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중국사
1. 선사
2. 삼대
3. 춘추전국
4. 진한
5. 위진남북
6. 수당오대
7. 송요금원
8. 명청
9. 국공
10. 인민공화국
11. 통사
· 오늘 :  1,105 
· 어제 :  1,238 
· 최대 :  6,990 
· 전체 :  2,251,557 
 
  2015-05-13 15:35:413237 
전연의 흥기와 쇠망
운영자


전연의 흥기와 쇠망


모용씨(慕容氏)의 흥기


전연을 세운 모용씨는 선비족의 일족이다. 동한말 선비족 수령 단석괴(檀石槐)는 흉노족이 이주한 땅을 모두 점령하고 그 땅을 중(中), 동(東), 서(西) 삼부로 나누어 각기 대인을 두어 다스렸다. 동부는 20여 읍, 중부는 10여 읍, 서부는 20여 읍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우문씨(宇文氏)는 동부, 모용씨는 중부, 척발씨는 서부에 속했다. 선비족 중 모용씨의 피부색은 다른 종족에 비해 백색이었음으로 사람들은 그들을 백부선비(白部鮮卑)라고 호칭했다. 조위(曹魏) 초 요서(遼西)에 거주하다가 위진(魏晉) 교체기에 요동(遼東) 북쪽으로 이주했다. 당시 묘용부족의 추장이었던 모용외(慕容廆)가 해를 거르지 않고 진나라의 요서 변경을 침략했다.

294년, 지금의 하북성 창려시(昌黎市) 의현(義縣)으로 이주해서 농업을 위주로 한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307년에서 312년 사이에 발생한 영가(永嘉)의 란으로 서진왕조가 멸망하자 모용외는 스스로 대선우(大單于) 자리에 올랐다.

333년 모용외가 죽고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뒤를 이었다.

337년 모용황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했다.

343년 후조(後趙) 황제 석호(石虎)가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해왔다. 후조군은 모용황의 반격을 받아 8만의 전사를 내고 패주했다. 모용황은 수도를 용성(龍城)으로 옮겼다. 용성은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朝陽市)다. 이때부터 전연의 국세는 강성해지기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를 무찌르고 선비의 우문부족을 멸하여 요서지역에서 유일한 무장세력의 지위를 차지했다. 묘용황의 활약은 후에 모용준(慕容儁)이 남하하여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서진말, 흉노의 장수 유요(劉曜)가 낙양과 장안을 함락시키자 중원의 세족들이 종족들을 이끌고 이주한 땅은 장강 이남의 강남이 아니라 당시 장(張)씨가 다스리던 서쪽의 량주(凉州)였다. 또한 산동이나 하북의 세족이나 대지주들도 모두 강남아니라 일부는 북쪽의 유주(幽州)로 이주해서 당시 서진왕조에 의해 유주자사로 임명된 왕준(王浚)에게 투항했다. 왕준은 태원(太原)의 세족으로 대지주 출신인 왕침(王沈)의 아들이다. 후에 왕준의 정치가 부패하게 되자 왕준를 멸하고 유주의 땅을 병탄하려고 했던 석륵(石勒)의 목표물이 되어 그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에 왕준에게 투항했던 세족들은 점차로 유주를 떠나 요서(遼西)로 들어가 당지의 세족이며 대지주 출신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를 찾아가 의탁했다가 다시 요서로 이주해 온 모용씨에게 투항했다. 이때 모용씨에게 의탁한 세족들은 다음과 같다.

