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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20 16:08:545062 
강충(江充)과 무고(巫蠱)의 화(禍)
운영자

강충(江充 : ?-기원전91년)


본명은 강제(江齊)고 자는 차천(次倩)이며 서한의 조나라 한단(邯鄲) 출신이다. 거문고와 춤을 잘 추는 자신의 여동생을 조나라의 태자 유단(劉丹)에게 바쳐 비로소 조왕 유팽조(劉彭祖)의 상객이 될 수 있었다. 후에 태자 유단은 강제가 자기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부왕에게 일러바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여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신의 많은 비밀스러운 일을 알고 있던 강제를 유단이 관리를 보내 체포하려고 했으나 강충은 눈치 채고 도망치고 말았다. 유단은 강제의 부모와 형제를 잡아 살해했다. 조나라에서 목숨을 구해 달아난 강제는 장안으로 들어가 이름을 강충으로 바꾼 후에 조정에 조나라 태자 단이 동모의 누이 및 조왕의 비빈들과 간음을 일삼고 군국의 교활한 호족들과 친교를 맺어 멋대로 간악한 짓을 저질러 백성들을 해치고 있다고 고발했다. 고소장을 읽어 본 한무제가 대노하여 황명을 내려 조나라 궁궐을 포위하고 유단을 체포한 후에 위군(魏郡)의 저옥(底獄)에 이관시켜 엄히 치죄하라고 했다. 옥리는 심리를 마치고 사죄에 해당한다고 보고했다. 한무제와는 이모형인 조왕 유팽조는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상서를 올렸다.

「간사기망(奸詐欺罔)의 죄를 짓고 도주 중인 일개 말단 관리에 불과한 강충이 황상을 격노케 했음은 그 뜻이 사사로운 원한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가마솥에 삶겨져 젓갈로 담가도 충분치 않을 정도로 간교한 자입니다. 신은 원컨대 조나라의 용사들을 모집하여 흉노정벌전에 종군하여 죽을힘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원컨대 태자 단의 죄를 속죄하게 해 주십시오.」

무제가 유단의 사형만을 면하게 해주었지만 태자의 자리에서는 폐하게 했다.

이때 강충은 자기를 분장할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 자기가 직접 고안한 사포(紗袍)를 입고 그 위에 제비꼬리처럼 생긴 치맛자락을 두르고 머리에는 새의 깃을 꽂은 보요관(步搖冠)을 써서 훤칠한 키에 장대한 외모를 더욱 당당하게 보이게 해서 했다. 무제가 강충의 그런 모습을 보고 기인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좌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연과 조 지방에는 기인이 많다던데 참으로 그러하구나!」

그리고는 이어서 시정(時政)에 대해 묻자 강충은 마치 물흐르 듯이 대답했다. 무제는 크게 만족하고 강충을 인재라고 생각했다. 한 번 잡은 기회를 결코 다시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강충은 곧바로 자신이 흉노에 사자로 가겠다고 청했다. 무제는 흉노에 사자로 가면 어떻게 그들에게 대처하겠느냐고 물었다. 강충이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곳 사정을 확실히 알 수 없으니 단지 형편에 따라 대처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무제는 그 자리에서 강충을 알자(謁者)에 임명한 후에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강충이 돌아오자 무제는 그가 사자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칭송하고 그의 관직을 직지수의사자(直指繡衣使者)로 직위를 올렸다. 직지수의사자란 수의직지어사(繡衣直指禦史)라고 부르는데 서한왕조의 관직인 어사의 일종으로 비단의복을 입은 존중받은 총신이라는 뜻이다. 직지수의어사는 황제의 특명을 받아 파견되는 어사로써 임무를 띠고 출행할 때는 지절과 죽장을 지니고 비단 옷을 입었다. 그의 권한은 군국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으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상벌을 행했고 심지어는 지방관리를 임의대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한무제가 지방의 간악한 관리들을 다스리거나 큰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설치한 감찰관으로 평상시에는 두지 않았다. 일개 도망자에 불과했던 자가 어느 날 갑자기 황제의 총애를 받아 직지어사에 임명되어 큰 권력을 잡게 된 강충은 감격에 겨워 분발하여 황제에게 더욱 신임을 받아야 되겠다고 전의를 불태웠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황제가 맡긴 임무에만 전념하여 매직(賣直)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매직이란 정직을 팔아 명성을 얻는다는 뜻으로 상사가 시키면 선악을 판단하지 않고 무슨 짓이든 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순간에 강충의 이름은 장안을 진동하게 되었다.

