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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02 10:26:333313 
한무제가 시작한 중국최초의 지방정부 감찰제도 - 육조문사(六條問事)
운영자

육조문사(六條問事)

1. 간개

한무제 원봉(元封) 5년(전106),한무제는 중국 전역을 13주로 나누고 각 주에 자사(刺史) 한 명씩을 파견하여 매년 가을이 되면 해당 주에 속하는 군국(郡國)을 순행하여“육조문사(六條問事)”에 규정에 근거한 직권을 행사하여 군국을 감찰하도록 했다.

제1조

- 강폭한 종족들과 토호를 돕는 자[強宗豪右]

- 규정을 초과한 전답과 저택을 소유하는 행위[田宅逾制]

- 무력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행위[以強淩弱]

- 무리를 지어 소수자를 억압하는 행위[以眾暴寡]

제2조

2천석 관리들의 다음 행위.

- 조서를 받들지 않거나 법제를 준수하지 않는 행위

- 공익을 저버리고 사익을 취하는 행위

- 조서를 빙자하여 사욕을 취하는 행위

- 백성들의 재산을 침탈하거나 가렴주구하는 행위

제3조

2천석 관리들의 다음 행위

- 포학한 살인행위

- 화풀이로 하는 형벌행위

- 기쁘다고 남발하는 포상

- 백성들을 괴롭히고 각박하게 대하는 행위

- 백성들의 생활여건을 악화시켜 질병에 걸리게 하는 행위

- 치산치수를 게을리 하여 산이 무너지고 바위가 깨지게 하는 행위,

- 요언을 뻐뜨려 혹세무민하는 행위

제4조

2천석 관리들의 다음 행위

- 아전을 불공정하게 선발하는 행위

- 아첨배를 좋아하는 행위

- 현능한 인재의 앞길을 막고 둔재를 총애하는 행위

제5조

2천석 관리들의 다음 행위

- 집안의 세력을 믿고 청탁이나 직권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뇌물을 수수하는2천석 이상 관리들의 자제들의 행위.

제6조

공직자의 직무를 위반하여 범법자를 비호하거나 토호나 부강한 자들에게 아부하거나 뇌물을 주고받아 정령을 훼손하는 행위

2. 서한왕조의 출순제(出巡制)로 설치한 13자사부

서한왕조의 한무제가 지방정부의 감찰을 위해 시행한 출순제는 후대 왕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방정부에 대한 서한왕조의 감찰제도는 초기에는 진나라가 제정한 법을 따랐다. 한혜제 재위 시 부분적으로 지역을 한정해서 감찰어사제도를 한 번 시행했다. 감군어사(監郡御史)는 2년 임기로 매년 10월에 조정에 들어와 감찰업무를 보고하고 12월에 임지로 돌아갔다. 후에 감찰범위를 확대하여 중앙정부에 각 군을 관할하는 감찰어사를 설치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설치한 어사의 임무는 비교적 복잡하고 효과적이지 못했다. 예를 들어 한고조 유방이 사수현(泗水縣) 관하의 정장(亭長)을 지낼 때 감찰어사는 수시로 상궤를 벗어난 행위를 자행했다. 사수정이 있던 곳은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으로 진나라는 매 10리마다 정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를 정장이라고 했다. 정은 진나라의 지방행정조직의 최소말단 단위다. 한고조는 진시황의 능묘인 여산릉을 축조하기 위해 장정을 현장으로 압송하다가 중도에서 모두 풀어주고 자신은 망탕산(芒碭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망탕산은 지금의 강소성 탕산현(碭山縣) 일대다. 한고조는 망탕산에서 100여 인을 모아 현에서 문서를 수발하는 소하와 옥리 조참 등의 인사들과 함께 진나라 정부에 반기를 들고 기의했다가 마침내 한나라 왕조를 창건했다. 사수감(泗水監)의 이름은 평(平)으로 관내에서 반란사건과 같은 엄중한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중앙정부에 아무런 보고를 올리지 않았던 이유는 실직과 독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서한왕조 초기에에 감찰어사 역시 진나라 때의 관리들과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한문제는 승상사(丞相史)를 을 수시로 파견하여 지방을 순찰하게 했으나 승상사 역시 한시적인 직책으로 시행했던 이유는 지방정부에 대한 감찰업무를 개혁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3. 천하를 13주로 나누어 자사로 하여금 감찰하게 하다.

