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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4 08:04:002465 
기원전 494년 부초지전고(夫椒之戰考)
운영자

부초지전(夫椒之戰)


1. 원인

기원전 494년에 일어난 오월의 부초지전은 기원전 496년 취리(欈里)의 싸움에서 패전하고 생명을 잃은 오왕 합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한 전쟁이라는 설은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다. 《월절서(越絕書)》권6에 “ 옛날, 오왕 부차가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정벌했다.”라는 기사가 있으나 《국어(國語)·월어(越語) 하(下)》에는 “월왕 구천이 즉위한 지 3년이 되자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여.....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패주하여 회계로 들어가 농성했다.”라고 했다. 《사기(史記)》의 기술은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데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오왕이 정예병을 모두 이끌고 출전하여 부초에서 월군을 무찔렀다.”라고 기록했으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는 “오왕 부차가 밤낮으로 군사들을 조련시켜 월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은 오나라가 먼저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려고 했다.”라고 기술했다. 실제로 부초지전의 발생과정은 사적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국어(國語)》에 의하면 범려(范蠡)는 합리적인 주장을 펼쳐 구천의 군사행동을 반대하며「불가합니다. 신이 듣기에 군사란 흉기와 같아 싸움을 구하는 자는 덕에 역행하는 일이라, 먼저 행하고자 다투는 일은 가장 저급한 수단입니다. 음모를 꾸며 덕행에 역행하고, 흉기에 해당하는 군사의 일을 즐겨하며, 몸소 저급한 일에 몸을 담는 일은 상제가 금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결코 이롭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구천은「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마음을 결정했소!」라고 하며 범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 기사는 군사를 동원하여 일으키는 전쟁은 덕행에 역행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늘이 허락하지 않아 장차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범려의 사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구천은 범려의 간함을 듣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사기(史記)》를 정독해보면 서로 모순된 곳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의 “벌월(伐越)” 즉 오나라가 월나라를 정벌했다는 기사와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의 “슬발정벌격월(悉發精兵擊越)” 즉 나라 안에 정예병을 모두 일으켜 월나라를 공격했다는 기사다. 《월절서(越絕書)》의 “吳王夫差興師伐越”의 “벌월(伐越)” 기사는 부초의 전투 이전에 군사를 동원하여 정벌했다는 말이 아니라 부초의 전쟁에서 월군을 대파하여 승세를 타고 패주하는 월군의 뒤를 쫓아 월나라 땅으로 진군했기 때문에 “吳伐越”라고 했지 “越伐吳”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초지전은 확실히 월나라가 오나라를 선제공격한 전쟁이며 단지 전투가 벌어진 후에 월군이 싸움에서 지고 오군이 패주하는 월군의 뒤를 쫓아 월나라 당으로 진공했음으로 사람들에게 ‘오벌월(吳伐越)’이라는 착시현상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2. 부초의 지리적 위치

부초의 지명에 관하여는 일반적으로는 태호의 초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오지기(吳地記)》에 말하기를 “포산(包山)、부초산(夫椒山)、동정서산(洞庭西山) 등의 이름은 모두 부초를 말한다.”라고 했다. 부초산(夫椒山)은 즉 초산(椒山)은 동정서산(洞庭西山)으로 태호의 섬 위에 솟아 있는 산이다. 부초지전은 초산 주위의 수상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금인 몽문통(蒙文通)은 이 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초지전은 수전으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즉 부초산록 일대의 호수 위에서 벌어졌지 부초산 위에서 벌어진 싸움이 아니다.”라고 했다.

오월전쟁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여러 차례 오나라를 공격했던 월군은 언제라도 기습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나라보다 국력에 있어서 열세였던 월나라가 북을 두드리며 요란하게 쳐들어가 정면으로 싸웠을 경우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기습은 월나라로써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초의 전쟁은 곧 월군이 기습작전을 펼쳐 선제공격한 전쟁으로써 부차가 오자서에게 명하여 태호에서 수군을 훈련시키자 구천은 오나라를 기습하여 일거에 오나라의 수군을 분쇄시킨 후에 동진하여 고소성을 압박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초산 일대의 수역은 합려도 일찍이 고소성의 방위에 중요한 전략상의 요지로 중시하고 있었다. 자만심으로 교만해진 구천은 맹목적으로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나라 수군의 매복전에 걸려 참패하고 말았다.

부초지전은 또한 오호지전(五湖之戰)이라는 설도 있다. 《국어(國語)·월어(越語)․下》에 구천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여 오호(五湖)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패잔병을 이끌고 회계산으로 들어가 농성했다는 기사가 있다. 《월절서(越絕書)》8권에 “태호의 넓이는 3만 6천 경(頃)으로 오호(五湖)라고도 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 곽박은 태호의 둘레는 5백리에 달했기 때문에 오호라고 불렀다고 했다.