하동(河東)의 배억(裵嶷), 배개(裵開), 우북평(右北平)의 양탐(陽耽), 양유(陽裕), 광평(廣平)의 유수(游邃), 발해(渤海)의 봉추(封抽), 봉혁(封弈), 봉유(封裕), 고첨(高瞻), 평원(平原)의 송해(宋該), 유찬(劉瓚), 란능(蘭陵)의 무개(繆愷), 노국(魯國)의 공찬(孔纂), 서하(西河)의 송석(宋奭), 안정(安定)의 황보급(皇甫岌), 황보진(皇甫眞) 등이다. 그들은 종족, 향리(鄕吏), 부곡(部曲), 전객(佃客) 등을 모두 이끌고 이주했다. 숙부 고은(高隱)과 함께 수천 가를 이끌고 이주해서 모용씨에게 의탁했던 고첨(高瞻)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모용씨에게 복속된 그들은 모용부족들에게 한족을 통치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하고 한족을 적대시하지 말고 명목상으로는 동진정권을 정통왕조로 인정하라고 가르쳤다. 후에 모용황은 후조의 석륵이 요서로 보낸 사절을 체포한 후에 강남의 동진왕조로 압송하여 동진왕조에 충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명을 구하던 중원의 한족들은 부득이 모용씨들의 그러한 정치적인 수단에 유인되어 요수 유역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유민들을 더욱 잘 후대하여 장악하게 된 모용부족은 그들을 자산으로 삼아 서기 310년 요수 유역에서 중원에서 망명한 백성들을 기층민으로 하는 지방정부를 건립할 수 있었다. 중원에서 몰려든 유민들을 출신지별로 수용하기 위해 군과 현을 설치했다. 기주인(冀州人)을 위해서는 기양군(冀陽郡), 예주인(豫州人)은 성주군(成周郡), 청주인(靑州人)은 영구군(营丘郡), 병주인(幷州人)은 당국군(唐國郡) 등을 설치했다. 중원에 있었던 군현의 이름을 딴 지방관서를 연나라 안에 설치하여 유민들에 대한 통치를 효과적으로 행했다. 과거에 영토였던 군현이 적국에 빼앗기는 경우 자국 영토 내의 다른 군현에 빼앗긴 땅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교치(僑置)라고 한다. 중원에서 투항한 한족 유민들에게 면역권(免役權) 등과 같은 일정 정도의 우대정책을 시행한 결과 유수(濡水) 유역으로 밀려드는 한족들의 수효는 원래의 거주민보다 10배나 더 많게 되었다. 이윽고 모용황이 연왕을 칭할 때에 이르러서는 모용씨들이 요서유역에 세운 정권의 토대가 공고해지자 한족 유민들에 대한 정책을 변경했다.

서기 347년, 유민들을 위해 설치한 지방관아 중 1급지에 해당하는 성주군, 기양군, 영구군 등의 1급지 관청을 폐지하고 오히려 발해인은 흥집현(興集縣). 하간인(河間人)은 영집현(寧集縣), 동래(東萊)·북해인(北海人)은 육fugus(育黎縣), 오인(吳人)은 오현(吳縣)을 설치하여 각각 거주하도록 하고 연나라에 직접 예속시켰다. 그런 일련의 조치는 과거 중원 출신의 유민들에게 일종의 기만정책으로 행했던 우대정책을 자동적으로 폐지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로써 한족유민들에 대한 부담은 점차적으로 가중되었다.

요서지구로 이주한 한족 유민들은 모두 생산활동에 숙련된 기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도래는 요서지역의 생산 기반을 개발시키고 농업생산을 증가시키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당시 땅은 좁고 인구는 조밀하다는 현실을 인식한 모용황은 과거에 왕실과 귀족 전용으로 지정했던 園苑이나 목초지를 모두 개방하여 유민들의 노동력으로 개간시켜 모두 농지로 만든 후에 그들에게 전답과 소를 빌려주어 농업생산활동을 장려했다. 유민들이 소와 땅을 지급받아 경작하여 생산된 수확물 중 8할을 징수하고 2할은 사유로 했으며 자기 소유의 소를 이용할 경우는 7할을 징수하고 3할을 사유로 했다. 모용황의 그런 조치에 기실참군(記室參軍) 봉유(封裕)가 상주했다.

“ 위진(魏晉)의 도가 비록 쇠락했지만 그 백성들 중 7-8은 여전히 이곳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관우(官牛)와 관전(官田)에서 생산한 수확물에 대해서는 6할은 관이 4할은 개인이 갖도록 하시고 사우(私牛)와 관전(官田)에서 생산한 수확물에 대해서는 반반씩 하십시오. 그러면 백성들의 마음은 안정되어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신은 비록 왕도정치에 밝지 못하지만 이리하면 어찌 세수가 늘지 않겠습니까?”

