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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1:43:573894 
제49회. 厚施買國(후시매국), 竹池遇變(죽지우변)
양승국
 그림49-1. 백성들에게 인심을 베풀어 나라를 산 송나라의 공자 포(鮑)와 001.jpg  (542.8K)   download : 152
 그림49-2. 죽지에서 변을 당해 살해된 제의공(齊懿公) 001.jpg  (648.8K)   download : 68
일반

제49회 厚施買國 竹池遇變(후시매국 죽지우변)

백성들에게 인심을 베풀어 나라를 산 송나라의 공자포와

죽지에서 변을 당해 목숨을 잃은 제의공(齊懿公)

1. 사회귀진(士會歸晉)

- 당진에 무사히 귀국하는 사회 -

사회와 위수여가 황하를 건넌 후 동쪽을 향하여 길을 가다가 미처 일 리도 못 가서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영접을 나온 한 소년 장군을 만났다. 그 소년장군이 병거 위에서 사회를 알아보고 몸을 굽히며 인사를 하며 말했다.

「수계(隨季)님께서는 무양 하셨습니까?」

사회가 가까이 가서 보니 소년 장군은 바로 조삭(趙朔)으로 상국 조돈의 아들이었다. 원래 사회는 수(隨)를 식읍으로 했기 때문에 자를 수계라 했다. 세 사람이 모두 병거에서 내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사회가 조삭에게 어쩐 일로 오게 되었느냐고 묻자 조삭이 대답했다.

「부친의 명을 받들어 다시 당진으로 돌아오시는 수계님을 영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저의 뒤를 따라온 대군도 이미 당도해 있을 것입니다.」

조삭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포성소리와 함께 수많은 병거들이 밀물 듯이 들이닥치고 이어서 달려드는 말들이 용처럼 포효한 후에 사회와 수여를 태우고는 강도를 향해 바람과 같이 사라져버렸다.

한편 진강공이 황하의 건너편에서 사회 일행의 행동을 살펴보기 위해 보낸 사람이 돌아와 사회가 당진의 군사들을 만나서 강도로 가버린 일을 고했다. 강공이 듣고 대노하여 하수를 건너 당진을 정벌하려는 참에 또 다른 정탐병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하수 건너 동쪽 편에 또 다른 대군이 당도하여 지키고 있는데 그 대장은 곧 순림보와 극결이라 합니다.」

섬진군의 대장 서걸술이 말했다.

「당진이 이미 대군을 보내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는 이유는 틀림없이 우리가 하수를 건너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회군함이 좋을 듯 싶습니다.」

강공이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리쳐 돌아갔다. 섬진군이 물러나는 모습을 본 순림보와 극결도 당진군을 이끌고 강도로 회군했다. 섬진에서 망명생활을 한지 3년만에 다시 강도로 돌아온 사회의 마음은 감개무량했다. 두 사람은 조당에 입조하여 영공을 배알하고 육단(肉袒)으로 죄의 용서를 빌었다. 영공이 말했다.

「경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도다!」

영공이 사회에게 명하여 육경의 반열에 서도록 했다. 조돈이 위수여의 공로를 칭찬하고 영공에게 품하자 그에게 병거 10승을 하사했다. 한편 섬진의 강공은 사람을 시켜 사회의 처자와 가노들을 당진으로 보내주면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나는 황하에 대고 한 맹세를 어길 수가 없었다.」

사회는 강공이 자기를 생각하는 각별한 정의에 감격하여 편지를 써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그만 군사들을 쉬게 하고 백성들을 돌보면서 섬진의 서쪽 변경을 굳게 지키라고 조언했다. 강공이 사회의 말을 쫓아 이후로 수십 년 간 당진과 섬진사이에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주경왕(周頃王) 6년은 기원전 613년이다. 이 해에 경왕이 죽고 태자 반(班)이 즉위하였다. 이가 광왕(匡王)이다. 이때가 당진의 영공(靈公) 8년이었고 초나라에서는 목왕(穆王)이 죽고 그의 세자 여(旅)가 그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이가 초장왕(楚庄王)이다.

당진의 집정 조돈은 초나라가 상을 당한 틈을 타서 선세 때의 맹주자리를 찾기 위해 제후들을 신성(新城)①에 불러 모이게 했다. 송소공(宋昭公) 저구(杵臼), 노문공(魯文公) 흥(興), 진영공(陳靈公) 평국(平國), 위성공(衛成公) 정(鄭), 정목공(鄭穆公) 란(蘭), 허소공(許昭公) 석아(錫我)가 줄을 이어 속속 회맹장에 당도했다. 옛날 송, 진, 정 삼국의 제후들은 초목왕의 부름을 받아 궐맥(厥貉)의 회맹에 참석했던 일은 초나라와의 옛 정리상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조돈은 세 나라의 군주들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했다. 이로써 제후들이 다시 당진 편에 서기 시작했으나 채후만은 초나라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회맹에 참석하지 않고 여전히 당진 편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조돈이 극결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도록 하자 채후가 화의를 청했다. 극결이 화의를 허락하고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2. 明示仁厚 暗藏殺心(명시인후 암장살심)

- 겉으로는 인자하고 후덕한 덕을 베풀면서 가슴속에는 비수를 품은 제의공(齊懿公) 상인(商人) -

제나라 소공(昭公) 반(潘)은 그때 마침 몸에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마음과는 달리 맹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제소공은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얼마 후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그의 아들 태자사(太子舍)가 사위하여 제후(齊侯)의 자리에 올랐다. 태자사의 모친은 노나라 출신의 숙희(叔姬)로 사람들은 소희(昭姬)라고 불렀다. 소희는 비록 제소공의 부인이었지만 소공이 살아 있을 때 총애를 받지 못했고 또한 태자사 역시 재주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라 안의 사대부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때 제환공의 첩실 밀희(密姬)의 소생 공자 상인(商人)은 옛날부터 항상 군주의 자리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소공이 상인을 동모제처럼 극진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잠시 묻어 두고 소공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대사를 도모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소공은 말년에 위(衛)나라로 도망쳐 살고 있었던 공자원(公子元)을 불러 국정을 맡기고 있었다. 공자 상인은 공자원의 어진 성격을 시기하여 일부러 인심을 얻기 위하여 즉시 그의 모든 가산을 털어 빈민들을 구제하기 시작했다. 가산이 떨어져 계속 해서 양식을 못 대주게 되자 심지어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까지 빈민들을 구제했다. 공자 상인의 후덕한 인정에 감격하지 않는 제나라 백성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시 수많은 자객들을 자기 집에다 모아 놓고 아침저녁으로 훈련을 시킨 후 자기가 밖으로 나갈 때는 늘 데리고 다녔다. 이윽고 소공이 죽고 태자사가 즉위하자 그때 마침 북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상인이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게 했다. 점을 친 사람이 점괘를 보며 말했다.

