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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2 17:29:263822 
주무제(周武帝) 우문옹(于文邕)의 북방통일과 멸불운동
운영자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


남북조시대의 북주(北周)의 무제(武帝)의 이름은 우문옹(宇文邕)이고 서기 543년에 태어나서 서기 578년인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자는 이라돌(禰羅突)에 선비족으로 지금의 내몽고 관하의 대군(代郡) 무천(武川)에서 북주의 문제(文帝) 우문태(宇文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북주 효민제(孝閔帝) 우문각(宇文覺)과 명제(明帝) 우문육(宇文毓)의 이모동생이고 생모는 문선황후(文宣皇後) 질노씨(叱奴氏)이며 남북조 주조의 세 번째 황제로 서기 560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우문옹은 재위기간 중 권신 우문호(宇文護)를 주살하고 선비족의 구습을 타파했다. 관리체제를 정비하여 북조의 정치를 밝게 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킨 결과 국세가 매우 강성해졌다. 검소한 생활을 견지한 우문옹은 민간의 질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서기 575년 북제를 대거 공격하기 시작한 우문옹은 1년 반 동안의 치열한 전쟁 끝에 북제를 멸했다. 서기 578년 북주의 전 병력을 이끌고 다섯 개의 진군로를 이용하여 돌궐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출동 직전 갑작스러운 병으로 급사했다. 당시 우문옹은 36세의 한창 젊은 나이었다. 우문옹은 중국 역사상 소수민족 출신의 뛰어난 군주로 인정받고 있다.


업적

무성(武成) 2년(560),명제 우문육(宇文毓)을 독살한 권신 우문호(宇文護)는 당시 대사공(大司空)에 노국공(魯國公)이었던 우문옹을 황제로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건덕(建德) 원년(572),우문옹이 우문호를 주살하고 친정에 임해 정사를 직접 처리하기 시작했다.

근검한 생활을 견지하고 모든 일을 옛날 선현들의 행적을 따르려고 했던 우문옹은 북제의 황궁을 본 따 지은 화려한 궁전을 모두 불살랐다. 사서에는 “몸에는 베옷으로 만든 도포를 입었으며 후궁은 10여 명에 불과했다.”라고 했다. 우문옹은 재위 기간 중에 선비족의 구습을 타파하고 한족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관리체계를 정돈하여 북주에 치세가 오도록 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생활은 부유하게 되고 국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는 다시 대대적으로 멸불운동을 펼쳐 전국의 만연해 있던 대량의 불탑과 사찰을 부수고 추상같은 령을 발해 승려들을 환속하도록 했다. “불탑과 사당 사이에서 무기를 찾아 승려에 으해 부림을 받고 있던 백성들을 환속시켜 군사로 만든다[求武器於塔廟之間、以士兵於僧侶之下]”라는 구호로 부국강병운동을 펼쳤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때의 일을 ‘삼무지화(三武之禍)’의 하나에 포함시키고 있다. 삼무란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척발도(拓跋燾), 주무제 우문옹 및 당무종(唐武宗)을 말한다.


건덕 4년 575년, 우문옹은 많은 대신들이 반대한 가운데 제왕(齊王) 우문헌(宇文憲) 등의 인사들과 모의하여 북제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주무제는 친정에 나서 지금의 하남성 낙양인 금용성(金墉城)을 포위공격하다가 진중에서 병을 얻어 회군했다. 다음해에 다시 제나라 정벌군을 일으켜 여러 길로 나누어 진군하여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에 소재한 평양(平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계속 북진하여 진양(晉陽)을 포위공격하다가 전투에 패하고 자신은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면한 후에 간신히 잔병을 수습한 우문옹은 우문흔(宇文忻)의 “사지에서 생을 구하고 패전에서 승전을 구하십시오.”라는 건의에 따라 심기일전하여 마침내 진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건덕 6년 서기 577년, 업도(鄴都)에 입성하여 북제를 멸하고 중국의 북방을 통일했다. 그때 북제왕조는 포로로 잡아간 북위의 하서(河西) 지방의 백성들을 대를 이어 노예로 만들어 노역에 동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위(西魏) 왕조를 찬탈한 북주는 영토 내에 노비를 두지 않았으며 남조의 양나라로부터 빼앗은 강릉의 백성들 누구도 노비로 만들지 않고 양인으로 살게 했다. 그때 돌궐은 세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그 힘으로 북제를 노리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진(陳)나라가 여전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옹은 돌궐의 공주를 맞이하여 황후로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북제를 멸한 우문옹은 선정(宣政) 원년 서력 578년, 나라의 군사를 5대로 나누어 각기 행군로를 따라 진군하여 돌궐을 토벌하기 위해 친정을 행했다. 그러나 행군 도중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는 36세의 한참 나이었다. 우문옹이 죽은 지 3년 후에 양견이 그의 어린 아들로부터 선양 형식을 취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후에 수나라를 세웠다.


