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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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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여행

2, 성도(成都)와 양번(襄樊)



成都="聯合)" 申三浩기자= 劉備와 諸葛亮(181-234). 한 사람은 인재를 포용하는 넓은 덕을 지닌 군주의 모델로, 또 한 명은 곧은 충절과 뛰어난 지략으로 군주를 보필해야 하는 신하의 이상형으로 추앙되고 있다.


삼국지 곳곳에서 암시하듯이 군주가 휘하에 능력과 충절을 겸비한 인재를 모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을 섬겨야 하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덕이 높고 웅지를 품은 군주를 선택해서 자신의 뜻을 펼치느냐도 그에 못지않게 의미가 크다.


더욱이 여기저기서 천자를 자처하는 영웅호걸들이 난립하는 난세에는 군주의 命에 따르기 보다는 오히려 참모형 인재들이 자신이 보필할 군주를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인재가 누구를 충성의 대상을 선택하느냐는 천하의 판도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의미에서 유비와 제갈량은 서로에게 둘도없는 명파트너요 협조자로 서로가 지닌 능력을 배가시키며 중국천하를 삼분하는 위업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유비와 제갈양의 만남을 극적으로 전해주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장소 隆中은 호북성 양번(襄樊) 시내에서 약 10㎞ 떨어진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다. 양번은 양양과 번성이 합쳐진 곳으로 양자강 기슭에 있는 武漢시에서 3백28㎞ 떨어진 곳에 위치 한다.


제갈량이 살던 隆中은 예로부터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고장으로 문사, 명망가들이 즐겨 찾아온 곳으로 전해진다. 원래 山東省 호족 출신인 제갈량은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 劉表 밑에서 벼슬을 지내던 숙부 제갈현의 손에 자랐다. 숙부는 이들 형제에게 융중 언덕배기에 농사짓고 집지을 땅을 마련해주어 제갈량은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과 명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러다가 마침 조조에게 쫓겨 형주로 와 劉表의 객장으로 은인자중하던 유비가 삼고초려의 예로서 초빙함에 따라 臥龍이 뜻을 펴기 위해 세상에 나서니 그 때가 바로 207년, 그의 나이 26세의 일이다.


융중산 언덕받이에 있는 제갈량 유적지는 들어서는 입구 문 양쪽에는 삼고초려모습과 제갈량이 밭일하는 모습을 부조로 조각한 대리석판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곧바로 `古融中'이란 글귀가 새겨진 대문이 나타났는데 그 옆 공터에는 낙타를 매어두고 관광객에게 사진촬영을 권유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대문은 청말인 1895년 세워졌으며 위쪽에 중국 하.은.주시대이후 최고의 인물이란 의미의 소동파의 `三代下一人'이란 문구가 붉은 색으로 새겨져 있다.


입구에서 곧게 뻗어있는 도로로 조금 가다보면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속에 제갈량이 공부했다는 정자가 나타나고 바로 옆에 그가 갈았다는 밭이 펼쳐진다.


밭은 약 5백평정도로 그리 넓지않아 농사일로 공부와 교제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작약 등 꽃과 들깨를 포함한 채소가 심어져 있는 밭 가운데는 제갈량이 몸을 굽혀 농사일을 했다는 뜻의 `躬耕龍畝'(궁경용무)를 새긴 비석이 정자속에 들어있다.


밭 오른편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그 위에 유비가 처음 찾아갔을 때 제갈량으로 오인한 그의 장인을 만났다는 다리가 걸쳐 있고 경사진 길을 따라 언덕위로 올라가면 참나무숲 밭과 다리 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3층짜리 정자가 서있다. 농사짓다 피곤하면 무릎을 포개고 앉아 책을 읽었다는 의미의 구슬처(`抱膝處')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나무숲으로 난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제갈량을 모신 武候祠와 劉備廟가 위아래로 나란히 서 있다.


무후사에서 대나무와 참나무숲이 차례로 어우러진 샛길을 따라 1분쯤 걸어가면 지붕을 갈대로 단장한 `諸葛草廬'가 방문객을 반긴다. 대나무를 엮어 담은 친 이 초려의 대문을 들어서면 밑이 터진 입 口자 형의 초가건물군 2개가 연이어 서 있다. 이 곳에는 제갈량의 침실과 서재를 비롯해 당시 살던 모습을 전해주는 갖가지 죽편, 탁자, 토기, 거문고 등 악기, 농기구 등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이 초옥과 전시품들은 4∼5년전 중국중앙방송에서 제갈량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제작하면서 이곳저곳에서 끌어모으거나 만든 것으로 그의 손때는 전혀 묻지 않았다고 안내원 李 淸(24)씨가 말한다.


다만 초옥이 세워진 자리는 드라마를 제작할 당시 한 무더기의 폐허가 남아있어 제갈량이 살던 집터로 추정된다고 부연했다.


이곳 융중에는 군데군데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안내원 李씨는 중국 관광객들이 많으며 일본인도 상당수라고 일러주었다.


양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제갈량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있다. 시내 군데군데에 `三顧주점'이라는 이름을 단 식당들이 눈에 띄였으며 이곳에서 나는 수박도 제갈량이 품종을 개량, 후대에 물려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안내원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제갈량이 이곳에서 농사를 지을 당시 그가 소출해 내는 수박은 비할 데 없이 크고 맛이 달았다. 귀찮은 씨도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적었다.


