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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9 11:47:033568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창건한 호하(胡夏)
운영자

호하(胡夏)

-오호십육국시대 흉노족이 세운 왕조 -


호하는 하국(夏國) 혹은 대하(大夏) 또는 혁련하(赫連夏)라고도 칭한다. 오호십육국시대 흉노의 철불부(鐵弗部) 수령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창건한 왕조다. 중국 고대의 하(夏)왕조와 구별하기 위해 사서에는 대하(大夏) 또는 흉노족에 의해 창건되었기 때문 호하(胡夏)라고 칭한다. 혁련발발은 원래 남선우(南單於)의 후예로 중국의 본토로 이주한 후에 유(劉)씨 성으로 개성한 철불부의 수령 유위진(劉衛辰)의 셋째 아들이다. 오호십육국 때 철불부는 같은 흉노족 유연(劉淵)이 세운 전조(前趙)에 속했다가 후에 저족이 세운 전진(前秦)에 복속되었다. 다시 대국(代國)을 멸한 전진왕 부견은 철불부의 수령 유위진을 황하 이서의 땅을 통괄하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동진과의 비수대전에서 패한 전진왕조가 붕궤되자 유위진의 세력은 독립세력으로 발전하여 삭방(朔方)의 땅을 근거지로 삼았다. 후에 북위왕조를 창건한 척발씨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유위진은 목숨을 잃고 종족은 멸족될 때 유발발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지금의 섬서성 연안(延安)인 삼성(三城)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부친의 친구 설간부(薛幹部 : 晉書에는 叱幹部)의 족장 태슬불(太悉佛 : 晉書에는 ‘他鬥伏’)에 의탁했다. 당시 설간부에서 유발발이 행한 행적은 어느 한 왕자가 부모의 원수를 갚은 동화와 같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황하 이남의 전략적인 거점을 차지하기 위해 벌린 쟁탈전쟁의 과정에서 비롯된 복합적인 원한관계 때문에 서연(西燕)을 구원하지 못한 여파로 북위(北魏) 척발도(拓跋燾)의 기습을 받아 유발발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유발발의 행적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다른 기록이 있다.

“질간타투복(叱幹他鬥伏)이 유발발을 잡아 북위로 압송하려고 했다. 그때 대락천(大洛川)의 방어를 맡고 있던 조카 질간아리(叱幹阿利)가 달려와 간했다. ‘천둥소리에 놀란 연작도 자기 품안에 날아들면 마땅히 구해주어야 합니다. 하물며 나라는 망하고 가족은 모두 피살되어 우리에게 망명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를 받아들이지는 못한다면 마땅히 그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그를 잡아서 북위로 압송한다면 그것은 인의에 벗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북위정권으로부터 견책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한 타투복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유발발을 잡아서 북위로 압송했다. 이에 질간아리는 아무도 몰래 굳세고 용감한 기병을 보내 유발발을 노상에서 빼앗아 요흥(姚興)의 후진(後秦) 정권에서 고평공(高平公)으로 있던 몰혁간(沒奕干)에게 보냈다. 유발발의 범상치 않은 기상에 몰혁간은 자기의 딸을 주어 처로 삼게 했다.”(《진서(晉書).재기제30(載記第三十)》

또《위서(魏書).제기제2(帝紀第二)》에는 “옛날 설간부로 도망쳐 온 유위진의 아들 유굴개(劉屈丐)를 붙잡기는 했으나 북위로 압송하지는 않았다.”라고 했고《위서(魏書).열전83(列傳八十三)》에는“태슬복(太悉伏)이 유발발을 요흥에게 보냈다.”라고 했느데 각각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난다. 그러나 후에 질간아리가 대하국의 요직에 임명되어 혁련발발의 신임을 크게 받은 사실을 보면《진서(晉書)》가 보다 정확한 기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후진정권 하에서 유발발의 생활은 그들과의 충돌도 결말이 났다. 후진의 군주 요흥이 비록 유발발을 매우 총애했으나 그의 대신들은 일개 도망자 신분의 몰락한 공자를 곱게 보지 않았다. 요흥의 동생 요옹(姚邕)이 그에 대해 말했다.