황권을 강화하다.

우문옹은 우문태(宇文泰)의 넷째 아들이다. 우문태는 서위(西魏)의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권을 오로지한 실제적인 서위정권의 통치자였다. 서력 556년 우문태가 원정 중에 병이 걸려 죽자 우문태의 조카 우문호(宇文護)의 비호 하에 당시 16세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권력을 승계하여 서위의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주정권을 창건했다. 우문각의 시호는 효민제(孝閔帝)다. 무성(武成) 2년 서력 560년 4월, 친정을 행하려는 우문각을 독살한 우문호는 우문태의 서장자 우문육(宇文毓)을 황제로 옹립하여 그 뒤를 잇게 했다. 그러나 친정을 행하려고 하던 우문육도 1년도 채 못 되어 우문호가 다시 독살하고 우문각의 넷째 아들인 우문옹을 옹립하여 황제로 세웠다. 이가 북주의 무제다. 무제가 재위에 올랐을 당시 북주의 정국은 매우 불안했다. 그 이유는 우문호가 북주의 정권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어 권력을 농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문호는 서위정권 때 이미 대장군과 사공을 역임한 권력자였다. 동위의 마지막 황제부터 북주의 두 황제를 포함하여 모두 세 명의 황제를 살해한 우문호가 실질적으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다고 간파한 우문옹은 표면상으로는 불만을 감히 내색하지 못했다. 무제의 그런 자세는 그가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과 일의 요체에 대해 매우 밝은 성품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번은 양조공(梁躁公) 후막진숭(侯莫陳崇)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원주(原州)에 순시 나갔다가 밤이 되었음에도 무제가 한사코 고집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원주는 장안에서 서북 200키로 떨어진 지금이 고원시(固原市)다. 사람들은 그 일을 매우 괴이하게 생각했다. 진숭이 그의 막역한 친구인 상승(常升)에게 말했다.

“내가 얼마 전에 점을 쳤는데 진공(晉公) 우문호(宇文護)가 금년 액운이 들었다고 했다. 황제께서 오늘 원주에 순시나갔다가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도성으로 달려 돌아간 이유는 아마도 진공 우문호가 죽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진숭의 말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이에 어떤 사람이 그 사건을 고변했다. 우문옹이 대덕전(大德殿)으로 공경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후막진숭을 견책했다. 후막진숭이 두려운 마음에 죄를 청했음으로 근신을 명하고 조회를 파했다. 그날 밤 우문호가 군사들을 보내 숭의 집을 포위하고 그를 압박했음으로 결국 숭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우문옹은 후막진숭을 규정된 의례에 따라 장례를 치러주었다. 주무제의 그런 행동은 자기는 켤코 이심을 품지 않았다는 뜻을 우문호에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주무제는 다시 우문호에게 도회지계(韜晦之計)를 구사했다. 우문호를 표창하면서 조칙을 내려 말했다.

“대총재(大塚宰) 진국공(晉國公)은 친속으로 짐의 절친한 형님이시다. 사직의 원보(元輔)로 이 나라를 지키는 대들보가 되어야 마땅하니 지금 이후로는 조명이나 포고령 및 모든 문건은 진공의 이름도 함께 병기하라!”

