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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4 14:44:173063 
성복대전의 패장 성득신(成得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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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득신(成得臣)


초성왕 때 영윤(令尹)으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32년에 죽었다. 성은 미(芈)이고 씨는 성(成)이고 이름은 득신(得臣)이고 자는 자옥(子玉)이다. 투백비(鬪伯比)의 세 아들 중 막내 아들이며 자문(子文)은 그의 큰 형이다. 초성왕(楚成王) 35년 기원전 637년 자문이 전공을 들어 자기의 후임으로 성득신을 천거했다. 성왕 38년 기원전 634년 초군을 이끌고 기(夔)를 멸한 후에 진로를 북쪽으로 돌려 당시 초나라를 배반한 송나라를 정별했다. 다음 해인 기원전 633년 겨울 다시 송나라를 포위하자 송나라를 구원하기 이해 출동한 당진(唐晉)과 제(齊) 및 섬진(陝秦) 연합군과 성복(城濮)에서 싸웠으나 싸움에서 패하고 후퇴했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그 다음 해인 기원전 632년에 자살했다. 기(夔)는 지금의 호북성의 자귀시(秭歸市)에 존재했던 중소제후국이고 성복은 지금의 산동성 견성(甄城) 임복집(临濮集)으로 춘추 때 위(衛)나라 땅이다.


약지전(鄀之战)


약(鄀)은 지금의 섬서성 및 호북성과 경계하는 하남성의 남서단의 석천시(淅川市)에 존재했던 중소제후국으로 도성은 상밀(商密)에 두었다. 후에 호북성 의성시(宜城市)로 이주한 약국(鄀國)과 구분하기 위해 하약(下鄀)이라고도 부른다. 기원전635년 초성왕 37년 가을, 진진(晉秦) 연합군이 약국을 정벌하러 왔다. 당시 약국 정벌을 주도했던 나라는 섬진이었고 당진은 단지 섬진과의 공수동맹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참전했을 뿐이었다. 초나라의 중원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던 방성(方城)의 좌우에는 신(申)과 식(息) 두 개의 큰 현이 있었고 신공(申公)과 식공(息公)은 두 현을 지키기 위해 책봉된 중요인물이었다. 섬진과 당진 두 나라가 연합하여 약나라를 정벌하러 왔을 때 초나라는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단지 단순한 일상적인 국경에서의 사소한 충돌로 여겼다. 영윤 성득신과 사마(司馬) 투의신(鬪宜申)는 영도(郢都)로 돌아가서 신공 투극(鬪克)과 식공 굴어강(屈御寇)에게 명하여 신식(申․息) 두 현의 군사를 이끌고 상밀로 달려가 진진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치라고 했다. 초나라의 구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단수(丹水) 강안을 따라 크게 우회하여 상밀을 지나쳐 지금의 하남성 서협현(西峡县)부근의 석읍(析邑)에 당도한 섬진군은 자기들의 군역들을 모두 줄로 묶은 후에 포로로 잡은 석인(析人)들로 가장시킨 후에 아침이 되자 서쪽으로 행군으로 시작했다. 저녁의 야음을 이용하여 상밀성을 포위한 섬진군은 수많은 횃불 밑에서 회생을 잡아 피를 묻히고는 신공과 식공과 함께 회맹의 의식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성위의 약나라 군민들은 그 모습을 보고 초나라가 이미 자기들을 섬진에게 팔아 넘겼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전하고 열 사람이 다시 백 사람에 전해 초나라의 신식이 섬진군과 강화를 맺었다고 믿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약인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섬진군에 항복을 청했다. 약인들의 항복을 받아들인 섬진군은 동쪽으로 진군하여 상밀을 향해 진군해오고 있던 초나라 군대를 기습했다. 섬진군의 기습에 대해 미처 방비하지 못했던 초나라의 신식의 군대는 모두 초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초나라가 대군을 발하여 섬진군을 공격해오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섬진군은 상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총총히 물러갔다.


신식 두 현의 군대가 복멸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영윤 자옥은 그날로 군사를 일으켜 진군의 뒤를 추격했으나 그때는 이미 늦어 따라잡지 못했다. 자옥은 스스로 불안한 마음이 되어 다른 전공을 세워 패전을 보충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진(陳)나라를 공격하고 동시에 당시 초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돈자(顿子)를 돈성으로 호송하여 돈나라의 군주 자리에 앉히고 회군했다.