무제는 강충에게 준 구체적인 임무는 귀척과 근신들의 사치스럽거나 조정의 규정을 어기는 자는 경중을 따지지 않고 하는 적발하는 것이었다. 이에 강충은 자신을 믿고 알아주는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생각에 적지 않은 인사들을 적발하여 탄핵했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우린 중요한 항목은 치도(馳道)의 법금을 어긴 자들을 적발하는 일이었다. 치도는 황제만이 다닐 수 있는 도로였다. 문헌에 따르면 “치도의 넓이는 50보(약 70미터)에 3장(약 7미터) 마다 가로수를 심고 도로 변에는 축대를 두껍게 쌓고 나무는 청송으로 하여 철추를 가지고 암살하려고 하는 자객을 피하려고 했다.”라고 했다.망망할 정도로 폭이 넓은 큰 대로가 밀림 속을 뚫고 건설된 치도는 확실히 사람의 넋을 잃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나라 법에 신민이 말이나 수레를 타고 통과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황제의 명을 받지 않고서는 도로 바깥쪽으로 다녀야했다. 그 법을 제정한 이유는 황제가 행차하는데 도로가 붐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권위와 존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비록 법률이 그렇게 엄하기는 했지만 치도라는 도로로 통행하려는 유혹은 너무 컸다. 그래서 일부 귀척들은 왕왕 이 금기를 깨고 치도를 이용하곤 했다.

강충은 무제가 극도로 허영심이 많은 인물이라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존엄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무제에게 금후로부터 치도의 법금을 깨고 통행하자는 자는 그들의 거마를 몰수하고 범법자는 흉노정벌군에 보내 종군시키겠다고 주청했다. 무제의 허가를 간단히 얻은 강충은 치도의 도로 위에 감시망을 설치하고 일시에 작전을 펼쳐 도로를 통행하던 거마를 나포했는데 그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그 중에는 한무제의 고모이며 폐위된 진황후(陳皇後)의 모친인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도 있었다. 관도공주는 치도로 수레를 몰았다가 강충에 의해 한바탕 수모를 당하고 그녀를 호위했던 거마와 기구는 모두 몰수당하고 말았다. 그 밖에 수많은 귀척의 자제들은 강충의 조령을 범한 죄로 관문에서 궁문의 출입을 제지당했다. 그들은 모두 두려운 마음으로 무제에게 고두(叩頭)를 행하며 죄를 용서해달라고 애걸하며 돈을 바쳐 속죄하겠다고 했다. 그때 마침 북군의 재정이 바닥나 있었음으로 무제는 곧바로 그들의 청을 허락했다. 일시에 무제의 친위군인 북군의 부고에는 수천만 전의 헌금이 쌓였다. 이 일로 인해 한무제는 강충의 충직함을 끊이지 않고 칭송했다. 강충은 법을 받들어 귀척에게 아부하지 않고 또한 일의 처리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후로 강충의 권세는 더욱 공고하게 되었고 치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의사자 강충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한번은 감천궁 근방의 치도를 감시하고 있던 강충은 황태자 유거(劉據)가 마부에게 시켜 치도로 수레를 몰게 한 현장을 보게 되었다. 강충이 즉시 사람을 보내 수레 앞을 막아 그들을 내리게 하여 심문했다. 태자가 알고 급히 뒤에 있는 강충에게 사람을 보내 거마를 돌려달라는 뜻이 아니라며 말하게 했다.

