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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 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의의
운영자

한비자

-제왕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정치학 교과서-


왕굉빈 해설 황효순 편역


『한비자』는 현대의 중국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는 지침서요, 중국인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척도이다! 이 책은 법가사상의 기원에서부터 진화과정을 연대기적으로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치사상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저절로 이해할 수 있도록 법가사상 의 핵심사항을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법가사상을 이론적 기반으로 세상을 지배했던 정치사상가의 일면들을 조명함으로써 한비사상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며, 특히 그의 사상이 후대에 미친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여 한비 사상을 표방한 제왕들의 통치술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저자 왕굉빈

왕굉빈 교수는 1954년 하남성 낙양에서 출생했다. 하남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중산대학 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하북사범대학교 역사사문화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학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역사문화학원 원장, 하북성역사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왕 교수는 중국근대사 강의와 연구업무를 계속하고 있으며, 역사학 분야에서 권위 있는 다수의 저작물을 남겼다. 그의 주요 연구 성과로는 「청말기화폐의 비교연구」「중국근대의 가치척도와 아편문제」「독금사감」「일본의 아편을 통한 중국침략 50년」「청대전기의 해안방어, 그 사상과 제도」「청말 해안방어사상과 제도연구」등이 있으며, 「역사연구」「근대사연구」「광명일보」 등의 학술 잡지 및 언론에 약 50여 편의 학술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

역자 황효순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 사학과에서 중국역사를 전공하였으며, 동 대학원에서 중국경제사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국과 국교가 수립되기 이전 해외한민족연구소, 동아시아경제연구원의 연구원을 시작으로 동아시아경제연구원의 연구실장을 역임했으며, 한중수교 이후 중국의 지역경제 연구에 뜻을 두고 동서문화센터에서 지역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중국지역개발연구원 원장으로 연구생활을 하면서 행자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지역경제학회에서 중국 연구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중국경제통상학부를 통해 중국전문가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2008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의 외국인 고문으로 위촉되어 한중양국의 문화교류 협력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에 는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로 활동하며, 동양고전의 심오한 지혜를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지역개발론』『문화적 자원과 중국경제의 발전』『중국중소도시의 문화적 자원 활용』 이 있고, 공저로 『한국통신사업자의 중국진출방안』(한국통신)이 있으며, 「경기북부 한국가구산업의 중국진출 전략」을 비롯하여, 중소기업청이 주관한 「중국진출 한국기업의 실태조사」등 수많은 정부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차례


제1장 한비와 『한비자』

1. 한비의 운명과 일생

2. 한비의 법가사상과 이전의 법가 사상

3. 『한비자』 의 처세와 지혜

4. 『한비자』 의 문학적 공로


제2장 한비사상의 실천과 진왕조의 흥망

1. 진의 흥기와 변법

2. 진시황, 이사와 한비

3. 군주 일인독재체제의 구축

4. 형벌로 세운 권위

5. 사치와 무한한 욕망 - 스스로의 무덤을 파다

6. 진시황의 후계자 호해와 모략가 조고

7. 진왕조의 붕괴


제3장 외도내법에서 양유음법으로 진화

1. 진나라를 답습한 한제국

2. 한 초기의 황로사상에 입각한 통치

3. 표면적으로는 도가를 내부적으로는 법가를 취했던 황로학

4. 육가, 숙손통, 가의

5. 陽儒陰法 관념 체계의 확립자, 동중서

6. 표면적으로 유가를 표방하고, 내부적으로 법가를 취함


제4장 한비의 법치 이론과 정치사상가

1. 난세에는 형벌을 최우선으로 한다-조조

2. 가르침엔 엄격함이 있어야 하고, 상벌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제갈량

3. 존귀한 자를 벌함으로 권위를 세우고, 천한 자를 상줌으로 선함을 장려한다-갈홍

4. 안정된 국가는 예로 통치하고, 혼란한 국가는 법으로 통치한다-왕맹

5. 천하에 대한 진정한 통치는 진나라에서 유래한다-유종원

6. 죄를 지은 자는 마땅히 벌한다-포증

7. 세상이 변하면 마땅히 법도 변해야 한다-왕안석

8. 국가를 통일하는 것은 엄격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주원장

9. 군주를 존귀하게 여기고, 관리의 직무를 명확히 하며, 상벌에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장거정