봉유의 제안을 수락한 모용황은 즉시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왕실과 귀족들이 소유한 園囿는 모도 폐지하여 전답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분배하라! 재산이 없어 빈곤하여 스스로 생활을 할 수 없는 백성들에게는 각기 소 한 마리씩을 주어라! 만약 민간에 여력이 있다면 즐거이 관우를 이용하여 황폐한 땅을 개간하도록 하다.”

모용황의 조치는 수확물을 6·4, 혹은 5·5로 나누었던 위진의 둔전제를 시행하라는 지시였다.

모용황의 일련의 정책은 연나라를 경제적으로 번영시켰다. 이윽고 확충된 실력을 바탕으로 모용황은 주변의 적대세력을 정벌하여 복속시키거나 병합했다. 당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던 선비족의 별종인 단부(段部)를 멸하고 그 부족민 5천 호를 복속시켰다.

다시 342년 11월 모용황은 高句麗를 정벌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아우 무(武)에게 정예병 5만을 주오 북도로 침공하는 적을 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대를 이끌고 남도를 방어하기 위해 출전했다. 그러나 모용황의 주력군 4만은 남도를 통해 진격해 왔다. 고국원왕은 노약병으로 전연의 4만에 달하는 정예병을 저지할 수 없었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나고 환도성은 연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버리고 몇몇의 군사들만을 이끌고 단웅곡(斷熊谷)까지 도망쳤다. 환도성에 머물던 고국원왕의 왕모 주씨는 연군의 포로가 되었고 북도로 출동했던 고구려군의 정예병도 연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연나라 본국의 사정으로 환도성을 점령한 모용황은 그곳에 오래 머물며 고국원왕의 뒤를 쫓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본국의 사정이 급했던 모용황이 철군하려고 하자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말했다.

"고구려의 땅은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그 왕이 도망가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 속에 숨었습니다만, 우리 대군이 돌아가면 저들은 틀림없이 다시 모여들어 또 다른 후환을 만들 것입니다. 청컨대 고구려왕의 부왕 시체를 파서 가져가고, 또 그 생모를 사로잡아 고구려왕의 항복하면 돌려보낸다고 하소서."

모용황은 그 건의를 받아들였다.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릉이 파헤쳐졌고, 창고에 있던 수많은 보물도 약탈되었다. 모용황의 군대를 미천왕의 시체와 보물, 고구려인 5만여 명을 사로잡아 포로로 삼는 전과를 올리고 철군했다. 그들은 떠나면서 궁궐을 불태우고 환도성의 성벽을 몽땅 헐어버렸다.

또 다른 선비족인 우문부를 멸하고 부족민 5천 부락을 복속시켰다. 부여를 공격하여 부족민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주위의 피정복민들과 모용씨 지배하의 선비족들은 점차로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화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요서지방의 모용씨 정권은 비교적 많은 호구를 모을 수 있었으며 그 인구를 토대로 막강한 군사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서기 348년, 모용황이 죽고 그의 아들 모용준(慕容儁)이 뒤를 이었다. 이때 전연은 이미 20여 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농업생산량은 크게 증가했으며 군대의 전투력은 강대해졌다. 이즈음 후조(後趙) 황제 석호(石虎)가 죽고 그 뒤를 염민(冉閔)이 뒤를 잇자 서기 352년 모용준은 대군을 일으켜 염민의 북위정권을 멸했다. 이어서 모용준은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도읍을 지금의 북경시 경내인 계(薊)로 정했다가 후에 다시 업(鄴)으로 천도했다. 전연(前燕)의 영토는 남쪽으로는 하남성 여(汝)와 영(潁), 서쪽으로는 효산(崤山)과 민(澠), 동쪽으로는 청주(靑州)와 제(齊) 전 지역을 아우르고 북쪽으로는 운중(雲中)에 이르렀다. 전연은 하북(河北), 하남(河南), 산서, 산동 등의 중국의 중원지방을 전부 차지하여 당시 관중(關中) 지방을 근거지로 할거하고 있던 저족(氐族)이 세운 부진(苻秦)과 북중국의 황하 유역을 양분했다.


