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 천하명필, 그 신화(神話)의 탄생을 살펴본다

중국 역사상 나타난, 그야말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서예작품 중 ‘최고(最高)’로 평가 받는 작품이 무엇일까요?

바로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입니다.그 값어치를 과연 매길 수나 있을까요?

일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2010년 아시아에서 거래된 예술작품 중 가장 고가(高價)로 거래된 작품이 북송(北宋)시대 서예가인 황정견(黃庭堅)의 <지주명(砥柱銘)>이란 서예작품인데,2010년 6월달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서 769억 원이란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가 되었습니다.

황정견(黃庭堅)이 중국서예사상 손꼽히는 서예가임은 분명하지만,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작품과 비교하자면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둘 수가 있을까요?

황정견(黃庭堅)이 쓴 서예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송풍각시첩(松風閣詩帖)>이란 작품인데,중국의 ‘천하십대행서(天下十大行書)’중에서는 끝부분인 아홉 번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천하제구행서(天下第九行書)인 이 <송풍각시첩(松風閣詩帖)>이 거래가 된다면,아마도 최소한 <지주명(砥柱銘)>의 몇배 가격으로 거래가 될 것입니다.

하물며 시기적으로도 700년 이상 앞서며, 더군다나 서예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의 작품임에야... 그 대단한 서성(書聖) 왕희지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最高)’로 일컬어지는 <난정서(蘭亭序)>는, 따라서 중국의 찬란한 역사상 명멸해간 수많은 서예작품위에 도저히 다른 작품들이 넘볼 수 없는 최고봉으로 우뚝 군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이 <난정서(蘭亭序)>가 알면 알수록 그 실체가 더욱 애매모호해지는 신기루 같은 존재라는 점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돈으로는 도저히 그 가격을 매길 수 없다하여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부르는 반면,정작 그 원작(原作)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작품, 베껴 쓴 유명한 임본(臨本)및 모본(摹本)만 500여종이 넘지만 임본(臨本)들의 글자가 조금씩 달라서 그 진본(眞本)의 글자가 어떠했는지 조차 알수 없는 작품,더욱 기가 막히는 사실은 이 작품을 왕희지(王羲之)가 썼는지,아니면 다른 사람이 썼는지 조차 분명치 않은 작품, 이런 모순투성이의 작품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입니다.

이 작품의 탄생 이래 수없이 많은 신화를 만들어 낸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이제 그 신 화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AD 353년, 동진(東晉)시대로서, 소위 말하는 중국역사상 최대(最大), 최장(最長)의 혼란기,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시작 무렵입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삼국시대 위(魏)는 기어코 촉(蜀)을 멸망시키는데,

그 이후 위(魏)의 재상인 사마염(司馬炎)은 위(魏)로부터 왕권을 탈취한 뒤에,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고 진(晉)을 개국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오(吳)를 멸망시키고 약 50여 년 동안 천하를 잠시 통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晉)은 이후, 북방 호족의 남하에 의해 멸망당함으로써 북조(北朝)인 5호 16국의 시대가 시작되는데, 그때 진(晉)의 일족은 과거 남쪽 오(吳)나라의 수도였던 건강(建康: 오늘날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으로 옮겨가 AD 317년 동진(東晉)을 건국하게 되니,이것이 남조(南朝)의 시작입니다.

그 동진(東晉)의 다섯 번째 임금 목제(穆帝)가 즉위한지 9년째 되던 해인 영화(永和) 9년(AD 353) 3월3일,

당시 회계내사(會稽內史)이자 우군장군(右軍將軍)이었던 왕희지(王羲之)는 자신의 아들 7명을 포함한 당시 사족(士族)들과 명사(名士)등 41인의 동진(東晉)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회계현(會稽縣: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난정(蘭亭)에 초청해 대규모의 연회를 열게 됩니다.

이러한 연회는 배타적인 동진(東晉)시대 귀족문화의 특성상 사족(士族)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음으로 여러 가지의 형식을 통해 자주 열렸다고 할 수 있는데,이날은 삼월 삼짓날, 계사(禊事: 물가에서 몸을 씻으며 한해의 재앙을 떨어버리는 중국 전통풍습)의 형식을 빌린 모임이었습니다.

이날의 모임은, 술잔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동안 시(詩)를 짓지 못하면 벌주(罰酒)로 술 3말을 마시는 소위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였는데,당시 참석한 사람 중 유명 인사였던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손작(孫綽)등 26명은 시(詩)를 지었고,나머지 15명은 시(詩)를 짓지 못해 술을 마십니다.

