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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족과 서기 206년 조조의 백랑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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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족과 서기 206년 조조의 백랑지전

[1]삼국지 위지 오환전(烏桓)

《상서(尙書)·순전(舜典)》에는 ‘만이가 중국을 어지럽힌다’(蠻夷猾夏-만이활화) 했고 《시경(詩經)·소아(小雅)·유월(六月)》에는 ‘험윤(獫狁)※이 매우 강성하다’[玁狁孔熾]라고 했으니 그들이 오랫동안 중국의 근심거리가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진한(秦漢)이래 흉노가 오랫동안 변방지역에 해를 끼쳤음으로 한무제는 밖으로 사방의 이족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그래서 동쪽으로는 남월과 동월 및, 조선(朝鮮)을 평정하고 서쪽으로는 이사(貳師), 대완(大宛)을 치고, 공(邛), 작(苲), 야랑(夜郎)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황복(荒服)※의 바깥이었으므로 중국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사서에 오환족(乌桓族)은 산 이름에서 기원했다고 했다. 오환족들의 선조는 그들이 거주했던 오환산의 이름을 자기들의 종족이름으로 삼았다. 오환산의 위치는 대략 지금의 내몽고자치고 적봉시(赤峰市)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 : Alukorqin Qi) 이북으로 대흥안령 중부 동서쪽에 있는 한산(罕山) 남록(南麓)이다.
진말한초 지간에 흉노왕 모돈(冒顿) 선우가 동호를 공격하여 패주시킬 때 동호인들은 선비산((鲜卑山)과 오환산(乌桓山)으로 도망쳐 살았음으로 산이름을 그들의 종족명으로 삼아 선비족과 오환족으로 갈라졌다. 오환족들은 수초(水草) 지대에 살면서 방목생활을 하고 천막으로 지은 궁려(穹廬)을 집으로 삼았다. 늘상 흉노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으며 흉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오환족에게 가축과 피혁을 공물로 징수했다. 동한말, 조조가 토벌한 이후부터는 사서에 그 행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험윤(獫狁) : 서주와 춘추전구시대 때 흉노의 명칭이다. 하(夏)왕조 때에는 훈육(薰鬻), 은(殷)왕조 때에는 귀방(鬼方), 한나라 때는 흉노라고 했다.
※황복(荒服) : 중국 고대 왕조의 제도에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5백 리씩 차례로 나눈 다섯 구역 중 가장 먼 곳의 지역을 칭하는 말이다. 상고(上古)에는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으로 구분했다가 주대(周代)에 들어와 후복(侯服)·전복(甸服)·남복(男服)·채복(采服)·위복(衛服)이라고 바뀌었다.

그러나 흉노는 중국과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흉노의 기병이 남쪽으로 내려와 자주 세 곳의 국경을 침범했다. 그래서 한무제는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의 여러 장수들을 자주 출격시켜 북방의 흉노 영토로 깊이 쳐들어가 정벌하게 하고 선우를 끝까지 추격해 그들의 풍요로운 땅을 빼앗았다. 그 후 흉노는 마침내 새(塞)를 지키며 번(藩)이라 칭하고 대대로 쇠약해졌다. 건안(建安 : 196-220) 연간에, 남선우(南單于)의 왕 호주천(呼廚泉)이 입조해 천자를 알현하자 중국 조정은 그를 관리에 임명하고 궁정에 머물게 하고, 현지의 우현왕(右賢王)에게 남흉노를 다스리게 했다. 흉노가 절개를 굽혀 스스로를 낮춘 일은 예전의 한나라에 행한 것보다 훨씬 심한 정도였다.