“발발의 심성은 잔인하여 가까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윗사람을 모시는데 태만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잔인하게 대하며 탐욕스럽고 포학할 뿐만 아니라 주위에 가까운 사람이 없으며 총애를 받으면 분수도 모르고 경거망동합니다. 그는 결국 우리나라의 변경에 해를 끼칠 것입니다.”《진서(晉書)·재기제30(載記第三十》. 요흥은 요옹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흥은 본심을 가슴에 깊이 감추고 은인자중하고 있던 유발발을 후진왕조의 관직에 임명했다. 지절(持節)、안북장군(安北將軍)、오원공(五原公)에 임명된 그는 지금의 섬서성 유림(榆林) 서쪽 지구인 삼교(三交)에 거주하던 선비 다섯 부족과 잡로(雜虜) 2만여 부락의 수장이 되어 삭방(朔方)에 진(鎭)을 두었다. 그에게 부여한 관작은 표면상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삼교의 선비 다섯 부족과 잡로 2만여 부락을 이끄는 수장이 되어 삭방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요흥이 그와 같은 조치를 행한 이유는 흉노의 잔존세력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유발발에게는 후에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되었다.


서기 407년, 후진의 변경 지역에서 세력을 신장한 유발발은 마침내 마음 속의 야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해 5월 후진이 그의 철천지 원수인 척발씨의 북위와 화친을 맺고 자신에게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요흥의 지배에서 벗어난다고 공포했다. 동년 6월 유발발은 정식으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하(大夏)로 정했다. 하(夏)라는 국호는 흉노족의 선조가 하후(夏候)씨라는 설을 평소에 믿고 있었던 유발발의 본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 당시 유발발에게 복속된 종족들은 이미 순수한 혈통의 흉노족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더욱이 “호부선비모(胡父鮮卑母)” 계열의 철불부(鐵弗部)도 모두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삼교(三交)에 잡거하는 선비 다섯 부족과 잡로를 포함한 2만여 부락”의 종족들이 이미 피가 섞여 흉노족과 선비족을 구분하기가 모호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은 그와 같은 국호는 감정적 색채를 띠고 단지 더 좋은 이름을 찾을 때까지의 잠정적인 호칭에 불과할 뿐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유발발이 세운 하(夏)나라는 호하국(胡夏國)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건국 후에 유발발은 성도 바꾸었다.《위서(魏書).열전제83(列傳之八十三)》의 기사 중에 “유발발은 철불(鐵弗)이란 성을 수치로 여겨 혁련(赫連)으로 개성했다고 했다. 또한 혁련은 또한 휘혁(徽赫)과 천련(天連)에서 따왔으며 발발의 서손을 철벌씨(鐵伐氏)로 호칭하게 했는데 그 종족들이 단단한 쇠처럼 강건하라는 뜻이었다. “‘혁련(赫連)’을 ‘휘황찬란함이 하늘에까지 닿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당연히 견강부회한 말이지만 기사 중 혁련의 본 뜻은 당연히 천(天)과 관련이 있음을 표출한 것이다. 기련(祁連)이나 탱리(撐犁) 등에 해당하는 흉노말은 하늘을 뜻하는 발음과 유사하다. 또한 호(胡)란 천제의 버릇없는아이로 선우의 명칭에는 천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유발발이 성을 혁련으로 바꾼 이유는 흉노의 옛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혁련발발이 세운 하국(夏國)은 동시대에 존재했던 여러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큰 특징이 있다. 그들 국가가 건국하기 전에는 한 뼘의 땅도 고정된 영토로 갖고 있지 않았고 또한 건국 초기 창건자들 역시 영토를 늘리거나 성곽을 확장하는데 그다지 열심이지 않았다. 나라를 세운 창건자들이 영토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로써는 자연스럽고 대수롭지 않은 흔한 풍조였기 때문이었다. 혁련발발의 의해 창건된 신생국 호하(胡夏)의 신민들은 아마도 일종의 전 백성들이 군사가 되어 후진(後秦)의 영토에서 재화를 약탈해서 살아가려는 노력에 온 힘을 경주했다. 그런 정황 하에서 혁련발발의 대신들이 역시 보지 못한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신하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상서했다.

“장차 사해를 경영하시려는 폐하께서는 남으로 장안을 취하여 먼저 나라의 굳건한 근본으로 삼으시어 백성들을 위무하신다면 대업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고평(高平)은 산천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도읍으로 삼을만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건의에 혁련발발은 오히려 일소에 붙이며 대답했다.

