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중국사
1. 선사
2. 삼대
3. 춘추전국
4. 진한
5. 위진남북
6. 수당오대
7. 송요금원
8. 명청
9. 국공
10. 인민공화국
11. 통사
· 오늘 :  596 
· 어제 :  1,320 
· 최대 :  2,389 
· 전체 :  1,757,983 
 
  2014-01-27 21:05:415703 
楚漢爭覇之際年表(초한쟁패지제연표)
운영자


楚漢爭覇之際年表(초한쟁패지제연표)


전221년 진시황제 재위 26년


1. 진나라 장군 왕분(王賁)이 연나라를 점령한 후에 남하하다가 방향을 돌려 제(齊)나라를 공격했다. 방비를 하지 않고 있던 제나라는 진군이 임치성 하에 당도하자 제왕 전건(田建)이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 제왕 건은 44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진나라는 제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군(郡)을 설치했다. 이로써 육국은 모두 망했다.

2. 진왕이 칭호를 ‘황제(皇帝)’라 칭하고 황제의 명(命)을 ‘제(制)’, 령(令)을 조(詔)라고 정했으며 스스로를 칭할 때 짐(朕)이라고 했다. 왕호에 대한 시호(諡號) 제를 폐지했다. 왕이 죽으면 부르게 되는 시호제는 아들이 그 아버지의 일을, 신하가 군주의 일을 논하게 되는 경우가 되어 심히 불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로 하고 그 후세들은 순서대로 2세, 3세 하다가 만세까지 무궁하게 전해지도록 했다.

3. 음양가(陰陽家)들의 오덕(五德)의 채용하여 주나라는 화덕(火德)에 해당하고 화(火)를 이기는 것은 수(水)임으로 진나라를 수덕(水德)에 해당한다고 했다.

4. 역법을 바꾸어 매년 해월(亥月: 10월)을 해의 처음으로 삼았다.

5. 승상 왕관(王綰)이 황제의 여러 아들들을 진나라 본국과 멀리 떨어진 연(燕), 제(齊), 형(荊) 등의 옛 땅에 제후왕으로 책봉하자고 청했다. 시황이 정위(廷尉) 이사(李斯)와 의논한 후에 후왕의 분봉제를 채용하지 않고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어 군현제를 시행했다. 군에는 수(守), 위(尉), 감(監)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고 백성들을 검수(黔首)라고 부르게 했다.

6. 천하의 모든 병장기를 수거 후 녹여서 종을 만들고, 다시 금인 12개를 주조했다.

7. 도량형을 통일하고 화폐제를 시행했다. 황금을 상패로 그 단위를 일(鎰)로 동(銅)을 하패로 반량(半兩)을 단위로 했다. 수레의 바퀴 간격을 통일하고 문자를 정리했다. 천하의 부호 20만 호를 함양으로 옮겨 살게 했다.


전220년 시황27년


시황이 북쪽으로 순행을 나갔다. 치도(馳道)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치도는 동쪽으로는 연(燕)과 제(齊), 남쪽으로는 오(吳)와 초(楚)에 이르고 도로의 넓이는 50보에 삼장마다 가로수를 심었다. 진나라 때 한 보는 1.35m이고 장(丈)은 2.35m다. 50보는 약 70m에 해당하는 넓이다.


전219년 시황28년


1. 시황이 동쪽으로 순행을 나가 태산에서 봉선을 행하고 비석을 세워 자신이 세운 공덕을 찬양했다. 다시 동쪽의 지부(之罘)에 들렀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낭야대(琅邪臺)에 송덕비를 세웠다.

2. 방사(方士) 서불(徐巿 : 徐福)에 명하여 동남동녀와 함께 바다로 나아가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시켰다.

3. 시황이 팽성(彭城)을 지나 서남으로 나아가 회수(淮水)를 건너 남군(南郡)에 이르고 다시 강수(江水)를 건너 상산사(湘山祠)에 이른 후 함양으로 돌아왔다.


전218년 시황29년

1. 시황이 동쪽으로 순행을 나가 박랑사(博浪沙)에 이르렀을 때 옛 한나라의 귀족 출신의 장량(張良)이 보낸 창해역사(滄海力士)에 의해 철추공격을 받았으나 명중되지 않아 화를 피했다. 박랑사는 지금의 하북성 원양현(原陽縣) 경내에 있다. 시황이 령을 내려 전국에 대수색을 10일 동안 행하게 했다.

2. 시황이 순행을 계속하여 지부산에 올라 돌에 글을 새겼다.


전216년 시황31년

1. 시황이 함양성에서 미행(微行)을 나갔다가 만난 도적을 호위무사들이 죽였다. 이 일로 해서 관중에 대수색령을 내려 20여 일 동안 거동수상자들을 색출했다.

2. 령을 내려 스스로 농사를 짓는 검수들에게만 토지를 소유하게 했다.


전215년 시황32년

1. 시황이 순행을 나가 갈석(碣石)에 이르러 노생(盧生)에게 바다로 나아가 신선을 찾아오도록 했다. 갈석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시(昌黎市) 경내다.

