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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1 07:59:581279 
영화 “뮬란”의 주인공 , 木蘭에 얽힌 傳說 ⑮
운영자




朴漢濟 교수의 중국中世로의 시간여행


영화 “뮬란”의 주인공 , 木蘭에 얽힌 傳說 ⑮


[애국심의 상징이자 효도의 모범 그리고 용기있는 여성의 대명사로 역대 중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木蘭. 월트 디즈니는 전해오는 목란의 이야기를 각색해 만화영화로 제작,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목란의 이야기가 담긴 ‘木蘭詩’를 통해 목란과 그가 살았던 위진남북조 시대를 돌아본다.]



창문이 서향으로 뚫린 연구실에 앉아 서편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라치면 문득 저 구름 너머가 중국일 것이라는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곤 한다. 지금까지 20회 가까이 중국에 드나들었고, 1년이나 그곳에서 생활했건만 아직도 가 보지 못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중국의 면적(11,173,558㎢)은 유럽대륙과 거의 비슷하며, 우리나라(남북한) 면적의 50배에 이른다.
아직 우리나라에도 가 보지 못한 곳이 많은데, 우리나라 50개가 합쳐진 면적을 가진 중국을 대강이라도 훑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둘러본 중국대륙 가운데 지그시 눈감으면 불현듯 떠오르는 영상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초원이다.
연구 방향이 이 초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서만도 아니다. ‘심플’하다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초원에 가 보지 않으면 쉽게 짐작할 수 없다. 마지막 유목제국인 준가르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지 이미 300여년이 지난 지금, 인류가 만들어낸 양대 문명의 하나였던 유목문명의 잔해인 초원과 유목민들이 그런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를 정말 기쁘게 한다. 내몽고 초원을 다섯차례, 몽골인민공화국을 한차례 방문하여 그때마다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긴 초원길을 다니기도 했지만 초원은 그저 그립기만 한 존재다.



蒙古草原紀行

가없이 펼쳐진 草原 위로 말달리던 여인의 이야기가 천몇백년 동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는 遠征軍의 일원으로 참여하라는 軍帖을 받은 병약한 아버지 대신 男裝을 하고 12년간 치열한 전투에 참여해 큰 공훈을 세우고 개선했다. 그가 바로 木蘭이다. 그에게 주어진 벼슬은 尙書郞이라는 고관이었다.

그는 그 높은 벼슬도 마다하고 부모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고향땅으로 귀환해 마침내 화장하고 여자의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혹설에 의하면 木蘭이 여자라는 사실을 안 군주가 수청을 강요했으나 죽음으로써 거절했다고 한다. 이것이 人口에 회자되던 ‘木蘭詩’의 대강의 줄거리다. 소설에는 간혹 추한 여인도 나오지만, 시 속에는 그럴 여유가 없다.

시 속의 여인은 항상 아름답다. 木蘭은 우리의 春香이나 沈淸처럼 중국 민간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인의 하나다. 효성과 정절을 갖춘 여인인 동시에, 국가에 책임을 다하지만 돈과 벼슬보다 인간다움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民草였다.

이 木蘭이 어느 시대, 어떤 전투에 참여했는가 하는 것은 中國 文學史뿐만 아니라 歷史學界에서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를 다룬 수많은 논문이 시대를 걸쳐 쏟아져 나왔다. 그에 대한 사랑이 끔찍한 만큼 그와 因緣 대기 경쟁도 치열하였던 결과다. 문학작품이란 픽션일 뿐이지만 거기에도 항상 모델이 있게 마련이고, 그 詩語에는 시대적 殘骸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木蘭은 北魏 孝文帝 시대인 485∼492년 北魏와 북방의 柔然이 현재 蒙古草原에서 벌인 전투가 모델이 되었으며, 木蘭은 원래 유목민족 출신으로 長城 너머 중국 內地에 들어와 살면서 胡俗과 漢俗의 두 풍습을 고루 익힌, 즉 胡漢融合의 여인이었다.

고단하고 따분하기만 한 오늘의 한국을 사는 우리, 잠시라도 이 풍진 세상을 잊어버리고 마음도, 얼굴도 예쁜 木蘭이라는 젊은 여인과 더불어 하늘은 푸르고 들판은 가없는 草原 위에서 1,000여년 전에 벌어진 전투장으로 잠시 시간여행을 함께 떠나봄이 어떨지….



이번 여름방학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원으로 이름난 흥안령(興安嶺)산맥 서록의 호륜패이(呼倫貝爾) 대초원과 그 속에 박힌 거울같은 호수 호륜지(呼倫池)를 찾아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초원은 포근하고 풍족감을 주지만 때로는 한없이 잔인하다. 풍설이 거세게 몰아치는 초원을 탐방할 기회를 필자는 아직 갖지 못했다. 필자가 찾았던 초원은 여름의 그것이었다. 따라서 필자가 이제껏 본 초원은 그 본 모습의 4분의 1일 뿐이다. 여름밤 망망한 초원 위에 세워진 ‘게르’(빠오·蒙古包)에 누워 원형의 환기구멍을 통해 유성(流星)이 흘러내리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초원에서 사는 인생이야말로 신선의 그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시끌벅적하고 먼지 날리는 농경(도시)사회가 진실로 진망(塵網) 속세임을 금방 실감하게 될 것이다.

초원으로 갈 때는 반드시 초원의 시 하나를 적어 가서 읊어야 제격이다. 필자가 공부하는 위진남북조 당시 북방 유목민이 그들의 생활과 초원의 풍광을 파노라마처럼 묘사한 “칙륵가”(?勒歌)는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진주보다 영롱한 보석이다.

