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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銅人) 혹은 금인(金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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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銅人) 혹은 금인(金人)


통일진제국을 창건한 진시황은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무장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지방세력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멸망시킨 나라와 민간이 몰래 숨긴 병기를 수거해서 함양으로 집결시켜 녹였다. 전국시대에는 비록 철제 무기가 이미 전쟁의 무대에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병기들은 동제품이었다. 농업이나 공업의 도구들의 품질은 전쟁병기들의 품질과는 반대로 일찍이 철제공구들이 동제품을 대체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소위 『소봉주거(销锋铸鐻)』라는 방법으로 ‘병기를 녹여서 종거(鍾鐻)’를 만든다는 일이었다.

사기에「쇠를 녹여서 금인 12개를 주조했다. 금인 한 개의 무개는 천석으로 궁정의 뜰에 세웠다.」라는 기사가 있다.

금인이라는 말은 실제로 구리를 녹여 만든 동상이다. 진나라 때 한 석은 120근이고 한 근은 고노(高奴)에서 발굴된 동석의 권형(權衡)에 따르면 256.25그람에 해당한다. 즉 동인 한 좌의 무게 천석은 30톤에 해당하는 중량이다. 동인의 키는 3장으로 삼국시대 위나라 척은 24.2cm로 동인의 높이는 지금의 단위로는 7.26미터다.


《삼보황도(三輔黃圖)》에 의하면 동인이나 대동인은 어떻게 주조하거나 설치했는지를 알 수 없는 영원이 상상할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단순히 운송할 수 있는 방법뿐만 아니라 당시에 기중기나 조거(吊車)도 없었던 진나라 시대에 30톤의 무게에 높이가 7.26미터에 이르는 동인 12개를 함양궁에 세웠다가 다시 아방궁으로 운송했던 방법도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진나라의 “금인(金人)”은 서양의 로도스(Rhodos) 섬에 세웠다는 청동제의 아폴로 상을 연상하게 한다. 태양신 아폴로 청동상은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94년에서 시작해서 282년에 완성된 높이 36미터, 무게 12.5톤에 달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폴로 상은 진나라의 동인에 비해 비록 높이는 높았지만 자체 중량이 중심을 이기지 못하고 지진이 일어나 넘어지고 말았다. 세계 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여겼던 예술품 아폴로 상은 로도스 섬에서 약 60년을 서있었을 뿐이었다. 망망대해에 마주서서 민물과 썰물의 드나듬을 바라보며 하늘의 구름 가운데에 우뚝 솟아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시끌벅적한 항만을 드나드는 선박들을 위한 표지판이 역할을 담당했다. 아폴로 상이 넘어진 시점에서 5-6년 후에 진나라의 금인이 세워졌다. 단지 애석한 것은 중국의 대동인은 진한의 궁문을 장식하다가 마지막으로 삼국시대 동탁에게 화를 입고 최후로 전진의 부견에 의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지중해 로도스 섬의 아폴로 상은 고작 60년을 버틴 것에 비해 진나라의 금인은 약 600년 동안을 당당히 서서 위용을 자랑했다는 점이다.