“경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도다! 내가 대업을 일으킨지가 얼마 되지 않고 백성들도 그다지 많지 않으며, 요흥 또한 일세를 풍미한 영웅이라고 지금의 형세로써는 관중의 도모는 불가하다. 이에 여러 진(鎭)의 장수들에게 명을 내려 견고한 성에 의지하여 대항할 경우 요흥은 필시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그때는 우리는 중과부적으로 그를 대적할 수 없다. 내가 구름같은 기병으로 바람처럼 내달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재빠른 작전으로 전방을 구원하는 척하며 후방을 공격하고 후방을 구원하는 척하다가 전방을 공격하여 그들을 피로하게 하여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우리는 유유자적하게 배불리 먹고 기다린다면 10년 안에 영북(嶺北)과 하동(河東)의 땅은 모두 우리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요흥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서서히 장안을 취하면 된다. 요흥의 아들 요홍(姚泓)은 일개 평범한 어린 아이에 불과한 자라 나는 이미 그를 포로로 잡을 계책을 세워두고 있다. 옛날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 역시 20여 년 이상을 정처없이 떠 돌아다니다가 제왕이 되었는데 어찌 나만 근거지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진서(晉書)·재기제30(載記第三十)》

위에 말한 혁련발발의 전술은 진실로 현대에서도 통하는 고도로 정밀한 유격전의 개념으로 지금의 현대전에서도 통하는 정치한 이론이다. 그래서 실제로 혁련발발은 그와 같은 전술적인 방침을 세웠고, 또한 실제로 그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후에 그가 건설한 통만성(統萬城)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의 근거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매우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은 그런 전술 방침은 혁련발발의 설계에 의해 진행되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한편 역시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면 다소 어쩔 수 없이 택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후에 그가 건설한 통만성(統萬城)의 구조를 보면 그의 근거지에 대한 인식은 매우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의 수준과 비교할 경우 그의 국토방어계획은 다소 치밀하지 못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앞서의 문서 상의 전술방침은 당연히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또 다른 요소는 당시 그의 목전에서 전개되고 있는 중국 천하의 정세를 매우 우려했던 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서의 기사에서 우리는 혁련발발이 당시 거느린 병력의 주력이 유목민족임을 감안할 경우 만일 그런 유목민족을 이끌고 당시 성채의 방어전에 고도의 전투력을 보유한 후진의 부대와 정면에서 정정당당하게 회전에 들어갔다면 그때는 손자가 살아나 지휘한다고 해도 대하의 군사들은 일패도지했을 것이다. 자기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살린 혁련발발의 군사적인 재능은 당시 혼란기에 있어서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다. 혁련발발이 효과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자 성에 의지하여 방어전을 위주로 펼치는 후진군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심지어는 “영북(嶺北)의 여러 성들의 성문은 낮에는 열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 전진의 부등(苻登)이 보낸 유능한 장수들을 패주시킨 후진의 황제 요흥에게 조차도 신출귀몰하는 호하군을 마치 도깨비를 만난 듯 무력감에 빠져 어쩌지 못하고 그저 옛날 요옹(姚邕)의 말을 듣지 않았던 자신의 판단에 대해 한탄할 뿐이었다.


후진이 견벽청야 작전으로 호하군의 유격전에 대응하자 공성전투에 능하지 못했던 혁련발발은 잠시 눈길을 호하 서쪽 변경의 일정한 국력을 갖추고 있던 선비족 계통의 독발씨(禿髮氏)가 세운 남량(南涼)으로 돌렸다. 독발씨는《위서(魏書)·열전(列傳) 87》에 따르면 “남량국을 창건한 선비(鮮卑) 독발오고(秃发乌孤)의 8대조 척발필고(拓跋匹孤)는 부락민들을 색북(塞北)에서 이끌고 이주하여 하서(河西)에 정착했다. 동쪽으로는 맥전(麥田)、견둔(牽屯), 서쪽으로는 습라(濕羅),남쪽으로는 요하(澆河),북쪽ㅇ로는 대막(大漠)에 이르렀다.” 이 기사와 같은 내용의《진서(晉書)·재기(載記) 제26》에 의하면 독발씨와 척발씨는 가까운 혈족임을 알 수 있다. 독발이라는 성씨의 유래는《진서(晉書)》에 “척발필고의 아들 척발수전(壽闐)은 그의 모친 호액씨(胡掖氏)가 동침한 후에 애를 배어 면이불 안에서 낳았음으로 선비어에 면이불을 독발(秃发)이라 했음으로 이후로 수전의 후예들의 성을 독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나 선비족 계통이기는 하지만 묘용씨와 척발씨는 그 차이가 컸음에 비해 척발씨와 마찬가지로 중국문화에 대한 동경과 조예가 매우 깊었던 독발부의 지배계층은 사회적 조직체계나 구조에 있어서는 매우 원시적인 상태에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남량(南涼)의 대신 한 명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 평가한 기사가 있다