칙륵천 내린 물은 음산 아래로 흘러가네(?勒川陰山下) / 하늘은 궁려인양 온 들판을 뒤덮었네(天似穹廬 籠蓋四野) / 하늘은 푸르고 들판은 가없는데(天蒼蒼 野茫茫) / 바람 불어 풀 누울 제 소와 양떼 보이누나(風吹草低見牛羊)

이 시를 조용히 읊조리고 있노라면 윌리엄 워즈워스의 명작 ‘초원의 빛’이란 시도 그 빛을 잃고 만다. 칙륵가는 원래 음산 아래로 흐르는 칙륵천(현 土默特, Tumd) 옆, 가없이 펼쳐진 넓고 푸른 초원 위를 달리던 유목민들이 부르던 선비어로 된 노래였다. 그것이 한어로 번역된 것인데, 27자밖에 안되는 짧은 시를 통해 우리는 이들 유목민이 왜 그토록 초원을 떠나지 못했던가를 여실히 알 수 있게 된다. “칙륵가”와 함께 이 초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작품이 바로 ‘목란시’(木蘭詩) 혹은 “목란사”(木蘭辭)다. 목란시는 중국의 대표적 영웅문학작품의 하나로 목란(木蘭)이라는 처녀가 연로한 아버지 대신 12년간이란 짧지 않는 세월을 초원에서 벌어진 전투에 종군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현재도 중국인들에게 즐겨 애송되는 악부(樂府) 중 하나지만, 몇년전 미국 월트 디즈니사에서 만든 만화영화 “뮬란”이 바로 ‘목란시’(木蘭詩)에 나오는 목란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잘 아다시피 목란의 중국어 발음은 ‘무란’(MULAN)이지만 그 영화를 수입한 회사에서 잘못 읽어 ‘뮬란’으로 소개된 것이다. 이 영화는 상당한 관객을 동원한 모양이지만 뭐가 그렇게 바쁜지 영화관과는 담을 쌓고 살다 보니 영화 광고도 주의 깊게 보지 못하여 관람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필자는 사실 이 목란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이미 8년전(1993) ‘목란시의 시대’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목란시’를 소재로 한 논문을 발표한 사람은 문학과 역사 방면을 통틀어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후에 안 일이지만 컴퓨터통신 동호회에서 이 논문이 거론되었던 모양이다. 영화 “뮬란”을 이해하려면 ‘박모’씨의 논문을 참조해 보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목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목란시’에 필자가 여러 논문을 통해 전개하고 있는 위진남북조, 특히 북조의 시대상 설정에 중요한 전거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목란의 활동을 통해 위진남북조 시대의 서민, 특히 호족(유목)과 한족(농경)의 생활이 융합된 그들의 모습을 묘사해 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다시피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사상 ‘민족이동’의 시대이고, 그 결과 민족융합이 급속히 진행된 시대다.

필자는 목란이 북방 유목민족으로, 중국 내지로 이동해 생활하던 가문 출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학계 입문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추구해온 중국문화와 중국인의 다원적 성격, 즉 필자의 작업가설인 이른바 ‘호한체제’(胡漢體制)를 가장 잘 설명하는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木蘭詩’를 소재로 한 영화 “뮬란”

‘목란시’의 배경이 된 시대와 종군(從軍) 지점, 전투대상, 고향, 성씨, 이름 등은 중국 문학사상, 혹은 중국 역사학사상 중요한 쟁점의 하나며, 아직 미해결 부분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필자는 스스로 논증한 사실에 대해 상당한 확신을 갖고 있지만 이 문제를 놓고 독자 여러분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여행이란 홀가분하게 떠나는 것이 좋지만 돌아올 때는 뭔가 보고 얻어들은 것이 있어야 나름으로 알찬 것이라 할 것이므로 필자는 독자 여러분에게 이 시대 역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제공하려 한다. 그러면 ‘목란시’의 전문을 천천히 읽어 가도록 하자.

덜그럭 덜그럭 목란이 방에서 베를 짠다 / 베틀소리 멈추고, 긴 한숨소리 들린다./ 무슨 걱정인가 물으니, 무슨 생각인가 물으니 / 다른 생각 아니오, 다른 생각 아니오. / 어젯밤 군첩(軍帖)이 내렸는데 가한(可汗)께서 군사를 부른다오 / 그 많은 군첩(軍書十二卷) 속에 아버지도 끼어 있소. / 우리 집에는 장남 없고 목란에게는 오라비 없으니 / 내나 안장과 말을 사, 아버지 대신 싸움터에 나가겠오 / 동쪽 장에서 말을 사고, 서쪽 장에서 안장 맞추고 / 남쪽 장에서 고삐 사고, 북쪽 장에서 채찍을 사 / 아침에 부모에게 하직하고, 저녁에 황하(黃河)에 머무르다 / 부모 애타는 소리 못 듣고, 다만 황하 물소리만 철철 / 아침에 황하를 떠나 저물어 흑산두(黑山頭)에 묵다 / 부모 애타는 소리 못 듣고, 연산(燕山) 오랑캐(胡) 말굽소리 터벅 터벅 /

만리나 변경 싸움터에 나서, 날듯 관문과 산(關山)을 넘었다 / 삭북의 찬바람은 쇠종소리 울리고, 찬 달빛은 철갑옷을 비춘다 / 장군은 백전을 싸우다 죽고, 장사 십년만에 돌아 오다/

돌아와 천자(天子)를 뵈오니, 천자는 명당(明堂)에 앉아 / 공훈을 열두급(策勳十二轉)으로 기록하고, 백 천 포대기의 상을 내린다 / 가한은 소망이 뭐냐고 묻거늘, 목란이 대답하되 상서랑(尙書郞)의 벼슬도 싫소 / 원컨대 명타천리마(明駝千里馬)를 빌려 주어 나를 고향으로 보내주오 /