2. 옛날 관동 제후국들 도성의 성곽을 허물도록 하고 제방을 무너뜨러 물이 흐르게 하여 험한 지형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3. 몽염에게 명하여 30만의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


전214년 진시황 33년

1. 상강(湘江)과 이강(漓江)을 연결하기 위한 영거(靈渠)의 공사가 완성되었다. 영거를 통해 50만에 달하는 군사를 진군시켜 영남(嶺南)의 땅을 점령하고 그 땅에 계림군(桂林郡), 남해군(南海郡), 상군(象郡) 등을 설치했다. 계림군의 치소는 지금의 광서성 계평현(桂平縣) 서남에, 남해군은 광주시(廣州市)에, 상군의 치소는 광서성 숭좌현(崇左縣) 경내다.,

2. 몽염(蒙恬)이 흉노를 무찌르고 하남(河南 : 지금의 황하 하투(河套))를 점령하고 그 땅에 구원군(九原郡)을 설치했다. 구원군의 치소는 지금의 내몽고 포두(包頭)다. 지금의 감숙성 민현(岷縣)인 임조(臨洮)에서부터 장성을 수축하기 시작해서 황하를 따라 하투를 거쳐 음산(陰山)을 지나 요동의 갈석(碣石)에 이르렀다. 몽염은 상군(上郡)에 주둔하면서 장성의 수축을 위한 공사를 감독했다.


기원전 213년, 진시황 34년

1. 복야 주청신(周靑臣)이 제후들의 땅을 모두 군현으로 만들어 전쟁의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주청하자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주청신의 말에 반대하며 ‘옛날의 일에서 배우지 않고 나라를 오래 유지한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반박하며 황실의 자제와 공신들을 제후에 봉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에 승상 이사(李斯)가 순우월의 말에 “당세의 것을 따르지 않고 옛것만을 따르고 있는 지금의 유생들의 행위는 세상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백성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시키고 행위이다.”라고 반박했다.

2. 시황이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학(私學)을 금하고 진나라 역사를 제외한 열국의 사서를 모두 불사르라고 명했다. 《시(時)》및 《서(書)》와 백가어(百家語)는 박사와 관청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서적들은 모두 불사르게 했다. 또 의술과 약품에 관한 서적, 참위(讖緯)와 복술(卜術)에 관한 서적, 농사와 임업에 관한 책은 제외했다.


기원전 212년, 진시황 35년

1. 산을 깎아 계곡을 메워 1천 8백 리(약 700키로)에 이르는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직도(直道)를 건설했다. 구원은 지금의 내몽고 하투(河套) 지역의 포두시(包頭市)이고 운양은 지금의 함양성 서북 50키로의 순화(淳化)다.

2. 궁형을 받은 자, 노역형을 받은 형도(刑徒) 등의 죄인들 70여 만 명을 동원하여 아방궁을 건설하고 여산릉(驪山陵)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3. 후생(侯生)과 노생(盧生) 등이 진시황을 비난하고 도망쳤다. 시황이 형리를 시켜 제생(諸生) 등을 심문케 하여 그들이 요언을 퍼뜨려 백성들을 선동한 사실을 밝혀냈음으로 460명에 달하는 제생을 함양성 내에서 갱살(坑殺)했다.

3. 장자 부소(扶蘇)가 간했으나 시황이 노하여 상군(上郡)으로 가서 몽염의 감군(監軍)이 되게 했다.


기원전 211년, 진시황 36년

1. 동군에 떨어진 운석에 어떤 사람이 “시황이 죽었기 때문에 땅이 갈라졌다.”라는 글을 새겼다.

2. 시황이 어사를 보내 글을 새긴 사람을 찾으라고 명했으나 찾지 못하자 그 부군에 사는 백성들을 모조리 잡아서 죽였다.

3. 이 해에 패공 유방이 패현의 죄수를 호송하는 책임을 맡아 여산릉 공사장으로 가다가 도중에 많은 죄수들이 도망쳐버리자 장사들과 함께 산택(山澤) 지간으로 도망쳐 숨었다.

4. 여산릉의 노역에 동원되어 일하던 경포가 동료들을 이끌고 도망쳐 기의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 37년

1.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행나갔다. 좌승상 이사와 막내아들 호해(胡亥) 및 환관 조고가 수종하고 우승상 풍거질(馮去疾)은 남아서 도성을 지켰다. 시황의 행렬이 운몽(雲夢)에 이르러 순임금이 묻혔다는 구의산(九疑山)을 멀리서 바라보며 제사를 올렸다. 장강의 물결을 타고 항행하여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錢塘)에 이르렀다. 절강(浙江)에 이르자 파도가 심하게 쳐서 건너지 못하고 서쪽으로 120리를 거슬러 올라가 중류에서 강을 건넜다. 회계(會稽)에 도착하여 대우(大禹)에게 제사지내고 진시황의 덕을 찬양하는 송덕비를 세웠다. 북상하여 오(吳)를 지나 강수를 건너 낭야(琅邪)와 지부(之罘)에 이르렀다. 함양으로 귀환하기 위해 서쪽으로 나아가다 사구평(沙丘平)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2. 시황이 죽기 전에 부소에게 주는 새서(璽書)를 썼는데 ‘나의 후계자가 되어 함양에 들어와 장례를 치르라!’라는 내용이었다. 새서를 조고에 맡기고 미처 보내지는 않았다.

3. 승상 이사는 순행 중에 황제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나라에 변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상을 비밀에 부쳤다. 조고가 음모를 꾸미고 이상이 동의를 얻어 새서의 내용을 고쳐 막내아들 호해를 태자로 세우고 황제의 명으로 부소와 몽염에게 자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서를 받은 부소는 몽염의 만류를 듣지 않고 자살했다. 몽염은 사자에 의해 감금되었다.

4. 함양에 돌아온 호해는 진시황의 상을 발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이가 이세황제다.

5. 시황은 여산에 장사지냈다. 대량의 진귀한 보물을 부장하고, 자식이 없는 후궁을 모두 순장시켰으며 장사(葬事)의 일에 동원된 장인과 인부들은 모두 묘 안에 가둬 죽였다. 몽염과 그의 동생 몽의(蒙毅)를 죽였다. 몽의는 시황의 총신으로 상경이었다.