이날 지은 시(詩)들을 모아 철(綴)을 하고, 그 서문(序文)을 왕희지(王羲之)가 쓰며,당시 참여한 인사 중 가장 문명(文名)이 높았던 손작(孫綽)이 그 집회를 마무리하는 후서(後序)를 쓰게 되는데,이중 왕희지(王羲之)가 쓴 서문(序文)이 바로 그 유명한 <난정서(蘭亭序)>입니다.

<난정서(蘭亭序)>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날 난정집회(蘭亭集會)에서 지은 글 중 <난정서(蘭亭序)>만 기억되고 있는 실정입니다만,사실은 수 십 편의 사언시(四言詩)및 오언시(五言詩),그리고 서문(序文)및 후서(後序)까지 있는 일종의 문집 중 한 부분인 셈입니다.

당(唐)대 하연지(何延之: 당 현종 때 문인)가 기술한 <난정기(蘭亭記)>를 보면,당시 왕희지(王羲之)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繭紙: 누에고치 껍질로 만든 종이로서 종이 질이 좋기로 유명함)에 서수필(鼠須筆: 쥐의 수염을 사용하여 만든 붓)로 28행, 324자를 써,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하는데, 이 글중 특히 갈지(之)字가 가장 많아 24자나 있으나 자획의 변화가 있어 한 글자도 같게 쓴 것이 없었으니,술이 깬 후 수 십 번을 다시 써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도 ‘神의 도움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하며,매우 소중히 여겼다 합니다.

(...修祓禊之禮，揮毫制序，興樂而書。用蠶繭紙、鼠須筆，遒媚勁健，絕代更無。凡二十八行，三百二十四字，有重者皆構別體。就中“之”字最多，乃有二十許個，變轉悉異，遂無同者。其時乃有神助，及醒後，他日更書數十百本，無如祓禊所書之者。右軍亦自珍愛寶重。).

이후, 이 작품은 후손에게 전해져 왔었는데,당(唐)대로 들어와, 절대 권력자였던 당(唐) 태종(太宗)이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특히나 좋아하여,그의 작품을 모두 모으게 됩니다. 당(唐) 태종(太宗)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 중에서도 특히나 이 <난정서(蘭亭序)>를 좋아하여 애지중지하다가,자신이 운명(殞命)할 때 <난정서(蘭亭序)>를 자신과 함께 순장(殉葬)할 것을 명하니,<난정서(蘭亭序)>는 ‘소릉(昭陵)’에 묻혀버렸고,이때부터 <난정서(蘭亭序)>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2. 왕희지(王羲之) 가문의 일화(逸話)

- 왕씨(王氏)가문은,동진(東晋)사씨(謝氏)집안과 최고 사족(士族)가문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왕희지(王羲之) 가문에 대해 좀 말씀 드릴까 합니다.낭야(琅邪) 왕씨(王氏)로 불리는 이 가문은, 동진(東晋)시대 당시에 진군(陳郡) 사씨(謝氏) 집안과 더불어 최고의 사족(士族) 가문을 이루었습니다.

대대로 도교(道敎)를 믿었고, 서예(書藝)가 가문의 전통이었으며,아버지나 아들이나 같은 ‘지(之)’字 돌림을 쓴 이 괴상한 가문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원래 왕씨(王氏)의 성(姓)은 희성(姬姓: 주(周)나라 왕족의 성)에서 출발하였는데,주(周) 영왕(靈王) 태자 진(晉)이 직간(直諫)을 하다가 서인(庶人)으로 폐함을 당하였다.그의 아들 종경(宗敬)은 사도(司徒)가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왕가(王家)’라 부름으로써 이때부터 성씨(姓氏)가 되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이승연(李昇姸) ‘왕희지의 도교관과 서예’)

이후 진난(秦亂)을 피해 낭야(琅邪)로 옮겨와 정착하였는데,그들 일가가 호족으로 이름이 높아진 것은, 동진(東晋)의 건국 때 왕도(王導: 276~339)라는 사람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상 명재상(名宰相)중의 한명으로 꼽히는 그는 왕희지의 아버지인 왕광(王曠)의 종형으로, 당시 혼란했던 북쪽 황하지방과는 달리 장강 이남지방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여 왕씨(王氏)집안의 기초를 닦습니다.