부모는 여식 돌아온다 하니, 곽(郭) 밖으로 나와 환영한다. / 누이도 동생 온다 하니 새 옷 바꿔 입고 / 남동생은 누이 온다하니 칼 갈아 돗과 양을 잡는다 / 동각(東閣) 내 방문 열고, 서각상(西閣牀)에 내 앉으며 / 싸움 옷 벗어 놓고 옛 차림 하며 / 창 앞에서 머리 빗고 거울 보고 화장한다 / 다시 나가 전우(火伴)를 보니 전우들 먼듯 놀라며 / 십이년을 같이 다녔건만 목란이 여자인 줄 몰랐도다 / 숫토끼 뜀걸음 늦을 때 있고, 암토끼 분명치 못할 때 있거늘 / 두 마리 같이 뛰어 달리니 그 누가 가려낼 수 있겠는가

이상이 ‘목란시’의 전문이다. 베틀에 앉아 베를 짜던 여인 목란이 금방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베 짜는 것이 농경민의 장기라면, 기마는 유목민의 장기다. 요즈음 과천 경마장에 여자 기수(騎手)가 생겨 화제가 되고 있지만, 여자가 말 타고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농경사회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또한 유목민 여인이 베틀에 앉는다는 것도 도대체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필자는 목란을 호속(胡俗)과 한속(漢俗) 두 풍습을 모두 고루 익힌, 즉 호한융합의 여인으로 보는 것이다.

‘목란시’는 모두 네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단락은 목란이 출정하는 정형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단락은 전장에서의 목란의 모습을, 셋째 단락은 12년간 종군후 개선한 목란이 관작 받기를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단락은 목란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 여성으로 돌아가 가족과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떤 문학작품이든 그 출현 배경에는 역사적 실제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의 기술, 즉 기실(記實)과 이 작품을 통해 싣고자 하는 뜻, 즉 우의(寓意)라는 두가지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문학작품이란 ‘기실’의 측면보다 ‘우의’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겠지만 배경없는 작품 없듯 그 작품이 생성된 무대가 어디며, 그 주인공이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점을 밝히는 것도 흥미로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특히 필자처럼 지금으로부터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직접 그 시대 사실을 진술하는 사료가 적기 때문에 문학작품 속에서도 시대적 의미를 찾으려는 묘한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의 “춘향전”이나 “심청전”이 정절과 효심을 표방하려 했듯 ‘목란시’는 민초의 애국심과 가족애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소재가 된 영화가 중국에서는 항일전쟁(抗日戰爭) 시기 등 국난(國難)시대, 혹은 민중성이 강조되는 인민 중국에서 제작되고 널리 유포되었다.

춘향이나 심청에서 느끼는 직설적 의미보다 ‘목란시’는 시대에 따라 풀어낼 수 있는 이른바 ‘사상성’이 다양하다는 점이 다르다. 중국의 어떤 학자는 ‘목란시’가 남녀평등 사상과 노동의 신성함을 표방하고 있다는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목란시’가 중국인들에게 크게 애송되는 것은 연약한 여자로 12년간이나 남자들과 함께 종군했다는 사실, 그리고 혁혁한 공훈과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고향의 가족들에게 돌아오는 등 현실에서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스토리가 길지 않은 글에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여하튼 중국인에게 목란은 우리의 춘향과 심청에 못지않게 사랑받는 작품 속의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목란을 자기네 지방인으로 우겨 묘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지역, 즉 고향이라고 주장되는 곳이 대략 아홉 곳이나 된다. 그것을 지역적으로 보면 호광(湖廣)에서 삭방(朔方) 지역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고향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가 언제냐 하는 문제도 그 고향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종래 연구에는 ‘목란시’의 배경이 된 시대로 크게 보아 한대설(漢代說) 남북조설(南北朝說) 수·당대설(隋唐代說) 등 세가지가 거론되었다. 세부적으로는 남북조설이라 하더라도 북위설(北魏說) 서위·북주설 등으로, 수·당대설이라 하더라도 수말당초설 당대 측천무후(則天武后)시대설 예종(睿宗)시대설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종군 지점, 전투 대상 등에 각각 다양한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


북방 유목민 여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목란

필자는 발표한 논문에서 목란은 북위의 효문제 시대인 485~492년, 북방 유목민인 유연족(柔然族:턆턆)과 벌인 전투에 종군했으며, 현재 오르도스(河套) 모오소(毛烏素) 사막 속에 폐성으로 남아 있는 통만성(統萬城)에 살았으며, 그의 가문은 본래 유목민족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내지로 들어와 성곽 안에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한족의 문화를 접하게 된, 이른바 호한융합의 ‘성민’(城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점에서 목란이 흉노 정벌에 종군했다는 영화 “뮬란”의 내용과는 다르다.

목란은 일개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이므로 역사적 인물을 다룬 정사(正史) 등에는 기록이 있을 리 없다. ‘목란시’가 재록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전적은 송대 사람인 곽무천(郭茂?)의 “악부시집”(樂府詩集)과 같은 시대에 편집된 “문원영화”(文苑英華)라는 두 책이다. 두 책 사이에는 서술상의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곽무천의 “악부시집”에서는 ‘목란시 이수(二首)’라 하여 앞서 소개한 ‘목란시’ 외에 또 다른 한수를 더 재록하고 있는 점이다. 곽무천은 ‘목란시’ 제1수를 양나라 시대에 불려졌던 고각횡취곡(鼓角橫吹曲)으로 분류하고는 “고금악록”(古今樂錄)이라는 책을 보면 ‘(당시 유행하는) 가사(歌辭) 가운데 목란이라는 하나의 악곡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생겼는지 확실히 모른다’라 쓰여 있다”고 소개했다.(卷 25 橫吹曲辭 5 梁鼓角橫吹曲의 總論)

또 곽무천은 다시 같은 책의 ‘목란시’ 편에서 ‘목란시’는 “고금악록”에서 전재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금악록’에는 ‘목란의 이름은 알 수 없다’라 되어 있다. (당대 사람인) 절강서도관찰사겸어사중승(浙江西道觀察使兼御史中丞)인 위원보(韋元甫)가 이어 (한 수를 다시) 붙여 넣은 것”이라고 쓰고 있다. 즉 제1수가 어떻든 제2수는 위원보가 다시 쓴 것이라는 설명이 된다.

