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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02 11:41:584056 
자귀모사(子贵母死) - 아들이 귀하게 되면 생모는 죽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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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모사(子贵母死)

- 아들이 귀하게 되면 생모는 죽인다. -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로 황태자를 세우기 전에 먼저 황태자로 지명할 생모에게 죽음을 내리는 제도다. 그와 같은 잔인한 방법의 군위를 전하는 방식은 역사학계는 “입자살모” 혹은 “자귀모사(子贵母死)”라고 칭하고 있다. 한무제가 선례를 보인 이 제도는 남북조시대 북위(北魏) 왕조가 계승해서 제도화시켰다. 한무제의 “입자살모” 사건은 서한의 황실에서 일어난 특이한 사건이었으나 척발씨의 북위왕조는 입자살모 사건을 “자귀모사” 제도로 정착시켰다. 북위시대의 군주의 자리를 전하는 과정에서 빈번히 일어난 변란을 척발씨는 하란, 독고, 모용 등의 부족들과 연맹을 맺어 진압하여 왕권을 차지했으며, 반대로 세 가문은 왕실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 척발씨의 왕위 계승다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위왕조 초기 때는 군위의 전승방법은 장유(長幼)나 적서(嫡庶)의 순서로 확정되지 않았고 대체로 그 생모의 종족이 강대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냐에 결정되어 소위 “모강자립(母强子立)”이라고 부를만 했다. 。

척발씨 종족 내의 대사에 대해 왕왕 영향력을 행사했던 척발씨 군장들의 처족이나 모족 소속의 여인들은 여타 다른 북쪽 출신의 여인들 처럼 예교에 의해 속박을 받거나 권력을 행사하는데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들은 직접적으로 조정을 장악하기가 용이했다. 하란족 출신의 모후와 외가의 지지와 도움을 받아 왕위에 앉을 수 있었던 도무제 척발규는 이미 전통으로 굳어버린 제국의 제도를 바꾸어야만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외척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된 국면을 개변시키기 위해서 척발규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모족 하란부(贺兰部)、처족 독고부(独孤部)、조모족(祖母族) 모용부(慕容部) 등의 대부락을 강제로 산개하여 이주시켜 대(代)의 북쪽 지방을 통일했다. 후에 척발규는 다시 자기의 모친 하란태후(贺兰太后)를 죽음으로 몰고 태자의 생모 유황후(刘皇后)에게 사약을 내려 목숨을 빼앗았다. 옛날 신원제(神元帝) 척발력미(拓跋力微)가 자기의 부인 두후(竇后)를 살해한 선례가 있었지만 도무제가 시작한 “자귀모사(子貴母死)” 제도는 후위왕조의 왕위 계승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자귀모사(子贵母死)”제도의 목적은 정사에 간섭하려는 모후의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서었다. 한무제가 구익부인(钩弋夫人)을 죽이고 구익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던 이유는 황제는 어리고 장년의 모후가 장차 한나라의 조정을 어지렵히는 경우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구익부인의 아들이 후의 한소제(漢昭帝)다.