「송, 제, 당진 이 세 나라의 군주들은 모두가 장차 변란 중에 죽을 징조입니다.」

상인이 점괘를 듣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제나라에 변란이 일어난다면 란을 일으킬 사람은 내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상인은 즉시 자객들을 시켜 상을 치르기 위해 장막 안에 기거하고 있던 태자사를 찔러 죽이도록 했다. 이윽고 태자사를 살해한 상인이 자기보다 연장임을 이유로 속마음과는 달리 공자원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말했다.

「태자사가 백성들의 군주로써 위엄이 없어 군위에 앉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을 위해 거사했습니다.」

공자원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오랫동안 군위를 노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찌하여 그 누를 나에게 넘기려고 하느냐? 나는 능히 너를 모실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모실 수 없지 않느냐? 단지 네가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에 나를 용납하여 내가 제나라의 한 필부로써 여생이나마 마치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상인이 제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제의공(齊懿公)이다.② 공자원은 마음속으로 상인이 한 짓을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여 문을 닫아걸고 병을 핑계대고 입조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공자원의 좋은 점이었다. 한편 소희는 그 아들이 비명에 죽은 일을 슬퍼하여 매일 밤마다 흐느껴 울었다. 의공이 싫어하여 후원의 별궁에 가두어 버리고는 먹고 마시는 것도 마음대로 주지 못하게 했다. 소희가 몰래 궁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편지를 써서 노나라에 보냈다. 소희의 편지를 받은 노문공은 강력한 세력을 지닌 제나라를 두려워하여 대부 동문수(東門遂)를 주왕에게 보내 제나라의 일을 고하게 했다. 그것은 천자의 힘을 빌려 소희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서였다. 주광왕은 노문공의 청을 받아들여 선백(單伯)을 제나라에 보내 천자의 명을 전하게 했다.

「이미 그의 아들을 죽이고 또한 그 모친까지 감옥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소회를 석방하여 노나라로 보내 제나라의 관대함을 보여주지 않는가?」

태자사를 시해한 일을 꺼리어 피하고 있었던 의공은 천자가 보낸 사자의 입에서 세자를 죽였다는 말이 나오자 뺨이 붉어지며 아무 말도 대꾸하지 못하였다. 선백이 물러나 객관으로 갔다. 의공이 소희를 밤사이에 궁궐 안에 옮겨 놓고 사람을 선백에게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저희 군주께서는 선군의 부인에 관한 일을 아직까지 감히 태만히 하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하물며 천자께서 유지를 내리시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자께서는 저희 국모님을 한번 만나시어 천자께서 동성의 제후국을 돌보아 주신다는 뜻을 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선백은 단지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일 줄만 알고 즉시 수레를 몰아 의공이 보낸 사자 뒤를 쫓아 입궁하여 소회를 알현하였다. 소희가 눈물을 흘리며 간략하게나마 억울한 심정을 고하였다. 선백이 소희에게 대답하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뜻밖에도 의공이 밖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며 큰소리로 욕지거리를 해댔다.

「선백이라는 놈이 어쩐 일로 제 멋대로 내가 사는 궁궐로 들어와 국모와 몰래 만나는가? 국모와 더러운 일을 벌이려고 하는 짓인가? 과인이 이 일을 천자께 고하리라!」

곧바로 선백과 소희를 잡아다 한 방에다 같이 가두어버린 의공은 왕명으로 자기를 누르려고 했던 노나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려고 했다.

후세의 사람들이 논하기를 제의공은 어린 군주를 시해했으며, 국모를 감옥에 가두고 천자가 보낸 사자를 구금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침략한 진실로 극악무도한 사람인데 하늘이 어찌 그를 용납했는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단지 그 당시 고씨(高氏)와 국씨(國氏) 등의 세신(世臣)들이 모두 조정에 있었는데 어찌하여 공자원을 받들어 상인의 죄를 성토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흉악한 행위를 인정하고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는지 진실로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에 노래한 시가 있다.

군주의 자리를 탐하면서 어린 임금을 속이고

먼저 가재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샀다.

긴 인끈에 의기양양했던 대신들이여 한심하도다!

그대들 역시 시정사람들 처럼 흉인에게 눈웃음쳤구나!

欲圖大位欺孤主(욕도대위사고주)

先散家財買細民(선산가재매세민)

堪恨朝中綬若若(감한조중수약약)

也隨市井媚凶人(야수시정미흉인)

노나라가 다시 계손행보(季孫行父)를 당진으로 보내 제나라의 시역사건과 천자의 사자와 함께 국모를 감금한 일을 고했다. 당진의 조돈은 영공을 모시고 송(宋), 위(衛), 채(蔡), 진(陳), 정(鄭), 조(曺), 허(許) 여덟 나라 제후들을 옹(雍)③땅에 모이게 하고 제나라를 토벌할 일을 상의했다. 이에 제의공은 당진에 많은 뇌물을 바친 후에 선백은 석방하여 주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소희는 노나라로 돌려보냈다. 제후들은 곧바로 해산하여 각기 군사를 이끌고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노나라는 당진이 제나라를 정벌하지 않고 제후들을 해산시켜 버리자 공자수(公子遂)를 사자로 보내어 뇌물을 제나라에 바쳐 화의를 청해 혹시라도 제의공이 군사를 내어 정벌할 경우를 미연에 방지했다.