당시 귀족들 가운데, 왕씨(王氏), 사씨(謝氏), 치씨(郗氏)등은 서로 일족간의 혼인관계를 통해 폐쇄된 귀족사회를 유지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문예(文藝)에 뛰어났으며,그 위에 서예(書藝)에 능했습니다.이런 환경 하에서 태어나고 자란 왕희지는 축복받은 환경과 뛰어난 재능이 어우러져 서예사(書藝史) 최고봉인 ‘서성(書聖)’으로 추앙되는 업적을 이룹니다.

그의 일대기를 <진서(晉書)> 왕희지전(王羲之傳)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왕희지의 자(字)는 일소(逸少)로, 사도(司徒)인 왕도(王導)의 조카이다.조부는 왕정(王正)으로 상서랑(尙書郞) 벼슬을 하였고, 부친은 왕광(王曠)으로 회남태수(淮南太守)를 지냈다.원제(元帝)때 양자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주하였는데, 왕광(王曠)이 앞장서 이주를 주도하였다.

왕희지가 어려서는 말을 잘하지 못해, 그 재주를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13세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인 주의(周顗)를 배알하였는데,그때 주의(周顗)가 그를 눈여겨보았다. 당시에는 소 염통구이(牛心炙)를 귀하게 여겼는데,좌중들이 맛보기도 전에 주의(周顗)가 칼로 잘라 왕희지에게 맛보이니,그때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자라면서 말재주도 생기고 학식도 풍부하며,성격도 곧다고 칭해졌다.

또한 예서(隸書)에 능하여, 고금 서예 중 으뜸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 필세(筆勢)를 일컬어,‘그 표표함이 마치 떠가는 구름 같고, 굳세기가 마치 놀란 용이 달려가는 것 같다(飄若浮雲，矯若驚龍)’하였다.그때 태위(太尉) 치감(郗鑒)이 문하생들로 하여금 왕도(王導)의 집안에서 사윗감을 고르게 하였는데,왕도(王導)는 치씨(郗氏) 집안 새 사위(東廂)를 고름에 자신들의 자제들을 둘러보게 한즉,문하생이 보고 돌아와 고하길, “왕씨 집안 여러 젊은이가 모두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사윗감 고르려 왔다는 소식에 모두 잘 보이려 하는데, 오직 한 사람만은 동쪽 마루에 배를 드러내놓고 식사를 하면서(東床坦腹食) 듣지 못한 척 하였습니다.” 하였다. 치감(郗鑒)이 말하길,“그가 바로 좋은 사윗감이다!”하고는 찾아가 보니, 바로 왕희지였으며, 이에 그를 사위로 삼았다.

王羲之，字逸少，司徒導之從子也。祖正，尚書郎。父曠，淮南太守。元帝之過江也，曠首創其議。羲之幼訥於言，人未之奇。年十三，嘗謁周顗，顗察而異之。時重牛心炙，坐客未啖，顗先割啖羲之，於是始知名。及長，辯贍，以骨鯁稱，尤善隸書，為古今之冠，論者稱其筆勢，以為飄若浮雲，矯若驚龍。時太尉郗鑒使門生求女婿于導，導令就東廂遍觀子弟。門生歸，謂鑒曰：「王氏諸少並佳，然聞信至，鹹自矜持。惟一人在東床坦腹食，獨若不聞。」鑒曰：「正此佳婿邪！」訪之，乃羲之也，遂以女妻之。

이 고사를 따서, 이후부터 결혼식이 끝난 뒤 신부 측에서 신랑친구들에게 음식 대접하는 일을 ‘동상례(東床禮)’란 단어로 부르게 됩니다. 일종의 결혼식 피로연인 셈인데,제대로 하려면 신랑친구들은 배를 드러내놓고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왕희지는 도가(道家)의 복식양생(服食養性)을 좋아하여, 수도인 경사(京師)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처음 절강(浙江)으로 건너가자, 거기서 여생을 보낼 마음(終焉之志)이 생겼다.훗날 벼슬을 관두고 회계(會稽)에 내려가 사는데, 회계(會稽)에는 산수가 아름답고,명사들이 거처하고 있었으며, 훗날 명재상(名宰相)으로 이름을 날리는 사안(謝安)도 당시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거기에 거처하고 있었다.

