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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29 15:32:082987 
임성삼의 춘추강독
운영자

춘추강독(春秋講讀)


공자는 '춘추'를 짓고 나서 "후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는 것도 이 춘추를 통하여고, 비난하는 것도 춘추를 통하여 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디지탈세계대백과사전의 '춘추(春秋)'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춘추(春秋)는 중국 최초의 편년체 역사서이며,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BC722)에서 애공(哀公) 14년(BC481)에 이르는 12공 242년 동안의 일들을 1800여 조(條) 1만 6500자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다룬 시기를 춘추(春秋)시대라고 부른다.」

(이 다음 진시황이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전국책(戰國策)에서 다루었으므로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몇 주일 후에 전국책을 소개하려 한다.)


춘추에서는 공자가 독자적인 역사의식과 가치관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예를 들면 침략의 경우에는 침(侵)·벌(伐)·입(入)·취(取)로 구분하는 등 용어와 서술방식에 일정한 원칙이 있었다. 이와 같이 《춘추》는 특정한 뜻을 가진 많은 용어가 쓰였고, 내용이 매우 간단하게 기록되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파악하기 위하여 한(漢)나라 때 춘추학(春秋學)이 생겼고, 전국시대의 공양고(公羊高)·곡량적(穀梁赤)·좌구명(左丘明) 등은 전(傳;해석)을 지어 원 뜻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특히 이들 3사람이 지은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씨전(左氏傳)》을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한다. 《공양전》 《곡량전》은 직접적인 경문 해석 중심이고, 《좌씨전》은 기록된 사실과 그에 관련된 사실(史實)을 통한 역사적·실증적 해석이 중심이다. 태학(太學)의 교재로 서로 우열을 다투었으나, 후한(後漢)말 이후에는 《좌씨전》이 가장 널리 쓰였다.


춘추좌전은 분량이 많아 이성규 편역인 삼성문화문고 138 권, 좌전선(選)의 III 장 "이상과 현실"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내용


춘추의 첫 부분 몇 줄을 먼저 소개한다.

은공 <隱公> 元年春, 王周正月

[춘추]; 원년 봄, 주왕의 정월,

[역자 주(註); 주왕의 정월이라고 적은 것은 노나라가 주 왕조의 역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인 것이다. 이는 노나라가 주 왕조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새 군주가 시작되면 반드시 즉위하였다는 말이 있어야 하나 여기에 적지 않았다. 이것은 은공의 즉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三月, 公及 儀父盟于滅

[춘추]; 삼월, 공은 주자(邾子)의 '의보'와 '멸'이라는 곳에서 회맹(會盟)을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공'은 노은공(魯隱公)을 말한다. 위의 글이 공자가 적은 '춘추'의 내용이다. 이것만으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므로 좌구명이 아래의 해석을 붙였다.]

― 子克也. 未王命, 故不書爵. 曰, "儀父", 貴之也

[좌씨의 해석]; 주(邾나라의 군주 주자(邾子)의 이름은 극이다. 시호가 없으므로 그 작위를 부르지 않고 '의보'라고 불렀다. ('의보'라고 그의 자(字)로 부른 것은) 그를 높인 것이다.

[역주; '의보'는 주나라의 군주이나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주왕(王周)의 왕명(王命)을 정식으로 받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이름만 적은 것이다..]


公攝位而欲求好於 , 故爲蔑之盟.

좌씨의 해석; 은공은 새로 위에 올랐으므로 주나라와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했으므로 '멸(蔑)' 땅에서 맹약을 행한 것이다.


夏五月, 鄭伯 克段于鄢

[춘추]; 여름 5 월, 정백(정나라의 군주, 백작이므로 정백)이 '단'을 언(鄢)이라는 곳에서 이겼다.

[역주; 단은 정백의 아우이다. 둘 사이에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싸움이 있었다.

이 경우 통상적으로는 "나라에서 반역도를 처벌하였다"라고 적는다. 그러나 정백이라고 적은 것은 정나라의 군주도 옳지 않은 점이 있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단' 역시 아우로서 잘 못한 일이 있었으므로 '아우'라는 말을 적지 않았다. 즉 공자(孔子)는 정백에게 어긋남이 있음과 동시에 단의 패역함을 함께 적은 것이다. 또한 토벌이나 처벌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극(克)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단'도 큰 도읍을 다스리고 있어 정백에 필적할만 했기 때문이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역주는 매우 축약해서 적은 것이다. 정백과 그 아우의 이야기는 적어도 책의 두 면이 넘는다. 논어 자체에는 한 줄에 완벽한 표현으로 모든 사리판단을 다 적기는 하였으나 우리로서는 해석이 없이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압축적이며 명확한 표현들이 중국의 역사를 적는 모범으로 수천 년간 이어졌다. 이와 달리 유럽의 첫 역사책인 헤로도투스의 "역사"는 신화가 섞인 단순한 이야기책이다. 연도마저 적지 않았다.]


秋八月, 天王使宰咺 來歸惠公,仲子之 .

[춘추]; 가을 7 월 천왕이 재상인 咺(원)을 보내어 혜공과 중자의 봉(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예물)을 주었다.