3. 후시매국(厚施買國)

- 백성들에게 재산을 풀어 나라를 산 송나라의 공자포

한편 송양공의 부인 왕희(王姬)는 즉 주양왕의 누이로써 송성공(宋成公) 왕신(王臣)의 모친이며 송소공(宋昭公) 저구(杵臼)의 할머니다. 소공이 세자였을 때 공자앙(公子卬), 공손공숙(公孫孔叔), 공손종리(公孫鍾離) 세 사람과는 사냥을 다니며 같이 즐겨 놀아 서로 사이가 좋았다. 성공의 뒤를 이어 송군의 자리에 오른 소공은 오로지 옛날부터 친하게 지냈던 세 사람의 말만 들었다. 대신들에게 나라 일을 맡기지 않았고, 공족들을 멀리하면서 왕희에게 문안도 드리지 않았다. 백성들의 일을 태만히 하고, 매일 들에 나가서 하는 사냥만을 인생의 락으로 삼았다. 그런 송소공의 문란한 행동 때문에 장차 송나라에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마(司馬) 락(樂)은 그의 관직을 공자앙에게 넘겨주고 집안에 들어앉아 은둔했다. 사성(司城)④ 공손수(公孫壽) 역시 화가 자신의 몸에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나이를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송소공이 공손수(公孫壽)의 아들 탕의제(蕩意諸)를 불러 사성의 직을 물려받게 하였다.

양공의 부인 왕희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음탕한 여자였다. 소공에게는 공자포(公子鮑)라고 하는 서제가 있었는데 용모가 여자보다 더 예뻤다. 왕희가 마음속으로 매우 사모하여 궁실로 불러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유혹하여 통정했다. 공자포를 송나라 군주의 자리에 앉히겠다고 약속한 왕희는 소공을 폐하고 공자포를 세우기 위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다. 한편 목공과 양공의 종족들이 너무 번창하여 두려움을 느낀 소공은 공자앙과 모의하여 그 무리들을 전부 나라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왕희가 이 사실을 몰래 두 종족들에게 말해 주자 송나라는 마침내 내란이 일어났다. 두 종족들은 작당하여 공자앙과 공손종리를 조문 앞에서 살해했다. 이에 사성(司城) 탕의제는 자신도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노나라로 도망치고 말았다. 평소에 송나라의 육경(六卿)들을 높이 받들었던 공자포는 나라 안에 남아 있는 경들과 두 종족들을 화해시켜 더 이상 함부로 서로 죽이지 않도록 주선했다. 공자포는 송소공에게 권하여 탕의제를 노나라에서 불러와 그의 관직을 돌려주도록 했다.

공자포는 제나라의 공자 상인(商人)이 인심을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산 후에 제후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즉시 그를 본받아 역시 가재를 털어 빈민들을 구제하기 시작했다. 소공 7년 송나라에 기근이 들자 공자포가 그의 창고에 있던 모든 곡식들을 내놓아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했다. 또한 노인을 높이고 현자를 존경하여 나라 안에 70살 이상이 된 노인은 모두 매월 곡식과 비단을 주고 더하여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을 보낸 후에 사람을 시켜 모두 안부를 묻게 했다. 그 밖에 한 가지 재능이나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문하에 모이게 하여 음식을 후하게 차려 대접했다. 또한 매월 공경대부들의 집 앞으로 음식을 보내고 친소를 불문하고 종족들의 경조사에는 가재를 털어 도왔다. 소공 8년에 송나라에 더 큰 기근이 닥쳤으나 공자포의 창고는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왕희가 궁중에 보관하고 있던 모든 보물들을 공자포에게 주어 빈민들을 돕도록 도왔다. 송나라의 백성들은 공자포의 인자함을 노래하게 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친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면 사람마다 공자포가 송나라의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송나라 백성들이 자기편이 되었다고 생각한 공자포는 양부인에게 소공을 죽여야 되겠다고 몰래 고했다. 양부인이 듣고 방법을 알려 주었다.

「내가 들으니 저구가 며칠 후에 맹제(孟諸) 소택지로 사냥을 나간다고 했다. 그가 수레를 타고 성문 밖으로 나가게 되면 내가 공자수를 시켜 성문을 닫게 하겠다. 그 사이 너는 성안의 군사들을 이끌고 성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구를 공격하면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공자포가 왕희의 말을 따랐다.

한편 사성 탕의제는 자못 어질다고 나라 안에서 이름이 있어 공자포가 평소에 예를 갖추어 공경했다. 그때 마침 양부인의 음모를 듣게 된 탕의제가 소공에게 고했다.

「주군께서는 사냥을 나가시면 안 됩니다. 만약 사냥을 나가신다면 돌아오시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

「만약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면, 비록 성 안에 있다 한들 어찌 그들의 손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소공은 즉시 우사(右師) 화원(華元)과 좌사(左師) 공손우(公孫友)에게 명하여 성을 지키도록 명하고 부고에 보관하고 있던 송나라의 보물들을 모두 꺼내어 수레에 싣고 그의 측근들과 함께 그해 겨울 11월에 맹제의 소택지로 사냥을 나갔다. 소공의 일행이 성문을 나서자 양부인이 화원과 공손우를 불리 궁중에 머물게 하고 공자수를 시켜 성문을 닫도록 했다. 공자포가 사마 화우(華耦)를 시켜 성안의 군사들을 향해 외치게 했다.

「양부인이 명하시기를 금일부터 공자포를 우리 송나라의 군주로 세우라고 하셨다. 우리들은 무도혼군을 없애고 도를 갖추신 분을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고자 한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군사들이 모두 뛰어나오며 말했다.

「원컨대 명을 따르겠습니다.」

성안의 백성들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화우가 성안의 무리들을 인솔하여 성문 밖으로 나가 소공의 뒤를 추격했다. 소공의 행렬은 사냥터를 가는 길 중간쯤 되는 곳에 이르러 성중에 변란이 난 사실을 알았다. 탕의제가 소공에게 권하여 이웃나라로 몸을 피한 후에 후사를 도모하라고 권했다. 소공이 말했다.

「위로는 할머니가 밑으로는 백성들이 모두가 과인을 원수처럼 대하고 있는데 제후들 중 누가 나를 받아들이겠는가? 타국을 방황하다 죽기 보다는 차라리 고향에서 죽겠소!」

그 즉시 령을 내려 수레를 세우게 한 소공은 음식을 준비하게 하여 사냥을 따라 온 종자들을 모두 배불리 먹였다. 일행이 음식 먹기가 끝나자 소공이 좌우를 향해 말했다.

「죄는 과인 한 사람에게 있지 그대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대들은 수년간 나를 따라 다니며 모셔 왔는데 내가 해 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오늘 나라 안의 보물은 모두 내 손에 있다. 내가 나누어 너희들에게 주겠으니 각자가 도망가서 목숨을 구하기 바란다. 절대 과인과 같이 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좌우의 시종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청컨대 주군께서는 앞서 가시기 바랍니다. 만약 군사들이 추격해 온다면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한 번 싸워 물리쳐 보겠습니다.」

「헛되이 목숨을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윽고 화우가 이끄는 군사들이 당도하여 소공의 일행을 포위하고는 양부인의 명이라고 하면서 전했다.