문장가로 이름난 손작(孫綽: 뒷날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조상), 시인인 이충(李充),도인(道人)인 허순(許詢), 승려 지둔(支遁)등 당시를 주름잡던 인사들과 더불어 어울렸으니,동토(東土)땅에 집을 짓고 같이 교류하였다. 일찍이 뜻이 맞는 친구들과 난정(蘭亭)에 모여 연회를 여니,왕희지 자신이 서문을 써서 그 뜻을 펴보였다.

羲之雅好服食養性，不樂在京師，初渡浙江，便有終焉之志。會稽有佳山水，名士多居之，謝安未仕時亦居焉。孫綽、李充、許詢、支遁等皆以文義冠世，並築室東土，與羲之同好嘗與同志宴集于會稽山陰之蘭亭，羲之自為之序以申其志

또한 성품이 오리를 좋아하였다. 마침 회계(會稽)의 혼자 사는 노파가 오리를 키우는데 그 소리가 아름다워 시장에서 구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친구와 더불어 보러갔더니,노파가 왕희지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잡아서 음식으로 내놓자, 몇날며칠을 탄식하였다.

또한 산음(山陰)에 도사가 한사람 좋은 오리를 키운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고는 기뻐하며 자신에게 팔라고 하자, 도사가 말하길, “<도덕경(道德經)>을 한부 써 주시면,여러 사람들 앞에서 서로 증정 합시다”하니, 기뻐하며 써주고는 오리를 새장에 넣어 돌아왔으매,오리를 좋아함이 그와 같았고, 그 성격의 진솔함이 그와 같았다.

또한 문하생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 책상이 치워져 있으면, 그 자리에서 글을 써 보였는데,해서(楷書)와 초서(草書)가 반반씩 이었다. 또한 일찍이 즙산(蕺山)에 있을 때 한 노파가 부채를 파는데 잘 팔지를 못하자, 지나가다가 이를 보고는 글씨를 써서 주고는 말하길,“왕우군(王右軍)의 글씨이므로, 백전(百錢)은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게 했다.

사람들이 다투어 사가자, 다른 날 노파는 고마움에 부채를 들고 찾아왔는데,왕희지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이 그의 글을 소중히 여김은 대략 그와 같았다.

性愛鵝，會稽有孤居姥養一鵝，善鳴，求市未能得，遂攜親友命駕就觀。姥聞羲之將至，烹以待之，羲之嘆惜彌日。又山陰有一道士，養好鵝，羲之往觀焉，意甚悅，固求市之。道士雲：「為寫《道德經》，當舉群相贈耳。」羲之欣然寫畢，籠鵝而歸，甚以為樂。其任率如此。嘗詣門生家，見棐幾滑淨，因書之，真草相半。又嘗在蕺山見一老姥，持六角竹扇賣之。羲之書其扇，各為五字。姥初有慍色。因謂姥曰：「但言是王右軍書，以求百錢邪。」姥如其言，人競買之。他日，姥又持扇來，羲之笑而不答。其書為世所重，皆此類也

한편 왕희지에게는 아들이 모두 7명이 있었는데, 그중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모두 5명입니다.현지(玄之), 응지(凝之), 휘지(徽之), 조지(操之), 헌지(獻之)가 그들인데,이중 휘지(徽之)와 헌지(獻之)가 빼어났던 인물로 전해집니다.

그중에서도 서예로 아버지인 왕희지에 못지않은 이름을 날린 사람이 바로 마지막 7남인 왕헌지(王獻之)인데,보통 아버지인 왕희지와 더불어 ‘이왕(二王)’을 겸칭됩니다.원래 뛰어난 서예가는 수십년 각고의 세월 끝에 탄생되기 때문에,“청년 문장은 있으나, 청년 명필은 없다”란 말들을 합니다만, 워낙 명필가문에서 태어나서인지,그는 어릴 때부터 서예가로서의 이름을 얻습니다.

헌지(獻之)의 자(字)는 자경(子敬)으로, 어려서부터 이름을 얻었으며,성격이 고매하고 거침이 없어, 하루 종일 아무 일 않고 있어도 행동거지가 흐트러짐이 없었으니,당시 풍류로는 최고라고 일컬음을 받았다. 몇 살되지 않았을 때,왕희지의 문하생 몇이서 모여앉아 노름(樗蒱)을 하고 있었는데,노름이 잘 풀리지 않던 문생의 어깨너머로 이를 보던 헌지(獻之)가 훈수를 두길,“남풍불경(南風不競)이군..(‘남풍(南風)’은 중국 '양자강 남쪽 지방의 음악’이라는 뜻이며 ‘불경(不競)’은 ‘힘이 없다’는 뜻으로, 본디 남쪽의 음악은 여성스러워 여리고 생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말로 ‘세력이 미미함’을 뜻함)”하자, 문생이 말하길, “이 어린아이가 대롱으로 표범을 보고 있네(管中窺豹).그러니 표범의 점 하나만 볼 밖에..' 하였다.