[임성삼의 주(註); 춘 3 월, 추 8 월 등으로 사건의 기록을 시작한 것에서 춘추(春秋)라는 제목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주(註); 이 때 혜공을 위해서는 이미 늦었었고, 중자는 살아 있었으므로 너무 이른 때였다. 두 가지 모두 예절이 아니었으므로 사자의 본명인 '훤'을 적어 이를 비판한 것이다.]


緩, 且子氏未薨, 故名. 天子七月而葬, 同軌畢至; 諸侯五月, 同盟至; 大夫三月, 同位至; 士踰月, 外姻至. 贈死不及尸, 弔生不及哀, 豫凶事, 非禮也.

[임성삼의 주(註); 위의 춘추에 대한 좌씨의 설명]

[임성삼의 이야기; 춘주좌씨전의 첫 부분을 소개하였다. '춘추'는 그 시대의 모든 사항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이해가 불가능하고, 좌씨전은 설명이 매우 긴 부분이 많아, 많은 노력 없이는 읽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매우 의미가 깊고, 재미있는 일부분만을 추려서 아래에 소개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춘추에는 거의 없고, 좌씨가 붙인 것이 대부분이다.]


1. 불후(不朽)의 가치


노나라의 목숙(穆叔)이 진(晉)나라에 갔을 때 범선자(范宣子)가 그를 영접하며 물었다.

"<죽은 후에도 썩지 않는다(불후(不朽))>는 옛사람의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목숙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범선자가 말했다.

"옛날 우리 집안의 조상은 요임금 시절에는 도당씨였으며, 하나라 시기에는 어룡씨, 상나라에서는 시위씨, 주나라 시대에는 당두씨가 되었고, [우리] 진(晉)나라가 중국의 맹주가 된 이후에는 범(范)씨가 되었습니다. [불후란] 이같은 [집안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임성삼의 주(註); 기원전 549 년의 일이다. 요임금이 단군과 같은 기원전 2300 년 경의 사람이니 범선자는 그 당시 1750 년을 내려온 자기 집안을 자랑하고 있다.]


목숙이 대답하였다.

"제가 알기로는 그것은 가문대대의 복이지 불후(不朽)한 것은 아닙니다. 노나라의 대부(大夫) 중에는 장문중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으나 그분의 [좋은] 말씀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썩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최상의 불후는 덕(德)을 세우는 것이며, 그 다음이 공(功)을 세우는 것이고, 그 다음에 세상에 말을 남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폐절(廢絶)되지 않는 이 세 가지를 불후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姓)을 유지하고 씨(氏)를 계승하여 가묘(家廟; 사당 묘)를 지키며 대대로 제사가 끊기지 않는 것은 어느 나라에도 다 있는 일입니다만, 그것은 큰 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불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노양공(魯襄公 : 재위 572 - 542) 24년 : 전 549 년



2. 다수(多數)와 선(善)


[몇 나라가 관련된 복잡한 상황이 벌어져 진(晉)나라 대부 범무자(范武子 : 士會="隨會)가" 출전하자 상대편 초나라가 후퇴하여 전투 상황이 끝났으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상대방인 초나라와의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그들의 의견에 따라 진(晉)나라의 대부 무자(武子)가 초군을 공격하려고 하자 진나라의 지(智), 범(范), 한(韓)의 세 대부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대하였다.

"이 전쟁을 계속하면 초나라를 이기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초나라가 전체 군대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두 현의 군사만 동원하였으므로 우리가 이겨도 명예가 안 된다. 만일 진다면 이보다 더 큰 수치가 없다. 그로 돌아가는 편이 났다."


범무자(范武子)는 돌아가기로 하였다. 군중(軍中)의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무자(武子)에게 말했다.

"성인(聖人)은 다수의 의견에 따르므로 [항상] 성공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다수의 의견에 따르지 않습니까? 당신은 대권을 위임받은 사람이니 민심을 참작해야 합니다. 당신의 장수 11 사람 중에서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3 사람뿐이니 싸우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서(尙書)에도 '세 사람이 점을 치면 두 사람의 의견에 따른다. 다수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상서의 주서편 홍범)"


그러자 무자(武子)가 대답했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경우에는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법이지만, 현인은 다수의 주인이다. 이 세 사람은 현인(賢人)이므로 다수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은가?" (노나라 성공(成公 590 - 573) 6 년)

[임성삼의 주(註);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여 모든 공직자를 추첨으로 선정하던 아테네도 장군만은 능력있는 사람을 선임하였다.

히틀러는 아인슈타인을 싫어하여 독일의 물리학자 200여 명을 동원하여 상대성이론이 틀리다는 서명을 받아 발표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인슈타인이 말하였다. "내 이론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200 명의 물리학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능력있는 물리학자 단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 역시 전쟁을 다수의 군중심리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다수결이라면 언제나 따라야 한다.]



2. 인신희생(人身犧牲)을 반대


여름에 송(宋)나라의 양공이 작은 나라인 증나라의 군주를 생포하여 토지신에 희생으로 바치도록 하였다. 그것은 동이(東夷)를 복속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것을 듣고 사마자어가 말했다.