그러나 오환(烏丸)과 선비(鮮卑)는 점차 강성해지고 또한 한나라 말의 혼란으로 인해 중국에 일이 많아 국경 밖의 두 종족들을 토벌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오환과 선비는 막남(漠南) 땅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횡행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성읍(城邑)을 침략하여 백성들을 죽이거나 약탈했음으로, 중국의 북쪽 변경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큰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하북을 차지한 원소(袁紹)가 삼군에 군거하던 오환족을을 위무하고 그들의 하자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안문(雁門) 등의 3군에 군거하던 오환족을 위무하고 그들 중 제법 이름이 나있는 추장들을 대우해주어 그들의 정예기병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후 원소가 관도(官渡)에서 조조에게 패하자 원소의 두 아들 원상(袁尙)과 원희(袁熙)는 도망쳐 오환족의 답돈(蹋頓)에게 몸을 의탁했다. 무용이 탁월한 답돈을 오환족의 장로들은 한나라에 용맹을 떨친 모돈(冒頓) 선우에 비유했다. 그는 중원과 멀리 떨어진 곳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한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워 북방의 여러 만족들 사이에서 우두머리로 우뚝 섰다. 조조는 비밀리에 군사들을 대거 출격시켜 북쪽으로 정벌에 나서, 전광석화와 같은 군사행동으로 오환족을 평정했다. 이에 이족들은 놀라 모두 복종하게 되었고 조조의 위세는 북방 지역을 뒤흔들었다.

그뒤 선비대인(鮮卑大人) 가비능(軻比能)이 일어나 여러 오랑캐 족속들을 복속시켜 흉노의 옛 땅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그는 옛날 흉노의 땅을 모두 차지하여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오원(五原)부터 동쪽으로는 요수(遼水)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비의 지배하에 두었다. 누차에 걸쳐 북방의 변경을 침략하여 병주(幷州)와 유주(幽州)의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다. 전예(田豫)는 마성(馬城)에서 포위당했고 필궤(畢軌)는 형북(陘北)에서 패했다. 위명제(魏明帝) 조예(曹叡)청룡(靑龍 : 233-236) 연간에 황제는 왕웅(王雄)의 주청에 따라 검객(劍客)을 보내 가비능을암살했다. 그 이후로 선비의 각 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서로 공격했다. 그래서 강한 자는 멀리 달아나고 약한 자는 중국 조정에 항복해 왔다. 이에 북방 지역은 거의 안정을 찾았고 막남 땅 역시 소요사태가 줄어들었다. 때때로 소규모의 집단에 의한 약탈이 자행되었지만 더 이상 부족들이 단합하여 대규모로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오환과 선비는 즉 예전에 동호(東胡)로 일컬어지던 종족이다. 그 습속과 과거의 일들은 한나라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때문에 한말위초(漢末魏楚) 이후의 사적만을 기록하여 서방 이족들의 변화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한말에 요서(遼西)의 오환대인(烏桓大人) 구력거(丘力居)는 5천여 부락을 거느렸고, 상곡(上谷)의 오환대인 난루(難樓)는 9천여 부락을 거느렸는데 각자 왕을 칭했다. 또 요동속국인 오환대인 소복연(蘇僕延)은 1천여 부락을 거느리고 스스로 초왕(峭王)이라고 자칭했으며, 우북평의 오환대인 오연(烏延)은 8백여 부락을 끼고 스스로 한로왕(汗魯王)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지모와 용기를 갖추고 있었다. 중산태수(中山太守) 장순(張純)이 모반하고 구력거에 투항해 그의 수하가 되어 스스로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고 칭했다. 장순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안문(雁門) 등의 삼군 오환의 선비족들을 지휘하는 대장군이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幽州),기주(冀州) 등 네 주의 변경을 침략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을 무수히 죽이고 약탈했다.

영제 말년, 유우(劉虞)가 유주목이 되어 호인(胡人)의 도움을 받아 장순을 죽이자 북방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구력고 죽었으나 그의 아들 누반(樓班)은 나이가 어렸고, 구력거의 당질 답돈(蹋頓)은 무예와 지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답돈이 누반을 대신하여 구력거의 후임이 되어 삼왕과 그 부족들을 거느렸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과 며령에 복종했다. 원소가 공손찬(公孫瓚)과 계속 전쟁을 벌렸으나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 와중에 답돈이 사자를 보내 원소를 도우겠다고 전했다. 답돈의 도움으로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하고 하북의 맹주가 될 수 있었다. 원소는 황제의 명을 위조하여 답돈, 소복연, 오연 등에게 왕의 인수를 주고 모두 선우로 삼았다.

