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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부인(許穆夫人) - 중국 최초의 애국여류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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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부인(許穆夫人)

- 중국 최초의 애국여시인 -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고, 희성에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춘추 때 위나라 여인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역사에 기재된 애국여시인이다.


허목부인은 위선공(衛宣公)의 아들 소백(昭伯) 공자석(公子碩)의 딸로서 위나라 군주의 여동생이다. 춘추시대 제후들이 주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 위나라는 당시 제후국들 중 국력이 중간 정도 되는 제후국이었다. 나라는 황하의 중류지역에 위치했고 도읍은 상나라 때에 형성된 도시 조가(朝歌)였다. 그녀는 소녀시절부터 조국의 안전에 대해 마음속으로 크게 걱정했고 어떻게 하면 위나라의 안전을 위해 공헌을 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미모가 뛰어났던 허목부인을 허(許)와 제(齊) 두 제후국이 사자를 파견하여 청혼해왔다. 당시 제후국들은 통혼은 일종의 정치행위로써 두 나라 간의 친선과 결맹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허나라가 많은 혼수품을 보내왔음으로 허목부인의 부모는 허나라의 군주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조국의 안전을 먼저 고려했던 허목부인은 허나라는 약소국이고 위나라와는 거리가 너무 멀러 일단 위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허나라는 원군을 보내 도울 국가적인 역량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나라는 강대국이고 또한 위나라와는 국경을 접하고 있던 이웃국이라 위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제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목부인의 부인은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결국은 처음 결정한 대로 허나라의 허목공의 부인으로 시집을 보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허목부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위나라의 군주 위의공은 술과 음악, 그리고 여색 및 동물과 같은 것에 탐닉했던 혼군이었다. 그는 특히 학을 기르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궁원에 많은 백학을 모아 길렀다.학을 기르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어 많은 상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황당하게 학에게 장군이라는 봉작을 내려 대부에 준하는 대우를 누리게 했다.

그가 궁밖으로 나갈 때는 화려한 수레에 같이 태웠다. 그런 백학을 기르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위의공은 백성들에게 학연(鶴捐)이라는 명목의 세금을 징수하여 위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격분시켜 불만을 샀다. 위의공 치하의 위나라는 그 국력이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약육강식의 춘추시대에 북방의 적족(狄族)은 위나라의 국정이 문란해졌음을 보고 마침내 기원전 660년 군대를 대거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해왔다. 위의공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적족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으나 백성들은 그를 도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군사들은 목숨을 바쳐 싸움에 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족이 위나라 경내에 침입해 왔을 때는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위나라를 삽시간에 멸망하고 말았다. 위의공은 전투 중에 전사하고 백성들은 대부분 살해되고 위나라의 도성은 약탈당해 텅텅비게 되었다. 피난민이 된 위나라 백성들은 황하를 건너 남쪽 강안의 조읍(漕邑)으로 피했다.


허나라로 시집을 간 허목부인은 위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날을 지샜다. 그녀는 적족의 침략을 받아 위나라는 망하고 군주는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날개가 없어 위나라에 날아갈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년는 말을 타고 달려가 침략군을 무찌르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원수를 갚고 치욕을 설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허목공에게 원군을 보내 위나라를 구원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허목공은 담이 작은 소인에 불과했음으로 괜히 위나라를 구원하려고 하다가 불똥이 자신에게 튀어 해를 입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에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수수방관하고 내버려 둘 수 없게 된 허목부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숙고했다. 그녀가 처음 허나라에 시집올 때 시녀로 데려온 시녀와 누이동생들만을 데리고 조읍(漕邑)으로 달려가 위나라 도성에서 도망쳐온 궁실의 사람들에 의해 옹립된 위대공(衛戴公)을 만났다. 위대공은 허목부인의 오빠다. 허목부인은 수레에 싣고 온 재물들을 풀어 난민들을 구제했으며


