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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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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始皇(진시황)


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일 때는 기원전 259년에 태어난 그는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왕에 즉위하였으나 親政(친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한 것은 23세 때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기원전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현재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후 얼마 못되어, 진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 우리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왔다. 또한 통일후 진은 전국시내에 서울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진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육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2천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백90m, 폭 1백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백m, 남북 2백여m), 그 외에도 수많은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조세 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애 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백60여 명의 학자들을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체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로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겼고 있다.




진시황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괴물(怪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中國)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대륙 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 인해 삼국(三國) 분립시대나 남북조((南北) 분열시대의 중국인들은 '이것은 이상사태(異常事態)다. 언젠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창작으로 가공할 괴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대사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쓰다




'황제' 라는 말은 영어로 emperor라고 한다. emperor는 로마 제국의 황제 emperialt에서 유래된 말이나 '皇帝' 라는 두 개의 한자로 칭호를 최초로 쓴 사람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의 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중국 전국시대의 일곱 제후)' 이라고 해서 중국에는 일곱 개의 강국이 있었고, 진(秦)은 그 중의 한 나라였다. 시황제는 나머지 여섯 개 나라를 잇따라 멸망시켰는데 BC 221년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산동(山東) 반도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진시황은 태황의 태(泰)를 떼어내고 황(皇)만을 취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삼황(三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복희(伏羲)씨, 여와(女蝸)씨, 신농(神農)씨 세 사람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오제(五帝)는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이라는 다섯 사람의 성군을 가리킨다. 따라서 '황제'라는 말에는 진시황 자신이 3황 5제의 덕을 겸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문(同文)-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부른다. 이 육국문자는 분서(焚書;죽간(竹簡)등의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소멸되었다. 진시황제의 사후에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으로 들어왔을 때 다시 남은 서적들을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가끔 지하에서 특히 사막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 이 육국문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인장이 돌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그 당시는 모두 금속을 썼다. 훌륭한 사람은 금, 그 다음 사람은 은이나 구리를 썼다. 이것을 끈으로 매서 목에 걸었다. 전쟁시에는 이것이 인식표(認識票) 역할을 했다. 전사한 유체(遺體)를 판별할 수 없을 때에는 목에 걸었거나, 혹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금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




치도(馳道)의 건설




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 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 한(漢)나라 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도량형(度量衡)의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


절대자 시황제(始皇帝)




시황제는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천하통일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나 신선을 믿고 있었다. 시황제도 믿고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황제'라는 말 그자체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칭호였다. 또 그때까지 누구나 다 쓰고 있던 '짐(朕)'이라는 말을 황제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등 황제의 절대화를 도모했다. 황제의 절대화는 국가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시황제는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완수한 자신은 보통인간이 아니며 절대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로불사의 인간, 즉 신이나 선인과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자임했던 시황제는 이제 자기 자신이 선인(仙人)이나 신선(神仙) 되겠다고 했다. 신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시황제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도사(당시는 방사(方士)라고 불렀다)가 여러 가지로 수상한 짓을 가르쳐 주었다. 예컨대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너무 보여 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인주(人主)는 미행(微行) 하여 체중(體中)의 사기(邪氣)를 피(避)하라.'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사기(邪氣)가 몸에 들어와서 신기(神氣;몸 속에 있는 신의 기운)에 해가 된다고 해서 시황제에게 당분간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말했다. 더구나 자신이 있는 곳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도록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거처가 알려지고 말았다. 시황제는 매우 노하여 누가 알렸느냐고 조사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 때 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기(史記)>에는 아니지만 다른 사료 등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릉(金陵;지금의 남경)에 갔을 때 역시 방사(方士)였겠지만 '이 근방에는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기' 즉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왕은 나 혼자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대신하는 자가 이 지방에서 나올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지방의 기맥에 의한 것이므로 기맥을 단절해야겠다고 시황제는 산을 파서 무너뜨렸다. '연강굴단(連岡掘斷;연속되어 있는 언덕을 잘라 버림)'해 버리면 왕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장소는 진회(秦淮)라고 일컬어지며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것은 인공의 하천이 아니고 자연의 하천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생긴 것은 역시 시황제의 인품에 의한 것이리라.




소주(蘇州)에 호구(虎丘)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의 무덤이 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명검이 많이 나왔던 곳으로 왕이 사망하면 검을 무덤 속에 넣었다. 그런 명검이 몇 천 개나 있다고 들은 시황제가 그곳을 파헤치게 했다.. 파헤친 자리가 검지(劍池)라는 곳이다. 파 보았지만 범이 나타나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파헤치려 했던 곳에 범이 있어서 검으로 바위를 쳤던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설명서에 쓰여 있기도 한다. 검을 차지하려 했던 것 역시 검이 갖는 영력이 탐이 나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시황의 출생




대상인이었던 여불위는 교묘한 정치공작을 펴서 진나라의 서출공자 자초(子楚)의 후원자가 된다. 결국 여불위의 활약으로 기원전 249년 자초는 진나라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초가 장양왕(莊襄王)이고 진시황은 장양왕이 조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여불위의 첩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이렇듯 진시황은 여불위와 자초의 정치적 연대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초가 어느 날 여불위에 집에 초대되었는데, 여불위의 애첩을 보고 반해서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일을 앞두고 작은일을 양보하자는 심정으로 자초에게 주었다. 후에 그녀는 자초사이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정(政)이며, 이 정이야말로 6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뒤에 호랑(虎狼)이라 불리운 진시황이었던 것이다.




