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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06 21:50:135028 
조충국(趙充國)- 둔전을 최초로 시행한 서한의 명장
운영자

조충국(趙充國)

 조충국의 자는 옹손(翁孫)이고 서한의 상규(上邦) 사람이다. 한무제4년 기원전137년에 태어나서 한선제(漢宣帝) 22년인 기원전52년에 죽었다. 기사(騎射)에 능하고 용감했으며 지략이 뛰어난 군사가였다. 위인이 침착하고 용기가 있었으며 모든 일을 심모원려(深謀遠慮)하여 처리했다. 당시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서 둔전병을 두어야한다는 정책을 제안하여 중국의 군사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어렸을 때 변방에 살면서 병법과 군사행정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기원전119년, 한무제22년, 한무제가 흉노에 대해 세 번째 행한 대대적인 정벌전 결과 대승을 거두고 점령한 땅에70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함으로써 북방의 변경수비를 강화하려고 했다. 동쪽의 삭방(朔方)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영거(令居)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 내에 거주시키면서 모두 군사로 편입시키고 이주민들에게 소와 농기구 및 곡식과 종자를 공급하여 광대한 북방의 목초지를 농업지구로 개변시켰다. 이 때 조충국의 전가족은 모두 함께 영거로 이주했다. 영거는 지금의 감숙성 영등현(永登縣)으로 감숙성 성도 란주시(蘭州市) 서북쪽100키로 지점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99년, 한무제42년,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흉노기병에 의해 포위되어 진지에 갇혀 식량이 바닥나고 사상자가 많이 났다. 이때 조충국이 장사100여 명을 이끌고 흉노의 포위망을 향해 앞으로 돌진하자 이광리와 대군이 그 뒤를 따랐다. 선두에 선 조충국은 전신에20여 군데의 부상을 입으며 마침내 흉노의 포위망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광리가 조충국의 활약상을 상세하게 적어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가 조충국을 불러 접견하고 친히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진실로 용사라고 칭송했다. 황제는 조충국의 군공을 기려 중랑(中郞)①에 임명하고 다시 거기장군(車騎將軍)의 막부에서 행정업무를 보는 장사(長史)로 옮겼다. 조충국은 소제(昭帝)가 즉위하자 중랑장(中郎將)②、수형도위(水衡都尉)③를 차례로 역임했다. 다시 흉노정벌전에 종군하여 서기왕(西祁王)을 생포하여 개선했음으로 직위가 호강교위(護羌校尉)에 후장군(後將軍)으로 올랐다. 기원전74년, 한소제(漢昭帝)가 재위13년만에 죽자 그 뒤를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로 잇게 했으나 유하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웠다. 이에 대장군 곽광이 유하를 황제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한선제(漢宣帝) 유순(劉詢)을 옹립할 때 협조한 공으로 영평후(營平侯)의 작위를 받았다.

무제 말년, 지금의 청해성 경내에 거주하던 강족(羌族)들은 시시때때로 중국의 내지를 침략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흉노가 그 사실을 알고 강족과 연합하여 한나라를 협공하려고 계획했다. 그와 같은 정황 하에서 한무제는 흉노의 오른쪽 팔을 잘라내고자 군대를 파견했으나 오히려 강족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그 결과 강족들은 중국의 내지에 더욱 깊숙이 들어와 황수(湟水) 이북으로 이동하여 한나라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하고 떠난 땅을 찾았다. 황수는 청해성 청해호에서 발원하여 동남으로 흐르다 란주(蘭州)에서 합류하는 황하의 지류로써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시에 강인의 각 부락이 일치단결하여 움직였음으로 한나라의 각 군현의 관리들은 그들을 금지하지 못했다. 이때 흉노가 다시 강족들과 연합전선을 펼쳐 한나라의 서쪽 변경을 어지럽히려고 했다. 한나라는 군사를 호미(浩亹)로 파견했으나 다시 강족들에게 패퇴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말았다. 호미는 지금의 청해성 대통하(大通河) 동안의 성읍으로 앞서의 영거(令居) 남쪽 약30키로 되는 곳이다. 기원전61년 한선제13년, 그때 나이가70세를 갓 넘고 있었던 조충국은 서수(西陲)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강족을 무찌르고 그들의 동진을 막았다. 장안으로 복귀한 그는 세 번에 걸쳐 조정에 상서를 올려 강족의 이주 상황을 상세하게 분석하여 미연에 변란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건의했다. 그가 제출한 둔전병에 대한 계책은 한선제의 인정을 받았다. 나이가 든 조충국을 향해 한선제가 물었다.