「단지 무도혼군만 죽이면 될 일이지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소공이 좌우를 급히 불렀으나 태반이 놀라서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오로지 탕의제만이 칼을 빼 들고 소공 옆에 서서 지켰다. 화우가 탕의제를 따로 앞으로 불러내어 양부인의 명을 다시 전했다. 탕의제가 듣고 한탄하며 말했다.

「남의 신하된 자로써 그 군주가 어려움에 처하고 있음에도 몸을 피해 몸이 비록 살아난다 한들 어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화우가 즉시 손에 들고 있던 과로 소공을 찌르려 하자 탕의제가 달려들어 자기 몸으로 소공 앞을 가로막고 칼을 들고 대항했다. 그러자 화우가 데려온 군사들과 백성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먼저 탕의제를 죽이고 후에 소공도 같이 죽였다. 도망치지 않고 소공의 좌우에 남아 있던 측근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한탄했다.

옛날에는 송나라의 화독이 상공을 시해하더니

오늘은 화우가 반역자를 도와 소공을 죽이는 구나!

란신적자는 원래 그 종자가 따로 있으니

장미와 도리⑤는 근본이 같지 않음이로다!

昔年華督弑殤公(석년화독시상공)

華耦今朝又助凶(화우금조우조흉)

賊子亂臣原有種(적자란신원유종)

薔薇桃李不相同(장미도리부상동)

송성공을 시해한 화우가 성안으로 돌아와서 양부인에게 복명했다. 우사 화원, 좌사 공손우(公孫友) 등이 같이 양부인에게 상주했다.

「공자포는 심성이 어질고 후하여 민심을 얻고 있으니 마땅히 군위를 잇도록 해야 합니다.」

양부인은 즉시 공자포를 옹립하여 송나라의 군주 자리에 앉게 했다. 이 사람이 송문공(宋文公)이다. 조당에서 문공에게 경하의 예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화우는 갑자기 심장에 통증을 느끼더니 이내 숨이 끊어져 죽고 말았다. 문공이 탕의제의 충성심을 가상하게 여겨 그 동생 탕훼(蕩虺)를 사마로 임명하여 화우의 일을 맡기고 동복동생 공자수를 사성(司城)으로 삼아 죽은 탕의제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

한편 송나라에서 군주가 시해 당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돈은 순림보를 장수로 삼아 위(衛), 진(陳), 정(鄭) 세 나라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송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송나라 우사 화원이 당진의 군영에 사자로 가서 나라 안의 백성들이 공자포가 인의(仁義), 후덕(厚德)하여 군주로 추대했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한편으로는 황금과 비단을 여러 수레에 싣고 와서 당진의 군사들을 호군하는 예를 취하며 화의를 청했다. 순림보가 송나라의 뇌물을 받고 화의 신청을 받아 드리려고 하자 정목공이 보고 말했다.

「우리들이 종을 울리고 북을 쳐서 군사를 모은 후에 장군을 따라 송나라에 와서 그 군주를 시해한 자를 토벌하러 왔는데 만약 우리가 그들의 화의신청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란신적자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소?」

순림보가 대답했다.

「제와 송 두 나라는 같은 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제나라에게는 관대하게 대했는데 어찌 유독 송나라만을 토벌하여 그들의 군주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송나라의 경우는 나라 안의 백성들이 원해서 추대한 일이라 이미 모든 것들이 정해져 버려 기정사실화 되었습니다. 어찌 토벌하여 다시 군주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순림보는 즉시 송나라 화원과 화의를 맺고 송문공의 군위를 인정한 후에 군사를 이끌고 당진으로 돌아갔다. 정목공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 당진의 처사에 불만을 말했다.

「당진이 단지 송나라의 뇌물만을 탐하여 이름만 있지 실속이 없어 그들은 결코 백업(伯業)을 다시 일으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왕이 선 초나라가 머지않아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쳐들어 올 것이다. 차라리 당진을 버리고 초나라를 따름으로써 나라의 안전을 꾀해야 겠다.」

목공은 즉시 사자를 보내 초나라와 수호를 맺었다. 당진으로써는 정나라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뿐 달리 어쩌는 수가 없었다.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를 논했다.

의를 밝혀 간적들을 토벌함은 패주의 일인데

군사를 끌고와서는 오히려 란신들을 도왔다.

상인은 무양하고 포(鮑)는 군위가 안정되었으니

중원의 젊은 장부들에게 비웃음만 샀도다!

仗義除殘是伯圖(장의제잔시백도)

興師翻把亂臣扶(흥사번파란신부)

商人無恙鮑安位(상인무양포안위)

笑殺中原少丈夫(소살중원소장부)

4. 掘棺刖足 妻子覇占(굴관월족 처자패점)

- 시신을 파서 다리를 자르고 남의 처자를 빼앗아 차지하다. -

한편 제의공(齊懿公) 상인은 성격이 원래 탐욕스럽고 절제하는 마음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위인이었다. 그 부친 환공이 재위에 있을 때 이미 대부 병원(邴原)과 전답의 경계를 가지고 다툰 적이 있었다. 환공이 관중에게 시켜 그 시비를 가리게 했다. 관중은 상인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여 전답을 병원에게 돌려줬다. 상인이 그 일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계속 마음속에 품고 다녔다. 후에 세자사를 시해하고 스스로 군위에 오른 의공은 그 즉시 병원의 전답을 모두 빼앗았다. 또한 관중이 병씨의 편을 들은 것에 한을 품고 있다가 관씨들의 봉읍을 반으로 줄여 버렸다. 관씨 종족들은 죄를 받을 까 두려워하여 초나라로 도망쳤다. 관씨들은 이 일로 인해 초나라에서 벼슬을 받고 정착했다. 그래도 의공은 병원에 대한 한을 풀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나 그때는 병원이 이미 죽은 후였다. 병원의 묘가 임치성 동쪽 교외에 있다는 사실을알고 있던 의공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그 묘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군사들을 시켜 병원의 무덤을 판 의공은 그 시신의 발을 자르게 했다. 그때 병원의 아들 병촉(邴歜)은 의공을 수행하여 측근에 있었다. 의공이 병촉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너의 아비는 다리를 잘라야 하는 죄를 지었다. 너는 과인이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

병촉이 의공의 말에 대답했다.