기원전 209년, 이세 원년

1. 이세가 조고의 계책을 따라 여러 공자와 공주들을 살했다.

2. 여산릉 장사에 필요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잠시 중단했던 아방궁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3. 진나라가북쪽 변경 도시 어양(魚陽)의 수비병으로 동원하기 위해 대택향(大澤鄕)으로 소집했던 여음(汝陰)과 기현(蘄縣) 일대의 여좌(閭左)에 살던 빈민들 900명 중에 진승과 오광은 둔장(屯長)이 되었다. 둔장은 50명을 거느리는 하급 부대의 지휘자였다. 여음은 지금의 안휘성 부양시(阜陽市)고 기현(蘄縣)은 숙현(宿縣) 동남이다. 여(閭)는 고대 진나라의 행정조직의 하나로 매 25호를 묶어 1려(閭) 혹은 1리(里)로 했다. 려(閭)의 마을 입구에 문을 세워 표시했음으로 려문(閭門) 혹은 리문(里門)이라 하고 그 문의 오른쪽에는 부자가 살고 왼쪽에는 가난한 사람을 살게 했음으로 여좌(閭左)라 했다.

4. 그 해 7월에 어양에 당도하기로 한 기일을 놓쳐 당도하더라도 참수형에 처해지게 된 진승과 오광은 징용된 9백 명의 장정과 함께 진나라의 장위(將尉)를 죽이고 대택향에서 기의했다.

5. 기의군이 진현(陳縣)으로 들어갔을 때는 무리는 늘어 수만 명에 달해 진승은 왕을 칭하고 장초(張楚) 정권을 창건했다. 당시 천하는 진나라의 혹정에 시달림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분분히 기의하여 진승에게 호응했다.

6. 진승은 오광을 가왕(假王)으로 삼아 형양(滎陽)을, 무신(武臣),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에게는 조(趙)나라 땅을, 위인(魏人) 주불(周巿)에게는 위(魏)나라 땅을, 주문(周文)에게는 진나라 본토를 공략하도록 했다.

7. 주문이 기의군 주력을 이끌고 서진하여 함곡관과 동관을 돌파한 후 희수(戱水) 강안에 이르렀을 때는 기의군은 수십 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8. 진나라가 장한(章邯)을 장수로 삼아 여산릉(驪山陵)의 형도(刑徒)들과 노예들의 자식들로 토벌군을 조직하여 주문이 이끄는 초군을 물리쳤다. 주문은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靈寶縣) 동쪽의 조양(曹陽)으로 후퇴하여 주둔했다.

9. 조나라 땅으로 진입하여 스스로 무신군(武臣君)이라고 칭한 무신은 괴철(蒯徹)의 계책을 이용하여 진나라 관리들을 설득하여 연나라와 조나라 지방의 30여 개 성의 항복을 싸우지 않고 받아냈다. 무신은 스스로 조왕이 되었다.

10. 이해 9월, 유방과, 현의 관리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개백정 번쾌(樊噲), 취고수(吹鼓手) 주발(周勃) 등이 패현(沛縣)에서 기의하고 유방은 패공(沛公)이라 칭했다.

11. 항량(項梁)과 그의 조카 항우(項羽)가 강동(江東) 자제 8천 명을 규합하여 지금의 강소성 소주(蘇州)인 오군에서 기의했다.

12. 제나라 왕족 출신 전담(田儋)이 기의하여 제왕(齊王)을 칭했다.

13. 무신의 장수 한광(韓廣)이 연나라로 들어가 스스로 연왕이 되었다.

14. 위나라 땅을 공략한 주불은 위나라 왕족 출신인 위구(魏咎)를 위왕으로 추대했다.

15. 진승의 옛친구가 찾아와 의탁했으나 그가 옛날 진승이 빈천했을 때 행한 일들을 말하고 다녔음으로 피살되었다. 진승은 주방(朱防)을 중정(中正)으로, 호무(胡武)를 사과(司過)로 삼아 제장들을 감시하도록 하여 그들의 말을 따라 죄를 주었다. 이로써 제장들은 진승과 멀어지게 되었다.

16. 이세황제가 지나라의 박사와 유생들에게 수졸들의 기병한 일에 대해 묻자 그들은 모두 수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군대를 보내 진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세는 그들을 옳지 않은 말을 했다는 죄목으로 모두 옥리에게 넘겨 심문하게 했다. 이때 숙손통은 거짓으로 그들은 단지 쥐새끼나 개도적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음으로 상을 받았다. 함양을 탈출한 숙손통은 설(薛)에 숨어있다가 후에 항량(項梁)에게 귀의했다.

17. 이 해에 흉노의 모돈(冒頓)이 그의 아버지 두만(頭曼)을 죽이고 스스로 선우(單于)의 자리에 올랐다.


기원전 208년, 이세 2년

1. 주문이 진나라 군대와 싸워 패해 민지(澠池)로 후퇴했으나 그곳에서 다시 싸워 패하고 자살했다.

2. 오광의 부장(部將) 전장(田臧)이 오광을 살해하고 장한의 진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싸웠으나 패하고 란군 중에 죽었다.

3. 진승의 어자 장가(莊價)가 진승을 살해하고 그의 목을 가지고 진나라에 항복했다.

4. 진승의 부장 여신(呂臣)이 창두군(蒼頭軍)을 조직하여 진현(陳縣)을 진나라 군사들로부터 탈환하고 장가를 잡아서 죽였다.

5. 진군의 반격으로 진현을 빼앗긴 여신은 잔병을 수습하여 파양(番陽)에서 기의한 경포(黥布)의 군대를 얻어 진현을 탈환했다.