진시황은 중국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통일왕조의 황제다. 그에 관한 전설과 기담은 민간에 광범하게 퍼져서 전승되어왔다. 사서에 기록된 진시황이라는 이름은 불후의 공적을 세운 한 사람의 대영웅으로 중화민죽의 자존심으로 여겨지나 다른 한편으로는 폭군에 잔인한 군주의 대명사로도 쓰이고 있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이룩한 공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지금까지 세계역사상 볼 수 없었던 수 많은 대역사를 이룩했으며 그 중에서도 12개의 금인을 주조한 일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불가사의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건설된 아방궁의 전전(殿前)에 우뚝 솟아 있는 12개의 동으로 주조된 동인은 황색을 띠었음으로 사람들은 금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모두 이족들 복장 모습이었으며 하나같이 실로 운반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30톤의 거대한 무게를 자랑했다. 또한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정교한 문양을 새겨 넣어 무용을 빛내고 위세를 떨치는 금인의 위용은 보는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들 정도로 영용무비(英勇无比)한 모습으로 매일 밤낮으로 진왕의 궁전을 지켰다. 동인은 크기는 거대하고 제작은 정교하가기 그지없어 역사상 그런 조형물은 보기 힘든 것이었다. 《사기(史记)·진시황본기(秦始皇本纪)》의 기사에 “진시황 26년(전221년) 천하의 병기를 수거하여 함양으로 가져와 불에 녹여 금인 12좌를 주조했다. 금인 한 좌는 각기 천석의 무게로 궁중의 뜰에 세웠다.”라고 했다. 또 가의(贾谊)의 《과진론(过秦论)》에도 역시 “소봉주거(销锋铸鐻)에 금인 12좌를 주조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은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12좌의 동인을 주조한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며, 또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막대한 경비를 들여 만든 거대한 중량의 조형물의 실제적인 사용처에 대한 의문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전국을 통일한 후에 황제라는 존호를 만들어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한 진시황이 여불위(呂不韋)와의 권력투쟁과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은 고난을 이겨내고 황제의 자리에 어렵게 오르자 자기 이후의 황제들은 이세, 삼세를 거쳐 만세에 이르도록 대대손손 황제의 자리를 잇는 원대한 꿈이 실현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는 황제의 자리를 우선 안정시킨 후에 어떻게 하면 장안의 치안을 영구히 확보하여 진제국을 만세까지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민간에 산재된 각종 병기를 수거하여 폐기시켜야만 하고 그때서야 비로소 다른 세력의 무력에 의해 정권을 빼앗기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병기를 수거하는 행위야 말로 그 문제를 해결위한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대신들이 참석한 조정회의에서 진시황은 무정롱(舞灯笼)을 관람하고 각종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떼의 살기가 등등한 무사들이 손에 도검과 병장기들을 들고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올라왔다. 공연을 관람한 진시황은 자기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마음속의 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임조(臨洮)의 농민 한 사람이 소식을 전했는데 12명의 거인이 나타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거거일(渠去一),현우금(显于金),백사벽(百邪辟),백단생(百瑞生)”라는 가사의 동요를 불렀다고 했다. ‘渠去一’의 풀이는 거(渠)에서 일(一)을 거(去)하면 인(人)으로 진시황을 의미하고 ‘현우금(显于金)’은 금기(金器) 즉 금으로 만든 기물에 의지하면 그 공적이 찬란히 빛난다는 뜻이고 ‘백사벽(百邪辟)’은 백가지의 사악한 기운을 피할 수 있으며 ‘백단생(百瑞生)’은 백가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진시황이 듣고 크게 기뻐하며 하늘의 계시라고 여겨 하늘의 뜻에 순응한다는 명목으로 령을 발하여 민간의 병기를 수거하여 함양에 모두 가져오게 하여 마침내 12좌의 동인을 주조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은 진시황이 병기를 수거하여 동인을 주조한 일은 완전히 진시황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실현되었다는 설이 역사적인 평가다.


 금인에 대한 또다른 판본이 있다. 어느 날, 진시황이 아방궁에서 휴식을 취하며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날씨가 갑자기 크게 변하여 하늘은 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귀신과 요괴가 나타났다. 매우 두려워한 진시황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홀연이 백발이 창창한 노인이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진시황 앞으로 다가왔다. 몸은 정정하고 정신은 또렷한 노인이 손을 휘둘러 먼지를 쓸어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 금인 12좌를 만들어 이곳에 세워야만 비로소 천하가 안정되느니라!”

말을 마치자 한 줄기의 금빛이 번개처럼 지나가더니 노인은 사라지고 말았다. 꿈에서 깨어난 진시황은 꿈을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어 그 즉시 령을 내려 온 나라의 병기를 수거하여 함양으로 모아 12좌의 동인을 주조하도록 했다는 설이다. 수 많은 학자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진시황은 특히 방사와 도사들의 말을 믿었으며 더욱이 통일제국을 창건한 이후로는 죽음에 대한 걱정이 앞서 그와 같은 꿈속의 도인 이야기를 더욱 믿게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일은 오늘날 12좌에 달하는 동인들의 흔적이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동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거대한 동인들에게 날개가 돋쳐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금인이 사라진 사연은 대체로 3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당초 서초패왕 항우가 진나라 서울 함양을 공격하여 아방궁을 태울 때 같이 불에 타서 사라졌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동한 말년에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진입한 동탁은 10개의 금인을 불에 녹여 동전을 주조하고 나머지 2좌의 금인은 장안성 청문(清门) 안으로 옮겼다고 했다. 이어서 삼국시대에 위명제(魏明帝) 조예(曹睿)가 2좌의 동인은 낙양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수천 명의 인부와 장인들을 동원하여 장안성의 청문에서 패성문(霸城門)까지 운반했으나 금인의 중량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운반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동인은 장안성의 패성문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다시 서진(西晉) 시대를 지나 동진과 오호십육국 시대가 되자 후조(後趙)의 황제 석호(石虎)가 다시 두 좌의 금인을 업성(鄴城)으로 옮겼다. 후에 북중국을 통일한 전진(前秦)의 부견(苻坚)이 다시 두 좌의 금인을 업성에서 장안으로 옮겼다가 녹여 없애버렸다는 설이다. 금인은 진시황에 의해 주조된 이후 그때까지 약 600년 동안 존재하다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세 번째 설은 대체로 낙관적인 추측으로 사서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12개의 금인은 훼손되어 없어지지 않았다는 설이다. 12좌의 금인은 평소에 진시황이 가장 아꼈던 물품이었기 때문에 진시황이 능묘를 조성할 때 12좌의 금인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보물과 함께 능묘에 같이 부장되었다는 설이다. 현재 기술적인 문제로 진시황릉의 발굴작업은 잠시 중지된 상태이기 때문에 12좌의 금인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한 문제도 함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상태다. 발달된 고고학의 기술로 진시황릉이 발굴이 완료되는 날 금인에 대한 의문점이 모두 풀릴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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