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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최초의 도읍 단양(丹陽) 비정고(比定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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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최초의 도읍 단양(丹陽) 비정고(比定考)

《사기(史記)•초세가(楚世家)》에"주성왕 때 웅역(熊繹)이 문왕과 무왕을 도와 공을 세운 공신들의 후예들을 찾아 후사를 잇도록 할 때 웅역(熊繹)을 만이의 땅인 초(楚)에 봉했다. 초나라의 봉지는 자작과 남작의 크기에 미(羋)를 사성(賜姓)하고 단양(丹陽)에 거하게 했다. 또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주성왕 때 문왕과 무왕의 스승이었던 죽웅(鬻熊)의 증손자 웅역(熊繹)을 형만(荊蠻)에 봉하고 초(楚)라는 국호를 주고 작위는 자작(子爵)에 단양(丹陽)을 국도로 삼게했다.”는 기사가 있다. 고금의 초사(楚辭) 학자나 역사학자 대부분은 이 기사에 의거하여 초나라의 시봉자는 웅역, 최초의 도읍지를 단양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양은 지금의 어느 곳에 해당하는가? 고금의 학자들의 설은 매우 다양하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비교적 믿을만한 학설은 다음의 다섯 가지 설이다.

1、당도설(當塗說)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후한의 반고가 대표적이다. 그는《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서 “단양(丹陽)은 단양군(丹陽郡)의 관할이고 초나라는 웅역이 봉해진 나라로써 그18대 후손인 초문왕에 의해 단양에서 영(郢)으로 천도했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책 말미의 총론에서 다시 설명하기를 “오나라와 영토분쟁이 일어난 지금의 회계(會稽)、구강(九江)、단양(丹陽)、예장(豫章)、여강(廬江)、광릉(廣陵)、육안(六安)、임회군(臨淮郡) 등은 모두 오나라가 차지했다.”라고 했다. 기록의 단양은 바로 지금의 장강 하류 안휘성 당도현(當塗縣) 동쪽과 강녕현(江寧縣)의 경계에 위치한 소단양(小丹陽)을 말한다. 담개보(譚介甫)는《초적개국사(楚的開國史)》에서 “초나라가 산동에 이르렀으나 주족(周族)의 팽창으로 초나라는 다시 지금의 강소성 단양으로 밀려 이동하게 되었다. 단양이라는 지명은 초나가 이동할 때마다 지명도 같이 사용했다.”라고 했다. “강소(江蘇)의 단양(丹陽)” 역시 안휘성 당도의 단양을 가리키며 일찍이 북위(北魏) 왕조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은 그의 저서《수경주(水經注)》에서 잘못이라고 비판했다.《수경주(水經注)》제34권에서 말하기를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는 오(吳) 땅의 단양은 오(吳)와 초(楚)는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남루한 형산(荆山)은 오나라 경내에서 너무 멀어 받아들일 수 없는 설로서 이곳은 단양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후로 송나라 왕무(王茂)의《야객총서(野客叢書)》、명나라 방이지(方以智)의《통아(通雅)》、청나라의 고염무(顧炎武)의《일지록(日知錄)》과 고동고의《춘추대사표(春秋大事表)》 및 송상봉(宋翔鳳)의《과정록(過庭錄)》등등은 당도설을 부정했다. 초나라 건국 시 도성으로 삼은 당도는 오나라와 경계에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는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없게 되었다.