6. 조나라 장수 이량(李良이) 한단(邯鄲)을 기습하여 조왕 무신을 죽였다. 장이와 진여가 잔병을 수습하여 이량을 물리치고 옛 조나라의 왕족 출신 조헐(趙歇)을 조왕으로 세웠다.

7. 진승이 죽자 광릉(廣陵) 출신 기의군 장령 진가(秦嘉)가 팽성에서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옹립했다. 항량이 장강을 도하한 후에 서쪽으로 나아가 회수를 건너자 경포가 찾아와 귀의했다. 항량은 팽성의 경구와 경가를 죽였다.

8. 범증의 의견을 쫓아 항량은 유방과 함께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초왕으로 옹립하고 부르기를 초회왕이라고 했다. 초회왕은 우이(盱眙)에 머물게 하고 초나라의 도성으로 삼았다.

9.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으로 칭한 항량이 옛날 한나라의 왕족 성(成)을 한왕으로 세워 장량으로 하여금 옛 한나라 땅을 공략하도록 했다.

10. 장한이 위나라를 공격하자 제와 초가 구원에 나섰으나 싸움에서 지고 제왕 전담(田儋)과 위왕 구(咎)는 전사했다. 초나라가 위구의 동생 위표(魏豹)를 위왕으로 세워 위나라 땅을 위무하게 했다.

11. 전가가 제왕을 칭하자 전영(田榮)은 전담(田儋)의 아들 전불(田巿)을 제왕으로 세우고 전가를 공격했다. 전가가 싸움에서 패해 초나라로 도망쳐 몸을 의탁했다. 이때부터 초와 제는 사이가 멀어졌다.

12. 조고가 이세에게 권하여 궁궐의 깊은 곳에 몸을 숨겨 조정에서 대신들을 접견하지 말라고 했다. 이세가 조고의 말을 쫓아 진나라의 모든 조정대사는 조고가 전결하게 되었다. 이사 등의 대신들은 이세에게 권하여 아방궁 공사를 중지하고 군역과 운송의 부담을 줄여 민심을 수습하라고 했다. 이세가 듣지 않고 이사를 하옥하고 우승상 풍거질과 장군 풍겁(馮劫)은 자살했다. 조고는 이사의 아들이며 삼천군수로 있던 이유(李由)가 모반했다고 모함하여 이사를 요참형에 처하고 삼족을 멸했다. 이세는 조고를 승상으로 올렸다.

13. 항량이 장한의 진군을 동아(東阿)에서 무찌르고 서쪽의 정도(定陶)에 이르러 또다시 진군과 싸워 무찔렀다. 항우와 유방은 옹구(雍丘)에서 진군을 무찌르고 삼천군수 이유를 잡아 참수했다. 이로써 항량은 진군을 얕보게 되어 교만한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14. 장한이 복양(濮陽)을 지키다가 조정으로부터 증원군을 얻자 정도로 진군하여 항량의 초군을 크게 무찔렀다. 항량은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15. 장한은 진군로를 북쪽으로 돌려 황하를 건넌 후에 조군을 격파하고 한단에 이르러 그 성곽을 모두 부셨다. 장이와 조왕 조헐(趙歇)은 거록(鉅鹿)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장한은 거록을 포위했다.

16. 항우와 유방 및 여신(呂臣)은 우이(盱眙)에 머물고 있던 초회왕을 데려와 팽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초회왕은 위표를 위왕으로 송의(宋義)를 상장군으로 삼았다. 송의에게 경자관군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항우는 차장(次將), 범증(范曾)은 말장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라고 했다. 한편 유방으로 하여금 진나라를 정벌하게 하고는 ‘先入關中者王之’ 즉 관중에 먼저 당도한 자를 진왕으로 세운다고 맹약했다.

17. 진나라의 남해위(南海尉) 임효(任囂)가 죽으면서 용천령(龍川令) 조타(趙佗)에게 남해위의 일을 대신하게 했다.


기원전 207년, 이세황제 3년

1.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북진하던 송의가 안양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46일 간을 머물면서 진과 조 두 나라 군사들이 싸워 지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12월 항우가 송의를 살해하고 초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장하(漳河)른 건너 거록으로 진군하여 진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로써 제후군은 모두 항우에게 귀속되었다. 장한은 항우와 몇 개월을 대치하며 전투를 벌렸으나 싸움마다 모두 패했다.

2. 진나라를 향해 진군하다가 창읍(昌邑)에 이른 유방은 팽월(彭越)이 이끌던 기의군을 얻었다. 이어서 진류(陳留)에 이르렀을 때는 세객 역이기(酈食其)를 얻어 진나라의 양식창고에 있던 군량을 얻고 다시 진류의 현령을 설득하여 항복을 받았다. 한나라의 옛 땅을 공략하던 장량이 군사를 이끌고 찾아와 유방과 합류했다.

3. 7월 유방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완(宛)에 이르러 완의 현령의 항복을 받고 예전처럼 완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후로 유방군이 서쪽으로 진군하던 길목의 성읍들은 모두 유방에게 항복해왔다.

4. 장한이 20만의 진군을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에 임며하고 장한의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은 상장군으로 삼아 항복한 진군을 인솔하여 초군의 선봉을 서게 했다.

5. 유방이 무관(武關)을 돌파했다. 이에 중승상(中丞相) 조고는 이세에게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가 먼저 이세를 살해하고 자영(子嬰)을 진왕(秦王)으로 세웠다. 9월에 자영이 조고를 죽였다. 유방이 남전(藍田)에서 진군을 크게 무찔렀다.