왜냐하면 “전당시”(全唐詩)(권 272)에 보면 위원보의 ‘목란가’(木蘭歌)라는 명칭의 일수가 따로 있고, 이것이 바로 곽무천의 “악부시집”에 나오는 ‘목란시 2수’ 중 위에서 전문을 소개한 목란시 1수와 다른 속칭 제2수이기 때문이다. 제1수와 제2수를 비교하면 시사(詩詞)는 많이 다르지만, 내용상에는 별 차이가 없다.

위원보가 지은 것으로 보이는 제2수에 나오는 목란은 당 고조(高祖)의 셋째딸로 낭자군(娘子軍)을 이끌고 정벌에 나섰던 평양공주(平陽公主)의 고사를 소재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종래 ‘목란시’가 당대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위원보 작인 소위 “목란가” 때문이다. 위원보란 자는 “구당서”(舊唐書)(권 115)에 그 열전이 있고, 대종(代宗) 대력(大曆) 6년(771)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고, 관직도 곽무천의 기술과 거의 같다.

목란의 종군지대로는 제1수에는 흑산두(黑山頭)·연산(燕山)·관산(關山)·황하(黃河) 등 북방지역(이것도 고증이 요구되는 부분이지만)의 지명이 나오지만, 제2수에서는 우전(于?)·청해(靑海)·설산(雪山)·연지(燕支) 등 서북 변방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1수와 2수는 주제는 서로 비슷할지 몰라도 지역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동일한 시기의 상황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목란시’의 첫 모델이 된 것은 제1수의 분석을 통해 가능하다.

제1수가 처음으로 실렸던 “고금악록”은 남조 진조(陳朝)의 폐제 임해왕(臨海王) 광대(光大) 2년(568) 화상(和尙) 지장(智匠)이 편찬한 책이다. 이미 없어진 소위 일서(佚書)지만 “수서”(隋書) 및 “구당서”(舊唐書)의 경적지(經籍志), “신당서”(新唐書) 및 “송사”(宋史)의 예문지(藝文志)에는 모두 그 책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책은 원대(元代)까지는 적어도 존재했던 것이다. “문원영화”(권 333)에는 ‘목란가’의 작자를 위원보라고 분명히 적고 있고, 또 “시기”(詩記)(권 96 題注)에도 “고문원”(古文苑)이라는 책에 ‘당나라 사람(唐人)의 작품에 목란시가 있다’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제2수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란시’가 진(陳)나라 이전의 작품이라는 곽무천의 말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다. 곽무천의 주장을 따르자면 ‘목란시’는 양대(梁代)의 무명인(無名人)이 기마를 위주로 하는 북방민족이 피리에 붙여 부르는 노래가사를 채집하여 지은 소위 북가(北歌)에 속하게 된다.

중국 문학사상 ‘목란시’가 갖는 위치는 순정(殉情) 민간서사시인 ‘공작강남비’(孔雀江南飛)와 함께 ‘한쌍의 구슬’(雙璧)의 하나로, 남북조시대 문학 가운데 걸작이다. 인민중국이 성립한 후 중국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범문란(范文瀾)의 “중국통사”(中國通史)에는 ‘북조에는 ‘목란시’ 1편이 있는데 남북조 양조의 모든 사족(士族:貴族)시인의 작품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목란시’의 시대배경을 둘러싼 논쟁들

당시 남조와 북조의 민요는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니 ‘염곡은 남조에서 일어났고, 호음은 북속에서 생겨났다’(艶曲興於南朝 胡音生於北俗)(樂府詩集)는 지적처럼 남조와 북조가 장기간 대립하여 정치·경제·문화 및 민족풍습·자연환경이 판이한 정형 밑에서 출현한 작품인 까닭에 그 정서와 색채도 서로 달랐다.
주지하듯 ‘공작강남비’는 남조적 정서를 한껏 풍기는 작품이다. 즉 후한말 건안 연간(建安年間) 여강부(廬江府)의 소리(小吏)였던 초중경(焦仲卿)의 아내 유씨(劉氏:劉蘭芝)가 시어머니에게 밉보여 쫓겨나 본가(친정)로 돌아가면서 중경에게 절대 개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지만 본가의 재혼 핍박에 견디다 못해 물에 빠져 죽었다.

중경이 그 소문을 듣고 마당에 선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공작강남비의 여주인공 유란지는 선량하고 근면하면서도 죽음으로써 애정에 충성한 여인이다. 유란지의 행동에서 우리는 춘향의 절조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목란은 그와는 다르다. 목란에게는 가녀린 여자의 처절한 사랑보다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내는 북방 여인의 강인함이 있다.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북방의 남자들도 남조와는 달랐다. ‘낭야왕가’(琅邪王歌)라는 작품에는 ‘새로 사온 5척검을 들보에 걸어 두고 하루 세번 어루만지니 소녀 사랑 능가하네’라 하여 보검을 소녀보다 더 사랑하는 호인적인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목란시’를 읽다 보면 티끌 흩날리며 말을 타고 쏜살같이 내달리며 활을 쏘고 이러저리 검을 휘젓는 북방 유목민족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목란이 만약 유목민 가문 출신이 아닌 남조의 여인이었다면 이런 행동이 가능했겠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듯 ‘목란시’는 북방 유목민들이 중원에 들어와 만든 북가(北歌)로 보아야 합당하다. 북가 중의 하나인 ‘절양유지가’(折楊柳枝歌)에는 ‘목란시’에 나오는 내용과 유사한 것이 많다.