원래 모용씨의 세력이 강성해지기 전에는 표면상 동진(東晋)을 정통정권으로 받들었음으로 동진정권은 선비족이 세운 전연정권을 적극 신임하고 오히려 한족이 세운 염민의 북위정권을 불신하여 모용준이 염민정권을 멸망시킬 때 관망했다. 염민을 멸망시킨 모용준이 황제를 칭하자 동진은 사자를 보내 책망했다. 이에 모용준은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돌아가 천자에게 말하라! 나는 백성들의 곤궁하고 고통을 해결해주어 중원인들에 의해 추대되어 황제가 되었을 뿐이라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모용준은 동진의 사자에게 그의 본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모용준은 명을 내려 주군(州郡)에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한 호 당 남자 장정 1인 만을 남기고 나머지 장정을 모두 군사로 징집하려고 했다. 조사 결과 군사로 징집할 수 있는 병력은 모두 150만 이상임을 확인한 모용준은 장차 그 병력으로 전진(前秦)과 동진(東晋)을 공격하여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서기 360년 미처 중국통일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직전 39세의 한참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태자 모용위(慕容暐)가 뒤를 이었으나 그의 나이는 당시 11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다. 모용준의 동생인 태원왕(太原王) 모용각(慕容恪)이 보정(輔政)이 되고 상용왕(上庸王)인 모용평(慕容評)이 부찬조정(副贊朝政)이 되어 모용위를 보좌했다. 모용평은 모용외의 동생에 모용황의 작은 아들이다. 360년부터 전연의 보정의 자리에 오른 모용각은 6년만인 366년에 병사했다. 모용각이 보정으로 집정한 기간인 7년 동안은 전연의 정국은 비교적 평온했다.

모용각의 집정초기, 모용각은 태사(太師) 모여근(慕輿根)을 시켜 전연국의 정치중심을 용성(龍城)으로 옮겨야한다고 주장하게 했다. 모여근의 발언은 모용부족의 인심을 동요시켰다. 동시에 모여근은 모용각에게 어린 모용위를 폐위시키고 대신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후 가족혼씨(可足浑氏)와 어린 군조 모용위의 면전에서 모용각과 모용평 두 사람에게 자기에게 금군의 지휘권을 주면 태후와 어린 황제를 주살하겠다는 황당한 요구를 했다. 모용각은 부득이 모여근과 그 일당을 모두 살해했다. 비록 전연국의 정사를 전결할 수 있는 대권을 지니고 있었던 모용각이었지만 매사를 항상 숙부 모용평과 상의해서 행했다. 한번도 자기 독단적으로 정사를 결정하지 않았으며 마음을 비우고 선비를 대하여 의견을 물어 최선의 방도를 찾아냈다.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직책을 주고 다른 사람의 일에 월권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관속이나 조정대신들이 어쩌다 실수를 하게 되면 그들의 죄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편한 때를 찾아 스스로 말하게 해서 단지 그 일만으로 잘못을 그치게 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큰 수치로 여겨 아무도 감히 법을 범하지 않았다. 모용각은 정치의 생리를 깊이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재능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동진 정권이 일시적이나마 수복한 낙양 일대의 땅을 상실한 원인은 서기 365년 모용각이 감행한 군사적인 공격 때문이었다. 전연군의 총대장이 된 모용각은 사졸들을 위무하고 큰 틀에서 군대의 진용을 유지하려고 힘썼다. 가혹한 명령을 자제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으며 평시에는 군영 내의 분위기를 자유롭게 만들어 부하들이 상관을 의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영에 대한 경계만은 엄격하게 시행하여 적군의 간자들이 감히 범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모용수(慕容垂)의 양읍지전(襄邑之戰) 승리

서기 367년 4월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된 모용각이 吳王 모용수를 대사마로 천거하여 그의 후임으로 삼기 위해 황제 모용위에게 말했다. 모용수는 모용황의 다섯 째 아들이다.