그때 우문호의 생모는 옛날 북제와의 싸움에서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35년 동안 헤어진 상태였다. 이윽고 북제부터 석방된 우문호의 생모가 북주로 돌아오자 주무제가 기뻐하며 말했다.

“무릇 봉헌 받은 재물로 지극히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 때가 되면 하제(夏祭)와 동제(冬祭)를 지내 조상신을 받들고 있는 주나라의 주인 되는 짐이 여러 황친들을 이끌고 집안의 이런 기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잔치를 벌려 숙모님께 축수를 해야 하겠소.”

주무제의 그런 발언은 우문호의 환심을 사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으나 우문호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황제가 표면적으로 자신을 존중하고 있는 척하고 있으나 자기가 옹립했다가 살해한 우문각이나 우문육과 마찬가지로 친정을 행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문호는 시시때때로 주무제를 끼고 전횡을 넘어 발호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직접 오르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서력 572년 주무제 재위 다음 해인 건덕(建德) 원년, 동주(同州)의 순시를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온 우문호를 맞이한 무제가 함께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기 위해 태후궁으로 향하던 중 우문호에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춘추가 높으심에도 술을 많이 들고 계십니다. 여러 번 간했지만 여전히 듣지 않으십니다. 형님께서 뵙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리고는 품속에서《주고(酒誥)》를 베낀 서찰을 꺼내 우문호에게 주어 그것으로 태후를 설득해달라고 청했다. 태후의 거처에 당도한 우문호는 주무제의 요청대로 태후 앞에서 《주고(酒誥)》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우문호의 경계를 풀고 주고를 읽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주무제가 들고 있던 옥홀(玉笏)로 우문호의 머리를 가격했다. 불의의 일격에 우문호가 넘어지자 무제는 환관 하천(何泉)에게 명하여 칼로 우문호를 찔러 숨통을 끊으라고 명했다. 당황한 하천이 손을 떨며 몇 번이나 우문호의 몸을 칼로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그때 뒤에 숨어있던 주무제의 동모형제 위국공(衛國公) 우문직(宇文直)이 튀어나와 우문호를 살해했다. 우문호의 일가를 멸족시켜 심복의 화근을 제거한 주무제는 명실상부한 북주의 통치자가 되어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 우문태가 닦은 기초 위에 건립된 북주정권은 원래 북제에 비해 국력이 훨씬 약세였다. 우문옹의 개혁조치들은 그런 북주정권을 북제정권을 뛰어 넘는 강국으로 변모시켰다.


멸불운동(滅佛運動)

북제의 멸불운동은 남북조시대 북제의 무제 우문옹의 건덕(建德) 연간에 여러 차례의 쟁론을 거쳐 각 사회계층의 압력을 버티다가 당시 불교의 극성은 사회적인 반감을 일으켜 척불운동으로 나타나 북제의 전 영토로 확대되어 하나의 거대한 멸불운동으로 진행된 결과 사찰은 국가에 귀속되고 승려는 칙령으로 환속되거나 군역으로 충당되었다. 무제의 철저한 멸불운동의 전개는 북방에 있어서 불교는 금지되어 거의 교세가 단절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우문옹의 멸불운동은 중국문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후한 명제(明帝 : 28-75) 때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으나 동시에 심각한 사회문제를 조성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대사원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점차적으로 독자적인 정부를 운영할 정도로 발전했다. 출가인은 사원의 권력에 의지하여 나쁜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며 나라의 법규나 약속들을 받들지 않았다. 대량의 토지와 세수 및 출연금은 종교 조직의 통제를 받아 국력을 심각하게 잠식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북주의 무제는 금불(禁佛) 정책을 시행하기로 결심했다.

금불정책을 시행하면 사후에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승려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건덕(建德) 3년(574년)5월 15일 주무제는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 불교와 도교의 포교를 금지하고 모든 불상이나 도인의 상을 파괴하라! 승려와 도사는 환속시켜 일반 백성으로 돌려보내라! 은밀한 모든 종교 행사는 금하고 소정의 규정된 것을 제외한 모든 의식은 없애라!”