“ 누구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야 하는가? ”

조충국은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 노신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

한선제가 다시 물었다.

“ 병마는 얼마나 필요한가? ”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입니다. 신은 원컨대 지금 즉시 금성(金城)으로 달려가 지형을 관찰하고 그 대책을 마련해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단지 저로 하여금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조치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만 명도 채 안 되는 기병을 이끌고 곧바로 달려가 황하를 건너 진영을 은밀히 세우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윽고 황수의 양쪽 강변에서 강족들이 여러차레 도발을 해왔으나 조충국은 굳게 지키기만할 뿐 응전하지 않고 단지 위엄과 성실한 자세로 강족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부락을 해산하라고 할뿐이었다. 한편으로는 조정에 건의하여 황수 양쪽 강변에 둔전을 행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으며 지구전을 벌여 군량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는 계책을 조정에 건의했다.

조충국 사후 곽광 등과 함께 초상화를 그려 미앙궁(未央宮)에 걸어놓고 ,장후(壯侯)라는 시호를 내려 규복(圭蔔)의 양지(지금의 清水縣城西 북쪽의 李崖)에 장사지냈다.

조충국이 행군할 때는 멀리 정찰병을 보내 사전에 경계를 위주로 행했은며 수시로 전투준비를 점검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숙영시는 방어벽을 견고하게 축조하고 철저하게 꼼꼼히 대비했다. 사졸들을 사랑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 노년으로 인한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변방에서 큰 변란이 생길 때마다 조정에 나아가 대책을 같이 마련하고 어떤 때는 조정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그 대책을 묻곤 했다.

주석

①영거(令居)/ 지금의 감숙성 성도 란주(蘭州) 북서 약7-80키로의 영등현

②중랑(中郞)/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이름으로 광록훈(光祿勛)의 속관이다. 문호를 지키고 거기(車騎) 인원을 보충한다. 녹봉은 비육백석이다. 중랑에는5관(官)과 좌우(左右) 및 삼서(三署)가 있었다. 중랑의 장관은 중랑장(中郞將)으로 녹봉은 비이천석이다.

③중랑장(中郞將)/ 진나라가 설치한 랑중령(郞中令)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한나라가 답습했다. 후에 광록훈(光祿勳)으로 명칭을 바꾸고 그 밑에 의랑(議郞), 중랑(中郞), 랑중(郞中) 등의 속관을 두었다. 그 중 중랑은 속관으로 오관서(五官署), 우서(右署), 좌서(左署)의 부서를 두고 그 장을 모두 중랑장이라고 불렀다. 광록훈 밑에는 그 외에 우림중랑장(羽林中郞將)을 두고 황제의 시위를 통솔하고 황제가 출타할 때 좌우에서 호위했다.

④수형도위(水衡都尉) / 황제 직속의 광대한 상림원을 관장하던 관서의 장이다. 당시 상림원은 남쪽으로는 의춘(宜春)、정호(鼎湖)、어숙(御宿)、곤오(昆吾)에서 종남산의 서쪽의 장양(长杨)、오작(五柞),북쪽으로는 황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빈위(濒渭)에 이르는 사방이 수백 리에 달해 지금의 단위로200키로에 달하는 담을 쳐서 관리했다. 《관중기(关中记)》에 의하면 상림원은 모두36구로 나누었으며 그 중 궁궐구12구, 유람구25구, 10개의 큰 연못에 각종 날짐승 및 들짐승들을 방목하고 진기하고 희귀한 식물 수천 종들을 길렀다. 수형도위는 상림원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 외에 백성들로부터 몰수한 고민전(告緡錢), 전답, 노비와 영내에서 운영하던 화폐의 주조, 관부에서 운영하던 수공업 및 각종 세수와 군정 민정 등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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