위나라 군주와 신하들과 함께 위나라를 복국시킬 대책을 의논했다. 그리고 얼마 후,4천여 명의 백성들을 모아 생업을 도모하도록 독려하며 한편으로는 군사들을 정돈하여 싸움에 익숙하도록 훈련시켰다. 또다시 허목부인은 위대공에게 건의하여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라고 했다. 이때 허목부인의 뒤를 쫓아온 허나라의 대부들은 허목부인에 대해 큰 원한을 품고 그녀가 허나라를 떠난 것은 신중하지 못한 처사이며 남에게 웃음거리만 되었지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행위임으로 제후의 부인으로써 체통만 잃은 행위라고 비난하며 허목부인에게 귀국하라고 완강하게 청했다. 허목부인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허나라 대부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분노한 그녀는 시를 지어 꾸짖었다.



旣不我嘉 不能旋反(기불아희 불능선반)

이미 나를 좋게 여기지 않아도 나는 돌아갈 수 없네



視爾不臧 我思不遠(시이부장 아사불원)

그대가 좋지 않게 생각해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고



旣不我嘉 不能旋濟(기불아가 불능선제)

이미 나를 좋지 않게 여기지만 물을 건너 돌아갈 수 없도다.



視爾不臧 我思不閟(시이부장 아사불필)

그대가 날 좋지 않게 여기나 내 생각은 그치지 않으리



그대 대부들이 이르러 내 행동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 또한 내가 돌아가지 않음을 선하다 여기지 않는다 해도 나는 결코 능히 길을 돌려 돌아갈 수 없노라! 비록 나의 행동이 그대 대부들에게 좋지 않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내 생각은 그치지 못하겠다.


그리고 얼마 후에 대공이 병이 들어 죽자 위나라 사람들은 제나라에서 공자 훼(毁)를 맞이해 와서 위후(衛侯)로 옹립했다. 이가 위문공(衛文公)이다. 문공은 대공의 동생이며 허목부인의 작은 오빠다. 제환공은 위나라를 돕기 위해 군사를 보내 조읍에 주둔시키고 다시 자기의 아들 무휴(無虧)에게 별도의 3천 명의 군사와 병거 3백 승을 이끌고 위나라로 가게 했다. 동시에 송과 허 등의 나라도 군사를 보내 적족과의 싸움을 도왔다. 삼국의 도움으로 적족을 무찌르고 실지도 회복했다. 이로써 위나라는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위나라는 초구(楚丘)에 도성을 짓고 옛날 제후국의 지위를 찾아 이후로 4백 년 동안 사직을 이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위나라의 부흥은 허목부인의 적극적인 행동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허목부인의 시는 강렬한 애국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현재 우리들은 허목부인의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3편의 시를 시경에서 읽을 수 있다. 그 세 편의 시는 위풍(衛風)의 《죽간(竹竿)》、패풍(邶風)의 《천수(泉水)》、용풍(鄘風)의《재치(載馳)》등의 모두 12장이다. 《죽간(竹竿)》의 내용은 허목부인이 허나라에 시집가서 소녀시절 자랐던 위나라의 산천과 자기를 길러주신 부모와 고국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다. 《천수(泉水)》는 조국을 구하려는 급한 마음에 기 위해 분주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녀의 걱정을 호소했고 재치는 위나라로 가려는 절박한 마음을 토로한 시다. 시의 내용은 그녀가 조국으로 돌아가 적족의 침략을 받은 위나라의 군신들과 함께 대항하려는 그녀를 제지하려는 행위에 대해 분개했으며 또한 조국을 위해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현장으로 달려가는 초지일관된 마음을 표현했다.


시경 용풍-재치를 지은 시인으로써의 허목부인


중국 역사상 최초의 시가집 《시경(诗经)》중에서 《재치(載馳)》애국심으로 충만한 격정적인 시다. 작자 허목부인은 역시 중국 역사상 최초이 애국 여시인이다. 재치는 허목부인의 애국심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춘추시대 제후국 사이에 존재하는 약육강식과 약탈쟁패의 사회현상을 폭로했다.