「신의 부친이 살아 계셨을 때 형을 받지 않고 죽음을 면한 것만도 이미 분수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이제 썩어 버린 해골에 손상이 조금 갔을 뿐인데 어찌 그런 일에 제가 원한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의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경이야말로 가히 부모의 허물을 덮을 수 있는 아들이로다!」

의공이 즉시 병촉에게서 빼앗은 전답을 다시 돌려주라고 좌우에게 명했다. 병촉은 자기 부친의 시신을 다시 매장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을 올려 의공의 허락을 받았다.

의공이 사냥에서 돌아와서 나라 안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찾아 돈을 주고 사 오게 하고는 그녀들을 끼고 하루가 짧다 하고 종일토록 음사(淫事)를 즐겼다. 그때 어떤 사람이 대부 염직(閻職)의 처가 매우 아름답다고 의공에게 말했다. 마침 새해 원단(元旦)이 다가오자, 의공은 령을 내려 모든 대부들의 부인들을 궁중으로 불러 새해 인사를 드리라고 했다. 물론 염직의 처도 여러 대부들의 부인들과 함께 궁중으로 들어와 의공에게 신년하례를 올렸다. 의공이 염직의 부인을 보더니 매우 기뻐하며 궁중에 머물게 하고는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서 염직에게 말했다.

「중궁의 여인들이 경의 처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내가 그녀를 궁중에 머무르라고 하였으니 경은 별도로 좋은 여인을 구하여 부인을 얻도록 하시오!」

염직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왔으나 감히 입 밖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의공의 면전에서 물러났다.

5. 죽지우변(竹池遇變)

- 죽지에서 시해 당하는 제의공 -

임치성의 서남문 밖에 이름이 신지(申池)라는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의 물이 매우 청결하여 목욕을 즐길만 했다. 연못의 주위에는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뤘다. 그래서 연못의 이름을 죽지(竹池)라고도 불렀다. 때는 여름철인 5월이라 의공이 신지에 가서 목욕을 하며 더위를 피하고자 즉시 수레를 준비하라 하고는 병촉을 어자로 염직을 참승(驂乘)⑥으로 명하여 자기를 수행하라고 했다. 시종가운데 한사람이 아무도 몰래 의공에게 와서 간했다.

「주군께서는 병촉의 부친 되는 사람의 시신을 파내어 발을 자르고 염직의 처를 빼앗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어찌 주군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군께서는 오히려 그 두 사람을 불러 곁에 두고 계십니다. 아직도 조당에는 제나라의 신하들이 수두룩한데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을 데려 가시려고 하십니까?」

「두 사람은 지금까지 과인을 원망한 적이 없다. 그대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

의공은 즉시 병촉에게 수레를 몰게 하여 신지로 가서 즐거운 마음으로 놀다 보니 술을 많이 마셔 취하게 되었다. 날씨는 한낮이 되어 온도가 높이 올라가 비단침대를 가져오게 하여 깊은 대나무 숲 속에 설치하게 하고는 그 위에 누워서 더위를 식히려고 하였다. 의공이 대나무 숲 속에서 누워 잠이 들자 병촉과 염직도 연못으로 들어가 목욕을 했다. 그때 의공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병촉은 항상 살해할 기회만을 노리면서 그 아비의 원한을 갚고자 했으나 아직 그 일을 같이 도모할 사람을 찾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염직이 자기의 아내를 의공에게 빼앗긴 일을 알고 마음을 떠보려고 했으나 아직까지 감히 자기가 가지고 뜻을 말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병촉은 지금 둘이서 같이 연못에 목욕을 하게 되자 마음속으로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가 일부러 염직의 머리를 부러진 대나무 가지로 때렸다. 염직이 맞고 화가 나서 말했다.

「어찌하여 네가 감히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병촉이 얼굴에 비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너는 마누라를 빼앗길 때도 화를 내지 않더니 이제 대나무로 한번 맞아 상처도 나지 않았는데 그것도 못 참고 화를 내는가?」

「마누라를 빼앗긴 일은 비록 나의 치욕이지만 그것은 나 한 사람만의 것이다. 그러나 네 아비의 시신에서 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을 쳐다보고만 있던 너의 치욕은 네 집안이 입은 치욕인데 누가 입은 치욕이 더 큰 것인가? 그대는 그대의 아비가 입은 치욕을 참고 있으면서 오히려 나보고 내 처를 빼앗긴 치욕을 책하고 있으니 어찌 그대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가 했소! 내가 은인자중하여 한 번도 이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그대가 이미 옛날에 당한 치욕을 이미 잊어버리지나 않았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였소. 그대가 이미 그 치욕을 잊었는데 내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면 그것은 일을 행하는데 무익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사람은 각기 자기 마음을 갖고 있소. 어찌 그 치욕을 잊고 있었겠소? 단지 힘이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었을 따름이었소.」

「지금 흉악무도한 놈이 대나무 숲에서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소. 이곳에 따라온 시자는 우리 빼고 단지 두 사람의 내시뿐이오.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오. 절대 이 기회를 노칠 수 없소!」

「그대는 능히 큰일을 행할 수 있겠소! 내가 마땅히 도우리라!」

두 사람이 연못에서 나와 물기를 닦아 내고 옷을 입은 후에 같이 대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의공은 깊이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가 마치 벼락치듯 하였다. 의공 옆에는 내시 두 사람이 좌우에서 각각 지키고 있었다. 병촉이 내시들에게 말했다.

「주공께서 술에서 깨어나시면 필시 마실 물을 찾으실 테니 그대들은 물을 끓여 준비를 하기 바랍니다.」

내시들이 병촉의 말을 쫓아 물을 끓이기 위해 물러갔다. 염직이 의공의 두 손을 잡자 병촉은 의공의 목을 누르고는 허리에 찬 칼로 목을 베었다. 의공의 머리는 땅에 떨어졌다. 두 사람이 의공의 시체를 들어 대나무 숲 깊은 곳에 감추어 놓고 그 머리는 연못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의공 재위 4년만의 일이었다. 내시들이 물을 끓여 가지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오자 병촉이 말했다.

「상인은 군주를 시해하고 군위를 찬탈한 흉악한 놈이라 제나라 선군들께서 우리들을 시켜 죽이도록 하셨다. 공자원은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니 군주로 세워도 무방할 할 것이다.」

두 사람의 내시들이 단지 「예, 예」하기만 할뿐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병촉과 염직이 의공이 탔던 수레를 몰고 성안의 자기 집으로 들어가 술상을 차리게 하고는 마음껏 마시고 서로 간에 경하의 말을 주고받으며 환호했다. 어떤 사람이 보고 그 일을 고경(高傾)과 국귀보(國歸父) 두 사람의 상경에게 고했다. 고경이 듣고 말했다.

