를 지어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에게 바쳐 그로부터 국시랑(國侍朗)의 벼슬을 받았다. 임천왕이 죽자 시흥왕(始興王) 유준(劉濬)의 시랑(侍郞)이 되었다. 다시 형주의 임해왕(臨海王) 유자욱(劉子頊)의 밑에서 전군형옥참군(前軍刑獄參軍)을 지내다가 진안왕(晉安王)의 반란에 참가한 유자욱에게 연루되어 형주에서 살해되었다. 포조는 자기의 뜻을 세상에 펼쳐 보이려는 큰 포부를 갖고 살았으나 남북조 시대의 엄격했던 문벌제도의 벽을 뚫지 못하고 포부를 펼치지 못한 채 불행하게 생을 마쳤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시는 모두200여수가 있는데 문벌귀족들을 규탄하고 지배계층으로부터 압박 받는 하층 계급의 곤궁한 생활을 그렸다. 그는 사령운, 안연지와 더불어 원가(元嘉) 삼대가로 불리우고 있으며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의 시단에 사실주의적 기풍을 일으켰다. 그는 자기 자신이 품고 있던 포부와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자연히 낭만주의적 색채를 띄우게 되었다. 그는 삼국시대 때의 건안문학(建安文學)의 기풍을 계승하였으며 그가 쓴 악부시(樂府詩)는 후에 오언절구와 칠언체시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포조는 남북조 시기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후에 중국 시가문학을 꽃피운 이백과 두보 등의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음의 시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의행로난(擬行路難)> 중의 한 수이다.

束薪幽篁里(속신유황리)

그윽한 대숲에서 땔나무하고

刈黍寒澗陰(예서찬간음)

차가운 산간에서 곡식거두네

朔風傷我肌(삭풍상아기)

삭풍은 나의 살을 애일 듯하고

號鳥驚思心(호조경사심)

우는 새 내 마음을 놀라게 하네.

歲暮井賦訖(세모정무흘)

그믐에 지조(地租)를 바치고 나니

程課相追尋(정과상추심)

연이어 부역이 뒤를 따르고

田租送函谷(전조송함곡)

전세는 함곡관에 갖다 바치고

獸藁輸上林(수고수상림)

마초는 상림으로 보내야 하네.

河渭氷未開(하위빙미개)

하수와 위수물을 아직 녹지 않았고

關隴雪正深(관농설정심)

함곡관과 농서에는 눈이 제법 깊다네

笞擊官有罰(태격관유벌)

관가엔 곤장 치는 벌책이 있고

呵辱吏見侵(가욕리견침)

아전들 욕설로써 능욕하는구나

不謂乘軒意(불위승헌의)

초헌을 탈 생각이야 어이하련만

伏櫪還至今(복력환지금)

마판에 누운 준마 예대로여라

유의경(劉義慶: 403-404년)/중국 남북조시대 남송(南宋) 황실의 종친으로 임천왕(臨川王)에 봉해졌다. 송무제(宋武帝)의 종자(從子)로서 어려서부터 성품이 소박하고 문학에 소질이 있어 무제의 사랑을 받았다. 이어서 성장함에 따라 그의 처소에는 당대의 문사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저서 중 대표작으로는 세설신어(世說新語)가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남송 때 유의경이 저술한 일화집이다. 후한 말부터 동진(東晋)까지의 인물을 망라하여 그들의 언행과 일화를 덕행, 언어 등36개 주제로 분류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은 처음에는<세설(世說)>이라고 불리다가 후에<세설신서(世說新書)>로 바뀌었으며 당조에 이르자 세설신어로 불리게 되었다. 인물의 언행, 일화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려고 한 점에서 사서의 성격을 띄고 있으나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꽤 의도적인 픽션이 섞여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사실(史實)과 상반되는 이야기도 많다. 그러나 간결한 단문형식으로 나타나는 개성의 단면에 귀족사회의 풍속이나 가치관을 엿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위진(魏晉)의 시대상을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또 당시의 구어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언어자료소서도 중요시되고 있다. 또한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사람 유효표(劉孝標)가 붙인 주석(註釋)이다. 이 주석은 어휘의 해석은 적고, 다른 문헌에 의해 본문을 보충하거나 또는 사실과 상반되는 것을 예시하면서<세설신어>의 세계를 보다 입체화하였다. <세설신어>의 주석은 본문에 못지 않은 귀중한 자료이다.

