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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왕조의 사생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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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왕조의 사생아들

1. 유방

- 교룡의 아들[蛟龍之子] -

한왕조의 사생아들 중에서 한고조 유방이야 말로 첫 번째 사생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취독사기(趣讀史記)》의《십대현안게비(十大懸案揭秘)》는《사기(史記)》의 발췌기사 중 유방의 출생비밀, 홍문연(鴻門宴), 형가자진(荊軻刺秦) 등 가장 기이하고 특별한 10개의 쟁론적인 사건을 죽순을 벗기듯 누에고치를 타는 듯이 그 진면목을 밝혔다.

유방의 출생비밀

한고조 유방은 한왕조의 첫 번째 사생아다. 특히 유방의 출생내력은 은밀하다. 유방의 생모 유온(劉媼)은 유방을 낳을 때 나이가 이미 많은 든 상태였다. 어느 날 큰 호수가에 놀이를 나가서 쉬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낮잠이 들어 춘몽을 꾸었다. 그때 집에 머물고 있었던 유방의 부친 태공은 갑자스러운 벼락과 천둥소리에 놀라 날씨가 불순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노파를 데려오기 위해 집을 나가 호수가로 달려갔다. 호수가에 당도한 유태공은 한 마리의 교롱이 유온의 몸 위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유온은 그 일이 생긴 후에 회임을 하여 유방을 낳았다.

이 기사는《사기(史記)•고조본기(高祖本紀)》에 기록되어있다. 사마천의 묘사에 의하면 유방은 태공의 아들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또한 교룡의 아들이라는 말도 진실이 아니다. 천하를 얻은 유방에 대한 사관들의 우회적인 기술도 마땅히 진실이 아니다.

유방에 대한 신비스러운 탄생설화를 분석해보면 당시 태공의 태도는 매우 깊이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최소한 태공은 유방이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유방이 출생 비화뿐만 아니라 그의 용모를 묘사한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그의 마치 교룡처럼 키가 컸으며 코는 오똑하고 목은 길었고 수염은 무성했다. 특히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한 점은 그의 왼쪽 어깨에 72개에 달하는 검정사마귀가 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신체적인 특징은 일종의 생리적인 결함으로 여름에 수영을 할 때 타인으로부터 놀림을 당할 정도였다. 원래 성공하면 왕이 되고 패하면 도적이 된다는 도리에 따라 승리자의 우월적인 신체적인 특징으로 사관들이 기록했으나 오히려 유방이 사생아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되고 말았다.

유방의 성격은 게으르고, 욕심이 많았으며, 극히 이기적이고 잔인한 성격에 혈육도 안중에 없는 사람이었다. 유방의 일가는 모두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스스로 자만하고 가족들이 땅에 붙어 생업을 영위하는 일을 매우 싫어했고 그저 놀고먹는 일에만 전념했다.

보다 못한 태공이 유방의 그런 나태한 행실을 매우 신랄하게 꾸짖었다. 열심히 일해서 부를 이루지 않고 오로지 요행수만 바라면서 살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유방에게 농사일에 열심힌 형제들을 본받아 열심히 농사일을 배워 근검한 자세로 하나하나 씩 쌓아나가 가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훈계했다.

분아배갱[分我杯羹]

『네가 내 아버지를 삶아 국을 끓이게 되며 나에게도 한 그릇 보내다오.』

기원전 205년 유방과 항우가 팽성에서 큰싸움을 벌린 결과 유방은 일패도지하여 아들과 딸을 제외한 유방의 생부와 여후(呂后) 등의 전 가족은 항우의 포로가 되었다. 유방은 도망치다가 아들과 딸을 도중에 발견하고 자기의 수레에 태워 같이 달아났다. 뒤에 따라오던 추격병이 접근해오자 유방의 마음은 타는 듯이 걱정되어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러 번 자기의 아들과 딸을 수레에서 밖으로 던져버렸다. 수레를 끌던 하후영이 그때 마다 수레를 멈추고 두 아이들을 주워서 마치 호주의 캉가루처럼 자기의 가슴에 품고 위기의 순간에서 그들을 구했다. 하우영이 그런 유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사세가 위급하다고는 하지만 살아 있는 그들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2년 후 초한(楚漢)이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부근의 경색(京索) 지간에서 대치하여 공방전을 벌릴 때 후방에서 양도가 끊겨 큰 고민에 싸여있던 항우가 두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을 설치하고 그 옆에 고대를 세운 후에 나무판자 위에 마치 양고기를 꿰어놓은 꼬추구이 모양으로 태공을 묶어 가마솥 위에 매달았다. 이윽고 준비가 끝낸 항우가 사람을 보내 유방에게 나와 서로 대면하면서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이윽고 유방이 상대방 진영 앞으로 나오자 항우가 그를 향해 외쳤다.