기원전 634년 초성왕 38년, 제나라가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희공(僖公命)은 공자수(公子遂)와 장문중(臧文仲)을 사자로 삼아 초나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했다. 지모와 언변이 뛰어난 장문중이 자옥을 만나 제(齊)와 송(宋) 두 나라는 초나라에 신복을 하지 않으니 초나라가 두 나라를 정벌한다면 노나라가 스스로 향도가 되겠다고 했다. 자옥은 장문중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으나 먼저 기(夔)나라 문제를 처리한 후에 중원으로 나가겠다고 결심했다.


멸기지전(灭夔之战)


기(夔)나라는 초나라의 지족이 봉해진 소제후구이다. 처음 봉해진 군주는 웅거(熊渠)의 둘째 아들 웅지(熊挚)로 봉지는 지금의 호북성 자귀시(秭归市)이며 주민들은 파인(巴人)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미 파인에게 융화된 기자(夔子)는 초나라가 기나라의 모국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축융(祝融)과 죽웅(鬻熊)에게 제사를 올리지도 않았다. 공공연히 초나라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적인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던 초나라는 마침내 그들에게 징벌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가을 영윤 자옥은 사마 자서(子西) 즉 투의신(鬪宜申)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기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포로로 잡아 영도(郢都)로 압송했다. 이로써 기나라는 없어지고 초나라의 현으로 편입되었다. 기나라를 멸한 자옥은 눈길을 제와 송 두 나라로 돌렸다. 그때 정사에 싫증이 나서 국정을 소흘히 행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음으로 자연히 초나라의 권력은 자옥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송성공(宋成公)은 선군 송양공(宋襄公)이 초나라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홍수(泓水)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그때 맞은 화살로 인한 부상이 덧나 죽었기 때문에 초나라에 의해 큰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송나라는 자연히 초나라를 따르지 않고 당진국에 붙어 마음속으로 당진국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초나라를 제압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해 겨울 자옥과 자서는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원정을 나서며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주요 공격 목표는 제나라였다. 송나라의 변경에 이르러 민읍(缗邑)을 며칠간 포위한 초군은 초나라의 공격목표는 송나라 도성을 공격한 후에 계속 동진하여 제나라를 정벌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송나라에 주지시켰다. 민읍은 지금의 산동성 금향현(金乡县)이다. 초나라가 민읍을 포위한 행동은 제나라의 내란을 이용하여 한몫을 잡기 위한 산가지를 손에 잡은 격이 되었다. 당시 제나라의 국내사정은 얼마 전에 제환공이 죽자 여러 공자들이 서로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위희(衛姬)의 소생 공자 무휴(無虧)가 살해되고 정희(鄭姬)의 소생 공자 소(昭)가 제후(齊侯)의 자리에 올라 내정이 극히 혼란 스러운 상태였다. 공자 소가 제효공(齊孝公)이다. 나머지 7명의 공자는 모두 도망쳐와 몸을 피해 초나라에 머물자 초나라는 그들 모두를 상대부에 봉했다. 나머지 일곱 공자 중 공자 소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제환공이 사랑했던 송화자(宋華子) 소생의 공자 옹(雍)이었다. 자옥은 대군과 함께 공자 옹을 앞세우고 동쪽의 제나라를 향해 진군했다. 제나라 국경에 당도한 자옥은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东阿县)의 곡읍(穀邑)을 점령하고 공자옹을 안치시킨 후에 신공 숙후(叔侯)를 불러 지키게 하고 자신은 자서와 함께 본국으로 회군했다. 당시 초나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진 지방에 세운 하나의 괴뢰정권이 한 떼의 부대만으로 유지시켰던 일은 중국 역사상 두 번 다시는 없었던 희귀한 일이었다. 초나라의 영윤 자옥이 그런 무모하게 보이는 일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경을 넘어서 점령한 땅을 통제했던 경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국경 너머의 점령지였지만 그 당시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던 초나라에 무력한 제나라가 감히 어찌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제나라는 성득신의 짐작대로 곡읍을 되찾으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자옥이라는 위인은 적국의 입장에서 매우 두려운 존재였으나 그가 군사를 다스리는 방법은 다소 문제가 있었다. 그는 군사들에게 지엽적인 문제에는 가혹하게 대했고 근본적인 문제를 소홀하게 대했다.