"옛날에는 육축(六畜; 소, 말, 돼지, 개, 닭, 양)도 서로 바꾸어 희생으로 쓰지 않았으며, 작은 일에 큰 희생을 쓰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감히 사람을 희생으로 쓰다니! 제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민(民)은 귀신의 주인인데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면 누가 그것을 받겠는가? ... [송양공은] 장차 패자(覇者)가 되려한들 어려울 것이며, 제 명에 죽으면 다행일 것이다."

노희공(魯僖公; 재위 전659 - 627) 19년 ; 기원전 641년


[임성삼의 주(註); 각 문화권에서 어느 시기에 사람을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가를 살피면 그 문화가 성숙하기 시작한 때를 알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때가 기원전 641 년이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480 년 페르시아와의 살라미스 해전 전(前) 날 인신공양을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적혀있다. 로마에서는 조금 더 후까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게르만족은 기원후 500 년 이후에도 계속 인신공양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문화권에서도 위와 같이 명확한 개념으로 사람의 희생에 반대한 내용을 본 적이 없다.]


3. 순장(殉葬)을 반대


진(秦)나라 목공이 죽자 신하인 자거(子車)씨의 세 형제들이 순장되었다. 목공이 죽기 전에 명을 내린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진나라의 인재들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사람들은 슬퍼하며 '황조(黃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군자(君子)가 이를 두고 말했다.

"진목공이 맹주가 못된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죽으면서 백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선왕(先王)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법을 남겼는데, 인재를 빼앗아가다니...시경에 '인재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싯귀는 착한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말한 것이다.어떻게 그들을 빼앗아 간다는 말인가? 설령 법을 후세에 남기지 못할망정, 인재마저 거두어서 같이 죽었으니 군주의 자격이 의심스럽다."

노문공(魯文公; 재위626 - 609) 6년 : 전 621년


[임성삼의 주(註); 역시 각 문화권에서 순장이 없어진 시기도 문화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고 생각한다. 순장을 인재의 손실로 보는 관점이 현대적이다.]


4. 미신에 대한 반대


여름 노(魯)나라에 큰 한발이 들었다. 공이 비를 기원하는 무당을 태워 죽이려 하자 장문중이 반대하였다.

"그것은 한발의 대책이 못 됩니다. 성곽을 수리하고[任註; 빈민 구제를 위한 공사, 이 대가로 정부의 비축 곡식을 주면 빈민의 구제가 된다], 먹을 것을 아끼고 비용을 줄이며,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나누어 먹도록 권장하는 일들이 지금 바로 해야 할 일입니다. 무당이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하늘이 그의 죽음을 원한다면 처음부터 낳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무당이 한발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를 태워 죽이면 더욱 한발이 심해질 것입니다."

노공이 그 말을 따랐다. 그 해에는 기근이 들기는 했지만 백성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노희공(魯僖公) 21년 : 전639년


5. 형법제정을 반대


3 월 정(鄭)나라 사람들이 형벌을 제정하여 정(鼎)을 만들어 새겨 넣었다.

[임성삼의 주(註); 최초로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진(晉)나라 대부 숙향이 정나라의 상경 자산(子産)에게 편지를 보냈다.

" 백성들이 다투는 꼬투리를 알면 예절을 버리고 법조문만 따지게 되며, 송곳이나 칼끝처럼 사소한 일도 다투게 되어 어지러운 소송이 점점 많아지고, [재판을 둘러싼] 뇌물도 아울러 판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 정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반드시 법이 많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의 정나라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겠는가?"


자산은 답장을 보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나 나는 재주가 없어 자손대의 일까지 생각할 수가 없으며, 다만 지금의 세상을 구제하려는 것입니다. 충고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배려는 잊지 않겠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법률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자산의 답장 마지막 말을 살펴보자. 자산은 논어에도 여러 번 나온다.]


6. 위정자의 자격


[송(宋)나라는 정(鄭)나라에게서 말 16 필과 악사 두 명을 뇌물로 받고, 자기 나라에 피난해 온 정(鄭)나라의 사람 3 명을 정나라에 인계해 죽게 하였다. 뇌물로 온 악사 두 명중의 한 사람이 혜(慧)라는 사람이었다. 악사 혜(慧)가 송나라에 와서 궁궐에 입조(入朝)한 후 [그 자리에서] 오줌을 누려하자 안내자가 주의시켰다.

"이곳은 조정이다. [어디서 오줌을 누려 하는가?]"

악사가 대답하였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무슨 조정이냐?"

"이곳이 조정인데 어째서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반드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있었다면 왜 피난해 온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뇌물을 받고서 넘겨주었겠는가? 반드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송나라의 집정 자한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송공에게 청하여 그를 다시 정나라로 돌려보냈다.



7. 상벌(賞罰)의 일관성


주나라의 지방관인 서기가 자기 나라의 두 읍을 가지고 노(魯)나라로 도망왔다. 노나라의 계무자(季武子)는 노(魯)공의 고모를 그의 처로 삼게 하고 그의 종자들에게도 모두 선물을 주었다.