「태자께서는 수레나 말을 아까워하시지 않으나 황제께서 이 사건을 아시면 태자가 좌우의 관속들을 단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게 되어 명성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십니다. 부디 강군께서는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시오.」

그러나 강충은 추호도 망설임 없이 있는 사실 그대로 황제에게 고했다. 무제는 강충의 충성심이 드러난 일이라고 크게 칭송하며 말했다.

「마땅히 신하된 자는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강충은 이로써 황제의 신임을 크게 얻어 그의 위세는 장안을 진동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강충은 질록(秩祿)이 2천석인 수형도위(水衡都尉)로 승진했다. 수형도위(水衡都尉)란 상림원(上林園)에 관한 모든 일을 관장하기 위해 한무제가 원정 2년 (기원전 115년)에 처음 설치한 관청이다. 후에 수형도위는 상림원 일뿐만 아니라 황실의 원림과 전답, 기물, 화폐의 주조, 선박, 마필, 세수, 창고 등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고대에 산림을 감독하는 관리를 형(衡)이라고 하고 그 주요한 일은 원(苑)과 지(池)였음으로 수형이라고 했다. 속관으로는 상림(上林), 균수(均輸), 어수(御羞), 종관(鍾官) 등의 9관(官)과 영승(令丞), 형관(衡官), 도수(都水) 등의 7관(官) 장승(長丞)을 두었던 당시 한나라 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부서라고 할 수 있었다. 무제가 강충을 수형도위에 임명한 이유는 대중들 사이에 이미 퍼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분노를 피하려는 목적이 그 첫 번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충과 같은 유능하면서 견마지로를 다하는 신하는 황제에게는 일종의 윤활유와 같다는 생각이 두 번째였다. 강충은 자신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시에 충직스러운 총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종족과 친지 및 친구들을 불러와 요직에 앉혀 자기의 수하로 삼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자 강충의 무리들은 높은 사람의 비위에 장단만 맞추었음으로 결국은 “봉법불아(奉法不阿)”로 권력을 얻은 강충은 이제는 오히려 불법적인 행위로 관료체제를 붕궤시켰다.

정화(征和) 2년(前91年)승상 공손하의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이 군부의 공금을 횡령한 죄로 하옥 되었다. 공손하는 기회를 보아 무제에게 양릉대협으로 유명한 주안세(朱安世)를 체포하겠으니 그 공으로 아들의 죄를 속죄시켜달라고 청했다. 무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아들을 속죄시켜 주겠다고 허락했다. 그러나 공손하에게 잡힌 주안세는 일개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옥중에서 공손경성과 무제의 딸 양석공주가 간통하고 무고(巫蠱)를 행하여 무제를 저주했다고 고발했다. 무제가 듣고 대노하여 공손하를 아들과 함께 하옥시켜 심문한 결과 죽을죄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위황후의 딸 제읍공주(諸邑公主)를 양석공주에 연좌시켜 모두 사형시켰다. 그런 한무제의 잔인한 성격을 곁에서 목도한 강충은 몰골이 송연했다. 그는 무제는 나이가 이미 늙고 기력이 점차로 떨어져 살아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자 유거와는 옛날 치도에서의 사건으로 사이가 벌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언제나 불안했다. 일단 유거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그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은 명백했다.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강충은 감천궁으로 들어가 병상에 있는 무제에게 참언했다.

「황상의 큰 재주와 웅대한 포부는 마땅히 저 남산과 견줄만합니다. 그러나 황상의 병환은 낫지 않으니 이는 분명히 무고(巫蠱)로 인한 저주입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무고의 저주를 제거해야만 황상의 병은 낫을 수 있습니다.」 강충으로부터 무고란 말을 들은 한무제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살고 싶은 간절한 욕망에 마침내 황당한 말에 귀를 기우리게 되었다. 무제는 강충을 사례교위(司隸校尉)에 임명하여 무고의 행위를 다스리라고 했다.