“옛날 우리 독발씨의 선조들은 유주(幽州), 삭주(朔州) 등의 땅에서 피발좌임(被髮左袵) 즉 오랑캐 복장에 머리에는 관이나 면류관도 쓰지 않고 항시 이곳저곳을 또돌아다니다기 머무는 곳에는 성이나 읍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능히 천하의 한 곳을 차지하여 위세를 이역만리까지 떨쳤다. 오늘날 큰 나라를 세워 성심껏 하늘의 뜻에 순종하니 어찌 자연스럽게 락토에 편안히 거할 수 없겠으며 법도를 후손에 남길 수 없겠는가? 또한 창고의 곡식과 비단은 적국의 침략을 유발하고 또한 무력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우려고 시도했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옛날 진승이나 항우가 당한 전례를 답습했을 것이다. 마땅히 망한 진(晉)나라 백성들을 여러 성에 안치한 후에 농사와 잠업을 권장하여 나온 산물로 군대와 나라살림의 비용으로 삼아 잘 훈련된 군사를 동원하여 내조하지 않는 자들을 주살하고 만약 동과 서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그들을 제압하고 강적이 내침하면 우리의 거주지를 옮겨 그들의 예봉을 피한다면 역시 훌륭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진서(晉書)·재기(載記) 제26》의 앞서의 인용문은 남량의 군주 독발이록고(禿發利鹿孤) 휘하의 장군 유물륜(鍮勿侖)의 말이라고 인정되고 있으나, 독발이록고의 동생이며 후에 남량의 군주자리에 오른 독발욕단(禿發傉檀)의 말이라는 설도 있다. 앞서 인용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료로써 당시 남량 사회의 상황과 조직계통을 연구하는 매우 훌륭한 재료다. 한편 혁련발발은 당시로써는 효과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호하국의 사정은 근근히 세운 국호에 매우 조악한 관료체계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으로 국가를 운영할만한 자원이나 경제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해 전쟁을 수행할만한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남량의 군주 독발욕단은 호하국과 화친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던 남량국에 전화가 불타오르게 되었다.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호하군의 침략을 당하게 된 남량군은 일거에 그들의 최전방의 진지를 잃고 말았다. 사실상 그 몇 년 동안 남량은 그 군주 독발욕단이 펼친 외교상의 성공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독발욕단이 이룩한 외교적인 성과만으로 보면 16국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능한 외교관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는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외교적인 수완으로 서량의 군사요충지 고장성(姑臧城)을 차지했다. 그 일은 실로 고도의 외교술로 얻어낸 걸작품이었다. 그러나 호하와의 전쟁은 군사적인 재능에 있어서는 중류에 불과했던 독발욕단에게는 매우 내키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당시 군사적인 재능에서 가장 뛰어났던 장수 중의 한 명이었던 혁련발발과 대적하게 된 독발욕단의 입장에서 싸움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자 혁려발발은 2만의 기병을 이끌고 양비(楊非)에서 지양(支陽)에 이르는 300여리를 종횡무진으로 유린하여 남량의 장수와 사졸들 1만여 명을 살상하고 남량의 민호 2만 7천여 호와 우마(牛馬) 및 양 수십 만 마리를 약탈했다. 양비는 지금의 감숙성 란주시 서북 약 100키로 되는 곳이고 지양은 란주시 교외 서북이다. 이어서 벌어진 다음 전투에서는 독발욕단이 직접 출전한 남량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은 전황하에서도 호하군을 이끌고 국경을 거슬러 80여 리를 쳐들어가 분전하여 남량군 1만여 명의 을 살상하고 그들의 대장 10여 명의 목을 벴다.《진서(晉書)·재기(載記)·제30(第三十)》의 기사의 내용은 “남량군의 시신으로 세운 경관(京觀)을 ‘촉루대(髑髏台)’라고 이름짓고 영북(嶺北)으로 귀환했다.” 또한 호하가 세운 촉루대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위서(魏書)·열전(列傳)83》에 “동진의 대장 유유(劉裕)가 후진의 군주 요홍(姚泓)을 사로잡은 후에 그의 아들 유자진(劉子眞)을 장안의 수비군 대장으로 남겨두고 철수하자 유굴혈(劉屈孑)이 공격하여 유의진을 대파하고 동진 수비대의 두개골로 경관을 세우고 이름을 촉루대라고 지었다.”라고 했다. 유굴혈은 혁련발발의 중국식 이름이다. 어쨌든 혁련발발의 잔인한 행동은 남북조 전 지역에서 이름이 높았다.