“빨리 투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의 아비를 가마솥에 삶아 죽이겠다.”

태공이 가마솥에 위에 매달린 모습을 본 유방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여유만만하게 대꾸했다.

“우리 두 사람은 옛날 초회왕(楚懷王) 앞에서 결의형제를 맺고 서로 맹세했다. 즉 우리는 형제임으로 내 아버지는 네 아버지도 된다. 만일 네가 꼭 너의 아버지를 가마솥에 끓여야겠다면 나에게도 한 사발 보내주려무나! ”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된 항우는 분노가 폭발하여 태공을 가마솥에 빠뜨려 삶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이 달려와 제지했다.

“‘천하를 취하려고 하는 자는 그의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다.’라고 했다. 유방의 아비를 죽여서 좋은 점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너의 악명만 널리 알리는 일일 뿐이다.” 항백은 단지 ‘천하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은 그 가족들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지 유방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몰랐다. 태공은 원래 유방의 생부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방은 태공의 생사는 안중에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일을 두고 유방의 기지를 발휘했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그들은 태공이 가마솥에 삶아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뿐이다. 만일 항우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말로 태공을 죽였다면 유방이 기지를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마침내 해하(垓下)의 일전에서 항우를 무찌른 유방은 천하를 평정했다. 일찍이 태공의 생사에 무관심했던 한고조 유방이 황제의 자리로 올라 화려한 복장을 입고 태공에게 문안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유방의 문안인사는 부자지간에 행하는 예절로 5일에 한 번 들려 행했다. 문안을 올리는 방법은 고두(叩頭)가 필수적인 의식이었다. 유방 집안의 비밀스러운 가정사를 알게 된 태공의 집사가 태공에게 조용히 권유했다.

“하늘의 태양이 둘이 아니듯이 땅 위의 제왕도 둘이 아닙니다. 고조는 비록 당신의 아들이지만 또한 나라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즉 태공은 비록 황제의 부친이지만 또한 황제의 신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찌 신하된 몸으로 황제가 고두를 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

그러나 집사의 그와 같은 말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다.

“어찌하여 그 부친으로 하여금 아들에게 고두를 행하게 놔둔단 말입니까?”

집사의 마음속 깊이 태공이 유방의 친부가 아니라는 의중이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명분상 부자관계는 당연히 국가의 주인과 신하 관계보다 하위 개념이 아니라 상위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일 뿐만 아니라 유방은 여러 신하들 면전에서 방자하게 태공을 모욕했다. 미앙궁(未央宮) 축조가 끝나자 유방은 미앙궁 대전에서 연회석을 열고 태공과 함께 여러 신하들을 초청했다. 이윽고 연회석의 술자리가 무르익어 술기운이 거나해졌을 때 술에 취한 고조가 태공에게 축수를 빌며 득의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옛날 태상황께서는 항상 저를 무뢰한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내가 생업에 무능하다고 제 형제들과 비교하곤 하셨습니다. 지금 여쭤보건대 제가 이루어 놓은 부와 형제들이 이루어 놓은 생업 중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

대전의 연회에 참석했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크게 웃고 이어서 큰 소리로 만세를 외쳤으나 태공 한 사람만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2년 후에 태공은 울적한 심정을 지닌 채로 세상을 떴다.

2. 한문제

사생녀 박희(薄姬)의 일보등천(一步登天)

유방의 후궁 박희(薄姬)는 사생아가 아니라 사생녀다. 박태후(薄太后)의 부친은 오(吳)나라 사람으로 성은 박씨(薄氏)다. 진(秦)나라 때 그는 위(魏)나라 왕가의 종녀인 위온(魏媼)과 간통하여 박희(薄姬)를 낳았다. 박희의 부친은 산음(山陰)에서 죽었는데, 그로 인해 산음에 매장되었다.