사람들이 수박농사 비법을 알려고 몰려오자 제갈량은 자기 밭에서 난 수박을 집앞에 쌓아두고 마음대로 먹되 씨는 버리지 말고 모아 달라고 부탁, 그들에게 씨를 나눠주었다. 그 이후로 양번 전지역에서 큰 수박을 소출하게 됐다.


시내입구 시장에 산더미 처럼 쌓여 있는 수박 하나를 쪼개먹었더니 과연 타지역 것에 비해 맛이 달았고 씨도 별로 없었다. 어린이 몸통처럼 크고 길죽한 수박 하나가 중국돈 2.5원(한국돈 2백70원정도)이었다. 이런 수박 2개로 운전사를 포함한 일행 18명이 포식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세나라가 형세를 겨뤄 정립하는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고 吳의 손나라와 연합,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맞아 적벽싸움에서 대승을 거둔다. 유비가 죽은 뒤에는 어린왕 劉禪을 보필하면서 운남지역을 정벌하는 등 국세가 약한 촉한의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기울어가는 국세를 막지 못하고 2백34년 魏의 장군 司馬懿와의 五丈原 전투중 나이 쉰셋에 병사한다.


촉한 후주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忠武候'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의 죽음은 촉한의 몰락을 부채질했으며 제갈량은 유언에 따라 定軍山에 묻힌다.


그의 아들 瞻과 손자 尙도 263년 위군의 침입을 막기위해 綿竹전투를 벌이다 동시에 전사하니 3대가 충성한 촉한은 이들의 죽음과 함께 멸망한 셈이다.


중국의 서쪽 四川省의 省都인 成都는 유비가 세운 蜀漢의 수도로 시내의 인구만도 5백50만에 이르는 대도시다. 이곳에는 유비가 묻혀있는 昭烈帝陵, 제갈량을 모신 武候祠, 촉한시대의 유품들을 전시한 문물기념관 등이 있다. 또 안록산의 난 때 이곳까지 피난온 두보가 살았던 杜甫草堂과 1백여종의 진귀한 대나무들을 모아둔 대나무 공원도 볼거리다.


소열제릉과 무후사는 나란히 붙어있다. 약 3만7천㎡의 부지에 조성된 이 두 유적지는 규모로 보아 무후사가 훨씬 넓고 소열제릉은 귀퉁이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형국이다. 청 康熙11년(1672) 무후사를 중건하면서 옆에 있는 소열제릉을 한데 합쳤다.


살아서는 군신의 관계로 유비가 제갈량의 위에 있었으나 망한 왕조의 왕이어서인지 죽어서는 오히려 신하보다 대접을 덜 받고 있다는 인상이다.


무후사는 제갈량전, 유비전, 過廳, 蜀漢君臣塑像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는 문장, 서법, 조각기법이 뛰어나 三絶碑로 불리는 `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가 서있으며 곳곳에 제갈량의 위업과 충절을 칭송하는 편액과 글귀들이 걸려있다.


제갈량전에는 2.5m정도의 거대한 제갈량상이 봉안돼 있으며 좌우에 아들과 손자상이 놓여있다. 제갈량전 위에는 1984년 11월24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던 李先念이 달필로 쓴 `무후사'라는 편액이 걸려있어 현대 중국에서도 제갈량의 위엄을 빌려 자신의 권위를 지킬만큼 숭상받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유비전에는 왕관을 쓴 유비를 비롯, 관우. 장비의 소상이 안치돼 있었다. 유비는 둥근 얼굴에 덕있는 모습이었으며 장비는 삼국지에 묘사된대로 호장의 상을 띠고 있었으나 관우의 소상은 미염공이라 불릴 만큼 멋이 있었다던 수염이 별로 강조되지 않아 평범한 느낌이었다.


촉한군신 소상전에는 촉한의 주요인물 47명의 소상이 안치돼있으며 이밖에 무후사 곳곳에는 당시 사용하던 무기류, 종, 북, 솥 등 유물 2백여점이 전시돼 있다.


무후사 한쪽에 있는 `성도무후사 문물전시관'에는 당시 삼국시대를 이끌었던 유비, 조조, 제갈량 등 주요인물의 초상을 비롯, 정치형세, 황건적의 난 형세도, 적벽전투 상황들의 설명서와 촉한 시대의 와당, 비석 등이 남아있다.


공산주의 사관에 맞춰 조조, 제갈량 등의 인물을 설명하면서 지주계급 출신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고 있으며 황전적의 난을 `黃巾起義'로 표현하고 있음이 이채로왔다.


소열제릉은 유비의 묘임을 나타내는 `한소열황제지릉'이라고 쓰인 대문 뒤쪽에 있었다.


무덤은 벽돌담 뒤에 있는데 규모는 작은 언덕 정도로 황제의 묘치고는 매우 작았다. 언덕과 같은 무덤 위에는 각종 나무들과 잡초가 무성했다.


유비는 221년 촉한을 세우고 제위에 오르나 다음해 형주 탈환과 동생 관우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다 이릉싸움에서 대패하고 백제성에서 예순셋에 병사한다.


유비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덕치주의자이고 너그럽고 포용력이 크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너무 인자하고 작은 정에 이끌려 큰일을 그르치는 일이 있었음도 무시할 수 없다.


작가 李文烈씨는 "유비가 중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것은 漢高祖와 같이 덕을 위주로 한 道家的인 無爲의 治 위주로 각종 압제와 탄압에 시달렸던 백성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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