2. 강총(江總)

남북조 때 남조의 양(梁) 과 진(陳), 그리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나라에 걸쳐 살았던 문인이다. 자는 총지(總持)다. 지금의 하남성 란고현(蘭考縣) 동쪽인 제양(濟陽) 고성(考城) 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재가 있었다. 나이18세 때 선혜무릉왕부(宣惠武陵王府)의 법조참군(法曹參軍)이 되었다가 곧이어 상서전중랑(尙書殿中郞)으로 옮겼다. 강총이 지은 시들이 양무제(梁武帝)에게 인정을 받아 시랑(侍郞)으로 발탁되었다. 장찬(張纘), 왕균(王筠), 유지린(劉之遴)은 당대의 명망있는 학사들이었으나 강총과는 나이를 개의치 않고 친구가 되었다. 후에 관직이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에 이르렀다. 양조의 무장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대성(臺城)이 함락되자 강총은 영남(嶺南)으로 몸을 피해 그곳에서 머물렀다. 진조(陳朝)의 문제(文帝)가 강총을 다시 불러 중서시랑에 임명했다. 진나라의 후주(後主)가 즉위하자 상서복야(尙書僕射), 상서령(尙書令)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는 재상의 신분이었지만 정무를 돌보지 않고 매일 마다 후주와 함께 후원에서 연희를 열어 남녀간의 애정을 위주로 한 시를 지으며 절도 없는 놀이에 빠져 당시에 그를 압객(狎客)이라고도 불렀다. 수나라가 들어서도 고위직에 있다가 강도(江都)에서 죽었다. 원래 그의 작품을 모아 놓은 시집이30권이 있었으나 모두 실전(失傳) 되었고, 후에 명나라 사람들이 다시 편찬한<강령군집(江令君集)>이라는 시집이 전한다. 강총은 궁체시의 중요 작가로 지금까지 전하는 시가 약100수 정도 되는데 모두가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화려한 기풍이나 내용은 빈약해 대부분 군주들의 음락(淫樂)을 도운 작품들이다. 만년에는 비교적 좋은 시들도 있었으니, <過長安使寄悲尙書(과장안사기비상서)>, <南還尋草市宅(남환심초시택)>, <哭魯廣達(곡노광달)>, <於長安歸還揚州九月九日行微山亭賦韻(어장안귀환양주구월구일행미산정부운)> 등은 망국의 고통을 담고 있으며 풍격도 슬프고 처량하다. 그는 시가 형식상에도 공한 바가 있어<규원편(閨怨篇)> 같은 것을 당신의 배율과도 이미 닮아 있었다. 그중 「병풍은 일부러 밝은 달을 가리고(屛風有意障明月), 등잔불은 무정하게 외로이 잠을 자는 나를 비추네(燈火無情照獨眠)」의 두 시귀는 대구가 정연하며 묘사도 뛰어나다. 칠언가행(七言歌行) 중<완전가(宛轉歌)>는 편폭이 전에 없이 긴 작품이다.-청년사 간<중국문학사>-

【평 설】

부국강병을 이루고 내정을 안정시키는 것은 패권을 차지하려는 제후들의 기본 조건이다. 진양공 재위 만년에 당진국의 상황은 그러한 조건을 창조하지도 못했고 내정도 공고하게 다지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 예전보다 많이 약화되었다. 진양공이 죽기 직전, 그는 당진군의 편제를 축소 개편하여 그 병력의2/5를 줄여 버렸다. 또한 현신과 명장들이 계속해서 세상을 뜸으로 해서 당진국의 인제 풀에 위기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평시에는 재상에 해당하고 전시에는 총사령관 역할을 담당했던 중군원수를 경솔하게 임명했다가 계속해서 바꾸는 실수를 반복함으로 당진국 내부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기원전621년 섬진의 목공의 뒤를 이어 당진의 양공이 죽자, 당진국은 그들의 새로운 군주로 세우기 위해 사람을 섬진으로 보내 공자옹을 데려가려고 했다. 당진국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오랫동안 싸인 섬진국과의 적대관계를 해소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계획은 일단은 좋은 뜻에서 추진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각기 자기가 주장하는 바대로 추진하려고 했다. 최종적으로 조돈이 마음을 바꾸어 섬진국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영공을 세움으로써 결말이 났지만 섬진과 당진과의 오랫동안 축적된 원한 관계는 해소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관계를 더욱 악화시켜 두 나라는 번갈아 가며 정벌전을 감행하여 몇 년 동안 쉬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은 진문공이 이룩한 패업에 손상을 입게 되었고, 국내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지도 못해, 당진국의 패권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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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3부5권 초장왕 연표(기원전 626 - 581년)