제후들이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자 위표(魏豹)가 자립해서 위왕(魏王)이 되었다. 이 때 위온은 그녀의 딸을 궁에 들여보냈다. 그 전에 위온의 부탁으로 박희의 관상을 본 허부(許負)는 그녀가 천자를 낳는다고 예언했다. 이때 항우(項羽)는 마침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형양(滎陽)에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천하는 아직 형세가 정해지기 전이었다. 그 전에 한(漢)나라와 연합하여 초(楚)나라를 공격했었던 위표는 허부의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이에 위표는 한왕을 배반하고 중립을 지켰으며 나아가 초나라와 강화한 후에 연합했다. 이에 한나라는 한신에게 명을 내려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표를 사로잡았은 후에 위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한나라의 군으로 삼았다. 이윽고 포로로 잡혀와 한왕의 부하가 된 위표가 죽자 박희는 군복을 짜는 직실(織室)로 보내져 노역에 종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직녀들이 일하는 곳을 방문한 고조가 미색이 매우 뛰어난 박희를 보고 조칙을 내려 자기의 후궁으로 삼았으나 일 년이 넘도록 찾지는 않았다.

음에 박희가 젊었을 때에 관부인(管夫人), 조자아(趙子兒) 등과 친하게 지냈다. 그때 세 사람은 약속했다.

“ 누가 먼저 부귀하게 되든지 간에 서로를 잊지 말자! ”

그리고 얼마 후에 관부인과 조자아가 먼저 한왕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날 하남궁(河南宮)의 성고대(成皐臺)에서 한왕을 모시던 두 미인이 서로 박희와 옛날 했던 약속을 조롱하며 웃었다. 한왕이 듣고 그 까닭을 물었다. 두 미인은 세 사람이 어렸을 때 한 약속을 고했다. 한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박희를 매우 불쌍히 여겨 그 날로 그녀를 불러 잠자리를 같이 했다. 박희가 한왕에게 말했다.

“어제 밤 저는 푸른 용이 저의 배 위에 누워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왕이 말했다.

“그 꿈은 네가 매우 귀하게 될 징조이다. 내가 너를 도와 그 일을 이루도록 하겠다.”

이윽고 유방과 동침한 박희는 회임한 후에 기한이 차자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뒤에 대왕(代王)이 되었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문제 유항(劉恒)이다. 그러나 잠자리를 한 후로는 박희는 고조를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유방이 죽자 정권을 잡은 여치가 유방의 총애를 받았던 척부인,(戚夫人)、관부인(管夫人)、조자아(趙子兒) 등의 비빈들을 연달아 죽였지만 박희만은 고조의 총애를 받지 않았음으로 여치의 마수에서 벗어나 대왕에 봉해진 유항을 따라 대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여치가 죽자 군신들은 란을 일으킨 여씨들을 주살하고 대왕 유항을 영접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한문제다. 사생녀 출신 박희(薄姬)는 고조의 후비가 되었다가 태후되었으니 두 여인으로 인해 일보등천(一步登天)했다고 할 수 있다.

3. 위자부(衛子夫)

- 한무제의 황후가 된 시녀 -

한무제(漢武帝)가 문제와 경제를 거쳐 서한의 5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한무제의 여인 위자부(衛子夫)도 역시 사생녀였다. 위자부의 부친의 이름은 정계(鄭季)였는데 평양후(平陽侯) 조수(曹壽)의 후국(侯國)을 관리하던 관리였다. 평양은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다. 한무제의 누이가 시집간 조수(曹壽)가 평양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평양공주라 호칭을 갖게 되었다. 조수는 서한의 창업공신으로 평양후에 시봉된 조참(曹參)의 증손이다. 조수는 조시(曹時)라고도 한다. 정계와 평양후의 첩 위온(衛溫)과 간통해서 위청(衛靑)을 포함해서 3형제를 낳았고 다시 평양후 사이에서 위자부를 포함한 1남3녀를 낳았는데 장자는 위장군(衛長君)이고 첫째 누이는 위군유(衛君孺)로 후에 승상의 자리에 오른 공손하(公孫賀)와 결혼했고 위소아(衛少兒)는 평양후국의 관리 곽중유(霍仲儒)와 간통해서 곽거병(霍去病)을 낳았다. 곽중유는 후에 정식으로 결혼한 정실 사이에 곽광(霍光)을 낳았다. 곽광은 한무제 사후 대장군이 되어 한나라의 정권을 한 손에 쥐고 황제마저도 마저도 자신의 뜻대로 바 꾸다가 후에 자기가 옹립한 한선제(漢宣帝)에 의해 살해당했다.