「그 놈들을 잡아들여 죄를 물은 후에 죽여서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로 삼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국귀보의 생각은 달랐다.

「군주를 시해한 자를 어쩌지 못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물었는데 그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이윽고 술을 마시기를 다해 거나해진 병촉과 염직 두 사람은 그들의 가노들에게 큰 수레를 준비하여 모든 가재들을 실으라고 명한 후에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수레에 타고 남문을 통하여 유유히 성밖으로 나갔다. 가노들이 수레를 빨리 몰라고 권하자 병촉이 말했다.

「무도한 상인을 내가 죽여서 성안의 백성들이 다행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는데 내가 무엇이 무서워서 빨리 간단 말이냐?」

병촉과 염직은 가족들은 데리고 모두 한가롭게 초나라를 향해 수레를 몰았다. 고경과 국귀보가 군신들을 조당에 모이게 하여 후사 문제를 상의한 결과 공자원을 받들어 군위를 잇도록 하였다. 공자원이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거 제혜공(齊惠公)이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 일을 논했다.

어찌하여 원수를 데리고 같이 놀 수 있단 말인가?

원수와 가까이 하여 원수가 원수를 갚게 만들었구나!

이것은 역신에 대해 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기보다는

하늘이 두 사람을 시켜 흉악한 자를 죽였음이라!

仇人豈可与同游(구인개가여동유)

密邇仇人仇報仇(밀이구인구보구)

不是逆臣無遠計(부시역신무원계)

天敎二憾逞凶謀(천고이감영흉모)

5. 三桓跋扈(삼환발호)

- 발호하는 노나라의 삼환씨 -

한편 노문공(魯文公) 흥(興)은 곧 희공(僖公)의 정부인 성강(聲姜) 소생이었는데 주양왕 26년, 기원전 626년에 군위에 올랐다. 노문공이 제소공의 딸 강씨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아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름을 각각 오(惡)와 시(視)라 했다. 문공이 다시 섬진 출신의 신분이 미천한 여인 경영(敬嬴)을 사랑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름을 왜(倭)와 숙힐(叔肹)이라 했다. 네 아들 중 공자왜가 가장 나이가 많았으나 정부인 소생으로 적자인 공자오를 세자로 세웠다.

당시 노나라는 삼환씨(三桓氏)⑦가 정사를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맹손씨(孟孫氏)는 공손오(公孫敖)가 뒤를 잇고 있었는데 이름이 곡(穀)과 난(難)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으며, 숙손씨(叔孫氏)는 숙아(叔牙)의 아들인 공손자(公孫玆)가 사위(嗣位)를 하여 숙중팽생(叔仲彭生)과 숙손득신(叔孫得臣)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노문공은 공자오을 세자로 봉하면서 숙중팽손을 태부로 임명했다. 끝으로 계손씨(季孫氏)로는 계우(季友)의 아들 계무일(季无佚)이 행보(行父)라는 아들을 낳았다. 계문자(季文子)는 계손행보(季孫行父)의 시호(諡號)이다.

또한 노장공(魯庄公)에게는 공자수(公子遂)라는 첩실 소생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을 중수(仲遂)라 했다. 살고 있던 집이 노성(魯城)의 동문 근처라 이름을 동문수(東門遂)라고 했다. 노희공(魯僖公) 치세 때부터 이미 삼환족(三桓族)은 모두 같이 노나라의 조정에 나와 벼슬을 하고 있었다. 공손오와 동문수 사이의 항렬을 따진다면 재종형제간이며 계손행보도 또한 같은 항렬이었다. 공손오가 중수에게 죄를 얻어 외국에서 객사한 후 실권을 하게 된 이후로는 중손씨(仲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 등 삼가가 노나라의 국정을 나누어 맡았다.

공손오가 동문수에게 죄를 얻게 된 사연은 이렇다. 공손오가 거(莒)나라 사람 기씨(己氏)의 딸인 대기(戴己)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아 곡(穀)을 낳았다. 또한 대기의 동생 성기(聲己)를 같이 취하여 난(難)을 낳았는데 대기가 병이 들어 일찍 죽었다. 천성이 원래 음탕한 공손오는 다시 거나라의 기씨(己氏)에게 가서 대기의 뒤를 이어 정부인으로 삼으려고 한다고 남은 딸을 달라고 했다. 기씨가 거절했다.

「성기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마땅히 그녀를 대기의 뒤를 잇도록 하여 그대의 정부인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절을 당한 공손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의 사촌동생 중수가 아직 부인이 없는데 데려가서 중수의 아내로 삼게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기씨가 허락했다. 노문공 7년, 기원전 620년 공손오가 노후의 명을 받들어 거나라에 수호사절로 갔다.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중수를 위하여 기녀를 노나라로 데려 가려고 했다. 공손오의 행렬이 기씨가 사는 언릉(鄢陵)⑧에 당도하여 여장을 풀었다. 성루에 오른 공손오가 마침 성문 아래를 지나고 있는 기녀를 보게 되었는데 그녀의 미색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날 밤 결국 기녀와 동침한 공손오는 자기 처로 만들어 노나라로 돌아왔다. 자기와 약혼한 여인을 공손오에게 빼앗긴 동문수가 크게 노하여 노문공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그의 죄를 물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했다. 숙중팽생이 옆에 있다가 반대했다.

「군사를 내어 공손오를 공격하는 일은 불가합니다. 군사가 나라 안에서 움직이면 란(亂)이라 하고 외국으로부터 쳐들어오면 구(寇)라 합니다. 근자에 다행히 외국으로부터 군사적인 침략이 없는데 어찌하여 나라 안에서 란을 조장하려고 하십니까?」

노문공이 공손오를 불러 즉시 기녀를 다시 거나라로 돌려보내 중수의 노한 감정을 풀라고 명했다. 공손오가 할 수 없이 기녀를 거나라로 돌려보냈다. 공손오와 중수는 다시 옛날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손오는 기녀를 잊을 수 없었다. 다음 해 주나라의 양왕이 죽자 노후가 공손오를 조문 사절로 임명하여 주나라에 가도록 했다. 공손오가 주왕의 조문을 위해 바치게 되어 있는 예물들을 모두 가지고 주나라로 가지 않고 몰래 거국으로 가서 기녀를 만나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살았다. 노문공 역시 그 일을 추궁하지 않고 그의 아들 곡을 후사를 잇게 하고 맹손씨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거나라에 살던 공손오가 갑자기 고향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자기 아들 맹손곡(孟孫穀)을 시켜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중수(仲遂)에게 전하게 했다. 자기 부친의 말을 중수에게 전한 맹손곡은 자기 부친이 노나라에 돌아 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중수가 말했다.