한 순간에 북주의 모든 땅에서는 ‘불상을 녹이고 불경을 불살랐으며 승려를 쫓아내고 불탑을 파괴했다. 사찰과 절간은 모두 일반저택으로 변했고 승려들은 모두 일반 백성으로 환속했다.’ 건덕 6년(577년),북제를 멸한 주무제는 계속해서 제나라의 옛 땅에 멸불정책을 시행했다. 4만 여 개의 사찰을 파괴하고 300만에 달하는 승려는 북주정권의 총인구의 1/10에 달하는 막대한 인적자원으로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한 병력과 재원(財源)에 충당되어 실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주무제의 멸불운동은 불교도 필히 세속의 황권을 존중해야만 하는 정치적인 원칙을 확립하고 불교사원과 신도들이 힘을 합하여 세속정권에 항거하여 신정일치 정권이 수립되는 길을 단절했다. 이로써 중국은 이때부터 현재까지 1천 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신정일치 사회에 기초한 유럽 사회보다 선진화된 국가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북방통일

주무제 우문옹은 또한 뛰어난 군사전략가이도 했다. 서력 575년, 주무제가 우문순(宇文純)、사마소난(司馬消難)、달해진(達奚震)을 전삼군총관(前三軍總管)에 다시 우문성(宇文盛)、후막진경(侯莫陳瓊)、우문초(宇文招)를 후삼군총관(後三軍總管)에 임명한 후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하수를 건너 북제 정권의 하양성(河陽城)을 공격했다. 그해 9월 북제의 우승상 고아나굉(高阿那肱)이 대군을 이끌고 진양(晉陽)에서 출병하여 하양(河陽)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했다. 그때 마침 주무제가 병을 심하게 앓았음으로 북주군은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리치고 말았다. 주무제 즉위 2년 서기 576년 10월, 북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북제정벌군을 일으켰다. 두 번째의 정벌은 북주의 전 군사력을 집중시킨 14만 5천으로 일차 공격 때의 진군로를 바꾸어 진양을 직공하는 전략을 세웠다. 10월 하순 주나라 군대 주력이 평양성(平陽城) 밑에 이르자 북제의 진주자사(晉州刺史) 최경호(崔景暠) 등은 성을 들어 투항했다. 11월 초 북제의 후주(後主)가 제군(齊軍) 주력 10만 명을 이끌고 북주의 평양성을 포위하고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주나라 군대는 분전을 거듭하여 서로 선봉을 다투어 가히 일당백이라고 할만 했다. 12월 주무제는 장안을 떠나 평양성으로 들어갔다. 주무제는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명을 내려 관하의 군대를 모두 평양성에 집결시키도록 명했다. 약 8만 명에 달하는 주군은 평양성을 바라보고 세운 진영은 동서로 20여 리에 뻗쳤다. 주무제는 제왕(齊王) 우문헌(於文憲) 명하여 적진을 향해 나아가 적군의 허실을 살펴보라고 했다. 제왕 헌이 주무제를 향해 말했다.

“원컨대 적군을 물리친 후에 식사를 하겠습니다.”

제왕 헌의 말에 크게 기뻐한 주무제가 말했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내가 근심할 필요가 없겠다!”

주무제는 말을 타고 앞으로 나가 주군을 순시하면서 말을 달려 큰 소리로 각 군의 장수들을 이름을 호명하여 격려했다. 주군의 장군들과 병사들을 그가 황제임을 알아채고 사기가 충천하여 임전무퇴의 태세를 갖추었다.

북제의 황제 고위(高緯)가 고아나굉(高阿那肱)을 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말했다.

“지금 북주군과 싸울 수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어찌하여 싸움을 하지 않고 있는가??”

아나굉이 대답했다.

“우리 군대의 병수의 수가 많다고는 하나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병사는 10만이 넘지 않고 더욱이 옛날 옥벽(玉壁)의 싸움①에서 서위의 구원군 때문에 우리 동위군은 철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무황제(神武皇帝)②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장군들이나 적은 병력을 가지고 어찌 그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싸움을 중지하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안토근(安吐根)과 같은 장수들이 주나라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했다.