당시 노나라에는 도적이 많았으므로 계무자가 도적 잡는 일을 맡고 있는 장무중을 책망하였다.

"당신은 어째서 도적을 다스리지 않는가?"

"다스릴 수 없다.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에는 사방에 관소가 있는데 도적을 다스리는 일이 왜 불가능한가? 당신은 사구(司寇; 도적을 다스리는 관리)이다. 도적을 없애는데 힘써야 할텐데 어떻게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하는가?"


"당신이 밖에서 도적을 불러들이고 크게 대접하는데 어떻게 나라 안의 도적을 막겠는가? 정경(正卿)인 당신이 밖에서 도적을 끌어 들이며, 나라 안에 있는 도적을 없애라고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서기가 주의 읍을 훔쳐 갖고 오자 당신은 공녀(公女)로 처를 삼게 하고, 그에게는 읍을 주었으며, 그의 종자들에게도 모두 선물을 하사하였다. 만약에 큰 도적을 공의 고모와 대읍으로 예우하였다면, 그 다음가는 도적에게는 노예와 수레 그리고 말을,

작은 도적에게는 의복과 칼을 차는 허리띠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도적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상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없애라고 한들 될 리가 없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웃사람은 마음을 깨끗이 갖고 항상 법도에 따라 사람을 대하고 신의가 분명해야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웃사람이 하는 대로 백성들은 하게 마련이다. 웃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혹 백성이 하는 경우에는 형벌을 내려 응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웃사람이 하는 것을 백성들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금할 수 있는가?"

노양공(魯襄公) 21년 : 전552년


8. 포로의 윤리


1. 초(楚)나라가 송(宋)를 포위하자 진(晉)나라는 해양(解揚)이라는 신하를 송나라에 보내 초나라에 항복하지 않도록 "진(晉)나라 군사가 총 동원하여 곧 도착할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송나라로 들어가는 도중에 정(鄭)나라 군사들에게 잡혀 초나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위와 같이 몇 줄 안되는 내용에서도 네 나라가 나온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점이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복잡성으로 인하여 중국 사람들이 원칙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며, 줄기와 가지를 구분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초나라의 장왕은 잡혀 온 해양에게 많은 재물을 약속하면서 송나라에 내용을 반대로 전하라고 유혹하였다.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세 번을 권하자 그는 응낙하였다. 그래서 높은 망루를 설치한 수레에 그를 올려보내 성안의 송나라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전하게 하였다. 그는 [초나라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진나라 군주의 원래 명령을 그대로 전하였다.


초장왕은 그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 꾸짖었다.

"너는 나와 약속해 놓고 배반하였다. 무슨 이유인가? 내가 신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네가 신의를 저버렸다. 너를 당장 처형하겠다."


그러자 해양이 대답하였다.

"군주가 정당한 명령을 내릴 때 의(義)가 되고, 신하가 그 명령을 잘 받들 때 신(信)이 되며, 또 의(義)에 따라 신(信)을 행하면 이(利)가 되고, 이(利)를 놓치지 않고 사직을 보위(保衛)하는 사람이 백성의 주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이 이야기에 여러 나라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義)와 신(信) 그리고 이(利)와 사직의 보위 또한 백성의 주인과 같은 여러 관념이 언급된다.]


의(義)에는 두 가지 신(信)이 없고, 신(信)에는 두 가지 명령이 없습니다. 귀군께서 저에게 뇌물을 주시려는 것은 명령의 [본질을] 모르시는 처사입니다.

명을 받들고 나오면 죽어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뇌물을 주면서 배반시킨다는 말입니까? 신이 군께 응락한 것은 [저의] 군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죽게 되었지만 군주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으니 다행입니다.우리 주군께서는 신의(信義)로운 신하를 두게 되었고 신은 군주의 명령을 수행하였으니 죽은들 또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초장왕은 그를 용서하고 그를 데리고 귀환하였다.

노선공(魯宣公) 14 년 : 전595년


2. 진(晉)나라는 사로잡은 초나라의 공자 교신과 초나라 연윤 벼슬의 양노의 시체를 초나라로 보내고, 대신 사로잡힌 진나라의 장군 지앵의 송환을 요청하였다. 당시 [지앵의 아버지] 순식은 진나라의 중군 좌[부사령관]였기 때문에 초나라도 그것을 허락하였다.


초왕(공왕)은 지앵을 보내며 물었다.

"그대는 나를 원망하는가?"

"양국이 싸운 전쟁에서 신이 재주가 부족하여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귀를 잘렸지만, 초나라의 관원들이 신을 죽여 그 피로 북을 바르지 않았으며, 또 본국으로 보내 처형당하게 하는 것도 모두 군후의 은혜입니다. 신이 실제 재주는 없지만 누구를 감히 원망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고맙게 생각하는 것인가?"

"양국이 각기 사직을 근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하여 분노를 억누르며 서로 용서하는 입장에서 포로를 석방하고 화의를 맺으려는 것이므로 국가간의 문제이지 제가 관여한 것도 아니므로 누구를 고맙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대는 돌아가면 무엇으로 나에게 보답하겠는가?"