남량을 멸하고 그 자원을 보유하게 된 혁련발발은 자신의 기존전략을 여유를 가지고 계속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혁련발발이 시작한 유격전술은 자신의 단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완한 아주 정곡을 찌르는 전략으로 그것의 최종적인 목적은 후진의 멸망이었다. 후진의 진북참군(鎮北參軍)이었다가 호하국에 항복한 왕매덕(王買德)은 혁련발발의 천재적인 전술과 호하국의 존망을 위한 전략을 결합하여 전환한 지구전으로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마침내 두 나라의 역량을 역전시키고 말았다. 즉 후진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쉬지 않고 계속 수행했다. 그와 같은 전술을 몇 차례 반복해서 수행한 결과 마침내 중원에서 대국이며 종주국 신분으로 양주(凉州)의 여러 소국들을 지배했던 후진은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 끝에 피를 다 쏟고 그 힘을 남김없이 소진한 결과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후진의 멸망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남북지(南北志)·남조편(南朝篇)》에 있다.


근거지를 안정시킨 혁련발발은 도성을 건설하려는 생각을 진진하게 고려했다. 서기 413년은 호하국이 창건된지 6년 째 되는 해다. 이 해에 주변의 소국을 정발하여 10여 만에 달하는 포로를 잡은 혁련발발은 지금의 섬서성 정변현(靖邊縣) 홍참계공사(紅攙界公社)의 백성자(白城子) 부근에 옛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질간아리(叱幹阿利)를 총감(總監)으로 임명하여 한 좌의 견고한 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그 성은 쌓는 과정에서 혁련발발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진서(晉書)․재기30(載記三十)》에 “흙을 쪄서 쌓은 성벽이 쇠뭉치로 내리쳐서 1촌의 깊이 이상으로 들어가면 그 즉시 성을 쌓았던 인부들을 모조리 죽였다.”라고 했다. 완성된 성채에 통만성(統萬城)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혁련발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바야흐로 천하를 통일하여 만방에 군림하리라! 그런 뜻에서 도성의 이름을 통만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동시에 후진의 항장 왕매덕(王買德)을 중용하여 모사로 삼고 백관과 관청 및 국가의 각종 제도를 건립하고 발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혁련발발은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성격이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살육했다. 병장기 만드는 일을 완수한 장인들은 반드시 죽여 그 숫자가 수천 명에 달했고 늘 상 손에 활과 검을 들고 성루에 올라 혼자 서있다고 눈초리가 불순한 사람이 지나가면 재빨리 살해했다. 신하들이 올리는 간언을 비방한다고 여겨 먼저 혀를 자르고 난 후에 목을 벴다. 서기 417년, 동진이 북상하여 후진을 공격하여 장안을 포위하자 요홍(姚泓)이 투항했음으로 후진은 망하고 말았다. 동진군의 대장 유유(劉裕)가 돌아가자 그 공백기간을 이용한 혁련발발이 남하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서기 418년 패상(霸上)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창무(昌武)로 개원했다가 다시 진흥(真興)으로 바꾸고 옛날의 근거지 통만성(統萬城)을 도읍으로 정했으며 장안은 남도(南都)로 삼고 태자 혁련괴(赫連璝)를 보내 지키게 하면서 “통령장군(領大將軍),옹주목(雍州牧)、녹남대상서(錄南台尚書)”등의 직책을 겸하게 했다. 후에 태자를 싫어하게 된 혁련발발은 혁련괴를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다른 아들을 세우려고 했다. 혁련괴가 눈치를 채고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혁련괴는 그이 동생 혁련창(赫連昌)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혁련발발은 혁련창을 태자로 삼았다. 혁련발발은 서기 425년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이고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며 가평릉(嘉平陵)에 장사지냈다. 태자 혁련창이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426년(宋元嘉三年,北魏始光三年), 북위가 양로로 공격해와 통만성은 포위하고 장안은 점령했다. 그 다음 해에 통만성마저 함락당하고 하나라의 잔여 세력은 관중과 농동(隴東)을 사이에 두고 북위와 쟁탈전을 벌렸다. 431년 다시 서진(西秦)이 멸망한 기회를 노렸으나 결국은 국력이 고갈된 하주 혁련정(赫連定)이 서쪽의 하서(河西)지구로 이동하던 도중 토욕혼(吐穀渾)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호하국은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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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귀모사(子贵母死) - 아들이 귀하게 되면 생모는 죽인다. -