허목부인의 출신은 비교적 복잡하다. 그녀는 위나라의 정치의 격변하는 와중에 태어났다. 그녀의 모친은 역사상 유명한 패륜을 저지른 제나라 공녀 출신의 미녀 선강(宣姜)이다. 미녀는 위험하다는 뜻의 홍안화수(红颜祸水)와 같아 아름다운 여인이 나라를 그르친 중국역사에서 있어서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났듯이 선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미모는 중국 역사상 4대 미녀와 비교해서 손색이 없었고, 또한 서시(西施) 보다 수백 년 전의 시대에서 역사에 끼친 영향은 4대미녀가 끼친 해악에 못지않다. 선강은 결코 역사상 몇 명 안 되는 절세미녀라는 칭호를 얻기에 부족하지 않은 미녀임에 틀림없다. 선강은 원래 위선공(卫宣公)의 아들인 태자의 부인으로 제나라에서 데려왔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는 위선공으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부인으로 삼게 하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일로 인해 위나라는 몇 십년 간 정치적인 혼란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 사건은 《춘추좌전(春秋左传)》、《사기(史记)》등에 모두 기재되어 있으며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위나라의 선강이 태자를 음해하여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수(壽)를 대신 세우려고 획책했다. 비밀리에 장사들을 모집해서 태자를 죽였으나 그 와중에 수도 함께 죽고 말았다. 위나라는 과연 선강의 란으로 위험에 빠져 5대에 이르기까지 혼란 상태를 계속되었다. 이는 모두 선강으로 일어난 난리였다.

선강이 음모로 태자와 그의 아들 수가 죽자 격노한 위선공의 동생인 좌우공자는 정변을 일으켜 선강의 아들 위혜공(衛惠公)을 축출하고 선공의 다른 아들 검모(黔牟)를 국군으로 세웠다. 선강의 부친 제희공(齐僖公)이 제노(齐鲁) 연합군을 결성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여 좌우공자를 잡아 거열형에 처하고 제라에 망명하고 있던 위혜공을 복위시켰다. 그때는 이미 위선공이 죽었음으로 제희공은 위나라의 구 귀족들과 관계를 개선하여 위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목적으로 선강과 소백(昭伯)을 강제로 동침시키고 부부사이가 되게 했다. 소백은 위선공의 배다른 아들이다. 즉 선강 때문에 부인의 자리에서 폐위된 이강(夷姜) 사이의 아들이다. 선공과 이강은 태자 급자와 검모 소백 세 아들을 두었었다. 즉 선강은 소백에게 서모에 해당한다. 그래서 소백은 선강을 부인으로 맞이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제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여 서모인 선강과 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세 아들과 두 공주를 낳았다. 첫째 아들은 어려서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은 위의공(衛懿公)의 뒤를 이은 대공(戴公)이고 막내는 위문공(衛文公)이다. 그리고 큰 딸은 송환공의 부인이며 송양공의 친모인 송환부인이며 둘째 딸이 바로 허목부인이다.


제희공에 의해 복국된 위혜공은 그후 얼마 못 살고 죽고 그의 아들 위의공(衛懿公)이 뒤를 이었다. 완물상지(玩物丧志)와 호학망국(好鶴亡國)라는 성어는 위의공으로 인해 생긴 성어다. 군주의 자리에 오른 위의공은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오로지 학만을 기르는데 국고를 물쓰듯이 낭비했다. 기원전 660년 적인(狄人)이 위나라를 침략해 오자 군사로 동원된 백성들이 모두 말했다.

「군주께서는 학을 보내 적인(狄人)을 막으라고 하십시오!」

그래서 위의공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가 적인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적인에게 사로잡힌 두 태사(太史)가 적주(狄主)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제사를 주관하고 있는 태사인데 만일 우리들을 놓아주면 우리 위나라의 신령에게 고해 당신들이 우리 위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소!」

두 사람의 말을 믿은 적인들은 그 들을 석방했다. 두 사람의 태사는 위나라 도성으로 들어가 그 즉시 피난 준비를 시켰다. 위나라의 피난민 뒤를 추격한 적인들은 모두를