「문무를 겸전한 오왕은 관중(管仲)과 소하(蕭何)와 같은 인물입니다. 폐하께서 만일 그에게 국정을 맡긴다면 나라는 안정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전진(前秦)과 동진(東晋)이 기회를 틈타 우리를 도모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용각이 죽자 그의 보정(輔政) 자리는 모용평이 차지했다. 성격이 원래 시기심이 많고 동시에 모용각의 건의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용평은 모용위로 하여금 그의 동생 모용충(慕容冲)을 대사마로 임명하도록 했다. 그러자 과연 동진과 부진(苻秦)이 모용각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전연을 정벌하려는 국면이 조성되었다. 당시 석륵의 후조정권이 붕괴된 이후 황하 이남 지역은 모두 동진정권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였다. 전연의 보정 모용각은 여러 장군들을 파견하여 낙양, 형양(滎陽), 허창(許昌), 호현(瓠縣) 등의 여러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태산 방향으로 진군하여 연주(兗州)를 깨뜨리고 회남(淮南)까지 진출했다. 결국은 황하 이남부터 회수 이북 지역의 동진영토는 모두 모용씨의 전연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동진이 잃어버린 옛 영토를 수복하여 동진정권에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싶었던 동진의 대사마 환온(桓溫)은 모용각이 사망하자 부정부패로 정치가 문란해지기 시작한 기회를 틈타 서기 369년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연주(兗州)를 통해 북진하여 전연을 공격했다. 전연군을 계속해서 패주시킨 환온의 동진군은 수로를 이용하여 황하를 건너 방두(枋頭)로 들어가 주둔했다. 방두는 지금의 하남성 준현(浚縣) 서남의 기문(淇門) 나루터로 전연의 수도 업도(鄴都)까지는 불과 2백여리에 불과한 곳이었다. 공황상태에 빠진 모용위와 모용평은 수도인 업도를 버리고 모용씨의 발흥지 용성(龍城)으로 달아나기 위해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모용수는 모용위에게 동진군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주도록 요청했다. 모용위는 모용수를 남토대도독(南討大都督)에 임명하고 5만의 군대를 주어 환온의 동진군을 막도록 했다. 모용수는 별동대를 보내 형양(滎陽)의 석문(石門)으로 보내 동진군 수군의 퇴로를 절단했다. 환온의 원정군은 보유한 군량이 모두 떨어지고 전연군이 지키고 있던 석문도 열지 못해 결국은 하수의 순류를 타고 변하(汴河)로 들어가는 통로가 없어져 할 수 없이 선박을 불사르고 육로로 회군해야 했다. 모용수는 본대를 이끌고 동진군의 뒤를 추격하여 지금의 하남성 휴현(縣) 일대의 양읍(襄邑)에서 동진군을 크게 무찔렀다. 동진군은 이 전투에서 3만의 군사를 잃었다. 모용수의 승리는 위난에 처한 전연왕조를 구출한 쾌거였다.

양읍에서의 동진군에 대한 대승은 모용수에게는 오히려 자신을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했다. 모용수는 전연의 조정에 양읍전투 시 선봉에 서서 적진에 용감하게 뛰어든 장병들에 대한 포상을 요청했으나 모용평에 의해 거절당했다. 이로써 두 사람의 사이는 크게 틀어졌다. 태후 가족혼지(可足渾氏)가 모용평과 모의하여 평상시에 증오하던 모용수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두 사람의 계획은 중간에 누설되어 모용수는 죽음을 피해 용성으로 달아났다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다시 한단 부근으로 내려왔다. 그때 모용수을 체포하기 출동시킨 모용평 휘하의 정예 기병들은 지금의 북경시 남쪽의 탁현(涿縣)인 범양(范陽)에 이르고 있었다. 그 길로는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한 모용수는 산중의 소로를 이용하여 지금의 하남성 맹현(孟縣)으로 도망쳐 황하를 도하하여 낙양으로 들어가 다시 장안으로 곧바로 달려가 전진(前秦) 정권에 투항했다.