5장 제왕술의 역사

1. 예와 법의 불가피한 동침

2. 한신을 처형한 유방

3.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제 양광

4. 이세민과 현무문의 변

5. 여황제의 꿈을 이룬 무측천

6. 연회를 열어 병권을 찬탈한 조광윤

7. 화친을 요구하며 지위를 유지한 조구

8. 주익균의 남면지술

9. 옹정제의 황제 즉위

10. 건륭황제와 탐관오리 화신


제6장 한비 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의의

1. 국가의 패망 앞에 서 있던 지식인

2. 내일을 위해 개혁에 힘써야 하며,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공자진

3. 옛 것을 변화시키면, 백성들이 행복해질 것이다-위원

4. 법과 이치를 중시하면, 폭력을 제거할 수 있다-증국번

5. 신불해와 한비의 현명함은 요순의 10배에 달한다-왕사탁

6. 한비 사상의 또 다른 의미를 예찬하다-엄복

7. 한비에게 양복을 입히다-양계초

8. 혁명가가 논한 법가-장태염

9. 법가 부흥론-상연생 & 진계천


7장 한비 사상의 또 다른 지혜

1. 관리학에서 나타나는 한비의 지혜

2. 마케팅에 적용하는 한비의 지혜



한비의 생애

한나라의 공자로 태어난 한비는 진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비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권력을 잡았었던 적도 없고, 찬란한 정치적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오히려 굴욕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10여만 자에 달하는 국가통치의 이론과 사상, 통치를 위한 전략을 후세에 남겼다. 이 이론과 사상 그리고 통치술은 사람들에게 번쩍이는 섬광이었고, 땅을 울리는 굉음이었다. 또한 그의 사상과 전략이 응축돼 있는 『한비자』는 제왕들의 필독서로 받들어지고 있다.

『한비자』는 진나라 임금에 의해 읽혀지고,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였다. 진왕은 한비의 이론을 철저하게 적용하려 했다. 한비가 주장했던 ‘법술세(법술세)’의 사상은 진왕에게 스며들어 결국 통일된 진왕조의 수립을 가능케 하였고,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건설이라는 불후의 패업을 완성하도록 하였다.한비는 저술을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의 저서 『한비자』를 통하여 춘추시대 이래의 법가사상은 매우 정교하게 통합되고 창조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한비자』는 한시대의 사상 흐름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업적물이다. 그의 저작 속에서 한비는 천재적인 사상의 날개를 펼쳤으며, 제왕의 책무에 대하여 경계하며, 제왕이 꼭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제왕의 모든 언행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의 성공적인 통치와 변방의 공략 그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크게는 천자에서 작게는 제후에 이르기까지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목적은 스스로 군왕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고 모든 권력을 동원하여 혼란을 막고, 자신의 생명과 국가의 재난을 막음으로써 불후의 패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한비 사상의 학술적 기원


-법가사상의 집대성

한비사상의 주체는 법술사상이다. 사람들은 그가 상앙의 ‘법(法)’, 신불해의 ‘술(術)’, 신도의 ‘세(勢)’이론을 흡수하였고, 이를 집대성하여 하나로 녹여서 법가의 정치이론 체계를 완성하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한비는 일찍이 신불해는 “술을 추구하나 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신불해가 한나라 무후를 보좌할 때, 비록 최고 통치자들에게 술을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관리들을 대함에 있어 법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라는 패권국이 될 수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또한 상앙이 “법을 따랐으나 술을 활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상앙이 진나라 효공을 섬기고 있을 때, 법치를 통해 진나라는 부국강병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나, 권술(權術)을 잘 활용하지 못하여 임금은 이익을 얻을 수 없었고, 대권을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제왕의 통치를 실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법과 술을 동시에 잘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신도의 권세를 통한 통치의 학설을 채택하였다. 그는 권력과 세력의 중요성을 중시하여 “법을 장악하고, 권세를 활용한 통치를 해야 한다. 법을 배제하고, 세력을 잃게 되면 그것은 곧 혼란을 야기한다”고 강조하였다. 법(法)은 관청에서 공표한 성문법을 말하며, 서적으로 편집된 법규를 말한다. 술(術)은 군주가 은밀히 심중에 간추고 있는 권력과 통치술을 말한다. 이는 곧 신하와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이다. 세(勢)는 군주가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권력과 지위를 말한다. 이를 통해 신하들이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한비는 바로 이러한 세 학설을 종합하여 체계화된 법가의 정치학설을 완성하였다.