적인들은 위나라 사람들을 전부 국경 밖으로 쫓아낸 것을 아쉬워하는 사이에 조읍(漕邑)에 읍민 730명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위나라로부터 난을 피해 도망쳐온 5천여 명의 백성들은 대공을 위나라 군주로 추대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대공이 죽었음으로 문공이 뒤를 잇고 제나라의 도움으로 초구(楚丘)로 도성을 옮겨 비록 잠시나마 나라의 안정을 되찾아 마침내 망국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


위나라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은 이미 허목부인으로 하여금 밤을 새워 잠도 못자고 안절부절했으며 이윽고 적인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시라도 위나라의 운명을 걱저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위나라 대부들이 천리 길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와서 선강의 부고와 함께 위나라는 적인에 의해 함락당하고 국군은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못 이겨 허목공을 향해 자신이 위나라에 가서 문상을 해야 하겠다고 청했다. 허목공과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실은 허목공은 부인이 위나라에 돌아가라고 허락할 만큼 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허목부인은 허목공의 허락에 관계없이 위나라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로써 만세에 전해지게 될 《재치(载驰)》라는 시가 탄생했다. 재치라는 시는 그와 같은 슬프고 비참한 상황 하에서 걱정스럽기도 하고 격앙되기도 한 심적으로 복잡한 상태에서 분출된 것이다.


1. 泉水(천수)

- 샘물 -




毖彼泉水 亦流于淇(비피천수 역류우기)

졸졸 솟은 샘물은 기수로 흐르는데



有懷于衛 靡日不思(유회우위 미일불사)

그리운 고국 위나라를 하루인들 잊을 손가!


孌彼諸姬 聊與之謨(연피제회 요여지모)

아름다운 저 몸종들과 함께 의논해보세!

흥(興)이다. 비(毖)는 샘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모양이다. 泉水(천수)는 지금의 衛州(위주) 共城(공성)의 百泉(백천)이고 淇水(기수)는 相州(상주) 林慮縣(임려현)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위나라의 서울 기(淇)를 지나 황하와 합해진다. 泉水(천수)는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淇水(기수)의 지류다. 孌(연)은 예쁜 모양이다. 諸姬(제희)는 시집올 때 모국에서 데려온 몸종들이다.

○ 제후(諸侯)에게 시집간 위나라 공녀가 돌아가신 부모가 생각나 고국에 가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으므로 이 시를 지었다. “ 졸졸 흐르는 샘물도 또한 기수(淇水)로 흘러들어가지만 고국 위나라를 그리워한 나는 하루라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이 때문에 몸종들과 함께 의논하여 위나라에 갈 방법을 도모해본다. ”



出宿于泲 飮餞于禰(출숙우제 음전우예)

제수(泲水)에서 묵고 예(禰) 땅에서 헤어졌지


女子有行 遠父母兄弟(여자유행 원부모형제)

여자 한 번 시집가면 부모형제와 멀어지니



問我諸姑 遂及伯姊(문아제고 수급백자)

여러 고모님, 큰 언니 소식도 궁금하구나!


부(賦)다. 泲(제)는 땅이름이나 불상(不詳)이다. 혹자는 노시(魯詩)에 제(濟)로 되어 있으니 제수(濟水)를 말한다고 했다. 음전(飮餞)이란 옛날에 시집가는 여인은 반드시 조도(祖道)라는 제사를 지내야 했다. 제사가 끝나고 길을 떠날 때 전송하러 나온 자들은 제사 음식으로 술을 마시며 시집가는 여인을 보내는 예법이다. 미(禰) 역시 위나라의 지명이다.

○ “ 처음 시집왔을 때에 진실로 부모형제(父母兄弟)와 멀어졌다. 하물며 지금은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제고(諸姑)와 백자(伯姊)에게 물은 것이다. ”

정씨(鄭氏)가 말했다. “ 국군(國君)의 부인(夫人)이 부모가 계시면 귀녕하고, 돌아가시면 대부를 시켜서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



出宿于干 飮餞于言(출숙우간 음전우언)

간 땅에서 잠을 자고 언땅에서 작별주 마셔



載脂載舝 還車言邁(재지재할 환거언매)

수레바퀴 달아 기름치고 수레 돌려 달려가면



遄臻于衛 不瑕有害(천진우위 불하유해)

단숨에 위나라에 당도할 텐데, 혹시라도 잘못 아닐까?