자귀모사(子贵母死) - 아들이 귀하게 되면 생모는 죽인다. -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로 황태자를 세우기 전에 먼저 황태자로 지명할 생모에
운영자 15-06-02
[] 북위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하란부인(賀蘭夫人)

북위(北魏)의 헌명황후(獻明皇後) 하란부인(賀蘭夫人) - 북위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하란부인 - 북위의 전신 대국(代國)이 전진(前秦)의 부견
운영자 15-06-01
[] 북위(北魏)의 선행국가 대(代)나라를 세운 척발십익건(拓跋什翼鍵)

척발십익건(拓跋什翼犍 : 320―377年) 선비족으로 평문제(平文帝) 척발욱율(拓跋郁律)의 차자이고 열제(烈帝) 척발예괴(拓跋翳槐)의
운영자 15-06-01
[] 선비족 대추장 단석괴(檀石槐)

단석괴(檀石槐) 동한 순제(順帝) 영화(永和) 2년(137년)에 태어나서 영제(靈帝) 광화(光和) 4년(181년)에 죽은 선비족 대추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운영자 15-05-29
[] l북제의 포학한 황족 고작(高綽 : 556年-574年)

고작(高綽 : 556年-574年) 자는 인통(仁通)이고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융(融) 자는 군명(君明)이다. 북제(北齊) 무성제(武成帝) 고담(高湛)의 서
운영자 15-05-29
[] 전연의 흥기와 쇠망

전연의 흥기와 쇠망 모용씨(慕容氏)의 흥기 전연을 세운 모용씨는 선비족의 일족이다. 동한말 선비족 수령 단석괴(檀石槐)는 흉노족이 이주
운영자 15-05-13
[] 완적전(阮籍傳) -진서(晉書)

《진서(晉書)·완적전(阮籍傳)》 완적(阮籍)의 자는 사종(嗣宗)이고 진류(陳留) 울지(尉氏)① 인이다. 그의 부친 완우(阮瑀)②는 조위(曹魏)의 승상
운영자 14-07-10
[] 혜강(嵇康)의 광릉산(广陵散)은 사라졌는가?

혜강(嵇康)의 광릉산(广陵散)은 사라졌는가? 도연명이 술을 마신 까닭 동진시대의 대문호 도연명(陶淵明) : 대략365~467년)의 시 중
운영자 14-05-20
[] 김운희의 삼국지 바로읽기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진실 1997년 제가 미국에 잠시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동양인 아줌마 한 분을
운영자 14-05-11
[] 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成都="聯合)" 申三浩기자= 劉備와 諸葛亮(181-234). 한 사람은 인재를 포용하는 넓은 덕을 지닌 군주
운영자 14-05-11
[] 삼국지여행 1. 장비점(張飛店)

삼국지여행 1. 張飛店 히북성 탁주시(涿州市) 장비점(張飛店) 책의해 조직위원회(위원장 金洛駿)는 세번째 名著를 찾아가는 해외기
운영자 14-05-11
[] 삼국지의 대표 미인 초선에 대한 역사적 진실

중국 고전의 4대미녀 중의 한 명인 초선(貂蟬)의 형상은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와《삼국연의(三國演義)》등의 소설에 처음 등장했다. 소설의
운영자 14-05-05
[] 영사시(詠史詩)의 개조 좌사(左思)

좌사(左思)와 영사시(詠史詩) 좌사(左思)는 서진인(西晋人)으로 자는 태충(太沖)이고, 임치(臨淄: 지금의 산동성 임치현) 출신에, 생몰 연대는 모두
운영자 11-11-21
[]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가문 일화

1.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 천하명필, 그 신화(神話)의 탄생을 살펴본다 중국 역사상 나타난, 그야말로 수를 헤아릴
운영자 11-09-27
[] 채문희와 왕소군 회고(박한제 교수)

중국 내몽고자치주 수도 呼和浩特 서남 들판에 하나의 무덤이 우뚝 서 있다. 이름하여 王昭君墓라 한다. 내몽고 초원 관광여행 코스에 반드시 들어가
운영자 1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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