"신은 원망할 처지도 못되지만, 군후 역시 은덕을 보답 받을 자격이 못됩니다. [피차간에] 원한과 은덕이 없으므로 무엇으로 보답할 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꼭 듣고싶다."

"우리 주군께서는 [포로가 되었었다고 저를] 처형하실 것이지만, 포로가 되었던 제가 귀군의 덕분으로 뼈나마 고국에 묻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 후에도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만약 우리 주군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저를 처형하지 않고 저의 아버님께 인도하신다면, 아버님께서는 우리 주군께 청하시어 [포로가 되었순던 죄로] 신을 조상의 사당에서 죽이실 것입니다. 이 역시 죽은 후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주군께서 [아버님의 청을] 허락하시지 않고 신을 살려 선조의 지위를 계승케 하시고 유사시에는 적은 군대나마 통솔하여 국경을 지키게 하신다면, 비록 초나라의 장수들을 만나더라도 피하지 않고 힘을 다해 목숨을 바쳐 두 마음 없이 신하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

초나라 왕은,

"진(晉)나라는 아직 싸울 수 없는 상대로구나."하고 [탄식하면서] 정중한 예를 갖추어 그를 돌려보냈다.

(성(成)공 3 년)

[임성삼의 주(註); 어느 입장에서든지 곧게 생각하고 말하면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권력을 탐하지 않음

오나라의 군주 제번은 아버지의 상이 끝나자 동생 계찰에게 양위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계찰이 말했다.

"...주군께서 의리에 합당한 계승자인데 누가 감히 주군을 넘보겠습니까?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저의 도리가 아닙니다. 제가 비록 아둔하다 할지라도 ... 절조를 지키겠습니다."

그래도 그를 세우려하자 그는 집을 버리고 시골에 숨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오왕도 단념하였다.


사관(史官)의 직필(直筆)

[제(齊)나라에서 최서라는 힘있는 신하가 제나라 군주를 죽였다.]

제(齊)나라 태사(太史;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가 "최서가 주군을 시해하였다"고 기록하자 최서는 그를 죽였다.

그 동생이 태사(太史)가 되자 똑같이 적었으므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 다음 동생도 같은 이유로 죽었다.

그 다음 동생이 또 똑같이 기록하자 [최서도] 그대로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남사씨라는 사람이 태사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간책(簡冊; 기록을 위한 공책)을 가지고 오다가(그 역시 정확한 기록을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한 것이다), 제대로 기록되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양(襄)공 25 년)

[임성삼의 주(註); 이런 사람들 몇 명이면 역사가 진실되게 지켜질 수 있다. 모든 백성이 진실을 지킬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자기의 맡은 바를 수행할 의무가 있다.

25 번째 안자춘추에서 나오는 그 최씨이다.]


백성을 이롭게하는 것이 충(忠)

[수나라의 군주가 초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계량이 만류하며 말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같은] 작은 나라가 [초나라 같은] 큰 나라를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나라에 도(道)가 있고 큰 나라가 불의한 경우라고 합니다.


소위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백성에게 충(忠)을 다하고, 신(神)에게 믿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금 백성이 굶주리고 있는 데, 군주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제관은 거짓말을 늘어 놓으면서 제사를 바치고 있으니 [지금 초를 공격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백성이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백성에게 충성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수나라 군주가 말했다.

"내가 신에게 바친 소나 양은 모두 털도 반짝거리고 살찐 것이었고 제물로 올린 곡식도 풍부하게 갖추었는데 어째서 내가 신(神)에게 불신(不信)하다고 하는가?"

계량이 대답하였다.

"무릇 백성은 신(神)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성왕(聖王)은 먼저 백성을 안정시킨 연후에 신에게 힘을 다했습니다. ..."

(환(桓) 6)


주 문공의 위민(爲民)

주나라 문공이 천도할 문제를 점치게 했더니 점치는 자가 대답했다.

[임성삼의 주(註); 앞에서부터 나오는 모든 주나라는 이 때의 종실인 周나라가 아니고, 주변의 작은 나라이다. 한자가 없어서 한글로 적는다]

"[그곳으로 천도하면] 백성에게는 이롭지만 주군께는 불리합니다."

문공이 말했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그것이 곧 나의 이로움이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군주를 세운 것은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

좌우의 신하들이 말했다.

"명을 길게 하실 수도 있는데 왜 주군께서는 안하십니까?[천도하지 말라는 뜻]"

문공이 말했다.

"군주의 사명은 백성을 기르는 것이며, 수명의 장단은 운에 따르는 것이다. 백성이 이롭다면 천도해야 한다. 이보다 더 길(吉)한 것은 없다."

마침내 천도하였는데 5 월에 주문공이 죽었다. 군자가 이를 듣고 말했다.

"주 문공은 명을 아는 사람이구나."


폭군추방의 정당성

진(晉)의 사광이 진후를 모시고 있을 때 진후가 물었다.

"위나라 사람들이 그 군주를 축출한 것은 심한 일이 아닌가?"

사광이 말했다.

"그 이전에 위나라의 군주가 사실 지나친 행동을 하였습니다. ......