척발규는 소성제(昭成帝) 척발십익건(拓跋什翼犍) 적손(嫡孙)이고 헌명제(献明帝) 척발식의 아들이며 생모는 헌명황후(献明皇后) 하란부인(賀蘭夫人)이다. 서기 376년 대국(代國)을 멸망시킨 전진은 척발규를 장안으로 잡아가려고 했다. 그때 대왕의 좌장사(左长史)을 지냈던 연봉(燕凤)이 전진왕 부견(苻堅)에게 척발규를 대국의 옛 땅에 머물게 하여 그가 장성하면 수령으로 삼는다면 척발규는 부견의 은혜에 감격하여 진나라를 잘 받들 것이라고 힘써 간언했다. 부견의 허락했음으로 척발규는 대국의 옛 땅에 머물 수 있었다. 당시 대국의 옛 땅은 전진왕 부견의 명을 받아 흉노의 일족인 유고인(刘库仁)과 유위진(刘卫辰)이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다. 척발규의 생모 하란부인은 어린 척발규와 척발고를 데리고 하란부족과 독고부족 사이를 전전했다. 그때 하란부, 독고부 및 남부대인 장손숭(长孙嵩) 등은 유고인의 통제 하에 있었다. 원래 대왕 척발십익건 휘하에서 남부대인을 지냈던 유고인은 척발규 등의 옛 대나라 왕족인 척발규 일행을 정성을 다해 모셨다. 대국이 멸망한 후에 비록 전진으로부터 관작을 받았지만 결코 변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뿔뿔이 흩어진 부족들을 찾아 돌아오게 하여 잘 대해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위(北魏)를 창건한 척발규(拓跋珪)는 자신의 통치권을 공고히 확립하는 과정에서 모친과 처의 배후세력이야말로 자신의 권력기반에 가장 큰 위협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비록 외가인 하란가(賀蘭家)와 처가인 모용씨(慕容氏)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자신이 북위왕조를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지만 어린 자신과 동생 척발고를 데리고 여러 부족들을 전전하며 온갖 곤란과 정적들의 살해 위협을 이겨내고 마침내 자신으로 하여금 대국을 부흥시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준 모친의 적극적인 여장부의 모습은 척발규의 뇌리에 두려운 형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오랜 동안의 심사숙고 끝에 그는 외척의 후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독고부에서 맞이한 장자 척발사(拓跋嗣)의 생모 유귀인(刘贵人)을 죽여 자기의 사후에 외척세력이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제거하려고 했다. 부황의 의중을 눈치 챈 효성이 지극한 척발사는 매일 밤낮으로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자 척발규가 그와 같은 조치가 불가피한 이유를 힘들여 설득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척발규가 노하여 척발사를 세자로 세우고 궁궐로 들라는 명을 내렸다. 척발규의 역정을 알고 있었던 태자의 측근은 아마도 태자가 궁궐로 들어가면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고 생각해서 척발사에게 궁궐로 들어가지 말고 일단은 몸을 피했다가 황제의 노기가 가라앉으면 그때 죄를 빌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척발사는 측근의 권유에 따라 척발규의 명을 받들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척발사가 도망치자 척발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발규가 후계자로 세우려했던 아들은 청하왕(清河王) 척발소(拓跋绍)였다. 척발소의 모친은 척발규의 생모인 하란부인의 동생으로 즉 척발규의 친이모였다. 척발규가 어린 시절 하란부에 몸을 의탈하고 있을 때 아름다운 이모의 모습 반했었다. 당시 선비족들에게는 자기보다 항렬이 높은 여인들과의 혼인은 일상적인 일로 이모를 자신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일은 정상적인 관습이었다. 황태후 하란부인은 자신의 어린 동생이 매우 아름다운 용모의 미인이었으나 그때는 이미 시집을 가서 남편이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자기 아들의 처로 데려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척발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무도 몰래 이모의 남편을 살해하고 그녀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다.


척발규는 그런 하씨부인을 매우 사랑했다. 그러나 척발사가 도망가고 척발소를 태자로 세우려고 결심한 척발규는 반드시 하씨부인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손을 쓰지 않고 그녀를 모처에 가두어 두고 시간을 두고 시행하려고 했다. 중원왕조에서 그와 같은 부자상속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는 이미 두 이복동생 척발고와 척발의(拓跋儀)를 죽였고 하란부와 독고부 세력을 제거할 때는 자신의 생모를 압박하여 울분에 차서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는 자기의 후계자가 외척세력에 의해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사랑하는 부인을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와 가까이 있던 친족들이 하나 둘 씩 죽어나갈 때 그는 자기야 말로 고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정신적인 중압감과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받은 척발규의 마음은 극도로 피폐해진 나머지 마침내는 정신착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매일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며 마치 자신의 좌우에 홀연히 나타난 원귀들에게 하나하나 자기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때 모처에 갇혀 앉아서 그냥 죽을 수만 없다고 생각한 하씨부인은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주위 사람에게 자기를 구원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자신의 아들 척발소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16살 난 척발소는 몇 사람의 수행원을 데리고 깊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궁궐의 담을 넘어 척발규의 침소가 있는 천안전(天安殿)에 침입했다. 척발도가 인기척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나 무기를 찾을 새도 없이 아들과 그 수행원들이 휘두른 칼에 살해되고 말았다. 서기 409년의 10월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척발규는 그때 겨우 39세의 한참 나이였다. 척발사는 동모제 척발열(拓跋烈)의 도움으로 몸을 드러내 척발규의 뒤를 있고 이어서 하씨 모자를 사약을 내려 죽였다. 척발사는 척발규에게 태조(太祖) 도무황제(道武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후로 자귀모사 제도는 여전히 북위의 후비들에 의해 차용되어 당시 모후의 외척세력이 정치에 간섭할 여지가 없는 틈을 타서 황제의 생모를 죽이는 제도는 완전히 정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그와 같은 규정으로도 태후가 조정에 나와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방지할 수 없었다. 비록 황제의 생모가 죽었다고 해도 황태후와 선황들의 후비 소생이 낳은 아들들이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文明太后 馮氏가 그와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헌문제(献文帝)와 효문제(孝文帝)를 차례로 자기 손바닥에 안에 넣고 조정하자 황제들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지시를 따라야했다. 북위정권의 자귀모사제도는 100여 년간 계속 시행되다가 선무제(宣武帝) 척발각(拓跋恪)에 의해 폐지되었다.