2、자귀설(秭歸說)

《산해경(山海經)•해내남경(海內南經)》에 “ 하후(夏後) 계(啟)의 신하에 맹도(孟塗)라는 사람이 산상에 살았는데 단산(丹山)의 서쪽이었다. 단산은 단양(丹陽)의 남쪽에 있고 단양의 관할이었다.”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은 이 설에 주를 붙이기를 “지금의 건평군(建平郡) 단양성(丹陽城) 자귀현(秭歸縣) 동쪽7리 되는 곳에 있다. 즉 하나라의 맹도(孟塗)가 살았던 곳이다. ” 북위의 역도원(酈道元)은 《수경주(水經注)•강수편(江水篇)》에 동진 원산송(袁山松)이 편찬한《의도기(宜都記)》의 기사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자귀(秭歸)는 초자 웅역(熊繹)이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이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단양성(丹陽城)은 산을 등지고 언덕을 따라 성벽을 쌓았는데 주위는8리280보다. 동북의 양면은 모두 절벽을 등지고 있고 서쪽으로는 하천에 남쪽으로는 장강을 베고 험준한 가파른 절벽에 우뚝 솟아있다. 실로 견고한 성이다. 초자 웅역이 처음 봉지로 받은 단양은 바로 이곳이다. 초나라 군주들의 선조들의 능묘는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산재해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 역도원은 자귀의 단양성의 지리적인 위치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초나라 군주들의 능묘가 단양성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고 했다.

곽박, 원산송, 역도원 등은 모두 초나라의 도성 단양은 지금의 호북성 자귀현 경내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역대의 수많은 학자들은 이 설을 따랐다. 예를 들어 남북조시대 남조 진(陳)의 고야왕(顧野王)은《여지지(輿地志)》에서 “단양성(丹陽城)은 자귀현(秭歸縣) 동쪽에 있는데 성벽의 둘레는8리이고 웅역이 시봉된 곳이다. ”라고 주장한 설은 당나라 때 가장 성했고 《괄지지(括地志)》에서 당나라의 위왕(魏王) 이태(李泰)는“웅역의 능묘는 귀주(歸州) 자귀현(秭歸縣)이다.” 또 “귀주(歸州) 자귀현 단양성(丹陽城)은 웅역이 나라를 시작한 곳이다.”이라고 했다. 당조 이길보(李吉甫)는《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서 말하기를 “ 단양은 자귀의 동쪽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초나라의 옛 도성이다. 주성왕(周成王)이 웅역(熊繹)이 봉한 형만의 단양 땅이 바로 이곳이다.” 라고 주장했다. 또 당조의 이현(李賢) 등의 주에《후한서(後漢書)•남만열전(南蠻列傳)》에 “주성왕(周成王)은 초(楚)에 웅역을 봉하고 단양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귀주 자귀현 동남쪽의 고성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했다. 송대에 이르기까지 『자귀설(秭歸說)』은 당조 때처럼 계속 주류설의 지위를 유지했다. 송조의 왕상(王象)의《여지기승(輿地紀勝)》에서 “단양성(丹陽城)은 자귀의 동쪽3리 되는 곳에 있고 지금의 굴타(屈沱)에 있는 초왕성(楚王城)의 유지는 바로 이곳으로 북쪽으로는 대강(大江)을 뒤로 하고 있는데 둘레는20리에 달한다.” 라고 주장했으며 송의 축목(祝穆)은 《방여승람(方輿勝覽)에서 “단양성은 바로 초왕성으로 지금의 장녕천호(長寧千戶)가 바로 이곳이다.”이라고 했다. 북주(北周) 건덕(建德) 6년(577년)자귀는 장녕현(長寧縣)으로 개명했다. 그밖에 송조의 악사(樂史)는《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서, 나필(羅泌)은《로사(路史)•국명기(國名紀)》에서 이 설을 따랐다. 그러나 “자귀설(秭歸說)”은 장강의 북쪽이라는 설과 남쪽이라는 설로 양분되었다. 역도원은 《수경(水經)•강수주(江水注)》에서 “자귀(秭歸)는 초자 웅역(熊繹)이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이다.”라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단양성(丹陽城)은 산을 등지고 언덕을 따라 성벽을 쌓았는데 주위는8리280보다. 동북의 양면은 모두 절벽을 등지고 있고 서쪽으로는 하천에 남쪽으로는 장강을 베고 험준한 가파른 절벽에 우뚝 솟아있다. 실로 견고한 성이다. 초자 웅역이 처음 봉지로 받은 단양은 바로 이곳이다. 초나라 군주들의 선조들의 능묘는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산재해있는 사실이 그 증거다. ” 역도원이 말하는 자귀의 단양성의 장강 북쪽 강변을 가리킨다. 그러나 왕상(王象)의 《여지기승(輿地紀勝)》과 축목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의 기사는 초왕성은 자귀의 장강 남안에 있었다고 했다. 현대의 양관(楊寬)은《서주시대적초국(西周時代的楚國)》에서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적지 않은 현대의 학자들은 양관의 단양에 대한 강수북안설은 지지하고 있다. 그는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장강대(長江隊)가 자귀의 장강 북안 마을인 연어산(鰱魚山) 유지를 시굴할 때 참여하여 그때의 정황을 《시론초단양화영도적지망여연대(試論楚丹陽和郢都的地望與年代)》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말하기를 “그곳은 자귀와7.5리의 거리고 장강 북안에 위치하고《수경주(水經注)》의 기록과 대체적으로 부합하고 있다.” 라고 했다. 유빈휘(劉彬徽)는 장강 북안의 연어산 유지가 바로 초나라가 처음 도읍한 단양이라고 했다.