이와 같이 한비의 정치학설과 초기 법가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주장은 차이가 있다. 한비의 정치사상 체계는 법치, 술치, 세치 이론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상호작용을 통하여 각각의 이론을 서로 보완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군주는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활용하고, 술수를 통하여 신하들을 통제하고, 동시에 신하들의 보좌를 통하여 백성들이 공포된 성문법규를 엄격히 준수하도록 하면, 천하를 능히 통치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일종의 전형적인 제왕의 통치술이다. 또한 한비가 법가사상을 집대성했다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비자』 의 처세와 지혜

한비의 인성론 -이익을 탐하여 악을 행함

전국시대 백가쟁명의 사상계에서 인성(人性) 문제는 각 학파가 모두 중시했던 문제였다. 각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인성의 선악문제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하였고 매우 깊이 있는 연구를 했다. 몇몇사람들은 인성을 선하다고 보았고 어떤 이는 약하다고 보았으며 또 어떤 이는 악한 면과 선한 면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보았고, 어떤 이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인성의 선함과 악함의 문제는 선진시기 각 학파들의 사상의 주요 쟁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선한 본성을 긍정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고 민본사상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맹자는 사람들을 모두 동정하는 마음,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 인과 의를 위해 사욕을 멀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이러한 마음(착한 본성)이 발현되면 요순의 태평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맹자는 백성을 귀히 여기고 군주를 민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본성의 악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 선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채찍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힘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다. 순자는 인성의 악함을 가장 먼저 정면으로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시 교육을 통해 그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악한 인성을 선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순자의 제자가 되었던 한비는 스승의 성악론을 계승하였고 인간의 사악한 본성의 근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사회관계를 연구하는 데서 출발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쫓아 행동하며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한비는 스승인 순자처럼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주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인성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으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은 모든 인간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취하는 본성은 악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비자』 의 문학적 공로

- 논리는 골수에 사무치며, 문장으로 심장에 새긴다 -

한비는 사상가이며, 정치가임과 동시에 문학가로서도 중국문학사에 중요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한비자』 55편은 체제가 다양하고, 장편의 논문은 물론 단편의 잡문도 있고, 또 논박형의 역사평론, 또 강목(綱目)형의 경전도 존재한다. 대부분은 논의와 논쟁을 위한 문장이며, 서술방식에는 우화나 고사 등을 동원하기도 했다. 한비자는 기본적으로는 산문의 형태이며, 산문과 운문이 결합된 운문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도 다루는 주제가 풍부하고 풍격이 다양하며 다양한 문제로 정리되어 그 문장의 세밀함과 정밀함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선진시대에 장편의 전문주제를 다루는 논문의 글은 『묵자』로부터 시작하여 『순자』에 이르면서 그 기초를 다졌고, 『한비자』는 이를 발전시켰다. 한비의 문장은 포함하는 내용이 확대되고 구조는 더욱더 세밀하고 복잡해졌으며, 문필의 힘과 초점은 더욱더 예리해져서 논의가 명확하고, 정밀해졌다. 따라서 ‘주제를 다루는 논의는 골수에 사무치는 듯하며, 글로써 사람들의 심장에 각인되는’ 선명한 논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현학」「오두」「세난」「고분」 등의 장편의 문장들이 대표적이다.