전연정권의 쇠망

흉노의 유씨가 세운 전조(前趙) 정권과 갈족(羯族) 출신의 석(石)씨가 세운 후조(後趙) 정권은 모두 호한분치(胡漢分治) 정책으로 주민들을 통치했다. 그러나 중원지역에 건립한 모용씨의 전연왕조는 호한분치 정책을 채용하지 않았다. 이는 모용씨들의 한화(漢化)가 다른 이민족에 비해 크게 진행되어 선비족이나 한족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전연정권에는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즉 중원으로 진입한 후의 모용선비의 왕공이나 귀족들은 중원의 발전된 봉건제도에 동화되어 점점점 봉건귀족화 되었다. 그들은 중원지구의 일종의 농노에 해당하는 蔭戶제도의 영향을 받아 대량의 호구를 소유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원지구에서 농업에 종사했던 編戶齊民들은 병역과 빈번한 노역 및 중세로 고통을 받아 부득불 자신의 자영농의 신분을 포기하여 모용선비족들의 왕공이나 귀족들이나 한족세가들의 농노로 전락했다. 편호제민은 한왕조 때 시행한 호적제도로 모든 평민들을 성명, 연령, 적관(籍貫), 신분, 용모, 재산상태 등을 기입하여 호적에 편입시킨 제도를 말한다. 그 결과 전연왕조가 통치하던 지역에서는 나라에 편입된 호구보다 사가에 편입된 농노의 숫자가 많거나, 민호는 모두 사라져 운반할 물자조차 없게 되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여 자연적으로 전연왕조의 경제, 정치 및 군사 등의 실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서기 368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邪) 열관(悅綰)의 건의를 받아들인 모용위는 “모든 농노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해방시켜 민호에 편입시키라!”라는 칙명을 내렸다. 열관은 몸소 나서서 농노의 현황을 세밀히 조사하고 거짓으로 고한 자들을 규찰하여 죄상을 적발했음으로 감히 농노를 감추어 은폐할 수 없었다. 1차로 적발하여 민호에 편입시킨 호구는 20여 만 호로 5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1백만 이상이 되어 전국 총인구의 10분지 1이 넘는 숫자였다. 열관의 그와 같은 蔭戶에 대한 철저한 색출은 전연정권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역량을 크게 증대시켰으나 모용평이 대표한 왕족과 귀족들의 커다란 원한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열관은 그들이 보낸 사람의 손에 암살되고 음호를 색출하여 연나라 정권의 정식적인 호구로 편입시키는 작업은 다시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모용씨가 용성(龍城)에서 업도로 천도한 이후 크게 증대된 부는 그들 통치집단의 생활을 사치와 부패로 물들게 했다. 모용위는 4천 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동복과 시녀들은 그 열배인 4만 명에 달했고 그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막대한 경비는 만금이 이르렀다. 또한 업도에 주둔시킨 40만에 달하는 상비군의 경비가 부족해서 장병들의 군복도 지급이 안 될 정도였으며 군사장비 역시 태반이 부족했다. 사치와 부정부패가 극도로 달한 모용씨 통치집단은 산천의 계곡물이나 샘물을 강점하고 백성들의 자유롭게 이용하거나 마시지 못하게 막고는 군사들이나 백성들의 이용할 때는 물 1석 당 견(絹) 1필 씩을 징수했다. 그와 같은 만행은 전연정권의 내부적으로 붕궤의 원인이 되었다.