제3부 중원을 놓고 다투는 당진(唐晉)과 초(楚) 제5권 초장왕(楚庄王) - 기원전 626 - 581년 기원 전 周 대사(大事) 魯
42.5K 양승국 04-05-11
[일반] 제3부5권 초장왕 목차

제 III 부진초쟁패(晉楚爭覇) 제5권 초장왕(楚庄王) 제46회 被激察機 渡河焚舟(피격찰기 도하분주)고모를 격분시켜 부왕의 뜻을 살핀 초나라
양승국 04-05-11
[일반] 제57회. 巫臣逃晉(무신도진), 趙氏孤兒(조씨고아)

제57회 巫臣逃晉 趙氏孤兒(무신도진 조씨고아) 하희를 취해 당진으로 달아난 초나라 대부 무신과 정영(程嬰)의 도움으로 조씨 종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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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56회. 登臺笑客(등대소객), 易服免君(이복면군)

제56회 登臺笑客 易服免君(등대소객 역복면군) 대에 올라 사신들을 회롱한 제나라의 소부인과 어의를 바꿔 입고 제후를 위난에서 구한 방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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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재55회. 登床劫將(등상겁장), 結草報恩(결초보은)

제55회登床劫將 結草報恩(등상겁장 결초보은) 침상의 적장을 위협하여 화의를 이끌어 낸 송나라의 화원과 결초로 두회의 발목을 잡아 보은
양승국 04-05-11
[일반] 제54회. 縱屬亡師(종속망사), 托優悟主(탁우오주)

제54회 縱屬亡師 托優悟主(종속망사 탁우오주) 부하장수들을 다스리지 군사를 잃은 당진의 순림보(荀林父)와 연극으로 초장왕을 깨우친 초나라의
양승국 04-05-11
[일반] 제53회. 株林宣淫(주림선음) 蹊田奪牛牛(혜잔탈우)

제53회 株林宣淫 蹊田奪牛(주림선음 혜전탈우) 주림에서 신하들과 함께 혼음을 즐기다가 시해당하는 진영공과 시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양승국 04-05-11
[일반] 제52회. 嘗黿搆逆(상원구역), 衵服戱朝(일복희조)

제52회 嘗黿搆逆 衵服戱朝(상원구역 일복희조) 자라탕을 맛보려 하다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여자의 속곳으로 조당을 희롱한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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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51회. 董狐直筆(동호직필), 絶纓大會(절영대회)

제51회 董狐直筆 絶纓大會(동호직필 절영대회) 직필로 조돈을 책망한 사관의 사표 동호(董狐)와 투월초를 주살하고 절영대회를 연 초장왕 1. 도
양승국 04-05-11
[일반] 제50회. 一飛沖天(일비충천), 桃園忠諫(도원충간)

제50회 一飛沖天 桃園强諫(일비충천 도원강간) 한 번 날아 하늘을 뚫은 초장왕과 도원에서 영공에게 온힘을 다해 간한 조돈 1. 살적입서(殺嫡立
양승국 04-05-11
[일반] 제49회. 厚施買國(후시매국), 竹池遇變(죽지우변)

제49회 厚施買國 竹池遇變(후시매국 죽지우변) 백성들에게 인심을 베풀어 나라를 산 송나라의 공자포와 죽지에서 변을 당해 목숨을 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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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48회. 五將亂晉(오장란진), 召賢紿秦(소현태진)

제48회 五將亂晉 紿秦召賢(오장란진 태진소현) 선극을 살해하고 변란을 일으킨 당진의 다섯 장수들과 섬진을 속여 현인 사회를 불러온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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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47회. 吹簫跨鳳(취소과봉), 背秦立君(배진입군)

제47회 吹簫跨鳳 令狐失信(취소과봉 영호실신) 퉁소로 부른 봉황을 타고 하늘에 올라 선녀가 된 농옥과 영호에서 섬진과의 신의를 버리고 영
양승국 04-05-11
[일반] 제46회. 被激察機(피격찰기), 渡河焚舟(도하분주)

제46회 被激察機 渡河焚舟(피격찰기 도하분주) 고모를 격분시켜 부왕의 뜻을 살핀 초나라의 태자 상신과 하수를 건넌 후 배를 불태워 전의를 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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