3、지강설(枝江說)

이 설은 한나라 때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당나라의 장수절(張守節)은 《사기(史記)•초세가(楚世家)•정의(正義)》에서 동한의 영용(穎容)이 쓴《춘추삼전례(春秋三傳例)의 기사를 인용하여 “초나라의 단양은 지금의 지강현(枝江縣) 고성이다.”라고 했다. 동한말과 삼국시대 사람 송충(宋衷)은《세본(世本)•명편(名篇)》이라는 책의 인용문에 “단양은 남군의 지강현(枝江縣)”이라고 했다. 남조의 송나라 사람 배인(裴駰)은《사기(史記)•초세가(楚世家)•집해(集解)》에서 동진의 서광(徐廣)의 설을 인용하여 “초나라의 단양은 남군(南郡)의 지강현(枝江縣)이다”라고 했다. 서진의 사마표(司馬彪)는《속한서(續漢書)•군국지(郡國志)》에서“지강(枝江)은 원래 제후극 나국(羅國)의 도읍으로 단양의 취락이다.”라고 했다. 당대의 학자 중에 적지 않은 사람이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또 지강설을 지지하는 또 다른 설은 “형산(荊山)과 영(郢)의 위치를 고찰해 볼 때 지강설은 비교적 사실과 부합되는 면이 많이 있음으로 초나라 도성 단양은 마땅히 이곳이 되어야 한다. 형산과 영 사이의 땅은 저수(沮水)와 장수(漳水)의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다가 단양을 통과하여 마지막으로 강릉의 영(郢)에서 합쳐짐으로 즉 강릉은 저수와 장수가 장강과 합류되는 지점이다. ”라고 현지답사를 통해 연구한 유위초(俞偉超)는 그의 논문《관어초문화발전적신탐고(關於楚文化發展的新探考)》에서 주장하고 지강설이야 말로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했다. 초문왕 때 지금의 강릉시(江陵市) 기남성(紀南城)인 영도(郢都)로 도성을 옮겼다고 했다. 초나라 사람들이 동쪽의 영도로 도성을 옮긴 이유는 확실히 장강과 한수 사이의 평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또한 중원에 해당하는 하남의 남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했다. 고응근(高應勤)과 정요정(程耀庭)의 공저인 《담단양(談丹陽)》과 고응근의 《재담단양(再談丹陽)》은 지강설을 강력히 주장했다.