기원전 637년은 성왕 재위 39년이다. 그 해 가을, 초성왕은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전에 영윤을 역임했던 자문을 보내 규(睽)라는 땅에서 열병하게 했다. 다시 성왕은 계속해서 당시의 영윤 자옥을 같은 장소로 보내 별도로 초군을 열병하도록 명하여 두 사람의 치군을 비교하려고 했다. 자문은 열병을 단지 새벽녘에 다 끝내고 한 사람의 사졸에게도 군법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옥이 열병을 행할 때는 꼬박 하루에 걸쳐 7명의 사졸들을 채찍으로 내리치고 긴 화살대로 3명의 사졸들 귀를 뚫어 징벌을 행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신료들이 자옥의 치군 솜씨를 칭찬하며 영윤의 후임으로 잘 천거했다고 축하했다. 자문은 매우 흡족한 마음이 되어 자옥에게 술을 돌렸다. 열병식에 참석한 대부분의 인사들과 달리 당시 어린 나이의 위가(蒍贾)는 자옥의 행위를 칭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옥이 백성들을 적법하게 다스리지 않았고 또한 용병에도 능하지 않아 그에게는 군사를 300백 승 이상을 지휘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혹평했다. 전차 한 승은 수레에 타는 갑사 3인과 그 뒤를 따르는 보졸 75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춘추 때 최소의 전투부대 단위다. 위가는 자옥을 영윤으로 임명하여 싸움에서 패하게 해서는 된다고 주장했다. 초나라의 대군의 운명을 쥐고 있는 영윤이 그의 기량으로는 오로지 소수의 군대만을 지휘할 수 있어 국인들은 불행한 사태를 걱정하고 있는데 무슨 도리로 축하를 하느냐고 힐난했다. 그때 어린 나이의 위가가 자옥을 평했던 말은 후에 불행하게도 적중하고 말았다. 그해 겨울 초성왕은 초(楚),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등의 오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송나라 도성을 포위했다. 이로써 당진과 초나라의 국운을 건 건곤일척의 전쟁인 성복대전(城濮大戰)의 서막이 올랐다.


성복대전(城濮之战)


기원전 632년 당진군이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황하를 도하한 후 먼저 조(曹)나라를 공격하고 계속해서 남진해서 위(衛)나라를 압박하여 송나라에 대한 초나라의 포위를 풀려고 했으나 초나라 군사들은 송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진문공(晋文公)이 신료들과 장수들을 불러 초나라와 싸우기 위해서 섬진(陝秦)과 제(齊) 두 나라의 협력을 얻기 위한 방안에 대해 상의했다. 소장파를 대표하는 장군 선진(先轸)이 의견을 말했다.

“섬진과 제 두 나라가 초나라에 원한을 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송나라로 하여금 우리 당진국 대신 후한 재물을 지니고 섬진과 제 두나라에 가서 구원을 청하게 하십시오. 재물을 받은 섬진과 제 두 나라가 송나라를 위해 포위를 풀어달라고 초나라에 청하면 초나라의 대장 자옥은 틀림없이 거절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초나라와 섬진과 제 두 나라는 절교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당진국은 섬진과 제 두 나라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함께 초나라 군사들과 싸울 수 있습니다. 진문공은 선진의 계책을 따랐다. 당진, 섬진, 제 등의 세 대국이 결맹했다는 소식을 들은 초성왕은 초군을 송나라에서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자옥에게 명을 내려 군사를 철수시켜 본국으로 회군하라는 명렬을 내렸다. 그러나 자옥은 성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대부 투월초(鬪越椒)를 보내 당진군과 결전을 해야겠다는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했다.

