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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2 05:40:161911 
사명지교(舍命之交), 양좌지교(羊左之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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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명지교(舍命之交)


시중에 팔리는 감람나무 열매의 표면에 새겨진 ‘양좌지교(羊左之交)’라는 글귀는 이 시대의 수많은 붕우들이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는 성어로 그것은 친구사이의 정리가 이미 생명을 서로 허용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표현이다. 즉 ‘양좌지교’는 친구의 정리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며 중국 역사상 가장 절친한 친구들에 대한 일단의 현몽(現夢)으로 표시한 전기고사(傳奇故事)로 실로 전례가 없는 진기한 이야기다.

양좌(羊左)의 묘는 두 사람이 합장된 무덤이다. 묘의 첫 번째 주인은 좌백도(左伯桃)로 목숨이 달린 양식을 친구에게 건내주고 자신은 삭풍과 폭설 속에서 얼어죽은 사람이다. 두 번째 무덤의 주인 양각애(羊角哀)다. 각애는 꿈속에 나타나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좌백도를 돕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사자(死者)로 만든 후에 귀신의 세계에서 좌백도와 함께 형가(荊軻)의 귀신과 싸워 물리쳤다. 중국 고대인들의 마음 속에 “열사(烈士)”로 각인된 두 사람의 묘 주인들의 전기고사는 적지 않게 소설화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전설로 내려오는 고사의 내용은 비록 허구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지만 친구 사이의 진정한 정리와 의리의 표상으로 전해진다. 오늘날의 관점으로도 그들은 중국 고대에 있어서 우정의 진정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좌백도와 양각애는 춘추 때 연나라 사람으로 서로 의기가 투합한 친구 사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 친구를 사우(死友)라고 했다. 그들은 진정한 의리의 남아들로 생전의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초나라의 왕위에 오른 초평왕(楚平王 : 재위 전528-514년)이 현사를 초빙한다는 소식이 두 사람이 사는 동네에 전해졌다.두 사람은 초빙에 응해 함께 초나라로 길을 떠났다. 두 사람이 양산(梁山)이라는 지방에 이르렀을 때 대단히 큰 폭설을 만나 길이 막혔으나 지참하고 간 식량은 그리 많지 않았고 의복은 또한 추위를 막을 수 없는 아주 얇았음으로 결국 기아와 추위가 겹친 환경에 빠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 가지고 간 식량은 간신히 한 사람이 지탱할 수 있는 량이었음으로 장차 두 사람은 삭풍과 대설의 와중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일 두 사람의 식량을 한 사람이 먹는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추위와 기아를 벗어나 초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양각애보다 연장이었던 좌백도는 추위에 얼어 길을 가지 못하고 있는 양각애를 향해 말했다.

“나의 학문은 자네보다 못하니 그대가 초나라에 들어가게나!”

그리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양식보따리를 풀어놓고 다시 자기의 비단 옷을 벗어 양각애에게 모두 주고는 자신은 길옆에 서있는 속이 빈 고목나무의 가운데에 들어갔다. 결국은 좌백도는 나무의 빈 공간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굶어죽고 말았다.

연나라의 저명한 학자 출신이었던 양각애가 초나라에 들어가자 곧바로 초평왕의 인정을 받아 중용되어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초평왕은 폭군 초영왕(楚靈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이름은 웅기질(熊棄疾)이고 영왕은 그의 서형이다. 후에 초평왕은 간신 비무극(費無極)의 농간으로 며느리로 데려온 진녀(秦女)를 가로채고 태자를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태자의 태부 오사(伍奢)가 평왕의 그런 행위를 비난비난하자 평왕이 오사와 아들 오상(伍常)을 죽였다. 그러나 오사의 작은 아들 오자서(伍子胥)는 나라 밖으로 망명하여 외국의 힘을 빌려 부친과 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오자서는 오나라로 들어가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부국강병을 이룬 후에 그 힘으로 초나라를 점령했으나 그때 초평왕은 이미 죽은 후였다. 오자서는 초평왕의 무덤을 파해쳐 꺼낸 그의 시신에 채찍질을 가해 부친과 형의 원한을 갚았다. 이는 후일의 일이다.