백성의 생활을 고통스럽게 만들면 ... 백성들은 절망에 빠지고 사직의 주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군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쫓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


잘하면 상을 주고 과오를 범하면 고쳐주며, 근심이 있으면 구해주지만, 지나친 실태를 보이면 바꾸어 버리도록 돼있습니다. ......"

(양(襄) 14)


전쟁에 임하는 태도

진(晉)과 진(秦)나라의 군대가 정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 주(周)나라 왕성의 북문 앞을 지나갔다. 병거(兵車)에 탄 군인들은 투구를 벗고 병거에서 내렸다가(왕성에 경의를 표한 것) 펄쩍 뛰면서 다시 올라 탔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서의 주(周)는 앞에서 언급된 나라와 달리 춘추시대의 정통왕조인 나라이다.]

병거의 수는 300 이나 되었다. 왕손만이 아직 어렸으나 그것을 보고 주(周)나라 왕에게 말했다.

"진(秦)군은 경솔하고 무례하니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경솔하면 지모(智謀)가 적은 법이며, 무례하면 해이(解弛)하게 마련입니다. 위험한 전쟁에 나가면서 해이하고 또 지모도 부족한데 패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희(僖) 33)


백성의 저항 1

적인(狄人)이 위(衛)나라를 정벌하였다. 위나라의 의(懿; 아름다울 의)공은 학(鶴)을 좋아하여 학에게 대부(大夫)만 탈 수 있는 수레를 타고 다니게까지 하였었다. 적(狄)인이 쳐들어와 싸우게 되자 무기를 배급받은 사람들이 모두 싸울 것을 거부하며 말했다.

"학에게 싸우도록 하십시오. 학이 실제로 녹과 지위가 있었는데 우리가 왜 싸웁니까?"


백성의 저항 2

양(梁)나라의 군주는 토목공사를 좋아하여 백성을 다 거주시키지 못할 정도로 많은 성을 쌓았다. (결국 빈 성이 많았다.) 백성이 피폐하여 견디지 못하겠다고 불평하면 적이 곧 쳐들어 올 것이므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속였다.

마지막에는 수도 주위에 호를 파면서 진(秦)나라가 우리를 곧 습격할 것이라고 말하자 백성들은 두려워서 모두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진(秦)은 쉽게 양나라를 점령하였다.


백성의 저항 3

송나라가 정(鄭)나라와 싸울 때 송나라의 장수 화원이 양을 잡아 군사에게 먹였는데 그의 마부가 고기의 분배를 받지 못하였다. 분개한 그는 싸움터에서 장수 화원에게

"어제 저녁의 양은 당신 마음대로 처분했지만 오늘 이 수레는 내 마음대로이다."고 말하면서 말을 정(鄭)나라의 진지로 몰고 갔다. 그래서 화원은 포로가 되었고 송나라는 패배하였다.


자한의 염직(廉直)

송(宋)의 어떤 사람이 옥(玉)을 얻어 자한에게 바쳤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옥을 바친 사람이 말했다.

"이것을 옥 전문가에게 보였더니 훌륭한 보물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감히 바친 것입니다."

자한이 말했다.

"나는 탐욕하지 않은 것을 보물로 생각하고 너는 옥을 보물로 생각하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나에게 준다면 우리 두 사람은 모두 보물을 잃고 마는 결과가 된다. 그것보다는 각자가 보물로 생각하는 것을 갖고 있는 것이 낫다."

그러자 그는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며 말했다.

"소인은 이 옥을 품고서는 안심하고 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도적의 해를 걱정한 것). 이것을 받아주셔서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십시오." 자한은 그를 자기의 향리에 두고, 옥을 가는 사람을 시켜 그 옥을 닦고 갈게 한 후, 그것을 팔아서 그를 부자로 만든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양(襄)공 17)


안자(晏子)의 신도(臣道)

제나라의 장공이 최(崔)씨에 의해 시해될 때 축융타는 외부에서 돌아와 최씨 집으로 달려가 장공을 위해 죽었다. 어업을 관장하는 신괴와 종멸이라는 신하도 장공을 위해 죽었다.[이 세 사람은 장공이 총애하던 신하였다.]

그 때 안자가 최씨의 집 문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종자(從者)가 물었다.

"죽으시려 하십니까?"

"나 혼자만 신하인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도망가려고 하십니까?"

"이것이 내 죄인가? 왜 내가 도망가느냐?"

"집으로 돌아가시렵니까?"

"주군이 죽었는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냐?

군주된 사람은 백성을 업신여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사직을 잘 다스려야 하는 법이다.

신하된 자는 봉록을 받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사직을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사직을 위해서 죽었다면 신하도 함께 죽어야 하고, 군주가 사직을 위해서 도망해야 한다면 신하도 함께 도망해야 한다.

그러나 군주가 개인적인 잘못으로 죽거나 도망갈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은혜 관계가 없으면 누가 군주와 운명을 같이 하겠는가?

더욱이 신하가 군주를 죽인 이 경우에 내가 왜 죽거나 달아나겠느냐?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야 있느냐?"