후에 누반이 강대해지자, 초왕은 그의 부족들을 이끌고 달려가 누반을 받들고 선우가 되었고 지모를 갖추어 계책이 많은 답돈은 왕이 되었다. 광양(廣陽) 출신 염유(閻柔)는 젊었을 때 오환과 선비족들 사이에 들어가 그들의 신임을 받았다. 염유는 선비족의 도움을 받아 오환교위 형거(邢擧)를 죽이고, 자신이 교위의 직을 대신했다. 원소가 염유를 회유하자 북방의 변경을 안정되었다. 이후에 원소가 관도에서 조조에게 패하자 그의 아들 원상(袁尙)은 답돈에게 도망쳤다. 원상은 답돈의 도움을 받아 기주를 탈환하려고 계획했으나 그때 마침 황하 북쪽 지방을 평정한 조조에게 염유가 선비와 오환 부족들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조조는 염유를 한나라의 조정의 명으로 오환교위로 임명하고 옛날처럼 광녕(廣寧) 일대를 다스리게 했다.

건안 11년 서기 206년, 조조는 답돈을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몸소 유성(柳城)을 향해 행군했다. 기습전을 위해 사잇길을 이용해 은밀히 행군했지만 유성을 100리 앞두고 적에게 발각되었다. 원상과 답돈은 군사를 이끌고 나와 범성(凡城)에서 조우해서 싸웠는데 그들의 병마가 매우 성했다. 조조는 높은 곳에 올라가 전군의 진영을 보고 병사들에게 일단 진군을 멈추게 하고 그들의 동정과 세세한 곳까지 살핀 후에 공격명령을 내려 적군을 격파했다. 선비의 진영를 유린한 조조의 군대가 벤 적군의 시체는 넓은 들판을 덮었고 답돈을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속부환(速附丸), 누반(樓班), 오연(烏延) 등은 요동으로 달아나는데,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나머지 선비족 군사들은 모두 조조에게 투항했다. 염유가 통솔하던 1만여의 오환 군사들은 그들이 속한 오환부락들을 중원으로 이주시켰다. 그들의 후(侯), 왕(王), 대부(大夫)들 지휘 하에 있었던 오환의 기병들은 조조 휘하의 군사들에게 편입시켜 종군하게 했다. 이때부터 삼군의 오환 기병들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백랑성(白狼城) : 在營州西南。漢縣,屬右北平郡。後漢省。建安中,魏公操*伐烏桓,曆平岡,登白狼堆。去柳城二百餘里,即故白狼地也。晉鹹康六年,石虎謀伐慕容,自幽州以東至白狼,皆大興屯田。其後慕容燕複置白狼縣,又析置廣都縣,屬北平郡。太元十五年,北平人吳柱作亂,破北平郡,轉寇廣都,入白狼城。是也。北燕以白狼爲重鎮,置並州及建德郡治焉。宋元嘉九年,後魏主燾攻和龍,別將拓跋健攻建德,拔之。師還,複屬北燕。十三年,北魏將娥清等攻燕,克白狼城。魏收《志》:真君八年,置建德郡,治白狼城,領廣都、石城等縣。是時,以白狼縣並入廣都也。高齊時,複廢廣都入龍城縣。


[2] 삼국지 위지 무제기(武帝記)