화가 난 헌지(獻之)는 “(제가 견해가 짧다고 한다면, 아마도) 멀리로는 순봉정(荀奉倩: 삼국시대 위(魏) 순찬(荀粲: 字가 봉정(奉倩))，글재주가 뛰어났으며, 도가에 밝았음)도 부끄러워하고,가까이는 유진장(劉眞長: 동지(東晉) 폐(沛)땅의 유담(劉惔: 字가 진장(真長))，성품이 고아하였으며, 아버지인 왕희지의 친구임)께서도 부끄러워하실 겁니다" 하고는 옷을 떨치고 가버렸다.

하루는 형인 휘지(徽之), 조지(操之)와 함께 사안(謝安)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두 형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으로 말을 많이 하였으나,헌지(獻之)는 인사(寒溫)만 드리고는 아무 말이 없이 있다가 돌아갔다.

나중에 어떤 객(客)이 사안(謝安)에게 묻기를, ‘왕씨 집안 아들 중에 누가 나으냐’고 하자,사안(謝安)이 대답하길 ‘막내가 가장 뛰어나다’ 하였다. 그 이유를 다시 묻자,“역경(易經)에 이르길, ‘길한 사람은 말이 적다(吉人之辭寡)’하였는데, 막내가 말이 적으니, 그런 줄 알겠음이라” 하였다. 하루는 형인 휘지(徽之)와 한방에 있다가 불이 났는데,휘지(徽之)는 신발도 신지 않고 뛰쳐나온 반면, 그는 놀란 기색 없이 사람들을 불러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또 하루는 서재에서 자는데, 도둑이 들어 물건을 훔쳐가자, 일어나 도둑에게 말하길,“특히 그 푸른색 담요(青氈)는 우리 집 오래된 중한 물건이니(氈青舊物) 빠트리지 말게” 라고 하니,도둑이 크게 놀라 달아났다.

그는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7~8세때 서예를 배우기 시작할 때,아버지인 왕희지가 몰래 뒤로 가서 붓을 잡아당겼으나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이에 왕희지가 말하길, “이 아이 또한 훗날 큰 이름을 얻겠구나” 하였다.

獻之字子敬。少有盛名，而高邁不羈，雖閒居終日，容止不怠，風流為一時之冠。年數歲，嘗觀門生樗蒱，曰：「南風不競。」門生曰：「此郎亦管中窺豹，時見一斑。」獻之怒曰：「遠慚荀奉倩，近愧劉真長。」遂拂衣而去。嘗與兄徽之、操之俱詣謝安，二兄多言俗事，獻之寒溫而已。既出，客問安王氏兄弟優劣，安曰：「小者佳。」客問其故，安曰：「吉人之辭寡，以其少言，故知之。」嘗與徽之共在一室，忽然火發，徽之遽走，不遑取履。獻之神色恬然，徐呼左右扶出。夜臥齋中而有偷人入其室，盜物都盡。獻之徐曰：「偷兒，氈青我家舊物，可特置之。」群偷驚走。工草隸，善丹青。七八歲時學書，羲之密從後掣其筆不得，歎曰：「此兒後當複有大名。」

‘관중규표(管中窺豹: 대롱 구멍으로 표범을 본다)’라는 고사성어가 나온 얘기입니다.좌정관천(坐井觀天)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한 ‘아끼는 귀한 물건’이란 의미의 ‘청전구물(青氈舊物: 전해오는 푸른 담요)’이란 성어도 등장합니다.

한편 왕헌지와 왕희지의 글씨에 관한 또 다른 일화가,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에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사안(謝安)은 본래 척독(尺牘)을 잘 썼는데 자경(子敬: 헌지(獻之))의 글씨를 경시했다.자경(子敬)이 솜씨 껏 글씨를 써서 사안(謝安)에게 보냈다. 당연히 잘 보관하여 두려니 했는데 정작 사안(謝安)은 자경(子敬)이 보낸 글의 여백에 대수롭지 않게 답글을 써서 보내었다.