진시황의 꿈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왕이된 진시황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건설하였다. 진시황은 자신의 크나큰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롭게 바꾸길 원했다. 따라서 신하들과의 논의 끝에 "태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皇帝)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자신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라고 부르기도 하고, 후대에는 2세, 3세등으로하여 이를 천만세까지 이어 나가도록 하자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만,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당해 15년의 짧은 왕조로 끝나버렸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천하통일이 이룩된 후 진시황의 통치 기간 중 이사는 승상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막강한 권세는 누렸다. 이사는 황제가 천하를 몸소 다스리는, 36군으로 나라를 구분하고 그 밑에 현을 두어 조직적으로 일사분한하게 통치하는 제도를 추천했다. 그러나 이사는 학자들이 사사로이 학문을 전수하며 법을 비난하고 자기가 배운 것만을 기준으로 시비를 따진다고 모함하여, 또한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퍼뜨린다고 하여 학자들을 난관에 빠뜨렸다. 결국 사관이 갖고 있는 자료 중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개인이 소장한『시경』과 『서경』 그리고 제자백가의 책은 모조리 몰수되어 불태워 졌고 옛것을 언급해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은 처형당했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꿈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서불(徐市)에게 어린 소년 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주어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불은 몇 년이 지나도록 약을 구하지 못하자 돌아와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러나 서불 일행은 끝내 영약을 구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후 진시황은 스스로 신선이라 자칭하는 노생과 후생이라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거처를 모르게 하였다. 그러나 필사적인 진시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생과 후생은 불로장생의 약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진시황의 주변에 계속 머물다가는 틀림없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진시황을 비방하고 도망쳐 버렸다.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비방한 자들을 조사하게 한 바 주로 유생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460여명이나 되는 유생들을 붙잡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사건이다.




아방궁(阿房宮)과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은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세살 즉위 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묘자리를 파고 있었다.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지하에 황하, 양자강 및 바다를 본 떠 만들고 그곳에 수은을 채워 계속 흐르게 했다.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 새긴 해와 달과 별들이 반짝이게 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보이도록 했다. 아울러 고래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또한 내부에는 기관을 설치하여 도굴자가 침입할 때는 즉시 활이 자동적으로 발사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시황이 죽어 시황릉에 매장되게 되자 후궁들도 모조리 생매장되었으며 매장 직후에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능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궈 공사와 매장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을 생매장시켜 죽였다. 무덤 위에는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하였고 또한 무덤 안에는 진시황을 모시는 시중과 신하 그리고 호위병과 군마 등 수만 개의 도용(陶俑) 즉 실물크기의 흙인형을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심지어 산채로 끊는 구리물을 뒤집어 씌워 만든 것도 있었다. 아방궁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약700m, 남북의 길이가 115m로서 만명 정도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고, 아래층에는 약 11.5m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이나 높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곧바로 남산으로 통하는 고가도로를 만들었으며 위수(渭水) 건너 함양(咸陽)으로 연결되는 복도도 만들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아방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멸망하고 건설 중이던 아방궁은 항우에 의해 불태워졌다.




만리장성(萬里長城)




한편 통일 천하를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부담을 주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그래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장군 몽염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했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공사를 시작한 지 10여 년만에 감숙성 임조(臨兆)에서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의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장성을 완성하였다. 이 공사를 위하여 30만 명의 군사 아닌 잡역부들이 동원되어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몽염 자신도 10여 년 동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이 대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렇게 무리한 사업이 원인이 되어 진나라에서는 각 지방에 반란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진승·오광의 난도 사실은 만리장성을 쌓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진시황의 죽음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은 강력한 추진력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진시황의 왕성했던 정력은 대단해서 하루에 1석(약30kg)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시찰만 해도 통일 후 다섯 번이나 강행군하였다. 교통편도 변변치 못했던 그 시대에 중국 대륙을 다섯 번 시찰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할 것이다.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에 나서 회계산(會稽山)에 다녀오는 길에 해안을 끼고 북상하고 있었다. 황제의 시찰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수행하였으며 조고가 옥새를 관리하는 일을 겸임하고 있었다. 시황제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맏아들 부소(扶蘇)는 황제가 하는 일에 여러번 반대한 적이 있어 멀리 북쪽의 상군(上郡) 지방으로 쫓겨나 변경 지방의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다. 당시 상군 지방의 군사를 지휘했던 사람은 명장 몽염(蒙恬)이었다. 한편 시황제는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귀여워하여 이번 시찰에도 아들 중 유일하게 동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황제가 사구 지방에 이르자 갑자기 병이 깊어져 위독하게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그래도 믿을 건 장남뿐이었든지 황제는 조고를 시켜 맏아들 부소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는 봉해졌으나 사자를 보내기도 전에 황제는 죽고 말았다. 황제의 편지는 옥새와 함께 조고가 쥐게 되었다.




시황제의 죽음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며 오직 호해와 이사, 조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는 여행 중에 황제가 죽었고 또 태자도 정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죽음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밀에 부치게 했던 것이다. 유해는 수레에 안치된 채 시찰이 계속되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신하가 정사를 아뢰고 황제의 수라상도 올려졌다. 결재도 수레 안에 있는 환관이 수행하였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써, 군현제도를 확립한 절대적 왕권 중심의 통치자였다. 진나라 멸망이후에도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모두 채택한 탁월한 행정제도 였다. 후대의 관점에서 진시황을 보는 시각은 다분히 여러 면이 부각되지만 가장 많이 얘기 되어지는 면은 불로장생을 꿈꾸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방궁과 시황릉을 세우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유례없는 독재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진시황의 진면목이 많이 가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시황은 중국 전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 화폐, 거궤(車軌), 문자를 통일하는 등 사회, 경제, 문화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형의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도 탁월한 합리주의자이자 가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아주 꼼꼼하게 정무에 힘쓰는 반면에,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극과 극의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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