건안 11년 서기 206년 봄 정월
조조가 병주(幷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간(高幹)을 정벌하기 위해 출격했다. 소식을 들은 고간은 호관(壺關 : 현 산서성 여성현(黎城县) 동양관진(东阳关镇))과 병주성을 별장을 남겨 수비하게 하고 자신은 흉노에게 달려가 구원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호관(壺關)이 포위된 지 3개월 만에 함락당하자 고간은 형주(荊州)로 도망치다가 도중에 상락(上洛)의 도위(都尉) 왕염(王琰)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가을 8월
삼군오환은 천하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유주(幽州)를 침범해서 노략질했다. 그 결과 10여 만에 달하는 유주의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전에 원소는 그들 부락의 우두머리를 선우로 세우고 한 집안 사람의 자식을 자기 딸로 삼아 그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요서의 선우 답돈(蹋頓)은 세력이 특히 강해 원소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 원상 형제는 그들을 투항시켰다고 하지만 답돈은 여전히 변경을 자주 침입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조조는 장차 답돈을 정벌할 목적으로 운하를 파서 호타하(滹沱河)와 고수(泒水)를 통하게 하고 평로거(平虜渠)라고 명명했다. 다시 구하(泃河)의 어귀부터 노하까지 운하를 파서 천주거(泉州渠)라고 했는 바다와 통했다.

12년 서기 207년 봄 2월
조조가 순우에서 업성(鄴城)으로 돌아와 명을 내렸다.
「나는 의병을 일으켜 포악한 반란군을 정벌하였고, 지금 19년이 지났는데, 정벌할 때마다 반드시 승리한 것이 어찌 나 개인만의 공로이겠는가? 이는 곧 모두 현명한 사대부들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하는 아직 완전하게 평정되지 않았음으로 나는 현명한 사대부들과 함께 그들을 평정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 공로의 대가를 한 사람만 누린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시금히 공로를 결정하여 봉작을 행하라!」
조조의 명으로 봉작을 대대적으로 행했으며, 공신 20여 명을 모두 열후로 봉했다. 그밖의 사람들도 각기 공적 순서에 따라 봉작을 받았다. 또 전사자의 자식들에게도 각기 경중의 차등을 주어 턱별한 대우를 했다.
북방으로 출정하여 오환을 정벌하려고 하지,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반대하면서 말했다.
「원상은 도망친 포로에 불과합니다. 오랑캐 족속은 탐욕스럽고 친애하는 마음도 갖고 있지 않은데, 어찌 원상에게 이용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적지로 기푹이 침입하여 정벌전을 감행한다면, 유비는 반드시 유표를 설득해서 허도를 습격할 겁니다. 만에 하나 변란이 생간다면 후회해도 소용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곽가 한 사람만이 의심이 많은 유표는 반드시 유비를 임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조조에게 원정을 권했다.

여름 5월
조조가 무종현(無終縣)에 당도했다.

가을 7월
큰 홍수로 해안가의 길은 불통되었지만, 길 안내를 자청한 전주(田疇)의 인도로 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 군대를 이끌로 노룡(盧龍)의 북쪽 경계를 나왔지만 변방 외곽은 길이 끊겨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500여 리에 걸쳐 산을 파고 계곡을 메꾸어 백단(白檀)을 지나 평강(平岡)을 거쳐 선비족의 영토를 건너 동쪽의 유성(柳城) 경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적들은 조조의 군대가 유성으로부터 20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었다. 원상과 원희는 답돈, 요서의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의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에게 수만 명의 기병대를 인솔하여 조조의 군대를 맞아 싸우도록 했다.

8월
조조의 군대가 백랑산(白狼山)을 넘고 있을 때 갑자기 적과 마주쳤는데 적군의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조조의 치중은 후방에 있어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매우 적었으며, 좌우에서 따르던 자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조조는 높은 곳에 올라가 미처 정비되어 있지 않은 적진을 보고 곧 군사들을 지휘하여 출격시키고 장료를 선봉에 세웠다. 용맹한 장료의 활약으로 적군은 일시에 붕궤되어 답돈과 명왕(名王) 이하의 간부들을 죽였다. 항복한 오환족과 한족은 모두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요동의 선우 속복환(速僕丸) 및 요서, 북평의 오환족 우두머리들은 동족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도망갔지만, 여전히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본래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은 중원과 멀리 있음을 믿고 조조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오환을 무찌른 승세를 타고 그대로 요동으로 진군하면 원상 형제를 잡을 수 있다고 조조에게 진언한 사람이 있었다. 조조가 말했다.
「나는 지금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목을 베어 보내오도록 하겠소, 다시 번거롭게 군사를 움직일 필요가 없소.」