자경(子敬)은 이를 몹시 한스럽게 여겼다. 어느 날 사안(謝安)이 자경(子敬)에게,‘그대와 우군(右軍:왕희지)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자경(子敬)이 답하기를 ‘물론 내가 더 났다’라고 답했다. 사안(謝安)이 말하길 ‘세간의 평은 그렇지 않다’ 하고 하자,‘요즘 세상사람들이 무엇을 알겠느냐’고 대답하였다.

謝安素善尺牘，而輕之敬之書。子敬嘗作佳書與之，謂必存錄，安輒題后答之，甚以爲恨。安嘗問敬：卿書何如右軍？答云：故當勝。安云：物論殊不爾。子敬又答：世人哪得知!

한편, 왕희지의 아들 중 비록 글씨로는 왕헌지만큼 이름이 나지 않았지만,성격이 독특하여 많은 일화를 만들어낸 또 한명의 인물이 바로 왕희지의 5남인 왕휘지(王徽之)입니다.<진서(晉書)>에 전하는 그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휘지(徽之)의 자(字)는 자유(子猷)이다. 성격이 빼어나면서도 자유분방하였다.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의 참군(參軍)을 할 때, 머리를 빗지 않고 허리띠도 두르지 않은 채 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또한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을 할 때,한번은 환충(桓沖)이 묻길, “경(卿)은 어디 소속인가?”하니, “마조(馬曹) 비슷한 소속 같습니다.” 하였다.

또한 “몇 마리 말을 관리하는가?”하고 묻자, “말을 제대로 모르는데,그 숫자는 세어 무엇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또 묻길, “말이 전에 비해 죽는게, 많은가, 적은가?”하자,“사는 것을 모르는데, 죽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또 하루는 환충(桓沖)을 수행하는데, 폭우를 만나자, 말에서 내려 마차 안으로 밀고 들어와서는,“어찌 혼자서 마차를 멋대로 타실 수 있습니까?” 하였다. 환충(桓沖)이 그의 이러한 태도가 못마땅한 나머지 하루는 그를 보고, “경(卿)도 벼슬한지 이제 제법 되었으니,마땅히 윗사람을 존대하여야 하지 않겠는가(比當相料理: 여기서 '料理'는 육조(六朝)시대 쓰던 구어체 단어로서,송나라로 들어서면서 존대한다는 '祗待'란 단어로 바뀜)?”하자,처음엔 아무 대답 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탁자를 짚고 일어나며 천천히 말하길,

“서산에 아침이 오니, 그 기운이 상쾌하도다(西山朝來致有爽氣).”라고 말하였다.(자신은 벼슬에 뜻이 없고 속세를 훌쩍 초월하였음을 은유함).

徽之字子猷。性卓犖不羈，為大司馬桓溫參軍，蓬首散帶，不綜府事。又為車騎桓沖騎兵參軍，沖問：「卿署何曹？」對曰：「似是馬曹。」又問：「管幾馬？」曰：「不知馬，何由知數！」又問：「馬比死多少？」曰：「未知生，焉知死！」嘗從沖行，值暴雨，徽之因下馬排入車中，謂曰：「公豈得獨擅一車！」沖嘗謂徽之曰：「卿在府日久，比當相料理。」徽之初不酬答，直高視，以手版柱頰雲：「西山朝來致有爽氣耳。」

이 고사에 나오는 ‘西山朝來 致有爽氣(서산조래 치유상기)’란 구절은 빼어난 기상을 표현한다 하여,고래로부터 많은 인용을 받은 구절로서, 우리나라 선비들에게서도 사랑을 받아왔습니다.그 일례로, 이 구절은 아래처럼 현재도 조선시대 경복궁 <집옥제(集玉齋)>의 여섯 기둥의 주련 중 다섯 번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왕휘지(王徽之)에 대한 더 유명한 고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당시 오(吳)땅에 한 사대부가 좋은 대나무를 가꾼다는 말을 듣고, 휘지(徽之)가 이를 보러 가서 죽림아래 가마에 앉아 읊조리고 있으니, 주인이 마당을 쓸다가 들어와 앉기를 권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주인이 나중에 출타함에 문을 걸어 잠그니, 비로소 탄식을 하고 자리를 떴다.한번은 남이 비워둔 집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집주위에 대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집도 아닌데 왜 심느냐 묻자 대답하길, “하루라도 이 군자(此君)를 보지 않고 어찌 견딘단 말인가!” 하였다. 또 한번은 산음(山陰)에 거주할 때, 밤에 눈이 오다 거치고,달빛이 맑아 사방이 흰색으로 덮여있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읊고 있다가,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 중국 동진의 문인화가)가 생각났다.