한편 초평왕으로부터 매우 후한 봉록을 받았던 고관들은 몸에 비단 옷을 두르고 호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양각애만은 초나라로 오던 길에 풍설을 만나 얼어죽은 좌백도를 잊을 수 없었다. 명조의 진기(陳沂)가 쓴《금릉세기(金陵世紀)·능묘기(陵墓紀)·卷四》에 양각애와 좌백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양각애가 초평왕의 초빙에 응해 친구 좌백도와 함께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예상치 못한 사정으로 죽은 좌백도에 대한 이야기를 초평왕에게 고하자 초평왕이 감동한 나머지 잠시 양각애에게 휴가를 주어 찾아가보도록 허락했다. 양각애는 옛날 조난을 당한 장소로 돌아가 좌백도의 시신을 찾았다. 좌백도는 속이 빈 나무 가운데에 강시가 되어 있었다. 슬픔에 젖은 양각애는 장례를 크게 치르고 조난을 당해 죽은 친구를 후하게 장사지내고 묘지는 율수현(溧水縣) 성구에서 40리 떨어진 포당(莆塘)이란 곳에 정했다.』

원조의 웅몽상(熊夢祥)이 지은《석진지집일(析津志輯佚)》에 의하면 포당의 지리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당시 건강(建康) 율수현(溧水縣) 남 45리에 의봉향(儀鳳鄉) 공진(孔鎮) 남대역로(南大驛路)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시 고순구(高淳區) 경내다.

포당의 땅은 원래 춘추 때 오(吳)나라 땅이었다가 한 때는 초나라에 의해 점령 당하기도 했다. 남송의 장돈이(張敦頤)가 지은 《육조사적류편(六朝事跡類編)·묘우문(廟宇門)·초평왕묘(楚平王廟)》의《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 인용한 글에서 ‘초평왕은 일찍이 율수현(溧水縣) 남쪽 90리에 도읍을 건설했는데 그곳은 지금의 남경시 고순구로 사서에는 성 이름을 고성(固城)이라고 칭했다. 지금까지 남경성 일대에서 발견된 가장 일찍이 축조된 성지(城址)로 연구 결과 확인되었다. 오나라가 도성으로 삼았던 고성은 초평왕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뢰저(瀨渚)라고 불렀다. 후에 고성의 유지(遺址)에 초평왕의 사당을 지었다. 당조 광명(廣明) 원년(880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친 후에 송조의 장돈이(張敦頤)가 활약할 때까지 전해졌다. 그런데 좌백도의 묘지를 포당에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초평왕이 그곳의 땅을 양각애에게 봉지로 하사했기 때문인 듯하다.

초평왕에게 하직인사를 올린 후에 곧바로 달려가 양산(粱山)의 땅에 당도한 양각애는 옛날 좌백도가 들어갔던 늙은 뽕나무를 찾았다. 과연 좌백도의 시신은 그때까지 여전히 그 안에 있었는데 안색과 몸은 살아있을 때처럼 생생했다. 양각애는 좌백도의 시신을 향해 절을 두 번 올리고 데리고 왔던 좌우의 시종들에게 마을의 부로들을 부르게 하고 장지를 포당의 평원을 끼고 있는 곳에다 정했다. 앞에는 흐르는 큰 개울과 뒤에는 높은 절벽과 그 절벽 좌우에는 산봉우리들이 모두 그 장지를 싸안고 있는 풍수가 심히 훌륭한 곳이었다. 향초를 끓인 물에 깨끗이 씻은 좌백도의 시신에 대부의 의관을 입힌 후에 외곽(外槨)이 달린 내관(內棺)에 안치하여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무덤의 사면 주위에 담장을 쌓은 후에 나무를 심고 봉분에서 10여 보 앞에 지은 형당(享堂) 전면에 조각상과 돌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위패를 거는 현판을 달았다. 다시 담장 옆에 지은 기와집에 사람을 살게 하여 좌백도의 묘를 지키도록 한 후에 집 앞에 좌백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걸었다. 좌백도을 위한 능묘의 조성을 끝낸 양각애는 향당 앞에서 제사상을 차린 후에 곡을 하는데 애절하기가 그지 없었다. 향촌의 부로들과 수행원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제사의 의례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헤어져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좌백도와 양각애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 해도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으나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그 뒤를 이었다.