「현학」은 선진시대 학술에 대해 종합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 논문이다. 이 글에서 한비자는 그 비판의 창날을 당시 유행하던 유가와 묵가를 향하고 있었다. 또한 양주나 송영 등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비판의 형태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모순되는 점과 시비를 밝히는 방식을 기본으로 취하고 있으며, 그 판단의 기준은 현실정치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는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작용하는가에 두었다. 그의 문장은 과감하며, 자신감에 차 있고, 논박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논리적이었다. 옛 사람들은 한비의 글에 대해 말하기를 “그 주장의 다다름이 종횡무진하여 거침이 없다”, “마치 황하의 흐름과 같이 위엄과 당당함이 있어 누구도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 비록 그 흐름은 여러 갈래에서 유래하지만 하나의 물길로 귀결된다”고 평가했다.


「오두」는 한비가 살던 시대의 사회 역사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한비는 역사란 부단히 변화하고 진보하는 것으로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일은 그 변화에 맞추어 준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비판과 부정이라는 두 방법을 통해 고대의 관념을 수정하려고 노력했다. 이 문장 역시 그 다루는 범위가 대단히 넓고, 글의 품격과 권위가 극에 달해 마치 큰 바람과 우뢰가 내리치는 것과 같다. 심지어 언어 표현의 과단성과 칭찬과 비판에 대한 확고한 의지,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차갑고 논리적인 필법은 작자의 냉정하고도 단호한 성격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후대의 학자들은 한비의 이 글에서 주장한 바에 대해 많은 반대 의견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 사용된 문학적 표현과 방법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원료범은 한비를 평하기를 “가슴속에는 마치 만 가지 줄기의 샘이 솟는 듯하여 마르지 않음과 같고, 그 변화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여 그 어느 것도 기이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장방 역시 “마치 큰 원(달)이 변화하듯 모든 것이 궁구함이 없이 드러난 것이 없고, 그 주장의 논리와 조리가 마치 실과 같아 다양한 문양과 무늬로 한 편의 멋진 옷감을 지은 듯하다”고 평했다.


「세난」은 정치 유세를 위한 전문적인 문장으로서, 일부는 스승인 순자의 『순자, 비상』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들 문장들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사안에 대해 매우 정밀하고 심도있는 분석을 취하고 있다. 마치 벌집과 같이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 여러 단계로 주장을 증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 손월봉은 “그 문장의 정연함과 논리는 너무 기이하고 세밀하여 그 문장의 단 한 구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고분」은 감정적인 필법으로 그의 정서가 매우 진하게 녹아있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법술가와 당시의 권세 있는 중신들과의 모순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권세가들에 의해 법술의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 불평등한 처우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 이 문장들은 대체적으로 당시 세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서로의 입장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서술하여 그 차별과 불평등함을 고발하고 있는데, 문장의 내용상 그 격한 감정이 그대로 녹아있고, 비분강개의 정서가 표현되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머리와 가슴에 오래 남게 하는 문장으로 한비의 필범을 느낄 수 있는 글이다.


한비의 법치 이론과 정치사상가

난세에는 형벌을 최우선으로 한다-조조


조조(曺操)는 동한 말기의 유명한 정치가이다. 그는 선진시대의 법가로부터 많은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위지․무제기』에서 조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나라 말기에 천하가 크게 혼란에 빠지자 각지에서 영웅과 호걸들이 일어났다. 당시 원소가 4주(四州)를 장악하고 있었고 그 강성함에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太祖, 조조를 말함)는 자신을 드러나지 않고, 신불해와 상앙의 법술과 한비의 책략을 배웠다. 관의 도움을 얻어, 그 도구들을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미리 상황을 계산하고 판단하여 이익이 되면 이전의 잘못을 문제 삼지 않았다. 결국 그는 황제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명철함과 모략의 우수함이 이와 같았으며, 감히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세상에 그의 호걸스러움을 뛰어넘는 자가 없었다.”

조조에 대한 진수의 평가는 조조의 진면목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조조는 법치의 작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찍이 그는 명령하기를 “군대가 전투에 임할 때에는 공적이 있다고 하여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모범이 될 수 없다”고 하였고, 군대를 통솔하는 것뿐 아니라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서도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는 예를 최고의 가치로 치지만, 혼란스러울 때는 무기를 앞세운다”고 하였다.