9월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유성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공손강이 원상 형제와 속복환을 죽이고 그들의 수급을 보내왔다. 의아하게 생각한 장수들이 조조에게 물었다.
「공께서 돌아왔는데, 공손강이 무엇 때문에 원상과 원희의 목을 베어 보냈습니까?」
조조가 대답했다.
「공손강은 평소부터 원상 등을 두려워했다. 내가 엄한 태도를 보이면 힘을 합치고 잠시 공격을 느슨하게 하면 서로 싸웠다. 이런 일은 당연히 일어는 법이다.」

11월
역수(易水)에 으르렀다. 대군의 오환족은 선우 대행 보부로(普富盧)와 상군의 오환족 선우댕행 나루는 휘하의 명왕(名王)들을 이끌고 와서 축하했다.

[3]백랑지전(白狼之戰)

오환은 동호의 일족으로 진말 흉노의 공격을 받고 지금의 대흥안령 남록의 오환산(烏桓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기 때문에 오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문제 이후 오환은 한나라에 귀부하여 그 중 일부는 유주(幽州), 상곡(上谷),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 북방 5군의 새외(塞外) 지역에 이주해서 살았다. 그 중에서특히 유주, 상곡, 우북평 지역에 몰려 살았음으로 그들을 삼군오환(三郡烏桓)이라고 불렀다. 한말에 이르러 천하가 혼란해져서 중원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 틈을 탄 오환은 대막(大漠) 이남의 성시를 노략질하여 중국의 변경지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오환족들은 각기 수령이 있고 한헌제(漢獻帝 : 190-193)) 초평(初平) 연간에 요서의 오환왕 구력거(丘力居)가 죽자 답돈(蹋頓)이 그 뒤를 이어 삼군의 오환족을 통솔했다. 답돈은 날쌔고 용감했을 뿐만 아니라 무예와 지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오환족들의 부로들은 진한 때 흉노의 선우 모돈과 닮았다고 했다. 그는 험한 지세와 먼 거리를 믿고 한나라에 도망쳐온 자들을 모두 받아들여 북방의 이민족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자칭했다. 북방의 4개 주가 원소의 관할 하에 있을 때 답돈은 삼군오환족을 이끌고 원소에게 투항하여 그 밑으로 들어갔다. 답돈이 인솔하고 온 명왕(名王)들과 정예기병들도 모두 환대를 받아 원소의 군대에 편입되었다. 관도대전으로 조조에게 패한 원상과 원희가 도망쳐오자 답돈은 원씨 형제들을 도와 그들의 옛날 영토를 회복한다고 하면서 유주성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수차에 걸쳐 쳐들어와 중국의 북변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틈을 타서 10여 만호의 오환족들은 유주와 기주에 옮겨 살기 시작했다. 원상 형제들은 그들을 군사로 편입시켜 조조에게 반격을 가해 옛날 자기들의 영토를 수복하려고 기도했다.