필자가 목란을 이상과 같이 규정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목란시’에 나오는 구절과 분위기 등이 다양한 시대로 비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래 ‘목란시’에 대한 시대비정의 근거가 되었던 1)목란의 고향과 성명에 대한 각종 지방지(地方志)의 서술과, 시 가운데 나오는 2)가한(可汗)과 천자(天子) 3)책훈십이전(策勳十二轉) 4)명당(明堂) 5)종군 지점 등의 용어였다. 이제 우리는 ‘목란시’의 시어를 하나 하나 분석해 가면서 목란 그는 누구인가를 검토해 보자.

중국의 전설적인 민간영웅들이 대개 그러하듯 중국인의 목란에 대한 짝사랑도 대단하다.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음을 애써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제법 경주되어 왔다. 그가 탄생한 곳, 성장했던 곳, 종군했던 지점, 죽은 곳이라는 기록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고향도 무덤도 사당도, 그리고 그의 성마저 여러 개가 생겨났다. 1,000여년 동안 지속돼온 중국인의 목란 사랑은 일종의 전설 만들기였다.

목란은 “신에게는 군주의 잠자리를 모실 예가 없다”(臣無?君之禮)며 거절하였으나 거듭된 궁박에 어쩔 수 없어 자진(自盡)하였다. 임금은 놀라고 불쌍히 여겨 장군(將軍)을 추증하고 효열(孝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향인(鄕人)들은 그를 추모해 묘당을 세우고 생일인 4월8일에 제사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완현에는 원대에 지은 목란사(木蘭祠)가 있었고, 거기에 ‘한효열장군기’(漢孝烈將軍記)라는 비각이 있으며, 원래의 고향 박주에는 ‘한효열장군화목란지묘’(漢孝烈將軍花木蘭之墓)가 있다는 것이다.

제3의 주장은 호북성 황피현(黃陂縣)설이다. 성북 60리에 목란산이 있는데, 당대부터 산상에 목란묘(木蘭廟)가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송대에 나온 역사지리서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옛날, 목란은 이 산에서 그 이름을 취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황피현지”에서는 더 나아가 ‘당 태종 정관(貞觀)연간의 사람인 주이(朱異)의 딸 목란이 나이 18세에 여분남장(女扮男裝)으로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하기를 12년, 전공으로 장군과 작록을 받았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90세까지 살다 죽으니 그곳 사람들이 목란산 위에 묻고 사당과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란이 참가한 전투는 북위와 유연의 마지막 전쟁?

필자는 북위의 초기 수도 평성(현재의 大同)에는 명당이 있었지만 낙양으로 천도한 후 명당을 다시 건립하려 했으나 결국 세우지 못한 사실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사실 필자의 논문은 한국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학계의 반응을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95년 대동에서 북위의 명당터가 대동박물관 W부관장에 의해 발굴되어 “중국사연구” 1999-1에 발표됨으로써 북위때 명당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지난해초 W씨를 만났을 때 이 사실을 애기했더니 상당히 놀라워했다.

필자는 이 일을 통해 한국에서 중국사를 연구하는 비애같은 것을 느낀 바이지만 어찌 되었든 필자의 주장이 증명된 것이어서 매우 기뻤다. 이제 명당의 존재 여부 문제로 ‘목란시’의 시대가 당대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게 되었다.

필자는 이 명당의 문제가 ‘목란시’의 시대비정 문제 해결에서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다른 논문에서 북위가 유연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전쟁을 492년의 일이었다고 정리한 바 있다. 유연은 두륜 시기인 485∼487년에 걸쳐 북위에 세차례의 침략을 감행하는 등 마지막 적극 공세를 폈으나 492년 북위의 대규모 원정군에 대패하고 두륜은 가장 인기 없는 가한으로 낙인찍혀 쫓겨났다가 곧 참살되었다. 492년 이후 유연은 그 명맥은 유지하나 극히 약화되어 북위에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북위의 낙양 천도는 바로 493년 10월에 이루어진다. 그후 낙양에서는 명당 건설이 수차 시도되었으나 제대로 건설이 이룩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즉 명당이 건설된 것이 491년 10월이고, 바로 2년뒤 천도가 이뤄졌으므로 명당이 건설된 곳은 바로 평성이었고, 효문제가 목란에게 책훈한 곳은 바로 당시 수도 평성의 명당이며, 그 시기는 492년 유연에게 승전(勝戰)한 이후 493년 10월 사이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북위의 가장 큰 외적은 바로 유연이었고, 유연이 사실상 괴멸된 것은 북위 시대의 대외 전사상 가장 찬란한 전과(戰果) 중 하나였다. 유연 정벌이 끝나자 북방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없게 된 효문제는 통일 작업의 일환으로 낙양으로의 천도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후 남조에 대한 적극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시대 비정을 바탕으로 목란의 종군 지점을 알아보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시에 나오는 ‘아침에 황하를 떠나 저물어 흑산두에 묵는다’(旦辭黃河去 暮至黑山頭)와 ‘연산 오랑캐 말굽소리 터벅 터벅’(但聞燕山胡騎鳴??)이라는 구절이다.

흑산두는 어디이며 연산호는 어디에 있는 어떤 호족을 가리키는가. 사실 흑산이나 연산이라는 지명은 여러 군데다. 당나라때 흑산으로 불리던 곳은 대략 세곳이나 있었다. 필자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북위 시대 흑산의 용례와 연산호의 연관성이 밝혀져야 한다.