“저에게 싸울 기회를 한번 주시면 마상에서 적장을 찔러 분수(汾水) 강물 속으로 던지버리겠습니다.”

북제의 황제 고위(高緯)가 결심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제나라의 군신들 중에서 한 가지 허황된 의견을 제출했다.

“주나라의 군주도 역시 천자이고 우리의 주군도 역시 천자이며 그들은 먼 곳에서 원정해 왔음에도 어찌하여 우리는 참호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며 허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고위는 그런 허황한 의견을 칭찬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도다!.”

그리고는 참호를 모두 메꾸라는 명을 내렸다. 주무제가 곧바로 제군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지 그 동안 참호 때문에 공격에 애를 먹고 있었던 주나라 군사들에게 메꿔진 참호를 보고 뛸듯이 기뻐했다. 이윽고 주무제의 명을 받은 주군이 물밀듯이 돌격을 감행하자 제나라 황제 고위는 곧바로 도주하고 잠시 후에 제군의 군심은 동요되어 계속되는 전투로 모두 궤멸되어 전사자만 수만 명에 달했다. 사서에는 “제군이 버리고 간 군수품과 병장기는 수백 리에 걸쳐 산처럼 쌓였다.”라고 기록했다.

평양(平陽)의 싸움에서 북제는 이미 실제적으로 원기를 상실하고 무너진 상태가 되었으며 진양으로 달아난 북제의 황제 고위는 지금의 산서성 삭현(朔縣)인 삭주로 달아나 돌궐에 의탁하려고 했다. 북제의 군주 고위가 진양성을 몰래 빠져나가 도망치자 남아있던 신료들처럼 모두 뿔뿔히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고위의 총신 목제파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주무제에게 투항했다.

서기 577년 정월, 징양성을 위무한 주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북제의 도성 업성(鄴城)으로 진군하여 포위한 후에 공격을 퍼부어 함락시켰다. 업성이 함락되기 전 하루 전에 성을 탈출하여 제주(濟州)로 달아난 고위는 다시 청주(青州)를 거쳐 남조의 진(陳)나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뒤따라온 북주의 추격군에 의해 사로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가 2년 후에 살해되고 말았다.

마침내 주무제는 북제를 멸하고 중국의 북방을 통일했다. 주무제의 북방통일은 중국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그는 북위가 동서로 분열된 이래 근 반세기 동안 끊이지 않은 전란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을 구했으며 전란으로 황폐화된 농지를 살려내 생업의 터전으로 회복시켰다. 그의 업적은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교류와 발전을 촉진시켰다. 주무제는 후에 수나라가 서진 이래 분열되어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전란 상태를 끝내고 통일왕조를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북주가 북제를 멸하여 북방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남북조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①기원전 546년 남북조시대 동위와 서위 사이에 벌어진 옥벽(玉壁)의 싸움을 말한다. 옥벽은 지금의 산서성 직산(稷山)에 있었던 서위(西魏)의 하동(河東) 방어의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동위의 승상 고환(高歡)이 나라의 전군사력을 동원한 대군을 이끌고 서위(西魏) 장군 위효관(韋孝寬)이 지키는 옥벽성을 포위한 후에 맹공을 퍼부었다. 50일 간을 쉬지 않고 주야로 공격했으나 옥벽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7만의 군사들의 목숨만 잃고 회군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고환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병이 들었음으로 동위군은 본국으로 철병해야만 했다.

②신무황제(神武皇帝) : 동위의 창건자 고환(高歡)의 시호다.


평가(評價)

우문옹은 중국역사에 있어서 소수민족 출신의 위대한 군주의 한 명으로 역사는 그에게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으나 결국은 통일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은 주지 않았다. 주무제가 북제를 멸하고 북방을 통일하여 한 나라로 합칠 수 있었던 원인은 황제의 몸으로 장병들과 동고동락하고 싸움에 임했을 때는 사졸들 앞에 서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이 전기를 기록한 책에는 빠짐없이 ‘몸소 사졸 틈에 끼어 적군의 성루에 올라 육박전을 펼쳤다.’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는 정사에 부지런했고 생활은 검소했으며 후궁과 미인은 10여 명이 넘지 않았다. 당시 남조의 진(陳)나라는 이미 극도로 부패되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에 주무제에 의한 중국통일은 목전의 일에 불과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무제는 35세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말아 후인들의 한탄을 자아내게 했다. 주무제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8살의 어린 나이였음으로 주나라에 부여된 중국통일의 사명을 완수할 없었다. 결국 중국의 통일은 주무제의 아들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왕조를 세운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에 의해 완성되었다.