위자부는 평양공주 집의 가희였다. 그때 평양공주는 전국에서 미녀들을 선발하여 집에서 가무를 가르치며 양성하고 있었다. 원래 미신을 잘 믿었던 한무제가 어느 날 패상(覇上)으로 나아가 하늘에 복을 비는 제례의식에 참석했다가 궁궐로 돌아오던 중 평양공주 집을 지날 때 심장이 박동하는 것을 느껴 평양공주 집을 들렀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왕림에 평양공주는 긴급히 임시로 T자형 무대를 가설해 놓고 미녀들을 불러 노래와 춤을 추게 했으나 한무제는 계속해서 하품만 해댔다.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어 가희들이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고 나와 차례로 노래와 춤을 불러 경연하도록 했다. 그 가희들 중 위자부의 자색이 가장 뛰어나고 민간의 창법으로 부른 노래도 특색이 있었다. 위자부의 독특한 창법의 노래를 한 번 듣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크게 쏠렸다. 한무제가 옷을 바꿔 입기위해 자리를 떠나 어가 안으로 들어가자 평양공주는 위자부를 딸려 보내 황제의 의중을 떠보려고 했다. 위자부는 마음속으로 그 뜻을 짐작하고 한무제를 따라 어가로 들어 한무제가 옷을 바꿔입는데 시중을 들었다.

궁궐로 돌아간 한무제는 평양공주에게 천근의 황금을 하사하고 위자부를 다음 날 궁궐로 보내라고 명했다. 위자부는 후에 자기의 동모이부 남동생인 위청을 평양공주의 남편으로 만들어 그 은혜를 갚았다. 그때 한무제의 정식 황비는 권세가 등등한 황족 출신의 ‘금옥장교(金屋藏嬌)’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진아교(陳阿嬌)였다. ‘금옥장교’란 말은 ‘황금으로 된 집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이다. 황후가 된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 애를 낳지 못한 진아교는 도처에 수소문해서 무려 9천만 전에 달하는 거금을 써서 아이를 얻게 해달라고 빌었으나 여전히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사생아 출신의 위자부는 그런 면에서 생산능력은 매우 강했다. 한무제의 후궁으로 들어간 후부터 계속해서 1남 3녀를 낳아 황후 진아교의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황후의 투기로 인해 위자부는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결코 포기하지 않은 진아교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300명에 달하는 여인에게 초나라 복식을 입힌 후에 마치 승려가 불경을 외는 것처럼 위자부를 저주하는 말을 읊게 했다. 진아교가 행했던 일은 무고(巫蠱)라고 했는데 무속인의 저주로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당시 사람은 믿었다. 한무제가 그 일을 알고 대노하여 300명의 여인들을 모두 죽이고 진아교를 장문궁(長門宮)의 냉궁에 유폐시켰다. 진아교는 한경제의 누이인 관도공주(館陶公主)와 서한의 창업공신 진영(陳嬰)의 증손자인 당읍후(堂邑侯) 진오(陳午)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다. 즉 한무제와는 고종사촌으로 어렸을 때부터 황궁에서 같이 자랐다. 황금으로 지은 집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금옥장교(金屋藏嬌)’라는 별명의 금지옥엽 진황후는 가련하게도 냉궁에 갇혀 결국 그곳에서 20년 동안의 유폐생활 끝에 숨을 거두었다.