「너의 부친이 만약 노나라에 돌아오고 싶다면 반드시 내가 말하는 세 가지 조건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전하라! 조당에 나오지 말 것이며, 국정에 관여하지 말 것이며, 기녀를 데려오지 말 것이다.」

곡이 사람을 시켜 거나라에 보내 중수의 말을 전했다. 공손오는 주저하지 않고 허락했다. 공손오가 노나라에 다시 돌아 온 지 3년이 지나도록 과연 문을 걸어 잠그고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있던 모든 재물과 금은보화를 챙기더니 다시 거나라로 가 버렸다. 맹손곡은 그 부친을 생각하는 마음에 몇 년도 더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 아들 중손멸(仲孫蔑)이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동생 맹손난이 맹손씨 집안의 뒤를 이엇다. 맹손난은 조정에 출사하여 경(卿)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기녀가 죽었다. 공손오가 다시 노나라에 돌아오고 싶어 그의 가재를 모두 거두어 문공과 중수에게 바치고 그의 아들 맹손난을 시켜 자기의 귀국을 청하게 했다. 문공이 허락하자 공손오가 다시 노나라에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공손오가 제나라의 경계에 이르자 병이 들어 더 이상 길을 가지 못하고 당부(堂阜)⑨의 땅에서 죽었다. 맹손난이 노문공에게 간곡하게 청해 허락을 받아 부친의 시신을 노나라로 가져와 상을 치렀다. 맹손난은 곧 죄인의 자식이라 근신하려고 했지만 종족의 제사를 지내는 일을 당분간 맡아 주재해야만 했다. 그는 맹손곡의 아들 중손멸이 장성하기를 기다려 종족의 일을 넘기려고만 할뿐 노나라의 정사에는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다. 계손행보(季孫行父)는 중수(仲遂)와 팽생(彭生) 및 득신(得臣) 등의 세 사람은 모두 자기에게는 숙부의 항렬이었기 때문에 매사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세 사람에게 양보했다. 세 사람 중 팽생의 사람됨이 가장 어질고 후덕하였고 또한 세자의 태부 직까지 맡고 있었기 때문에 중수와 득신처럼 노나라 정사에는 그다지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간이지만 팽생과는 상반되는 성격의 득신은 여러 번 노나라 병권을 손에 쥐게 되면서 더욱 노나라의 정사를 멋대로 주물렀다.

한편 문공의 총애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생이 세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경영(敬嬴)이 많은 뇌물을 중수에게 주어 환심을 샀다. 경영이 그의 아들 공자왜를 중수에게 부탁하면서 말했다.

「앞으로 왜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노나라의 국정은 그대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겠소!」

공자왜를 자기에게 부탁하는 경영의 태도에 감격한 중수는 이윽고 공자왜를 노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리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중수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숙중팽생은 바로 세자오의 태부이니 필시 공자왜를 추대하고자 하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생 숙손득신은 성격이 탐욕스러워 뇌물을 좋아하니 이해로써 설득하면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중수는 시시때때로 경영이 내려 준 재물들을 나누어 득신에게 보내곤 했다. 중수는 재물을 보낼 때마다 득신에게 말을 전했다.

「이것은 경영부인이 나에게 명하여 그대에게 내리는 하사품이요!」

또한 중수는 공자왜를 시간이 있을 때마다 득신의 집으로 가게 하여 공손한 태도로 가르침을 청하게 했다. 이런 연유로 득신의 마음도 역시 공자왜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주광왕(周匡王) 4년, 즉 기원전 609년 봄에 노나라 문공은 재위 18년만에 죽었다. 세자오가 장례를 주제하고 노후의 자리에 즉위하였다. 중원의 각 제후국들이 모두 사자를 보내와 조문했다. 그때 제나라는 혜공(惠公) 원(元)이 새로이 군주의 자리에 올라 옛날 의공이 노나라에 행한 무도한 짓을 바로 잡고자 사자를 보내 문공의 장례에 참석하게 했다. 중수가 숙손득신에게 말했다.

「제와 노 두 나라는 대를 이어 우호관계를 맺어 왔소. 특히 환공(桓公)과 희공(僖公) 두 군주 때에는 마치 형제처럼 지냈었소. 제나라에서 효공(孝公)이 들어서고부터 원한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상인에 이르러서는 서로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소. 근자에 제나라에서 공자원이 새로 즉위하였으나 우리는 아직까지 경축의 사절을 보내지 않고 있음에도 제나라가 먼저 우리나라에 조문 사절을 보냈으니 이것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는 좋은 뜻이 아니겠소? 우리도 사자를 보내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이번 기회에 제나라와 수교를 맺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공자왜를 군위에 앉히는 것도 한 가지 계책이라고 할 수 있소.」

「그대가 간다면 내가 동행하리다.」

두 사람이 동행하여 제나라로 갔다.

《제50회로 계속》

주석

①신성(新城) : 당진의 부도(副都)로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 동북의 곡옥(曲沃)이다. 분국인 곡옥이 본국을 병합하기 전에 일어난 곳이다. <진본기(秦本紀)> 太子申生死于新城

②제환공이 죽자 그의 여섯 아들 중 다섯이 서로 싸웠다. 그들의 권력투쟁 양상이 너무 복잡하여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상세한 이야기는 전회 32회와 33회를 참조.

나이순

이 름

시호

군위에 오른 순서

비고

1

无虧

무휴

없음

1

환공에 의해 세자로 책봉된 공자소를 재치고 간신 옹무(雍巫)와 수조(竪刁)의 옹립을 받아 형제들 중 맨 처음 군위에 오르나 국인들에 의해 피살당했다.

2

惠公

5

효공(孝公)과의 후계자 다툼에서 송양공(宋襄公)의 후원을 받은 세자소에게 패하여 위나라에 망명하여 살던 중 효공의 군위가 안정되자 귀국을 허락 받아 제나라의 정사를 돌보다 상인(商人) 즉 의공(懿公)이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혜공으로 즉위하였다.