한나라의 감찰제도는 한무제 통치시기부터 획기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원봉(元封) 원년(전110), 한무제는 각군에 설치한 감찰어사를 완전 철폐하고 그 4년 후에 황제의 칙명으로 전국을 13주 즉 13개의 감찰구로 나누었다. 13주는 기주(冀州)、유주(幽州)、병주(並州)、연주(兗州)、서주(徐州)、청주(青州)、양주(揚州)、형주(荊州)、예주(豫州)、익주(益州)、량주(涼州)、교지(交趾)、삭방(朔方)이다.

13자부의 자사는 중앙정부의 최고 감찰기관인 어사부(御史府)의 관할로 들어가고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최고책임자로 했다. 자사는 임명은 어사가 추천하여 황제가 임명했다. 당시 수의어사(繡衣禦史)였던 포승지(暴勝之)라는 위인은 잔인하고 포학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방관청과 군진에 지나치게 압박을 가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기의를 일으키도록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우린 인물이었다. 포승지는 어떤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의 수령을 겁박하여 란을 일으킨 농민들의 거주지를 급히 포위하도록 한 후에 그들을 모두 살해하여 여타 농민들에게 경계를 주었다. 이후로 그가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주변의 주군(州郡)은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번은 포승지가 발해(지금의 하북성 창주(滄州)) 일대에 들렸다가 준불의(雋不疑)라는 저명인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보기 위해 초청했다. 머리에는 진현관(進賢冠)을 쓰고 허리에는 검과 패옥(佩玉)을 차고 넓고 긴 옷에 두터운 허리띠를 둘러 화려하게 복장을 차려입은 준불의가 포승지의 거처 문 앞에서 당도하여 뵙기를 청했다. 허리에 찬 칼을 풀어 맡기라는 문지기의 말에 준불의가 말했다.

「검은 뜻 밖의 일을 당했을 때 군자가 대비하여 자신을 지켜야 함으로 검을 풀어놓을 수 없소. 나는 이만 돌아가야 하겠소!」

문을 지키던 관리가 포승지에게 준불의의 말을 전했다. 승지는 누각의 문을 열게 하고 그를 들어오게 하고서는 멀리서 준불의 용모를 보니 자못 위엄을 갖추었는데 의관은 심히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승지가 문쪽으로 나가 맞이하여 당 위로 인도하여 좌정을 청하자 불의가 서서 말했다.

「바닷가에 몸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는 저는 포공의 위엄과 명성을 들은지 오래입니다. 이제 다행히 존안을 뵙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무릇 관리란 너무 강하면 부러지게 되어있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면 령이 서지 않게 됩니다. 위엄으로 행하되 은혜를 베풀면 공명을 세울 수 있어 영원히 천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준불의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사살을 알게 된 포승지는 그의 말을 가슴에 새겨 경계로 삼고 예와 성을 다해 그를 접대하면서 당세에 행해야할 일에 대해 물었다. 그곳에 모인 관리들은 모두 주군에서 선발한 관리들로써 불의의 말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주연이 끝난 후에 포승지는 그 즉시 불의를 천거하는 표장을 올린 후에 그와 함께 공거를 타고 황도로 들어가 주상을 알현시키자 황제는 불의를 청주자사(青州刺史)에 임명했다.

4. 육조문사 중 중요한 감독업무

여섯 가지 조항 중 첫 번째 조항을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조항은 모두 2처석 녹봉의 군수에 대한 사항들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범문란(範文瀾)은 그의 저서《중국통사간편(中國通史簡編)》에서 말했다.