조조는 그의 한평생을 통해 “난세에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형벌을 가장 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법을 세웠으면 범하지 말아야 하며, 범할 경우 반드시 처벌한다”는 생각을 견지하였다. 그의 법률 집행에 대한 의지는 매우 단호하였다. 조조는 한비의 사상을 계승하여 “법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사상을 가졌으며, 어떤 사람도 반드시 국가가 정한 법률을 준수해야 하며, 신분이나 지위가 어떠하든지 법을 어길 경우에는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비는 “법은 무엇보다 귀하며, 공평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학식이 있는 자는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펼 것이요, 용감한 자는 다툼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징벌을 공평하고 엄격하게 해야 하며 포상 역시 공정하게 하여 공적이 없는 자는 포상을 받을 수 없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조는 이러한 한비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실천한 정치가였다. 조조는 사법관료 선발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형벌을 담당하는 자는 백성의 생명을 담당하는 것이다. 군대에서도 감옥을 책임지는 자와 형벌을 담당하는 자는 군대의 생가에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우선 법에 능통한 사람으로 하여금 형의 집행을 맡도록 해야 한다.”라고 제의하였다. 조조는 그의 부하 중에 법률에 통달한 자가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중용하였다. 그는 다년간의 출정 경험을 통해 군대는 반드시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기와 법률이 엄격하고 공정해야 군대는 강력한 힘을 유지할 수 있고 비로소 나라는 부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조조는 꾸준히 법으로 군대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강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군벌 세력을 소

탕하고 중국 북부 지역을 통일하는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또한, 조조는 법가들이 주장한 “품성이 좋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임용한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재능이 있는 자들은 눈에 띄는 대로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전국에 세 차례나 명령하여 지혜와 재능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도록 하였고, 모름지기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를 지휘하는 데 있어 능력 있는 자는 일체 그 신분과 문벌을 묻지 않았으며, 일률적으로 중책을 위임하였다. 사서에서 조조를 평가하기를 “조조는 인재를 등용하는데 어떤 제한이나 원칙에 구애받지 않았다. 장요, 서황은 적의 포로 중에서 발탁되었는데, 이들이 공을 세우자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는 바로 한비의 “재상은 시골에서 나오는 법이고, 명장은 사병으로부터 나오는 법이다”라는 가르침을 실제에 적용하고 실천한 것이다.

조조는 법가의 ‘경전(耕戰, 전투에 임하며 농사를 지음)사상’ 즉, 병농합일(兵農合一) 정신을 계승하였다. 조조는 경전에 대해 다음과 같으나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를 바로 세움에는 강한 군대와 충분한 식량이 있어야 한다. 진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중시하여 천하를 평정하였고, 효제와 무제는 둔전을 실시하여 서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이는 모두 선인들의 훌륭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조조는 군량과 급료를 해결하기 위해, ‘경전’을 장려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그리고 모집한 농민과 군대에게 여러 해 계속된 전쟁에 의해 발생된 주인 없는 황무지를 분배하고 경작하게 하였다. 이 정책이 널리 시행된 후, 생산의 많은 발전이 있었고, 식량 부족으로 인한 사회 모순이 많이 완화되었으며, 북방 통일 전쟁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비의 “법의 공평함, 상과 벌을 명확하고 공정하게 함, 품성 좋고 능력있는 인재 등용, 경전 장려”등의 사상과 주장은 조조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한비 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의의

- 옛 것을 변화시키면, 백성들이 행복해질 것이다-위원


아편전쟁은 중국이 근대의 시대로 나아가는 장막을 걷어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중국인들과 서구 열강의 침략자들 사이에는 격렬한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중국 근현대 사상계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이를 위한 논의 과정은 향후 몇 세기에 걸쳐 중국인들의 행동과 사상을 지배하였다.