4、단석설(丹淅說)

이 설은 “단석지회설(丹淅之會說)이라고도 한다. 석천설(淅川說)은 섬주(陝州), 예주(豫州), 악주(鄂州) 세 주의 경계가 만나나는 단강의 북쪽 지류와 석수(淅水)가 합류하는 지점으로 단강은 한수의 가장 큰 지류다. 그래서 단석(丹淅)이 만나는 곳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위치는 지금의 하남성 석천이다. 그래서 이 설을 또한 석천설이라고도 칭한다. 이 설은 당나라 때 최초로 제기되었다. 당나라 초기 사마정(司馬貞)은 그의 저서 《사기색은(史記索隱)》의 주석편인 《사기(史記)•한세가(韓世家)》에 “한선혜황11년 즉 기원전322년, 한나라가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단양에서 초장 굴개(屈丐)를 패주시키고 초군8만 명의 목을 베었다”라는 기사의 단양은 바로 석천 부군의 이곳이다“라고 했다. 또 “옛 초나라 도성은 지금의 균주(均州)에 있다.”고 했다. 단수와 석수가 합류되는 곳은 당나라 초기에는 균주의 관할이었다. 그래서 초나라의 첫 도읍지를 단양이라고 언급했다. 청대의 송상봉(宋翔鳳)은 “자귀설(秭歸說)”과 “당도설當塗說)을 비판하고 초나라의 최초의 도읍지 단양은 바로 단수와 석수가 합류하는 곳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는 《초죽웅거단양무왕사영고(楚鬻熊居丹陽武王徙郢考)》라는 저서에서 “전국시대에는 단양은 상주(商州)의 동쪽, 남양(南陽)의 서쪽으로 단수와 석수가 한수와 합류되는 곳임으로 그 지명을 단석(丹淅)이다.”라고 했다. 금인 여사면(呂思勉)은 그의 저서《선진사(先秦史)》에서 “단수와 석수 두 강이 합류하여 한수와 흘러들어가는 송상봉의 설과 좌씨전 소공(昭公) 9년, “천자의 사자 담환백(詹桓伯)이 국경문제를 따지기 위해 진나라에 들어갈 때 초(楚)와 등(鄧)나라 사자와 만난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설이다. 또 동서업(童書業)은 《여씨춘추연구(呂氏春秋研究)》에서 “《사기(史記)》의 설에 따른 웅역(熊繹) 이후의 단양(丹陽)은 송상봉의 고증에 의하면 지금의 하남성 남부의 단수와 석수 지간이다.”라고 했다. 고철부(顧鐵符) 또한 《주원갑골문“초자래고”인증(周原甲骨文“楚子來告”引證)》의 내용 중에 “단양은 위치 비정의 제 문제에 관한 쟁론은 천년 수 백년 동안 행해졌으나 지금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 유력한 설 중에서 단석설은 비록 비교적 늦게 제출한 설이지만 각 방면에서 제시한 조건들을 살펴보면 그 중 가장 사실과 부합한 설이다.”라고 했다.

5、천사설(遷徙說)

초나라 도성 단양의 이동설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당나라 때의 두우(杜佑)다. 그는《통전(通典)》에서“귀주자귀현설(歸州秭歸縣說)”설을 “초나라의 웅역이 처음 도읍을 정한 단양은 지금의 자귀현 동남의 고성이다. 후에 지강(枝江)으로 옮겨 그곳을 단양(丹陽)이라고 불렀다.”라고 했다. 동시에 “형주지강(荊州枝江)” 설은 “강릉지강(江陵枝江)은 옛 라국(羅國)의 땅으로 한나라의 옛 현이다. 초문왕이 단양에서 도읍을 옮겨 땅 이름을 역시 단양으로 불렀다. 옛 단양은 지금의 파동군(巴東郡)이다.”라고 했다. 두우의 설에 따르면 초나라의 옛 도읍 단양은 자귀에 있다가 후에 지강으로 옮겨 고을 이름을 단양으로 불렀으며 다시 강릉으로 천도한 초문왕이 도성의 이름을 영(郢)으로 했으나 단양도 같이 사용했다. 청나라의 고동고(顧棟高)의《춘추대사표(春秋大事表)》에 말하기를 “일반적으로 제후국이 도읍을 옮길 때는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두 개의 단양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했다. 두 개의 단양이란 자귀와 지강을 말한다. 청나라의 송상봉(宋翔鳳)은《과정록(過庭錄)》에서 초나라의 단양은 석천(淅川)에 있다가 후에 남장(南漳)으로 옮겼다고 했다. 。