문이 열리자 안자는 최씨 집안으로 들어가 공(公)의 시체를 무릎에 올려 놓고 곡을 한 후, 상례를 하고 나왔다. 어떤 사람이 그를 죽이자고 했으나 최서는 거절하였다.

"그는 백성의 신망(信望)이 있는 사람이다. 내버려두고 민심을 얻어야 한다."

(양(襄) 25)

[임성삼의 주(註); 안자춘추에 있는 내용과 약간 다르다. 그래서 수록한다.]


제(齊) 경공이 안자의 집을 다시 지어주려고 말했다.

"그대의 집은 시장에 가깝고 지대도 낮으며, 협소하고 시끄러우며, 먼지가 많으니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시원하고 양명(陽明)한 높은 지대로 집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안자는 사양하였다.

"선친께서도 그 집에 사셨습니다. 신은 선친의 지위를 계승하기에도 부족한 몸이라 그 집도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또 소인은 시장에 가까이 살아야 아침 저녁으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감히 여러 사람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집을 옮길 수가 있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이 때의 안자는 오랜동안 재상을 하고 있었다.]


경공이 웃으며 물었다.

"그대는 시장에 가까이 사니 물가가 싸고 비싼 것을 아는가?"

"그것을 알아야 이익을 보는데,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무엇이 비싸고 무었이 싼가?"

당시 경공은 족형(足刑; 죄인의 발을 자르는 형벌)을 많이 내렸기 때문에 시작에는 의족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안자는 [사려는 사람이 많아] 의족은 비싸고 신발은 싸다고 대답하였다. 경공은 이 때문에 족형을 완화하였다. ...

안자가 진(晉)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경공은 그의 집을 새로 지어 주었는데, 그가 귀국하였을 때는 이미 완성되었다. 그는 그것을 일단 받았으나 곧 헐어버리고 예전의 집 자리에 예전 그대로의 집을 짓고 집사람들에게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말했다.

"'집을 점치지 않고 이웃을 점친다'는 속담이 있다. 예전의 이웃들은 좋은 이웃들이었다. ..."

마침내 옛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처음에는 경공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안자가 다시 청하지 결국 허락하였다.


자산(子産)의 정치

자피는 자산에게 정치를 맡기려고 하였으나 자산은 사양하였다.

"정(鄭)나라는 작아 대국의 핍박을 받고 있고, 국내에서는 공족(公族)의 세력이 크고 총신(寵臣)도 많아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피는 그를 설득하였다.

"내가 그들을 통솔하여 그대를 따른다면 누가 감히 그대를 범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나라를 잘 다스리기만 하면 나라가 작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또 소국이기는 해도 대국을 잘 섬기면 대국도 우리에게 관대해질 것이다."

결국 자상은 정치를 맡았다.

자산은 나라의 수도와 그 밖의 도시의 서열을 분명히 하였으며[지방을 다스리는 관리가 과도한 힘을 가지지 못하도록], 신분의 고하(高下)에 따른 복장을 제정하고, 밭 사이에 도랑을 만들어 경계를 분명히 하고, 농부들을 5 가(家) 단위로 조직하였다. 경(卿)과 대부(大夫) 중 충성스럽고 검약한 사람은 권장하여 상을 주고, 사치스러운 자는 처벌하였다. ...


자산이 정치를 맡은 지 1 년이 지나자 세상에는 이런 노래가 들렸다.

"내 의관을 빼앗아 감추었네.

내 토지를 빼앗아 5 가(家)조(組)를 조직했네.

누가 자산을 죽일 것인가?

나도 그의 편이 되겠다."

그러나 3 년이 되자 이런 노래가 들렸다.

"내 자식과 동생을 자산이 가르쳤네.

내 토지를 자산이 불려 주었네.

자산이 죽으면 누가 그 뒤를 이을까?"

(양(襄) 19)

정나라의 백성들이 향교에 모여 대신들의 정치를 논하자 연명이라는 사람이 자산에게 말했다.

"향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산이 말했다.

"무슨 소리인가? 사람들이 그 곳을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며 대신들의 잘잘못을 논하고 있다.

그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행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고쳐야 한다.

그들을 우리의 스승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현대의 민주국가에 이런 국무총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무엇 때문에 향교를 파괴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옳은 의견을 존중해야 원망을 줄일 수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위압으로 원망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어떻게 백성의 불평을 갑자기 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강물을 막는 것처럼 대처해야 한다. 강물은 한번 크게 터지면 다치는 사람이 많게 마련이고, 그때는 구할 수가 없다. 차라리 조금씩 터놓아 흘러가게 하면서 그것을 알아내 대처하는 편이 낫다."

[임성삼의 주(註); 중국의 언론 대책은 항상 이 개념을 따랐다.]


연명이 말했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당신이 정말 받들 만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같은 소인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대로 밀고 나가시면 정나라 사람들이 모두 당신에게 의지할 것입니다. 왜 우리 몇몇 사람만 그렇겠습니까?"

공자가 이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판단할 때, 남들이 혹시 자산을 보고 어질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겠다."

자피가 윤하를 읍을 다스리는 대부로 삼자고 하였으나 자산이 반대하였다.