「6조 외에 문서로 밝히지 않은 한 가지 조항이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후왕이 저지른 죄상에 관한 조항이다. 법을 어긴 국왕도 이 조항에 의해 징벌을 받았다.」

국왕에 대한 감찰 업무를 명문화하지 않은 이유는 그 문제가 매우 미묘하고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한나라 초기에는 지방행정을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행해서 실행했다. 기원전 154년에 발발한 오초칠국의 란 여파로 국왕에 대한 감찰을 명문화시킨 이유는 그와 같은 문제가 이미 간과하기 힘든 사태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오초칠국의 란을 평정한 후에 제후국의 세력은 이미 크게 약화되었다. 한무제가 제위에 오르자 제후국들은 칼로 잘리듯이 조그만 나라로 나뉘어졌다. 그는 국왕의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는 방법 외에 그들의 아들이나 동생들에게 제후국의 영지를 나누어 후국에 봉하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군의 것과 동일한 규모의 제후국은 몇 개의 소제후국으로 나뉘게 함으로 해서 제후국들은 부단히 더 작은 규모의 제후국으로 축소되었다. 후에 다시 중앙조정은 106개에 달하는 제후국의 작위를 박탈하고 동시에 제후국의 관리는 조정에서 관직을 맡지 못하도록 금지시켜 반복해서 제후국이 중앙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자 못하게 예방했다. 계속된 일련의 정비과정을 거쳐 원기가 크게 상하게 제후국은 더 이상 중앙정부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이어서 한무제는 다시 주군을 다스리기 위한 후속적인 조치로서 2천석의 태수를 군의 최고 수령으로 삼았다. 지금의 성위(省委) 서기겸 성장에 해당하는 직위라고 할 수 있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은 관리와 제후왕을 감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제정한 “육조문사(六條問事)”의 중요한 목적은 고급관리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였다.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만일 지방의 고급관리들이 중앙정부의 정책을 인식하지 않고 집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형법의 남용과 백성을 농락하는 등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5. 자사의 업무방식

겨우 6백석에 불과한 자사의 봉록은 중하급 현령에 해당할 뿐이었다. 그때 현은 지금의 행정구역보다 광범위했고 현령이나 자사와 같은 직급은 지금의 지청(地廳) 급 간부 정도였다. 자사는 매년 8월 관할하는 군국에 순찰을 나갔다가 연말이 되면 중앙 조정에 감찰에 대한 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자사는 감찰권만 있었지 위반사항에 대해 사법처리를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사서에는 자사의 순행을 “승전주류(乘傳周流)”라고 했다. “승전(乘傳)”이라는 말은 정부가 운영하는 역참의 마차를 타는 행위 즉 정부의 공문을 전달하는 우거(郵車)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발견된 적이 없지만 마땅히 일반적인 우거와는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혹자는 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거라고 했다. 당시 2천석의 봉록을 받은 고급관리가 타는 수레상자는 양쪽 면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안의 바닥은 방석이나 가죽으로 깔았다. 그리고 6백석의 관리가 타는 수레상자는 왼쪽만 홍색 칠을 하고 우변은 칠하지 않았고 고인(古人)은 항상 왼쪽에 앉았다. 6백석 봉록의 자사가 타는 수레의 크기도 2천석 관리의 수레보다 매우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군국의 군수나 왕은 모두 당도하는 자사를 위해 전담하는 관리를 관할지의 경계로 보내 영접했다. 만일 자사를 태울 수레가 보통의 우거를 보내면 자사는 매우 체면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주류(周流)는 자사가 감찰하는 구역을 순행하는 행위다. 만일 기주자사의 감찰구가 10여개의 군과 제후국으로 되어있다면 기주자사는 그 10여 개의 군국을 돌아다니며 감독과 검사를 진행했다. 자사의 임기는 9년이고 만일 맡은 바 직책을 훌륭히 이행하고 임기를 끝내면 2천석 군수로 곧바로 승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6백석의 하급관리가 그런 기회를 갖기란 매우 드문 일이었다.