현대의 학자 중 이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장정명(張正明)은 《초문화사(楚文化史)》에서 초나라의 단양은 원래 석천(淅川)으로 후에 남장(南漳)으로 옮겼다. 또 왕광후(王光鎬)는《초문화원류신증(楚文化源流新證)•단양영도고(丹陽郢都考》에서 “초나라 단양은 개국조 죽웅(鬻熊) 시대에는 석천(淅川)이고 후에 웅역(熊繹) 때 지금의 남장현(南漳縣) 동북으로 옮겼다.”라고 주장했다.

석천(石泉)과 서덕관(徐德寬)이 공동작업한 《초도안양지망신탐(楚都丹陽地望新探)》이란 연구보고서는 섬서성 남부의 상락(商洛)의 고대 기록 중 초산(楚山)、초수(楚水)와 단강(丹江) 유역에 남아있는 고대문화 유적을 근거로 추론하면 서주시대 단양은 섬서성 상현(商縣)에 있다가 후에 하남성 석천(淅川)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유빈휘(劉彬徽)는 《시론초도단양화영도적지망여연대(試論楚都丹陽和郢都的地望與年代)》라는 보고서에서서 초나라가 처음 봉해진 단양은 자귀(秭歸)가 처음이었다가 웅거(熊渠) 시대에 지강(枝江)으로 옮겨 단양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했다. 。

고철부(顧鐵符)는《초삼읍고(楚三邑考)》에서 초나라의 도성 단양의 위치는 처음에는 단석(丹淅)이었다고 후에 형산(荊山)으로 천도했다고 했다.

1977-1979년,고고학자들이 당시 석천현(淅川縣)의 창방공사(倉房公社: 현 창방진(倉房鎮))와 단수의 하류 강변에 소재하는 하사(下寺)의 용산(龍山) 부근에서24기의 춘추시대 초나라의 분묘에서 청동기 제기(祭器), 악기, 병장기, 거마의 용구 및 농기구 및 옥기 등을 포함한8천여 점이 발굴되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하사2호 분묘는 초나라 영윤이었던 자경(子庚)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자경의 이름은 오(午)로 공자오 혹은 왕자오라고 칭했다. 초공왕 만년 사마(司馬)로 임명되어 초나라의 군사 책임자가 되었다. 초강왕(楚康王) 원년(기원전559년) 겨울 영윤의 직에 있었던 자낭(子囊)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영윤이 되어 강왕8년(전552) 여름 병으로 죽었다. 그가 죽은 이래 오랜 기간 동안 그의 가족들은 모두 용산의 산정에 묻혀 지금까지2500년에 이르렀다. 하사의 초나라 분묘군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은 조형미가 넘치고 선진적인 공예술과 풍부한 명문은 중국 내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 가장 많다. 하사령(下寺嶺)에서 발굴된 초나라 왕족들의 분묘는 당시 중국을 진동시키고 초나라 문화를 새롭게 조명시켰다.

