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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혹리(漢書·酷吏)· 윤상전(尹賞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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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혹리(漢書·酷吏)· 윤상전(尹賞傳)》

윤상의 자는 자심(子心)이고 거록군(巨鹿郡) 양지(楊氏)① 사람이다. 군의 관리로 있을 때 청렴함이 들어나 누번(樓煩)②의 현장이 되었다. 이어서 무재(茂材)로 천거되어 율읍(粟邑)③의 현령이 되었다. 좌풍익(左馮翊) 설선(薛宣)이 윤상이 치술에 능하다고 상주하자 조정은 그를 빈양령(頻陽令)④으로 옮겼으나 형벌을 교묘히 이용하여 죄인을 도적으로 만들었다는 혐의로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후에 어사의 천거에 의해 정현(鄭縣)⑤의 현령으로 옮겼다. 다. 윤상은 관하의 죄에 연좌되었거나 죄를 범한 사람들을 모두 사면했다. 후에 어사에 의해 鄭縣의 현령으로 옮겼다.

영시(永始)와 원연(元延)⑥지간에 황제가 정사를 태만히 하자 귀척들은 교만방자하게 되었다. 그때 홍양(紅陽) 현장의 형제들이 협객들과 왕래하여 죄를 짓고 도망다니던 사람들을 숨겨주고 있었다.⑦그러나 北地郡⑧의 대호(大豪)나 호상(浩商) 등이 그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거(義渠) 현장의 처자 6명을 살해하고 장안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승상과 어사가 포졸들을 풀어 그들의 일당들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잡지못했다. 그래서 다시 조서를 내려 그들의 체포를 독촉했으나 역시 오랫동안 그들을 잡지 못했다. 결국 장안 성내는 깡패들로 득실거리고 골목길에는 소년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관리를 살해하고 다시 돈을 받고 원수를 갚아주었다. 그들은 서로 작당하여 탄환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는데 붉은 탄환을 받으면 무관을 쏘고 흑환을 받으면 문관을 쏘고 흰 탄환을 받으면 상례를 주관하도록 했다. 성중에는 도굴할 때 일어난 먼지가 자욱하고 행인을 겁박했으며 길에 상처를 입거나 죽어서 쓰러진 사람이 즐비하여 포졸들이 두들기는 딱따기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때 윤상은 삼보(三輔)⑨가 천거한 고제(高第)로 장안령(長安令)에 뽑혀 관내의 모든 일을 자신의 편의대로 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윤상이 부임하자 먼저 장안의 감옥을 수리하고 관하의 여러 곳에 수장 깊이의 구덩이를 파게 한 후에 주위에 벽을 세워 담장을 세우고 큰 돌로 그 입구를 덮은 후에 그 이름을 “호혈(虎穴)”이라고 붙였다. 이윽고 호조(曹掾)의 아전, 향리(鄉吏)、정장(亭長)、이정(裏正)、부로(父老)、오인(伍人)과 장안의 소년 악패들, 시적을 갖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눈에 띄는 옷이나 괴상한 복장을 하고 무장을 갖추거나 검을 지니고 다니는 자 등을 모두 장부에 기재하여 수백 명의 명단을 얻었다. 윤상은 어느 날 조회에서 장안의 관리들을 모아놓고 수백 량의 수레를 동원하여 각기 방향을 정해 명단에 오른 자로서 도적떼와 통행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자들을 체포했다. 윤상이 직접 한 사람씩 심문하여 10명 중에 1명은 석방하고 나머지는 모두 호혈에 몰아넣어 백 명이 차면 그 입구를 큰 돌로 막아버렸다. 며칠이 지나서 호혈의 입구를 열어 살펴보니 갇힌 자들은 모두 서로 굶어 죽었는데 시신은 서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수레로 모두 꺼내어 절간의 동쪽 망주석(望柱石)에 매장하고 그들의 성명을 판대기에 적어 걸어놓도록 했다. 이윽고 백일이 지나자 윤상은 령을 내려 죽은 자들의 가족들에게 연락하여 시신을 파가라고 전했다. 친속들이 모두 크게 소리내오 통곡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탄식해 마지 않았다. 이어서 장안성 거리에는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디가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야 하는가?