기원전 206년, 한왕(漢王) 원년

1. 10월 유방이 패상(覇上)에 이르자 자영이 항복하여 진나라는 2대에 걸쳐 15년 만에 망했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자 소하는 진나라 승상부에 간직하고 있던 지적도와 호적을 챙겼다. 유방은 장량과 번쾌의 간언을 받아들여 진나라의 부고를 봉하고 패상으로 돌아갔다.

2. 11월, 유방은 진나라 사람들에게 ‘살인자는 죽이고 남을 상하게 하거나 도적질을 한 자는 죄를 준다.’는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약속하고 나머지 진나라의 가혹하고 복잡한 법률을 모두 폐지했다.

3. 유방이 군사를 보내 함곡관을 지키게 했다. 항우가 서쪽으로 진군하여 관중으로 들어오다가 新安 성 남문 밖에서 진나라의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무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장한, 사마흔 및 동예만을 데리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항우가 함곡관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관중으로 들어갔다.

4. 12월, 신풍(新豊)의 홍문(鴻門)에 주둔한 항우는 유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홍문으로 와서 항우와 회견하던 유방은 살해될 위기에 처했다가 장량과 번쾌의 활약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5. 항우는 함양성을 파괴하여 평지로 만들고 진왕 자영을 살해했으며, 궁실을 불살랐다. 궁실에 지른 불은 3개월 동안 꺼지지 않고 탔다. 항우는 항양성의 보물들과 부녀자들을 포로로 잡아 동쪽으로 돌아갔다.

6. 정월, 항우는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인다는 구실로 삼아 강남의 침주(郴州)를 도읍으로 정해 옮겨가 살도록 했다.

7. 2월,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어 팽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항우는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하여 파(巴)와 촉(蜀) 및 한중(漢中)을 다스리게 하고 남정(南鄭)을 치소로 삼게 했다.

8. 관중을 삼분하여 진나라의 세 항장을 봉했다. 장한은 옹왕(雍王), 사마흔은 새왕(塞王), 동예(董翳)는 책왕(翟王)으로 삼았다. 계속해서 위왕 표(豹)는 서위왕, 하구(瑕丘)의 신양(申陽)은 河南王, 한왕 成은 韓王, 司馬卬은 殷王, 趙王 歇은 代王, 張耳는 常山王, 黥布는 九江王, 吳芮는 衡山王, 共敖는 臨江王, 燕王 韓廣은 遼東王, 臧荼는 연왕, 제왕 田巿은 膠東王, 田都는 齊王, 田安은 濟北王으로 각각 봉했다.

9. 한왕이 소하를 승상으로 삼은 후에 한중으로 들어갈 때 장량의 말을 쫓아 잔도를 불살라 동쪽으로 나갈 의사가 없음을 항우에게 보였다.

10. 항우로부터 제후왕에 책봉되지 못한 전영은 전도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제왕 전불을 억류시켜 교동왕에 취임하지 못하게 했다. 항우의 후환을 드려워한 전불이 전영으로부터 도망쳐 교동의 봉국에 부임하자 전영이 노하여 그 뒤를 추격하여 전불을 즉묵에서 죽이고 다시 돌아와 제북왕 전안을 공격하여 죽였다. 그래서 전영은 즉시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삼제(三齊)의 땅을 병탄했다.

11. 한왕이 소하의 천거를 받아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한신은 암도진창(暗道陳倉)의 계책을 이용하여 한중에서 나와 관중을 일거에 평정했다. 한신은 장한을 폐구(廢丘)에 몰아넣고 사마흔과 도예는 한나라에 항복했다.

12. 장량이 항우에게 서신을 써서 한앙이 관중을 취한 것은 ‘先入關中者王之’라는맹약에 따랐을 뿐이며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항우가 장량의 말을 믿고 군사의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전영을 공격했다.

13. 요동왕 장도가 연왕 한광을 살해하고 그 땅을 병탄했다.

14. 이 해에 남해위(南海尉) 조타(趙佗)가 계림(桂林)과 상군(象郡)을 점령하여 스스로 남월왕이 되어 자립했다. 조타는 자신을 남월무왕(南越武王)이라고 자칭했다.

15. 항우가 한왕 성(成)을 살해하고 정창(鄭昌)을 한왕으로 삼아 옛 한나라 땅을 공략하도록 했다.


기원전 205년, 한왕 2년

1. 10월 항우가 사람을 시켜 침주(郴州)로 가고 있던 의제(義帝)를 강상에서 죽였다.

2. 진여(陳餘)가 전영(田榮)에게서 빌린 군사를 이끌고 상산왕 장이를 공격했다. 장이는 싸움에서 지고 한왕에게 투항했다.

3. 진여가 대왕 조헐(趙歇)을 조왕으로 다시 세우자 조왕은 진여를 상산왕에 봉했다.

4. 한왕이 동쪽으로 진군하자 하남왕 신양(申陽)이 항복했다. 한나라는 신양의 봉지에 하남군을 설치하고 낙양을 치소로 삼았다.

5. 한왕이 한양왕(韓襄王)의 손자 한신(韓信)을 시켜 한왕(韓王) 정창을 공격하도록 했다. 정창을 양성(陽城)에서 격파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봉했다.

6. 정월, 항우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전영(田榮)을 죽이고 전가(田假)를 제왕으로 삼았다. 초군이 제나라 백성들의 가옥을 불사르고, 성벽을 허물고, 항복한 군사들을 모두 갱살(坑殺)하고,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포로로 잡아가자 제나라 백성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항우의 군대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7. 3월, 위왕 표(豹)가 한나라에 투항했다. 한군이 은(殷)나라를 점령하고 은왕 사마앙(司馬卬)을 사로잡았다. 한나라는 은나라 고지에 하내군(河內郡)을 설치하고 치소는 회현(懷縣)으로 했다.