“제가 전공을 세우려는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를 참소한 자의 입[讒慝之口]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즉 성득심은 출전하기 전 위가가 지적한 말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마음이 움직인 성왕은 자옥에게 철군하라는 명령을 고집하지는 않았으나 서광(西廣), 동궁(東宮)과 약오씨(與若氏) 종족으로 이루어진 6백 명에 불과한 소수의 군대만 원군으로 자옥에게 보내주었다. 이때 초나라의 국권을 장악한 약오씨는 문무을 망라한 관원으로 초나라 조정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며 그들은 여전히 초성왕이 자기들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성왕의 말을 편의에 따라 듣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했다.《국어(国语)·초어(楚语)》에 자옥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한다는 소식을 들은 당진군은 후퇴할 준비를 하자 왕손계(王孙启)가 선진(先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나라와 동맹을 맺은 제후들 중 반 수가 자옥을 따르지 않고 있으며 약오씨에게도 역시 더 이상 자옥의 명이 서지 않고 있습니다. 초군이 싸움에 패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군대가 철군한단 말입니까? 당진군은 이곳에서 초군을 기다려 결전을 해야 합니다.”

자옥은 당진군 진영에 사자를 파견하여 자신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게 했다.

󰡒당진군이 위(衛)와 조(曹) 두 나라를 복국시켜 준다면 초나라는 송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물러가겠다.󰡓

자옥의 제안은 매우 훌륭한 제안으로 당진과 초 두 강대국은 전쟁의 위험을 피할 수 있으며 송, 위, 조 세 나라의 사직을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때 자옥은 결코 용기만 앞세운 무모한 장수는 아니었다. 당진국의 대책은 비밀리에 조와 위 두 나라의 복국을 허락했지만 두 나라 군주들에게 초나라를 배반하고 당진국을 따라야한다는 조건을 붙이고 동시에 자옥이 파견한 사자를 구류시켜 격노한 자옥을 북상하도록 유인하여 별도의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과연 위와 조 두 나라는 모두 자옥에게 앞으로는 초나라를 받들지 못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자옥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즉시 송나라 도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곧바로 당진군이 포진하고 있던 위나라를 향해 초군을 북상시켰다. 그때 당진군의 수효는 적고 초군은 많았음으로 당진군이 후퇴하자 자옥은 전군을 이끌고 당진군의 뒤를 추격했다. 그해 4월 무신(戊辰) 일에 당진군을 추격한 초군은 험지에 의지하여 영채를 세워 숙영했다. 다음 날이 되자 마침내 초나라와 당진국의 두 군대는 진영을 세우고 대치를 시작할 때 자옥은 다음과 같이 큰소리를 쳤다.

“오늘 내가 반드시 당진군을 없애버리고야 말겠다.”

자옥은 중군을 맡고 자서(子西)는 신식(申息)의 병사로 이루어진 좌군을, 자상(子上) 투발(鬪發)은 진채(陳蔡) 두 나라 병사로 구성된 우군을 맡았다. 당진의 중군은 초군의 중군과, 상군은 자서의 좌군과, 하군은 자상의 우군과 대진했다. 초(楚)、진(陈)、채(蔡) 3국 연합군의 병력은 1200승이었고 당진, 송, 제, 섬진의 4국 연합군의 병력은 1000승이었다. 진채(陳蔡)의 병사로 구성된 초나라 진영의 우군은 비교적 허약했다. 스스로를 부용국(附庸國) 출신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자학한 그들은 자신들의 천직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일이 순조롭게 흘러갈 때는 능히 적진을 향해 돌격하지만 역경에 처해 세가 불리하게 되었을 때는 굳게 지키지 못하고 완강하게 저항할 전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당진군은 좌군의 그런 경향을 초군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간파했다. 그래서 당진군은 하군으로 하여금 초군의 우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당진의 하군은 전차를 끄는 전마에 호랑이 가죽을 입힌 후에 갑자기 초나라의 우군 앞에 나타났다. 진채(陳蔡)의 우군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당진군의 전마의 모습에 놀라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진채의 장수와 사졸들은 당진군의 기이한 모습을 보고 서로 먼저 도주하려고 다투게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초나라의 우군이 붕궤되려는 순간 당진국의 상군은 전투를 피하여 후퇴하는 척 가장했다. 초나라의 좌군대장 자서가 후퇴하는 당진의 상군 뒤를 추격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당진의 상군은 진군방향을 뒤로 돌려 중군과 함께 초군에게 협공을 가했다. 당진의 중군과 상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초나라의 좌군은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는 초나라 진영으로 후퇴했다. 초나라의 주력부대인 중군을 지휘하고 있던 자옥은 초군의 좌우군이 모두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군마저 포위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빠져나가야 겠다고 결심했다. 초군과 당진군의 전투의 승패는 불과 반나절 만에 결판났다. 비록 초나라가 패전을 했지만 초나라의 주력군은 크게 손상을 입지 않고 원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당진국이 전투에서 승리를 취한 것은 행운이 따른 결과였다. 자옥은 패잔병을 수습해서 회군하다가 방성(方城) 부근의 연곡성(連谷城)에 들어가 패전의 책임에 대한 초성왕의 처분을 기다렸다. 초초성왕이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했다.