6. 분급부책(分級負責)과 귀구반리(歸口辦理)

직급에 따른 책임소재와 부서별 업무분장

자사의 업무를 수행하는 방법은 매우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육조문사에 규정된 업무 외의 일이나 2천석 이하의 관리를 감찰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한서(漢書).주박전(朱博傳)》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주박이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재직시 그는 감찰을 위해 관할의 지방관아로 가던 중에 어느 현에서 관리와 노인들을 포함한 큰 무리를 지어 족히 4-5백이 달하는 군중이 모두 현청의 뜰을 가득 채웠다. 일의 전말을 대충 짐작한 지방관아의 관리는 그에게 일단 현에서 머물며 그들의 일을 처리한 후에 그곳을 떠나라고 조언했다. 말을 마친 관리는 주박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폈다. 주박의 생각은 명백했다. 그는 수하에게 명하여 수레를 멈추지 말고 앞으로 계속 가던 길을 가라고 했다. 그러자 그를 만나러 온 군중들이 그의 수레 앞을 막고 주위를 둘러쌌다. 어쩔 수 없게 된 주박은 수레에서 내려 지방관아의 관리들 곁을 지나 자기에게 직접 탄원하려는 대중들에게 자기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

「본 자사가 하는 일에는 현승(縣丞)이나 현위(縣尉) 대한 감찰업무는 없소. 만일 그들의 문제를 호소하려고 하면 그대들은 군청으로 가야하고, 만일 2천석의 고관에 대한 일을 호소하려고 한다면 역시 이곳에서 그대들의 호소를 받아들일 수 없소. 청컨대 본 자사는 맡은 바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당하는 곳으로 가야하겠소. 만일 그대 백성들이 도적을 당한 일을 진원하려고 한다면 내가 해당하는 관원을 찾아서 그대들의 일을 처리하게 해 줄 수는 있소.」

말을 마친 주박은 수레에 올라 처음 하려는 생각대로 수레를 몰게 해서 가버리자 수백 명의 민원인들은 어쩔 수 없이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7. 자사의 출순(出巡)

자사가 일정한 기간 동안 출순하는 제도는 한무제의 개혁조치 중 이정표를 세운 업적이었다. 진나라의 감군어사(監郡禦史)는 순수한 감찰관이라기 보다는 상시적인 행정관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서한의 자사는 단지 감찰업무만을 맡았기 때문에 그 지위가 명확하게 규정되었다. 그러나 진나라 때의 감군어사는 한나라의 자사가 수행해야 할 육조문사와 같은 정확한 규정이 없었다. 더욱이 자사의 중요한 업무의 특성은 유동적이었으나 일관적인 정신은 감독자와 피감독자의 이해관계의 고리를 끊는 일이었다. 전국시대 때 상앙이 변법을 시행할 때 관리들 상호간의 이해관계라는 점에 착안하여 대단히 정교한 원칙을 규정했다. 상앙의 감찰에 대한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무리 관원의 수가 많아도 그들이 맡은 일의 성격이 동일하다면 그들은 하나의 입장에 서게 되어 그들로 하여금 서로 감독하게 할 수 없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상호간에 잘못을 쉽게 덮어주게 되어 있다. 마치 마부에게 마부를 감독하게 하는 일과 같아 감독업무는 행해지지 않는다. 그들의 이익은 일치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통로가 생겨 감독업무는 수행되지 않는다. 만일 말이 말로 하여금 말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마부의 잘못은 은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말과 마부의 이익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관원과 관원 사이는 서로 이해관계는 같기 때문에 그들은 상호간에 이익으로 연결될 뿐이다. 오직 그들 상호간의 이익이 충돌될 때만이 제왕은 비로소 통치권을 공고하게 보장할 수 있다.