임칙서는 아편 흡입을 강력하게 금지할 것과, 외세의 중국 진출에 결사적으로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나라를 위해 행동에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그의 강렬한 애국정신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그의 친구들과 측근들에게 크나큰 정신적 위안이 되었다. 위원, 공자진, 임칙서는 모두 친밀한 교제를 나누던 친구들이었다. 위원과 공자진은 금문경학파(한나라 이후 유교가 관학화된 이후에 정리된 경서를 연구하는 학파)로, 모두 경세치용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위원은 공자진보다 조금 더 오래 살면서 아편전

쟁 패배의 치욕과 청 정부의 투항이라는 추행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공자진보다 더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위원은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력이 강해야만 외세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으며 외세를 배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부의 내부부터 개혁을 단행하고, 필요하다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실정법조차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역시 대부분의 변법학자들과 같이 모든 사건이나 사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고 인식했다.

“3대의 세월이 지나면, 하늘도 땅도 사람들도 모두 지금의 것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진화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변화 발전의 관념에서 그는 명확히 주장하였다.

“옛 것을 바꾸어 개선하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수백 년의 역사가 흘러오는 가운데 폐지되지 않은 법은 없으며,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제도, 군사, 병역, 조세징수 모두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 법이란 변할수록 개선된다. 현명한 군주는 옛 것을 참고할 뿐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강물이 역류하여 다시 산으로 오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위원은 “한나라의 문제는 육형을 폐지했고, 이로 인해 이전 시대의 가혹함은 어짊으로 변하게 되었다. 유자는 봉건제도를 배척했다. 따라서 이전의 정치가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변했다. 세습되던 귀족을 선발하여 관리를 삼던 일이 공평한 선발제도로 바뀌었다. 이로써 봉건제도가 변하여 군현제와 유사한 정치제도를 갖게 되었다.”며 역사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그는 법의 개혁을 반대하는 유학자들을 ‘완고하며 고집스러운 유학자’라 비판했다. 그는 중국 사회는 이미 군대와 형벌이 지배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군사와 형벌이 없이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군대로 군사를 제어하고’, ‘형벌로 범죄를 다스리는’ 사회에 접어들었기에 유학자들이 말하는 허위적인 인의로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여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형벌로 범죄를 제어한다’는 말은 가혹하고 폭력적인 법의 적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과 질서의 유지를 위한 적절하고 합리적인 형벌과 법령이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강력한 힘이 수반되지 않으면 법은 바로 설 수 없고, 범죄를 반드시 근절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없다면 법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백성들을 통치하고자 하면 병폐와 범죄에 대해 매우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며, 구습을 혁파하는데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한 이에 반대하는 자에게는 강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따라서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서는 ‘황제(黃帝), 노자, 신불해, 한비자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즉, 나라를 다스릴 때는 무조건 엄격하고 가혹한 형벌과 법령을 취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법의 적용을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것은 법의 관대함과 엄격함, 형벌의 경중 모두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결정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나라가 진나라의 가혹한 폭정을 계승한 후 가벼운 형벌과 간단한 법률을 채택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한고조의 ‘약법삼장(約法三章)’부터 문제, 경제 때 국가가 잘 다스려지기까지, 한 초기의 통치가는 올바른 정책을 취했다. 물론, 가혹하진 않지만 엄격한 제도와 법률이 사용되기도 했다. ‘법률로서 법률을 통제하는 것’의 원리를 통해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의 효과 역시 모두 좋았다. 법치를 시행할 때, 가장 좋은 것이 다스리는 법과 또 그것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위원이 위에서 주장한 내용과 『한비자』의 법치사상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옛것이 변하여 다함이 있으면, 백성들의 삶은 더 나아지는 법이다”라는 변법 주장과 법가의 사회개혁 이론 역시 완전히 일치한다. 유가의 덕치나 도가의 무위지치 그리고 법가의 형명지술은 모두 겸용할 수 있는 것이다. 상황에 맞게 각 이론의 장점을 취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으로, 진한(秦漢) 이후의 통치자들은 일찍이 이러한 통치이념을 실천해 왔다. 위원이 “황제, 노자, 신불해, 한비자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만 봐도 한비의 사상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한비 사상의 또 다른 지혜