부다. 간(干)과 언(言)은 지명이니, 위나라로 갈 때 경유하는 땅이다. 지(脂)는 기름으로 그 걸쇠를 칠해서 활택(滑澤)하게 함이다. 할(舝)은 수레의 속바퀴이니, 멍에하지 않았을 때에는 벗겨두었다가, 설치한 뒤에 간다. 환(還)은 돌아감이니 시집올 때 수레를 돌리는 행위다. 천(遄)은 빠름이요, 진(臻)은 이름이요, 하(瑕)는 하(何)이니, 옛날에는 음이 비슷하여 통용했다.

○ “위나라에 빨리 이르는 일이 어찌 의리에 해롭지 않으랴?”라고 한 말은 의심하여 감히 이루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我思肥泉 玆之永歎(아사비천 자지영탄)

내가 비천을 생각해서 이에 길게 탄식한다.



思須與漕 我心悠悠(사수여조 아심유유)

수 땅과 조 땅을 생각하니 내 시름 끝이 없네



駕言出遊 以寫我憂(가언출유 이사아우)

수레 타고 유람나가 내 근심 떨쳐볼까?

부다. 비천(肥泉)은 물이름이다. 수(須)·조(漕)는 모두 위(衛)나라의 읍(邑) 이름이다. 유유(悠悠)는 생각을 길게 함이다. 사(寫)는 쏟음이다.

○ 이미 감히 돌아갈 수 없으나, 위나라 땅을 그리워하여 결코 잊지 못하니 어찌 저곳에 나아가 놀면서 그 정(情)을 쏟아버릴까.


泉水 四章이니, 章 六句이다.


송인 양시(楊時)가 말했다.

“ 위나라 여인이 돌아가려고 생각하는 것은 정 때문이고 그러나 결국 돌아가지 않았음은 예의를 밝혀서이다. 성인(聖人)이 이 일을 경서에 나타내어 후세에 보여 다른 나라에 시집간 여인은 모두 부모가 돌아가시면 문안을 묻기 위해 친정에 돌아간다는 예법은 없다고 밝히셨으니 스스로 사욕을 이겨 낼 자가 처할 바를 알 수 있음이다.”



2. 竹竿(죽간)

- 낚시대 -




籊籊竹竿(적적죽간)

휘청대는 낚시대로



以釣于淇(이조우기)

기수 가에서 낚시하네


豈不爾思(기불이사)

그대가 그립지만



遠莫致之(원막치지)

너무 멀어 갈 수 없네


부(賦)이다. 籊籊(적적)은 긴 대나무가 끝에 이르러 휘청거리는 모습이다. 竹(죽)은 위나라 기수 강변에 우거진 대나무다.

○ 제후에게 시집간 위나라의 공녀가 친정에 한 번 가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해 이 시로 그 마음을 노래했다. 휘청거리는 대나무를 잘라 낚시대로 만들어 淇水(기수)에서 낚시하며 너무 멀어 갈 수 없는 고향을 생각했다.


泉源在左(천원재좌)

천원의 물은 왼쪽으로 흐르고


淇水在右(기수재우)

기수는 오른쪽으로 흐르네



女子有行(여자우행)

여인은 한 번 시집가면



遠父母兄弟(원부모형제)

부모형제와는 멀어지네


부(賦)다. 천원(泉源)은 바로 백천(百泉)이니, 위나라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기수(淇水)에 유입한다. 그래서 왼편에 있다고 했다.

○ 천원과 기수 두 강은 여전히 위나라에 흐르고 있으나 정작 자신은 위나라를 떠나 있음을 탄식했다.