8. 초나라의 도위 진평(陳平)이 한왕에게 투항했다. 한왕은 진평을 원래 갖고 있던 전호군(典護軍)이라는 직책에 임명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호군중위(護軍中尉)로 올렸다. 호군중위는 장수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부대의 총책임자로 지금으로 말하면 보안부대장이다.

9. 한왕이 낙양의 삼로(三老) 동공(董公)의 말을 쫓아 의제의 죽음을 발상하고 항우를 토벌한다는 격문을 발표했다.

10.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기병하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옹립했다. 항우가 전영이 농성하고 있던 성을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11. 한왕이 5로 제후와 연합하여 56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팽성(彭城)으로 진군하여 항우가 제나라를 원정나가 비어있는 팽성을 점령했다. 항우는 휘하의 군사 3만을 이끌고 제나라에서 남하하여 한군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한군은 팽성의 전투에서 20만의 군사를 잃고 한왕은 도망가고 유방의 부친 태공과 부인 여치는 항우의 포로가 되었다.

12. 한왕을 따라 팽성전투에 종군한 사마흔과 동예가 항우에게 다시 항복했다.

13. 항우가 물러가자 전횡은 전가(田假)를 공격하여 제나라의 모든 땅을 차지했다. 전가가 쫓겨 항우에게 돌아갔으나 항우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살해했다.

14. 한왕이 서쪽으로 도망쳐와 형양(滎陽)으로 들어가 초군과 대치했다. 알자(謁者) 수하(隨何)를 사자로 보내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가 초나라에 반기를 들도록 유세하도록 했다.

15. 위왕 표(豹)가 위나라에 돌아가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에 항복한 후에 관중과 형양 사이의 양도를 끊었다.

16. 한신이 폐구(廢丘)를 함락시키자 장한은 자살하고 한나라는 그곳에 중지(中地), 북지(北地), 농서(隴西) 등의 삼군을 설치했다.

17. 9월 한나라의 대장군 한신이 위나라의 안읍을 기습하여 점령하고 위왕 표를 사로잡았다. 한나라의 위나라의 옛 땅에 하동(河東), 상당(上黨), 태원(太原) 등의 삼군을 설치했다. 한신이 계속 북상하여 조(趙)와 연(燕) 땅을 점령한 후에 남하여 제나라로 진군하겠다고 청했다. 한왕은 한신의 요청을 허락하고 장이와 함께 동행하도록 명했다.

18. 이 해에 관중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쌀 한 말의 가격이 만전으로 폭등하여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 한나라는 관중의 인민을 촉으로 보내 양식을 구해 먹도록 했다. 시황 31년(전216) 진나라의 곡물가격은 한 말에 1600전이었다.


기원전 204년, 한왕 3년

1. 10월, 한신이 정형구(井陘口)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쳐서 조군을 크게 물리치고 진여(陳餘)를 참수하고 조왕 조헐(趙歇)과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를 사로잡았다.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을 이용하여 연왕 한광의 항복을 받아냈다.

2. 경포가 수하에게 설득되어 초나라에 반기를 들자 항우는 용저(龍且)를 보내 구강의 군대를 무찔렀다. 12월 경포와 수하가 한나라 진영으로 들어왔다. 역이기가 한왕에게 육국의 후손들을 제후에 봉하도록 계책을 올렸으나 장량이 간하여 중지하게 했다.

3. 진평이 반간계를 써서 항우로 하여금 범증과 종이매(鍾離昧)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4월, 초군이 한왕이 머물고 있던 형양을 포위하자 범증은 항우에게 맹공을 퍼부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권했다. 한나라의 반간계에 떨어진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여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범증이 노하여 항우를 떠나 팽성으로 돌아가던 중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범증은 지금의 안휘성 동성(棟城)인 거소(居鄛) 출신이다.

4. 5월, 항우의 맹공으로 형양이 위급하게 되자 기신(紀信)이 한왕으로 분장한 후에 항우에게 항복하는 사이 한왕은 형양을 탈출했다. 항우는 기신을 불에 태워 죽였다.

5. 한왕은 관중으로 들어가 징발한 군사를 이끌고 무관(武關)으로 나와 완(宛)과 엽(葉) 땅에 머무르면서 항우를 남쪽으로 유인했다. 항우의 후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팽월(彭越)이 하비(下邳)를 함락시키고 수장 설공(薛公)을 살해했다. 항우가 팽월을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간 사이에 한왕은 북상하여 초군을 무찌르고 성고(成皐)로 들어가 주둔했다.

6. 6월, 항우가 팽월을 무찌르고 서쪽으로 돌아와 형양과 성고를 함락시켰다. 한왕은 서쪽으로 달아나 공(鞏)으로 달아났다. 8월 한왕이 팽월과 유가(劉賈)를 시켜 초군의 양도를 끊도록 했다.

7. 9월, 항우가 조구(曹咎)에게 성고의 수비를 맡기고 동쪽으로 출격하여 팽월을 공격했다. 역이기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서 제왕에게 한나라에 항복하도록 유세하자 제왕이 허락하고 한군과의 싸움에 대비하지 않았다. 연조의 군사를 이끌고 동진하던 한신이 제나라가 한나라에 항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멈추려고 했으나 책시 괴통(蒯通)이 계속 진군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라고 권했다.


기원전 203년, 한왕 4년

1. 10월, 한신이 제군을 기습하자 제왕은 역이기를 팽살하고 고밀(高密)로 달아난 후에 항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한왕이 조구가 지키던 성고를 함락시키고 광무(廣武)에 주둔했다. 조구와 사마흔은 자살했다. 항우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와 광무에서 한군과 대치했다.