전연정권은 정치를 뇌물에 의해 행하고 관리는 재능이 아니라 연줄에 의해 뽑아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횡포에 원한이 사무쳐 이빨을 모두 갈았다. 그와 같은 정세 하에서 전진(前秦)의 군주 부견(苻堅)은 서기 370년 4월 총사령관 왕맹(王猛)을 위시하여 양안(楊安) 등 6명을 장군에 임명하여 전연에 대한 정벌군을 일으켰다. 기병과 보병을 합해 6만에 달하는 전진군을 이끌고 전연을 향해 진군한 왕맹은 그해 7월 왕맹 자신은 전진군의 주력을 이끌고 호관(壺關 : 산서 장치시(長治市) 서남)을 공격하고 양안에게는 북진하여 진양(晉陽)을 공략하도록 명했다. 8월 왕맹은 호관을 함락시켰다. 9월 왕맹이 북진하여 양안과 합류하여 진양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그때 전연의 통수(統帥) 모용평은 30만의 대군을 모두 로천(潞川 : 지금의 하북성 탁장하(濁漳河) 강변에 집결시켜 전진군을 막으려고 했다. 왕맹은 전진군을 서진시켜 모용평이 지휘하는 전연군과 대치했다. 전진군이 멀리 전진하여 전지에 깊이 들어와 고립무원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한 모용평은 지구전으로 대항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천성이 원래 탐욕스러운 모용평은 나라의 존명이 달린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여전히 산과 내를 막아 땔감과 음용수를 팔아 구릉을 이룬 돈과 명주에도 불구하고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와 같은 모용평의 한없는 탐욕에 전연의 군사들은 모두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 왕맹은 야음을 틈타 기병을 소로를 따라 우회하여 연군의 배후를 기습하여 輜重을 불태웠다. 업성의 모용위는 멀리서 연군의 치중이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고 황급히 사람을 파견하여 탐욕에 눈이 먼 모용평이 목숨이 아까워 전진군과의 결전을 하지 않는다고 문책했다. 모용평은 어쩌지 못하고 출전하여 전진군과 회전에 들어갔으나 결과는 전연군의 참패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전연군은 5만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전진군은 승세를 타고 전연군의 뒤를 추격하여 10만의 군사를 포로로 잡았다. 마침내 30만에 달하는 전연군은 전진군에 의해 허망하게 소멸되고 말았다. 왕맹은 로천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전연위 수도 업도를 향해 동진하고, 전진왕 부견도 몸소 10만에 달하는 정예병을 휘몰아 왕맹의 군대와 합류하여 업도에 맹공을 퍼부었다. 그해 11월 수십 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업도를 탈출하여 달아나던 모용위는 전진군의 추격병에 의해 사로잡히고 말았다. 업도에 입성한 부견은 전연의 호적과 지적도를 챙겨 살핀 결과 전연이 관할한 땅은 모두 157개 군 예하에 1570개 현이 있었고 인구는 245만 호에 998만 명의 백성이 있었다. 부견은 모용위와 전연의 왕공과 귀족을 포함한 4만여 명에 달하는 선비족을 장안으로 옮겨 살게 했다. 서진(西晉) 태강(太康) 6년(285년) 모용외(慕容廆)가 모용선비를 통일하여 세운 전연정권이 모용위의 대에 이르러 부견에 의해 소멸될 때까지 모두 4대 85년까지 존속했다. 모용준(慕容儁)이 352년 염민(冉閔)을 살해하고 중원으로 들어온 이후 모용위가 나라를 잃을 때까지는 불과 19년 만의 일이었다.

魏晉南北朝史(上海人民出版社.王仲犖) 발췌

목록
5513
[] 조조 삼부자가 사랑한 견비

견황후(甄皇后) 이름은 견락(甄洛)이고 자는 상아(嫦娥)로 견복(甄宓)이라는 별칭이 있고 묘호는 문소견황후(文昭甄皇后)다. 중국역사상 기구
운영자 23-05-16
[] 오환족과 서기 206년 조조의 백랑지전

오환족과 서기 206년 조조의 백랑지전 [1]삼국지 위지 오환전(烏桓) 《상서(尙書)·순전(舜典)》에는 ‘만이가 중국을 어지럽힌다’(蠻
운영자 20-05-13
[] 영화 “뮬란”의 주인공 , 木蘭에 얽힌 傳說 ⑮

朴漢濟 교수의 중국中世로의 시간여행 영화 “뮬란”의 주인공 , 木蘭에 얽힌 傳說 ⑮ [애국심의 상징이자 효도의 모범 그리고 용기
운영자 20-01-21
[] 주무제(周武帝) 우문옹(于文邕)의 북방통일과 멸불운동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 남북조시대의 북주(北周)의 무제(武帝)의 이름은 우문옹(宇文邕)이고 서기 543년에 태어나서 서기 578년
운영자 15-07-22
[]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창건한 호하(胡夏)

호하(胡夏) -오호십육국시대 흉노족이 세운 왕조 - 호하는 하국(夏國) 혹은 대하(大夏) 또는 혁련하(赫連夏)라고도 칭한다. 오호십육국시대 흉
운영자 15-06-29
[] 자귀모사(子贵母死) - 아들이 귀하게 되면 생모는 죽인다. -