말과 마부의 예를 들어 감찰업무를 정의한 상앙의 생각은 아주 특별하고 심각한 발상이다. 그의 방식은 직무상 상호 이익에 있어서 상이한 겸제(鉗制) 관계를 확립시켜야만 비로소 감독행위는 진정으로 발휘되는 법이다. 지금 시대로 말하면 바로 “이체감독(異體監督)에 해당한다. 현대 서방국가가 채용한 민주주의의 원칙인 삼권분립(三權分立) 정신의 취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유동식방식(流動的方式)-감독자와 피감독자의 이해관계를 차단하는 방법-인 마아설화(馬兒說話)”는 공식적인 표현은 일종의 “이체감독(異體監督)”이다. 소위 이체란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이익공동체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에 있어서 현실화 시킨 순시감독이라는 방법은 그런 원리를 채용했다고 할 수 있다. “마아설화(馬兒說話)”의 관건은 어떤 방법으로 말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는가? 유기체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감독자와 피감독자와의 이해관계를 차단해야 하며 한 조직의 이해관계 통로를 차단하는 유동적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이것은 감독업무를 수행하는데 철칙을 발명한 2300여 년 전 고인인 상양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8. 검증제도(保證機制)

한무제가 설계하여 추진한 자사제도는 비교적 순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서한 말까지 존속했다. 이윽고 한성제(漢成帝) 수화(綏和) 원년(전 8년)은 한무제 사후 79년 되는 해로 당시 승상 책방진(翟方進)과 대사공(大司空) 하무(何武)가 자사를 주목(州牧)으로 바꿔야 한다고 상주했다. 이유는 한나라의 기본적인 법제는 귀한 것으로 천한 것을 다스리야 하지 천한 것으로 존귀한 것을 다시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봉록이 겨우 6백석인 자사가 2천석의 고급관리를 감찰하는 제도는 궤도를 벗어난 제도라고 했다. 성제는 이의를 달지 않고 조칙을 내려 자사를 주목으로 개명하고 봉록을 2천석으로 올려 군수와 대등한 대열에 놓았다. 그리고 3년 후, 승상 주박(朱博) 서장으로 힘써 간했다.

「원래 13자사부를 설치할 때 자사는 직위가 낮으나 하사하는 상은 후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사를 격려하여 직무를 완수하는데 매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자사제도를 폐지하고 주목을 설치했한 이후 그들을 분발시킬 동기가 없어져 감찰의 효과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땅히 자사제도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목은 다시 자사가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시 자사는 주목으로 바뀌고 말았다. 자사를 고급관리로 올리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는 두 가지 사상이 유불리를 따져 교차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책방진의 경우는 감찰제도도 마땅히 일반적이 다른 제도와 같은 원리로 작동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격한 봉건제 하의 등급제를 위반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귀한 것으로 천한 것을 다스려야한다는 원칙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박 등의 인사는 감찰관을 설치하는 목적은 감찰행위를 수행하는데 유불리를 판단기준으로 삼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관념 하에서 시행된 감찰제도는 결국 감찰관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자사가 주목으로 대치되자 원래의 감찰관은 행정관으로 전환되었고 감독자와 피감독자는 함께 섞여 한통속이 되어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져 “양마아설화(讓馬兒說話)” 정신에 입각한 감찰제도는 파괴되고 말았다. 한문제 생전에 고안해 낸 효과적인 감찰방법은 더 이상 장기적으로 효과를 보증할 수 없게 되었다. (Bai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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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ang Qian's[張騫] Expedition & Nomadic Countries adjacent to Silk Road Zhang Qian taking leave from emperor Han Wudi[漢武帝], for h
운영자 12-07-12
[] 진나라의 군현제 실시를 위한 정부기구와 녹봉제도

1. 행정기구 1) 중앙조직 진시황은 전국시대 각 나라가 설치한 관제를 기초로 조절과 확충을 가해 통일국가의 새로운 정부기구를 만들어냈다.
운영자 1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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