2. 항우가 용저에게 군사를 주어 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11월, 한신이 모래주머니를 이용하여 유수의 물길을 막았다가 초군이 도하 중에 터뜨려 초군을 격파하고 용저는 잡아서 죽였다. 제왕 전광이 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자 전횡이 제왕이 되었다. 다시 한나라 장수 관영(灌嬰)의 군사들에게 싸움에서 패한 전횡은 팽월에게 의탁했다. 한나라가 장이를 조왕으로 세우자 한신은 제왕을 시켜달라고 스스로 청했다.

3. 2월, 장량과 진평의 의견을 쫓아 한왕은 한신을 제왕에 봉했다. 이에 항우가 한신에게 무섭(武燮)을 사자로 보내 한나라를 돕지 말고 천하를 삼분하자고 했다. 괴통 역시 한신에게 자립하여 한왕 및 항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하여 정족지세를 이루자고 권했으나 한신이 듣지 않았다.

4. 7월, 한나라가 경포를 회남왕(淮南王)에 봉했다. 8월, 양도가 끊겨 군량이 떨어진 항우가 한왕과 강화를 맺어 홍구(鴻溝)를 경계로 서쪽은 한왕이 동쪽은 자신이 차지하기로 했다.

5. 9월, 항우가 태공와 여후를 석방하여 한왕에게 보내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장량과 진평이 한왕에게 권하여 호랑이를 풀어주어 후환을 남기지 말라고 했음으로 한왕은 항우의 뒤를 추격했다.

6. 이해부터 한나라는 산부(算賦)라는 법규를 만들어 성년이 된 사람은 매년 120전의 세금을 납부토록 했다.


기원전 202년, 한왕 5년

1. 10월, 한왕이 항우의 뒤를 추격하다가 고릉에서 반격을 받아 대패했다. 한왕은 장량과 진평의 말을 쫓아 한신과 팽월에게 봉지를 약속하고 그들의 참전을 명했다. 두 사람은 이때서야 비로소 군사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2. 11월, 한나라의 유가(劉賈)가 회하(淮河)를 도하하여 회남 땅을 공략했다.

3. 12월,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한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해하는 지금의 안휘성 영벽(靈璧) 경내다. 밤이 되어 사면에서 초가가 들리자 항우는 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아나 오강(烏江)에 이르러 한군의 추격을 벗어나지 못하자 자살했다. 오강은 지금의 안휘성 화현(和縣) 경내다. 항우는 진시황 15년, 기원전 232년 생으로 이때 그의 나이는 30이었다.

4. 한왕이 항우를 노공(魯公)의 신분으로 곡성(穀城)에 장사지냈다. 곡성은 지금의 산동성 동아(東阿) 경내다. 한왕이 정도(定陶)로 돌아가 한신을 제왕에서 폐하고 그의 군사권을 빼앗았다.

5. 정월, 한왕이 제왕에세 폐한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봉하고 회북(淮北)을 관할하게 하고 하비(下邳)에 도읍을 두도록 했다. 다시 팽월을 양왕(梁王)으로 봉하고 옛날 위나라 땅을 관할하게 하고 정도(定陶)를 치소로 삼게 했다.

6. 2월, 한왕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고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았다.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를 장사왕(長沙王)으로, 월왕(越王) 무제(無諸)를 민월왕(閔越王)으로 개봉했다.

6. 5월 군사를 해산하여 모두 고향으로 보냈다. 고향을 떠나 도망쳐 호적에 오르지 못한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면 원래의 작위와 전택을 돌려주었다. 기황으로 자청하여 남의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켜 서인으로 만들었다.

7.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생활에 필요한 물자가 극도로 부족했으며 황제의 신분임에도 황제의 어가를 끄는 말도 같은 색을 구비할 수 없었고 장상 중에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8. 고조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소하, 장량, 한신이라는 인재를 잘 썼기 때문이며 항우는 범증 한 사람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에 천하를 잃었다고 했다.

9. 고조가 동해의 고도(孤島)에 숨어 살고 있던 제왕 전횡을 낙양으로 불렀다. 전횡은 명을 받들어 낙양으로 가던 도중에 고귀한 신분의 제후 출신이 농부의 아들에게 머리를 굽힐 수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횡을 따르던 500 명의 부하들도 전횡을 따라 함께 죽었다.

10. 고조가 자기를 끝까지 추격하여 죽음 직전까지 몰아 항우에게 마지막까지 충성을 바쳤던 계포(季布)를 용서하고 추격을 멈추어 자기를 놓아준 정공(丁公)을 불충하다고 여겨 죽였다.

11. 제나라 사람 루경(婁敬)이 수도를 장안으로 옮겨야 한다고 상주하고 장량이 찬동했음으로 황제는 도성을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겼다. 루경에게 유(劉) 성을 하사했다.

12.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왕 장이가 죽었다. 9월에 황제가 친정을 행하여 장도를 죽이고 태위 노관(盧綰)을 연왕에 봉했다.


기원전 201년, 한고조 6년

1. 진평의 계책을 이용하여 운몽(雲夢)에 사냥을 구실로 제후들을 모이게 한 후에 한신을 사로잡아 초왕의 자리에서 폐하고 회음후로 강등시켰다.