3

孝公

2

환공이 살아 있을때 관중과 상의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그 후견인으로 송양공을 지목했다. 옹무와 수조가 반란을 일으켜 여섯 공자 중 나이가 제일 많은 무휴를 옹립하자 송양공에게 피신하고 그의 도움으로 옹무와 수조의 반란을 진압하고 즉위했다.

4

昭公

3

효공의 아들을 죽인 개방(開方)의 도움으로 군위에 올랐다.

5

商人

상인

懿公

4

소공의 아들 태자사(太子舍)를 죽이고 스스로 군위에 올랐으나 병촉과 염직에 의해 죽지에 놀러 갔다가 살해당했다.

6

없음

후계자 싸움에 끼어 들지 않고 섬진으로 망명하여 대부벼슬을 받고 그곳에서 살다가 다시 초나라로 옮겼다. 후에 중원 경영에 뜻을 둔 초성왕이 노나라의 지원 요청을 받아 들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양곡(陽谷)을 점령하자 그곳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초성왕은 다시 초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옹무(雍巫)를 보내어 공자옹을 돕게했다.

③옹(雍) : 지금의 황하 북안의 하남성 초작시(焦作市)로 춘추 때 당진령이다.

④사성(司城) : 사공(司空)에 해당하는 송나라의 대신이다. 토목이나 건축을 담당했던 관리들의 장이다.

⑤도리(桃李) : 복숭아와 오얏나무 혹은 그 열매. 좋은 나무를 뜻한다. 복숭아와 오얏나무를 심으면 여름에는 그 그늘에서 쉴 수 있고 가을에는 그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데에서 유용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⑥참승(驂乘) : 고대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닐 때 그 중앙에는 말을 모는 어자(御者)가, 어자의 오른 쪽에는 시종이나 심부름이나 호위를 하는 사람이 타고 왼쪽에는 주인이나 장군이 탔다. 병거의 경우는 차우(車右)라 했고 수레의 경우는 참승이라 했다.

⑦)삼환씨(三桓氏)의 계보도 : 삼환씨는 노환공(魯桓公)의 방계 후손들인데 처음에는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를 칭했다가 맹손씨가 몰락하고 노장공의 서자 동문수의 자손들인 중손씨가 대신했다.

桓公 x 宮女 - ①孟孫氏

公子慶父⇒公孫敖⇒ 公孫穀/公孫難⇒仲孫蔑

②叔孫氏

公子牙(叔牙)⇒ 公孫玆⇒叔仲彭生/叔孫得臣⇒叔孫僑如

x 文姜 - ▶庄公(公子同)⇒東門遂( 장공의 서자/仲遂)⇒

①仲孫氏

②季孫氏

公子友(季友)⇒ 季无佚⇒季孫行父(季文子)

⑧언릉(鄢陵) : 지금의 산동성 기남현(沂南縣) 북, 거나라의 도성이었던 거현(莒縣)은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30리 떨어져 있었다. 기원전 575년 당진과 초나라가 싸워 초공왕의 눈에 화살을 맞아 초나라가 패한 싸움터인 지금의 하남성 언릉현(鄢陵縣)과는 다른 곳이다.

⑨당부(堂阜) : 지금의 산동성 몽음현(蒙陰縣) 경내에 이오정(夷吾亭)이라고 있는데 포숙이 노나라에서 함거에 갇혀 포로로 잡혀온 관중을 석방한 곳이다.

[평 설]

패자가 그 지위를 잃게 되는 과정에서 내부의 부패 세력은 외부의 무력세력으로부터의 압력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 당진국이 기원전 612년 호(扈)에서의 회맹을 주재한 후에 송과 제 두 나라의 란신들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그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다. 평소에 제나라의 군주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공자 상인(商人)은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어 인심을 얻고 타국에서의 망명객들을 모아 그의 발톱과 이빨로 삼았다. 기원전 612년 마침내 제소공이 죽자 음모를 꾸며 세자 사(舍)를 죽이고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제의공(齊懿公)이 제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제의공은 찬탈의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주나라의 사자 선백이 세자사의 모친과 추문을 일으켰다고 모함하여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천자의 사자를 구금했다. 다시 노나라가 자기의 찬탈한 행위를 주나라에 알렸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했다.

제의공같은 극악무도한 찬탈자에 대해서는 패주로써 제후들을 호령하는 지위의 당진국은 당연히 공의에 맞는 처리를 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진국의 집정 조돈(趙盾)은 제나라에 찬탈의 죄를 물어 토벌하기 위해 8국의 제후군을 일으켰으나 제의공으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중도에서 흐지부지 처리하고 말았다.

제의공이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어 군위를 찬탈하는 수단을 본 송나라의 공자포 역시 우선 국인들의 지지를 획득한 후, 기원전 611년 드디어 송소공(宋昭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송군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송문공(宋文公)이다. 조돈이 다시 순림보(荀林父)에게 명하여 위(衛), 진(陳), 정(鄭) 삼국의 제후군의 지원을 받아 당진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송나라를 토벌하여 그 시역죄를 다스리라고 했다. 그러나 순림보 역시 조돈의 전철을 밟아 공자포로부터 여러 대의 수레에 가득 실은 금은포백을 받고 공자포의 군위를 승인해주었다.

인의(仁義)라는 것은 원래 일종의 고상한 도덕에 기반한다. 그러나 상인(商人)이 그의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돈을 주고 사서 군주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서였다. 도덕의 영역에 있던 인의(仁義)라는 개념을 모략에 이용한 것이니 이것은 인술(仁術)인 것이다. 공자포가 사용한 후시매국(厚施買國)이라는 말은 곧바로 후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 인의도덕이라는 말을 입에 물고 살지만, 뱃속에는 도적이나 창녀의 심보를 갖고 있다(滿口仁義道德, 一肚子男盜女娼)’으로 표현되는 위선적인 군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진실로 인의(仁義)라는 말이 비극적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패자로서의 당진국의 행위는 실로 “ 의(義)를 밝혀 흉악한 자를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 패업을 이루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동원한 군사로 오히려 란신적자들을 비호했다.” 라고 할 수 있다. 당진국의 몇몇 권신들의 뇌물을 받은 대가로 정의를 밝히는 직무를 버리고 제후들의 마음을 떠나게 한 것이다. 이로써 당진국은 세상 사람들에게 한낱 재물이나 탐하는 나라로 인식되어 패주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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