망주석 동쪽의 소년들이 묻혀 있다네

생전에 간사한 짓과 도적질을 일삼고 수신하지 않더니

죽어서 해골이 되었으니 어디다 묻어야할까?“

윤상이 석방한 사람은 모두 자기와 오랫동안 친근하고 지냈던 사람들이거나 혹은 전직 관리이거나 선량한 집안의 자제였으나 일시적으로 길을 잘못들어 도적이 되었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있는 자로써 근 백 명에 달했다. 윤상은 그들의 죄를 감형하고 그들로 하여금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명을 내렸다. 윤상은 그중에 힘껏 노력하여 공을 세운 자들은 자신의 전위대로 이용했다. 그들은 모두 간인과 도적들을 체포하는데 매우 뛰어났으며 도적들의 행동양식과 행방을 잘 파악하여 그 방면에서 일반 관리에 비해 두각을 나타냈다. 윤상이 장안에서 일을 보기시작해서 몇 달이 지나자 도적들은 활동을 중단하고 외부의 도적들은 두려워하여 원래 활동하던 군국으로 돌아간 이후로는 감히 다시는 장안을 넘보지 못했다. 다시 장강과 강호 사이에 도적이 들끓자 윤상은 다시 강하태수(江夏太守)로 임명되었다. 강하는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武漢市)다. 그는 강호일대에서 출몰하던 도적을 체포하여 살해하고 연루된 관리와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적당과 조금이라도 연루된 관리는 그 즉시 파면했다. 다시 남산(南山) 일대에서 도적떼가 창권하자 윤상은 다시 우보도위(右輔都尉)에 임명되었다가 후에 다시 집금오(執金吾)로 옮겨 큰 도적떼를 기찰하는 책임을 맡았다. 삼보(三輔)의 괸리들과 백성들은 부임해 온 윤상을 크게 두려워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윤상은 임무를 수행중 죽었다. 그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아들에게 유언했다.

“내가 장부로 태어나서 일반 죄인들을 도적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관직에서 파면된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다가 후에 공을 세워 다시 관리로 중용되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유약한 마음으로 인해 직무를 태만히 하여 관직에서 파면되어 평생토록 버림을 받고 재기용되지 않았다면 부패와 축재의 죄를 짓는 일보다 더 수치스럽고 욕된 일이었을 것이다. 너희들은 항상 이 점을 조심해서 관직을 잃지 않도록 하라!”

윤상의 네 아들들은 모두 관직에 나가 군수까지 올랐고 특히 장자 윤립(尹立)은 경조윤(京兆尹)을 역임했다. 그들 형제는 모두 행동에 위엄이 있었고 백성을 형벌을 적용하는데 이름이 있었다.


주석

①거록(巨鹿)은 지금의 하북성 거록현 일대에 있었던 군 이름이다. 치소는 거록(巨鹿)이다. 양지(楊氏)는 거록군 관하의 현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영지寧晉)다.

②누번(樓煩):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서성 영무현(寧武縣)이다.

③율읍(粟邑) : 지금의 산서성 백수현(白水縣) 서북에 있었던 현 이름이다.

④빈양(頻陽):지금의 섬서성 포성(蒲城)과 요현(耀縣) 사이에 있었던 현 이름이다.

⑤정(鄭) : 현 이름으로 지금의 섬서성 화현(華縣)이다.

⑥영시(永始)와 원연(元延)는 모두 서한의 漢成帝의 연호로 각각 기원전 16년부터 12년과 기원전 11년과 9년이다.

⑦)紅陽長仲兄弟(홍양장중형제):홍영후(紅陽侯) 왕립(王立)의 아들들로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다.《원후전(元後傳)》에“홍양후(紅陽侯) 왕립 부자는 사기꾼들과 도망자들을 숨겨주었다”고 했다.

⑧北地郡: 치소는 지금의 내몽고 고오랍특전기(古烏拉特前旗) 동남이고 관할은 지금의 섬서성 북부와 영하성 및 내몽고 일부다.

⑨삼보(三輔):한나라의 도성 장안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京畿) 일대를 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눈 경조윤(京兆尹)、좌풍익(左馮詡)、우붕풍(右扶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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