(baidu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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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발십익건(拓跋什翼犍 : 320―377年) 선비족으로 평문제(平文帝) 척발욱율(拓跋郁律)의 차자이고 열제(烈帝) 척발예괴(拓跋翳槐)의
운영자 15-06-01
[] 선비족 대추장 단석괴(檀石槐)

단석괴(檀石槐) 동한 순제(順帝) 영화(永和) 2년(137년)에 태어나서 영제(靈帝) 광화(光和) 4년(181년)에 죽은 선비족 대추장이다. 어렸을 때부터
운영자 15-05-29
[] l북제의 포학한 황족 고작(高綽 : 556年-574年)

고작(高綽 : 556年-574年) 자는 인통(仁通)이고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융(融) 자는 군명(君明)이다. 북제(北齊) 무성제(武成帝) 고담(高湛)의 서
운영자 15-05-29
[] 전연의 흥기와 쇠망

전연의 흥기와 쇠망 모용씨(慕容氏)의 흥기 전연을 세운 모용씨는 선비족의 일족이다. 동한말 선비족 수령 단석괴(檀石槐)는 흉노족이 이주
운영자 15-05-13
[] 완적전(阮籍傳) -진서(晉書)

《진서(晉書)·완적전(阮籍傳)》 완적(阮籍)의 자는 사종(嗣宗)이고 진류(陳留) 울지(尉氏)① 인이다. 그의 부친 완우(阮瑀)②는 조위(曹魏)의 승상
운영자 14-07-10
[] 혜강(嵇康)의 광릉산(广陵散)은 사라졌는가?

혜강(嵇康)의 광릉산(广陵散)은 사라졌는가? 도연명이 술을 마신 까닭 동진시대의 대문호 도연명(陶淵明) : 대략365~467년)의 시 중
운영자 14-05-20
[] 김운희의 삼국지 바로읽기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진실 1997년 제가 미국에 잠시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동양인 아줌마 한 분을
운영자 14-05-11
[] 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成都="聯合)" 申三浩기자= 劉備와 諸葛亮(181-234). 한 사람은 인재를 포용하는 넓은 덕을 지닌 군주
운영자 14-05-11
[] 삼국지여행 1. 장비점(張飛店)

삼국지여행 1. 張飛店 히북성 탁주시(涿州市) 장비점(張飛店) 책의해 조직위원회(위원장 金洛駿)는 세번째 名著를 찾아가는 해외기
운영자 14-05-11
[] 삼국지의 대표 미인 초선에 대한 역사적 진실

중국 고전의 4대미녀 중의 한 명인 초선(貂蟬)의 형상은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와《삼국연의(三國演義)》등의 소설에 처음 등장했다. 소설의
운영자 14-05-05
[] 영사시(詠史詩)의 개조 좌사(左思)

좌사(左思)와 영사시(詠史詩) 좌사(左思)는 서진인(西晋人)으로 자는 태충(太沖)이고, 임치(臨淄: 지금의 산동성 임치현) 출신에, 생몰 연대는 모두
운영자 11-11-21
[]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가문 일화

1.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 천하명필, 그 신화(神話)의 탄생을 살펴본다 중국 역사상 나타난, 그야말로 수를 헤아릴
운영자 11-09-27
[] 채문희와 왕소군 회고(박한제 교수)

중국 내몽고자치주 수도 呼和浩特 서남 들판에 하나의 무덤이 우뚝 서 있다. 이름하여 王昭君墓라 한다. 내몽고 초원 관광여행 코스에 반드시 들어가
운영자 1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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