척발규가 죽자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그의 사업을 계승한 아들 척발사(拓跋嗣)의 노력으로 북위정권은 안정되어 발전을 이루었다. 다시 14년 후에는 척발규가 북위정권의 세력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의 손자 척발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척발도가 후의 위태무제(魏太武帝)。척발도는 매우 뛰어난 군주로쏘 능력, 재주, 담력, 품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척발규와 닮은 점이 많았다. 동시에 용기와 무예가 뛰어났으나 또한 의심이 많고 폭력적인 성격으로 인해 결국 그도 척발규처럼 비명으로 최후를 마쳤다. 척발도는 척발규가 이룩하지 못한 사업을 계속 발전시켰으며 중국 북방의전역을 통일하고 문자를 창조하여 한족문화에 대한 흡수를 한층 더 진일보시켜 북위정권이 하나의 강대한 제국으로 성장시켰다.



※神元帝 척발력미(拓跋力微)가 그의 왕비 두후(窦后)를 살해한 사건


신원제(神元帝) 척발력미는 서기 174년에 태어나서 277년에 죽은 척발씨가 북위를 세우기 전의 족장이다. 성무제(圣武帝) 척발힐분(拓跋诘汾)의 아들로 서기 200년 경 어린 나이로 선비족 색두부(索头部) 추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추장의 자리에 처음 올랐을 때는 척발부 소속의 서부선비족들은 서로 전쟁을 수시로 벌려 부족민들은 뿔뿔히 흩어져 있었던 상태였다. 그 여파로 척발력미는 “몰록회부(没鹿回部)”의 대인 두빈(窦宾)을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평소에 척발력미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던 두빈은 몰록회부의 영토의 반을 나누어 력미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력미가 사양하고 받지 않자 두빈은 자신의 딸을 그에게 주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 척발력미는 종족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아가 장천(长川)에 거주하면서 10년 동안 종족들을 잘 다스렸음으로 옛 땅의 종족들도 찾아와 복속했다.


서기 248년, 두빈(窦宾)이 죽기 전에 아들을 불러 척발력미를 잘 대하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두빈의 아들들은 오히려 척발력미를 살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척발력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부인 두씨를 살해하고 사람을 두빈의 아들들에게 보내 두씨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고 알렸다. 척발력미는 믿고 달려온 두빈의 아들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로써 선비족의 다른 추장들은 모두 척발력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서기 258년 척발력미가 자신의 부중을 이끌고 남쪽의 성락((盛乐)으로 내려가려는 목적으로 선비족이 각 부족들의 추장들을 소집했다. 성락은 지금의 내몽고 화림격이(古和林格尔)의 북쪽이다. 제부족의 추장들은 모두 척발력미의 명을 따랐다. 서기 261년, 척발력미는 그의 아들 척발사막한(拓跋沙漠汗)을 조위(曹魏)의 조정에 인질로 보냈다. 서기 277년, 서진(西晉)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위관(卫瓘)의 계략에 빠진 력미는 각 부족의 추장들이 참언을 믿고 아들 척발사막한을 시켜 각부 추장들을 살해했다. 위관은 다시 계략을 꾸며 죽음을 모면한 추장들을 력미의 휘하에서 떨어져 나가게 했다. 나중에 모든 것이 위관의 계략에 빠진 것을 알게 된 력미는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사서에는 그때 그의 나이는 104살이라고 했다. 그의 아들 척발슬록(拓跋悉鹿)이 뒤를 이어 군장의 자리에 올랐다. 후에 북위왕조를 창건하고 황제를 칭한 도무제 척발규에 의해 신원황제로 추서되고 묘호는 시조(始祖)이며 두씨도 함께 신원황후로 척발력미의 정비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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