좌백도의 장례를 치른 후에 초나라 도성으로 돌아온 양각애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 좌백도가 꿈 속에서 나타나 양각애에게 말했다.

형가(荊軻)장군의 무덤이 내 무덤 옆에 있는데 틈만 나면 찾아와 나를 괴롭히고 있네. 내가 이번 9월 15일 무덤 위에서 그와 일전을 겨루게 됐으니 그때 군사를 끌고 와서 나를 도와주게나!”

형가는 태자단의 명을 받아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길을 떠날 때 “바람은 차고 역수의 물은 차구나! 한번 떠난 장사는 다시 돌아올 수 없구나!”라고 노래 부른 연나라의 자객으로《사기(史記)·자객열전(刺客列傳)》에 그의 행적이 전한다.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검술을 익힌 후에 연나라에 들어가 축(筑)의 명인 고점리(高漸離)와 친구가 되어 시정에서 같이 놀았다. 후에 연나라 태자단(太子丹)의 명을 받들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진나라에 사자로 갔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몸은 피살되었다.

그런데 형가는 원래 섬서성 함양성에서 죽었는데 무슨 연유로 지금의 남경 부근에 묻혀 후에 좌백도의 무덤과 같이 하게 되었는가? 그 연유는 역사적으로 명백한 기사가 없으나 민간의 전설로는 들판에 버려진 형가의 시신을 훔쳐서 수습한 고점리가 이곳에 장사지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저승의 형가는 무슨 이유로 좌백도를 용납하지 못하고 괴롭히게 되었는가? 그것은 좌백도가 형가의 풍수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해서 원한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너는 원래 굶주려 동사한 위인인 주재에 어찌 감히 너의 무덤을 나의 어깨 위에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은 나의 풍수를 빼앗은 행위가 아닌가? 만약 네가 너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내가 무덤을 파헤쳐 너의 시신을 야외에 던져버리겠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양각애는 좌백도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부로들에게 부근에 형가의 무덤이 있는지를 물었다. 형가의 무덤이 좌백도 무덤 부근에 있음을 확인한 양각애는 좌백도 귀신이 처한 사정을 슬퍼했다. 그는 자기의 몸을 저승으로 던져 좌백도의 싸움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양각애는 좌백도의 무덤을 파서 꺼낸 관을 열고 자신의 목을 찔러 좌백도의 시신과 함께 같은 관에 스스로 순장했다. 자살 전의 양각애 마음은 필시 비장하고 처연한 마음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고 “개관자문(開棺自刎)”과 같은 행위를 행하는데 단순한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양각애는 순사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편지를 써서 사람에게 주어 초왕에게 올리게 했다.

“좌백도 형의 영혼이 형가의 혼에 의해 괴롭힘을 받고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도우고 싶어도 들어갈 문이 없어 제가 참을 수 없습니다. 사당을 불사르고 무덤을 파고 싶으나 차마 토인의 뜻을 어길 수 없습니다. 저승의 귀신을 도와 강포한 형가의 영혼과 싸움을 돕기 위해서는 마땅히 죽어 저승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저의 시신을 좌백도 묘의 오른 쪽에 장사지내 주십시오. 제가 좌백도 형과 생사를 같이 함으로써 그가 나에게 양식을 주어 목숨을 보존하게 한 은혜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청컨대 신의 청을 받아들여 그것을 징표로 삼아 초나라의 산하와 사직을 영원히 보존하십시오.”

양각애의 수행원들은 그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신속하게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관에 넣어 좌백도의 무덤 옆에 묻었다. 민간에 전래된 “형가와 싸움 두 귀신 이야기[二鬼战荆柯]”에 의하면 “그날 밤 2경, 바람과 비가 크게 일어나고 번개와 천둥이 치면서 누군가가 크게 싸우면서 지르는 함성이 수십 리 밖에까지 들렸다. 다음 날 새벽에 무덤 주위를 살펴보니 형가의 무덤이 갈라진 곳에에서 백골이 튀어나와 묘 앞에 흩어져 있었고 무덤 가에 심은 소나무는 모두 뿌리가 뽑혀 쓰러져 있었다.....”라고 했다.