4. 위청(衛靑)

- 공주의 가노(家奴)가 남편이 되다. - 

사생아로 태어난 위청의 어렸을 때 생활은 참으로 비참했다. 위청은 어릴 때 부친의 집에서 지냈는데 부친은 위청에게 양치는 일을 시켰다. 정계의 정처가 낳은 자녀들은 모두 위청에게 가혹하게 굴어 마치 노복을 부리듯이 큰소리로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죄수가 위청을 보더니 말했다.

“너는 귀인이 될 사을 가지고 있구나. 후에 틀림없이 봉후가 될 것이다!”

위청이 듣고 큰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단지 일개 노예의 신분에 불과한 미물일 뿐이라 그저 바라는 것이라고는 욕이나 먹지 않고 살면 만족하겠소!당신의 말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뿐이오.”

그후 성년이 된 위청은 평양후 집으로 들어가 평양공주를 호위하는 기사(騎士)가 되었다.

위자부를 투기하고 있던 황후 진아교가 사람을 보내 위청을 잡아가 감옥에 가둬놓고 장차 그를 죽여 분을 풀려고 했다. 그때 위청의 친구들이 감옥을 깨고 잡혀있던 위청을 구해냈다. 위자부가 위청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잠자리에서 한무제에게 고했다. 한무제는 이미 진아교에게 염증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반드시 반대하는 사람을 누르고 위청을 보호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위청은 관리에 임명되었고 부상으로 천금의 상금을 하사받았다.

한무제는 비상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던 황제였다. 누이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면 그 동생도 당연히 장안성 내에서 투계나 개경주를 하거나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 도박을 하면서 황음무치한 생활을 누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과연 한무제다운 기상천외한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의 작은처남이 옛날 어렸을 때 양을 치면서 양떼를 몰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생각해내고는 그렇다면 마상에서 천군만마도 통솔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위청을 거기장군에 임명하여 흉노에 대한 강력한 반격작전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무제의 잘못된 결정은 뜻밖의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으로 전장터에 처녀출정한 위청이 흉노의 기병을 참하고 수 백 개의 수급을 얻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두 번 째 출정에서는 수천 급으로 전공이 늘어났다. 위청은 이후로 혁혁한 전공을 세워 그 공으로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져 옛날 그의 관상을 보아주었던 죄수의 예언대로 되었다.

기원전 124년 봄, 위청은 다시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흉노의 우현왕은 위청의 군대가 천리 밖에서 달려와서 피곤에 지쳐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해이해진 마음으로 밤을 세워 음주를 즐겼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도 여전히 연회를 열어 술에 취해 있는 동안 위청의 대군은 밤을 틈타 행군을 독촉하여 흉노의 군영을 rl기습했다. 갑작스러운 한나라 기병대의 습격에 흉노는 손쓸 새도 없이 우현왕은 한 명의 애첩과 함께 수백 명의 호위 기병만을 이끌고 며칠 밤낮으로 도망쳐 사막 가운데 숨었다. 나머지 흉노병들은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히고 가축과 병장기를 모두 노획하여 위청이 종군한 이래 가장 큰 전공을 세웠다. 한무제는 뜻밖의 승전 소식에 기뻐하며 위청을 군중에서 말을 타게 한 채로 군사의 최고위직에 해당한 대장군에 임명했다. 동시에 아직 강보에 싸여있는 위청의 세 어린 아들들로 모두 후에 봉했다. 위청은 몸을 낮추어 지나친 처사라고 하며 고사했으나 한무제는 결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평양후 조수가 병이 들어 자기 봉국에 머물며 실제적으로 평양공주의 남편으로써의 역할 하지 못하자 평양공주의 측근들은 의논하여 열후 중에서 선발하여 평양공주를 재가시켜야 한다고 했다. 서한 초기의 사회풍조는 그런 정도의 행위는 용납되는 개방된 사회였다. 공주는 그렇다면 혼담을 진행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허락했다. 공주의 측근들은 모두가 대장군 위청이 가장 적합하다고 천거했다. 공주가 입을 삐쭉거리며 신통치 않은 어투로 말했다.

“그 사람은 옛날 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다니던 기사에 불과한 자가 아닌가? 어떻게 그런 자가 나의 배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측근들이 말했다.

“지금 대장군의 누이는 황후이시며, 그의 세 아들은 모두 후에 봉해져 대장군의 부귀는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놓친다면 큰 잘못입니다.”