2. 정월, 동성의 자제와 친족들 제후왕에 봉하거나 韓王 信의 봉지를 한나라 옛 땅에서 북쪽의 태원으로 옮겨 흉노의 침입을 막게 했다.





















































봉국


피봉자


시호


고조와의 관계


관할


비고


형(荊)


유가(劉賈)


사촌


회동, 회남, 단양, 회계


한신(韓信)의 봉국 楚


초(楚)


유교(劉交)


초원왕


막내


설군, 동해,팽성


대(代)


유희(劉喜)


숙부


운중, 안문, 대군


後降郃陽侯

子吳王濞


제(齊)


유비(劉肥)


悼惠王


서장자


齊地 73縣


한(韓)


한신(韓信)


한왕


太原北 治馬邑

목록
9215
[] 울료자(尉繚子) 병법에 관해서

무경칠서: 울료자(尉繚子) 《울료자》의 저자 울료자의 이름을 놓고 ‘위료자’와 ‘울료자’가 대립하고 있다.중국의 사전 《사해》
운영자 21-03-26
[] 한무제의 모후 왕태후와 전분의 가계도

왕태후는 괴리(槐里)① 사람이다. 그 모의 이름은 장아(臧兒)라고 했는데 옛날 연왕 장도(臧荼)의 후손이다. 장아가 괴리의 왕중(王仲)에게 시
운영자 15-09-30
[] 위자부와 위청의 가계도

 위황후(衛皇后)의 자는 자부(子夫)로 미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모친의 성을 따라 위씨(衛氏)로 성씨를 삼았다.① 위온(衛媼)은 평양후 봉읍
운영자 15-09-30
[] 서한왕조의 사생아들

서한왕조의 사생아들 1. 유방 - 교룡의 아들[蛟龍之子] - 한왕조의 사생아들 중에서 한고조 유방이야 말로 첫 번째 사생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운영자 14-08-24
[] 《한서혹리(漢書·酷吏)· 윤상전(尹賞傳)》

《한서혹리(漢書·酷吏)· 윤상전(尹賞傳)》 윤상의 자는 자심(子心)이고 거록군(巨鹿郡) 양지(楊氏)① 사람이다. 군의 관리로 있을 때 청렴함이 들
운영자 14-07-08
[] 한무제가 시작한 중국최초의 지방정부 감찰제도 - 육조문사(六條問事)

육조문사(六條問事) 1. 간개 한무제 원봉(元封) 5년(전106),한무제는 중국 전역을 13주로 나누고 각 주에 자사(刺史) 한 명씩을 파견하여 매년
운영자 14-07-02
[] 준불의(雋不意)

준불의(雋不意) 한무제 말년, 군국(郡國)에서 도적들이 일어나자 직지사자(直指使者)에 임명된 포승지(暴勝之)는 수의(繡衣)와 부월(斧鉞)을 하사받
운영자 14-06-28
[] 탁문군(卓文君)

탁문군(卓文君) 원이름은 문후(文后)다. 서한(西漢) 때 사람으로서 지금이 사천 공래(邛崍)지방인 임공(臨邛)의 거상이었던 탁왕손(卓
운영자 14-05-29
[] 상계제(上計制)

상계제(上計制) 상계제는 중국 고대왕조에서 시행했던 지방정부의 업무보고 제도다. 자기 관할 내의 회계연도에 발생한 정적(政績)을 문서로 작성
운영자 14-05-27
[] 무고(巫蠱)의 란

무고지란(巫蠱之亂) [1] 사건의 전개 1. 사건의 단초 한무제가 건장궁(建章宮)에 머물렀는데 한 사람이 검을 차고 궁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
운영자 14-05-16
[] 楚漢爭覇之際年表(초한쟁패지제연표)

楚漢爭覇之際年表(초한쟁패지제연표) 전221년 진시황제 재위 26년 1. 진나라 장군 왕분(王賁)이 연나라를 점령한 후에 남하하다가 방향을
운영자 14-01-27
[] 동인(銅人) 혹은 금인(金人)

동인(銅人) 혹은 금인(金人) 통일진제국을 창건한 진시황은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무장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지방세력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운영자 13-12-05
[] 소무목양(蘇武牧羊)

소무목양(蘇武牧羊) 소무의 부친 소건(蘇建)은 무제 원삭 2년(前127년)에 교위(校尉)의 직채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정벌전에 종군하여 공
운영자 13-11-22
[] 강충(江充)과 무고(巫蠱)의 화(禍)

강충(江充 : ?-기원전91년) 본명은 강제(江齊)고 자는 차천(次倩)이며 서한의 조나라 한단(邯鄲) 출신이다. 거문고와 춤을 잘 추는 자신
운영자 13-11-20
[] 한무제 연표(전140-87년)

한무제(漢武帝) 연표(전140-87년) 한무제 원년 기원전 140년, 건원(建元) 원년 1. 전해인 한경제가 16년만인 기원전 139년에 죽자 황태자 유철
운영자 13-11-19
[] 진나라의 도성 이동사

진(秦)나라의 도성 이동사 1. 기원전 16-11세기 감숙성 천수(天水), 감곡(甘谷) 일대에서 일어났다. 2. 기원전 11세기(서조초기) 천수 부
운영자 13-07-09
[] 진시황의 공과

秦始皇(진시황) 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
운영자 13-01-10
[] 조충국(趙充國)- 둔전을 최초로 시행한 서한의 명장

조충국(趙充國)  조충국의 자는 옹손(翁孫)이고 서한의 상규(上邦) 사람이다. 한무제4년 기원전137년에 태어나서 한선제(漢宣帝) 22년인 기원전52
운영자 12-10-06
[] 장건의 원정 당시 서역제국

Zhang Qian's[張騫] Expedition & Nomadic Countries adjacent to Silk Road Zhang Qian taking leave from emperor Han Wudi[漢武帝], for h
운영자 12-07-12
[] 진나라의 군현제 실시를 위한 정부기구와 녹봉제도

1. 행정기구 1) 중앙조직 진시황은 전국시대 각 나라가 설치한 관제를 기초로 조절과 확충을 가해 통일국가의 새로운 정부기구를 만들어냈다.
운영자 12-05-09
1 [2][3][4][5][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