자귀모사(子贵母死) - 아들이 귀하게 되면 생모는 죽인다. -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로 황태자를 세우기 전에 먼저 황태자로 지명할 생모에
운영자 15-06-02
[] 북위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하란부인(賀蘭夫人)

북위(北魏)의 헌명황후(獻明皇後) 하란부인(賀蘭夫人) - 북위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하란부인 - 북위의 전신 대국(代國)이 전진(前秦)의 부견
운영자 15-06-01
[] 북위(北魏)의 선행국가 대(代)나라를 세운 척발십익건(拓跋什翼鍵)

척발십익건(拓跋什翼犍 : 320―377年) 선비족으로 평문제(平文帝) 척발욱율(拓跋郁律)의 차자이고 열제(烈帝) 척발예괴(拓跋翳槐)의
운영자 15-06-01
[] 선비족 대추장 단석괴(檀石槐)

단석괴(檀石槐) 동한 순제(順帝) 영화(永和) 2년(137년)에 태어나서 영제(靈帝) 광화(光和) 4년(181년)에 죽은 선비족 대추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운영자 15-05-29
[] l북제의 포학한 황족 고작(高綽 : 556年-574年)

고작(高綽 : 556年-574年) 자는 인통(仁通)이고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융(融) 자는 군명(君明)이다. 북제(北齊) 무성제(武成帝) 고담(高湛)의 서
운영자 15-05-29
[] 전연의 흥기와 쇠망

전연의 흥기와 쇠망 모용씨(慕容氏)의 흥기 전연을 세운 모용씨는 선비족의 일족이다. 동한말 선비족 수령 단석괴(檀石槐)는 흉노족이 이주
운영자 15-05-13
[] 완적전(阮籍傳) -진서(晉書)

《진서(晉書)·완적전(阮籍傳)》 완적(阮籍)의 자는 사종(嗣宗)이고 진류(陳留) 울지(尉氏)① 인이다. 그의 부친 완우(阮瑀)②는 조위(曹魏)의 승상
운영자 14-07-10
[] 혜강(嵇康)의 광릉산(广陵散)은 사라졌는가?

혜강(嵇康)의 광릉산(广陵散)은 사라졌는가? 도연명이 술을 마신 까닭 동진시대의 대문호 도연명(陶淵明) : 대략365~467년)의 시 중
운영자 14-05-20
[] 김운희의 삼국지 바로읽기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진실 1997년 제가 미국에 잠시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동양인 아줌마 한 분을
운영자 14-05-11
[] 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成都="聯合)" 申三浩기자= 劉備와 諸葛亮(181-234). 한 사람은 인재를 포용하는 넓은 덕을 지닌 군주
운영자 14-05-11
[] 삼국지여행 1. 장비점(張飛店)

삼국지여행 1. 張飛店 히북성 탁주시(涿州市) 장비점(張飛店) 책의해 조직위원회(위원장 金洛駿)는 세번째 名著를 찾아가는 해외기
운영자 14-05-11
[] 삼국지의 대표 미인 초선에 대한 역사적 진실

중국 고전의 4대미녀 중의 한 명인 초선(貂蟬)의 형상은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와《삼국연의(三國演義)》등의 소설에 처음 등장했다. 소설의
운영자 14-05-05
[] 영사시(詠史詩)의 개조 좌사(左思)

좌사(左思)와 영사시(詠史詩) 좌사(左思)는 서진인(西晋人)으로 자는 태충(太沖)이고, 임치(臨淄: 지금의 산동성 임치현) 출신에, 생몰 연대는 모두
운영자 11-11-21
[]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가문 일화

1.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 천하명필, 그 신화(神話)의 탄생을 살펴본다 중국 역사상 나타난, 그야말로 수를 헤아릴
운영자 11-09-27
[] 채문희와 왕소군 회고(박한제 교수)

중국 내몽고자치주 수도 呼和浩特 서남 들판에 하나의 무덤이 우뚝 서 있다. 이름하여 王昭君墓라 한다. 내몽고 초원 관광여행 코스에 반드시 들어가
운영자 11-09-16
1 [2][3][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