필자는 “위서”에 나오는 흑산의 용례를 검토하여 대동(平城)과 현재 내몽고의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 사이의 황하와 가까운 지점인 운중(雲中:현 和林各爾)으로 비정하였다. 이곳은 북위 초기 황제들의 능묘(雲中金陵)지역인 동시에 역대 북위군의 출병시나 혹은 회군시 군대상황을 점검(校數軍實)하는 지점으로, 특히 492년 북위가 마지막으로 유연을 통타한 군사작전의 출발점이 된 곳이었다.(於是中道出黑山… 大破턆턆)

그렇다면 연산은 어디일까? 필자는 연산이 유연의 수도, 즉 가한정(可汗庭)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연의 가한정은 약락수(弱洛水: 현 몽골인민공화국 툴라강, 土拉河)변에 있었다.

이 약락수는 바로 연연산(燕然山:현 항가이산, 抗愛山)의 남단 사막과 접하는 지점에서 발원한다. 492년 북위의 유연 정벌에 참여했던 양파(楊播)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전승한 최후의 지점을 거연산(居然山)이라 했다. 거연산을 바로 연연산이라고 보는 것이다. 연연산 연산으로도 불렸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1925년 옛소련 고고학자 G. Zh. Vorovka에 의해 몽고 툴라강 하반에서 4∼5세기의 귀족묘장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유연 가한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연산호는 바로 유연이다. 북방 유목민들은 그들이 근거하는 산 이름을 부족명으로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선비산에서 발원한 부족을 선비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필자는 목란이 통만성 사람이라고 하였다. 최근 학계에서는 목란의 고향이 오르도스 지방 특히 내몽고 영내라는 설이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목란시’의 내용으로 볼 때, 황하와 비교적 가까운 지점이 아니면 안된다. 그리고 집결지인 운중과도 가장 가까운 지점이 상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 가운데 ‘동쪽 장에서 말을 사고, 서쪽 장에서 안장 맞추고 남쪽 장에서 고삐 사고, 북쪽 장에서 채찍을 사’라는 구절에서 보듯 4시장이 반드시 있지는 않더라도 한두개의 시장을 갖춘 상당히 큰 도시가 아니면 안된다. 또 ‘부모는 여식 돌아온다 하니, 곽(郭) 밖으로 나와 환영한다’고 하였으니 곽(郭)이 있는 도시라면 성도 있는 도시이니, 북위에 의해 패망한 흉노 혁련씨(赫連氏) 하(夏)의 수도였던 통만성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목란시’ 문제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여자가 종군한다는 문제일 것이다. 우선 남자들도 지겨워하는 군대, 그것도 아침에 저녁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원정길에 여자가 나섰다. 평화시대인 지금도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는 젊은 남성들이 그득하여 ‘P원사’가 세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 돌아올 기약 없는 종군길에 나선 목란을 어느 시대 여인으로 비정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필자가 목란이 살았다고 비정한 북위 당시에도 군대 기피 풍조가 만연했던 것 같다. 그런 정경을 당시 문학작품을 통해 일부나마 살펴보자.

높고 높은 산마루에 솟은 저 나무에(高高山頭樹) / 바람이 불어 불어 잎 떨어지네(風吹葉落去) / 한번 가면 머나먼 수천리 길을(一去數千里) / 어느제랴 돌아가리 정든 고향에 (何當還故處?) (“紫?馬歌” 전문)

불쌍한 미물인양 우리 남아들(男兒可憐蟲) / 집 문을 나서면 죽음의 시름(出門懷死憂) / 좁디좁은 협곡에서 쓰러졌으니(尸喪狹谷中) / 그 누가 거둬 주랴 우리 백골을(白骨武人收) (‘企喩歌’ 전문)


군대 기피 풍조 만연했던 북위시대

필자도 젊은 날 군대에 가는 것이 형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싫었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몇년 간이나 이 대학 저 대학, 이 학원 저 학원을 기웃거리다 보니 군대 갈 나이가 넘었는데도 무엇 하나 확실히 정해진 길이 없어 이 핑계 저 핑계로 연기를 거듭하다 결국 논산훈련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31개월의 사병생활 끝에 치악산 쪽으로는 다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사회로 복귀하였던 것이다. 건장한 모든 남성은 병역의 의무를 진다고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즉, 국민개병제도다. 그것이 좋은 제도냐 아니냐는 별개 문제로 하고, 국민개병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요즈음 사관학교에 들어가 평생직업으로 군인이 되기를 작정한 여성도 상당수 나타나고 있는 모양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군 입대, 아니 전투병으로 종군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일제(日帝)처럼 종군위안부로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기 전에는 사실 군대와 여성은 상관관계가 적은 편이다.
목란은 종군위안부도, 후방의 병참 일을 돌보는 전투보조원도 아니고 삭풍이 몰아치는 초원에서 오랫동안 전투병으로 말을 타고 또 무기를 가지고 살상하는 전투에 자그마치 12년간이나 종군하였다.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고 하니 필자처럼 졸병으로 근무한 것도 아니고, 최하 중대장쯤은 되는 지휘관이었을 것이다. 역대 중국 정사에는 간혹 열녀전(列女傳)이라는 여성 전용란이 있다. 거기에는 대개 여성으로서의 정절과 효심 등 유교적 덕목을 가진 자로 채워져 있다.