좌백도와 양각애 두 사람의 고사는 중국의 전통문화의 대표인 유학이 주장하는 도덕의 모범인 “의(義)”의 표상이 되어 역대 문인들에 의해 널리 칭송되어오고 있다. 두 사람의 의거에 감동을 받은 초평왕이 좌백도를 상경(上卿)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다시 양각애와 함께 대부의 직에 봉했다.


당 대력(大曆) 6년(776년) 남경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대서예가 안진경(顏真卿)이 두 사람의 무덤 곁을 지나가다가《조열사좌백도묘시(吊烈士左伯桃墓詩)》라는 시을 지어 포당의 객관에 두었다. 북송의 사인(詞人) 주방언(周邦彥)도 일찍이 율수현(溧水縣)의 현령으로 있을 때 《과양각애좌백도묘(過羊角哀左伯桃墓)》라는 제목으로 시을 지었다.

두 사람의 행적은 세상사람들의 깊은 추앙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무덤 역시 보호를 받아왔다. 원조의 웅몽상(熊夢祥)이 지은 《석진지집일(析津志輯佚)》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송신종(宋神宗) 조욱(趙頊)의 치세 때인 회녕(熙寧) 연간에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있던 관기(關杞)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좌백도와 양각애가 나타나 위륜(魏倫)이란 사람이 장차 자신의 무덤 가의 나무를 훔쳐갈 것이라고 호소했다. 다음 날 태자가 당지 사람에게 사연을 물은 즉, 원래 위륜이라는 사람이 돈을 주고 두 사람의 무덤 가에 심어진 수목을 사서 바야흐로 베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관기가 알고 즉시 그 일을 중지시켰다.』


그런 일은 옛 사람들은 두 의사들을 매우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 좌백도와 양각애의 사연에 대해 노래한 시를 많이 찾을 수 있고 그 중에서 송조의 상주(常州) 진릉인(晋陵人) 호종유(胡宗愈)이란 사람이 그들을 조문하기 위해 지은 비교적 긴 시가 있다.



古有二烈士(고유이열사)

옛날 두 열사가 있었는데



羊左哀與桃(양좌애여도)

양각애와 좌백도였다.



結交事遊學(결교사유학)

친교를 맺고 같이 학문을 했는데



心若膠漆牢(심약교슬뇌)

두 사람의 우정은 아교나 칠처럼 깊었다.



遠聞楚王賢(원문초왕현)

초왕이 현인을 찾는다는 멀리서 날아온 소식을 듣고



待士皆英髦(대사개영모)

기다리고 있던 선비는 모두 영걸이었는데



負笈守燕路(급부수연로)

책보따리를 메고 연나라를 떠나 초나로로 향했다.



不憚千里勞(불선천리로)

천리 길의 고단함도 마다 않고


行行及梁山(행행급양산)

걷고 또 걸어서 양산에 이르렀을 때



雨雪填岩赘(우설전암췌)

비와 눈이 몰아쳐 암벽 길을 메워



窮途食不繼(궁도식불계)

길은 끊겨 양식을 얻을 수 없어



餓口空替替(아구공체체)

배고픔에 허기가 졌다.



毋爲俱死爾(무위구사이)

구태어 너와 함께 죽을 필요가 있겠는가?



原野塗身膏(원야도신고)

원야에 몸에 기름을 발라 버티겠으니



我留子獨往(아유자독왕)

나는 남고 자네는 길을 떠나게나!



命各系所遭(명각계소조)

사람의 명이란 각기 다른 법이라네!



慷慨示一訣(강개시일결)

강개한 뜻을 한번 표하더니



并粮解衣哀(병량해의애)

양식과 옷을 벗어 양각애에게 넘겨주고



僵坐空穴中(강좌공혈중)

자신의 몸은 속이 빈 고목나무 속으로 들어갔으니



視死輕鴻毛(시사경홍모)

죽음을 새털처럼 가볍게 여겼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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