"나이가 어려 아직 능력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자피가 말했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다. 내가 그를 아끼고 있으니 나를 배반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임지로 보내 일을 배우게 하면 점점 정치를 잘하게 될 것이다."

자산이 말했다.

"안됩니다. 사람을 아끼려면 그를 이롭게 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그를 아끼면서 정치를 시키려고 하시는데, 이것은 마치 칼을 잡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고기를 자르게 하는 격이니, 해만 많을 뿐입니다. 당신은 사람을 아낀다고 하면서 상하게 할뿐이니 누가 당신의 아낌을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정나라의 기둥입니다. 기둥이 부러지면 서까래도 무너집니다. 그러면 저는 깔려 죽게 됩니다. 그러니 낱낱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비단을, 재단법을 배우는 사람에게 재단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높은 관직과 큰 읍은 백성을 보호하는 것인데, 배우는 사람에게 맡기려 하신다니 그것이 아름다운 비단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저는 배운 연후에 정치를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정치를 함으로써 배운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당신 뜻대로 하신다면 해가 있을 겁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내용은 소크라테스의 논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소크라테스도 다른 모든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면서, 정치만은 시민이면 아무에게나 맡기는 아테네의 정치 체제에 대해 비난을 하였다.]

비유를 들어 말씀 드리지요. 사냥을 할 때 활 쏘는 사람과 수레 모는 사람이 능숙하면 짐승을 많이 잡겠지만, 만약 수레를 타보지도 못한 사람이 그 위에서 활을 쏘고 수레를 끌면, 수레가 전복되지 않을까 걱정될 뿐 사냥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피가 대답했다.

"잘 말해 주었다. 내가 부족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군자는 원대한 것을 알려고 노력하고, 소인은 비근한 것만 알려고 애 쓴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소인이다.

의복은 내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소중히 생각하였는데, 높은 관직과 큰 읍은 내 몸을 보호해 주는 것인데도 [몸에서] 멀다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대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일전에 내가 '그대는 정나라의 정치를 맡으라. 나는 우리 집안을 다스려 그대를 보호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오늘에야 내가 부족한 것을 알았다. 오늘부터는 우리 집안 일도 그대에게 의논한 후에 처리하겠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사람을 섬긴 자산은 행복한 사람이다.]

자산이 말했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른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각기 다릅니다. 어떻게 감히 당신께 당신의 얼굴을 내 얼굴처럼 똑같이 하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말씀드리지요."

자피는 자산을 충직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정치를 맡긴 것이고 자산은 자피의 지지 때문에 정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襄(양) 31)

자산이 구부(작은 행정 단위별로 거두는 세금)를 신설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였다.

"애비는 길에서 죽고, 자산이 벌의 독침이 되어 나라를 호령하니 이 나라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자관이 이것을 자산에게 고하자 그는 대답하였다.

"무슨 걱정인가? 진실로 사직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생사를 걸고 강행해야 한다.

또 좋은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 법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들었다. 그래야만 일이 성공할 수 있다. ......

시(詩)에 '예(禮)와 의(義)에 어긋남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 나는 동요하지 않겠다." (소(昭) 4)

[임성삼의 주(註); 자신을 가지고 일에 임하되, 항상 옳은 일인가를 확인하면 된다.]

...... 자산은 [제후들의 모임에서] 귀국 도중에 자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말했다.

"나도 이제 끝장이구나! 이제 좋은 일을 하려 해도 소용이 없겠다. 그만이 나를 알아주었는데..."

(소(昭) 13)


[힘이 센 나라인 진(晉)의 실력자의 한 사람인 한선자가 정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정나라 상인이 가지고 있는 진귀한 옥을 원하였다. 정나라에서는 주려고 하였으나 자산은 반대한다.

"...... 대국 사람들이 소국에 명령해서 원하는 것을 다 얻으려 한다면 소국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감당하지 못하여] 어떤 것은 바치고 어떤 것은 바치지 않는다면 더 큰 죄가 된다.

[그러므로] 대국의 요구가 무례한 것이라면 거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욕심은 한이 없으며, 결국 우리는 대국의 한 지방처럼 전락하고 [국가로서의] 체통을 잃게 된다.

한선자가 군명을 받들고 와서 사사로이 옥을 요구한 것은 탐욕이 지나친 것이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옥을 그에게 주면 두 가지 죄가 성립된다. 즉 우리는 국가의 체통을 상실하고 한자는 탐욕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리가 옥 때문에 대국의 미움을 사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결국 한선자는 자기가 상인을 찾아가서 그 옥을 구매하였다.]

(소(昭) 16)

[임성삼의 이야기; 이순신 장군이 젊으셨을 때 높은 관리가 장군의 좋은 화살통을 가지고 싶어했다. 장군께서 말씀하셨다.

"이 화살통 하나를 드리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침으로 인하여 저는 아부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날 것이며, 당신은 아랫사람의 물건을 토색질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서로 득이 없으니 제가 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와 거의 동일한 좋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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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3-01-09
[] 구합제후(九合諸侯)

구합제후(九合諸侯) 제환공이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한 일을 말한다. 회맹을 연도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양승국 0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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