중국 역사 가운데 여성이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 시기를 들라고 한다면 당연 북조 시대다. 아다시피 이 시대는 유목민이 중원에 들어와 왕조를 세운 시기이고, 유목민 세계에서의 여성은 남성과 비교해 그 능력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가축을 치고, 그 젖을 짜고, 털을 깎는 등 생산활동에서 농경처럼 강한 근력(筋力)이 요구되지 않는다. 여성의 지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경제력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요즈음 중국 여성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는 것은 봉급에서 남성과 전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도 비슷하다. 여성들은 수천년 내려오는 불합리한 여성의 지위를 투쟁을 통해 얻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여성이 밥을 짓는 등 가사일 외에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투쟁도 공허할 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모계사회 이후 여성의 전성시대였던 북조 시대의 풍조는 같은 시대 남조의 왕조에 살다 북조로 온 “안씨가훈”의 저자 안지추에게는 너무나 큰 차이로 느껴진 것이다. 그는 북제의 수도 업도(킌都)에 살면서 부녀자들이 가사뿐만 아니라 가외의 일, 즉 남편이나 자식의 엽관(獵官)운동이나 가문 사이에 일어난 쟁송에 뛰어들어 해결하는것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이런 풍조를 ‘항대(恒代)의 유풍(遺風)’이라 지적했지만, 항대란 바로 북위 초기 도읍 평성을 가리킨다. 사실 북위가 정식으로 성립하기 전인 대국(代國)시대에 서진의 사신이 그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여자의 나라’(女國)라고 지칭했던 것은 이런 사정에서였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중국의 전통적인 여성관과는 판이한 사회가 바로 당시 북위였다. 북위 시대에는 물론 여황제가 없고, 당대에 들어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女帝)인 측천무후가 출현하지만, 이런 여제 출현의 분위기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북위 시대에는 그에 버금가는 여성 권력자가 여러명 있었고, 황태자로 책봉되면 그 생모를 죽이는 것을 법제화(子貴母死制)했을 정도로 모권(母權)의 정치개입의 폐해가 심하였다. 태자의 생모가 죽으니 그 대신 보모·유모가 정치를 주무르는 사회가 바로 북위였다. 북위 시대에 여성이 전투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한 두 사례가 특히 눈에 띈다. 임성왕(任城王) 탁발징(拓跋澄)의 어미인 맹씨(孟氏)와 구금룡(苟金龍)의 처 유씨(劉氏)가 그들이다. 두 여인 모두 아들과 남편을 대신해 친히 군사를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고 성을 보전한 훌륭한 여성 군사 지휘자였다.

그러면 당시 군사제도가 어떠했길래 아버지 대신 딸이 종군했던 것일까? 여기에서 먼저 목란이 군첩을 받은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에 나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고대의 병역제도를 보면, 춘추전국시대부터 일반 서민을 상비군으로 쓰는 제도가 확립된 이래 진·한시대에 이르면 모든 서민이 징병의 모체가 되었다. 즉 병사와 민간의 구별이 없는 소위 ‘병민합일제’(兵民合一制)가 전한(前漢)시대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즉 상비군의 병사는 일반 서민에서 징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후한 이래 현저한 변화가 생겨 조조(曹操)의 집권 시대가 되자 병과 민이 분리되어 국가의 상비군은 점차 병호(兵戶:사료에 따라서는 士家·兵家·軍戶·鎭戶·府戶)라는 특정한 가(家)에서 나오게 되었다. 서진에서 남북조 시대에는 병사 및 그 가족은 일반 민적(民籍)에 넣지 않고 특별하게 병적(兵籍·軍籍)으로 따로 관리해 그 호내의 남정(男丁)에 대해서는 영대(永代)에 걸쳐 병역의 의무를 지게 했다. 이것은 중국의 병제사상뿐만 아니라 사회신분사에서 자못 의미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아다시피 병과 민이 분리되어 일이 있을 때 임시로 병사를 징발하다 보니 자고로 어려운 군대생활을 즐길 사람이 없고, 또 당시 국교인 유교의 상문언무(尙文偃武)사상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들이 피역을 꾀하다 보니 요즈음 우리의 경우처럼 ‘유전무병’(有錢無兵)의 상황이 전개돼 빈농만이 병사가 되게 되었다.
이런 추세다 보니 자연히 병사의 사회적 지위는 저하되고, 모인(募人)·유민(流民)·항민(降民) 등이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특히 위진시대에 들어서는 한족 외에 당시 중원으로 이동해온 이민족이 상당수 병사로 채용되었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매우 미천하여 노예와 가까웠다.

주지하듯 서진 말 ‘영가(永嘉)의 난’은 이들 이민족(胡族)이 일으킨 중국 역사상 한족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건의 하나다. 이 난의 결과 한족은 강남으로 도강해 동진·송·제·양·진의 여러 왕조를 세워 명맥을 유지하지만 문명의 땅 중원은 이민족이 세운 오호십육국과 북위 등 북조 국가의 통치 하에 들게 되었다. 동진·남조의 병제와 오호십육국·북조의 병제는 같은 시대라는 면에서 공통성도 있지만 그 차이도 컸다. 북방의 여러 왕조에서는 성년 남자는 모두 병사가 되기 때문에 강제적인 징발은 필요 없다.

그들은 싸우고 약탈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는 소위 ‘부락’(部落)시대의 전통에다 한족을 몰아냄으로써 그동안 그들에게 받았던 수모를 당당하게 갚고 그들이 주체가 된 나라를 세운 영예로운 전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병호라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신분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후한 이래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간 동진·남조의 병호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男裝한 딸이 아비 대신 징집돼야 했던 병호제도

위진남북조는 춘추전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빈발한 시대였다. 병호제도는 원래 병원(兵源)의 확보에 한계가 있는 제도다. 특히 병사의 신분이 낮은 남조에서는 도망자가 속출했다. 그래서 ‘한 병사가 도망가면 온 집안에 책임을 묻는’(一人逃亡 闔宗補代) 법령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또 병호제를 안정되게 운영하기 위하여 조위(曹魏)말 이후 그 가속(家屬)을 군영에 함께 거주하도록 하는 제도도 채택했다. 이것은 병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병호 인구의 증가라는 효과도 노린 다목적 정책이었다.