조조는 마침내 오환을 정벌하여 원씨 잔당들을 철저하게 섬멸함으로 해서 북방을 안정시키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에 정벌전을 수행하기 위해 사전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환은 업성에서 2천 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군량을 수송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건안 11년 서기 206년, 조조는 두 개의 운하 공사를 시작했다. 하나는 호타하(滹沱河)와 고수(泒水)를 연결한 운하로 이름을 평로거(平虜渠)라고 했다. 평로거로 인해 남쪽의 하북성 청현(靑縣)에서 북쪽의 천진까지 수로로 통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하여 구하(泃河)와 노하(潞河)를 연결한 운하로 천주거(泉州渠)라고 했는데 천진 남쪽의 해하(海河)에서 최북단의 보저(寶坻)까지 통했다. 두 운하가 완성됨으로 해서 원정군이 군량을 업성에서 우북평군의 무종(務從)까지 곧바로 수로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조조의 북정계획에 많은 막료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여러 장군들은 오환은 욕심이 많고 의리가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원상을 위해 온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우리 군대가 깊숙이 적의 영토로 들어간다면 우리의 거점 허도(許都)기 비게 되어 유표의 습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곽가(郭嘉) 만이 조조의 계획을 찬성을 표하며 말했다.
「조공께서 비록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호족(胡族)들은 그들이 먼 곳에 있다는 것만 믿고 반드시 방비를 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방비하지 않고 있는 틈을 타서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면 격파해서 멸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원소는 항상 백성들과 이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으며, 원상 형제도 아직 생종해 있습니다. 지금 원씨가 다스리는 네 주의 백성들은 공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잠시 귀순한 것이며 조공께서 이직 은덕을 페후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원상을 남겨 놓고 남쪽으로 정벌하러 가시면 원상은 오환족의 도움으로 다시 주인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던 옛날의 신하들을 다시 불러들일 겁니다. 그 사이에 호족들이 서로 충돌하여 중원에 분란이 일어나면 그 틈을 타서 북방의 백성들과 이족들이 호응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오환의 선우 답돈은 또다시 남쪽의 중원을 넘보려는 야심을 품고 제업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때는 아마도 기주와 청주는 우리 손을 떠날 겁니다. 유표라는 위인은 단지 혀만 놀리는 유세객에 불과한 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모가 유비를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제어할 수 없게 되고 하찮은 직책을 맡기면 쓸모가 없게 될 뿐입니다. 조공께서는 비록 나라를 비워도고 원정을 떠나시더라도 결코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곽가의 헌책에 용기를 얻은 조조가 마침내 북정을 결심하고 2천 리 밖의 오환족에 대한 원정을 떠났다.