“그대는 무슨 이유로 방성으로 들어가 자식을 잃은 신현과 식현의 부로(父老)들을 기다리고 있는가?”

자옥은 할 말을 잃고 곧바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성복대전에 대한 좌전의 기사

노희공(魯僖公) 28년 기원전 632년 여름 무진일에 진문공(晉文公), 송성공(宋成公), 제나라의 대부 국귀보(國歸父)와 최요(崔夭), 섬진(陝秦)의 소자은(小子憖)이 군사를 이끌고 성복에 당도하여 주둔했다. 한편 초군은 휴(酅)라는 곳에 험지를 등지고 진을 쳤다. 초나라 진영을 보고 걱정하고 있던 진문공은 잡부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었다.

『들판에는 풀이 무성하구나! 묵은 뿌리를 뽑아 버리고 새로운 씨를 뿌린다.

[原田每每, 舍其舊而新是謀]』

진문공이 노래 소리가 불길하다고 의심하자 자범(子犯) 호언(狐偃)이 말했다.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면 틀림없이 제후를 얻어 패자가 될 수 있고 설사 이기지 못한다 해도 우리 당진국은 밖으로 큰 강이 흐르고 안으로는 험한 산이 솟은 요새지가 있어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문공이 대답했다.

“ 옛날 내가 유랑할 때 초왕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난정자(欒貞子) 지(枝)가 대신 대답했다.

“한수(漢水) 북쪽의 희성(姬姓) 제후국은 초나라에 의해 모두 멸망당했습니다. 조그만 은혜를 생각하여 큰 치욕을 당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기필코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진문공이 밤에 잠을 자다가 초왕과 싸우는 꿈을 꾸었다. 초왕이 자기 몸 위에 엎드려 자신의 뇌를 빨아먹는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진문공은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자범(子犯)이 듣고 해몽했다.

“길한 꿈입니다. 주공께서 넘어져서 하늘을 향하고 있었으니 하늘을 얻고 초왕은 밑을 보느라 하늘을 등졌으니 죄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유연함으로 초나라 군대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하늘의 계십입니다.”

자옥이 투발(鬪發)을 사자로 보내 전서를 보내면서 진문공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다.

“청하건데 당신의 군사들과 기량을 저울질해보고 싶습니다. 그대는 전거의 횡목에 기대어 서서 관전하시면 나 자옥도 함께 관전하겠소.”

진문공이 란지로 하여금 대신 대답하도록 했다.

“우리의 군주는 그대의 가르침을 받았노라! 초왕의 은혜를 우리는 감히 잊을 수 없어 삼사(三舍) 거리를 후퇴하여 이곳까지 군사를 물리쳤고 그대 대부 신분인 자옥을 위해서도 우리들은 모두 후퇴하여 양보하려고 하는데 어찌 감히 그대 군주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귀국으로부터 군사를 물리치라는 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감히 그대를 번거롭게 하면서 귀국의 두세 명의 장령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라! ‘그대들의 전차를 정비하고 그대들의 군주가 부여한 임무를 잘 살펴라’ 우리들은 내일 아침 일찍 전쟁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당진군의 전차는 700승이었으나 거마와 장비는 단단히 준비되어 있었다. 진문공이 유신씨(有莘氏)의 유지(遺址)에 군사를 열병하고 군용을 갖추면서 말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모두 예의를 갖추고 있으나 모두 군사로 부릴만 하구나!”

그리고는 군사를 동원하여 당지의 나무를 베어 무기를 보충하게 했다.