1990-1992년 기간 동안 하사의 분묘군에 대해2차 작업을 시작해서 부근의 화상령(和尚嶺)、서가령(徐家嶺) 등지까지 발굴작업을 확대해서10여 개 좌의 초나라 귀족들의 무덤 군을 추가로 발굴했다. 출토된 문물은2천여 점에 달했다. 그것은 하사(下寺)의 발굴 이래 춘추시대 초나라 분묘가 발굴된 이후 단석(丹淅) 유역의 초나라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사업에 있어서 가장 큰 수확으로 다시 한번 초나라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하사는 지금의 하남성 석천현(淅川县) 단강구(丹江口) 수고(水库) 서안에 위치한 창방진(仓房镇) 하사(下寺) 동구촌(东沟村)이다. 1992년 해당 묘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그 해에 전국10대 고고학적인 발굴사업으로 평가되었다. 선후 몇 번에 걸친 고고학적인 대발견은 중국의 단강과 석수 유역을 세인의 주목을 받게 만들었다. 석천 일대의 유적에 대한 발굴활동으로 단석 유역의 분묘군은 모두 초나라 유적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선후로 행해진 해당 지역 내의 초나라 분묘군에 대한 전방위적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곳에서 발굴된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 고분군 이 존재하는28개 지역은 하사(下寺),화상진(和尚嶺),서가령(徐家嶺),모평(毛坪) 등을 포함한 지역에서 모두2천여 좌의 고분이 존재하며 실제로는 오히려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분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유는 수많은 분묘와 유적지가 수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분묘 한 개 한 개 발굴될 때마다 그곳에서 나오는 부장품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단강구 저수지 구역은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지하에 간직한 초문화를 연구자료로써 화제가 되고 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단강구수고(丹江口水庫) 일대가 사마천이 말한 초나라가 최초로 책봉된 땅이라는 설에 힘이 실리고 있는 중이며 해당하는 땅은 그곳의 원주민들에게 용성(龍城)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곳이 초나라가 처음으로 도읍한 땅이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초나라는 남방 땅을 근거지로 강력한 세력의 대국으로 발전하여 낭만적인 문학을 창조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초나라의 초기 역사연구는 뜨거운 감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기타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사기(史記)》,《한서(漢書)》등 고대역사서의 근거한 기록과 고고학적 활동에 의해 발굴한 유적들과 재결합한 결과 해당지역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단석유역이 초나라가 초기에 도읍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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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3-12-23
[] 임성삼의 춘추강독

춘추강독(春秋講讀) 공자는 '춘추'를 짓고 나서 "후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는 것도 이 춘추를 통하여고, 비난하는 것도 춘추를 통하여 일 것이다
운영자 13-11-29
[] 허목부인(許穆夫人) - 중국 최초의 애국여류시인 -

허목부인(許穆夫人) - 중국 최초의 애국여시인 -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고, 희성에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춘추 때 위나라 여인으로 중국 역
운영자 13-11-29
[] 《오자(吳子)/울료자(尉繚子)》

《오자(吳子)/울료자(尉繚子)》 오자(오기)와 울료자(울료)는 중국 전국시대의 병법가이다. 《손자병법》의 손자에 비해 생소하기는 하지만
운영자 13-09-26
[] 자한(子罕)

자한(子罕) 1. 정국칠목(鄭國七穆) 공자희(公子喜) 정목공(鄭穆公)의 아들로 희성(姬姓)에 이름은 희(喜)다. 자풍(子豊), 자사(子駟)와 동모형
운영자 13-09-03
[] 상앙의 변법 내용

상앙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기원전 390년 경에 태어나서 338년에 죽은 중국역사를 통틀어 변법을 통해 개혁을 단행한 가장 인상적인 정치가다. 전
양승국 04-10-04
[] 상간(桑間)

상간(桑間) ① 은(殷)나라를 멸한 주무왕은 그 땅에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봉한 후에 나라를 패(邶), 용(鄘), 위
운영자 13-01-13
[] 관중이 수행한 경제전쟁의 전말

관중이 수행한 경제전쟁 손자가 말한 바가 있다.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은 도궁비현(圖窮
운영자 13-01-09
[] 구합제후(九合諸侯)

구합제후(九合諸侯) 제환공이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한 일을 말한다. 회맹을 연도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양승국 0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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