건안 12년 서기 207년 3월 조조가 업성을 출발하여 오환 정벌전에 나섰다. 원정군은 역현(易縣), 무종(無終)을 경유하여 오환족들의 본거지인 요서의 유성(柳城)을 향해 진군했다. 유성은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朝陽市) 남쪽의 15키로 되는 곳이다.군사들의 행렬이 역현에 이르렀을 때 수행한 곽가가 다시 계책을 냈다.
「용병에는 신속함을 으뜸으로 삼습니다. 지금 천리나 행군하여 적군을 습격하기에는 너무 많은 치중으로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적군이 우리의 원정 소식을 듣게 되면 반드시 굳게 지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할 겁니다. 그래서 치중을 남겨두고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밤낮으로 행군시키면 그들은 생각하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시기에 습격을 당하게 될 겁니다.」
5월에 무종(無終)에 당도했으나 원래 계획한 행군로는 무종에서 해안가를 따라 북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7월이 되자 집중 호우가 쏟아져 해안가의 길은 모두 큰 물에 잠겨버리고 도로는 몇 길이나 빠지는 진창으로 변했다. 그리고 소로를 이용할 경우 험준한 지역에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는 오환족이 걱정되어 조조는 진퇴양난에 빠져 큰 난관에 봉착했다. 그래서 향도를 자청하고 나선 전주(田疇)에게 의견을 구했다. 전주는 무종의 호족 출신으로 군웅들이 난립하여 서로 싸울 때 족인들을 이끌고 서무산(徐無山) 속으로 들어가 난리를 피했다. 서무산은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옥전현(玉田縣) 경내의 산이다. 조조가 오환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할 때 예를 갖추어 초빙하여 향도로 삼았다. 전주는 오환족을 원수로 여겼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조조의 초빙에 응했다. 전주가 말했다.
「이 길은 매년 가을과 여름에는 항상 물이 가득합니다. 얕다고 해도 수레와 말이 다닐 수 없고, 깊으면 배도 운항할 수 없을 정도라서 오랜 시간 통행이 끊어지곤 합니다. 노룡채(盧龍寨 : 지금의 하북성 희봉구(喜峰口) 근처의 반가구(潘家口))로부터 북평군의 옛날 치소 평강(平岡 : 지금의 하북성 평천(平泉))으로 통하는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취하면 유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 25-56) 연간 이후로 이 길이 무너지거나 파괴되어 길이 끊기기를 근 2백 년 가까이 되었습니다만 좁고 작은 길이 있어 통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오환은 승상의 대군이 무종에서 나와 앞으로 진군하지 못하면 회군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경계를 풀고 방비를 소흘히 하고 있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아무도 몰래 뒤로 돌아 노룡채로 들어가 백단현(白檀縣 : 지금의 하북성 난평(灤平)의 흥주하(興州河))를 남안)의 험요를 넘어 새북(塞北)의 빈 땅을 통과하면 그때는 순탄한 길이 이어짐으로 적군이 미처 방비하기 전에 기습을 감행할 수 있어 답돈의 수급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조조가 전주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밀리에 행군로를 바꾸어 유성의 오환족을 기습하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무종에서 회군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그 뜻을 목패에 새겨 도로변이나 강가에 세웠다.
『계절이 우기라 도로가 불통되어 앞으로 행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을과 겨울이 되기를 기다려 진군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유성의 오환군은 조조의 군대가 처한 간고한 형편을 그들이 보낸 정찰병의 보고를 받고 더욱이 조조의 군대는 매우 먼 데에 있었음으로 경계심을 풀었다. 조조눈 전주의 안내를 받아 정예병만으로 선발한 본부병을 이끌고 서무산을 넘어 노룡채로 들어갔다. 다시 노룡채를 나와 새외로 들어갔으나 그곳부터는 길이 유실되어 없어진 상태였다. 조조의 군대는 산을 깎아 계곡을 매우면서 500리에 달하는 도로를 새로 개설하면서 진군했다. 천신만 끝에 평강을 통과한 조조의 군대는 은밀한 행군으로 유성의 오환족을 기습할 수 있는 작전상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조조의 대군이 이미 유성에서 200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답돈을 알게 되었다. 원상과 원희 형제, 답돈, 요서의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의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이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조조군의 요격하기 위해 출동했다.
8월 조조군이 백랑산(白狼山)을 넘기 위해 행군할 때 오환군이 눈앞에 나타났다. 백랑산은 지금의 요녕성 객라심좌익(客喇心左翼) 몽고족 자치현 동쪽에 있는 해발 880미터의 대양산(大陽山)으로 백록산, 대양산(大羊山) 등의 별칭이 있다. 오환군은 병력이 많았고, 조조군은 경무장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먼거리를 행군했을 뿐만 아니라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력이 적어 숫적으로 열세였다. 백랑산의 높은 곳에 올라가 오환군의 진영을 살펴본 조조는 그들의 진영이 정비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조조는 장요(張遼)를 선봉으로 삼아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오환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호랑이 같은 귀신같은 장요의 분전에 힘입어 오환군의 본진은 일거에 함몰되고 말았다. 사로잡힌 답돈과 오환의 명왕들은 모두 진영에서 참수되고 전사한 오환군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다. 항복한 오환족과 한족들은 20여 만 명을 넘었다. 요동선우 석복환, 요서와 우북평의 오환족 추장들은 부족들을 버리고 원상 형제와 함께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도망쳤다. 조조군은 오환군의 뒤를 추격하여 오환의 근거지인 유성을 파괴하여 평지로 만들었다. 오환과의 싸움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북진하여 공손강(公孫康)과 일전을 치르고 원상 형제를 사로잡아야 한다고 헌책했다. 조조가 대답했다.
「조만간에 공손강이 자기 손으로 원상 형제의 수급을 보낼 것이니 구태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할 필요가 없다.」
오환교위 염유에게 소속된 병주와 유주의 만여부락에 달하는 오환족을 모두 중국의 내지에 이주시키고 그들의 후(侯), 왕(王), 대인(大人) 및 부락민들에 이르기 까지 관할하게 하여 중원에서 벌어지는 군웅들과의 싸움에 종군하게 했다. 이로써 오환의 기병은 중국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9월에 유성에서 나와 회군을 시작한 조조는 도중에 공손강이 보낸 원상, 원희, 속복한 등의 수급을 받았다. 여러 장군들이 조조에게 회군하면 공손강이 그들의 수급을 보낼 것이라고 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이냐고 물었다. 조조가 대답했다.
「공손강은 원래 원상 형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공손강을 급하게 몰아붙이면 그들은 일심단결하여 대항하겠지만, 내가 잠시 공세를 멈추면 그들은 서로 싸우게 되어있다. 공손강이 원상 등의 수급을 보낸 것은 자연히 그리 되었을 뿐이다.」
그 당시 날씨는 매우 추웠고 게다가 비가 내리지 않아 200리를 행군해도 물을 구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군량미마저 떨어져 수천 필의 말을 잡아 양식으로 보충했으며 식수는 30장 깊이를 파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조조의 대군이 천신만고 끝에 요서주랑(遼西走廊)의 험난한 길을 벗어나자 조조는 북정을 행할 때 출병의 불가함을 간했던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제출하라고 해당 관리에게 명했다. 북정의 불가함을 간했던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몰라 매우 두려워했다. 명단을 받아본 조조는 그들의 공적에 따라 후한 상을 내리면서 말했다.
「나 역시 출병하기 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히 성공하기를 바랬다. 비록 승리는 했으나 이는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행으로 얻은 것을 상규(常規)로 삼을 없다. 여러 분들의 간언은 모든 위험을 고려하여 안전을 기하기 위한 계책이었음으로 상을 내리는 것이다. 이후 모두 간언을 올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11월 역수를 건넜다. 조조의 대군이 역수에 이르렀을 때 대군(代郡)의 오환족 선우 대행 보부로(普富盧)와 상군(上郡)의 오환족 선우 대행 나루(那樓)가 각기 자기 부락의 명왕들을 이끌고 찾아와 승전을 축하했다.
다음 해인 건안 13년 정월에 이윽고 업성으로 돌아온 조조가 논공행상을 행하여 전주(田疇)를 500호의 정후(亭侯)로 봉하려고 했다. 전주가 사양하면서 말했다.
「소신은 원래 유공[劉虞]의 복수를 위해 조공의 막무에 숨어들었습니다. 저의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익을 취하는 것은 제가 본래 품고 있었던 의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전주가 한사코 사양하자 조조는 그의 진심을 알고 강요하지 않았다.