淇水在右(기수재우)

기수는 오른쪽으로 흐르고


泉源在左(천원재좌)

천원은 왼쪽으로 흐르네


巧笑之瑳(교소지차)

생긋 웃는 그대 얼굴


佩玉之儺(패옥지난)

으젓한 걸음마다 패옥소리 요란하다.


부(賦)다. 차(瑳)는 선명한 하얀 색이다. 웃으면서 보이는 치아는 그 색이 흰 백옥 같으니 모두 환하게 웃는다고 여긴다. 나(儺)는 걸음걸이에 법도가 있는 모습이다.

○ 앞 장에 이어서 천수와 강수 두 강물이 위나라에 여전히 흐르고 있지만 스스로 웃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즐겁지 않음을 한탄했다.


淇水滺滺(기수유유)

기수는 도도히 흐르고


檜楫松舟(회즙송주)

전나무 돛을 단 소나무 배


駕言出遊(가언출유)

수레타고 나가 놀며


以寫我憂(이사아우)

이 내 시름 씻어나 볼까?


부(賦)이다. 유유(滺滺)는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다. 회(檜)는 잣나무다. 즙(戢)은 노를 저어 배를 나아가게 함이다.

○ 「천수(泉水)의 마지막 장과 같은 뜻이다.


竹竿 四章이니, 章 四句이다.





3. 재치(載馳)

- 수레를 달려라! -

위의공(衛懿公)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학을 키우는 일에만 몰입하다가 적인(狄人)의 침략을 받았다. 위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잃어 군사를 동원할 수 없었던 위의공은 적인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허목부인의 제부(弟夫) 송환공(宋桓公)이 황급히 조읍(漕邑)으로 나아가 위의공의 아들 대공(戴公)을 위후로 세웠다. 다음해 대공이 죽자 문공(文公) 훼(毁)가 뒤를 이었다. 대공과 문공 및 허목부인은 동모 형제자매들이다. 외적의 침입으로 의공은 살해되고 다시 대공마저 즉위하자마자 죽고 새로운 군주가 다시 선 위나라의 정세는 바야흐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유독 고국을 사랑했던 허목부인은 타는 듯한 아픈 마음으로 수레를 몰아 위나라를 향해 달려갔다.



載馳載驅 歸唁衛侯(재치재구 귀언위후)

수래를 달리고 또 달려 위후를 위로하려 가노라!



驅馬悠悠 言至於漕(구마유유 언지어조)

내 말은 유유자적, 언제나 조읍(漕邑)에 당도할거나?


大夫跋涉 我心則憂(대부발섭 아심즉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온 대부들 내 마음 때문에 근심하네

부(賦)다. 재(載)는 칙(則)이다. 망국의 군주에게 조문하는 것을 언(唁)이라 한다. 유유(悠悠)는 멀어서 이르지 못하는 모습이다. 풀섶을 헤치고 길을 가는 행위를 발(跋)이라 하고 강과 개천을 건너 길을 가는 행위를 섭(涉)이라 한다.

○ 선강(宣姜)과 공자석(公子碩) 사이에 태어난 딸이 허목공(許穆公)의 부인(夫人)이 되었다. 위나라의 멸망을 슬퍼한 허목부인은 수레를 빨리 달려 【치구(馳驅)】조읍(漕邑)으로 들어가 위후를 위로하려고 했으나 미처 당도하지 못했다. 이에 발섭(跋涉)하여 따라온 허나라 대부가 보니 부인에게는 장차 허나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알고 이를 매우 근심했다. 허목부인은 마침내 허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이 시(詩)를 지어서 스스로 그 뜻을 말했다.



旣不我嘉 不能旋反(기불아희 불능선반)

이미 나를 좋게 여기지 않아 돌아갈 수 없네



視爾不臧 我思不遠(시이부장 아사불원)

그대가 좋지 않게 여기나 내 생각은 변함이 없고



旣不我嘉 不能旋濟(기불아가 불능선제)

이미 나를 좋지 않게 여기지만 물을 건너 돌아갈 수 없도다.