강충은 자신이 수족으로 부리고 있는 일당을 동원하여 도처에 땅을 파서 목우(木偶)를 찾게 했다. 다시 호인(胡人) 출신의 무당 호무(胡巫)를 시켜 무고를 색출하게 했다. 마침내 밤중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잡아와서 감옥에 가두고는 불에 달궈서 지글거리는 철제 차꼬를 채워 피부를 태우는 고문을 행하여 강제로 무고를 행했다고 자백하게 만들고 다시 그로 하여금 같이 무고를 행한 사람을 지목하게 했다. 이로써 무고에 연좌된 사람의 숫자는 한 사람에서 열 사람으로 열 사람에서 백 사람으로 한 없이 늘어났다. 체포되어 하옥된 자들은 모두 대역무도한 죄명을 얻어 모두 살해 되었는데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강충의 진정한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제에게 궁중에서 고기(蠱氣)가 있으니 궁궐의 안도 조사해야겠다고 청했다. 이때 강충의 말에 미혹되어 좌우의 근신들이 모두 무고를 행해 자신을 저주한다고 의심한 무제는 강충의 청을 허락했다. 강충은 일당들을 이끌고 총애를 잃은 비빈들을 위주로 수색하기 시작해서 점차로 황후와 태자궁까지 대상을 넓혔다. 그는 마침내 태장궁에서 동목인(桐木人)을 찾았다고 크게 소리쳤다. 태자 유거는 무제와 위황후 사이의 소생이다. 7세 때 황태자의 자리에 올라 무제의 사랑을 크게 받아왔다. 무제는 태자 유거를 위해 박망원(博望苑)이란 궁궐을 특별히 조성하여 태자로 하여금 빈객들을 초치하여 교우를 맺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세월은 이미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당시 강충으로부터 자기가 사는 태자궁에서 무제를 저주한 동목인이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태자는 매우 두려운 생각이 들어 부황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즉시 소부(少傅) 석덕(石德)과 상의하여 그 기회에 단안을 내려 수하를 보내 먼저강충의 파당을 체포하게 하고 현장에 직접가서 강충의 머리를 베었다. 태자는 그때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던 원한에 맺혀 강충을 매도했다.

「조나라의 도망자여!조나라의 국왕과 부자 사이를 이간시키더니 그것도 모자라 우리 부자 사이마저 어지럽히느냐?」

호무를 잡아 상림원 중에서 산 채로 태워 죽인 태자는 큰 화가 이를게 됨을 스스로 알고 그 즉시 조명으로 위장하여 병마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다. 감천궁의 무제는 그 소식을 듣고 승상 유굴리(劉屈氂)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란을 진압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태자와 황제의 군사는 장안성 내에서 시가전을 벌려 5일을 밤낮으로 싸워 쌍방 간에 수 만 명이 죽어 시신에서 흐르는 피가 강물을 이룰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태자 측의 군사가 싸움에 패하게 되어 태자는 도망쳤다가 장안의 동쪽 경계의 호현(湖縣) 천구리(泉鳩裏)에서 지방군에게 포위되자 태자는 대들보에 목을 메어 자살하고 태자의 여동생과 두 아들은 모두 관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단지 태자의 핏줄이라고는 강부에 싸인 황증손 유병기(劉病己)한 명뿐이었다. 이 아이가 장성하여 후에 한선제로 등극하게 된다. 황증손 유병기(劉病己)는 후에 정위감(廷尉監) 병길(丙吉)의 도움을 받아 민가에 숨겨져 양육되었다.

위황후는 태자와 공모했다는 죄로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어사대부와 승상사직(丞相司直)은 모두 강충의 상관이라는 죄목으로 연좌되었다. 황후는 자살하고 어사대부와 승상사직은 요참형에 처해졌다. 사마천의 친구 임안(任安)은 그때 북군의 지휘관으로써 태자로부터 군사를 동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 영문을 굳게 닫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으며 정세가 불명함으로 잠시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해서 그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이때에 일어난 변란은 역사상 “무고지화(巫蠱之禍)”라고 칭한다. 난리 통에 죽은 사람은 수만 명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한무제 자신의 골육끼리 서로 죽이는 참극이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무고의 일을 믿지 않게 되었고 무제도 점점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어 결국은 모든 것이 강충의 술수에 놀아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무제는 강충의 3족을 멸하게 하고 다시 자사궁(子思宮)을 태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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