조조의 오환족 정벌은 건안 12년(207) 12월에 시작해서 다음 해인 정월에 회군했음으로 모두 10개월이 걸린 원정이었다. 오환족정벌전은 조조가 하북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전쟁으로써 원씨의 잔당들을 소탕하여 재기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분쇄했다. 동시에 삼군오환의 기병부대를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켜 용맹하고 정예스러운 기병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북방의 통일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오환족들이 조조를 따라 유주를 떠난 이후로는 중국의 북변에 소요사태가 사라지고 안녕을 찾게 된 것이다. 이로써 북쪽으로부터의 근심을 소제한 조조는 자기와 경쟁적인 군웅들에 대한 보다 강력한 전략과 기동성을 갖추게 되었다.

조조의 오환정벌전은 2천여 리 밖의 적군에 대해 험악한 자연조건 하에서 감행된 전격전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조조의 중요한 전략적인 방침은 다음 몇 가지다.
1. 형세판단이 정확했다. 배후에 유표와 유비를 두고 과감히 원정을 감행하여 북방 깊숙이 들어가 작전을 펼쳤다.
2. 행군을 반 이상 행하고도 과감히 치중을 버리고 경무장으로 바꾼 후에 진로를 변경하여 비밀리에 도로를 건설하면서 기만책으로 적군을 미혹시켜 출기불의(出其不意)의 작전을 구사했다.
3. 막강한 전투력의 오환기병과 조우했을 때 적군의 진영이 미처 정비되지 않은 것을 간파하고 맹장들을 선두에 세워 급공을 가해 승리를 취했다.


《오환족과 조조의 백랑지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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