- 관리학에서 나타나는 한비의 지혜, 현대의 관리부문에서 한비의 ‘법치’ 응용 -


법은 관청의 주관 하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형벌제도는 반드시 민중의 사상과 의식을 반영해야 하고 또한 이를 근거로 철저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법을 잘 지키는 자에겐 상을 주고, 법률을 위반하는 자에겐 형벌을 내려야 한다. 즉 법은 관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관리에게 법치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요소라 할 수 있다. 기업 내에서는 수많은 관계와 갈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경영자와 노동자의 관계, 개인과 기업의 관계, 사람과 사물의 관계, 사물과 사물의 관계 등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많은 다른 기업과의 관계, 그리고 외부 환경과의 관계도 존재한다. 이런 관계의 해결은 바로 갈등의 조절인데,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행위의 규범이 필요하다. 이런 행위의 규범은 대부분 기업문화를 세움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큰 문제는 반드시 법이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다. 기업에서의 법 형식은 기업의 규율, 조례, 기율, 정책, 조령, 지령, 계획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한비의 ‘법, 술, 세’ 중 현대 기업에서 가장 모범으로 삼아야 할 사상은 바로 법 사상이론이다. 기업에선 법 사상이론이다. 기업에선 법치야말로 관리의 기초가 되고, 법치가 있어야만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입지를 굳히고, 승리를 얻을 수 있다. 그래야만 기업은 생존할 수 있고, 또 발전할 수 있는 것이 다. 현대 기업 관리에 있어, 몇몇의 우수한 기업가는 기업의 규율을 제정하고 집행할 때, ‘법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는 원칙을 매우 중시한다.


중국 복건성 히다치 텔레비전 주식회사의 노동 규정은 ‘어떠한 직원도 지각해선 안 되고, 또 조기 퇴근해서도 안 된다. 출근 시 출근 체크카드를 반드시 찍어야 하며, 1분이라도 지각 시 그 달 월급에서 모두 차감된다. 일원이라도 공짜로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규정이 발표된 후 회사의 부사장이 지각을 했다. 이에 사장은 당장 그의 월급을 깎았다. 이 사건은 공표되지 않아도 소문에 소문을 이어 널리 퍼졌고, 규율 집행의 공평함과 엄격함이 모든 사원들에게 귀감이 되어 엄청난 긍정적 효과를 거두었고 회사와 직원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포상은 충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그것을 갈망할 것이다. 칭찬과 표창은 보기 좋아야 한다. 그럼 백성들은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반면 처벌은 엄격해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비난과 질책은 가혹해야 한다. 그러면 백성들은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한다.


한비의 ‘충분한 포상과 엄격한 처벌’ 사상은 전국시대 사회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형성되었다. 이심각한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서 ‘충분한 포상과 엄격한 처벌’의 시행은 최선의 효과적인 법 시행이었고, 바로 이 법은 열악하고 무질서한 사회 풍조를 바로잡고, 혼란한 사회를 질서가 잡힌 사회로 변하게 만든 강력한 무기였다. 사회가 매우 혼란스럽고 좋지 않은 풍조가 만연했던 열악한 상황에서 중형이란 법률을 시행하지 않고, 그냥 가벼운 처벌 형식만을 시행했다면, 상황이 개선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만약 충분한 포상으로 백성들을 격려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사회 풍조를 제창함에 대해 백성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 조건에 있어, 한비의 ‘충분한 포상과 엄격한 처벌’은 최선의 방책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후한 상과 엄한 벌’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 응용 범위는 일반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회와 기업 전체의 무질서한 상태에서 방치되거나 지체된 각종 일들이 모두 처리되기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 혼란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경우이다. 둘째, 집중된 역량으로 불량한 풍조를 타파하고 중지시키거나, 새로운 풍조를 제창하고 선양하는 경우인데, 이런 경우 특정 영역이나 부문에 있어 제한적으로 ‘충분한 상과 엄한 처벌’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우리는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 이용해야 하고, 또 옛날의 문화유산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선 법가 관리시스템과 선진 철학가들이 흡수했던 다양한 사상과 지식들이 필요하다. 이 모든 지혜를 현대 과학 관리와 결합하여 더욱 발전된 관리시스템을 창조해 낼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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