4월 초4일 당진군은 신(莘)의 북쪽에 진영을 펼쳤고 하군부수(下君副帥) 서신(胥臣)은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진채(陳蔡) 두 나라 군사로 이루어진 초나라의 좌군과 대치했다. 초군 대장 자옥은 초왕이 원군으로 파견한 약오씨의 6백 명의 병졸을 포함하여 주력인 중군을 향해 말했다.

“오늘 나는 반드시 당진국을 멸하겠다.”

초군의 좌군대장은 자서(子西) 투의신(鬪宜申)이었고 우군대장은 자상(子上) 투발이었다. 당진군의 하군부수 서신이 전마에 호랑이 가죽을 입힌 후에 진채의 장정으로 이루어진 초군의 좌군을 공격했다. 진채의 좌군은 놀라 서로 다투어 도망치고 우군도 역시 전투에서 지고 붕궤되었다. 당진군의 상군주수(上軍主帥) 호모(狐毛)가 두 개의 큰 깃발을 세워 후퇴의 명을 내려 거짓 군사를 물리치자 초군이 유인책에 넘어가 당진군의 뒤를 추격했다. 선진(先軫)과 극진(郤溱)이 중군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초군의 허리를 끊고 맹공을 가했다. 상군을 이끌고 후퇴하다가 매복해있던 호모와 호언의 상군이 일제히 일어나 초군의 우군을 양쪽에서 협공했다. 이로써 초군의 좌군은 모두 복멸되었다. 마침내 초군은 싸움에서 대패했다. 이에 자옥은 군사를 급히 불러들여 움직이지 않고 굳게 방비했음으로 초나라의 주력부대인 중군은 온전할 수 있었다.


당진군은 초군이 세운 영채에서 3일을 머무르면서 그들의 군량으로 배불리 먹고 4월 8일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회군길에 올랐다. 4월 29일 하수를 도하하여 형옹(衡雍)에 이른 당진군은 천토(践土)에 주양왕(周襄王)을 위한 행궁을 축조했다.


성복대전이 발발하기 3개월 전 정문공은 초나라에 들어가 정나라 군대의 지휘를 초나라에 속하게 했었다. 그러나 성복대전에서 초군이 대패하자 당진국으로부터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자인구(子人九)를 사자로 보내 당진국에 수호를 청했다. 당진국은 란지(欒枝)를 정나라로 보내 정문공과 동맹을 맺도록 했다.

5월 11일, 진문공과 정문공이 형옹에서 만나 다시 우호를 맺고 맹세했다.

5월 12일, 진문공이 초군 포로 천 명과 장갑으로 말 네 마리가 끄는 장갑으로 무장한 전차 1백 량을 주양왕에게 바쳤다. 정문공이 주양왕을 대신해서 전례에 따라 의식을 주관했는데 옛날 주평왕(周平王)이 진문후(晉文侯) 희구(姬仇)에게 행한 예절로 진문공을 접대하게 했다.

5월 14일, 주양왕이 진문공에게 단 술을 하사한 후에 진문공에게 술잔에 술을 따라 바치라고 권했다. 주양왕이 윤씨(尹氏)、왕자호(王子虎)와 내사 숙흥보(叔兴父)에 명을 내려 서책(書策)으로 진문공을 제후들의 수령으로 임명하고 상급으로 진문공에게 대로(大輅)와 융로(戎輅) 각각 한 대와 그에 소용되는 의복과`깃발 및 기타 모든 장식품을 갖추어 주고 붉은 칠을 한 활 1개, 붉은 칠을 한 화살 100 개, 검은 칠을 한 활 10개, 검은 칠을 한 화살 1000개, 검은 기장으로 빚은 술 1통, 용사 300 명을 하사한 후에 말했다.

“천자가 숙부에게 전하니 천자의 명령을 공경한 자세로 따르고 사방의 나라를 편안하게 하며, 천자의 명을 어기는 자를 바로잡아 다스리시오!”

진문공이 세 번 사양하다가 명을 받아들이고 대답했다.

“이 중이가 감히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천자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책명을 받들고 서서히 물러나온 진문공은 그 후로 세 번이나 주양왕에게 조현을 올렸다.


《성득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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