평양공주는 시세에 따르기로 하고 자기가 몸소 위자부를 찾아가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위자부는 다시 한무제의 면전에서 애교를 부리며 평양공주의 뜻을 전했다. 한무제는 두말하지 않고 그와 같은 혼인은 친한 인척이 더욱 친하게 되니 금상첨화와 같은 큰 경사라고 하면서 조칙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다. 단지 위청의 본부인은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사서에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5. 곽거병(霍去病)

- 시녀와 간통해서 낳은 아들 -

평양후(平陽侯) 조수(曹壽)의 희첩 위온은 위자부 이에 두 명의 딸이 더 있었다. 하나는 후에 승상 공손하의 부인이 되는 위군유(衛君孺)와 위소아(衛少兒)라는 딸이다. 세 자매는 위청과는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누이들이다. 그들이 어렸을 때 위소아 역시 평양공주의 집에서 시녀로 일했다. 위소아도 그녀의 모친에게서 배워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평양현에 근무하는 하급관리인 곽중유(霍仲儒)와 통간하여 곽거병을 낳았다. 곽거병은 18살 때부터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정벌전에 종군하기 시작했다. 표요교위(剽姚校尉)의 직책으로 처음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곽거병은 휘하의 800명에 달하는 기병을 이끌고 본대를 이탈하여 흉노의 영역으로 깊숙이 쳐들어가 흉노군의 막사를 기습하여 일거에 흉노병의 2천여 개에 달하는 수급을 얻어 그의 외삼촌이 처음 출전하여 세운 전공을 크게 넘어서는 대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곽거병은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졌다. 20살이 되는 청년장군 곽거병은 다시 승진하여 일약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되었는데 표기장군의 직급은 대장군 다음의 무관으로써는 2번 째로 높은 관직이었다. 그 해에 만 명의 정예기병을 거느린 곽거병은 하서주랑(河西走廊) 일대에 거주하던 5개 흉노부락을 공략하여 한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었고 흉노의 절란왕(折蘭王)과 로호왕(盧胡王)을 살해하고 혼야왕(渾邪王)의 아들과 상국, 도위 등을 생포하고 8천 명의 수급을 얻은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보다 더 중요한 전공은 휴도왕(休屠王) 소유의 제천금인(祭天金人)을 노획한 일이다. 제천금인이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기물로 동을 녹여 주조한 동인상(銅人象)인데 흉노족에게는 하왕조가 주조하여 전국(傳國)의 보기(寶器)가 된 구정(九鼎)과 같은 보물이다.

곽거병이 세운 큰 전적으로 하서주랑은 이때부터 서로 통하기 시작했으며 서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같은 해 곽거병은 다시 원정을 나가 거연수(居延水)를 건저 곧바로 기련산(祁連山) 밑에 당도하여 일거에 혼야왕과 휴도왕의 부대를 격파하고 흉노의 5부락 왕과 왕모, 왕자 등 모두 59인을 생포하고 10만의 흉노병의 항복을 받아 하서주랑에서 흉노세력을 철저히 소제했다. 거연수는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서단의 액제납기(額濟納旗:Ejinaqi)이고 기련산은 감숙성과 청해성을 가르는 산맥으로 최고봉은 감숙성 주천시(酒泉市) 남쪽의 해달 5500미터에 달하는 봉우리다. 이로써 서역과 통하는 하서주랑(河西走廊) 전지역은 모두 한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후에 실크로도가 개통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곽거병 역시 이때부터 흉노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전신으로 추앙되기 시작했다.

곽거병의 전공을 축하하기 위해 그에게 거대한 규모의 별장을 하사했으나 곽거병은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당시 유행했던 유명한 말인 “ 흉노를 멸하지 않고는 가정을 꾸리지 않겠다.”라는 말로 대답했다. 곽거병이 세운 일련의 전공과 그가 외친 “ 흉노를 멸하지 않고는 가정을 꾸리지 않겠다.”라는 말은 1백 년 후에 한나라가 흉노를 완전히 소멸시킨 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곽거병은 거병(去病)이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와는 달리 불과 23세의 지극히 젊은 나이로 기원전 117년에 요절하고 말았다.

《서한왕조의 사생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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