視爾不臧 我思不閟(시이부장 아사불필)

그대가 날 좋지 않게 여기나 내 생각은 그치지 않으리


부(賦)다. 가(嘉)·장(臧)은 모두 선(善)함이다. 원(遠)은 잊음과 같다. 제(濟)는 건넘이니, 허(許)땅으로부터 위(衛)에 돌아간다면 반드시 건너야 할 물이 있다. 피(閟)는 가림이나 그침이니, 생각이 그치지 않음을 말한다.

○ “ 대부가 이미 이르러 과연 내가 돌아가는 것을 선하다 여기지 않으니 나 또한 능히 길을 돌려 건너가서 위나라에 이를 수 없다. 비록 그대에게 내가 좋게 여겨지지 않았으나 내 생각은 그치지 못하겠다. ”


陟彼阿丘 言采其蝱(척피아구 언채기맹)

저 아구(阿丘)에 올라 패모초를 캐리라



女子善懷 亦各有行(여자선회 역각유행)

여인은 생각이 많아, 갈 길이 각각이거늘


許人尤之 衆穉且狂(허인우지 중치차광)

허나라 사람 나를 걱정하지만 사람들은 유치하고 미쳤구나!


부(賦)다. 한 쪽으로 치우친 언덕을 아구(阿丘)라 한다. 맹(蝱)은 패모(貝母)라는 약초이니 우울증을 치료한다. 선회(善懷)는 근심과 생각이 많음이니, 행(行)은 길이요 우(尤)는 허물이다.

○ “ 이미 위나라에 갈 수는 없게 되었으나 그리움만은 끝내 그칠 수 없다. 그래서 길에 있을 적에 혹은 높은 곳에 올라 우상(憂想)의 정(情)을 펴고 혹은 맹(蝱)을 주우면서 우울증을 고친다. 아마도 여자가 선회(善懷)하는 것에는 각기 도(道)가 있는 법인데 허나라의 중인(衆人)들이 과하다 했으니, 나이가 어려 어려운 일을 겪어보지 않아서 광망(狂妄)한 사람일 뿐이다. 허나라 사람들이 예를 지키니 유치하거나 광망한 바가 아니요, 다만 자기의 정이 간절하고 지극하지 않아 이런 말을 했음이다. 결국 내 뜻을 감히 꺾지 못하니, 어찌 진실로 어리석고 광망하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했다.



我行其野 芃芃其麥(아행기야 범범기맥)

나 들판에 나가보니 보리는 무성하여 더북하다.


控于大邦 誰因誰極(공우대방 수인수극)

큰 나라에 고하고자 하니 누구를 통해 누구에게 갈까?



大夫君子 無我有尤(대부군자 무아유우)

대부들아 군자들아, 내 허물있다 하지 마오



百爾所思 不如我所之(백이소사 불여아소지)

내 생각은 백가지나 내가 가는 것만 못하리!


부(賦)다. 봉봉(芃芃)은 보리가 성장(盛長)하여 무성한 모습이다. 공(控)은 가지고 가서 하소연함이다. 인(因)은 위장자(魏莊子)와 인연이 있음을 말한다. 극(極)은 이름이다. 대부는 바로 발섭(跋涉)한 대부요 군자는 허나라 중인들을 말한다.

○ “ 돌아갈 길이 밖에 있어 봉봉(芃芃)한 보리밭을 건너면서 허나라가 작고 힘이 없어 친정 위나라를 구할 수 없음을 상심했다. 그래서 대국을 붙잡고 하소연하려고 하지만 장차 어느 곳을 인연하여 어디에 이를지 알지 못한다. 대부와 군자는 나를 지나치지 말지어다. ”라 한 것이다.


역자 주

《재치(載馳)》가 허목부인의 작품이라는 설은 시경학계가 대체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천수(泉水)》와 《죽간(竹竿)》도 허목부인의 작품이라는 설은 소수설로 대표적은 학자는 청나라 때의 시경학자 하해(何楷)와 위원(魏源)으로 그들은 《시경세본고의(詩經世本古義)》와 《시고미(詩古微)》에서 각각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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