당시 대규(戴逵)는 섬계(剡溪)땅에 살고 있어서, 한밤중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도록 갔다가,문전에 이르기 직전에 배를 돌려 돌아왔다. 사람들이 어인 연고인지 묻자,“흥이 일어나 갔다가, 흥이 다하자 돌아온 것일뿐(乘興而行，興盡而反),반드시 안도(安道: 대규(戴逵)의 字)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성품이 고아하고 거침이 없었으며, 음악과 여자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동생인 헌지(獻之)와 함께 <고사전(高士傳)>의 찬(贊)을 품평하였다. 왕헌지는 '동한(東漢)의 은사 정단(井丹)의 고결함'을 칭찬하였으나,

왕휘지는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세상을 오시(傲視)한것만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그의 성격됨이 이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재주는 아꼈으되, 그의 행동은 좋아하지 않았다.

時吳中一士大夫家有好竹，欲觀之，便出坐輿造竹下，諷嘯良久。主人灑掃請坐，徽之不顧。將出，主人乃閉門，徽之便以此賞之，盡歎而去。嘗寄居空宅中，便令種竹。或問其故，徽之但嘯詠，指竹曰：「何可一日無此君邪！」嘗居山陰，夜雪初霽，月色清朗，四望皓然，獨酌酒詠左思《招隱詩》，忽憶戴逵。逵時在剡，便夜乘小船詣之，經宿方至，造門不前而反。人問其故，徽之曰：「本乘興而行，興盡而反，何必見安道邪！」雅性放誕，好聲色，嘗夜與弟獻之共讀《高士傳贊》，獻之賞井丹高潔，徽之曰：「未若長卿慢世也。」其傲達若此。時人皆欽其才而穢其行。

이 왕휘지(王徽之)의 고사는 매우 유명한 고사입니다.여기서, 훗날 대나무를 지칭하는 유명한 용어인 ‘차군(此君)’이란 단어가 탄생하였습니다.우리나라에도, 뒤에 대나무숲이 있는 정자에 차군정(此君亭) 또는 차군헌(此君軒)등의 당호(堂號)를 붙여놓은 것을 볼수 있는데, 모두 이 고사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또한 왕휘지(王徽之)가 그의 친구인 대규(戴逵)를 눈오던 밤에 갑자기 보러간 고사에서,‘승흥이행(乘興而行: 흥이 일어나 감)’이란 성어가 나오고, 또 친구인 대규(戴逵)가 살던 섬계(剡溪)를 따와서 ‘섬계흥(剡溪興: 섬계에서의 흥)’, ‘섬계회도(剡溪廻棹: 섬계에서 배를 돌림)’등의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차군(此君)’이란 용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소동파의 ‘녹균헌(綠筠軒)’이란 시를 아래에 참고로 소개드립니다.

可使食無肉 식사에 고기가 없을 수는 있어도,

不可居無竹 사는 곳에 대나무는 없을 수 없네.

無肉令人瘦 고기 없으면 사람을 야위게 하지만,

無竹令人俗 대나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오.

人瘦尙可肥 사람이 야위면 살찌울 수 있으나,

士俗不可醫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 없는 법,

傍人笑此言 옆 사람 이 말을 비웃으면서,

似高還似癡 고상한 것 같으나 어리석다 말하지만,

若對此君仍大嚼 대나무 앞에 두고 고기 실컷 먹는다면,

世間那有揚州鶴 세상에 어찌 양주학(揚州鶴)이란 말 있었겠는가?

주(註) 揚州鶴(양주학): 옛날에 손님들이 서로 노닐면서 각자 자신의 소원을 말했는데,어떤 자는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기를 원하고, 어떤 자는 재물이 많기를 원하고,또 어떤 자는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그 중 어떤 자가 말하기를 “나는 허리에 십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서 양주(揚州)의 하늘을 오르고 싶다”라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말은, 양주자사(揚州刺史)라는 관직과 십만 관의 돈과,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신선이 되겠다는 욕망을 모두 가지려는 것으로,실현 불가능한 욕심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인다.

<하태형/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 교수/고전(古典)칼럼니스트/ 경제학박사(뉴욕 주립大)/서울대 경영대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