병호제 붕괴의 또 하나의 현상은 동진 남조에 난숙한 귀족제의 영향으로 귀족에 의한 병호의 사유화(家兵, 部曲의 형태로)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의 전개는 병원의 고갈을 더욱 부채질하여 동진·남조의 병호제는 더 이상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병원을 지원병에 의존하는 모병제(募兵制)로 전환했다.

오호·북조의 경우 이른바 병호의 세습이라는 측면에서 병호제는 위진남조에서 유지되었지만 이민족 위주의 병민합일제라는 점에서 남방과 다르고, 병호의 신분도 평민보다 높아 그들은 일종의 통치계급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출발점부터 달랐다.

그러나 이민족의 한화(漢化)와 함께 광역이 넓어지고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병원의 보충이 현안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여기에 전쟁포로나 범죄자 등으로 병호의 부족을 보충하는 정책이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북조에도 병호의 신분하락 상황이 전개되었고, 이런 추세는 영예로운 전사를 자임했던 병사들을 분노케 한 결과를 낳았다. 곧 ‘육진(六鎭)의 난’이 발발하고 북위는 멸망한다. 그후 나타난 제도가 바로 병민일체의 부병제(府兵制)다. 이로써 북방 이민족이 전담하던 군역(軍役)이 호한 양족에게 모두 지워지게 된 것이다.

북위의 병호제 하에서도 역시 병사가 도망하면 대신 누군가가 나가야 하는 제도가 있었으니, 이 제도는 문성제(文成帝:460∼465) 시대에 시작되어 효문제 태화 20년(496)에 폐지된다. 목란이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필자가 설정한 ‘목란시’의 배경 시기와 그대로 일치한다. 필자가 목란의 고향을 통만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북조 시대 군사력의 근간이 되었던 소위 ‘성민’(城民)으로서의 목란의 일가를 상정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성민이란 단순히 ‘성거(城居)의 민’이라는 뜻이 아니라 당시 가속이 군대를 따라 성(軍營) 안에 거주하는(隨軍城居) 병호를 의미한다. 통만성은 오르도스 지역에 있던 유일한 성진(城鎭)이었다. 이곳에 유목민족을 주체로 하는 병호가 배치돼 있었다. 따라서 당시 성민이 거주하고 황하를 곁에 두고 있는 도시는 통만성이 아니면 다른 곳을 찾을 수 없다.

‘목란시’를 보면 목란은 군첩을 받은 아버지를 대신해 입대하기 전에 준마와 안장 등 군 장비를 스스로 준비(自備)한다. 군장비의 자비는 일반적으로 서위·북주(西魏·北周)시대에 확립된 부병제 하의 제도로 알려져 있지만 부병제 시기의 전유적(專有的)인 현상은 아니며, 북위 시대에도 그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효문제 태화 5년(481)경에 생활비 및 군장비용으로 당시 화폐 대용으로 쓰인 비단을 갖고 입대하는 소위 ‘자견자수’(資絹自隨)제도가 실시됐다는 점이 그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지금까지 목란이라는 인물의 자취를 따라 약간 지루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초원이라 하면 대개 대지가 온통 푸른 색을 드러내는 여름의 그것을 상상할 것이지만 푸른 빛 농후한 낭만의 초원은 잠시일 뿐이다. 새싹이 굳건히 돋아나는 봄, 그 찬란한 빛을 잃어가는 가을, 그리고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을 그곳에서 보내야 초원 인생의 시고 달고 쓰고 매운(酸甛苦辣) 맛을 제대로 알 것이며, 목란도 더욱 더 실감나게 이해할 것이다. 초원의 사계(四季)를 보다 더 생생하게 소개할 날이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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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嵇康)의 광릉산(广陵散)은 사라졌는가? 도연명이 술을 마신 까닭 동진시대의 대문호 도연명(陶淵明) : 대략365~467년)의 시 중
운영자 14-05-20
[] 김운희의 삼국지 바로읽기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진실 1997년 제가 미국에 잠시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동양인 아줌마 한 분을
운영자 14-05-11
[] 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成都="聯合)" 申三浩기자= 劉備와 諸葛亮(181-234). 한 사람은 인재를 포용하는 넓은 덕을 지닌 군주
운영자 14-05-11
[] 삼국지여행 1. 장비점(張飛店)

삼국지여행 1. 張飛店 히북성 탁주시(涿州市) 장비점(張飛店) 책의해 조직위원회(위원장 金洛駿)는 세번째 名著를 찾아가는 해외기
운영자 14-05-11
[] 삼국지의 대표 미인 초선에 대한 역사적 진실

중국 고전의 4대미녀 중의 한 명인 초선(貂蟬)의 형상은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와《삼국연의(三國演義)》등의 소설에 처음 등장했다. 소설의
운영자 14-05-05
[] 영사시(詠史詩)의 개조 좌사(左思)

좌사(左思)와 영사시(詠史詩) 좌사(左思)는 서진인(西晋人)으로 자는 태충(太沖)이고, 임치(臨淄: 지금의 산동성 임치현) 출신에, 생몰 연대는 모두
운영자 11-11-21
[]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가문 일화

1. 천하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 - 천하명필, 그 신화(神話)의 탄생을 살펴본다 중국 역사상 나타난, 그야말로 수를 헤아릴
운영자 11-09-27
[] 채문희와 왕소군 회고(박한제 교수)

중국 내몽고자치주 수도 呼和浩特 서남 들판에 하나의 무덤이 우뚝 서 있다. 이름하여 王昭君墓라 한다. 내몽고 초원 관광여행 코스에 반드시 들어가
운영자 1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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