3. 월군의 진군로선

선박을 이용한 월군의 기습로선은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취리(欈里)의 싸움 때 월군이 취했던 로선으로써 통릉강(通陵江)을 따라 오월의 국경을 갈랐던 지금의 절강성 동향시(桐鄕市)인 어아(御兒)와 취리(槜李) 일대를 지나 입택(笠澤)에서 방향을 바꿔어 태호(太湖)로 진입한 소위 통릉강선(通陵江線)이고 다른 하나의 설은 전당강(錢塘江)을 경유 초수(苕水)로 진입하여 북상하여 태호로 들어간 일명 초수선(苕水線)이다. 당시 전당강 이북의 절강성 수상교통로를 설명하는 기록에 따르면 천목산(天目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항주 서쪽의 여항(余杭)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초수(苕水)는 호주(湖州) 시의 북쪽에서 태호로 진입했다. 초수는 당시 전당강과 태호를 연결하는 수상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당시 월군이 통릉강선을 이용하여 오나라로 진군한 것은 불가능한 작전이었으며 초수선은 통릉강선보다 이동거리가 비교적 가까웠으며 더욱이 북쪽으로 흘러 태호로 들어가는 초수의 순류를 탈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나라의 남쪽 국경지대에 월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장성(長城 : 지금의 절강성 長興市)、하고성(下菰城: 지금의 湖州市 道場鄕) 등의 방어를 위한 성읍을 건설하여 월나라의 침입에 대비했으나 통릉강선의 방어시설에 비해 비교적 취약한 면이 있었다. 통릉강로선을 따라 우회하게 될 경우 오나라의 심장부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월군이 고소성에 접근하기 전에 발견되지 않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또한 오나라의 고소성은 태호를 동쪽으로 끼고 있고 서쪽에는 笠澤江으로 바다와 통했음으로 만약 월군이 통릉강을 경유하여 진군할 경우 고소성의 바로 남쪽에 이르게 되어 타격목표인 고소성에 곧바로 닿기 때문에 일부러 서쪽으로 진군방향을 돌려 태호 내의 도서에 솟아있는 부초산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월군이 만약 초수를 따라 북상하여 고소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태호의 동정서산 즉 부초산 주위의 수면을 지나가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월나라의 군사력은 오나라에 비해 절대적으로 약세였기 때문에 만인이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오나라를 쳐들어가는 군사행동은 위험부담이 큰 작전이었다. 그래서 구천은 초수강의 순류를 타고 태호로 진입하여 고소성의 서쪽으로 나아가 기습하려고 했다. 구천의 작전은 일종의 출기불의(出其不意) 작전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오나라는 미리 월나라에 원수를 갚기 위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기 때문에 월군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오군의 반격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紹興市)인 월나라 도성인 회계에서 절강까지의 행군로선은 취리지전 때의 행군로선과 서소강(西小江)에서 당시 최대의 군항이었던 고릉(固陵)까지의 수로는 대체적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월군이 부초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패주할 때도 같은 로선을 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고릉은 지금의 소산시(蕭山市) 경내로 전단강 남안에 건설된 월나라의 군항이다. 부초지전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여러 개의 소규모 전투가 합쳐저 대형전투로 발전된 경우이며 전투의 시발점은 태호의 도서에 솟아있는 부초산 수면상에서 시작되어 점점 전장은 남쪽으로 이동되어 곧바로 전단강으로 발전되었다. 태호로 무사히 진입한 구천의 월나라 수군은 잠복해있던 오군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참패하고 전당강으로 퇴각한 후에 석매를 장수로 삼아 패잔병을 다시 수습하여 오군에게 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사들을 가혹하게 다루어 군심을 얻지 못한 석매는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다. 《월절서(越絕書)》는 단지 “절강의 강물 위에서 싸웠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전술한 근거에 따라 월나라의 북변을 지키는 성보(城堡)와 수군의 영채는 고릉에 있었으며 그런 이유로 인해 고릉 일대의 전당강에서 수전이 벌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동시에 부처지전에 이어서 다시 “ 포양(浦陽)에서 군대를 잃은 구천이 이곳에서 난관에 빠졌다.”라는 기사의 포양은 바로 포양강(浦陽江)을 말한다.《월절서(越絕書)》에서 말하는 “포양(浦陽)”은 당연히 동한 때부터 시작된 명칭이고 춘추 때는 “서소강(西小江)”이라고 불렀다. 즉 월군은 포양강을 따라 퇴각했다고 하나 진군할 때와는 완전히 일치하는 로선이 아니었을뿐만 아니라 퇴각할 때 주변의 중요한 수로와 군사기지를 거점으로 맹렬한 저항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역시 서소강은 월나라의 중요한 군사시설이라고 이라고 할 수 있다.

상기의 기록을 참고하여 부초지전 때 월군의 진군로선을 개괄해 보면 지금의 항주시 소산구 임포진(臨蒲鎭)의 비중(埤中)을 출발하여 서소강(西小江)의 수로를 이용하여 고릉(固陵)에서 전단강으로 들어가 북상하여 여항(余杭)에서 초수로 진입하여 북쪽으로 호르는 순류를 타고 태호로 들어가 서동정산의 초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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